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19/22)

18. 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곧 황실에서 연락이 올 거야.”

“감사합니다.”

누명이 벗겨진 트라펠로 가문이 후작위에 봉해질 거라는 소식에도 에르도안은 시큰둥했다. 그 소식을 전해 준 라인하르트 또한 크게 기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한 라인하르트는 바로 앞쪽에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았다. 본래 푸른색이었던 호수는 노을빛을 머금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바로 왔어야 했지만, 황태자 책봉식이 더 급해서 말이지.”

“벨키에로트는 어찌 되었습니까?”

“똑같지. 자네가 그런 거라며 난리를 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에르도안 쪽으로 몸을 기울인 라인하르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자네가 한 게 아닌가?”

“아닙니다. 저였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깊게 가라앉아 있던 자안에 잠시나마 살기가 스쳤다.

“그래. 누가 알았겠나. 그놈이 정말 광증이 있었을 줄은.”

라인하르트는 몸을 바로 하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중얼거리면서.

“애쉴은 좀 어떤가?”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직 기억을 찾지도 못했고요. 주치의 말로는 불가능할 거라 하긴 하는데…….”

에르도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찬가지가 된 라인하르트가 말을 받았다.

“계속 치료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간만에 얼굴이나 보러 왔으니 함께 가세.”

“예.”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뒤로하며 두 사람은 팔라디움의 별장으로 돌아왔다.

* * *

그날, 에르도안이 황태자 궁으로 쳐들어갔던 날을 기점으로 웨이센은 크게 바뀌었다.

황태자가 교체된 것이다.

소문만 무성할 뿐 잠적을 감췄던 공녀가 황태자 궁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도 온갖 실험을 당했다는 흔적이 여실히 남은 채로. 여기까지만 해도 큰 문제인데, 이 사단을 벌인 벨키에로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까지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그는 소드마스터가 나라를 전복시킬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망상을 펼쳤으며, 그를 모함하여 반역자로 만들고 제국의 군대를 귀족원과의 협의 없이 운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녀를 인질 삼아 팔라디움 공작가를 손에 넣으려던 것과 황후의 나라이자 우방국인 이트라에 사람을 보내 이간질하려던 것도 드러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폐위감인 것을.

황태자 궁 비밀의 공간에서 소드마스터와 맞붙었던 그날. 벨키에로트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행을 벌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정말 미치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제 사지를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아무리 신성력을 퍼부어도 사라진 신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소드마스터가 한 짓이라며 악을 퍼부었으나 그 사건을 목격한 기사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기절한 공녀를 방패 삼아 소드마스터를 농락하던 황태자가 갑자기 게거품을 물더니 ‘행동만 바꾸면 되겠군.’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직접 제 신체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신체가 부족한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 사지가 멀쩡하다면 모를까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어진 인간을 위해 소드마스터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진실 공방을 위한 재판이 열렸으나 벨키에로트의 기사들은 앞다투어 에르도안의 결백을 증명했다. 재판을 주최한 귀족원 또한 별다른 이견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팔라디움의 입김도 있었거니와. 황족이 죽었다면 모를까 살아 있기는 한 상태이니 굳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벨키에로트는 폐위되었다. 그를 따르던 자들 중 그 누구도 반발하는 이가 없었다.

황궁 밖으로 퇴출당하여야 했으나 신체가 부족한 황족이란 황실의 수치와도 같은 것. 때문에 바깥으로 내보내지는 못하고 황궁의 북쪽 끝에 있는 마탑에 보호라는 명목으로 유폐되었다. 이따금 절규 어린 음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른다는 소문을 마지막으로 그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혔다.

공석이 된 황태자 자리를 차지한 건 당연하게도 2황자 칼리아스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소드마스터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 거기에 황실의 치부가 될 수도 있었던 공녀 사건을 해결해 준 것과 더불어 앞으로를 기대한다는 의미로 후작위를 수여했다.

“공작 각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말도 하지 마라. 나도 오늘 간신히 도망쳐 나온 거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황태자 책봉식을 두 번이나 치르는 팔라디움은 자신과 아버지가 처음일 거라며 라인하르트가 진저리를 쳤다. 에르도안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궁에서 가끔 마주칠 때 빼고는 통 뵙지를 못했지. 퇴궁하신 후에도 집무실에서 나오시질 못하시고. 아버지께서도 애쉴을 많이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어머, 오셨어요!”

때마침 애쉴의 방에서 나온 엘린이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그녀의 표정이 워낙 밝아 보여서 에르도안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말을 걸었다.

“일어났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몸을 뒤척이시는 게 곧 일어나실 것 같아요. 빨리 들어가 보세요!”

아가씨가 먹을 만한 걸 준비해 오겠다며 엘린이 후다닥 뛰어갔다. 에르도안과 라인하르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애쉴의 방에 들어갔다.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은 건 은은한 꽃향기였고, 그다음은 나풀거리는 커튼이었다.

가볍게 환기를 시킬 생각이었을까.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따뜻한 실바람이 커튼과 탁자 위의 크리스탈 꽃병에 담긴 달루아, 그리고 그 옆의 침대에 누워 깊게 잠들어 있는 여자의 반짝이는 은발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애쉴.”

하루종일 붙어 있다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인사한 에르도안이 애쉴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낯뜨거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눈을 돌리고 있던 라인하르트의 시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저건…… 그때 신관을 부르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신전에 문의했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목에 감긴 여태껏 핏물이 배어 나오는 붕대를 보며 우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나마 여기서 칼날이 더 깊게 들어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하더군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니 아프지는 않을 거라 하지만-”

“우웅…….”

바로 그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애쉴에게서 흘러나왔다. 두 남자는 숨 쉬는 소리조차 죽여 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졸음기 어린 적안이 실금 같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가 싶더니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라인하르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고, 에르도안은 애쉴 쪽에서 라인하르트가 잘 보이지 않도록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정스레 말을 붙였다.

“잘 잤어요?”

“아…… 네에…….”

수줍게 웃은 애쉴이 일으켜 달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에르도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가 제 몸에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오늘, 손님이 한 분 오셨어요.”

“손님……?”

“예전에도 몇 번 본 분이에요. 절대로 위험한 분이 아닌데. 어때요, 한 번 만나 볼래요?”

“……같이 있어 줄 거예요?”

“그럼요.”

애쉴은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에르도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나 도저히 익숙해질 수는 없는 반응에 라인하르트는 쓰게 웃었고, 에르도안은 파르르 떠는 그녀를 다독거렸다.

“괜찮아요, 애쉴. 괜찮아요.”

“진짜…… 진짜 괜찮아요……?”

애쉴은 에르도안이 괜찮다며 수십 번도 더 말하고 나서야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애쉴의 시선에 맞춰 쪼그려 앉은 상태였다.

“안녕, 애쉴.”

“아, 안녕하세요…….”

힘겹게 인사를 한 애쉴이 에르도안의 뒤로 숨었다. 라인하르트는 쓰린 속을 달래가며 억지로 웃었다.

“나는 라인하르트야.”

그녀에게 기억이 안 나냐고 묻는다던가, 혹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다짜고짜 말을 붙이는 건 금기였다. 때문에 라인하르트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자기소개를 했다.

애쉴은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을 입속으로 몇 번 굴려보다 얼굴을 붉혔다.

“저는 애쉴이에요…….”

“그래, 애쉴. 반가워. 옆에 앉아도 될까?”

애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물의 부작용으로 백치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주치의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뿐이랴. 성인 남자들을 보면 자지러질 듯 놀라며 비명을 지르곤 했다. 벨키에로트와 그 수하들이 한 짓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에르도안만은 예외였다.

우연인 건지, 아니면 기적인 건지.

애쉴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아니고 무서운 곳에 있을 때 도와주었던 사람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엘린이나 다른 고용인들이 말을 걸어올 때만 짧게 짧게 대답하는 것과 달리 에르도안에게만은 먼저 다가가곤 했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사랑한다는 말도 하긴 했다. ‘사랑한다’라는 뜻을 알고 하는 게 아니라 에르도안이 했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만.

엘린이 가져와 준 다과를 들며 세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잠깐의 평화는 애쉴이 하품하며 눈을 비비는 것으로 끝이 났다.

“졸려…….”

에르도안이 따로 언질 주진 않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애쉴의 남은 수명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갈수록 길어지는 수면 시간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일어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자겠다는 동생을 보며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중에 또 올게. 그땐 꼭 알아봐 줘야 해?”

“네에…….”

가냘프게 웃은 애쉴이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르르 눈이 감기나 싶더니 쌕쌕거리며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방 안을 메운 규칙적인 숨소리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삼켰다.

* * *

찬란한 봄볕이 지상에 내려앉고, 향긋한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일찍 일어난 에르도안은 살며시 애쉴의 방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정돈된 꽃가지가 들려 있었고, 머리와 옷에는 미처 털어내지 못한 꽃잎들이 붙어 있었다. 가장 어여쁜 것을 구하려 새벽부터 돌아다녔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에게서는 진한 머스크 향 너머 은은한 풀 내음이 군데군데 묻어 나왔다.

혹여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산들바람에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린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아…… 오셨어요.”

“……?”

보랏빛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환청인가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애쉴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몽롱해 보이던 평소와는 달리 선명한 시선으로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그러나 그녀가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란 에르도안은 그 미묘한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허둥지둥 애쉴에게 다가갔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조금 전에요. 얼마 안 됐어요.”

“잠드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애쉴이 눈꼬리를 접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는 적안에 졸음기 따위는 없었다. 그제야 에르도안은 그녀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애쉴……?”

“꽃냄새가 나요.”

그에게서 나는 꽃향기를 맡던 애쉴이 별안간 폭 안겨들었다. 에르도안은 얼떨결에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가 들고 있던 가지에서 떨어진 꽃잎 몇 개가 은색 머리카락을 어여쁘게 꾸몄다.

“벌써 봄인가요?”

“정신이…… 들어요?”

에르도안이 목멘 소리로 더듬거렸다. 애쉴은 대답하는 대신 그에게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옷자락에 뺨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듯 소곤거렸다.

“처음인 것 같아요. 누군가와 함께 맞는 봄은.”

“…….”

“고마워요. 내 곁에 있어 줘서.”

“……애쉴.”

크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애쉴은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속살거렸다.

“나가 보고 싶어요. 같이 가 줄 수 있나요?”

처음이었다. 먼저 제의하지 않았는데도 밖에 나가겠다 한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인데, 전혀 좋아할 수가 없어서. 그녀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

“물론입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 * *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애쉴과 에르도안은 밖으로 나왔다.

힘들 거라는 에르도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애쉴은 그의 손을 잡은 채 제 발로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에르도안은 초조한 얼굴로 잡아 주려 움찔거렸다. 그러나 애쉴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요. 저기 좀 보세요. 저 하얀 꽃, 너무 예쁘지 않나요?”

그들이 있는 곳은 별장 뒤쪽의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작은 언덕이었다. 제국 내 꽃으로 가장 유명한 장소이자 수도가 아닌 이곳에서 애쉴이 요양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계절에 맞지 않게 온몸을 꽁꽁 여민 여자가 달음박질하려 했다. 그러나 채 몇 발자국을 가지 못하고 발이 꼬여 풀썩 쓰러졌다. 놀란 에르도안이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바닥을 크게 구를 뻔했으나 그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말갛게 웃기만 했다. 꼭, 이번 생에 미처 짓지 못한 웃음을 한꺼번에 몰아서 짓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옷에는 온통 풀물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해진 손에는 에르도안이 꺾어 준 각양각색의 꽃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었는지 앞서 걷던 애쉴이 갑자기 비틀거리자 에르도안이 황급히 그녀를 뒤에서 부축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저기로 가요.”

바들거리는 손으로 그녀가 가리킨 곳은 언덕 중앙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그늘이었다. 곤란한 표정이 된 에르도안은 그녀를 설득하고자 재차 입을 열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아니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 에르도안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알고 있는 걸까.

오늘이 그녀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겠…… 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애쉴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아름드리나무 그늘로 향했다. 곧 공작 각하와 소공작께서 오실 텐데,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면서.

나올 때만 해도 동쪽에 있던 해는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토록 오래 깨어 있는 건 몇 달 만인지라. 에르도안은 초조한 눈빛으로 애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은 애쉴은 손을 조물거리며 꺾어 온 꽃들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보지 말아요!”

삐죽 입을 내민 애쉴이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옆에 앉아 있던 에르도안은 처연하게 웃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남몰래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겠지.

“이상하다고 놀리면 안 돼요?”

오래 지나지 않아 만들던 걸 완성했는지. 몸을 원래대로 돌린 애쉴이 뒤쪽에 숨긴 걸 한 번,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며 부끄럽다는 듯 창백한 얼굴을 붉혔다.

에르도안은 다정하게 답했다.

“너무 예뻐서 놀라는 일은 있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으으……. 이거, 선물이에요.”

새빨개진 얼굴로 수줍어하던 그녀가 건넨 것은 봄꽃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화관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닮은 제비꽃이 주가 된.

할 말을 잃은 에르도안이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애쉴은 어리광을 부리듯 그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고, 그가 정말 머리에 쓰자 예쁘다며 어린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에르도안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시야를 가득 메운 눈물 탓에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린 미소를 지은 애쉴이 지나가는 바람에 속삭이듯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

에르도안은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턱에 맺혀 있던 눈물이 화관을 만들고 남은 꽃잎에 아침 이슬처럼 아롱아롱 맺혔다.

애쉴은 찬찬히 눈을 깜빡이며 에르도안에게 몸을 기댔다. 가느다란 은발이 그의 가슴께로 사르르 떨어져 내렸다.

“있지요, 에르도안.”

잠을 자듯 나른히 눈을 감으며 애쉴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흔들림 없는 나지막한 그 말이 심장을 옥죄었다.

에르도안은 숨 쉬는 걸 잊었다. 영혼 없이 그가 한 말을 따라 하던 이제까지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감정이 느껴지는 어투에 섧게 울던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애쉴……?”

“사랑해요, 에르도안. 사랑해요……. 하지만 당신은 저를 사랑해서는 안 돼요. 사랑하지 마세요.”

에르도안은 그녀가 유언을 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제게 기댄 여자를 꽉 붙잡고 경련했다.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희미한 미소를 띠며 애쉴이 말을 이었다.

“만일 하나,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또다시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면…….”

“…….”

“그때는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있나요?”

고개를 든 애쉴이 활짝 웃으며 그를 보았다. 장미를 닮은 적안에 물기가 한 아름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기억해 내 볼게요. 당신을 밀어내지 않을게요.”

“……애쉴.”

그녀를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애쉴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대답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인지는 그녀만이 알 터였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이기적으로 굴라 하셨으니까…….”

자세를 바꾸어 그와 마주 보는 형태를 하며 애쉴이 길게 말꼬리를 늘였다. 점차 느려지는 말투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에르도안은 힘없이 쓰러지려는 그녀를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제가 있을 수 있는 시간 동안만…… 딱 1년만…….”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동그랗던 적안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애쉴은 마지막 힘을 모아 문장을 완성했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피를 토해내는 듯한 심정으로 답한 에르도안이 입을 맞췄다.

짜고, 쓰면서도, 달콤한 마지막 키스였다.

* * *

애쉴리아 팔라디움이 정말 모든 것을 떠올렸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연인과의 긴 키스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잠들어 버린 탓이다.

그녀는 곧장 별장으로 옮겨졌고,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깨어났다.

그 누구도 소리 지르거나 울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던 그들은 가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긴 했으나 밝게 웃으며 애쉴을 어르고 다독였다.

애쉴은 행복했다. 비록 그들을 기억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녀는 아버지인 팔라디움 공작과 오라비인 라인하르트, 연인인 에르도안. 그리고 그 외 곁을 지키고 있던 엘린 등에게 달콤한 작별 인사를 받았다. 이전 생에서 그녀가 원하던 대로 외롭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받았다.

“저, 너무 졸려요.”

“……좋은 꿈 꾸세요. 잠꾸러기 아가씨.”

“에르도안도 안녕히 주무세요…….”

눈물을 삼킨 연인의 인사를 진혼곡 삼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행복한 죽음이었다.

* * *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눈물이 날 만큼 맑고도 아름다운 날이었다.

고위 귀족의 죽음을 추모하는 종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

애쉴의 시신은 프리하의 옆에 묻혔다. 본래라면 수도에 있는 고위 귀족들 전용 묘지에 묻혔어야 했으나 수도를 떠나고 싶어 하던 의지와 더불어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어 하던 소망이 합쳐져 프레디아에 가게 되었다.

프레디아는 소문이 느린 시골이었고, 때문에 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에르도안을 반역자라 생각하고 배척하려 들었다. 그러나 함께 장례를 치르러 간 이들이 누명을 벗겨 준 덕분에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에르도안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에르도안은 충분히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괜찮다 하며 넘어갔다.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스스럼없는 사이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애쉴의 장례식이 끝난 후.

라인하르트와 공작은 핏줄을 잃은 슬픔을 뒤로한 채 마을을 떠났다. 슬픔을 연이어 곱씹어보기엔 황태자가 바뀌고 세상이 바뀜에 따라 그들을 찾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이다. 1년 전 주치의에게 애쉴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들은 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탓에 추스르는 게 빠른 것도 있었다.

에르도안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애쉴과의 추억이 깃든 프리하의 집에 머물렀다.

애쉴이 누워 있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홀로 숲에서 노란 꽃 달루아를 찾아 헤매다가,

그녀와 같이 걷던 길을 혼자 걸으며 묘지로 향하고.

그게 전부였다. 그의 일상은.

그의 반복된 회귀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달도 뜨지 않은 어느 깜깜한 밤이었다.

에르도안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화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존 마법을 걸어 놨으면서도 혹여 시들기라도 할까 보고 또 보던 것이었다.

“죽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단테가 말을 걸었다. 황태자의 궁에서 본 후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어찌 들으면 기분 나쁠 만한 말이었으나 에르도안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애쉴이 사라진 후 그에게 펼쳐진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은 사람처럼 건조하게 굴었다.

“아직 제게 볼일이 남았습니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다만.”

“……무슨 뜻입니까?”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았나.”

원하는 대로라. 그에게 원하는 바를 말한 적이 있었던가? 찬찬히 생각해 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애쉴이 죽음으로써 그의 영혼 또한 죽어 버린 탓이다.

단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말이다.”

아. 그제야 에르도안은 작은 숨소리를 냈다.

“역시 당신이 한 짓이었군요.”

마지막 결전의 날, 애쉴이 쓰러진 직후.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에르도안은 미쳐 날뛰었다. 그러나 애쉴은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궁지에 몰린 벨키에로트가 그녀를 진심으로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단테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왜 끼어들었을까.

아니,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에르도안은 도저히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결과가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진정 애쉴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버리지 못한 지독한 미련이 가슴속에서 질척거렸다. 불길하니 검은 무언가가 연기처럼 일렁였다.

그래서 그는 감사 인사가 아닌 다른 말을 했다.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습니까.”

“인간들 사이에서 죽음은 도피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들 하더군.”

단테가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래서 조금 바꾸어 봤지.”

그의 말대로였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벨키에로트는 성대한 예우를 받으며 황족의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한때 입안의 혀처럼 굴던 이들이 한꺼번에 등을 돌리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평생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며 비참하게 인생을 이어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에르도안은 자신이었다면 죽였을 거란 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원하시는 대로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용건을 마쳤으면 이만 가 달라는 식으로 에르도안이 말을 마쳤다. 그러나 단테는 연기로 변해 사라지는 대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물건을 확인한 에르도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건…….”

“모래시계. 네 눈엔 보이지 않겠군.”

단테는 본연의 모습인 황금빛으로 돌아온 모래시계를 들어 올렸다. 에르도안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 금색의 얇은 목걸이로 보일 뿐이었다.

에르도안이 흉흉하게 물었다.

“그게 왜 당신에게 있습니까?”

“주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어서 귀속이 풀렸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이라도 파헤친 거냐는 뜻으로 던진 질문이었으나 단테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인상을 더욱 구긴 에르도안이 재차 질의하려 했으나 단테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한 가지만 묻지. 너는 지금 네 상황에 만족하나?”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그럼 남겨둘 필요 없겠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은 단테가 제 힘을 모래시계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센 기운의 물결에 당황한 에르도안이 급히 물었다.

“잠시만요. 뭘 남겨두지 않겠다는 겁니까?”

“네 기억.”

“미쳤습니까?”

눈 깜짝할 새 그에게서 목걸이를 빼앗아간 에르도안이 으르렁거렸다.

“뭘 남겨두지 않겠다고요?”

“만족하지 않는다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약을 먹고 그녀와 관련된 기억이 지워졌던 때를 떠올리며 에르도안이 분노했다.

“두 번 다시 잊지 않을 겁니다. 제 숨이 끊어진다 한들 영원히요!”

“……이렇게 되면 조금 골치 아파지는데.”

드물게 뜸을 들이던 단테가 쯧, 혀를 찼다.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 진심인가?”

에르도안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했다. 잘못 말했다가는 날뛸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본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단테는 그를 지나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단테는 에르도안을 무표정하게 올려다보았다. 앉으라는 건가 싶어서, 에르도안은 부글거리는 속을 감추며 단테가 앉은 곳의 반대쪽 끝에 가 앉았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목걸이를 있는 힘껏 움켜쥐면서.

단테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미리 말했던 대로 모래시계를 파괴할 생각이다.”

시간을 돌리는 아티펙트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겨우 하나를 파괴한다 해서 앞으로도 시간이 뒤틀리는 일이 영구히 없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지만 가능성 정도는 줄어들 거라며 단테가 뒷말을 덧붙였다.

“한계까지 도달하도록 내 힘을 불어넣으면 폭주하다 알아서 사라질 테지. 이런 식으로 회귀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고자 파괴하는 거니까.”

모래시계를 또 폭주시키겠다는 말에 흠칫한 에르도안이 얼굴을 구겼다. 한순간이나마 그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눈 녹듯 사라져 버린 탓이다.

“설마 또 도우라거나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소원이 바뀌었으니까.”

나른함이 담긴 녹색 눈동자가 상대방을 훑었다.

“시간은 한 번만 돌아갈 테지.”

순간 에르도안은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시간이…… 돌아갈 거라고?

“……지금 그게 무슨?”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얼어붙어 있던 에르도안이 보일 듯 말듯 입술을 달싹였다. 마법으로 빛의 구를 만들어 천장에 띄운 단테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옅게 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남기겠다 하니 설명해 주지 않을 수도 없고…….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라.”

단테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하얀 종이뭉치와 핀 여러 개가 나타나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우아한 손길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걸 현재라 해 보지. 시간을 돌리는 아티펙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과거를 뜯어내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로 덮는 거다.”

그는 들고 있던 종이를 검게 물들인 후, 한가운데에 붉은 점을 찍었다.

“이 점이 회귀 시점이라 한다면.”

그러고는 새로운 하얀색 종이를 꺼내어 붉은 점을 기준으로 검은색 종이를 반쯤 덮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이전 시간을 덮어두는 거지. 이 시간대 위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워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저 가려진 검은 것들이 모여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겁니까?”

“그래, 맞아.”

느른히 웃은 단테가 허공에 떠다니던 핀을 집어 들었다.

“보다시피 검은색과 흰색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때문에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분리가 되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아티펙트들은 이런 식으로 시간을 고정시킨다.”

그가 붉은 점 위에 핀을 꽂았다.

“한 번 되돌린 시간 이전으로는 갈 수 없는 게 이 때문이다. 고정축 위에 새로운 시간이 덮이면 이전 고정축이 어디 있었는지 관리하기가 힘들어지니 규칙이라 하며 막아놓은 거지. 고정축을 잘못 다뤘다간 다른 시간들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하게 변할 수도 있으니.”

에르도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왜 이런 것을 설명해 주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단테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핀이 꽂힌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문제를 내지. 핀이 없어지면 이 종이들은 어떻게 될 것 같나?”

“두 장으로 분리되겠죠.”

“그렇다면 핀 역할을 하는 아티펙트가 사라지면 시간들이 어떻게 될 것 같나?”

단박에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이해한 에르도안이 얼굴을 굳혔다.

“……마찬가지로 분리되겠죠.”

고정축이 사라진다면.

애쉴이 시간을 돌렸던 일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베이스가 되는 검은 종이, 즉 원래 시간에 벌어졌던 일들이 돌아온다는 소리였다. 바꿔 말하자면…….

“모래시계를 파괴하면 저는 원래 운명대로 서부 지역에서 죽겠군요.”

남의 죽음을 언급하듯 에르도안이 차분히 정리했다.

“그럼, 그녀는 살아나게 되는 겁니까?”

“그래. 모래시계를 사용했던 이력 자체가 지워지는 거니 수명도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

“하…….”

에르도안이 웃음인지 한탄인지 모를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앞쪽으로 몸을 숙이며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뭉그러진 발음이 손 틈새로 흘러나왔다.

“다행…… 이군요…….”

저를 살리려 했던 그녀의 노력이 수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에르도안은 안도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끔찍한 독을 삼킨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

“모래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돌리지 못할 테고…… 그러면 당장은 고통스러울지언정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겠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

흔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건가. 저 없이도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하…….”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 제가 있기를 바랐고,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항상 제가 되기를 바랐다.

“좋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어서. 그녀가 살아난다는데도 웃음 지을 수가 없어서.

“애쉴…….”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을 볼 수 있다면.

저 때문에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떻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 어떠한 일이라도 할 텐데.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치울 텐데…….

“부탁드립니다. 한 시간, 아니 일 분이라도 좋습니다.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에르도안이 심장을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그런 그를 무심한 눈길로 보던 단테가 고저 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시간이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

“돌아갈 거다. 1년 전으로. 정확히 1년 전은 아니겠군. 반복해서 시간을 돌리기 전에 한 번 사용한 흔적이 있어. 어림잡아 그때쯤으로 가겠지.”

고통스럽게 울던 남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 눈빛에 단테가 귀찮다는 태도로 눈을 게슴츠레 떴다.

“폭주한 모래시계는 주인의 마지막 바람에 맞춰 움직인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1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딱 1년 전으로 돌아가야 할 테지만. 나 때문에 고정축이 다 뽑혀나갈 테니…….”

단테는 핀으로 이어져 있던 종이 중 위쪽의 하얀 종이를 분리하듯 위로 들어 올렸다. 고정시킨 핀 탓에 분리되는 대신 팽팽하게 잡아당겨 지기만 했으나, 그가 핀을 뽑는 순간 종이에 주고 있던 힘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종이가 확 들어 올려졌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돌리는 힘과 고정하고자 하는 힘이 충돌하면서 조금 더 돌아가겠지.”

“그, 그럼…… 저도 죽지 않는다는……?”

“죽은 상태는 아니겠지. 미래가 어찌 될지는 나야 모르지만.”

단테는 시간에 꽂힌 고정축들은 그 고정축을 만든 아티펙트의 주인에게 귀속되는 거라며 애쉴 이전의 신녀들이 돌렸던 시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흥분한 에르도안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금 당장 파괴해 주십시오!”

“설명 다 안 끝났다.”

에르도안이 입을 다물었다. 단테는 성가시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네가 아는 과거는 아닐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했지. 내 힘을 직접 받은 일들은 시간이 돌아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그가 손가락을 두 개 접었다.

“너와, 황태자.”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에르도안이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벨키에로트는 과거로 돌아가도 불구일 거라는…….”

“그래. 정확히는 몸이 정상이었던 시간이 기록에서 지워질 거다. 이건 문자 그대로 ‘지워지는’ 것이라 역사가 바뀔 수도 있지.”

순간, 에르도안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몸이 불구인 자는 황태자가 될 수 없다.

몸이 정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그는…….

“벨키에로트가 황태자였던 역사가…… 그가 황태자라서 만들어졌던 역사가 바뀌겠군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단테는 머리 아프다는 얼굴로 쯧쯧거렸다.

“그놈도 멍청한 놈이지. 그냥 있었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을.”

“……역시, 그녀를 위한 거였군요.”

넋을 놓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에르도안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지?”

“벨키에로트를 불구로 만든 것 말입니다.”

단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아무런 예고 없이 그가 들고 있던 목걸이를 잡아챘다. 에르도안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물건을 빠르게 움켜쥐었다.

“……그래.”

답을 꼭 들어야겠다며 결연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에 침묵하던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도 전에 말했던 편애의 일종입니까?”

“그렇다고 해 두지.”

단테가 제 쪽으로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놓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죽어가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그 기준이 궁금한 겁니다.”

피곤하다는 듯 단테가 느른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살짝 눈을 내리깔며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이야기해 주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그것이 순리다. 나는 순리를 벗어난 것들에게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나를 만들 수 있는 자들은 더욱 애정한다.”

저는 시간이지만 시간이 아니기에 시간 그 자체가 신녀를 사랑하는 이유와는 차이가 약간 있을 거라며 단테가 덧붙였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순리이니까. 그러나 한 번의 탄생에 여러 번의 죽음이 반복되는 건 순리가 아니지. 하지만 어긋난 순리를 고치기엔 너무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끼어들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끼어들면 그야말로 재앙이 될 터이니.”

“그럼 이번에는-”

“황태자 한 사람의 행동만 바꾸면 되었지. 불찰이었다. 그 누구의 운명도 바뀌지 않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그런 소원을 빌 줄은.”

덕분에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뀔 거라며 단테가 씁쓸히 말했다.

불현듯, 항상 궁금했으나 묻지 못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테와 처음 만났던 때를 곰곰이 되새겨보던 에르도안이 조용히 질문했다.

“제 소원을 들어주신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단테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소원대로 제가 쉽게 죽지 않도록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주신 것 아닙니까?”

“아니. 네가 빈 소원이 그것이었으니 그렇게 들어줬을 뿐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단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큭큭거렸다.

“왜 그녀가 아닌 네게 먼저 찾아갔는지 알고 있나?”

“……?”

“어떻게든 너를 살리고야 말겠다는 집념 때문이었다. 보통 그런 집념은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이라. 복수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겠다 같은……. 그래서 네가 시간을 돌리고 있는 줄 알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아티펙트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라서. 그리고…….”

찰나 단테는 고민했다. 그는 에르도안에게 거짓말을 한 게 있었다.

반복된 회귀는 인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녀야 특수한 경우이니 괜찮다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신을 놓고, 미치다, 모든 기억을 잊고, 끝내 자기 자신이 누군지 조차 잊게 된다. 사라진 시간과 융합되어 임의의 인격체가 되고, 과거와 미래의 구분 없이 떠돌아다니게 된다.

단테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벨키에로트를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애쉴이 그의 손에 죽고, 에르도안이 또다시 회귀를 반복했더라면. 그러다 반복된 회귀에 미쳐서, 임의의 인격체가 되어 버렸더라면.

그 임의의 인격체는 무엇이었을까.

단테는 왠지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

기실 그가 에르도안에게 주었던 가면은 인지 불능 마법 정도만을 걸어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쓴 에르도안은 자신과 똑같은 외형으로 변했다. 하여 단테는 거짓말을 했다. 외형 변경 마법까지도 같이 걸어놓았다고.

무언가의 외형은 영혼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에르도안의 회귀의 끝은, 아마도…….

‘답지 않군.’

쓸데없는 상념에서 빠져나온 단테가 목걸이를 당겼다. 에르도안의 손에서 목걸이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아니다. 네 소원을 들어주면 회귀가 멈출 줄 알았다. 그것뿐이다.”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을 마친 단테가 힘을 끌어올렸다. 전신에 은은한 검은빛이 감도는가 싶더니 목걸이를 든 손으로 너울너울 모여들었다.

상극의 힘을 감지한 모래시계가 황금색으로 빛나며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밀어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잡아먹혔다.

“참, 진짜 목적을 잊고 있었군.”

두 개의 빛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찬란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단테가 피식 웃었다.

“없었던 일들이 된다는 건 당연하지만 기억에서도 사라진다는 뜻이다.”

“……! 아까 했던 말이랑 다르지 않습니까!”

“넌 조금 다르지. 내 힘에 직접 노출이 되었으니. 본래라면 기억을 지워야 하겠지만 네가 거부했으니 지우지는 않으마.”

시야를 가득 메운 눈부신 빛들로 단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임을 알았다.

“다만, 이건 기록에 남는 회귀인지라. 신녀도 아닌 네가 기억을 가지고 회귀했다간 미래에게 들켜 처벌받을 수도 있으니 네 기억을 잠시 가려놓도록 하겠다. ……를 만족하면 알아서 떠오르도록.”

“뭐라고요? 아니, 기억도 없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조건을 들은 에르도안이 기함했다. 그의 항의를 무시하며 단테는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두 번 다시 보지 말자꾸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검은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황홀한 빛이 온 세상을 메웠다.

에르도안은 정신을 잃었다.

* * *

그리하여, 시간은 마지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으로.

애쉴이 아직 열아홉이던 시절로.

에필로그– 어느 찬란한 여름날에

한 사람의 존재는 자의이건 타의이건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던 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마지막 회귀에서 불구가 된 벨키에로트는 황태자의 직위를 잃었다. 정확히는 황태자였던 기록 자체가 소멸되었다. 마찬가지로 그와 연계되어 있던 미래 또한 소멸되었으며. 신녀들의 예언 또한 크게 바뀌게 되었다.

제국의 마지막 신녀, 프리하는 딸의 불행한 미래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팔라디움 공작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황태자가 벨키에로트가 아닐 때.

애쉴의 나이 열아홉이자, 아직 에르도안을 만나기 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진짜 결말이다.

* * *

“제가 꼭 가야 할까요?”

황궁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

울상을 하고 있던 애쉴이 양 검지를 맞부딪치며 소곤거렸다.

“제가 아니더라도 많이들 축하해 주러 오실 텐데.”

“애쉴.”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라인하르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가겠다 한 걸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게다가 네가 직접 회신했으니 더더욱.”

“그때는 이런 연회인 줄 몰랐으니까…….”

황궁 연회라는 말에 내용도 살피지 않고 가겠다 답장을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곧 황실에서 열릴 사냥대회를 기념하는 무도회인 줄 알고 참석하겠다 한 것인데. 세간에 한창 떠도는 소드마스터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한 백작 영애가 일러준 소드마스터와 관련된 소문들을 되새겨보며 애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속 제 옆에 계셔야 해요?”

“그렇게 무서우면 내 옆보단 다른 곳이 안전할 것 같은데. 나는 그쪽과 친해져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럼 칼리아스랑-”

“칼리아스도 마찬가지겠지.”

제 오라비의 주군이자 자신의 친우인 황태자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른 애쉴이 시무룩 풀이 죽었다. 라인하르트는 끙, 한숨 소리를 내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어디서 또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사람이야. 괴물 같은 게 아니라고.”

“그렇겠죠. 그렇겠지만…….”

무서운 걸 어떡해요…….

애쉴이 웅얼거렸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수 있다. 악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뼈가 부러질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웃어 주지 않고, 대화를 잘 하려고도 하지 않는, 접근하기 힘들면서도 위험한 사람이다.

1세기하고도 반 만에 나타난 소드마스터의 평가 중 일부였다. 9할 이상이 근거 없는 소문에다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꾼들이 사교계에 퍼뜨린 것이었으나. 애쉴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고스란히 믿고 있었다.

“오라버니도 위험하실 텐데 안 만나시면 안 돼요?”

“그거 다 거짓말이라니까.”

“어제 만난 영애는 진짜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 영애가 직접 보았다고 하던?”

“그건 아니지만.”

“내가 직접 보고 알려줄게. 소문들이 사실인지.”

“그러다 오라버니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라인하르트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머니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너무 싸고 돌아서일까. 같은 아버지에게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도 어쩜 이리 성격이 유순한 것인지.

그는 웬만한 놈들은 감히 애쉴에게 접근도 못 하도록 물어 뜯어놔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안 다쳐.”

“하지만…….”

“다칠 게 무서워서 뒤로 뺐다간 아버지께서 경을 치실걸. 난 그게 더 무섭다.”

급한 볼일로 공작은 늦게 참석하겠다 밝힌 상태였기에 오늘 연회의 주인공을 상대하는 건 라인하르트의 몫이었다. 그의 너스레에 조금이나마 밝아진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 드리워진 수심을 지우지 않은 채 애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좋은 오누이가 탄 공작가의 마차는 황궁의 입구에 도달했다.

* * *

“오늘 밤 공녀님과 부디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평소 같으면 환하게 웃으며 맞잡았을 손을 거절했다. 춤추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영식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또 다른 춤 신청이 들어오기 전에 애쉴은 춤을 추지 않겠다는 의미로 벽 쪽에 바짝 붙어섰다. 그러고는 멀찌감치 있는 라인하르트와 칼리아스를 흘깃거렸다. 그들은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상대방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소드마스터라는 사람일 거야. 에르도안이랬나…….’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기절한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지?

괴물 같은 남자를 상상하며 애쉴이 부르르 몸서리쳤다. 실제로도 그녀는 연회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확 내리깔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에 관한 것들은 한 귀로 듣고 흘렸던지라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다른 연회였으면 해맑게 웃으며 이곳저곳 돌아다녔을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돌아가고 싶었다. 예쁘게 꾸미고 나온 것들이 오늘따라 무척 거추장스러웠다. 황궁 연회에 간다며 신이 나 맞췄던 드레스도 답답하고 무거웠다.

“어머, 공녀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발끝으로 대리석 바닥을 톡톡 차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와중이었다.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애쉴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다과회에서 소드마스터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던 바로 그 백작 영애였다.

애쉴은 살포시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영애도 오셨군요.”

“그럼요. 소드마스터의 탄생이라니. 살면서 두 번 다시 없을 자린데 꼭 와야죠.”

포크를 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백작 영애가 호호거렸다. 그제야 애쉴은 그녀가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연회장 내부에 달달하니 익숙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소드마스터 때문에 겁을 너무 먹었던 탓이다.

“이게 웬 거예요?”

“이날을 위해 황태자 전하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거라 하더라고요. 저쪽에 있는데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가 보세요.”

“고마워요!”

허둥지둥 대답한 애쉴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크기나 모양, 냄새로 보아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카페 플랑드르에서도 특별한 날에만 만든다는 초코케이크일 거라 확신하면서.

가라앉아 있던 적안에 생기가 돌았다.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에 정신이 팔려 잠시나마 ‘무서운 소드마스터’의 일도 잊어버린 그녀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사람들을 헤치고 부지런히 나아갔다.

“아, 있다.”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 인기를 방증하듯 케이크는 딱 한 접시가 남아 있었다. 더 먹고 싶지만 그래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되뇌며 접시에 손을 뻗는 순간.

“……!”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접시를 낚아채 갔다.

소중한 걸 잃은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애쉴은 상대방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쯤은 족히 큰 남자였다. 애쉴은 그의 손에 들린 접시를 확인한 후 곧장 몸을 돌렸다.

‘망했어…….’

여기까지 와서 플랑드르의 한정 케이크를 못 먹다니. 틀림없어. 오늘 밤 꿈에 나올 거야…….

우울해진 애쉴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때였다.

“레이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봄바람이 불듯 다정함이 한껏 실린 목소리였으나 애쉴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힘없이 뒤를 힐끗 보았다.

“네?”

“가져가세요.”

“……?”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애쉴이 제게 내밀어진 접시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예쁘게 눈꼬리를 접은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먹고 싶기는 했지만 이름도 모르는 영식의 것을 빼앗아가면서까지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애쉴은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그가 들고 있는 케이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에 동물 귀가 달려 있다면 축 처져 있지 않을까. 작은 동물을 보는 것 같은 귀여운 모습에 남자가 잘게 웃었다. 오늘 연회장에 온 후로 처음 웃는 것이었다.

“저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냥 어떤 맛일까, 하고 집어 든 것일 뿐입니다.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감사히 먹겠-”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감사 치레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에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든 탓이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칼은 비로드처럼 우아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눈썹은 그의 강인한 성격을 표현하는 듯했다. 붓꽃처럼 진한 보라색 눈동자에는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고, 살짝 다물린 붉은 입술은 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

그녀가 떠올린 첫 문장이었다.

그런 문장을 떠올렸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애쉴은 고개를 확 숙였다.

진한 초콜릿 향기를 뚫고 날아든 머스크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 향이 깃털로 변하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와 동시에 찌르르, 하며 마음 한구석이 저며 드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도 함께 찾아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레이디?”

상냥한 부름에 애쉴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봄꽃같이 해사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귓가에 울리던 연회장의 소란이 멎어 들면서 온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현듯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애쉴은 평소의 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호, 혹시, 같이 드실래요?”

“……아니요.”

의외의 제안에 당황한 듯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표정을 갈무리하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너무 단건,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아…… 네…….”

순간 목까지 빨개진 애쉴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남자가 건넨 접시를 허겁지겁 받았다. 바로 그때. 접시 밑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를 스쳤다.

정전기가 인 듯 따끔한 느낌이 들었으나 애쉴은 내색하지 않고 황망히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저를 보는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은 보지 못했다.

‘바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바보, 바보!’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애쉴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최악인 날이었다. 케이크고 뭐고 이젠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발로 뻥뻥 차고 싶었다. 그러나 기껏 받은 케이크를 버릴 수도 없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빠르게 먹고 사라질 심산으로 뛰다시피 걸을 무렵이었다.

“잠시, 잠시만요! 애…… 아니, 레이디!”

민망함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당장에라도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부름이 어딘가 모르게 다급하고 절실했던 데다 케이크를 양보해 준 좋은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발을 멈췄다. 혹시 돌려 달라고 하면 바로 주고 도망쳐야지 다짐하면서.

그러나. 거칠어진 숨소리에 섞여 나온 문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

“……네?”

잘못 들었나 하며 애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케이크, 같이 먹어도 될까요?”

아니, 같이 먹게 해 주세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음 지은 에르도안이 애원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 * *

“단것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가 초콜릿 케이크입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테라스였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에르도안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결연하게 말했다.

‘안 좋아한다고 두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애쉴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먹기 좋게 잘린 케이크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달고 씁쓸한 게 너무너무 맛있었다.

“영식께서도 드세요.”

“예, 먹고 있습니다.”

같이 먹고 있다 하기에는 줄어드는 속도가……. 애쉴은 눈을 깜빡거리며 먹기 좋게 케이크를 자르는 남자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이고 칼리아스나 라인하르트의 것보다 억세 보이는 것이 펜보다는 검을 주로 잡은 것 같았다.

“기사분이신가 봐요.”

“음? ……네.”

찰나 에르도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 연회는 그가 소드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던지라. 연회에 참석한 그녀는 그가 기사라는 걸 당연히 알았어야 했다.

작위가 높은 그녀는 저와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으니 소개하는 자리에서 못 보지도 않았을 것인데. 이 질문은 대체?

“기사분이시면 소드마스터 분과도 만나 보셨겠어요.”

에르도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연이어 떠올랐다.

어딘가 모르게 불길함이 들어 그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케이크를 우물거리던 애쉴이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어떤가요, 그분은?”

“……예?”

“소문대로 정말 무서운 분인가요?”

“소문…… 이라 하심은?”

“눈만 마주쳐도 기절하고, 손만 스쳐도 뼈가 부러진다던데요. 잘 웃지도 않고,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검부터 뽑으신다고…….”

겁먹은 애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에르도안의 미소가 물결처럼 사그라들었다. 새롭게 얻은 인생에서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 마주한 높다란 벽 탓이다. 그러다 애쉴의 앞이라는 걸 깨닫고는 양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누가…… 그딴 소리를……?”

분을 참지 못했는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나왔다. 애쉴은 달달함으로 무서움을 이겨내고자 초코케이크 한 조각을 냉큼 입에 넣었다.

“온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는걸요.”

“절대 아닙니다. 헛소문입니다.”

“영식께서도 오라버니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정말 가짜 소문일까요……?”

“그럼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에르도안은 소드마스터에 대해 좋은 말만 늘어놓으며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눈물겨운 노력이 통한 것이었을까. 성인의 두 손 크기만 하던 케이크가 거의 다 사라졌을 때 즈음. 애쉴이 포크를 문 채 작게 소곤거렸다.

“그래요. 그분도 사람이니까 눈이 마주친다거나 해서 기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맞습니다.”

“하지만 절대 만나고 싶진 않아요. 무서워…….”

“…….”

에르도안은 울고 싶어졌다.

소드마스터로 공표된 걸 없던 일로 해 달라며 황태자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할까 싶던 그때. 무언가를 깨달은 애쉴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는 게 늦었네요. 저는 팔라디움 공작가의 장녀 애쉴리아 팔라디움이라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너무 늦게 여쭙게 되어 죄송합니다.”

귀족다운 우아함이 배인 몸짓으로 가슴 중앙에 한 손을 얹으며 애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느다란 은발이 폭포수처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에르도안은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면에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탓이다.

‘이름을 들으면 소드마스터라는 걸 알지 않을까. 아니, 얼굴도 모르는 것 같은데 이름을 알 리가……. 설사 안다고 해도 방법이 없지 않나. 그렇다고 해서 가짜 이름을 댈 수도 없고.’

“혹시 곤란하신 거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작위를 듣고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한 하위 귀족들이 신분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은. 눈앞의 남자 또한 비슷한 경우일 거라 생각하며 애쉴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에르도안은 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숨겨 봤자 언젠가는 들통날뿐더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와 가까워지려면 비밀 따윈 만들지 않는 것이 맞으리라 여기면서.

“저는 오늘부로 후작위에 오른 트라펠로 가의 에르도안 트라펠로라 합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에 애쉴은 웃고 있던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냘픈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네……?”

잘못 들은 거죠, 그렇죠?

그런 의미가 담긴 붉은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에르도안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애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바보처럼 입을 벌린 그녀는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빤히 그를, 그의 손을, 본래라면 검이 매달려 있어야 할,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허리춤을 쳐다보다가-

“히끅…… 히끅…….”

별안간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눈을 감으며 뒤로 털썩 쓰러졌다.

“애쉴, 아니, 레이디!”

크게 당황한 에르도안이 다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쉴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쓰러지기 전과 달리 오들오들 떨뿐더러 그를 향한 눈빛에 두려움과 거부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어, 에르도안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나마 반복해서 회귀할 때처럼 원초적인 게 아니라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게. 잘 설득하면 어떻게든 지워질 것 같다는 게 나름 위안이었다.

“저, 정말 소드마스터신가요?”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그걸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지의 여부는 둘째치고서라도 왜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가면서까지 이렇게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애쉴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하면 절 두려워하지 않으실 겁니까?”

“두, 두려워하다니요. 제가 언제…….”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얼굴과 손발도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고는 하나 아직 하얀 편이었다.

황태자가 직접 달아 준 가슴께의 훈장들이 바닥의 대리석에 부딪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몸을 숙인 에르도안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그만큼 그는 절실하고 간절했다.

“편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레이디께서 말씀하시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저기…… 알겠으니까 일단 좀…….”

일어나 달라 간청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애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스러움이 담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정말 잘못된 소문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소드마스터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귀한 케이크를 양보해 준 것도 모자라 편하게 먹으라며 예쁘게 잘라 주기까지 했다. 저를 보는 눈빛은 다정하기 그지없었고, 말투나 행동 또한 부족함 하나 없이 고상하고도 부드러웠다. 표정은 또 어떠한가. 케이크를 같이 먹자 했을 때 놀라던 걸 빼고는 한 번도 웃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 직접 본 거랑 다르니까. 라인하르트 오라버니도 거짓말이라 했으니까. 소문이 정말 잘못 난 걸지도 몰라.

용기를 낸 애쉴은 주먹을 꼭 쥐고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트라펠로 영식……?”

“에르도안.”

그가 예고 없이 고개를 확 쳐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애쉴은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에르도안이라 불러주세요.”

“그, 그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며 거절하려던 여자가 멈칫했다.

애쉴은 저를 비춘 채 거세게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았다. 그 속에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검은 무언가도 보았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 어두운 심연에 잠겨 있던 것들 중 일부분이 강제로 끌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눈동자의 초점이 살짝 흐릿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스르르 입을 열었다.

“에르…… 도안……?”

아, 또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토록 그리워지는 것은. 가슴이 찌르르 울려오는 것은.

“네, 레이디.”

그가 아주 예쁘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도무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아서.

그를 보면 볼수록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서.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슬픔이 저에게까지 와닿아서.

애쉴은 저도 모르게 기쁘면서도 슬퍼 보이는 것 같은 상대방의 표정을 따라 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애환을 머금은 두 쌍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이제는 영영 찾을 수 없는 과거를 엿보려 미로 속을 헤매었다.

그 짧은 침묵을 끝낸 건 애쉴이었다.

“……미안해요.”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의문을 가지는 것보다 입이 열리고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 더 빨랐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왜 미안하다는 건지도 모르고.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도 모르고.

애쉴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끊임없이 미안하다며 되뇌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고운 뺨을 적셨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썰물처럼 끝없이 밀려들었다.

“괜찮습니다, 애쉴. 괜찮아요.”

어느새 에르도안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애쉴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무의식이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혹여 겁을 먹고 도망치진 않을까 굉장히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애쉴은 얼굴에 닿는 순간 딱 한 번 파르르 떨었을 뿐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에르도안은 섬세하게 그녀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눈물이 망가뜨린 뺨도 함께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다 굳은살이 박인 두 손으로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을 정중하게 들어 올렸다. 손등에 살포시 입술을 대며 목이 멘 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저는 당신의 검이자, 방패이자, 신념을 지키는 도구이리니. 제 심장이 멎고, 바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원토록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멍한 표정이 된 애쉴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키스한 에르도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만을 오롯이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정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인생은 오직 당신만의 것입니다.”

영원토록 한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며, 그가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애쉴. 당신을 사랑해요.”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고백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아서. 도리어 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는 것 같아서.

애쉴은 눈물 젖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펑, 펑-

때마침 소드마스터의 탄생을 축하하는 폭죽이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더불어 함성이 연회장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들을 축가 삼아 아름답게 치장된 하늘 아래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속에 깊게 새겼다.

영원히 잊지 못할 밤이었다.

* * *

“진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검은색 정장을 입은 라인하르트가 예쁘게 꾸며진 버진로드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곁에 있던 팔라디움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날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벌벌 떨던 애가 어떻게 이런……. 진짜 협박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싶고-”

“리히.”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한 공작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은 아들의 의심을 매정하게 잘랐다.

“본인들이 좋다는데 왜 네가 자꾸 그러느냐.”

“아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왔군. 기분은 좀 어떤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허리를 끊어낸 공작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세기의 스캔들을 낸 주인공이자 사위가 될 사람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새신랑 차림을 한 에르도안이 꾸벅 인사하며 초조하게 웃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정신이 없습니다.”

“두 번이라도 할 생각인가?”

“리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애쉴은요?”

떨어진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애타는 눈빛을 한 에르도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라인하르트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신부 대기실에.”

“아, 한번 가 봐야-”

“애쉴은 나중에 실컷 보고 지금은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빠르게 이동하려는 남자의 앞길을 라인하르트가 막아섰다. 또다시 시작되려는 잔소리에 누가 아비인지 모르겠다며 공작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날 정말 협박하지 않았나?”

“가문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할 수 있습니다.”

“공작가의 힘이 필요해 사랑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고도 맹세할 수 있나?”

“원하신다면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에르도안에게 향한 라인하르트의 적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물어볼 때마다 듣는 말이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하루 만에 시작된 사랑이 오래갈 리 없지 않은가.

2년 전, 소드마스터의 탄생을 축하하던 그날.

라인하르트와 칼리아스는 무슨 말을 해도 목석처럼 동요하지 않는 남자를 상대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 건 누군가가 들고 지나가던 초코케이크였다.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를 회유할 만한 다른 수단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한 두 남자가 수긍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에르도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치 이야기에 진절머리가 나 도망이라도 간 건가 싶던 그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얼음 같던 남자가 한 영애와 춤을 추며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영애는 애쉴이었다.

‘쟤, 여기 오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나한테 취소해 달라고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

칼리아스가 당황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서워할 땐 언제고 소드마스터 앞에서 말갛게 웃는 동생을 보며 라인하르트는 할 말을 잃었다.

한창일 나이의 젊은 두 남녀라서였을까.

하루아침에 시작된 소드마스터와 공녀의 뜨거운 사랑은 불이 붙은 마차처럼 제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교계에서는 낭만적이라는 반응과 서로 얻을 것이 있어 그러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 엇갈렸다. 음유시인들은 좋은 먹잇감을 놓치기라도 할세라 벌꿀과도 같은 환상을 가미하여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속살거렸다.

그 이야기에서 장애물로 등장하는 인물은 공작도, 트라펠로 부부도 아닌 라인하르트였다.

교제를 시작한 지 약 2년 후. 에르도안이 애쉴에게 청혼하자 라인하르트가 십여 년간 이어진 제국의 골칫거리, 북부 산맥의 마물들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며 펄펄 뛰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소드마스터가 한 달 만에 산맥을 정리했다는 것도 비밀이 아니었다.

“결혼했으니 잡은 물고기라고 모른 척했다가는-”

“리히, 그만하거라.”

결혼식 당일까지도 이어지는 집요함에 듣다 지친 공작이 중재했다. 으르렁거리던 라인하르트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각하, 여기 계셨군요. 이제 그만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결혼식이 시작되려는지 한 사람이 부지런히 뛰어왔다. 공작은 그를 따라 자리를 떴다. 에르도안과 라인하르트도 마음을 추스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5월의 어느 날. 두 연인의 기분 좋은 시작을 알리려는 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 * *

얼굴에 드리워진 면사포 덕에 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애쉴은 저를 이끌어 주는 크고 따뜻하면서도 주름진 손을 꼭 붙잡았다.

“떨리느냐?”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아버지가 작게 물었다.

떨려요. 아주 많이 떨려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시간이라.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이라. 손을 뻗으면 안개가 되어 날아가진 않을까, 이 모든 것이 그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떨려요.

심연 속에 파묻혀 있던 생각이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으나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으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고, 잔잔하게 웃은 공작은 그녀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영원과도 같은 짧은 몇 분이 흐른 후.

버진로드의 끝에 선 에르도안이 그녀를 맞이했다. 면사포가 가로막고 있는데도 그가 웃고 있다는 건 잘 보였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까지도 아주 잘.

“행복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가 물러났다.

에르도안은 신을 숭배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계단 위로 이끌었다. 작고 하얀 손이 커다랗고 굳은살이 박인 손안에서 움찔거렸다.

주례를 보는 대신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가 소곤거렸다.

“긴장했어요?”

“네. 당신은요?”

“긴장했어요.”

북부 산맥을 쓸어버리고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차라리 산맥을 세 개쯤 더 쓸어 버리는 게 덜 긴장될 것 같아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을 말을 한 에르도안이 그녀와 깍지끼지 않은 쪽의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긴장으로 손이 저렸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

주례 단상에 화려하게 장식된 여름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애쉴이 그를 힐끗 보았다.

“그때 했던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이미 어기긴 했는데.”

“무슨……?”

“딱 1년만 사랑하겠다고 했던 약속이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나? 애쉴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 패물을 교환하라는 대신관의 말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에르도안은 떨리는 손으로 준비해 온 것을 애쉴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은색의 테에 붉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미꽃이 달린, 화려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우아한 반지였다.

그녀를 위해 매해 준비해 왔으나 단 한 번도 직접 전해 주지 못한 것인데.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감격 어린 눈물이 밝게 웃는 남자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아앗, 또 운다.”

그의 손에 보라색 보석이 달린 금색 반지를 끼워 주던 애쉴이 짓궂게 소곤거렸다. 귓불이 붉어진 에르도안은 절차에 맞춰 그녀의 면사포를 살며시 걷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로 엉망이 된 애쉴의 얼굴이었다.

에르도안이 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요?”

“이, 이건…… 눈물이 아니에요.”

“그럼?”

“……땀이에요.”

“땀보단 눈물이 낫지 않아요?”

에르도안이 쿡쿡 웃었다. 귓불까지 빨개진 애쉴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아니거든요.”

“……이런데 어떻게 약속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자수정과도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쉴이 잘게 몸을 떨었다.

“사랑해요, 애쉴.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절대 깨어지지 않을 맹세와 함께 에르도안이 입술을 포개었다.

“저도요, 에르도안. 사랑해요.”

애쉴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대신관의 성스러운 축복을 끝으로 새롭게 탄생한 부부의 행복한 앞날을 기원하는 종소리와 함성, 폭죽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해 여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 *

누군가의 우려와는 달리 에르도안 트라펠로와 애쉴리아 팔라디움, 아니, 애쉴리아 트라펠로는 조금의 불화도 없이 평생을 함께했다.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던 황제가 서거했다.

소드마스터인 에르도안은 제국의 힘 그 자체로써 새로이 황제에 오른 칼리아스를 보필했다. 역사상 최고의 지략가로 이름을 떨치게 될 라인하르트는 제국의 머리로써 새 황제를 보좌했다. 각기 상반된 영역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두 사내가 기둥을 맡음에 따라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번성했다.

칼리아스는 트라펠로 후작 부부의 의견에 따라 악습인 신녀 제도를 철폐했다. 그는 추후 신녀가 나타나더라도 황궁에 절대로 가둬 두거나 휘두르려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애쉴을 낳은 지 10년이 되던 해, 시름시름 병을 앓던 언니의 사망 후 쥐 죽은 듯 숨어 살던 달루아가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인 애쉴을 찾아간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애쉴은, 제국의 두 기둥에게 사랑을 받는 여인은 온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이따금 애쉴을 질투한 사교계의 호사꾼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팔라디움의 일원이었다. 순진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녀는 빠르게 성장했고, 슬기롭게, 때로는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쉴이 사내들의 뒷배로 덕을 본다는 말은 쏙 들어가 버렸다. 오히려 그녀의 지혜에 감복해 그녀와 결혼한 에르도안을 부러워했다.

“행복한가요?”

“네, 저는 행복해요. 에르도안은요?”

“달리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애쉴은 행복했다. 에르도안도 행복했다.

돌아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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