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이상기류 (2/50)
  • 02. 이상기류

    13년 전.

    4월이 시작된 후로도 한동안은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웠는데, 불과 2주 사이에 학교 화단에서부터 봄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추운 것도 싫고, 더운 것도 싫은 재현에게 봄은 그저 축구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운동장에 나가 축구나 한 게임 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다음 수업은 수학이었다.

    “재현아, 가자.”

    한 무리의 친구들이 재현에게 어서 가자며 재촉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재현은 느릿느릿 의자에서 일어섰다.

    “수학이지?”

    “3분 남았어. 빨리.”

    교실 안은 분주했다. 남녀공학이지만 남녀 각 반인 송운고는 영어와 수학 과목에 한해 수준별 이동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동 수업은 남녀 합반으로 진행되는데, 재현의 교실에는 다른 반으로 이동하려는 학생들과 수업을 받으러 온 학생들이 한데 뒤엉켰다. 재현은 교실 뒤편 사물함에서 수학 책을 꺼내 들고 시장통 같은 교실을 나섰다.

    재현의 목적지는 수학 B반 교실인 2학년 6반 교실. 재현의 자리는 창가 쪽 1분단 맨 뒷자리이자, 혜운의 바로 뒷자리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재현을 반긴 건 연보라색 편지 봉투였다. 재현은 혜운의 머리카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아, 진짜. 하재현!”

    단번에 자신을 알아차린 혜운이 뒤를 돌아보며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재현은 혜운의 눈앞에 편지 봉투를 흔들었다.

    “이거 뭔데?”

    “김보미가 전해 달래.”

    “어제도 주지 않았어?”

    “어제는 이미나였고.”

    “안 읽어도 되지?”

    “네 맘대로 해. 난 전해 준 거다.”

    혜운이 다시 앞으로 돌아앉자, 재현은 또 한 번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한 번만 더 머리카락 잡아당기면 내 손에 죽는다.”

    혜운은 이번에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경고를 쏘아붙이며 으르렁거렸지만 재현의 눈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내가 설마 그 조그만 손에 죽겠냐?”

    “또, 또 시비 튼다.”

    “편지 배달 그만해. 안 읽는 거 알잖아.”

    “그래도 자꾸 전해 달라는데 어떡해.”

    “거절하면 되지.”

    “거절하기 미안하니까….”

    “나한텐 안 미안한가 봐?”

    “그냥 읽어. 읽으면 되잖아. 그게 뭐 어려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썩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다. 관심도 없는 아이들이 친해지고 싶다, 좋아한다며 편지를 보내는데 마냥 좋을 리가. 재현에겐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귀찮아.”

    “너는 진짜…. 어떤 여자가 너랑 연애하게 될지 몰라도, 진짜 불쌍하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재현이 받아치자 혜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앞으로 돌아앉았다.

    재현과 혜운을 두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모태 우정이라고들 말했다. 엄마들끼리 산부인과 동기였고, 심지어 태어난 날짜도 단 이틀 차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친구였기에,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친구 사이, 그게 바로 재현과 혜운이었다.

    수업 종이 울리고, 수학 선생님과 함께 지난주부터 교생 실습을 나온 교생 선생님이 함께 들어왔다.

    “오늘 수업은 내가 할 거야. 기대되지?”

    “네!”

    수업을 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교생 선생님이자 재현의 친형인 진현이었다. 이번 주부터는 본래 과목 선생님이 참관을 하고 진현이 수업을 하게 되었다며 주말 내내 긴장을 하던 참이다.

    하지만 재현은 안다. 늘 그랬듯이 잘 해낼 거란 걸. 뭐든 잘하는 사람이니까 애초에 걱정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꼭 닮아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벌써부터 학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7교시 수업인 데도 딴짓하는 아이들이나 조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하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젊고 잘생긴 교생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재현은 진현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 소리 내어 웃고 있는 혜운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볼이 빵빵 부풀어 오르는 걸 보니 눈매가 축 내려앉을 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요즘 들어 재현의 시선이 혜운에게 고정될 때가 많아 그는 퍽 난감했다. 꽤 오래전부터 그래 왔는지도 모르지만 자각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샤프펜슬을 쥐고 꼼지락거리는 혜운의 희고 작은 손을 보고 있는데, 꼬고 있던 다리가 풀어지며 실수로 혜운의 의자 다리를 툭 치고 말았다. 그 순간 혜운이 눈매를 찡그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문득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혜운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이러다 말겠지, 생각하며 외면하려 했던 감정이 재현의 바람과는 달리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재현은 진현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교과서를 챙겨 일어서다 고개를 쭉 내밀어 혜운을 보았다. 반드시 B반을 탈출해 A반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신혜운답게 뭔가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나 간다.”

    “재현아, 잠깐만. 줄 거 있어.”

    혜운이 싱긋 웃으며 책상 서랍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았다.

    “여기 있다. 재현아, 이거.”

    “이게 뭔데?”

    “너 좋아하는 초코바.”

    혜운이 내민 건 재현이 가장 좋아하는 초코바였다. 하지만 초코바 포장지에 쪽지로 보이는 종이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이건 뭐냐고.”

    “너한테 초코바 전해 달라고 한 애가 쓴 쪽지.”

    그 쪽지를 신혜운이 썼을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혹시나 하고 물었던 참이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 버렸고, 잠시나마 달콤한 상상을 하며 기대했던 제 자신이 우스웠다.

    “그거 정주희가 김보미 몰래 전해 달라고 한 거니까 잘 숨겨서 가. 알았지? 보미가 알면 둘이 머리채 잡고 싸움 날 수도 있어.”

    “거 참 복잡하네.”

    정주희와 김보미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건 상관없지만 중간에서 혜운이 곤란해질까 봐 순순히 바지 주머니에 초코바와 쪽지를 넣고 교실을 나섰다.

    대체 저놈의 편지 심부름은 언제까지 할 생각인지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거절 못 하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아니면 전생이 전서구였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야. 방금 신혜운이 너한테 뭐 준거야?”

    “몰라, 새끼야.”

    “편지 줬냐? 편지 준 거 맞지?”

    복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시커먼 친구들이 재현에게 들러붙어 책과 재현의 몸을 수색하려 들었고, 재현은 잽싸게 뛰어가 거리를 벌렸다.

    “너 신혜운이랑 사귀면 뒈진다.”

    “미친놈. 니들이 신혜운 지킴이냐? 신혜운이 나랑 안 사귄다고 너랑 사귀어 줄 거 같아?”

    “저 개새끼가!”

    재현이 약을 올리며 도망가자 그 뒤로 몇 몇 남자아이들이 전력 질주로 따라갔다.

    재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재현의 주변에도 혜운을 좋아하거나 호기심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함께 등하교를 하다 보면 혜운에게 휴대 전화번호를 묻거나 편지를 전하는 건 수도 없이 보았고, 자신과 혜운이 친하다는 걸 아는 3학년 선배들은 자신을 불러 소개를 해 달라며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역시 자신의 눈에만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 몹시 신경이 거슬리던 참인데, 요즘 혜운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많아져 점점 더 예뻐지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혜운을 두고 군침 삼킬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신혜운은 너희들 같은 남자 안 좋아해.”

    “그, 그럼 어떤 남자 좋아하는데?”

    재현은 두 친구의 가운데에 서서 어깨동무를 하며 마치 굉장한 비밀이라도 털어놓으려는 듯 분위기를 잡았다.

    “나 같은 남자.”

    재현의 말에 사방에서 온갖 비아냥거림과 거친 욕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교복 셔츠의 단추를 풀며 걸었다.

    “아오! 저 또라이 새끼!”

    “저 새끼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냐? 쟤 신혜운 좋아하는 거 아냐?”

    누군가 정곡을 찔렀지만 재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손에 쥐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서 축구나 하자.”

    재현의 제안에 친구들은 우르르 계단 통로로 쏟아져 내려갔고, 재현은 고개를 돌려 6반 복도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는 혜운의 얼굴을 한 번 더 본 후 걸음을 옮겼다.

    청소 시간이 되자 청소 당번이 아닌 혜운은 먼지를 피해 복도로 나왔다. 그 주변에는 자연스레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혜운아, 재현이가 편지 보고 별말 없었어?”

    “어? 어…. 편지 읽고 나면 무슨 얘기가 있겠지.”

    기대감에 가득 찬 보미의 표정에 혜운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혜운아, 보미랑 재현이랑 잘되게 네가 좀 도와줘.”

    보미의 절친인 주희의 부탁에 혜운은 기분이 묘했다. 주희 역시 재현에게 전해 달라며 초코바와 쪽지를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두 친구 사이에 엮이게 된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나 그렇게까진 못 해. 하재현 성격 알잖아.”

    “알지. 너니까 고분고분 편지라도 받아 주는 거.”

    주희의 말대로 재현에게 편지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혜운이 유일했다. 재현에게 직접 편지를 건네거나 고백을 했다가 민망한 상황을 겪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성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오직 관심사는 축구뿐인 무심한 녀석이라 여학생들의 호감 표현을 그저 귀찮게 여겼다.

    그냥 순순히 받아 주기만 해도 좋으련만, 자기 딴에는 조금의 희망도 갖지 않도록 확실하게 선을 긋고 철벽을 치는 것이다.

    문제는 재현이 철벽을 치는 것마저 멋있다고 난리라는 것. 그와 동시에 혜운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 가서 난처했다.

    “얘들아, 빨리 와! 하재현 축구한다!”

    청소를 하던 한 친구의 부름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교실 안으로 달려갔다. 혜운도 그 틈에 함께 끼어 교실 창가로 향했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마저 포용하게 하는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로 뭇 여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하재현. 재현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한 친구들과 그들의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지켜보던 혜운도 조용히 웃었다.

    혜운은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공을 쫓는 재현을 바라보았다. 교복 셔츠는 어디다 집어 던진 건지 셔츠 안에 입고 있던 하얀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근데, 혜운아. 너 진짜 하재현이랑 아무 사이 아니지?”

    “그 얘기 한 오만 번쯤 들은 거 같다.”

    혜운의 대답에 몇몇 친구들은 진심으로 안도했고, 그 모습에 혜운은 기분이 조금 씁쓸했다.

    “하긴, 둘이 거의 남매잖아. 엄마 배 속에서부터 친구였다며?”

    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들의 시선이 다시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는 재현에게 옮겨 갔다.

    남매 같은 친구 사이.

    혜운에겐 요즘 그 관계가 너무나 버거웠다. 재현을 좋아하게 된 후로, 그 무게감을 제대로 확인한 참이다.

    재현을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만 들뜨곤 했다. 이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 예전처럼 재현을 그저 친구로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들뜨는 중이다.

    재현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물감이 물에 번지듯 서서히 커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어찌할 수도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커져 버렸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외모에 아무리 신경을 써도 재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지 늘 타박만 돌아왔다.

    혼자 마음 졸이고 혼자 애쓰는 거, 너무 속상하고 서러워서 그만하고 싶은데 마음이란 게 종이를 접듯 쉽게 접어지는 게 아니라서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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