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상대는 신혜운 (9/50)

09. 상대는 신혜운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첫날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재현과 혜운은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 맛 쭈쭈바를 사서 입에 물었다.

혜운은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잘 봤냐는 물음에 혜운은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은 곧 잘 봤다는 뜻이란 걸 재현은 잘 알고 있었다.

“중간고사 끝나면 진로 상담 시작한다는데, 너 무슨 과 갈지 정했어?”

“아직. 너는?”

이미 진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혜운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러자 혜운이 배시시 웃더니 자그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정했어. 광고홍보학과로. 나중에 AE가 될 거야.”

“AE? 그게 뭔데?”

“광고 기획자.”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멋있어 보이긴 하다.”

우습게도, 진현에게만 말해 줘서 내심 서운했던 것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정말 유치한 것 같았다.

“재현아, 우리 대학도 같이 다니면 되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붙어 다녔는데 지겹지도 않냐?”

“어. 난 하나도 안 지겨운데? 넌 지겨워?”

“아니.”

“지겨워지면 말해라. 떨어져서 다녀 줄 테니까. 아니다. 아예 대학을 외국으로 가 줄게.”

“아 왜 그래. 삐졌어?”

혜운은 앙증맞은 도톰한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재현은 그런 혜운의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장난을 걸고 싶었다.

“그래. 같은 대학에 가자. 그럼 우리 부모님도, 너희 할머니도 걱정 덜하시겠지. 믿음직스러운 내가 너랑 같이 있으니까.”

재현의 말에 혜운은 기가 막히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노려보았다.

“너랑 같이 다니는 거 하나도 안 지겨워. 너무 좋아. 이건 진짜 진심이야.”

재현은 혜운의 눈을 바라보며 솔직한 얘길 꺼내 놓았다. 쑥스러웠지만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색하고 간지러워도, 이제부터는 자꾸 해 볼 생각이었다.

둘 사이에는 진심을 농담이나 장난으로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법이 필요했다. 그래야 혜운과 진지한 고민이나 성숙한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점심 가게 가서 같이 먹자.”

“그럴까? 아! 우리 공부도 같이할래?”

“그래.”

“그럼 일단 우리 집부터 가자. 교복 갈아입고 책 챙겨야 되니까.”

식당으로 오겠다고 하지 않고 굳이 집에 같이 가자는 걸 보니, 책을 한 보따리 챙겨 갈 모양이다.

“짐꾼이 필요한 거구나?”

“어…. 눈치챘네?”

“알았다. 가자.”

재현은 못 이기는 척 혜운의 뒤를 따라 걸었지만, 실은 혜운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혜운의 집은 수백, 아니 수천 번도 더 들어와 본 곳이라 자신의 집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이지만, 지금 이 순간 재현에겐 너무나 불편한 곳이 되어 버렸다.

혜운은 한창 샤워 중이었다. 재현은 혜운이 외출 준비를 마치길 기다리며 TV 앞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뉴스를 강제 시청 중이었다. 아무리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 노력해 봐도 온 신경은 이미 청각에만 집중되었다. 그럴수록 TV 볼륨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 들고 먼저 가겠다고 할걸. 왜 괜히 기다리겠다고 해서 자진해서 고문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게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

“5분만. 금방 말리고 나올게.”

욕실을 빠져나온 혜운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린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촉촉한 물 향기와 바디 클렌저 향, 샴푸 향 등이 동시에 밀려 나와 재현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재현은 자신이 이렇게나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나 싶어서 놀라웠다.

점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혜운이 자신을 너무 안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이제 와 혜운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을 남자로 보고 있지 않다는 말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재현은 혜운이 자신을 믿어 줘서 고마운 걸로 결론짓기로 했다.

재현은 TV를 끄고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불순한 생각을 씻어 내고 후끈 달아오른 체온을 내리기 위해서다. 귀에서도 심장이 뛰는 것 같아서 정신이 사나웠다.

이번에는 발코니로 나가 경선이 정성으로 돌보는 허브 화분도 보고, 창밖의 하늘도 보면서 순수한 생각을 억지로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돌아서서 다시 거실로 들어가려는데, 빨래 건조대에 혜운의 속옷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재현은 깜짝 놀라 잽싸게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때마침 혜운이 방에서 나왔다. 혜운의 말간 피부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현은 좀처럼 혜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싱긋 웃으며 손짓을 하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머리… 덜 마른 거 아니야?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괜찮아. 날이 좋아서 너희 집 도착하기 전에 다 마를걸?”

혜운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고 재현은 천천히 혜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혜운에게서 늘 맡았던 그 향기가 짙게 피어나 간신히 바로잡은 마음을 어지럽혔다.

“네가 하도 구박해서 책 이것만 가져갈 거야. 얼마 안 되지?”

“어? 어… 그러네. 잘했어.”

재현은 혜운이 들고 있던 책을 건네받고, 혜운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래도 내일은 수학 빼곤 어렵지 않은 시험이라 다행이다, 그치?”

“어.”

“문제는 모레 시험이야. 국어랑 국사랑 같은 날인 데다가 범위도 너무 넓고.”

“어….”

“하재현,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대답에 영혼이 하나도 없다?”

정신이 쏙 빠져 멍하니 있던 재현은 혜운의 지적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시험 마지막 날 저녁때 약속 없지?”

“어. 왜?”

“그날 너 생일이잖아. 같이 밥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 놔.”

“선물은?”

“우리 사이에 선물은 무슨. 같이 밥 먹는 게 내 선물이야. 되게 좋지?”

혜운이 이런 멘트를 하면 평소처럼 질색을 하며 구박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혜운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좋기만 해서 하마터면 맞다고 맞장구를 칠 뻔했다.

“음, 그럼 비싼 걸 먹어야겠다.”

“그래. 비싸고 맛있는 거 먹자.”

혜운과 자신의 생일은 겨우 이틀 차이라 한꺼번에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챙긴다고 해 봤자 미역국을 한 통 끓여 나눠 먹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혜운과 단둘이 보내게 되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간신히 가라앉힌 심장이 또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거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공부를 시작한 재현과 혜운은,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실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좀처럼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다만 떨었다. 그 후 자연스레 몰입하기 시작했지만, 사실 재현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혜운을 훔쳐보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과일 먹어.”

진현이 키위를 들고 올라와 두 사람의 공부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형, 내일 시험 문제 아는 거 없어?”

“저는 알아도 모릅니다. 어쨌든 절대 모릅니다.”

“우리 형제의 의리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네. 이것밖에 안 되네요.”

진현의 철벽에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혜운은 진현이 포크로 찍어 준 키위를 받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재현의 입에도 하나를 넣어 주었다.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대신 시험 끝나고 내가 밥 사 줄게. 그날 재현이 너 생일이잖아.”

“나 그날 약속 있어.”

“약속?”

“어. 혜운이가 나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했어.”

“아무리 생일이라도 그렇지, 사내자식이 그걸 얻어먹겠다고 했냐? 혜운아, 오빠가 사 줄게. 그 다다음 날 너도 생일이잖아. 겸사겸사 같이 생일 파티나 하자.”

“안 돼! 혜운이가 나 사 준다고 했다고.”

“괜찮지, 혜운아?”

진현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혜운과의 약속에 끼어들었다. 재현은 혜운을 바라보며 거절해 달라고 적극 어필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럼 그날 같이 저녁 먹는 걸로. 공부 열심히 해라.”

진현은 재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재현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번 생일은 혜운과 단둘이 보내나 했는데, 눈치 없는 훼방꾼이 끼어들어 흥을 깨 버렸다.

‘내가 혜운이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기어이 끼어드는 심보는 대체 뭐야?’

구시렁거리던 재현은 혜운의 표정을 살폈다. 혜운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으며 키위를 오물거렸다. 진현이 끼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에잇!”

재현은 버럭 짜증을 내며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뭐 하는 거야?”

“나 그만할래. 너 집에 가서 혼자 해.”

“어쩐 일로 네가 오래 앉아 있다 했다. 간다, 가.”

혜운은 책을 덮고 펜을 챙겨 일어섰다.

“안 바래다줄 거야?”

짜증이 나는 건 나는 거고, 할 일은 해야 했다.

재현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혜운의 뒤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혜운이 가는 거야? 저녁 먹고 가지?”

“얘가 저보고 집에 가래요.”

“정말? 너 이놈 자식 혜운이한테 그렇게 말했어?”

민영이 벌떡 일어서자 재현이 혜운을 방패 삼아 뒤에 숨었다.

“네가 붙잡고 공부 좀 시켜야 되는데. 재현이가 네 말은 잘 듣잖아.”

“아니에요, 어머니. 제 말도 잘 안 들어요.”

재현은 혜운과 민영의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혜운의 등을 툭툭 치며 떠밀었다.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히 가고. 재현이는 혜운이 집까지 잘 바래다주고 와라.”

혜운의 뒤에 딱 붙어 건물을 나선 재현은 그제야 어깨를 쫙 피고 혜운에게서 떨어졌다.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있음이 실감 났다. 여섯 시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밖은 환했다. 날씨도 제법 봄다워서 따뜻하고 훈훈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혜운이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팔에 걸자, 재현은 그것도 받아서 들어 주었다.

“너는 네가 저녁을 사기로 했으면 끝까지 네가 사겠다고 해야지. 형이 산다고 하는 걸 덥석 받냐?”

“그럼 거절해? 쌤 민망하게?”

“난 네가 사 주는 밥을 선물로 받고 싶었다고.”

“다음에 또 사 줄게.”

“너는 거절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매번 그렇게 거절을 못 해서 어쩌려고 그래? 너 그거 못 고치면 평생 호구 잡혀.”

“얘가 왜 시비지? 아주 악담을 해라.”

혜운이 꼭 말아 쥔 조그만 주먹으로 자신의 팔뚝을 때렸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힘도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나 싶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혜운의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아옹다옹 말싸움을 이어 가던 재현과 혜운은 헤어지기 직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잘 가.”

“들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할 건 하는 혜운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재현은 내색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혜운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정말 모르겠다. 신혜운의 마음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도.

하늘 꼭대기를 찍었다가, 지구 내핵까지 꽂혔다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이 큰 폭으로 널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미리 안다고 해서 의지만으로 제어가 되는 건지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자신은 이렇게 될 거란 걸 미리 알았더라도, 알고도 당하는 쪽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좀 더 컸다. 상대가 무려 신혜운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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