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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선물 (10/50)
  • 10. 선물

    나흘간의 중간고사가 끝나고, 진현은 약속한 대로 재현과 혜운에게 저녁을 사 주겠다며 시내에 위치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먼저 도착한 재현과 혜운은 진현의 이름으로 예약해 둔 자리로 안내받았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쌤은 아직 안 오신 거지?”

    “이 형 원래 맨날 늦어.”

    재현은 평소와 다르게 한껏 꾸미고 나온 혜운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너 오늘 되게 신경 썼다?”

    “뭘 신경을 써. 평소랑 똑같은데.”

    “똑같긴. 입술도 빨갛고, 머리도 안 묶고, 옷은 또 왜 그래? 교복 아니면 치마도 안 입더니 어쩐 일로 치마야?”

    “네 생일이라 쬐끔 신경 썼다, 쬐끔. 됐냐?”

    자신의 생일이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애가 아니란 걸 잘 알기에 재현의 의구심은 점점 더 커졌다. 재현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얻고 턱을 괸 채 혜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자신을 도끼눈으로 쳐다보던 혜운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예쁘면 그냥 예쁘다고 말해, 인마.”

    마침 진현이 도착한 것이다. 뒤에서 등장한 진현은 자신의 옆자리가 아닌 혜운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았다.

    “일찍일찍이 다녀.”

    “이거 사 오느라 늦었다. 좀 봐줘.”

    그는 케이크를 꺼내 박스 위에 얹었고, 혜운은 작은 종이 봉투 안에서 초를 꺼내 꽂았다.

    “혜운아, 오늘 되게 예쁘다.”

    “아니에요.”

    진현의 말에 혜운은 볼을 발그레 붉히며 수줍게 웃었고, 재현은 그런 혜운의 반응이 무척 못마땅했다.

    설마… 진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한껏 꾸미고 나온 걸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요즘 부쩍 두 사람을 연결 지어서 생각하는데, 지나친 상상이다. 그런 찌질한 상상은 그만두자.

    “주문하고 초부터 불자.”

    진현은 손을 들어 서버를 불렀고, 자기가 여기서 먹어 본 음식 중 맛있었던 것 위주로 알아서 주문을 해 주었다. 그런 진현의 모습이 재현의 눈에는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기만 한 자신과는 달리 능숙한 그의 모습과 혜운을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 모두 말이다.

    “생일 축하한다, 동생아.”

    “생일 축하해.”

    진현과 혜운의 축하에 재현은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간지럽게 왜들 이래. 하지 마.”

    “뭘 하지 마?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를 건데? 맞지, 혜운아?”

    재현은 정말 그들이 노래를 부를까 봐 켜진 촛불을 냉큼 불어 꺼 버렸다. 그 찰나에도 재현은 소원을 빌었다. 다음 생일에는 꼭 혜운과 단둘이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난 이걸로 선물 퉁이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습니다, 형님.”

    재현은 케이크에 꽂힌 초를 뽑아 한쪽에 모아 두고 케이크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내 선물은 이따 집에 가서 줄게.”

    “선물?”

    혜운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재현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쁘고 기대되는 것 같았다.

    “혜운아, 요즘은 재현이한테 편지 안 써 줘? 어렸을 땐 편지도 자주 써 주더니.”

    “저 말고도 써 주는 애들이 워낙 많아서요.”

    혜운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 보였던 건 기분 탓인가.

    재현은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은 채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혜운아, 너 알아? 재현이가 네가 줬던 편지 다 모아 두고 있는 거.”

    아, 저 형이 왜 저럴까….

    진현의 갑작스러운 돌발 발언에 당황한 재현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야?”

    “아냐. 귀찮아서 안 버렸더니 쌓인 거야.”

    재현의 변명에 진현은 짓궂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귀찮아서 쌓아 뒀다고 하기에는, 편지 모아 두는 박스가 너무 예쁜 거 아니냐?”

    “형, 그냥 계산하고 먼저 가지 그래?”

    진현이 재현을 놀리는 사이,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졌다.

    “둘 다 시험은 잘 봤어? 시험 기간 내내 둘이 딱 붙어서 공부 열심히 했잖아.”

    “좋은 날 그런 얘긴 하지 맙시다.”

    “그래.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잔소리는 안 할게.”

    다행히도 진현은 순순히 물러섰다. 재현이 혜운에게 주려고 두툼한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고 있는데 진현이 한발 빨랐다. 재현은 자신이 자른 고기 세 점을 한꺼번에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자식 촌스럽긴. 누가 스테이크를 그렇게 먹냐?”

    “내 맘이야.”

    재현이 삐딱하게 받아쳤지만 진현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였는지 재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혜운은 진현이 잘라 건네준 고기를 얌전하게 찍어 먹었고, 진현은 자신의 몫으로 주문한 파스타도 접시에 덜어 건넸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정해 보일수록, 재현의 짜증 지수는 점점 올라갔다.

    “하진현!”

    진현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진현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진현과 친구 사이인 건지,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눴다.

    “인사해, 형 친구.”

    “안녕하세요.”

    재현이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눈치를 살피던 혜운도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하게 웃었다.

    “동생 생일이라 같이 밥 먹는 중이었어.”

    “애기 때 봤던 그 꼬마가 이렇게 큰 거야?”

    “이젠 키가 나보다 더 커.”

    “이쪽은… 진현이 여자 친군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친구의 호들갑에 세 사람은 동시에 당황했다. 진현은 손사래를 치며 친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아냐 아냐! 재현이 친구야.”

    “아이구. 미성년자한테 실수했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너무 잘 어울려서….”

    대체 뭐가 잘 어울린다는 건지. 그는 잘 어울린단 소리를 기어이 한 번 더 했다. 재현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혜운은 재현과 달랐다. 그가 사과를 건네자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점점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건 재현이 유일했다.

    소란스러웠던 진현의 친구가 테이블을 떠나는 사이, 재현은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고 있는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오해가 전부인 일인데, 어울려 보인다는 그 말이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다.

    “너도 참 대책 없다.”

    질투도 어지간해야지, 이건 너무 유치하고 철없어 보여서 창피할 지경이었다. 재현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찬물에 손을 뽀득뽀득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자리로 막 돌아가려는데,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혜운이 진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져서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늘 그런 눈으로 진현을 보았고, 늘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았는데, 내 마음 하나 달라졌다고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건가 싶었다.

    마음이란 게 참 무서운 거란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었다.

    ‘만약에, 혜운이가 정말로 형을 좋아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는데….

    진현은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모든 걸 갖춘 멋진 남자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재현이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진현이었다.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넌 어떤 남자가 좋아?”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 따뜻한 사람?”

    믿고 싶지 않지만, 혜운의 이상형에 꼭 맞아 떨어지는 사람, 혜운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은 진현일 확률이 높다.

    혜운이 진현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자신도 진현과 같은 사람으로 변할 자신이 있었다. 너무 구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진현을 좋아하는 혜운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를 좋아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재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김없이 저만큼 앞서 나간 자신의 비루한 상상력을 비난하면서.

    선물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잠시 기다리라는 혜운의 말에, 재현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혜운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종이 가방을 들고 다가오는 혜운이 눈에 들어왔다.

    “자. 선물.”

    혜운이 내민 건 제법 큰 크기의 종이 가방이고,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본 듯한 종이 가방이었다. 재현은 가방 안에 든 박스를 조심스레 꺼내다가 혜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귀엽게 서 있었다.

    “설마.”

    설마 하고 박스를 열어 보는데, 재현이 갖고 싶었던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브랜드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이 모델을 알고 구했는지 너무나 놀라웠다.

    “너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어? 내가 이거 갖고 싶어 했던 거 어떻게 알고….”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그네에서 내려온 재현은 모래가 없는 벤치로 달려가 바로 박스 안에 든 운동화를 꺼내 신어 보았다.

    “사이즈는 어때? 불편하면 바꿔다 줄게.”

    “아냐. 딱 맞아. 딱 좋아.”

    너무 딱 맞아서 살짝 발볼이 조이긴 했지만 신다 보면 늘어나서 딱 맞을 것 같았다.

    “너무 딱 맞으면 발 아플 텐데. 한 사이즈 큰 걸로 바꿔 와야겠다. 이리 줘.”

    “괜찮다니까. 끈을 조금 느슨하게 매면 돼.”

    재현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운동화 끈을 끝에서부터 잡아당기며 풀었다.

    “그게 성질부린다고 빨리 되냐? 가만있어 봐. 내가 해 줄게.”

    혜운은 재현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끈을 늘이며 느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혜운이 종종 자신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 주곤 했다. 분명 비슷하게 리본을 묶는데도 혜운이 묶어 주면 오랫동안 풀어지는 법이 없어 신기했다.

    그 때문에 혜운은 운동화 끈을 묶어 주면서 이것도 제대로 못 매냐며 구박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재현은 혜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고.

    “넌 나 없으면 운동화 끈도 못 묶어서 어쩌려고 그래.”

    “네가 계속 옆에 있으면서 묶어 주면 되지.”

    재현의 말에 혜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네 옆에서 운동화 끈이나 묶으라고?”

    “이상하게 내가 묶으면 자꾸 풀어지니까.”

    “운동화 끈이 풀리는 건 누군가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래.”

    “그런 소린 어디서 주워들어서….”

    “에휴. 말을 말자.”

    재현이 분위기를 깨자 혜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섰다.

    “그래 뭐. 어차피 이 운동화 때문이 아니라도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을 테니까.”

    혜운의 그 말은, 운동화보다 더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 * *

    이번에는 재현이 꾀병으로 야간 자율 학습을 빼고 시내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 다녀왔다. 혜운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혜운이 자신에게 선물해 준 운동화와 똑같은 모델을 사서 돌아온 참이다.

    빨리 전해 주고 싶어서 야자 중간 쉬는 시간에 잠깐 나오라고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마도 이 덜렁이가 휴대폰을 학교에 가져오지 않은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야자 마치는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혜운이 친구들과 함께 교문을 빠져나왔다. 먼저 혜운을 발견한 재현이 손을 흔들려 팔을 머리 위로 뻗는데, 혜운은 누군가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달려가며 환하게 웃었다.

    “어…?”

    혜운의 앞에는 진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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