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널 생각해 (11/50)
  • 11. 널 생각해

    재현은 나란히 걷고 있는 혜운과 진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달려가 알은체를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혜운의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카페였다. 혜운은 이곳 빙수가 맛있다며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했지만 단둘이 카페에 가는 게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해서 아직 함께 가지 못했던 곳이다. 혜운과 진현은 그곳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재현은 안까지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외부 조명 때문에 안쪽 상황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진현은 혜운에게 선물로 보이는 작은 선물 상자를 건넸다. 혜운은 그것을 확인하곤 진심으로 기뻐했다.

    재현은 숨을 죽인 채 눈을 깜박이는 것 마저 잊고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현이 혜운에게 선물한 건 손목시계였다. 진현은 자신이 건넨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 혜운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 분위기가 짐짓 진지해졌고, 표정 역시 방금 전과 달리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는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재현은 망설임 끝에 용기를 쥐어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는 주인을 지나,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대각선 방향 벽기둥에 기대선 재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해?’라며 자연스레 말을 걸기로 마음을 먹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좋아해요.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되게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혜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귀에 닿은 순간, 재현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혜운은 초조한 얼굴로 진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알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는 게 먼저야. 그러고 나서 나중에….”

    재현은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머릿속이 멍했다. 혜운이 진현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닐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상상력이 과한 거라고, 너무 그쪽으로만 생각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기를 한 거라고 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결국 재현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결말로 흘러가 버렸다.

    혜운이 그렇게까지 설레어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제야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달콤한 분위기와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에 다정함이 가득했던 것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진현의 거절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혜운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울지 않고 버티던 혜운이, 진현의 앞에서는 울먹이고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심장이 땅바닥까지 내려앉아 발에 채였다.

    재현은 그대로 돌아서서 걷다가 눈에 띈 쓰레기통에 혜운의 선물로 산 운동화를 쑤셔 넣어 버렸다.

    * * *

    혜운은 진현이 주문을 하고 자리로 오는 동안 카페 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여기 재현이랑 같이 와 보고 싶었는데, 쌤이랑 먼저 와 보네요.”

    재현에게 몇 번이나 여기 와 보자고 제안했지만 한 번을 같이 오지 않았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재현과는 늘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전부였다.

    “걔가 이런 분위기를 좀 간지러워하지.”

    진현의 말에 혜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그런 걸 못 견뎌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꼭 한 번 같이 오고 싶었다.

    주문한 음료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혜운은 따뜻한 레몬티를 한 모금 마신 후, 진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물어볼 말이 무엇이기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건지 궁금했다.

    “혜운아, 생일 축하해.”

    진현은 작은 선물 상자를 건넸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혜운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선물이에요?”

    진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혜운은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혜운은 시계와 진현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현이 거 사면서 네 거도 하나 샀어.”

    “와….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야자를 마치고 나오는데 진현이 찾아와 줄 것도 있고, 물어볼 것도 있다고 해서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자신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현의 생일과 이틀 간격이라 종종 재현과 같은 물건을 선물로 받곤 했는데, 오랜만에 받으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는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 자신의 손목에 직접 채워 주었다.

    “재현이랑 같은 모델인데, 괜찮겠지?”

    “그럼요! 상관없어요.”

    “여전히 애들이 너희 둘이 사귄다고 오해하니?”

    “이젠 그런 오해들이 무의미한 경지에 이르렀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애들은 안 믿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혜운과 재현은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있었다. 오해할 테면 해라, 이런 마인드로 바뀐 것이다.

    “아, 쌤 저한테 물어볼 거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 있지. 좀 주제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진짜 네 마음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괜찮아요. 뭔데 그러세요?”

    “혹시, 혜운이 너… 재현이 좋아해?”

    “당연하죠.”

    “내 말은, 그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 하하.”

    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 혜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하게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혜운은 잠시 고민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이야기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현에게 이미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를 퍼뜨릴 사람도 아니기에 진현에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좋아해요.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되게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막상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후련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렸다. 재현의 앞에서는 용기가 부족해서, 생각이 많아져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이 생각해도 안타까웠다.

    “알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는 게 먼저야. 그러고 나서 나중에….”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장은 재현이한테 이런 얘기 못 해요.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얘기하려고요. 재현이랑 같은 대학 가기로 해서 이제부터 재현이 공부 열심히 시켜서 성적 올려야 돼요.”

    요즘 혜운이 자주 하는 상상은 함께 대학 생활을 하는 모습이었다. 입으로는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늘 붙어 다니고, 모든 순간들을 함께 경험하며 같은 추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귀엽다. 요만하던 애들이 이렇게나 커서 좋아하고 그런다는 게…. 참 신기하네.”

    “근데 쌤은 제가 재현이 좋아하는 거 언제 아셨어요?”

    “나? 진즉에 알았지. 너 입만 열면 재현이 얘기뿐이잖아. 재현이는 뭐 좋아해요? 재현이 뭐 선물받고 싶대요? 재현이 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재현이, 재현이가, 재현이는…. 너 나한테 그랬어, 안 그랬어?”

    “그랬어요.”

    혜운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진현의 말을 듣고 보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죽으나 사나 붙어 다니더니. 하긴, 그 정이 무섭지. 오빠가 응원해 줄게! 우리 엄마랑 아빠도 혜운이 볼 때마다 며느리 삼고 싶다, 딸 삼고 싶다 노래를 부르시더니 잘하면 소원 이루시겠어.”

    “아이, 왜 그러세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먼 미래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무사히 재현에게 고백하는 것부터 해결할 일이었다. 고백을 하기로 다짐하고 나면 늘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거절을 당하는 건 두렵지 않은데, 혹시나 그 고백으로 인해 재현과 멀어지고 서먹해질까 봐 두려웠고 내 인생에서 하재현이 떠날까 봐 두려웠다.

    이제 혜운에게 재현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집에 돌아온 혜운은 부재중으로 찍힌 재현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 더 걸어 보았으나 통화 연결은 되지 않았고, 혜운은 침대에 누워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자?」

    메시지를 보낸 지 30분이 지나도록 답장은 오지 않았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아프다고 야자를 뺐다기에 꾀병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아팠던 건가 싶었다.

    “치. 하재현 무심한 거 하나는 알아줘야 돼….”

    그런 말 하는 거 닭살 돋고 간지러워서 잘하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은 게 못내 섭섭했다.

    “말해 주기 싫으면 메시지라도 남겨 주지.”

    아침부터 내내 나한테 뭐 할 말 없냐고 옆구리를 찔러 가며 부추겼지만 재현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야자 끝나고 가는 길에 한 번 더 부추겨 보려고 했는데 아프다고 야자를 빼 버려서 만나지도 못했다.

    “많이 아픈가….”

    건강 체질이라며 허세 부릴 때 알아봤다. 환절기가 되면 가끔씩 감기를 호되게 앓는데, 혹시나 그래서 아픈 건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등교할 때만 해도 멀쩡했기에 어디가 어떻게 갑자기 아프게 된 건지 걱정스러웠다.

    “혜운아! 케이크 먹자!”

    “네, 할머니!”

    혜운은 경선의 부름에 주방으로 나갔다. 식탁 위에는 경선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와 혜운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한가득이라 혜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밤에 너무 푸짐한 거 아니에요?”

    “생일이잖아.”

    경선이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자 혜운은 잽싸게 주방 조명을 껐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강아지.”

    “감사합니다, 할머니.”

    “소원 빌고 초 불어야지.”

    혜운은 눈을 꼭 감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후우.”

    초를 불고 다시 조명을 켜는 사이, 경선은 케이크 한 쪽을 잘라 접시에 놓아 주었다.

    “재현이 엄마가 혜운이 호박 식혜 좋아한다고, 그 바쁜 사람이 이 손 많이 가는 걸 해서 보냈어. 내일 학교 가기 전에 가게 들러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가.”

    “네, 그럴게요.”

    투명한 유리컵에 호박 식혜를 가득 따라 마시며 혜운은 연신 웃었다. 재현의 빈자리가 조금 아쉽지만, 모두의 축하를 받는 기분이 들어 진심으로 행복했다.

    “학교 마치고 재현이랑 있다가 온 거니?”

    “아뇨. 진현 오빠 만났어요. 이거 오빠가 준 선물!”

    혜운은 손을 내밀어 진현이 준 시계를 경선에게 보여 주었다.

    “아이구 예쁘다. 근데 선물로 받기에 너무 좋은 거 아니니?”

    “재현이 선물 사면서 제 것도 사 온 거래요.”

    “다정하기도 하지. 진현이는 제 아빠를 꼭 닮아서 참 상냥하고 따뜻해. 어렸을 때도 재현이랑 다르게 의젓하고 심성이 고왔지.”

    “재현이도 의젓하고 착해요.”

    “얼씨구? 네 친구라고 지금 편드니?”

    혜운은 케이크를 한 입 떠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진현 오빠만 칭찬하고, 재현이랑 정반대라면서 비교하는데 저는 알아요. 재현이가 얼마나 다정하고 속이 깊은지. 어떨 땐 오빠보다 더 어른스럽기도 해요.”

    하재현은 하재현이고 하진현은 하진현인데 재현은 늘 진현과 비교당해 왔다. 하지만 재현은 주눅 들거나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형을 더 닮고 싶고 존경한다고 말하곤 했다. 혜운은 재현의 그런 유연함이 좋았다.

    방금 전까지 재현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도 잊은 채, 혜운은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또다시 재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