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나만 알고 있는 너의 진짜 모습 (3/50)
  • 03. 나만 알고 있는 너의 진짜 모습

    재현의 집은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 건물 3층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재현은 씻자마자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소주가 담긴 분무기와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홍성곰탕’은 할머니 때부터 이 자리에서 40년 가까이 장사를 해 온 식당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현의 부모님인 영철과 민영이 물려받아 운영 중이다.

    재현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식당도 마감이 한창이라 그도 늘 일을 도왔다. 아니, 돕는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일상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재현이 왔니?”

    민영의 목소리에 테이블을 닦던 재현이 고개를 들어 주방을 보니, 그곳에는 민영과 민영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진현이 있었다.

    “네. 송운시 제일가는 효자, 작은아들 왔습니다.”

    재현의 말에 분주하게 뒷정리를 하던 식당 직원들은 물론이고 카운터에 앉아 정산을 하던 영철까지도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우리 식당 이름 ‘효자네 곰탕’으로 바꿀까 봐요.”

    “그러게. 식당 앞에 효자비도 하나 세워야겠어.”

    민영과 영철이 우스갯소리를 나누는 동안에도 재현은 묵묵히 테이블의 기름기를 닦았다.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고 영업 중인 식당이다. 이 지역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도 소문난 맛집이라 영업시간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늘 일손이 부족했다.

    투자자라면서 찾아와 가맹 사업을 제안하기도 하고 방송국에서도 여러 번 찾아왔지만 영철과 민영은 묵묵히 식당 운영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런 고집 덕분에 이만큼이나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다들 지독하다고들 말하지만 영철과 민영은 자신들만의 신념을 가지고 장사를 했고, 재현은 부모님의 뚝심을 존경했다.

    “우리 효자, 엄마 심부름 하나만 하자.”

    민영은 수육이 한가득 담긴 옹기그릇을 재현에게 건넸다.

    “오늘 고기가 너무 좋아서 선생님 드리려고 따로 삶은 거야. 가져다드리고 와.”

    “나는?”

    “네 것도 있지. 다녀와서 형이랑 같이 먹어. 얼른, 우리 효자.”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민영의 손길에, 재현은 좋으면서도 싫은 척 정색을 하며 배달에 나섰다.

    바쁜 식당 일로 부모님의 빈자리가 유독 컸기 때문인지, 재현은 여전히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좋았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재현은 제 자신이 아직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현은 영철의 초등학교 은사님이자 혜운의 외할머니인 경선의 집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이런저런 것들을 배달하곤 했다.

    혜운이 외할머니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자신의 집 근처에 살 때는 하루에 서너 번도 더 배달을 다녔으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드물게 가는 편이었다.

    이사 간 아파트도 그리 멀지 않았다. 식당 앞 큰길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 아파트 단지에 혜운의 집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넌 재현은 아파트 상가 건물 내 편의점을 지나다가 매장 안에 있던 혜운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혜운.”

    친구들과 모여 음료수를 고르던 혜운은 재현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더니 이내 반갑게 웃어 주었다. 혜운은 자신을 보면 항상 저렇게 환하게 웃곤 했다. 평생을 보아 온 모습이지만 요즘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최대한 태연한 척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다.

    “재현아 어디 가?”

    “너희 집.”

    재현의 대답에 혜운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대답이긴 했다.

    예전에는 둘이 사귀냐는 오해를 받는 게 귀찮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런 오해를 받는 게 좋았다. 혜운과 자신이 이만큼이나 가까운 사이라는 걸 과시하고 싶은 유치한 충동까지 들기도 했다.

    하지만 혜운은 자신의 마음과 다른 듯했다. 혜운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말하면 애들이 오해하잖아.”

    “엄마가 이거 선생님 갖다 드리고 오랬어.”

    “줘. 내가 들고 갈게.”

    혜운이 손을 내밀었지만, 재현은 혜운의 뒤편에 선 친구들을 스윽 본 후 앞장서서 걸었다.

    “빨리 가자.”

    재현이 먼저 편의점 밖으로 나와 혜운을 기다렸다. 이내 혜운이 친구들에게 뭔가를 말한 뒤 편의점을 나섰다.

    “그냥 내가 가져갈게.”

    “무거워.”

    “나 힘세잖아.”

    “뜨거워.”

    “흐음…. 알았어. 가자.”

    절대 건네주지 않을 걸 아는 혜운은 오늘도 역시 포기가 빨랐다. 재현은 그런 혜운을 보며 ‘넌 참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재현은 바닥에 비친 혜운의 그림자가 자신과 멀어지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걸었다.

    “이쪽으로 와.”

    차도 쪽에서 걷던 혜운이 재현의 말을 듣고 순순히 오른쪽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자 한 걸음쯤 뒤처져 걷던 혜운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그 순간,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지는 혜운의 향기에 또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러니까 애들이 우리가 사귄다고 계속 오해하는 거야.”

    “하든지 말든지.”

    “어어? 하든지 말든지? 언제는 애들이 사귀냐고 물어볼 때마다 펄쩍 뛰어 놓고?”

    “내가 그랬나? 전혀 기억이 안 나네.”

    재현의 발뺌에 혜운이 억울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재현의 팔을 툭 쳤다.

    “근데 네가 펄쩍 뛰었던 건 기억난다. 어렸을 때 누가 너한테 하재현 좋아하냐고 물으면 악을 쓰고 울면서 아니라고 했었잖아.”

    “왜곡하지 마라. 그냥 운 거지, 악을 쓰면서 울진 않았거든?”

    “내가 그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그랬다면… 미안.”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을 사과받으려니 우습기도 한데, 순순히 사과를 하는 혜운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혜운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을 먼저 배려하는, 조금은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는 법이 없고, 사과가 빠른 유연한 성격이라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

    한편으론 쉽게 상처받고, 잘 울고, 꽤 예민한 성격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움받는 걸 가장 두려워해서, 워낙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데 도가 튼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은 혜운이 전달해 주는 편지도 꾸역꾸역 받고 있었다. 친구들 때문에 혜운이 힘들어지는 걸 원치 않았고,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재현은 종종 헷갈렸다. 혜운을 이토록 아끼는 이유가 너무도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성으로 좋아하기 때문인지.

    늘 혜운을 좋아했기에 이 감정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그 답을 찾고 싶어서 재현은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확실한 건, 혜운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 이 사소한 일상마저 미치도록 좋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 재현의 방문에도 경선은 미소로 반겼다.

    “세상에. 매번 이렇게 귀한 걸 가져다주니 고마워서 어째?”

    “맛있게 드세요. 배달 완료했으니까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같이 먹자, 재현아. 우리 둘이 이거 다 못 먹어. 어서 들어와.”

    재현은 가 보겠다며 허리 숙여 인사까지 해 놓고, 경선의 제안에 거절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능숙하게 수저를 챙겨 식탁 위에 놓는 재현의 모습에, 혜운은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재현의 가족과는 맛있는 음식은 서로 나눠 먹고, 좋은 일 있으면 축하해 주고, 슬픈 일에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건네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 왔다.

    특히 재현은 혜운에겐 친구 이상의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친구였고, 이제껏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겨울에는 눈싸움을. 바닥에 배 깔고 누워서 동화책을 읽고, 진현에게 한글을 배운 것도 함께였다. 그리고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함께 자랐다.

    재현과 혜운의 인연만큼 깊은 것이 재현의 아버지 영철과 경선의 인연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경선의 교직 생활 당시 첫 제자가 영철이었는데,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김치만 있으면 되겠지?”

    혜운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고,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수육을 한 점씩 맛보았다. 음식 솜씨라면 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민영의 솜씨다웠다.

    “진현이는 수업 잘하니?”

    “처음엔 좀 긴장하는 것 같더니 역시나 잘하더라고요. 형은 뭐든 잘하니까.”

    “우리 재현이도 뭐든 다 잘하잖아.”

    “아, 선생님이 우리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재현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늘 진현과 비교당하는 재현이라 칭찬에 목말라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평소에도 경선은 재현에게 아주 사소한 것에도 칭찬을 해 주곤 했다.

    형을 질투하는 것처럼 말해도, 재현에게 진현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지 혜운은 잘 알고 있다. 재현은 세상에서 진현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망아지 같은 재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진현이다. 식당 운영으로 늘 부재중이었던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한 것도 진현이었다. 다들 형만 예뻐한다고 툴툴거려도 본인 역시 형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진현이 군 입대하던 날, 몰래 울다가 혜운에게 들켰던 건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기로 약속한 참이다.

    “형이 수업해 줘서 수학 공부가 더 재밌어졌을 거 같은데. 재현아, 어때?”

    “아뇨. 전혀요.”

    “너희들 이제 B반 탈출해서 A반으로 가야지. 너희들 내년에 고3인 거 알지?”

    “흠. 할머니에서 선생님으로 돌아오셨네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이구, 이 녀석이! 알았어. 공부 얘기 안 할 테니까 어서 먹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시늉을 하던 재현이 도로 의자에 앉아 경선이 집어 준 수육 한 점을 받아먹으며 냠냠거렸다.

    재현이 한 번씩 집에 오면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다. 학교에서는 전혀 볼 수 없지만 집에 오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막내 특유의 애교가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고 활기차게 만들었다.

    경선도 그래서 재현을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혜운은 기분이 좋아졌다.

    재현이 수육을 담아 온 옹기그릇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경선이 담아 준 딸기가 가득했다. 혜운은 늘 그랬듯이 1층 공동 현관까지 내려가 재현을 배웅했다.

    “들어가.”

    “너 가는 거 보고.”

    “너 먼저 들어가. 춥다. 감기 걸려.”

    “알았어, 얼른 가.”

    마지못해 먼저 걸음을 옮긴 재현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 위로 높게 팔을 뻗더니 좌우로 휘휘 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른 여자애들에게는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쌀쌀맞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섬세하고 다정한 구석도 있는 녀석이다.

    예전엔 그런 재현의 성격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재현을 좋아하게 된 후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혜운은 재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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