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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너 기다렸어 (5/50)
  • 05. 너 기다렸어

    재현을 좋아하게 된 후로 그를 관찰하는 시간이 늘었다. 밥 먹는 모습은 수천 번도 더 봤던 건데 왜 이렇게 눈을 뗄 수가 없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 봤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유리창에 비친 재현의 모습으로 다시 시선이 갔다.

    “너 요즘 형이랑 부쩍 가깝게 지내는 거 같더라?”

    “내가 그랬나?”

    “학교에서도 둘이 자꾸 속닥거리더니, 수학 문제 푸는 게 뭐 그리 급하다고 문제집까지 들고 쫓아와?”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

    “그래. 질투하는 거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농담을 맞받아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는데, 요즘은 종종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혜운은 헛기침을 하며 문제집을 넘겼다.

    그때, 갑자기 몰려온 손님들로 식당 안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재현은 가게 안 분위기를 쓱 살펴보더니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나도 도와줄게.”

    “거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소매를 걷어 올린 재현은 손님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로 향했고, 혜운의 시선은 그 후로도 계속 재현을 쫓았다.

    평소에는 장난기 많고 항상 툴툴거리는 것 같아도 재현은 속이 깊고 잔정이 많은, 따뜻하고 착한 아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운은 그걸 잘 알기에, 친구들이 재현을 두고 차갑고 쌀쌀맞다고 하는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솔직한 성격에 다소 표현이 서툴러서 그래 보이는 것뿐이다.

    다들 형인 진현과 비교를 하며 형제가 전혀 다르다고 말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재현도 다정하고 상냥한 구석이 있다.

    “혜운이 왔네? 재현이 보러 온 거야?”

    다들 혜운을 보면 당연히 재현을 만나러 왔냐며 묻곤 했다. 혜운은 진현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오늘은 쌤 보러 왔어요. 물어볼 게 좀 있거든요.”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줄래? 가게 일 좀 도와드려야 할 거 같다.”

    “네. 천천히 오셔도 돼요.”

    진현이 자리를 떠난 후, 혜운의 시선은 다시 자연스레 재현에게로 향했다.

    혜운과 진현의 시선은 문제집에 머물렀지만 내내 웃고 있었다. 물론 진현이라면 수학 문제를 풀면서 웃을 사람이지만 혜운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만 모르는 비밀 얘기를 나누는 게 분명했다.

    ‘수상해.’

    정말 혜운이 진현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혜운에게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걸 묻는 건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현을 좋아하니까, 혜운도 진현을 좋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민영과 분리수거를 하며 식당 밖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마침내 혜운이 진현과 인사를 나누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용무가 끝난 모양이다.

    “어머니, 저 이만 가 볼게요.”

    “혜운아, 재현이 데리고 가.”

    갑작스러운 민영의 말에 혜운도, 재현도 동시에 눈이 동그래졌다.

    “뭘 그렇게 놀라. 늦었으니까 혜운이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길만 건너면 되는데요.”

    “엄마가 얘기했지? 밤늦게 어디 다닐 일 있으면 항상 재현이 데리고 다니라고. 하재현,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

    귀찮다며 거절을 할 거라 생각했는지 민영이 연신 재촉하며 등을 떠밀었고, 재현은 마지못해 앞장서서 가는 척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재현이 그린 큰 그림이었다. 분리수거를 하며 밖에서 기다리다 보면 혜운이 나올 것이고, 절대 혜운을 혼자 보낼 리 없는 민영이 데려다주라고 말할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 리 없는 혜운은 순순히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흐으음. 음음.”

    혜운의 콧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뭐가 그리도 좋은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발걸음도 가벼워 보이고, 발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마저도 즐거워 보였다.

    “뭐가 그렇게 신나?”

    “어? 아무것도 아냐.”

    대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형이랑 무슨 얘길 했기에….

    ‘찌질한 상상에 갇히지 말자. 그냥 속 시원하게 물어보면 되잖아?’

    결심한 재현이 그 자리에 멈춰 서자 혜운도 멈칫하며 재현의 옆으로 다가와 얼굴을 빤히 보았다.

    “형이랑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수학 얘기.”

    “고작 수학 얘기를 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다고?”

    “그동안 너무 궁금했던 게 해결돼서 기분이 좋아진 거야.”

    “너 혹시… 내가 모르는 비밀 같은 거 생겼어?”

    정곡을 찔렸는지 혜운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런 거 없어.”

    제법 단호하게 말했지만 거짓말이 분명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혜운은 거짓말을 하고 나면 지금처럼 손을 어찌할 줄 몰라 꼼지락거리기 때문이다.

    더 캐묻는다면 혜운은 술술 불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진짜로 진현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인도를 밝히던 가로등도 줄고 인적도 줄어들었다. 곁에서 내쉬는 혜운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재현아.”

    “응.”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아?”

    혜운이 손가락으로 편의점을 가리키며 웃었다. 안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데 혜운이 먼저 반가운 제안을 해 주었다.

    재현은 편의점으로 들어가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맛 쭈쭈바 두 개를 사 들고 나왔다. 포장지를 벗겨 꼭지를 따서 건네자 혜운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혜운은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했다. 어렸을 때도 이거 하나면 눈물을 뚝 그치곤 했다. 그래서 재현은 주머니에 늘 천 원짜리 두 장을 넣어 다녔다. 언제든 혜운이 울면 아이스크림을 사 줄 수 있게 말이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와 울던 날에도, 비 오는 날 물웅덩이에서 넘어져 아끼는 원피스가 홀딱 젖었다며 울던 날에도, 재현에게 자전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꿈치가 까져 울던 날에도, 재현은 늘 혜운에게 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늘 혜운의 곁에 있었다.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늘 혜운이 함께였다. 혜운에게 자신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 재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내일 쌤이랑 축구 보러 간다고 했지? 재밌게 보고 와.”

    “진짜로 같이 안 갈래?”

    “나 내일 갈 데가 있어.”

    “어디?”

    혜운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채 쭈쭈바를 입에 물었다.

    무슨 일일까. 혜운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혜운이 더 이상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때는 재현도 알려 달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불문율과도 같았다.

    “아, 추운데 맛있다.”

    손이 시린지 혜운은 쭈쭈바를 입에 문 채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잡아 주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땐 수도 없이 잡고 다녔던 손이지만 이젠 함부로 잡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치듯 손등이라도 맞닿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사이, 두 사람은 혜운이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올라가라.”

    “잘 가.”

    혜운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운이 먼저 들어가길 기다렸다. 그러자 혜운이 공동 현관 안으로 쏙 들어갔다.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서던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재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날이구나.”

    혜운의 엄마의 기일이 이즈음이었던 게 이제야 떠올랐다. 혜운은 늘 혼자서 추모 공원에 다녀오곤 했다.

    같이 가 주고 싶었지만 혜운은 원하지 않았고, 민영 역시 혜운의 선택을 따라 주라고 조언을 했다. 그래서 오지랖 넓게 나설 수 없었고, 혜운이 먼저 같이 가자고 말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재현은 결국 다시 돌아서서 혜운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 * *

    혜운은 아침 일찍 포천에 위치한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일찌감치 서둘러 다녀온 건데도 거리가 멀어서인지 다시 동네에 돌아왔을 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배가 고프네.”

    하루 종일 배고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는데, 동네에 오니 배가 고팠다. 내내 밥도 안 먹고 다닌 걸 알면 경선이 속상해 할까 봐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사 먹고 들어갈 생각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신혜운.”

    그때,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역시 하재현.

    상가 건물 화단에 걸터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때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건지 모르겠지만, 혜운은 재현을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다.

    “여기서 뭐해?”

    “너 기다렸어.”

    재현의 말에 혜운이 미소를 지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재현의 농담을 듣고 나니 기분도 나아지고 기운도 나는 것 같았다.

    “축구는 잘 보고 왔어? 그 팀 또 졌지?”

    “몰라.”

    “왜 몰라?”

    “안 봤으니까.”

    “그게 무슨.”

    “말했잖아. 너 기다리고 있었다고. 네가 언제 올지 몰라서 여기 계속 앉아 있었어.”

    “거짓말….”

    혜운의 말에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혜운은 그런 재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나와 포장지를 벗기고 꼭지를 따서 건넸다.

    “자.”

    그것을 받아 드는 순간, 혜운은 울컥하고 말았다. 내내 잘 참아 왔던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터져 버린 것이다.

    “으이그. 어린애도 아니고.”

    재현은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혜운의 등을 다독이다가, 이내 두 팔로 혜운을 안아 주었다.

    위로가 되었다. 그냥 안아 주는 것뿐인데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별다른 말이 없어도,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어도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허전했던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하재현이라서 더 고마웠고,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엄마를 떠올릴 때면 서글펐다.

    왜 하필 내 엄마는 그 사람이었을까. 얼마나 모진 사람이기에 자식을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목숨까지 버렸을까.

    왜 하필 내 엄마는 그런 사람일까.

    다른 친구들의 엄마처럼 때리고 혼내더라도 가끔씩은 내 새끼가 제일 예쁘다며 안아 주고 사랑한다 말해 주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하필 나는, 왜 나만….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길러 준 경선에게도, 재현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꽁꽁 묶어 두고 숨겨 두었지만 한 번씩 가슴을 뚫고 나와 헤집어 놓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과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재현은 그런 혜운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안아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뜻한 품을, 든든한 어깨를 내어 주었다.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었다.

    “잘 다녀온 거지?”

    “알고 있었어?”

    “조금 늦게 기억이 났어.”

    “…고마워.”

    재현은 혜운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넌 정말…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구나.”

    “지나치게 많은 걸 알고 있지.”

    혜운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혜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재현이 있어서, 어쩌면 그녀에 대해 그녀 자신만큼이나 많이 알고 있는 그가 곁에 있어서 감사했다. 혜운이 갖지 못한 것들을 대신해 주기 위해 재현이 친구가 되어 준 건 아닐까 싶었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혜운의 심장만큼이나 재현의 심장도 이내 터져 버릴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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