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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날 내버려 둬 (12/50)
  • 12. 날 내버려 둬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재현은 메시지 알림음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자?」

    혜운이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낼지 잠시 망설여졌다. 정말 형을 좋아하는 거냐고 그냥 시원하게 물어볼지, 아니면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 형을 좋아하지 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자신의 방 앞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재현아, 자?”

    예상대로 진현이었다. 재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진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파서 야자도 뺐다며? 어디가 아픈데?”

    진현의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재현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나 앉았다.

    “자식, 예민하긴.”

    진현은 머쓱해하며 책상에 걸터앉아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은 그런 진현을 보는 게 불편했다. 아까 전에 카페에서 혜운과 함께 있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혜운이 진현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던 것도, 그런 혜운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진현의 모습도 전부 다 재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늦었네?”

    “어. 누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

    “누구?”

    “비밀이야.”

    “요즘 다들 나한테 비밀이 많네….”

    재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뭐?”

    “아냐. 나가. 나 잘 거야.”

    “너한테 줄 거 있는데.”

    “거기 놓고 가.”

    “뭔지 안 궁금해?”

    “나 피곤해.”

    “쌀쌀맞긴…. 알았다.”

    진현은 기어이 자신의 머리맡에 뭔가를 두고 방을 나갔다. 재현은 다시 일어나 그가 두고 간 작은 선물 상자를 확인하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까 혜운에게 선물을 건네던 모습과,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혜운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왜 하필 하진현이야….”

    하고 많은 남자 중에 왜 하필….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게, 왜 하필….

    재현은 선물 상자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다시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혜운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등굣길에 민영에게 들러 어제 만들어 준 호박 식혜를 감사히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밖에 서서 재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재현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신을 보고도 그다지 반가워하질 않았다. 항상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던 건 아니지만, 저렇게까지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고백을 해 오던 여자애들을 보던 그 눈빛과 닮아 있어서 혜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몸은 좀 어때? 아직도 아파?”

    재현은 별 대답 없이 앞장섰고, 혜운은 재현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한마디 하려던 혜운은 아무래도 오늘은 재현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아침부터 혼이 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몸이 안 좋은 걸까? 묻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제 전화도 안 받고. 내가 남긴 메시지 못 봤어?”

    “봤어.”

    “아, 봤구나….”

    생각해 보니 익숙함에 길들여져 너무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 같다. 재현이 자신에게 답장을 안 보낼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오늘은 내가 선물한 운동화 안 신었네?”

    “발 아파서.”

    “거봐. 내가 사이즈 바꿔다 준다고 했잖아. 근데 몇 번 신어서 이제는 교환 안 해 줄 텐데….”

    “그래서 안 신으려고.”

    본래 말투가 툭툭 뱉는 타입이긴 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대체 오늘 왜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혜운은 답답한 마음에 재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재현.”

    “비켜.”

    “너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있으면 말로 해. 아침부터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혜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현이 혜운을 옆으로 밀어 두고 다시 걸어갔다. 이해하고 참아 보려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시 달려가 앞을 막아섰다.

    “너 지금 나한테 뭐 한 거야?”

    “별거 아닌 일로 아침부터 떽떽거리면서 짜증 나게 한 건 너야. 귀찮으니까 비켜.”

    순간 울컥했지만 혜운은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이것보다 더한 말을 주고받으며 다툰 적도 많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운하고 마음이 아픈 건지 혜운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 아침부터 별거 아닌 일로 떽떽거리고 귀찮게 해서.”

    돌아선 혜운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가슴속에서 울렁거리던 갖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눈앞을 어지럽혔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꿋꿋이 걸었다.

    한편, 재현은 진현에게 선물받은 시계를 차고 있는 혜운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마음과는 다른 못된 말만 골라서 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못난 짓에 곧바로 후회가 되었다.

    재현은 달리듯 걸어가는 혜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괴로워했다. 혜운에게 쏟아 낸 밉고 못된 말이 도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것만 같았다.

    “미친 새끼, 성질머리 하고는….”

    자책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 *

    수학 이동 수업이 끝나고, 혜운은 곁눈질로 재현의 표정을 살폈다. 온몸으로 냉기를 풀풀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교실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 재현아, 이거….”

    막 교실을 나가려는데, 이동 수업 C반인 보미가 허겁지겁 달려와 수줍게 편지를 건넸다. 서늘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던 재현이 보미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잘 읽을게.”

    재현이 교실을 나간 뒤, 보미 주변에 모여든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축하를 건넸다. 혜운은 수학 교과서를 사물함에 집어넣고 다음 수업인 국어 교과서를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요 며칠 재현은 여자애들이 건네는 편지나 쪽지를 고맙다는 말까지 하며 받아 갔다. 이러려고 자신에게 더 이상 배달하지 말라고 한 건가 싶었다.

    요즘 부쩍 재현과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재현과 거리감을 느껴 본 게 난생처음이라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혼란스러웠는데, 며칠 새 제법 익숙해진 지금은 그저 마음이 시리고 아플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게 되니 그나마 간당간당하던 용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앞으로 더 멀어지게 된다면 지금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프고 힘들어질 거란 생각에 수도 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현이 좋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마음 아픈 거라면 더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동안은 서운해도 자존심으로 버티며 멀어지도록 두었지만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참고 버티는 데 한계가 왔다. 그동안은 다퉈 봤자 고작 반나절 말 안 하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며칠씩 냉랭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차근차근 묻고,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그깟 자존심이 뭐 대수라고.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을 파야 했다.

    혜운은 교실을 나와 재현의 반으로 찾아가던 중, 1학년 후배로 보이는 여학생과 복도에서 대화 중인 재현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학생은 편지로 보이는 것을 재현에게 건넸고, 재현은 얼굴에 미소까지 얹고선 편지를 받아 주었다.

    재현에게 편지를 주고 돌아선 아이의 표정은 감격 그 자체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혜운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재현의 앞에 섰다.

    “나랑 얘기 좀 해.”

    “해.”

    “지금 말고, 이따 야자 끝나고 기다려. 가면서 얘기하자.”

    “애들이랑 PC방 가기로 했어.”

    “끝나고 전화해. 내가 갈게.”

    “언제 끝날지 몰라.”

    “그럼… 너랑 언제 얘기할 수 있는데?”

    “지금 해.”

    혜운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재현을 노려보았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냐고, 만약 있다면 사과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왔지만 재현의 쌀쌀맞은 태도에 사과고 뭐고 너무 얄미워서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고만 싶었다.

    “나 너한테 잘못한 거 있어?”

    “없어.”

    “근데 요즘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화난 게 있으면 말을 해. 유치하게 며칠씩 나 피해 다니지 말고.”

    “나 원래 유치하잖아. …형이랑 다르게.”

    “여기서 형 얘기가 왜 나와?”

    “너는 왜 발끈하는데?”

    “우리 얘기에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튀니까 그러지.”

    “그냥 그렇다는 말을 한 것뿐이야. 예민하게 굴지 마. 너 그러다가 내가 형 흉이라도 보면 한 대 치겠다?”

    “하재현!”

    “그만하자.”

    재현은 혜운을 그 자리에 세워 둔 채 돌아섰고, 혜운은 이대로 재현을 보낼 수 없단 생각에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재현이 다시 돌아보며 혜운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재현이 자신을 바라볼 때 느꼈던 서늘함 대신, 오랫동안 보아 왔던 재현의 눈빛이었다.

    “내가 요즘 좀 그래. 그냥… 당분간 내버려 둬 줬으면 좋겠어.”

    바짝 날이 섰던 감정이 조금은 내려앉은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무슨 일인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혜운은 붙잡고 있던 재현의 팔을 놓아주었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지켜보던 아이들의 시선이 온몸에 따갑게 꽂혔다.

    ‘그래 내가 봐줬다, 하재현. 네가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네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 줄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다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너무 힘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 *

    일요일을 핑계로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민영의 호출을 받은 재현은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민영은 재현의 두 손에 큼지막한 반찬 통을 올려 주었다.

    “겉절이 한 건데 선생님 댁에 갖다 드리고 와.”

    “싫어.”

    “싫어? 왜 싫어? 뭐가 싫어?”

    재현이 심부름을 거부하자 민영이 버럭 했지만, 재현은 도로 반찬 통을 내려놓았다.

    “빨리 안 가?”

    “신혜운 보고 와서 가져가라고 해.”

    “이놈 자식이!”

    재현은 기어이 등짝 한 대를 얻어맞고 다시 3층 집으로 올라갔다. 등 뒤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빨리 가라고 민영이 소리쳤지만 지금 재현은 혜운의 집에 겉절이를 배달 갈 기분이 아니었다.

    재현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주 잠깐 심부름을 핑계로 혜운을 만나고 올까, 갈등했지만 도통 이 짜증이 가라앉지 않아서 포기했다.

    이 상태로 만났다가는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 혜운을 화나게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빌어먹을 성질머리였다.

    “하재현, 형 들어간다.”

    말릴 틈도 없이 진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재현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진현을 바라보았다.

    “너 혜운이랑 싸웠어? 요즘 둘이 어째 싸해 보이더라?”

    “신경 꺼.”

    “싸웠네. 귀여운 것들.”

    난 지금 너무 진지한데 귀여워 보였다니…. 또 한 번 짜증이 치밀었다.

    “왜 싸웠는데?”

    “안 싸웠어.”

    “그럼 너 혼자 일방적으로 삐진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형한테 말해 봐. 형이 도와줄게.”

    대체 그가 뭘 도울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까 너 요즘 나한테도 삐딱하다?”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나가.”

    재현이 다시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려 하자, 진현이 이불을 확 걷어 냈다.

    “사내자식이 혼자 꽁해가지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는 거 보기 흉하다. 나한테 화가 난거야, 아니면 혜운이한테 화가 난 거야, 그것도 아니면 사춘기가 다시 온 거야? 대체 뭔데?”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어. 안 되겠어. 너 요즘 인상 쓰면서 무게 잡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더는 못 보겠다.”

    결국 재현은 다시 일어나 앉았다.

    “너 혜운이 좋아하잖아. 네 기분에 휘둘려서 실수했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옆에 있을 때 잘해. 너 그러다 고백해 보기도 전에 차인다?”

    지금 진현이 자신에게 한 말은, 혜운에게 고백을 받은 사람이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 의아했고, 말뜻을 이해해 보려고 가만히 곱씹을수록 혼란스러웠다.

    ‘지금… 나를 약 올리는 건가? 아니면 설마 진짜 조언을 해 주는 건가?’

    진현의 속을 알 수 없는 재현은 미간을 한껏 구긴 채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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