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4/50)
  • 04.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혜운아, 아침 먹자.”

    “네, 할머니.”

    교복으로 갈아입은 혜운은 경선의 부름에 방을 나섰다. 현관 앞에 가방을 놓아두고 주방으로 달려가 식탁 앞에 앉자, 경선이 시래기 된장국이 담긴 국그릇을 혜운의 앞에 놓아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경선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정성스레 밥을 차려 주었다. 교직에 있을 때도 혜운의 아침밥만큼은 꼭 차려 두고 출근했다. 혜운은 매일 경선의 정성을 먹고 자랐다.

    “1년이 금방 지나갔네….”

    싱크대 앞에 서서 뒷정리를 하던 경선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혜운의 귀에 닿았다. 그 순간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혜운은 달력을 보았다.

    “할머니는… 안 가실 거죠?”

    “미안하다.”

    “아니에요. 포천은 저 혼자 다녀올게요.”

    이번 주 일요일, 엄마의 기일이었다.

    혜운은 외할머니인 경선의 손에서 자랐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혜운의 엄마는 짧은 결혼 생활 끝에 혜운을 임신한 상태에서 이혼을 선택했고, 경선의 집에 머물며 혜운을 출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못다 한 공부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재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그 결혼마저 실패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부라는 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 없었고 소식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죽음은 경선에게도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7년 전, 엄마가 타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뒤 유골을 가져와 포천의 한 수목장림에 수목장한 후로 경선은 단 한 번도 딸을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성당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 혜운은 그런 경선의 선택을 존중했다.

    경선은 혜운에겐 엄마이자 아빠였다. 부모님의 부재에 대해 그립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경선은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녀 손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저, 핏덩이 딸을 떠맡기고 자기 살길 찾아 떠났던 이기적인 사람이 자신을 낳아 준 엄마라는 게 놀랍고, 스스로 목숨을 거둘 정도로 모진 사람이 경선의 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물론 가끔씩 생각이 깊어질 때도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경선은 혜운에게 항상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속 깊은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인지 혜운의 마음속엔 상처의 그림자가 그리 짙지 않았다. 그들과 달리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고, 바른 인생을 살고 싶었다.

    “잘 먹었습니다.”

    혜운은 비타민까지 챙겨 먹은 후, 양치를 하고 곧장 가방을 어깨에 멨다.

    “내 새끼, 잘 다녀와.”

    경선은 혜운의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어 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다녀올게요.”

    혜운이 미소를 지으면 경선도 덩달아 미소를 짓는다. 혜운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경선의 모습이 좋아서 그녀를 향해 자주 웃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웃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혜운에게 재현은 넌 너무 시도 때도 없이 웃는다며 타박을 하기도 했다.

    엄마의 기일을 앞두고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서글픔을 다시 가두기 위해, 혜운은 기분 좋은 생각과 행복한 생각들을 하나둘 떠올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4교시 종료 5분 전. 점심시간을 앞둔 학생들은 다들 종 치기만을 기다리며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종이 치자마자 바로 급식실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누가 풀어 볼까?”

    반면, 눈치 없는 하진현 교생 선생님은 칠판 가득 문제를 적어 놓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어떤 학생을 간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재현?”

    아주 만만한 게 나지.

    재현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 진현의 부드러운 미소에 맞서 자신도 씨익 웃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재현의 당당함에 아이들은 키득거렸고, 그저 한마음 한뜻으로 이쯤에서 진현이 수업을 끝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나와 봐. 선생님이 도와줄게.”

    오늘따라 포기를 모르는 진현의 모습에 재현은 속으로 저 인간이 왜 저러나 싶었다. 재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하게 거부하자, 뒤에서 수업을 참관하던 수학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잠시 들썩이던 교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때 갑자기 혜운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그 문제 제가 풀어 보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지. 그럼 혜운이가 풀어 보자.”

    다들 혜운이 용감하게 총대를 매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칠판 앞에 선 혜운은 분필을 손에 쥐고 망설임 없이 문제를 풀어 나갔다. 혜운의 그런 모습에서 B반 탈출을 향한 강한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야, 신혜운이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말 같은 소릴 해라.”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물음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 좋은 오해였다. 재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얹어졌다.

    “내가 보기엔 재현이가 아니라 쌤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뭐?”

    “쌤한테 예쁨 받고 싶고, 관심 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 같지 않아? 이과 반 수업 때도 쌤이 문제 풀러 나오라고 하면 여자애들이 서로 나가려고 한다더라.”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추론이었다. 심지어 더 그럴듯한 추론이라서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신혜운이랑 재현이는 모태 우정인데, 갑자기 이성으로 보일 리가 없지. 못 볼 거 다 본 사이일 텐데. 안 그러냐?”

    여론은 ‘혜운이 진현을 좋아한다’ 쪽에 무게를 두고 흘러가고 있었다.

    딩동댕동.

    그때 마침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들썩거렸다.

    “수업은 여기까지. 점심 맛있게 먹어라.”

    서둘러 인사를 한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갔지만 재현의 발걸음은 교탁 앞에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진현과 혜운에게 향했다. 빨리 나오라는 친구들의 성화에도 재현은 손사래를 치곤 그들에게 다가갔다.

    “쌤,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어, 맞아. 잘했어, 혜운아.”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다. 혜운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다정하다. 길가의 잡초와 개미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다. 그걸 혜운도 알고 있다.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다정하게 대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 진현을 좋아할 리가 없다.

    만약 그래도 진현이 좋다면, 그래서 진현이 좋은 거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현의 미간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수업도 끝났는데 대체 무슨 얘기를 저렇게 정답게 나누는 건지. 친구들의 얼토당토않은 추론을 들어서인지 오늘 유난히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진현은 어렸을 때부터 혜운을 예뻐했고, 혜운도 진현을 잘 따랐다. 한때는 ‘진현 오빠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민영은 혜운에게 ‘우리 며느리’라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유일하게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 게 재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혜운이 진현과 결혼하는 건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참 현명했구나 싶다. 신혜운이 형의 여자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정말 상상하는 것조차 싫은 일이었다. 차라리 신혜운이 누나나 여동생으로 들어오는 게 나았다. 혜운을 딸 삼고 싶다던 영철의 의견에 이제라도 한 표를 던지고 싶었다.

    재현은 교탁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왜? 뭐 할 말 있어?”

    “어? 어…. 그게 아니라.”

    진현의 물음에 재현은 얼떨결에 들고 있던 책을 스르륵 넘기며 교탁에 올려 두었다.

    “근데 재현아. 이거 새 책이니?”

    넘긴 흔적조차 없는, 새 책과 전혀 다름없는 깨끗한 재현의 수학 책을 발견한 진현이 탄식하며 책을 재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운이 피식 웃었고, 재현이 그런 혜운을 노려보았지만 혜운은 전혀 기죽지 않고 혀를 날름거리며 약 올렸다.

    “아까 둘이서 뭘 그렇게 속닥거렸어? 내 욕했지?”

    “당연하지. 우리가 할 얘기가 네 욕밖에 더 있냐? 그쵸, 쌤?”

    일부러 약을 올리는 혜운이 미우면서도, 생글생글 웃어 대니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극과 극으로 널을 뛰는 감정 때문에 딱 미칠 노릇이었다.

    “형, 일요일에 축구 보러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축구 같은 소리 하네. 넌 이따 집에 가서 이 새 책과 다름없는 수학 책에 대해 대화 좀 나누자.”

    “아, 형!”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다.”

    “수업 끝났잖아.”

    “어휴, 진짜 말 안 들어.”

    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업 자료를 정리했다.

    “혜운이도 같이 갈래?”

    “축구 보러요? 저는 됐습니다.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해서. 특히 두 분이 응원하시는 팀 경기는 너무 너무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혜운의 말에 재현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너 지금 우리 팀 비하한 거냐?”

    “나 밥 먹으러 간다. 쌤, 얼른 가시죠.”

    혜운이 지현을 방패 삼아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간 뒤, 재현도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야, 신혜운. 우리 팀이 비록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진 못하고 지금도 꼴찌를 하고 있지만 두고 봐라. 언젠가는 반드시 우승팀이 될 거니까! 너 내 말 듣고 있어?”

    혜운은 들어 주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재현은 너무나 분했지만 이따 하굣길에 붙잡고 천천히 설명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바쁜 저녁 시간대를 피해서 왔는데도 ‘홍성곰탕’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혜운은 조심스레 식당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손님이 많은 토요일이 되면 진현이 항상 가게 일을 돕기에 이곳으로 만나러 온 것인데 어쩐 일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혜운은 민영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혜운이 왔네? 재현이 만나러 왔구나?”

    “아뇨. 쌤 만나러 왔는데, 안 계시네요?”

    “잠깐 집에 올라갔어. 금방 내려올 거야. 사과 깎아 줄까, 아니면 혜운이 좋아하는 사이다를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혜운은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네가 진현이를 오빠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하니까 내가 다 이상하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이젠 입에 붙었어요.”

    “진현이 학교에서 잘하긴 하니?”

    “그럼요. 애들도 쌤 엄청 좋아해요.”

    “하긴, 제 아빠를 닮아서 다정하고 상냥해서 미움받진 않을 거야. 어, 재현이 내려왔네.”

    민영의 말에 고개를 쭉 내밀었더니,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재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웬일이야?”

    “쌤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나한테 물어봐. 대신 대답해 줄게.”

    “이건데?”

    들고 있던 수학 문제집을 내밀자 재현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재현의 귀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실은 진현에게 수학 문제를 물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재현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 온 참인데, 혹시나 재현을 마주치면 핑곗거리로 삼으려고 들고 온 문제집을 요긴하게 써먹은 것이다. 재현을 좋아한 후로 그에게 하나둘 비밀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 저녁 먹으러 내려온 거 아냐? 배고프겠다. 어서 밥 먹어.”

    “너는?”

    “난 먹고 왔지.”

    재현은 쟁반에 밥과 국, 김치를 챙겨 와 식사를 시작했다. 곰탕 안에 파와 고추를 듬뿍 넣는 모습을 지켜보던 혜운은 문득, 초딩 입맛인 혜운이 골라낸 채소를 재현이 대신 먹어 주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내가 너무 잘생겼지?”

    “어…. 어? 아, 뭐라는 거야!”

    “그만 쳐다보라고.”

    너무 대놓고 쳐다본 모양이다. 혜운은 순식간에 목덜미에서부터 볼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창밖을 두리번거렸지만 심장은 여전히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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