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요즈음 라인하르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트라의 사절단이 던져 주고 간 골치 아픈 교역 건을 처리하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십여 년간 이어진 북부 산맥의 마물들이 최근 더 날뛰고 있다는 보고서를 받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현재 라인하르트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에르도안은…… 제 거예요!’
동생 애쉴의 첫 연애 상대, 에르도안 트라펠로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골이 딱딱 울렸다. 황궁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라인하르트는 문득 떠오른 고백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힘이 너무 세고 무뚝뚝해서 무섭다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시더라고요. 항상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해도 콩깍지가 쓰인 동생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지 얼굴을 감싸 쥔 채 헤헤거리는 애쉴을 보며, 라인하르트는 애꿎은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게 분명해.’
이따금 애쉴이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한 영식께서 제게 관심이 있으시다는데…….’라며 고민을 털어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 라인하르트는 믿지 않았다. 그런 걸 믿기에 그는 너무 속세에 물든 사람이었다. 틀림없이 팔라디움에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 접근한 것일 거라고, 그러니 애쉴이 상처받기 전에 떼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밀듯 밀려 들어오는 보고서들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는 시간이 나는 족족 애쉴과 에르도안의 데이트 현장을 몰래 따라다녔다.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그걸 빌미 삼아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짜증 날 정도로 에르도안은 애쉴에게 잘했다.
“저것도 맛있어 보이고, 이것도 맛있어 보이는데…….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다 먹어 보면 되죠.”
“아, 그건 너무 많은데-”
“한 입만 먹고 제일 맛있는 걸 먹어요.”
뭘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며 끙끙거리는 애쉴을 위해 비싼 음식점의 모든 메뉴를 다 주문하는가 하면,
“엄청 인기 있는 극이라 들었는데. 오늘은 사람이 없네요.”
“그러게요. 운이 좋네요.”
타인과 부대끼지 말고 편히 보라며. 한참 유행 중인 극이 열리는 극장을 통째로 빌려놓고서는 시치미를 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요?”
“평소랑 똑같이 입었는데…….”
“아. 평소에도 예뻤었지, 참.”
오소소 소름 돋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퍼붓곤 했다.
저 행동들이, 연회에서 만났던 얼음 같은 남자에게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트라펠로 후작가의 후계자가 이중인격자는 아닌지 진지하게 고뇌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제국 유일의 공녀와 소드마스터의 연애는 음유시인들의 류트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의 제국인들은 이를 환영했는데, 왕녀 일리아나의 일이 알려지며 최강의 검이 왕녀와 결혼해 타국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잘 어울리고 보기 좋은데 뭐.”
특정 안건으로 황태자를 찾아갔다가 우연찮게 애쉴과 에르도안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하는 칼리아스를 라인하르트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딜 봐서?”
“형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애쉴과 소꿉친구로 자랐기에. 칼리아스는 사석에서 그를 형이라 칭하곤 했다.
“전부 다.”
라인하르트가 거칠게 대꾸했다. 씩씩거리는 그의 눈치를 살피던 칼리아스는 ‘최고의 신랑감이라 일컬어지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들면 대체 누가 마음에 드는 거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그가 보기에 애쉴과 에르도안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자를 빼앗겨 속이 쓰리긴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을 두둔해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 그와 에르도안은 이트라의 사절단 연회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그 연회에서조차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것이 다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아스는 에르도안이 은근히 불편했다. 그가 싫은 티를 낸 것도,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마주하고 있으면 영 꺼림칙했다. 목줄 풀린 맹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전생에서 황태자 벨키에로트가 겪었던 일을 본 탓에 무의식중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지만. 칼리아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얘기하지그래.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것도 있지만…… 애쉴이 너무 좋아해서.”
라인하르트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한순간에 시작된 감정이니 시간이 지나면 확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어찌 된 게 갈수록 더 타오르는 듯하여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집착 기질까지 보이고 있어 이대로 둬도 괜찮은지 걱정될 수준이었다.
그때였다.
바깥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똑똑, 조급함이 담긴 노크 소리가 뒤따랐다.
“전하, 힐튼입니다.”
칼리아스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힐튼은 그의 직속 보좌관이었고, 라인하르트와의 독대로 잠시 자리를 비운 그 대신 정무 회의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아직 회의가 끝날 시간이 아니거늘.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싶어 그는 즉시 보좌관을 안으로 들였다.
“막 들어온 사안입니다만. 바로 처리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잰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온 힐튼이 황태자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의아하게 보고서를 받아든 칼리아스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그의 눈짓에 옆으로 다가온 라인하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탑에는 알렸나?”
“알리긴 했지만 성분을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라 들었습니다. 약을 만든 연금술사를 찾는 게 더 빠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칼리아스의 청안이 어둡게 침잠했다. 그는 재차 보고서를 읽어 내리다, 사건을 수습하고자 라인하르트와 힐튼에게 제각기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단순 해프닝이 아니었다 이건가.”
홀로 남은 칼리아스가 중얼거렸다.
최근 들어 미혼 귀족 중 사랑에 푹 빠져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연인에게만 집중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들었다. 에르도안과 애쉴의 스캔들이 워낙 유명하여 이를 동경한 이들의 감정놀음인 줄 알았는데.
그의 손에 들린 보고서에는 통칭 ‘사랑의 묘약’이라는, 지속적으로 복용 시 이성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불법 마법 약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 *
“저 에르도안이랑 더 있고 싶은데…… 집까지만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칭얼거리듯 말한 애쉴이 연인의 팔을 꼭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새벽같이 만나 날이 저물 때까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벌써 며칠째 기사단에도 나가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있거늘, 어째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나는 것은 좋으나 해야 할 일들을 손도 대지 못하고 있어 곤란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순순히 애쉴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일을 처리하느라 밤새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애쉴의 요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신 김에 식사하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식사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은데-”
“안 될까요?”
“…….”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눈동자로 물어오는데,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꽉 잡힌 팔에서 느껴지는 체온이나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달한 꽃향기 때문에라도 더욱 그랬다.
밤 열 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에르도안은 수긍했다. 저녁을 일찍 먹어 배가 고픈가 보다 하면서.
때에 맞지 않는 식사 요청에 팔라디움의 주방장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저녁을 준비해 주었다. 팔라디움 공작과 소공작의 부재로 넓은 식탁에 자리한 건 애쉴과 에르도안 두 사람뿐이었다.
“많이 먹어요, 애쉴.”
“에르도안도 많이 드세요.”
짧은 인사를 끝낸 에르도안은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늦은 시간에 무언가를 먹는 건 부담스러웠던지라 먹는 느낌만 낼 요량으로 샐러드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무심코 애쉴 쪽을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접시에 놓인 돼지고기 앞다릿살을 포크로 쿡쿡 찌르기만 하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먹으려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애쉴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접시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같은 표정으로 돼지고기를 쿡쿡 찌르다가, 돌연 비장한 얼굴로 붉은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술을 마시려 하는 건 처음 보았다. 모든 회귀를 통틀어 말이다.
깜짝 놀란 에르도안이 질의했다.
“괜찮겠어요?”
“……그럼요. 저도 성인인걸요.”
이번에도 잠시간의 뜸 들임 끝에 답이 돌아왔다.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에르도안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잔의 가장자리까지 잘름거리는 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마셔보고 싶다는데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훅 끼치는 독한 포도주 냄새에 애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으려는 것 같아서, 에르도안은 반쯤 몸을 일으켜 잔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는 것보다 애쉴이 행동하는 게 더 빨랐다.
꼴깍꼴깍.
애쉴은 주스를 마시듯 순식간에 잔을 비워 버렸고, 에르도안은 그런 그녀를 동요하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연분홍빛 입술에서 텅 빈 잔이 톡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애쉴!”
쿵.
애쉴은 테이블 위로 쓰러져 버렸다.
* * *
“우웅…….”
졸지에 애쉴의 방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과거와 같은 위치에 방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은 에르도안이 헛숨을 내뱉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고용인들도 부르지 못하고 직접 안고 왔던지라. 난감했다.
“애쉴, 애쉴. 이것 좀 놔주세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손등을, 종래에는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나 애쉴은 놓아주긴커녕 게슴츠레한 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마요…… 마…….”
“예?”
“가지 마…….”
향긋한 포도 향이 나는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대고 나서야 그녀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에르도안은 만면에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또 봐요.”
“싫어…….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돼요……?”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애쉴이 취한 음성으로 보챘다. 에르도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왜 안 되는데요……?”
“너무 늦었으니까요. 그만 자야지요.”
“같이 자면 되잖아요…….”
예상치 못한 폭탄 발언에 에르도안이 기겁했다.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얼굴이 뜨겁게 들끓었다.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그제야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아, 정신이 아찔하다. 그는 끊어지려는 이성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음성을 내었다.
“그, 그건 정말 안 돼요.”
“안 돼요?”
“네.”
“정말로?”
“……네.”
“진짜로?”
“…….”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미칠 지경이었다.
새하얗게 변해 가는 머릿속에 힘을 써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싶어서, 그는 옷자락을 쥔 애쉴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자 다음 행동을 눈치챈 애쉴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르도안은 황망히 다독거렸다.
“잠깐 자고 있으면 바로 올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왜 같이 자면 안 돼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그녀의 저의를 파악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날뛰려는 짐승을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그 침묵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애쉴이 울먹였다.
“책에서 그랬단 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같이 자는 거라고.”
바람둥이라 할 때도 그러더니. 대체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것인지.
에르도안은 수도의 서점을 싹 다 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차피 일찍 만날 거면 같이 자고 내일 보면 되잖아요. 왜 안 되는 거예요?”
“……!”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이 일었다.
그녀의 말을 잘못 해석했구나 싶어 에르도안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의했다.
“같이 자면서 뭘 하는지는 책에 나오던가요?”
“그냥 손잡고 잔댔는데…….”
역시나. 제일 중요한 장면은 잘라 버린 모양이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본인만이 알 한숨을 내쉬며 에르도안은 그녀를 타일렀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가 봐야만 한다고. 해가 뜨는 대로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러나 애쉴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흐윽, 흐윽.”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도 애쉴은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성으로는 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끝없이 샘솟는 서운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술을 먹어서일까? 아니, 아니다. 애당초 술을 먹기 전부터 에르도안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외로움에 사무쳐 너무나도 괴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 맨정신으로는 그를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친한 영애들이 술을 마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운이 난다 해서.
하지만-
“눈 감고 딱 100까지만 세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게요.”
곤란함과 다정함이 공존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와 있고 싶긴 했지만 난처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
혼탁해진 이성이 잠시나마 돌아왔다. 몽롱하던 적안이 찰나 선명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애쉴은 찬찬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를 잡기라도 할세라 베갯잇을 꼭 쥐며 눈을 감았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시선을 떼자 그를 향해 거세게 요동치던 마음이 훅 내려앉았다. 채 열을 세지도 못하고,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비로소 그녀에게서 벗어난 에르도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을 닦아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방 밖으로 나가려다,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였다.
‘이런.’
실랑이를 벌이느라 시간이 꽤 지났나 보다.
가벼운 발소리로 미루어보아 애쉴의 전속 시녀 엘린인 듯싶었다. 식당에서 사라진 아가씨를 찾고자 오는 것일 터다.
애쉴이 계속해서 잡아당긴 탓에 구겨진 옷 꼴이 엉망이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 시간에 공녀의 방에 있었다는 걸 들켜서 좋을 일이 없었다.
별수 있나.
그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애쉴이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엘린이 바로 닫아 줄 테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3층 높이인 데다 밤이라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엘린의 노크 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 * *
“어떤 일로 오셨는지…….”
밤을 새운지라 눈 밑이 퀭했다. 피곤해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에르도안은 새벽부터 찾아온 라인하르트를 예의 바르게 맞이했다.
단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어제 애쉴과 헤어진 후 집이 아닌 기사단으로 온 참이었다.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알 만했다. 마찬가지로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던 라인하르트는 혀를 끌끌 차더니, 가지고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애쉴 때문에 고생이 많아.”
“예?”
라인하르트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서류 쪽에 시선을 주었다. 에르도안은 뭔가 하며 느릿느릿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정색하고 눈빛을 달리했다.
“보다시피 추가 조사를 해야 하는데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황태자 전하께서 기사단원들을 데려가도 좋다고 명을 내리셨다. 특별히 추천할 만한 자가 있나?”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뭐?”
전투 업무도 아니고 한낱 상단을 조사하는 일에 소드마스터가 나서겠다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에르도안이 봐야 할 업무가 얼마나 밀려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 라인하르트는 급히 만류했다.
“아니, 자네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고. 평균만 되는 기사 둘 정도만 붙여 줘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안면이 있는 곳이라서. 제가 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아는 사이라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조사관의 역할까지 겸할 터이니 혼자 가겠다고 해서, 라인하르트는 뜻하는 대로 하라 했다. 사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적으로는 뛰어난 인재였기에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었다.
에르도안은 다섯 시간 후 제출해야 할, 중요 군사 개편 건을 버려두고 외출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단장의 방을 나서려다 아차 하며 책상 쪽으로 되돌아왔다.
“언제 퇴궁하십니까?”
“지금 가려던 참이야. 가서 조금이라도 눈 좀 붙이다 와야지.”
피곤한 눈가를 짓누르며 라인하르트가 대꾸했다.
‘그러시다면 죄송하지만-’ 하며 반색한 에르도안은 정자체로 쪽지 하나를 정성 들여 쓴 후 곱게 접었다. 일어나자마자 간다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금방 갈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짜증도 안 나나?”
엉겁결에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게 된 라인하르트가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한 에르도안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들어 애쉴이 이상하던 것, 자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텐데. 괜찮느냐 이 말이야.”
불특정 다수에게 퍼진 사랑의 묘약 부작용으로 제국은 난장판이었다. 상대방의 집착에 지쳐 깨진 커플들이 속출했고, 그중 일부는 범죄 비스무레한 것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아…… 예. 저야 뭐.”
그녀를 살려내고자 흘려보낸 시간만 최소 십여 년이다. 거기에 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자신을 사랑해 줄 거란 확신이 없어 불안했던 게 일 년 전이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애쉴이 제게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게 도리어 기꺼웠다.
그럼에도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직접 나서겠다 한 까닭은. 애쉴의 이상함을 눈치채기도 했거니와 어제 보았던 그녀의 눈물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선 24시간 붙어 있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싸움터에도 데려가야 할 기세라.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면 울지 않게끔이라도 해야 했다.
에르도안은 정말 괜찮다며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팔라디움과 관련된 꿍꿍이가 있어 첫눈에 반한 척 애쉴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겠냐며 씩씩거리던 라인하르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 * *
비르고 상단의 막내 캐시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나 있었다. 사랑의 묘약이니 뭐니, 듣도 보도 못한 약물을 들먹이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게 지겨웠던 탓이다.
처음에는 황실에서 나온 조사관이라 하여 지레 겁먹었었다. 그러나 상단주에게서 ‘저들은 별 볼 일 없는 하급 관리들이니 알아서 쫓아내라’라는 명령을 받은 후로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평민인 그에게 있어 중한 것은 월급을 주는 상단주이지 인생에 하등 관련 없는 황실이 아니었다.
“여기가…… 제대로 찾아왔군.”
한가롭게 카운터를 지키며 하품을 뻑뻑하고 있을 무렵. 한 사람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듯한 흑발에 우아한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그는 묘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아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눈빛인지라 이건 뭔가 싶었다.
하지만 손님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으므로. 캐시는 밝게 웃으며 접대용 인사말을 던졌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랑의 묘약에 관해 묻고 싶은데. 상단주에게 직접.”
이런 제길. 손님이 아니라 조사관이었나 보다. 매번 쌍을 지어 오더니 어쩐 일로 혼자 왔나 싶지만 궁금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미소를 지워 버린 캐시가 따분하게 주절거렸다.
“그 건에 대해서라면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할 말이 있는 건 이쪽이다.”
“예, 예. 여러 번은 보여 드린 것 같지만 다시 보여 드리죠. 자, 보세요. ‘사랑’, ‘묘약’. 그런 단어는 아무 데도 없지요?”
캐시는 건성으로 앞에 놓인 장부를 좌라락 펼쳐 보였다.
남자의 자안에 짜증 비슷한 게 어렸다가, 사라졌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혼잣말했다.
“이놈의 상단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말로 할 때 들어먹질 않아.”
“……?”
첫 방문이 아닌 것 같은 말에 캐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상대방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꼭 힘을 써야 하지- 귀찮게.”
쯧, 혀를 찬 그가 검을 휘둘렀다. 무언가를 겨냥한 것도, 힘을 준 것도 아닌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소름이 돋았다.
캐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와 동시에 보랏빛 섬광이 번개처럼 번쩍이는가 싶더니-
쾅!
그가 앉아 있던 카운터 뒤쪽 반대편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
“다 부숴 버리기 전에 나오라고 해.”
입을 쩍 벌린 채 할 말을 잃은 캐시에게 에르도안이 협박했다.
* * *
「……그리하여, 묘약의 여파는 한 영애가 주최한 티파티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사병 같은 열병을 앓고 있는 영애의 말에 따르면, 이국에서 어렵사리 구해 온 차라며 비르고 상단에서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단에서는 결단코 그런 적이 없다며……. 조사에 굉장히 비협조적…….」
우아하게 다리를 꼰 에르도안은 가지고 온 보고서를 죽 훑었다.
냉대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귀빈실로 안내된 그의 앞에는 값비싼 차와 디저트가 놓여 있었으나. 그는 그것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거 참. 엄청난 분을 몰라뵈어 실례했습니다.”
얼마간의 공백 끝에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띤 체이카가 나타났다. 협박도 협박이지만 소드마스터와의 접점 기회를 주면 나서리라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보고서에서 눈을 뗀 에르도안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사랑의 묘약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은데.”
“어이쿠, 그런 거라면 애석하게도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캐시 녀석이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저희는 그런 물품은 들어 본 적도-”
“추후 1회, 직접 호위해 주지. 제국 내 이동 한정으로.”
“-있는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웃음이 짙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말을 바꾼 체이카가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구미 당기는 제안 앞에서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태도가 한 치도 바뀌지 않은지라. 에르도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1분도 되지 않아 체이카는 헉헉거리며 돌아왔다. 비대한 몸집으로 온갖 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녔는지 먼지투성이가 된 채였다.
그의 손에는 검은 벨벳으로 싸인 얇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체이카는 맞은편에 앉자마자 숨을 고르며 부지런히 책을 뒤적이더니, 한 페이지를 쏙 빼내어 에르도안에게 넘겼다.
“일뤼안 에르시앙. 뛰어난 연금술사이지요. 저희 상단을 통해서만 거래하는지라 척 질 각오로 넘겨드리는 것이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곧이어 증서도 한 장 내밀었다. 추후 에르도안이 말 바꿀 것을 염려하여 호위 약속 건을 문서로 남겨놓으려는 모양이었다.
증서에 유려한 사인을 남긴 에르도안이 질문했다.
“약을 만든 자는 찾았고. 퍼뜨린 자는?”
“일뤼안이 직접 의뢰했습니다. 자세한 건 거기 다 나와 있습지요.”
넝쿨째 굴러들어온 행운에 체이카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1회 한정이었지만 소드마스터의 호위는 단순히 호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눈에 ‘저 상단은 손수 호위를 해 줄 정도로 소드마스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라 비칠 수 있었으며. 다른 상단들의 우위에 손쉽게 올라설 기회이기도 했다.
유능한 연금술사가 아깝긴 했지만 상단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
연금술사와 관련된 서류를 유심히 읽던 에르도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현 사건의 시작인 귀족 영애와의 접선이 이루어지기 전 연금술사가 사랑의 묘약을 풀려던 본래의 목적지들에 집중했다.
플랑드르, 아실라, 제너웨이.
이름만 말하면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한 장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여기서 에르도안은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그와 애쉴이 자주 가는 카페들의 이름이라는 거였다.
우연이라 하기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길의 작은 카페도 포함되어 있던지라.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그러나 지나친 비약이라 여기며 그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연금술사의 거처를 확인한 에르도안은 서류를 접어 품에 고이 넣었다. 그러면서 고압적인 말투로 낮게 말했다.
“위험한 약물을 풀어 제국을 위험에 빠뜨린 죄는 크다. 각오하고 있겠지.”
“아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위험한 약물이라니요. 저희 상단은 늘 제국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는 상단주의 모습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품에 있는 서류는 사본이었고, 그 어디에서도 연금술사와 비르고 상단이 연계되어 있다는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약과 관련된 상단의 사람들도 일이 커지자 위기에 빠진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즉시 내쳤을 것이다. 기사단장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체이카를 처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랬다간 연금술사를 어디로 빼돌릴지 몰랐다. 말은 척을 지니 뭐니 해도 쓸모 있는 패를 뒷일 없이 포기할 만큼 상단주는 머리 나쁜 이가 아니었다.
뭐,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었으면 애당초 혼자 오지도 않았을 터다.
용무를 마친 에르도안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체이카는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깊숙이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 * *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온 것인데. 벌써 정오였다.
약속을 어긴 게 무척이나 마음에 걸려서, 에르도안은 한달음에 팔라디움 공작가로 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그를 탓해야 할 애쉴이 없었다. 여태까지 잠들어 있던 탓이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싶었으나 아무리 깨워봐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엘린의 걱정스러운 말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불길했다. 응접실에서 라인하르트와 조우한 에르도안은 가져온 서류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약의 효능 밑에 개미만 한 글씨로 쓰여 있는 경고 문구를 간신히 발견했다.
「복용자의 이성과 마음에 충돌이 생겼을 때. 즉, 약으로 인해 증폭된 감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누구를 위한 주의 문구인지 모르겠다. 멋대로 먹인 주제에 알아서 피하라는 뜻인가?
에르도안은 이를 갈았다.
“거주 위치는…… 벨포드 숲이군.”
험난하기로 소문난 북부의 숲, 벨포드의 이름이 나오자 라인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것만으로도 보름, 수색하는 것만으로도 열흘은 걸릴 텐데.”
“이틀이면 됩니다.”
그리 말한 에르도안이 테이블 위의 서류를 챙겼다. 그 뜻을 알아차린 라인하르트는 깜짝 놀랐다.
“잠깐. 일은?”
“부단장이 알아서 하겠지요. 이틀간 휴가를 낼 생각입니다.”
애쉴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세상의 뭐가 대수겠는가.
보랏빛 눈동자에 누군가를 향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에르도안은 곧장 칼리아스에게 쳐들어가 휴가 승인을 요청했다. 거기에 벨포드 숲까지 텔레포트 할 수 있는 황실 마법사의 지원도 요구했다. 여럿이면 모를까 한 명 정도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왜 그것들을 원하는지 제대로 된 설명 따윈 없었다. 하지만 칼리아스는 사정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주었다. 그저 애쉴의 일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남자이니 이번에도 그렇겠구나 했을 뿐이다.
* * *
벨포드 숲에 도착한 에르도안은 기운을 넓게 개방했다.
보랏빛 오라가 넘실넘실 퍼져감에 따라 두려움을 느낀 동물들은 꼭꼭 숨어 버렸다. 가끔 겁 없는 마물들이 덤벼들긴 했으나 칼질 한 번에 부질없이 스러졌다.
정확히 반나절이 지난 후. 에르도안은 목표했던 연금술사의 집을 발견했다. 숲의 외곽에 자리한, 답지 않게 튼튼하게 지어진 오두막이었다.
연금술사 또한 살기를 느낀 것인지 집 주변엔 함정들이 그득했다. 하나하나 처리하기가 번거로워 에르도안은 다짜고짜 검기를 날렸다. 물론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리지는 않고 그 주위로만 날렸다.
쾅! 천지가 뒤집히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고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단 두 번 만에 이백여 개의 함정을 모두 파괴한 에르도안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히이익!”
안에 있던 연금술사가 기겁했다.
그는 밤색 머리에 녹갈색 눈동자를 가진, 지나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부러진 안경을 접착력이 있는 무언가로 고정해 착용하고 있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오,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쏟아버리겠다는 듯 남자가 위협적으로 플라스크를 들이밀었다. 반쯤 채워진 액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기포가 퐁퐁 솟아 나오고 있었다.
코웃음 친 에르도안이 검으로 그를 겨냥했다.
“해 봐. 죽고 싶으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실체를 가진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빈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보고만 있어도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결국, 기세에 눌린 연금술사는 슬그머니 플라스크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겁먹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는지 악 받친 소리를 내었다.
“누, 누구냐!”
“그쪽이 멋대로 푼 약의 피해자.”
“……?”
“사랑의 묘약 말이야.”
“사랑의 묘약……? 아, 감정 증폭제 말인가?”
입가를 감싸 쥔 채 사랑의 묘약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연금술사의 시선이 불현듯 묘해졌다.
연금술사는 에르도안의 얼굴과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보랏빛 기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런. 당신은 왜 이렇게 멀쩡해?”
에르도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기실 소란의 원인이 된 티파티에 참여한 애쉴이 나눠준 찻잎을 아끼느라 마시지 않은 덕분이었는데. 사실대로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왜 안 마셨냐며 따지는 것 같은 어이없는 질문에 불쾌해졌다.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상황도 잊었는지. 학자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연금술사는 에르도안을 유심히 살폈다.
“이러면 일이 틀어지잖아. 그쪽을 위해 준비했던 거였는데-”
“뭐?”
차가운 검날이 목덜미에 닿자 정신이 들었다. 실수했다는 표정을 한 연금술사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에르도안은 표피에 핏방울이 비칠 정도로 검에 힘을 주었다.
“말해.”
“으으……. 그러니까-”
머뭇거리던 연금술사는 끝내 협박에 굴복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트라의 왕녀, 일리아나의 청혼에서 시작되었다.
‘뭐? 소드마스터가 타국으로 갈 수도 있다고?’
부족한 재료를 구입하러 오랜만에 마을로 나온 연금술사 일뤼안은 신문을 보고 기함했다.
기사는 단순히 ‘소드마스터가 타국의 여인과 결혼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가정을 내놓은 것이었으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지라 일뤼안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닌 말로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의 꾀임에 홀랑 넘어가 귀화한 후 쳐들어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하며 매사를 과하게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도 큰일 났구나 싶었지만.
신이 도우셨는지 소드마스터와 공녀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리고 여기서 일리안은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제국의 여인과 결혼하면 되는 거잖아.’
마침 공녀와 연애 중이라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일뤼안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일 없이 결혼까지 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몇 달간의 연구 끝에 감정을 증폭시키는 약을 만들었다.
곧바로 거래하던 상단을 통해 기사에서 읽은, 두 사람이 자주 간다는 카페에 풀려 했으나. 일이 꼬여 잘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공녀와 친하다는 어떤 영애의 가문에 넣어달라 한 후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도했다.
그 결과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돌았군.”
너무 황당하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라더니.
한참 간의 침묵 끝에 에르도안은 짧은 소감을 내비쳤다.
일뤼안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다 그쪽 때문이잖아! 그쪽이 그렇게 강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이 멸망한다 하더라도 그녀와 헤어지는 일은 없어. 해독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목덜미를 짓누르는 차가운 감촉을 무시할 만큼 일뤼안은 간이 크지 못했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뒷걸음질 치더니, 정리되지 않은 책상과 서랍을 허둥지둥 뒤져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여, 여기.”
“다른 건?”
“이, 이게 다인데.”
그가 건넨 약병에는 알약이 들어 있었다.
이걸 정신 잃은 애쉴에게 먹일 수는 없는지라. 에르도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물에는 잘 녹나?”
“아니, 물에 닿으면 효과가 떨어져. 그래서 알약째로 삼켜야 하는…… 왜, 왜?”
효과가 떨어진다니. 녹여서 먹이기도 글렀다. 짜증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정신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깨우지?”
“정신을 잃어? ……설마, 공녀님?”
눈빛이 더욱 싸늘해지는 것을 보니 정답인 모양이었다. 어깨를 움츠린 연금술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그건 쉬우면서도 어려운데…….”
상처가 나기 시작했는지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기겁한 일뤼안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쓰러지기 전 그 사람이 원했던 걸 들어주면 됩니다!”
“……!”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에르도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 *
“방법이 정말 그것뿐이라는 거지.”
“예.”
“애쉴이 원한 게 그거였고?”
“……예.”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려 상대방을 볼 면목이 없었다. 에르도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심산해진 라인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인지 흑심에서 오는 거짓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외교 건으로 아버지인 팔라디움 공작이 부재중이었기에 이번 일은 그가 결정해야 했다.
“기다리면 깨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단,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잘-”
눈치 없이 끼어들던 연금술사가 뒷말을 삼켰다. 황궁의 마법사가 역 텔레포트를 시전해 준 터라 에르도안이 일뤼안을 수도로 데려오기까지는 딱 이틀이 걸렸다.
라인하르트의 눈짓에 일뤼안은 대기하고 있던 황실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취지는 좋았으나 엄청난 일을 벌인 건 틀림없는지라. 죗값을 받을 시간이었다.
끌려가면서도 그는 제국을 위해 한 일이었다며, 선처를 바란다며 끊임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하-”
사방이 조용해지자 라인하르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애쉴을 깨우기 위해선 허락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허튼짓을 하는지 감시하고 싶었으나 성인식까지 치른 여동생의 방에 남자 둘이 들어가는 것도 웃긴 일이었고, 더군다나 애쉴이 그걸 원했다는데-
“가문과 명예를 걸고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에르도안이 단호하게 읊었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말이었으나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은 붉었던지라. 라인하르트는 빈말이나마 신뢰한다는 단어를 뱉지 못했다.
* * *
마침내 밤이 되었다.
모든 일을 버려둔 채 몇 시간이나 고민하던 라인하르트는 결론을 내렸다. 에르도안의 말대로 하되 문밖에 의자를 두고 그가 앉아 있기로. 거기에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즉시 쳐들어갈 테니 헛수작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
달칵, 그녀의 방에 들어온 에르도안은 문을 닫았다.
애쉴은 이틀 전 그가 보았을 때처럼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시한부이던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오싹했으나 괜찮다며 억지로 털어 버렸다.
에르도안은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레 올라갔다. 그러고는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누웠다. 애쉴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에는 다정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쌕쌕, 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가슴께를 덮은 이불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포근하고도 평화로운 모습에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든 연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예전 생각이 났다. 잔잔하게 미소 지은 그가 몸을 가까이 붙였다.
“기억나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에르도안은 그리 운을 뗐다. 애쉴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른하게 속삭였다.
“숨어다닐 때, 항상 이렇게 잠들었었는데.”
그때처럼 어여쁜 코와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고른 숨소리가 나고 있었다. 에르도안은 그것을 가만 보다가,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아직도 가끔 생각해요. 이 모든 게 허상은 아닐까. 당신이 죽었다는 절망 속에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
“아니라는 걸 아는데, 불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있으니까…… 이젠 그게 다 무슨 상관일까 싶네요.”
환상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대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
그거 하나면 충분해요.
에르도안은 경애를 담아 은발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부디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했다.
* *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소란스레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흐아암. 작게 하품 한 애쉴은 눈을 감은 채 몸을 굴려 이불을 말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 꿈을 꾸었는데, 잘 기억 나지 않았다.
단둘만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달콤한 말을 속삭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장난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되새겨보아도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뿐 기억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끝내 떠올리는 걸 포기한 그녀는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과 시선을 마주쳤다.
“……!”
침대가 작았다면 그대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허둥거리던 여자의 루비 같은 적안이 휘둥그레했다. 그 속에 있던 남자가 방긋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잤어요?”
“왜, 왜, 왜 여기-”
“기억 안 나요?”
같이 자자고 했잖아요. 에르도안이 짓궂게 말했다.
“제, 제가 언제요!”
애석하게도 술기운을 빌려 했던 말이라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놀랍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꾸고 있던 꿈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게 왜인지 부끄러워서, 애쉴은 몸에 똘똘 말려 있던 이불 속으로 폭 숨어 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 행동을 후회해야 했는데, 그녀가 나오지 못하도록 에르도안이 입구를 막아 버린 탓이다.
“잘못했어요. 꺼내 주세요오-”
“싫은데요. 조금만 더 힘주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해 봐요.”
결국, 그들이 나오길 기다리다 지친 라인하르트가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녀는 에르도안의 장난을 받아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