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맑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뭉실뭉실 떠다니는 어느 가을날의 오후.
황실 기사단 연무장의 나무 그늘 아래, 에르도안은 눈을 감고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칠흑 같은 머리칼이 가벼이 부유한다. 땀으로 젖어 있던 이마가 서서히 식어 간다.
작디작은 평화이나 심히 힘들게 얻은 것인지라. 자신을 감싼 소소한 행복들에 가슴 벅차 하며 에르도안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올 때가 되었는데.’
웨이센의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가 되었음에도. 그는 하루도 훈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항시 남들보다 일찍 나오고 늦게 돌아갔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쉬는 날 없이 검을 잡았다.
그러던 그가, 아직 훈련 시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토록 여유를 부리는 까닭은-
“에르도안!”
연회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푹 빠졌기 때문임을, 기사단의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에르도안과 애쉴이 결혼하기 전.
두 사람이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 * *
“어제는 에시트 후작 영애와 다과회를 가졌어요.”
수도에서 한창 유행하는, 반은 묶고 반은 풀어 내려뜨린 머리 스타일을 한 애쉴이 열심히 재잘거렸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머리칼을 만져 보고 싶다는, 그리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구를 참아내고자 양손을 꽉 맞잡고 있어야 했다.
“다들 궁금해해요. 영식…… 과 어떻게 그렇게 친해진 거냐고.”
무심코 에르도안을 영식이라 칭한 애쉴이 얼굴을 붉혔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뱅뱅 꼬는 것이 멋쩍으면서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에르도안이라 불러 달라 수없이 들었음에도. 마음은 ‘에르도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머리로는 ‘영식’ 혹은 ‘경’이라 인지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에르도안 또한 이를 알고 있기에 그간 서운한 티를 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약간, 아주 약간 내색했는데, 왜냐하면-
“그냥 말하면 안 될까요?”
“그건 좀, 아직 부끄러워서…….”
타인들이 그녀와 자신을 한낱 ‘친한 사이’로만 여기는 게 싫어서였다.
두 사람이 재회한 날 밤.
에르도안은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했다. 애쉴은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를 바랐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무슨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한가 싶었지만. 공녀와 소드마스터의 연애란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이 자명하였으므로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공녀님, 오늘따라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부디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애쉴은, 예쁘장한 외모도 외모거니와 현 제국에서 제일 위치가 높은 여인인지라 인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연회건 다과회건 그녀와 잘되어 보려는 남자들의 추파가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에르도안에게도 추파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오직 애쉴 하나뿐이었고, 그 누가 들이댄다 한들 절대로 흔들릴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애쉴은?
에르도안은 불안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애쉴이 제가 싫어졌다며. 다른 남자가 좋아졌다며 훌훌 떠나버릴까 봐. 아니면 교제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자며 물러버릴까 봐.
겉으로 표를 내진 않았지만, 이따금 그녀가 타인의 눈에 비치는 그들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마다 에르도안은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다. 그만 사실을 알리는 게 어떻겠냐고.
그때마다 애쉴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끄러워서…….’라는 답변으로 그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아, 저. 오늘은 일찍 가 봐야 해요. 새 드레스를 맞춰야 한다고 오라버니께서 일찍 들어오라 하셨거든요.”
새 드레스.
에르도안은 그것이 어디에 쓰일지를 바로 알았다.
며칠 후 있을 이트라의 사절단을 위한 연회. 그곳에 참석할 때 입으려는 것이리라.
라인하르트의 동행 이유가 애쉴에게 변변치 못한 남자들이 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안다. 그러니 같이 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부티크에 같이 가면…… 아닙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감정이 비치는 얼굴을 보자마자 즉시 말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훈련할 게 남아서. 드레스, 기대하고 있을게요.”
“네.”
살포시 웃은 애쉴이 몸을 일으켰다.
어여쁜 은발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가 싶더니 진하던 꽃향기가 멀어져갔다. 점차 작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에르도안은, 뒤늦게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저에게 꽂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수상쩍다는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심란한 마음에 인상을 쓰며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우며 눈을 돌렸으나.
의미심장한 표정들이 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공녀님과 교제하시는 건가?’
에르도안은 애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안다고 자신했었는데, 운명이 바뀌고 수명이 늘어난 후에는 도저히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정말 부끄러워서라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왜 보여 주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으면서 말로 하기는 꺼려 하는 것인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며칠 후.
뭐가 그리도 준비할 게 많은지. 애쉴은 바쁘다는 이유로 기사단에 통 방문하지 않았다.
우울했으나 그녀의 신분상 이트라의 사신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되는 일인지라. 그 감정을 감추고자 에르도안은 대련에 매진했다.
“악, 단장님, 살살, 악!”
말이 대련이지 실질적으로는 일방적인 매질에 가깝긴 했지만.
“다음.”
맞는 것도 실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며 목검으로 기사 하나를 울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은 에르도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던 기사들은 흠칫 몸을 떨 뿐 누구 하나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소드마스터와 대련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긴 했으나 그보다 더 귀한 건 목숨인지라. 심기 불편한 단장의 앞에 나섰다간 기어나가다시피 하는 저 기사와 같은 꼴이 될 게 뻔했다.
“안 나오나?”
땀에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린 남자의 자안이 사납게 번뜩였다. 나오지 않겠다면 직접 호명하겠다는 의미였다.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고, 그 모습에 에르도안은 더욱 인상을 썼다.
그때였다.
“특종, 특종이야!”
저만치 멀찍이서 분위기를 모르는 기사 하나가 부지런히 달려왔다. 장기 휴가를 다녀온 탓에 에르도안의 소드마스터 축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래서 애쉴과 에르도안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자였다.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숨 가쁘게 말했다.
“공녀님과 황태자 전하께서 곧 약혼하실 거래!”
순간, 차가운 물을 뿌린 듯 대련의 열기로 타오르던 연무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엄청난 소식을 전한 기사 외의 모든 사람은 에르도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회귀 후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었던 살기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보랏빛 기운을 피해 기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심지어 소식을 전한 기사마저 까닭을 모름에도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에르도안이 황궁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자 단체로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차마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목검은 두고 가셔야죠!”
“아니, 그렇다고 진검을 가져가시진 말고요!”
“살인은 안 됩니다!”
* * *
황태자 칼리아스의 정원은 황궁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꽃과 동물을 사랑하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이라서였다.
오늘도 그는 정원 한쪽의 티 테이블에 홀로 앉아 향긋한 장미잎으로 우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트라에서 올 사절단과 관련된 일들은 모두 처리했다. 날씨도 좋다. 늘 그래왔듯 평화로운 하루가 될 거라 생각했다.
비록 마탑에 가둬 둔 황실의 수치, 벨키에로트가 시간이 이상하게 되돌아갔다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있는 일인 만큼 그의 평화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소한 일상은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에게 처참히 산산 조각났다.
“전하!”
예의를 차려 부른 게 에르도안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불순분자를 막고자 세워놓은 호위들도 분노한 소드마스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에르도안은 칼리아스의 앞까지 당도했다. 주인의 의지에 따른 보랏빛 기운이 전신에 흉흉하게 감돌았다.
“애쉴과, 약혼을 한다, 하셨습니까?”
에르도안은 얼어붙은 칼리아스를 향해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물었다. 이를 악문 탓에 짓씹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뭐?”
뜬금없는 말에 칼리아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릴 무렵,
“칼리아스-!”
벼락같은 고성과 함께 라인하르트가 나타났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격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칼리아스는 느닷없이 떨어진 날벼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라인하르트는 이를 득득 갈면서도 쫓아온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네가 애쉴과 약혼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진짜냐?”
어찌나 화가 났는지. 그는 에르도안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격의를 차리지 않았다. 칼리아스 또한 정신이 없었던지라 친우를 대하듯 허물없이 더듬거렸다.
“뭐, 뭐?”
“정말입니까?”
정말이라고 했다간 죽여 버릴 듯한 눈빛으로 에르도안이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다른 이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라인하르트가 실수를 깨닫고 흠칫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그게-”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인지라. 기세에 눌린 칼리아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부정의 답이 재깍 나오지 않음에 폭발한 라인하르트는 한 자, 한 자 씹어 삼키듯 으르렁거렸다.
“미치…… 셨습니까, 전하? 감히 누구와, 약혼을, 하시겠다고요?”
꽈드드득. 철제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에르도안의 짓이었다.
칼리아스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힐끔거리다, 모조리 다 말해 줄 테니 제발 듣고 난 다음에 판단해 달라고. 부탁이니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 * *
“진짜 약혼을 하려던 게 아니야.”
굳어 있던 시종들이 의자를 가져오고, 차와 다과를 날라왔다. 그러나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양옆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시선에 칼리아스는 오직 테이블만을 바라보며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번 사절단의 대표로 누가 오는지 알고 있겠지.”
“일리아나 왕녀님 아닙니까?”
일리아나 쉬르 이트라.
칼리아스의 사촌이기도 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두뇌로 유명한 이트라의 3왕녀였다.
비록 위의 왕자들에게 밀려 계승권이 없다고는 하나 사절단의 대표로 올 정도이니. 이트라 국왕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칼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그렇다면 왜 이트라가 굳이 그 애를 보냈는지도 알고 있나?”
“…….”
두 사람은 침묵했다. 기실 이트라 사절단의 방문은 갑작스레 정해진 일이었기에. 연회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들의 속내를 파악할 여력까진 충분치 않았다.
칼리아스는 끄응,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나와의 약혼을 추진하기 위해서라 하더군.”
“……!”
“소공작도, 경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최근 이트라에서 어머니를 통해 제국에 간섭하려는 사항들이 적지가 않아. 어머니께서는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하시지만……. 나는 그만 이 관계를 끊어내고 싶다.”
“그래서 기껏 생각하신 게 애쉴을 이용하는 거였습니까?”
따지듯 쏘아붙이는 에르도안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라인하르트는 왜 동생을 ‘공녀’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고, 칼리아스는 거침없는 언사에 기가 꺾인 눈빛이었다.
“아니, 그냥 회의 시간에 안건으로만 나왔었지. 그게 바깥으로 퍼질 줄은 나도 몰랐-”
“어떤 개자식이 그딴 걸 퍼뜨린 겁니까?”
제일 크게 분노해야 하는 건 팔라디움인데. 이상하게도 그들과 연관 없는 소드마스터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퍼뜨린 자가 누군지 알았다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 개자식을 잡아 올 기세였다.
최근 사교계에서 암암리에 퍼지는 소문이 사실인가 하며, 라인하르트가 살짝 운을 떼었다.
“끼어들어 미안하네만. 경이 그걸 왜 신경 쓰는 거지?”
“그야-”
무의식중에 사실대로 말하려던 에르도안이 멈칫했다. 아직은 밝히고 싶지 않다던 그녀를 떠올린 것이다.
여기서 말한다 한들 듣는 이는 두 명뿐이고, 어디 가서 말할 위인들도 아니긴 했지만.
에르도안은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절반만 말했다.
“-제가 그녀를 연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쾅!
찌그러진 테이블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찻잔들이 기어코 내용물을 쏟아냈다. 손도 대지 않은 비싼 쿠키들이 축축이 젖어 들었으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라인하르트가 에르도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막 이곳에 왔을 때처럼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안 좋은 쪽으로.
“그게 경이었나?”
“애쉴이 제 얘기를 했습니까?”
“누구 마음대로 애쉴이지?”
라인하르트가 거칠게 따졌으나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저와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말했다는 것에 설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을 피해 슬그머니 의자를 뺀 칼리아스는, 또라이들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불길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 * *
칼리아스는 두 사람이 돌아가자마자 공녀와의 약혼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자신은 그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분기탱천하며 황태자 궁으로 달려가던 라인하르트와 에르도안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지라.
누군가에겐 안타깝게도, 약혼하려 했으나 소드마스터와 팔라디움의 위세에 밀려 취소했다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이트라에서 사절단이 오기 하루 전날.
어두운 얼굴로 연무장에 나타난 애쉴이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에르도안은 절반의 기대감과 절반의 긴장감을 가진 채 조심스레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저희가 그…… 만나고 있다는 거요.”
차마 교제라는 적나라한 단어를 쓸 수는 없었는지. ‘만난다’라 에둘러 표현하면서도 애쉴은 귓불을 붉게 물들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에르도안은 꼭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보단 괜찮을 것 같아요.”
현재 애쉴은 소드마스터와 황태자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마성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안 좋은 내용도 있긴 했지만 평소 그녀의 품행상 좋은 내용이 훨씬 더 많았으므로.
에르도안은 짓궂게 그녀를 놀렸다.
“드디어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걷어차실 준비가 되셨나 보군요.”
“그런 거 아니에요.”
소꿉친구로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는데 어떻게 연애 감정 같은 게 생기겠냐며 애쉴이 단호히 부정했다.
에르도안은 벨키에로트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과거와의 괴리감을 다시금 실감해야 했다.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애쉴은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은 사람처럼 땅을 슥슥 파헤쳤다. 무슨 일이시냐 물었으나 ‘아니다, 아니다’라고만 하던 그녀는,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녀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에 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에르도안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뜻으로 허리를 쭉 폈다.
운을 떼고 나서도 애쉴은 쉬이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양 검지를 톡톡 치며 그의 눈치를 보다가, 후하후하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나더니,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혼자 끙끙거리던 걸 꺼냈다.
“제 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에르도안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인지라. 애쉴은 제가 뭐라 하는지도 모르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분홍빛 입술 사이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쉴새 없이 새어 나왔다.
“그, 처음 만나자마자 교제하자 하신 까닭이 궁금해서요. 싫은 건 아니에요! 저도 좋아요. 좋은데- 책에서 봤거든요. 만나자마자 교제하자 하는 사람들은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다고-”
“…….”
“에, 에르도안이 바람둥이라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그냥, 그냥 그러니까- 저는, 저는 에르도안이 참 좋아요. 항상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설레고, 기분 좋고, 행복하고- 하지만, 하지만 책에서 그러니까-”
“…….”
“그러니까…… 그냥…… 궁금했어요. 죄송해요…….”
점점 이상해지는 에르도안의 표정에 애쉴이 자신 없이 말을 맺었다. 손가락으로 땅을 문지르며 힐끗힐끗 곁눈질하는 것이 ‘괜히 말을 꺼냈나’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아, 그래서 교제하는 걸 얘기하지 말자 했던 건가.
바람둥이인가 해서. 불안해서?
에르도안은 억울해졌다. 바람둥이라니. 그녀에겐 과거의 기억이 없으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하필 다른 것도 아닌 바람둥이라니…….
“애쉴.”
에르도안은 짐짓 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를 담은 애쉴의 붉은 눈동자가 겁먹은 토끼처럼 파르르 떨렸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어요.”
남들에게 알리겠다 했으니 이젠 티를 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에르도안은 애쉴을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그들을 훔쳐보던 기사들이 경악하는 게 느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죠.”
“…….”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진 못했다.
그러나 어투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더불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거짓이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의 체향을 느끼며, 애쉴은 가만히 안겨들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은발을 어루만지던 에르도안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겐 당신뿐이에요.”
“…….”
“그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제 마음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 거예요.”
위쪽에서 불어 드는 따뜻한 숨결에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흡사 제가 짓고 있는 표정을 들키기라도 할세라 애쉴은 그의 가슴께에 붉어진 얼굴을 대었다. 에르도안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받아주었다.
이제 애쉴의 마음도 바뀌었겠다, 이트라의 사절단이 돌아가는 대로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리면 되겠구나 싶었지만-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게 된다.
* * *
그간 맑았던 날들이 무색하게. 이트라의 사절단이 도착하자마자 수도에는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졌다.
이에 연회에 참석하려던 귀족 몇은 급증한 물로 다리가 끊겨 먼 길을 돌아와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팔라디움 또한 그랬다.
최소한의 예의만 차려 대륙 최고의 무력으로서 사절단들을 맞이한 후.
에르도안은 그 무엇에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거렸다.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사절단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연인은 언제쯤 도착하나 하는 심정으로, 그는 계속해서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아까 뵌 후 또 뵙네요.”
그런 그에게 화려한 적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만개한 장미 같은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짧게 곁눈질한 에르도안이 딱딱하게 수긍했다.
“예.”
살갑게 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다. 무안할 법도 하건만. 여자는 오히려 더욱 진한 미소를 띠며 한 발 더 가까워져 왔다.
“다시 제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이트라의 3왕녀, 일리아나 쉬르 이트라라 합니다.”
비로소 에르도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채 3초를 넘기지 못하고, 이내 무심한 태도로 눈길을 거두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일리아나는 죽 말을 이었다.
“제국이라 그런가, 확실히 웨이센의 연회장은 무척이나 호화롭네요. 이트라의 것만 보다 여길 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경께서는 이트라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렇군요. 웨이센보다야 못하지만 이트라도 타국에 비하면 호화로운 편이랍니다. 게다가 저희는 큰 축제가 있을 때에는 마법사들을 불러 환상 마법을 걸어 놓기도 하지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니 꼭 한번 와 보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마법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뇨.”
“역시나. 검을 쓰는 분이라 마법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신가 보네요. 그렇다면-”
맥을 끊어버리는 대화 기법에 지칠 만도 했으나. 일리아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그녀를 따라와 소드마스터와 안면을 트려 했던 이트라의 귀족들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르도안의 얼굴엔 짜증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자리를 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애쉴이 오면 바로 에스코트해 줄 수 있는 곳이라서였다.
어느덧, 잔잔하던 음악이 바뀌었다. 본격적으로 춤이 시작됨을 알리는 빠른 박자의 곡이었다.
방긋 웃은 일리아나가 부드러이 한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어요?”
“다른 파트너를 찾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어머, 매정하셔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도통 가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애쉴에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다못한 에르도안이 불퉁하게 말했다.
“칼리아스 황태자 전하라면 저쪽에 계십니다.”
“알아요.”
“……?”
그제야 에르도안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칼리아스에게 듣기로, 그녀가 웨이센에 온 건 황태자에게 약혼을 제의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의 곁에 가 당사자와 측근들을 구워삶아야 하지 않겠는가.
의아함 서린 보랏빛 눈동자가 이트라의 왕녀에게 닿았다. 그러자 일리아나는 이제까지 보여왔던 가식 섞인 웃음 대신 진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경에게 관심이 있어요.”
“……!”
“아무리 황후의 자리가 좋다지만, 그동안 닦아온 기반을 버려가면서까지 웨이센에 오고 싶지는 않거든요. 모든 걸 감수할 만큼 황태자 전하가 남자로서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벌을 유혹하는 붉은 장미처럼, 일리아나는 은근한 어조로 에르도안을 꼬드겼다.
“하지만 경은 다르죠. 대륙에서 최고의 무를 지닌 데다 황제처럼 버릴 수 없는 작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
“연인이 없으시다 들었는데. 어때요? 한번 진지하게 만나 보는 건. 저, 이래 봬도 꽤 인기 있는 편이랍니다.”
어지간한 남자는 눈웃음만으로도 홀려 버릴 정도의 미인이 유혹하는데 넘어오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거기다 그 미인이 외모뿐 아니라 부와 권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기까지 하다면?
더 생각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연인이 있다 한들 버리고 올 게 뻔했다.
이제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과연 소문처럼 상대하기 까다로운 남자다 싶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데 안 넘어오고 배기겠나 싶었다.
하지만 일리아나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
에르도안이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간 고개를 뻣뻣이 세우던 자들도 대놓고 들이대면 지체 없이 체면을 벗어던졌었거늘. 이런 반응을 보인 건 눈앞의 남자가 처음이었다.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리아나는 민망함도, 상대방의 무례함도 잊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석같던 남자의 표정이 눈 녹듯 풀리더니 사르르 미소짓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는 막 연회장에 들어온 여자에게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다정스레 속닥거렸다.
“날이 많이 궂던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분명 소드마스터에게 애인은 없다 들었는데.
저 화기애애한 기류는 대체?
설산의 눈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은발에 새빨간 눈동자. 두서없이 돌아다니던 웨이센의 귀족들이 그녀와 함께 등장한 이들에게 몰려가는 것으로 보아 소문으로 듣던 팔라디움 공작가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공녀인가?’
흐응. 분위기로 보아 애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닌 데다 겨우 예측 정도로 포기하기엔 에르도안이 심히 아까웠다.
일리아나는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물이 불어서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왔어요. 원래는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튼튼하던 곳이었는데.”
허리까지 구불구불하게 늘어뜨린 은발에는 작은 수정들을 꿰어놓았다. 귀와 목에는 외형과 잘 어울리는 은과 루비로 이루어진 장신구를 걸쳤다. 분홍색의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사르락거리며 귀여운 미를 더욱 부각시켰다.
오늘따라 너무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늦게 온 게 미안한지 그녀가 뭐라 뭐라 말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나운 눈빛을 한 라인하르트가 동생에게서 떨어지라며 뇌까리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봄꽃처럼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 몇 개를 톡톡 두드려 닦아 주었다.
“앗, 뭐 묻었어요?”
“물이 좀 있어서요. 아직도 많이 오나 보네요.”
“돌아갈 때가 걱정이에요.”
휴. 애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도안은 진심으로 트라펠로 가에 머물러도 된다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요?”
“그냥…….”
예쁘게 보이고 싶던 당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애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러지 않아도 항상 예쁜데. 고생했어요.”
“……!”
애쉴은 이제 목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멀리서 보면 어디서부터가 목이고 어디서부터가 드레스인지 구분 못 할 지경이었다.
어서 빨리 교제하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 생각하며, 에르도안은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겸 춤을 신청하려는 의미였다.
그러나 웬 방해꾼이 끼어드는 탓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거둬들여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성질 같아선 무시하고 가 버리고 싶었으나. 애쉴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허튼소리를 했다간 바로 끊어버릴 거라 다짐하며 에르도안은 두 여인의 대화에 집중했다.
“일리아나 쉬르 이트라예요.”
“왕녀 님이셨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귀족다운 우아함이 넘치는 몸짓으로 애쉴이 인사했다.
딱 봐도 순해 보이는 모습에 다루기 쉽겠다 추측한 일리아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죄송하지만 공녀님. 혹시 트라펠로 경과 어떤 사이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무례하다 싶을 정도의 직설적인 질문에 놀란 애쉴이 더듬거렸다. 에르도안도 찰나 놀란 탓에 왕녀를 저지할 때를 놓쳤다. 일리아나는 양해를 구하듯, 그러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설명했다.
“경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듣자 하니 경은 아직 애인이 없으시다 하던데.”
“아…….”
“보아하니, 두 분께서 아주 친한 사이이신 것 같아서 말이죠.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짝 있는 사람을 건들고 싶진 않으니까.”
주위에서 헉, 숨을 참는 소리가 났다.
이트라의 왕녀가 소드마스터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연회장을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끝내 정적을 가져왔다.
꿀꺽-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 속에서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시선은 세 사람에게 쏠렸다. 에르도안은 뭐라 말하려다 얼굴을 확 구겼다. 왕녀가 저렇게 나온 이상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간 국가 대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서였다.
제게 쏟아진 수백 개의 눈동자에 당황한 애쉴의 얼굴이 벌게져 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긴 한데 입술만 달달 떠는 것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과연 여린 성격이라고. 여기서 조금 더 부추기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다고 짐작한 일리아나가 쐐기를 박고자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 사이도 아닌가 보죠? 그럼-”
“아, 안 돼요!”
애쉴이 급히 말을 끊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크게 심호흡을 하는가 싶더니, 떨리는 음성을 내었다.
“에르도안은…… 에르도안은……!”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자신과 만나고 있다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앞에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다 발언권을 빼앗긴 일리아나가 입을 열려 하자, 초조한 마음에 에르도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자신의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악쓰듯 외쳤다.
“제 거예요!”
제 거예요- 제 거예요- 제 거예요-
조용해진 홀 안에 그녀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 * *
“아- 정말. 진작 알았으면 이런 헛고생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름답게 꾸며진 황태자의 정원 안쪽.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일리아나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앞쪽에 앉아 있던 칼리아스는 혀를 쯧쯧 찼다.
“남의 국력이나 빼가려 한 주제에 말은 잘하지.”
“뭐든 기회가 있을 때 잡아둬라. 이트라의 가르침 아니겠어?”
이트라 출신 황후 탓에 자주 보진 못했을지언정 교류는 잦았던지라. 시종들을 모두 물린 두 사람은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일리아나가 칼리아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 온 사이인데 새삼 사내의 매력 같은 걸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일리아나의 취향은 칼리아스처럼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바로 포기했네. 좀 더 들이댈 줄 알았는데.”
툭 던진 말에 빙글거리던 일리아나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끼어들어 봤자 안 될 것 같아서.”
“네가?”
칼리아스는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번 목표한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독종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애쉴과의 약혼이라는, 팔라디움과 애쉴에겐 참으로 미안한 수단까지 언급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술을 마시듯 찻잔을 한 번에 들이켠 일리아나가 후,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 표정 봤어?”
“그 남자?”
“소드마스터 말이야. 공녀가 제 거라고 했을 때.”
아니,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탓에 보지 못했다. 칼리아스가 고개를 젓자 일리아나는 그때의 일을 상기하며 낄낄거렸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어. 난 살면서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그 정도였어?”
“그래. 그런 사람한테 들이대 봤자 나만 손해야. 시간 아까워.”
아쉬웠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릴 만큼 일리아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타겟을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공녀로 잡았어야 했나 봐.’ 하며 농담조로 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얼굴로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너, 공녀랑 약혼한다 하지 않았어?”
“헛소문이야.”
“아아, 그렇게 된 거로군.”
이해했다는 듯 일리아나가 빙긋 웃었다.
“고백은 해 봤어?”
“……시끄러워.”
“으휴, 어디 가서 이트라의 핏줄이라 하지 마라. 부끄럽다.”
오랜 짝사랑에 실패한 사촌을 일리아나가 대놓고 비웃었다. 칼리아스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괜히 말했다가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도라도 해 봤어야지.”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 게 느껴지는데 해 봤자…… 됐다.”
이미 끝난 일. 왈가왈부해서 무엇할까.
기실 애쉴에게 고백할 생각도 있긴 했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일정이 잡힌 소드마스터 탄생 축하 연회를 끝낸 다음에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애쉴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퍼져 꺼내지도 못했지만.
“네가 공녀랑 잘됐으면 나도 소드마스터랑 잘됐을 거 아니야.”
못마땅하다는 양 일리아나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칼리아스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이 조금만 일찍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질투심이 샘솟긴 하지만 애쉴과 에르도안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운명이 맺어 준 인연이라는 게, 바로 그들을 두고 나온 단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 * *
“왔어요, 주인?”
“하으으-”
애쉴의 얼굴이 빨개졌다.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으나 옆에 앉아 있던 에르도안이 붙잡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애쉴이 어디 가지 못하도록 단단한 팔뚝으로 휘감고서는,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왜요, 저는 당신의 것이라면서요.”
“아니, 그건…….”
소리 없이 벙긋거리기만 할 뿐 분홍빛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쉴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르도안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이 팔을 타고 전해지고, 달콤한 체향이 아련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부끄러움으로 몸부림치던 애쉴이 떨리는 음성을 내었다.
“제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라?”
“…….”
그냥 에르도안과 교제하고 있는 건 자기라고, 그러니까 왕녀님께서는 그러시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어쩌다 그런 말이 튀어 나가 버렸을까.
낯뜨거워서, 도저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머스크향이 나는 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현실을 회피해 버렸다. 심장이 귀에도 달려 있는지, 아니면 그의 심장 소리인지는 몰라도 빠르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에 에르도안은 짙은 갈증을 느꼈다. 애써 그 느낌을 내리누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전,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
“그렇다면 서운한데.”
서운하다는 말에 깜짝 놀란 애쉴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말했잖아요. 제 인생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라고.”
“…….”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 말해 주어서 기뻤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는 짐짓 우울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너무 슬퍼서, 어느 날 휙 쓰러져 버릴지도-”
“안 돼요!”
순진한 애쉴은 에르도안의 연기에 깜빡 넘어갔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르르 눈꼬리를 접으며 은은하게 웃는 모습에 비로소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에르도안은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귓가에 붉은 입술을 가져다 대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조곤조곤 속삭였다.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어요?”
“…….”
“저는 당신의 것이라고. 그때처럼 큰 소리로.”
심장이 간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쉴은 싫다는 의미로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에 꽉 붙잡혀 버렸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와락 안으며 에르도안이 속삭였다.
“작게라도 좋아요.”
“…….”
“듣고 싶어요. 당신의 목소리로, 제가 당신의 것이라는 걸 인지하게 해 주세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만 만지작거릴 뿐. 애쉴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에르도안은 그런 그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심장 박동은 빨라지기만 할 뿐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 붙어 있는 이 상황에서는 절대로 차분해지지 못할 것 같아서, 애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실바람이 불면 지워질 것 같은 음성으로 속닥거렸다.
“제 거예요.”
부끄럽던 마음과는 다르게.
막상 입 밖으로 내자 욕심이 났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런 날이 오기까지 굉장히 힘들고 괴로웠던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녀는 에르도안의 셔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크게, 상대방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말했다.
“제 거예요. 에르도안은 제 거예요.”
“네. 저는 당신 거예요.”
깃털로 간질이듯 몽글거리던 가슴에 환희가 차올랐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은발에 얼굴을 묻고 행복해했다. 그러다 뒤로 살짝 밀어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다 홀연히 멈췄다.
“키스해도 돼요?”
“……!”
실은, 그녀를 만나고 기억을 되찾았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다가갔다가 거부감을 줄까 그러지 못했다. 하물며 애쉴이 자신과의 관계를 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다 하여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자신을 제 것이라 칭한 지금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커다래진 눈만 깜빡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에르도안이 말을 받았다.
점차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대답하지 않아도 할 거니까.”
그 후에 이어진 건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에르도안은 갈급하게, 그러나 애쉴이 놀라지는 않게 상냥히 리드했다. 그녀의 입술을 살짝 열고 그 안을 마음껏 탐했다.
생전 처음 해 본 거였는데. 발끝이 찌릿거리고 아랫배가 뭉근한 것으로 보아 그가 정말 잘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짧지 않은 키스 후 애쉴이 할딱거리며 물었다.
“왜, 왜 이렇게 잘해요?”
다른 사람이랑 해 본 거예요? 그런 의미의 질문이었다.
은근한 손길로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칼을,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던 에르도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연습했거든요.”
“……네?”
“지금의 당신이랑 하려고, 아주 많이.”
과거의 당신과 말이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는 재차 입을 맞췄다. 실수하지 않으려 거미줄 같은 은발을 긴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것 같던 갈증을 채워 나갔다.
이제까지의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녀와 함께할 날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