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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만일 내가 고백을 한다면 (8/50)
  • 08. 만일 내가 고백을 한다면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선 혜운은 재현과 하나씩 나눠 먹으려고 챙겨 온 팩 두유 두 개를 손에 꼭 쥐고, 항상 만나는 장소인 아파트 단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오래 기다렸….”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재현이 아닌 성재였다. 혜운은 당황한 나머지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는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어제 딱 잘라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마치 자신의 의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학교 가자.”

    “아뇨, 저는 같이 갈 친구가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어제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잊었어?”

    “저는 어제 선배님께 분명히 제 생각을 말씀 드렸는데요.”

    그는 한숨을 쉬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고, 혜운은 긴장을 감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꼬리 쳐 놓고 내빼면 내가 좀 황당하지.”

    “네?”

    “너 나랑 눈 마주치면 살살 웃으면서 나한테 꼬리 쳤잖아.”

    “전 그런 적 없어요.”

    혜운은 너무나 황당했다. 성재가 워낙 학교 유명 인사라 얼굴을 아는 정도일 뿐, 그와 눈을 마주친다거나 대화를 나눈 적도, 인사를 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교실까지 찾아와서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고, 자신은 분명히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그가 이런 식으로 여러 아이들에게 접근해 불쾌한 일을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직접 당하니 손이 떨릴 정도로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얘 좀 봐. 어디서 여우 짓이야? 힐끔거리면서 훔쳐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네. 내 친구들도 다 알아! 네가 내 주변에 얼쩡거리면서 내 눈에 띄려고 애쓰는 거.”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전 선배님 쳐다본 적도 없고요, 보고 웃거나 주변에서 얼쩡거린 적도 없습니다.”

    “그동안 너 같은 애들 많이 봤어. 어떻게 한번 꼬셔 보려다가 들키면 쪽팔려서 아닌 척하는 애들. 괜찮아, 이해해. 그러니까 창피해하거나 자존심 세우지 않아도 돼.”

    역시 소문대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말씨름은 아무런 소득이 없을 거란 판단을 내린 혜운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그가 혜운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아앗!”

    “예뻐서 봐주는 거 여기까지야. 건방 떨지 마.”

    “이거 놔요.”

    “이따 점심시간 때 잠깐 보자.”

    “놓으라고요!”

    “소문처럼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냐. 만나 보면 알 거야. 그리고 나 지금 되게 진지해. 근데… 너 볼수록 되게 예쁘게 생겼다.”

    혜운은 있는 힘껏 팔을 뿌리치다가 손등으로 그의 턱을 치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혜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쏘아보자 그가 거친 욕을 뱉으며 성큼 다가왔다.

    “신혜운!”

    그 순간, 재현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혜운은 재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따 학교에서 보자.”

    성재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하자, 재현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단단히 화가 난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대로 내빼시려고요?”

    “뭐야, 넌?”

    “사과부터 하시죠.”

    “이 새끼가, 네가 뭔데 사과를 하라 마라야? 내가 왜 사과를 해?”

    “함부로 만졌잖아요. 사과하세요.”

    재현은 성재가 피하면 다시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결국 성재가 재현의 멱살을 움켜쥐며 주먹을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위협했다.

    “안 꺼져? 죽고 싶냐?”

    “때리세요. 제가 키가 크고 멀쩡하게 잘생겼지만 보기보다 뼈가 가늘어서 한 대만 맞아도 부러지고 그래요. 합의 보기 까다로운 편이죠.”

    말은 유들유들하게 약 올리듯 하고 있었지만 재현의 표정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이 개새끼가!”

    재현의 멱살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던 성재는 멱살을 놓은 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재현이 그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근데, 내가 주먹 힘은 좀 쓸 만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현의 주먹이 그의 턱을 가격하며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등교를 하던 학생들이 세 사람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재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인도 위에 널브러진 성재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사내새끼가 손버릇이 아주 나쁘네. 싫다는데 왜 만져? 그거 엄연히 성희롱이야! 맨날 여자애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너 스토커냐? 그거 너무 찌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네 아버지 송운지청 지청장이라며.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너희 아버지는 모르시지?”

    재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고,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재현이 그의 옷깃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팔뚝을 붙잡고 끌고 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숨죽이고 지켜보던 혜운은 재현의 뒤를 따랐다.

    “이거 놔, 시발새끼야! 이거 안 놔?”

    “왜? 너 이런 거 좋아하는 거 같던데. 당하는 건 기분 더러운가 봐?”

    재현은 또 한 번 성재를 밀어 넘어뜨렸고, 두 번이나 바닥에 구른 그의 교복은 잔뜩 구겨지고 흙투성이가 되었다. 혜운은 재현의 소매 끝을 붙잡은 채 그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한번만 더 혜운이 근처에서 얼쩡대다가 내 눈에 걸리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나. 나 분명히 얘기했다. 나중에 얻어터지고 나서 울지 마라.”

    성재는 그 길로 뛰듯이 걸어 자리를 벗어났고, 구경을 하던 학생들도 삼삼오오 흩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될 때까지도 재현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었고, 혜운은 그런 재현을 기다렸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신혜운.”

    “어?”

    “손 줘 봐.”

    혜운이 손을 내밀자 재현은 혜운의 손을 가볍게 쥐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턱 근육이 움찔할 정도로 이를 꽉 다물었다.

    “멍들겠다.”

    재현의 말에 그제야 자신의 손목을 확인해 보니 성재에게 잡혔던 곳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혜운은 쓰게 웃으며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직 시간 여유 있지? 편의점 들렀다 가자. 기운 뺐더니 배고프다.”

    “어? 내 두유!”

    경황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던 두유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행방이 묘연해진 두유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혜운은 길바닥에 터져 처참한 꼴이 된 두유를 확인하곤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먹으려고 챙겨 온 건데….”

    혜운이 시무룩해하자 재현이 웃으며 먼저 편의점으로 향했고, 혜운은 그의 뒤를 따랐다.

    편의점 앞 화단에 나란히 걸터앉은 혜운과 재현은 샌드위치를 한 쪽씩 나눠 먹으며 병 두유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미안하다, 재현아. 나 때문에….”

    “네가 왜 미안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재현은 혜운이 이런 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건 싫었다.

    “많이 놀랐지?”

    “조금. 이젠 괜찮아.”

    “당분간 어딜 가든 나 항상 데리고 다녀.”

    “우리 원래 어딜 가든 항상 같이 다니지 않나?”

    “그렇긴 하지.”

    재현은 많이 놀랐을 혜운을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 웃고 있었지만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겁에 질린 혜운의 표정과 혜운의 팔목을 붙잡고 억지로 끌어당기며 힘을 과시하듯 우쭐대던 성재의 표정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아 버렸다. 조금 더 빨리 발견하지 못한 제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붉은 손자국이 남은 혜운의 가는 손목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지금 같은 기분에서는 딱 죽지 않을 만큼 패 주고 싶었다. 혜운의 손목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날 것 같아서 다시 화가 났다.

    “우리 같이 태권도 학원 다닐 때, 사범님한테 칭찬은 내가 더 많이 받았는데. 그치?”

    “그거야 네가 폼이 좋아서 그랬지. 폼만 좋으면 뭐 하냐? 써먹을 줄을 모르는데.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만약 그런 일 생기면 길게 말씨름하지 말고 급소 걷어차고 도망가. 그러고 나서 신고를 하든지, 날 불러.”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분고분한 혜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현은 그녀의 동그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었다. 그 순간 얼마나 겁을 먹고 놀랐을지, 다시 생각해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24시간 내내 붙어 있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아. 저 인간이야 학교에서 워낙 유명하니까 네가 속지 않았지만, 사람 겉모습 멀쩡한 거에 속으면 안 돼. 좋아한다면서 고백해도 덥석 만나 주고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

    “알았어. 조심, 또 조심할게. 아니다. 아예 만나지 말까?”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혜운은 늘 자신과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남자의 곁에 설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잠깐 상상해 봤을 뿐인데도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치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차마 그 꼴은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럼 너도 만나지 마. 그래야 공평하지.”

    “그러지 뭐.”

    생글거리며 웃는 혜운의 모습에,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르던 짜증이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나 이제부터 네가 전달해 주는 쪽지나 편지 안 받을 거야. 그런 걸로 네가 친구들 사이에서 곤란해지는 거 싫어.”

    혜운이 주는 거라서 받았던 것뿐인데, 그게 오히려 혜운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더는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진작 거절하지….”

    “네가 주는 걸 어떻게 안 받냐?”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나는 어려워. 네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재현의 대답에 혜운은 눈을 가만히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두유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넌 어떤 남자가 좋아?”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쑥스럽게 웃었다. 마치, 좋아하는 누군가를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음.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 따뜻한 사람?”

    혜운이 말한 사람과 가장 흡사한 누군가가 재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 사람이 누군지 떠오를 만큼 이상형이 너무 구체적이잖아.”

    혜운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다. 재현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알아? 네가 좋아하는 거?”

    “모르는 거 같아.”

    혜운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며 쑥스러워했고, 그런 혜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현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떤 사람이 좋은데?”

    “나? 난 그런 거 없어.”

    난 그냥 네가 좋을 뿐이야. 네가 좋은 이유도 그냥 너라서 좋은 것뿐이고. 네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난 너를 좋아했을 거야.

    차마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집어 삼키며 재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등굣길에 벌어진 재현과 성재의 이야기가 하루 종일 학생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였지만, 종례 시간에 중간고사 시간표가 전달된 후로 모든 관심은 그곳으로 옮겨 갔다.

    하굣길에 혜운과 재현이 함께하자 다시 몇몇 아이들이 수군대긴 했지만 어차피 늘 겪어 왔던 일이라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난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수학 B반에서 탈출할 거야.”

    “형이 들으면 서운해하겠는데?”

    “잘했다고 칭찬해 줄걸?”

    혜운의 반박에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가방 줘.”

    “괜찮아.”

    재현은 혜운의 가방을 슬쩍 들어 보더니 눈썹을 구겼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또 시험공부 한다고 책이랑 문제집 잔뜩 쑤셔 넣었지? 네가 이렇게 무거운 걸 메고 다니니까 키가 크다 만 거야.”

    “아니거든? 그리고 앞으로 키 더 클 거야!”

    “1년에 1센티?”

    분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들어 줘서 고맙습니다, 해 봐.”

    “너무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혜운의 과장된 인사에 재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재현은 자신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아이 같았다. 민영의 말처럼 만약 자신이 남자였다면, 재현과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 박고 싸웠을 것이다.

    “넌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게. 너 없었으면 나 어쩔 뻔했냐?”

    재현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쳤지만, 사실 혜운은 진심이었다. 늘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

    쑥스러운 마음에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괜히 투덜거린 적도 많았다.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재현은 혜운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고,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하기까지 했다.

    이런 감정들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이런 마음으로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는 자신에겐 너무나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만일 내가 네게 고백을 한다면, 장난하지 말라면서 놀리겠지. 부담스러워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고.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가까이에 있으면서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렇게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그때쯤이면 네가 나를 이성으로 봐 줄 수도 있겠지? 내가 너에게 여자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재현아, 컵라면 먹고 싶지 않아?”

    “먹고 갈래?”

    “응. 먹고 가자. 네가 가방도 들어 줬으니까 내가 사 줄게.”

    이런 핑계로 조금이라도 더 너와 함께 있고 싶은 욕심…. 이 정도는 괜찮은 거겠지?

    혜운은 재현과 발을 맞춰 걸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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