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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보고 싶었어 (1/50)
  • 01. 보고 싶었어

    “오늘 전국에 대설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서울, 경기 등 중부 지역은 밤늦게까지 20cm가량의 눈이 더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하의 기온으로 도로 면이 얼어 크고 작은 교통사고 소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요. 출근길 교통안전에 각별히 유의하셔야겠습니다. 현재 서울 시내 정체 구간으로는….”

    세상은 사흘 동안 쏟아진 눈으로 온통 새하얗게 뒤덮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굵은 함박눈이 내리는 중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멘트 그대로 출근길은 대형 주차장이 되었다.

    겨울과 눈을 좋아하는 혜운이지만, 갈 길 바쁜 그녀에게 지금 내리고 있는 이 함박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와 다름없었다.

    “이 눈이 크리스마스 때 내렸으면 엄청 낭만적이었을 텐데. 그렇죠, 선배?”

    “지금 낭만 타령할 때가 아니야. 미팅 시간까지 20분밖에 안 남았다고.”

    이 와중에 낭만을 운운하는 무영의 말에 한껏 예민해진 혜운은 도로 상황을 확인하며 시계를 보았다.

    광고 기획사 네오의 제작 2팀 소속 AE 혜운과 무영은 계약 체결 전 최종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광고주의 회사로 이동 중이었다.

    날씨와 출근길 교통 상황을 감안해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약속 시간을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업계에서 계약 성사 직전에 지각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순간, 혜운의 머릿속에는 이날을 위해 들였던 공과 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계약 체결이 업무 평가로 직결되는 혜운에게 이번 미팅은 너무도 중요했다.

    “선배, 그렇게 죽자 살자 매달리지 않아도 회사에서 선배의 노고를 다 인정해 줄 거예요.”

    “이 건은 놓치는 순간 모가지 뎅강이야. 이 계약 따내려고 밤낮없이 매달렸던 인원과 노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걱정 마요! 선배 잘리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네가 날 무슨 수로 책임을 져? 네가 월급 줄 거야?”

    “나랑 결혼하면 되잖아.”

    “아, 예예.”

    혜운은 무영이 시도 때도 없이 툭툭 던지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너스레를 자연스레 넘긴 후 지도 앱을 열어 현재 위치에서 미팅이 진행될 회사까지의 거리를 도보로 측정해 보았다.

    도보 15분 거리. 평소라면 뛰어서 10분 안에 도착하겠지만, 인도가 빙판길인 걸 감안하면 빠르게 걸어서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미팅 때 신규 사업 본부 본부장하고 브랜드 개발팀 팀장이 같이 나온다고 하던데. 선배 그 팀장은 본 적 없죠?”

    “브랜드 개발팀 팀장? 본 적 없지.”

    “그 사람이 직책만 팀장이지 본부장 위에 있다는 소문도 있고, 사실상 ‘본가인’ 내 신규 브랜드 론칭은 물론이고 프랜차이즈 출점 관리까지 전담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어요. 이름이 뭐라더라…. 하여튼 사주 외조카인데 회사도 그 팀장 거 될 거래. 그 팀장이 유학 마치고 들어와서 회사 경영에 합류하고, 모친이 운영하던 식품 기업을 매입한 후로 단기간에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거지. 사업 수완이 제법인가 봐.”

    “그래. 최무영 씨는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혜운의 무덤덤한 반응이 실망스러웠는지, 무영은 혜운의 표정을 살피며 미간을 구겼다.

    “그 팀장이라는 사람, 젊고 잘생겼대요.”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네.”

    “선배는 그 사람이랑 눈도 마주치지 말고, 웃어 주지도 말아요.”

    “눈도 안 마주치고 회의는 어떻게 하지?”

    “그 사람 일 중독자래. 무뚝뚝하고 쌀쌀맞고, 옆에만 가도 찬바람이 쌩쌩 분대요. 그런 남자 별로 매력 없잖아? 선배는 나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 좋아하니까. 맞죠?”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벌써부터 경계하는 무영을 보며 역시 최무영답다는 생각을 했다. 틈만 나면 적극 어필하는 무영의 말을 자연스레 흘려보낸 혜운은 뒷자리에 두었던 서류 가방과 노트북 가방을 가져왔다.

    “넌 참… 남한테 관심이 많아. 그런 열정으로 일을 더 열심히 하자.”

    “근데 사실 그 팀장은 내가 관심 가질 급은 아니에요. 외식 프랜차이즈로 십여 년 만에 급성장한 졸부는 여기저기 널렸으니까. 난 갓 중소기업 딱지 뗀 중견 기업 애들하고는 같이 안 놀아서.”

    “그래. 너 잘났다.”

    혜운은 노트북 가방 끈을 오른쪽 어깨에, 서류 가방 끈을 왼쪽 어깨에 크로스로 걸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선배 뭐 하는 거예요?”

    “나 내려서 걸어갈 테니까 뒤따라 와.”

    “미쳤어? 밖에 눈 오는 거 안 보여요? 선배 얼어 죽어!”

    “미팅에 늦어서 팀장님 손에 죽느니 길에서 얼어 죽는 게 낫지. 이따 보자.”

    “감기 걸린다니까! 신혜운!”

    조수석에서 내린 혜운은 무영의 말을 뒤로한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도에 갇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차들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질러 인도에 올라선 혜운은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걸었다.

    함박눈이 거센 바람을 타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사방에서 퍼부어 눈을 뜨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묵직한 두 개의 가방이 양쪽 어깨를 짓눌렀지만 양손으로 가방이 흔들거리지 않도록 꽉 붙잡은 채 눈길을 뚫었다. 눈바람에 노출된 손등과 얼굴의 피부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 *

    본가인 본사 사옥 내 대회의실.

    회의실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회의 준비를 끝내고 서로 눈치 보느라 바쁘던 직원들의 시선이, 회의실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의 미세한 움직임에 집중되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홍 실장은 네오 측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대리에게 다가갔다.

    “전화해 봤어?”

    “아까 분명 거의 다 도착했다고 하셨는데….”

    “후우. 이 사람들이 진짜….”

    직원의 보고에 홍 실장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미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난 상황. 결국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장님.”

    홍 실장의 부름에 재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벗어 둔 슈트 재킷을 걸치고 앞 단추를 여몄다.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지금 길이 많이 막혀서….”

    “이런 날씨에 출근길 꽉 막힐 거 뻔하니까 저나 본부장님은 물론이고 여기 있는 직원들 모두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거 아닙니까? 그쪽에서도 좀 더 서둘렀다면 미팅 시간에 늦을 리가 없죠. 그 사람들 편들지 마세요, 실장님.”

    나지막하고 단호한 재현의 음성에 회의실 안 공기는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이참. 그런 분들이 아닌데….”

    중간에 끼인 홍 실장만 죽을 맛이었다. 이번에 신규로 론칭한 스테이크 하우스 브랜드 ‘본 스테이크’의 광고를 담당할 회사를 광고 기획사 네오로 최종 결정한 건 신규 사업 본부 본부장과 홍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광고 기획사 중 메이저 TOP3로 불리는 네오와의 계약은, 그동안 신규 브랜드 론칭을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본가인 입장에서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기회를 미팅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말아먹게 생겼으니, 홍 실장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담당 AE인 신혜운 AE는 신선한 감각으로 요즘 광고 업계에서 가장 선호하는 핫한 인물인데다 몇 번의 미팅을 진행하면서 인간적으로도 호감을 느꼈던지라, 약속 시간 엄수 같은 가장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지 않는 것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간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고, 절대 이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더더욱 그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막 재현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여자가 들어섰다.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던 신혜운이었다. 홍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허리를 펴고 눈이 쌓인 머리칼을 손으로 툭툭 털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혜운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실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혜운은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양쪽 어깨에 크로스로 짊어진 채 연신 허리를 숙이며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든 직원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건넸다.

    눈이 녹아 흠뻑 젖은 옷과 빨갛게 얼어 버린 귀와 코끝을 보니 안쓰러워서 홍 실장은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우리 팀장님 화 많이 나셨어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이렇게 꼬이면 어떡합니까.”

    홍 실장은 혜운을 원망하며 그녀를 재현의 앞으로 데려갔다.

    “팀장님, 이쪽은….”

    그런데 혜운을 바라보는 재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하고….

    재현과 함께 일한 지 만으로 3년이 된 홍 실장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팀장님?”

    재현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홍 실장의 음성이 귓가에 윙윙 울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신혜운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신혜운이다. 13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예쁘고 눈부신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서 밤마다 꿈에서 몰래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13년 전과 달라진 건, 어깨를 덮는 새까만 생머리가 아닌, 귀 아래에서 달랑이는 초콜릿빛의 단발머리라는 것과 자신을 바라보던 사랑스러운 눈빛에 지금은 원망이 가득 묻어난다는 것.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고, 미안함과 미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버릴 듯 벅차고, 동시에 갈기갈기 찢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홍 실장의 목소리에 재현은 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분 인사부터 나누시죠?”

    홍 실장의 제안에 재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혜운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작고 하얀 손도 여전했다. 찬바람을 맞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꽉 묶어 두었던 이성의 끈이 곧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다는 걸 감지했다.

    “하재현입니다.”

    재현의 인사에 혜운이 설핏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눈썹을 구겼다.

    “신혜운… 입니다.”

    혜운은 재현이 미련스레 붙잡고 있던 손을 억지로 떼어 내곤 가방 안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얼어붙은 손이 제 맘대로 움직이질 않는지, 명함을 꺼내다 바닥에 쏟아 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손이 얼어서….”

    혜운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명함을 줍자 재현도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재현은 그녀가 신고 있던 눈에 젖은 가죽 구두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혜운.”

    너무나 불러 보고 싶었던 그녀의 이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아플 줄이야….

    “보고 싶었어.”

    재현의 말에 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들어 재현의 눈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보고 싶었어.”

    이번에도 혜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재현의 얼굴 곳곳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보고 싶었어.”

    재현이 세 번째 말했을 때, 혜운이 천천히 일어나며 옅게 웃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혜운의 말간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혜운의 두 눈에 위태롭게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재현은 13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혜운을 두고 돌아서던 그날…. 그날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뒤돌아섰는지 그녀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보고 싶었지만 만나지 않았다.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그녀를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한동안은 잊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게 될 리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재현은 차마 혜운에게 말할 수 없는 뒷말을 삼키며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보고… 싶었어.”

    몇 마디의 말로 진심을 전하는 일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재현은 혜운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박히고 가슴에 남아 13년 동안 후회 속에 살아야했다.

    “거짓말….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그랬다면….”

    재현은 혜운이 뒤에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 진심이었다면 절대 이럴 순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은 늘 그 자리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기다렸는데 왜 찾아오지 않았냐고, 그러고도 보고 싶었단 말이 진심인 거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원망스러움에 울먹거리는 혜운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재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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