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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22/22)

외전 3.

“정말 예뻤어요.”

에르도안의 손을 꼭 잡은 채 친하게 지내던 영애의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온 애쉴이 웅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환상적으로 꾸며져 있던 버진 로드와 천상의 하모니 같던 축가,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하던 신부를 떠올리느라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신혼여행은 페르나로 갈 거래요. 거기서만 나오는 보석을 종류별로 사 올 거라 하더라고요. 페르나에서만 산다는 요정들이 만든 드레스도 포함해서-”

“요정의 드레스라. 부러운가요?”

“아뇨. 부럽지는 않아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 아직 못 입어 본 것도 많아서, 하며 애쉴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말아 올렸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설마, 그건가?’

추측에 확신을 더하고자 에르도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스리슬쩍 떠보았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는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애쉴이 무심코 대답했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깊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휘몰아쳐 질문했다.

“입어 보고 싶지 않아요? 아까 그 영애 입은 것 보고 예쁘다고 했잖아요.”

“네, 뭐. 입어 보고 싶긴 하지만-”

“같이 가서 입어 볼래요?”

“……?”

걸음이 우뚝 멈췄다.

태연하게 던져진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듣지는 못했던지라.

에르도안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애쉴의 표정이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청혼인가? 청혼이야? 나, 청혼받은 거야?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돌아다녔다. 애쉴이 빨개진 얼굴로 쩔쩔매자 에르도안은 어여쁘게 눈꼬리를 접었다.

“나중에 말이에요.”

“……아, 네, 네. 나중에요.”

즉답이 나오진 않았으나 얼굴색의 변화만으로도 원하는 답을 얻었다.

에르도안은 싱긋 웃었다.

* * *

“너무 예쁘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별장 뒤쪽에 있는,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작은 언덕을 거닐며 애쉴이 밝게 물었다.

팔라디움의 별장이 워낙 제국 곳곳에 있는지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공녀인 자신조차도 가물가물하거늘 한 번도 온 적 없는 그가 이 언덕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꿈에서 봤어요.”

그녀를 언덕 중앙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그늘로 이끌며 에르도안이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그는 애쉴 모르게 꽃을 조금씩 따 모으고 있었는데, 주로 붉은색의 팬지 꽃이었다.

“거짓말.”

애쉴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항상 그랬다. 만난 건 2년여 남짓인데 흡사 수십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령 플랑드르의 초콜릿 케이크라든지. 고양이라든지-

알려준 적도 없는데 어쩜 그리 세세하게 다 아는지. 물어볼 때마다 그는 꿈에서 봤다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가 좋아하는 건 뭔지 맞춰 보라며 놀리곤 했다.

“좋아하는 게 뭔지 제대로 말도 안 해 주면서.”

“얘기했었는데. 기억 안 나나 봐요?”

“저는 못 들었거든요!”

“잘 생각해 봐요. 분명 얘기했었으니까.”

어느새 나무 그늘 아래에 도착한 남자는 흙바닥에 손수건을 깐 후 연인을 앉혔다. 그제야 애쉴은 그의 손에 꽃이 가득 들려 있음을 보았다.

“웬 거예요?”

에르도안은 희게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아 꽃들을 엮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구경하던 애쉴은 만들다 남은 꽃줄기로 장난스럽게 그를 툭툭 쳤다.

“뭐 만드는 거예요?”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에르도안은 빠른 손놀림으로 화관 하나를 완성했다. 애쉴의 눈동자와 꼭 닮은, 붉은 팬지를 주로 한 것이었다.

그는 그 화관을 연인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잔잔하게 내려오는 꽃과 풀내음이 향긋하다. 동그래진 눈으로 에르도안을 올려다보던 애쉴은 화관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거 만드는 것도 연습했어요?”

“그럼요.”

뒤쪽에서 애쉴을 껴안은 그가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화관인지 체향인지 모를 향기에 벅찬 감동이 물결쳤다. 가슴속에서 무지갯빛 비눗방울이 퐁퐁 솟아오르는 듯했다.

이런 날이 올 줄 그땐 누가 알았을까.

“사랑해요.”

밑도 끝도 없이 그가 고백했다.

쑥스러움에 혀를 쏙 내민 애쉴이 헤헤 웃었다.

“저도요. 사랑해요.”

여린 산들바람에 은발이 나부꼈다. 눈을 살포시 내리감은 애쉴은 등 뒤의 체온과 꽃밭에서 불어오는 감미로운 향기를 음미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에르도안이 상냥하게 귓속말했다.

“그렇게 계속 감고 있어요. 뜨라고 할 때까지 뜨면 안 돼요.”

알겠노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에르도안은 껴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일어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아름드리나무 반대편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가져오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말라 하더니, 피크닉 도시락이라도 싸 온 걸까?

소리가 나는 쪽에서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디저트로 케이크를 가져왔나 봐! 애쉴은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이제 눈 떠도 돼요.”

그의 말대로 눈을 떴다.

역시나. 시야를 메운 건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다던 플랑드르의 특제 초콜릿 케이크였다. 개인 주문은 받지 않는다 들었는데. 어떻게 가져온 걸까, 하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력과 권력으로는 안 되는 게 없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다 방법이 있다며 얼버무렸다.

그는 그녀가 먹기 좋도록 케이크를 정성스레 잘랐다. 그러고는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어주며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맛있어요?”

끄덕끄덕. 케이크가 입에 꽉 차 있어 애쉴은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이런 거, 매일 먹게 해 줄 수 있어요.”

왜인지 목이 멘 소리를 내며 에르도안이 포크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뒤쪽에 숨겨놨었던 물건을 질질 끌어 가져왔다. 케이크를 하나 더 집어 먹으려던 애쉴이 멈칫했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요.”

물건을 덮고 있던 가림막을 걷어 보니 동물 이동장이 나왔다.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와 새까만 고양이가 사이좋게 잠들어 있는.

예고 없는 선물에 놀란 애쉴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다래졌다. 에르도안은 포크를 쥐고 있지 않은 그녀의 손을 끌어 이동장의 손잡이를 겹쳐 쥐었다.

“고양이도 마음껏 키워요. 원한다면 수백 마리를 키워도 좋아요. 다른 동물을 키워도 좋고.”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만이 담겼다. 경직된 몸과 더불어 겹쳐진 손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에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감정이 전해진 것이었을까.

애쉴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춤추는 거 좋아하니까, 매일 파티도 열어 줄게요. 물론 다른 사람이랑은 추면 안 되고 나랑만 춰야 해요.”

“…….”

“뒤뜰에 커다란 정원도 만들어 줄게요.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게. 꽃을 가꿀 수 있도록 화원도 따로 만들고, 겨울에도 볼 수 있도록 온실도 만들고. 그리고-”

에르도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애쉴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해 줄게요. 그러니까-”

길고 길었던 말에 잠시나마 틈이 생겼다.

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애쉴은 멍하니 에르도안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는 적안은 물기 어린 유리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에르도안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색 상자를 꺼내 열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가슴속 깊이 숨겨왔던. 간절히 바라왔던 말을 전했다.

“나와 결혼 해 줄래요?”

“…….”

두 눈에 물기가 넘실넘실 차올랐다.

눈 한번 깜빡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멀거니 그를 응시하던 애쉴은, 그러다 시선을 내려 상자 속에 든 것을 쳐다보았다.

툭 떨어진 눈물방울이 상자 안의 벨벳을 짙게 적셨다.

그가 내민 것은 마정석 팔찌였다.

비록 마법에 무지한 그녀에겐 평범한 루비 팔찌처럼 보이긴 했지만. 세공이나 형태로 보아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애쉴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져서, 심장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근거려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위에서 느껴지는 눈길에 고개를 들었다.

“받아줄 거죠?”

수줍게 웃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에르도안이 부탁했다. 질문이었으나 부탁과도 같았다.

아.

애쉴의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네, 그럼요!”

환하게 웃은 애쉴이 팔을 내밀었다.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르도안은 잘게 흔들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팔찌를 채워 주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끌어안고 진심을 고백했다.

“고마워요.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요.”

“저도요. 저를 사랑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한때는 인연의 종말을 고하는 장소였으나.

이제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지점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터였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겠노라며, 찬란한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사방을 가득 메운 꽃향기가 그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짜고, 쓰면서도, 달콤한 서막이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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