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5권 [완결]
17. 끝을 위한 후주곡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예……. 죄송합니다.”
하아. 답답하다는 듯 깊은숨을 토해낸 라인하르트가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아무리 답답해도 당사자만 할까. 그 앞에 앉아 있던 에르도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하늘 높으신 소공작께 소리 내어 전할 수는 없는지라 그 답답함을 기억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과로 승화시켜 버렸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어디까지, 라. 너무 추상적인 질문 아닌가.
에르도안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애쉴을 기억하나?”
“애쉴……?”
애쉴, 애쉴.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에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알고 있는 귀족들의 명단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곳에도 애쉴이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쾅!
분에 못 이긴 라인하르트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 정중앙에 놓여 있던 티포트가 바르르 떨리고, 그들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이 흘러넘쳐 받침대를 적셨다.
“죄송합니다.”
흠칫 한 에르도안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왜 사과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노한 소공작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은 없었다.
“하, 진짜, 하-”
속된 말로 하면, 그래.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라인하르트는 이마를 짚은 채 응접실을 빙빙 돌았다.
애쉴이 사라졌다. 아니, 어디에 있을지 짐작은 됐다.
“벨키에로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라인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한 달 전, 어느 날 아침.
팔라디움 저택에 특정한 장소로 사람을 보내 도와달라는 편지가 도착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으며 내용 형식도 지켜지지 않은 괴상한 편지였다.
별 미친 장난이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던 집사는, 그러다 편지와 함께 온 것을 보고 놀라 도련님께 달려갔다. 사태를 파악한 라인하르트는 곧장 편지에 적혀 있는 장소로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건 애쉴을 닮은 여자와 기절한 에르도안뿐이었다. 그마저도 애쉴을 닮았다는 여자는 수도로 오던 도중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전달받았다.
‘찾아볼까요?’
‘아니. 애쉴이 더 급해. 그 여자도 애쉴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면서.’
‘외람되지만 이 자는 어떻게 하실 건지…… 반역을 저지른 자가 아닙니까.’
명령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정말 괜찮으시겠느냐며 에르도안을 데려온 수하가 곤란하다는 기색을 띄웠다. 라인하르트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며 입이나 잘 단속하라는 말을 남겼다.
애쉴의 호위가 에르도안이라는 건 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소드마스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에르도안이 반역자라는 건 애당초 믿지 않았다.
뭐가 아쉬워서 소드마스터가 뒷공작으로 반역을 저지르겠는가. 진짜 저지를 생각이었으면 검을 잡고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터다. 반역을 저지를 만한 위인에게 아버지가 호위를 맡기셨을 리도 없고.
반역이란 누명까지 씌워 가며 소드마스터를 처리하고 공녀를 데려가려 했던 건가 싶어 분통이 터졌다. 그렇게도 팔라디움에 목줄을 채우고 싶었나.
라인하르트는 결국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
앞에 앉은 에르도안이 저에게 한 말인 줄 알고 움찔했으나 머리끝까지 화가 솟은 라인하르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반역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쳐들어가 벨키에로트를 결딴내고 애쉴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물증이 없었다. 벨키에로트가 정말 동생을 데려갔다는 증거가 없었다.
눈앞의 이 인간을 제외하고서는.
상대방이 환자만 아니었어도 정신 차리라며 주먹을 수십 번은 더 내질렀을 것을. 그는 잡아먹을 듯 에르도안을 노려보았다. 에르도안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자네 정말-!”
「에르도안을 잘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그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를 향해 막 욕설을 퍼부으려던 차였다. 편지에 적혀 있던 애쉴의 부탁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라인하르트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찻잔을 집어 들었다. 뜨거워진 목구멍에 차게 식은 차를 욱여넣었다.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화를 삭였다.
“……아니다. 이만 가 보도록.”
머리끝까지 화는 뻗쳐 오는데 표출할 대상자가 없었다. 기실 자신도 죄인이었다. 궁지에 몰린 아이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혹여 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싶어 에르도안은 바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린 소공작에게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떴다.
* *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방으로 돌아온 에르도안이 마른세수를 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메마른 숨을 토해내면서.
그의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늦게까지 훈련하다 숙소에서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일면식도 없는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판단하기도 전. 분노한 소공작을 만나 제가 웨이센을 뒤집으려 한 반역자가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저희 부모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자네가 알아서 잘해뒀겠지.’
잘해뒀겠지, 라. 정말 반역이라도 저지르려던 것일까.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에르도안은 양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눌렀다.
‘여기 계속 있어도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라디움은 친 황태자파의 대표 가문이었다. 누군가가 반역을 저질렀다면 그 어디 보다 앞장서서 반역자를 처단하는 검이 되어야 옳았다. 그런데 왜 자신을 숨겨주고 있는단 말인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는 게 거짓일 리도 없을 터인데.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인 건 아닐까 싶어 발소리를 죽이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숨을 멈춘 채 살며시 귀를 댔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다.
에르도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색하지 않아 그렇지 일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겉과 속 모두 망가져 있던 사람을 신성력을 퍼부어 겨우 살려냈다는 소공작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야옹.”
별안간 구석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푸른 털에 기묘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기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으나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에르도안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착각이었을까. 일순간 고양이의 눈에 한심하다는 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뜨자 고양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히 한 번 더 울어 재낀 후 할짝할짝 털을 골랐다.
기억을 잃기 전 키우던 것인가 보지.
에르도안은 순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합리화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에 의문을 가지는 대신 뻐근한 어깻죽지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다 침대 옆 선반에 시선을 주었다.
선반에는 팔찌와 쪽지라는 연관을 짓기 힘든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정신을 잃은 그가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것이라며 집사가 놓고 간 것들이었다.
그는 먼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여러 번 접었다 편 듯 손때가 묻고 꼬깃꼬깃해진 쪽지에는 딱 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부디 당신만을 위한 삶을 사시길.」
‘……?’
설마 이게 다인가 싶어 앞뒤로 살폈다. 다른 건 없었다. 숨겨진 뜻이라도 있을까 싶어 천천히 쪽지를 읽어 보던 와중 어디서 많이 본 필체인데 하며 곱씹어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쓴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문장을 왜, 누구에게 써 줬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쪽지를 내려놓은 후 팔찌를 들어 올렸다.
팔찌는 은색 줄에 새끼손톱만 한 빨간색 보석이 달린 것으로 딱 봐도 여성용 같았다. 생전 애인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그에게 여성용 팔찌가 웬 말인지. 잘못 가져다 둔 게 아닐까 하며 에르도안이 의아해할 무렵이었다.
‘……!’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팔찌를 내려놓은 그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차하면 상대방을 덮칠 기세로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면서.
그로부터 조금 후. 가벼운 노크 소리가 났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를 잡으러 온 것이라기엔 한없이 가냘픈 목소리였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러시라 하자 딸깍 문이 열렸다. 다른 고용인들처럼 메이드복을 입은,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칼을 지닌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여자는 자신을 엘린이라 소개했다.
“저, 정말 실례인 걸 알지만.”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는 태도에 긴장을 푼 에르도안이 무심히 응대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더 이상 거둬줄 수 없으니 당장 저택을 떠나라는 가주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 온 것일 터다.
그러나 한참을 뜸 들이던 여자가 내뱉은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질문을 던지자마자 엘린은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다른 고용인들이야 애쉴이 제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엘린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쉴의 전속 시녀였고, 때문에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가씨가 집에 없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분위기상 모르는 체하고 있었을 뿐이다.
“기사님과, 함께, 떠나셨다던데.”
엘린은 음유시인들이 신나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랑의 도피설을 믿고 있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딘가에서 잘 살고 계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한 달 전 아가씨의 연인이 기절한 채 실려 온 걸 본 후로는 설마 하는 심정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 아니, 저기.”
에르도안은 진심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크게 당황했다. 기본적으로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던 데다 다짜고짜 울기까지 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울음소리와 섞여 나온 ‘기사님과 함께 떠나셨다던데’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신 건가요?”
엘린이 엉엉 울며 다시 한번 물었다.
에르도안은 엉거주춤한 상태 그대로 굳었다. 아가씨라니. 팔라디움의 고용인이 아가씨라 일컬을 만한 사람이 있었나.
그가 아는 한 팔라디움의 후계자는 라인하르트 팔라디움 하나였다. 그 밑으로 딸이 있었다 듣긴 했으나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말도 있고, 잃어버렸다는 말도 있고, 애당초 없었다는 말도 있는 등 존재 여부조차 불투명했다.
안부는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하지만 모르겠다 하며 내빼기엔 상대방이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 있던지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에르도안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무사합니다.”
“저, 정말이죠? 우리 아가씨, 무사하신 거 맞죠?”
“예…….”
그녀가 정말 공녀라면 어딜 가든 무사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감히 팔라디움을 건들 수 있는 자가 제국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목구멍에 커다란 돌이라도 박힌 듯 그렇다는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대체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그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공녀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기원하면서.
* * *
“애쉴.”
“콜록, 콜록!”
사뭇 다정한 부름에 애쉴은 잦은 기침으로 답했다.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그녀는 바로 앞의 의자에 앉은 남자가 발끝으로 툭툭 치자 흐리멍덩한 눈을 들어 올렸다.
“말해 봐. 내가 누구지?”
애쉴이 느릿느릿 그의 얼굴을 훑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고고히 반짝이는 금발. 차가운 느낌을 주는 벽안과 날카로운 콧날, 그 아래 단단해 보이는 입술까지. 전반적으로 퇴폐적인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그는 의자 팔걸이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리를 꼬고 있었는데,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소름이 끼쳐 애쉴은 제정신이 아님에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모른다고 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 봐도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어떤 사람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완벽한 백지였다.
몰라,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몰라요……. 으윽!”
모른다고 하기 무섭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억지로 먹였다. 먹기 싫다고 몸부림치며 반항했으나 벨키에로트의 한마디에 힘이 쭉 풀렸다.
“얌전히 삼켜.”
하아, 하아. 다시 바닥에 쓰러진 애쉴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먹어서는 안 된다며 직감이 경고했으나 몸은 제 것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기쁘게 삼켰다.
쓰디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애쉴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약이 닿은 혀와 입천장, 목구멍과 속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 악, 아악!”
머리를 감싸 쥔 채 뒹굴자 벨키에로트가 바닥의 마법진을 발로 쿡 찍었다. 애쉴의 아래 있던 거대한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그녀의 몸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고통을 죽이고 약의 효과를 극대화해 주는 마법이었다. 부작용도 극대화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마법진에서 나는 빛이 희미해질수록 비명이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종장에는 헐떡이는 숨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빛이 다 사라지자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된 애쉴은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녀가 누워 있는 카펫에는 지워지지 않은 눈물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다시 물어보지. 내가 누구지?”
“……몰라요. 몰라…….”
흐응.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옆의 심복에게 눈짓한 후 그대로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 궁 안 숨겨진 곳 복도에는 한 달 전부터 그래왔듯 고통에 찬 비명이 메아리쳤다. 어떻게든 기억을 되찾기 위해 온갖 약과 마법을 강제로 주입 당하는 여자의 비명이었다.
* * *
애쉴을 버려두고 집무실로 돌아온 벨키에로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이 아주 복잡하게 꼬여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드마스터를 죽이고 공녀를 데려오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을 땐 모든 게 완벽하게 해결된 줄 알았는데.
어디서 대체 뭘 구해 마신 건지 멀쩡하게 왔어야 할 공녀는 기억을 잃었다. 기사들은 에르도안의 목 대신 재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시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나 집과 함께 불타고 있던지라 꺼내오지를 못했다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공녀를 이용해 팔라디움을 어떻게 해 볼까 하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소드마스터를 잡았다는 증거품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서 이따위로 허술하게 일 처리를 한 거냐 하며 기사들을 베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드마스터를 처리한답시고 국력이 많이 상했는데 거기에 더 보태어서는 안 되었다.
정신이 나간 공녀는 숨기면 그만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시체는 만들면 그만이었다. 에르도안을 죽인다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마무리만 잘하면 된다고 여겼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순진하고도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궁 마법사들에게 잿더미가 된 자리를 조사하라 시켰을 때였다.
마법사들은 수십 번을 마법으로 탐지해 보았으나 사람이 불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며 한결같이 증언했다. 그제야 벨키에로트는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던 기사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분노했다. 감히 황족에게 거짓말을 한 죄로 기사들의 목을 죄다 쳐 버리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지를 못했다.
지금 그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귀족들은 아무리 기사단이 황실의 힘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 규모를 움직이실 거면 최소한 언질은 주셨어야 했다며 아우성쳤다. 그의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할 팔라디움이 앞서 따지고 있어 더욱 그랬다.
심지어 그중에는 겨우 한미한 자작 가문이 뭘 위해 반역을 저질렀겠느냐며, 그들은 단순 눈가리개일 뿐 기사들을 희생시켜가며 숨겨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겠냐는 말까지 입에 올리는 자도 있었다. 당연히 벨키에로트의 앞에서는 하지 못했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온다는 것조차 치욕이었다.
이런 시점에 기사들의 목을 치겠다 하면. 국력을 깎아내리겠다 하면. 그들이 진짜 황족을 농락한 죄인일지언정 평판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자명한 바였다.
“감히,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개 따위 키울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함부로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2황자의 세력은 물론이요 양 세력에 한 발만 걸친 채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귀족들이 물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황태자로 책봉된 후, 아니, 태어난 후 이 정도로 몰려 본 적이 있었을까. 벨키에로트는 이를 갈았다. 에르도안의 시체만 있으면 되는데. 시체를 보여 주며 소드마스터가 제국을 멸망시킬 거란 예언을 받아 군대를 사용했다,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죽었는지조차 불분명해 가짜 시체를 만들 수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게 밝혀지면 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기실 벨키에로트는 에르도안을 ‘반역자’라고만 칭했을 뿐 소드마스터라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는 법. 그의 뜻을 따라 에르도안을 처단하려 할 자들도 있겠지만 소드마스터를 손에 넣기 위해 방해하려는 자들 또한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에르도안을 죽인 후 예언과 시체를 공개하려 했거늘.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똑똑.
끝없이 이어지던 잡념이 작은 노크 소리에 깨졌다. 벨키에로트가 거친 목소리를 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백발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그는 심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겁먹은 것 같기도 했다.
“델라스 백작가의 장남 클라우드 델라스가 감히 제국의 작은 태양이자-”
“됐고. 달루아, 그 여자는?”
“……죄송합니다. 놓쳤-”
빠악. 허공을 날은 꽃병이 머리에 부딪혀 산산 조각났다. 클라우드는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면서도 두 다리로 꼿꼿이 버티고 섰다. 바닥에 흐드러진 유리 조각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맹수가 우는 듯 벨키에로트가 사납게 뇌까렸다.
“뭐 하나 쓸모 있는 게 없군.”
“죄송합니다.”
그가 내뿜는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클라우드는 허리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벨키에로트는 당장에라도 검을 뽑고 싶다는 듯 손가락을 꿈틀거리다, 간신히 참아낸 후 이만 꺼지라며 손짓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고 싶은가 보지?”
“2황자 쪽에 불미스러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검을 뽑으려던 움직임이 멎었다. 계속 말해 보라는 의미로 벨키에로트가 고개를 까딱했다.
“이트라와 긴밀히 접촉 중이라 합니다.”
“황후의 짓이로군. 증거는?”
“확보 중에 있습니다.”
쾅. 분노한 벨키에로트가 책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증거, 증거, 증거. 그 빌어먹을 증거!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패들을 고작 증거 하나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며 한 자 한 자 씹어 먹을 듯 읊조렸다.
“어떻게든 가져와. 그냥 넘어가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달루아 그 여자도 반드시 찾아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여서라도 끌고 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인 클라우드가 빠르게 방을 나섰다. 벨키에로트는 핏발 서린 눈으로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가, 지령서를 쓰려는 듯 깃펜을 쥐었다. 그러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아귀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은 잉크로 엉망이 되었다.
“빌어먹을…….”
그래. 이건 모두 달루아,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가 이상한 예언만 하지 않았어도 공녀에게 청혼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팔라디움과 이렇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신녀가 나타났다는 걸 증명하고 진짜 예언이 나타났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잃은 것은 많은데 얻은 것은 없었다. 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소드마스터의 시신을 직접 본 건 오직 공녀뿐이라 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에게서 진실을 들어야 했다.
정신 사납게 방을 돌아다니던 그가 한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 모든 것은 애쉴에게 달려 있었다. 공녀가 기억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녀에게서 소드마스터인 에르도안이 죽었다는 걸 듣기만 한다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정말 죽었으면 가짜 시체를 만들면 될 일이고 죽지 않았으면 행방을 캐물은 후 공녀를 인질 삼아 그를 몰아붙이면 될 일이다. 그러면 위험인물을 물리치고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대받아 칼리아스 놈 따위는 증거 없이도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기억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약을 먹일 때마다 상태가 더욱 심각해지긴 했지만. 이젠 제 이름도 모를 정도로 백치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한다.
할 일이 산더미였으나 그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제 궁의 숨겨진 공간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 * *
“가서 말해 봐.”
“네가 가 봐. 왜 나한테 그래?”
“네가 먼저 얘기했잖아?”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데.
에르도안은 저만치서 저를 흘깃거리는 사병들을 쳐다보았다. 사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에르도안이 시선을 돌리면 같은 짓을 반복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에르도안이 먼저 가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말에 에르도안이 눈썹을 꿈틀했다.
소공작이 외부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죽고 싶으면 외부로 나가도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어딜 돌아다니든 상관없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은 자신을 반역자가 아닌 손님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랬다.
역사가 깊은 가문이니 가주의 명령을 잘 따르는 건가 싶다가도 최소한 이런 식의 친밀감은 없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공작이 왜 한미한 가문의 영식인 저를 이렇게 대우해 주는지도 모르겠고.
“소드마스터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아니, 뭐 당연히 처음일 수밖에 없겠지만,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 될 겁니다!”
“맞습니다. 어딜 가서 또 소드마스터를 만나 보겠습니까?”
음. 곤란해진 에르도안이 짧게 신음성을 내었다. 그러고 보니 저를 보는 사병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동경이 깃들어 있었다.
소드마스터라. 그것도 할 말이 참 많았다. 계속 집 안에만 있는 것이 지겨워 뒤뜰에 있다는 연무장에 갔을 뿐인데. 익숙한 느낌대로 집중하여 검을 휘두르자 보랏빛 검기가 치솟았다. 그를 구경하던 사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정작 당사자도 놀랐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소드마스터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연신 눈치를 살피던 사병이 풀이 죽어 말했다. 에르도안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을 잃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역시 아가씨께서 반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다. 있을 리 없는 공녀의 존재가 운운 되는 것은.
불협화음을 듣는 것 같은 거슬림에 에르도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예. 얼마든지요!”
“그 아가씨라는 분은…….”
“당연히 애쉴리아 아가씨 아니겠습니까!”
애쉴리아. 팔라디움의 아가씨이니 애쉴리아 팔라디움이려나.
하늘에 맹세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찢어질 듯 아려왔다. 가슴을 움켜쥐며 거칠어진 숨을 토해내자 깜짝 놀란 사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이 아직 낫지 않으셨나 봅니다.”
“……아뇨, 아닙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애쉴리아, 라는 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연인을 모르는 사람처럼 칭하는 태도에 의아해진 사병들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원래 이런 사람인가 보다 하며 묻는 말에 술술 대답해 주었다.
* * *
사병들과의 대련을 마친 그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대련은 압승이었다. 다섯 명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에르도안의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역시 소드마스터십니다!’
신들린 듯한 몸놀림에 흥분한 사병들이 소리쳤다. 정작 에르도안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몸에 익은 움직임인데 머리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동작을 언제 했더라. 분명 어디선가 이런 식으로 다수와 싸워 보았던 것 같은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단에서는 일 대 다로 싸워 본 적이 없었거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가씨께서도 이 모습을 보셨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
또다. 그 아가씨라는 단어는.
대련이 끝나자마자 에르도안은 ‘애쉴리아 팔라디움’이라는 여자에 관해 더 물었다. 모르는 여자인데. 난생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상하게도 친밀감이 들었다. 가능한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애쉴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에르도안은 거기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첫 번째, 그녀는 20년 만에 돌아온 팔라디움의 영애이다.
두 번째, 그녀와 자신은 연인 사이이다.
세 번째, 그녀는 지금 깊은 병에 걸려 거의 1년째 방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약 1년 반 전 그녀의 데뷔탕트에서 같이 춤도 추었다는데 정작 그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최소 1년 반 사이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만나 봐야 하나.’
사병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가 오갈 만큼 사이좋은 연인이었다 하니 가서 물어보면 기억을 되찾는 데 뭐라도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데 대뜸 찾아가기도 조금 그랬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애쉴을 기억하나?’
문득 소공작의 질문이 떠올랐다. 그제야 왜 그가 분노에 차 있었는지 짐작되어서 에르도안은 성마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인이었던 누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깐. 그럼 왜 전속 시녀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한 거지?’
엘린은 왜 방에 있을 공녀의 안부를 저에게 물은 것일까.
어찌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는 것도 몰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초봄의 햇살을 받으며 에르도안은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애쉴, 애쉴리아 팔라디움. 애쉴, 애쉴……. 연인이라는 말이 사실인 듯 혀끝에서 굴려지는 것이 제법 친숙했다.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신 건가요?’
그녀의 전속 시녀는 왜 그런 눈빛이었을까.
‘우리 아가씨, 무사하신 거 맞죠?’
정말…… 무사한 게 맞을까?
순간, 머리가 찡 울렸다.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은발에 적안을 가진 여자가 떠올랐던 것도 같다. 그러나 눈 깜짝할 새에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던 터라 에르도안은 두통으로 인한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통을 털어내고자 고개를 젓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왜, 가족들이 아닌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그가 반역자로 몰렸으니 일가친척 모두 같은 신세일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소공작의 말마따나 제가 알아서 잘해 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반역을 저지르려 한 거지?
복잡하고 답답한데 누구 하나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에르도안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왜 복도 한가운데에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싶어 일단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꺄악!”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앞서 오는 이도 보지 못했다. 그는 발이 걸려 나동그라지려는 시녀를 급히 잡아 주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앞을 제대로 안 봐서.”
저와 부딪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에르도안이 움찔했다. 공녀의 전속 시녀 엘린이었다. 그날 이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순수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불안에 떠는 이를 거짓으로 안심시켜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린.”
그래서 불렀다. 도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시녀를.
엘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레이디께서 많이 아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애쉴이라 할까 하다 레이디라 칭하기로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자신이라면 공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저를 담은 갈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으나 그것을 보지 못한 에르도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순간 에르도안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한 말을 주워 삼키고 싶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린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곧장 울음을 터뜨렸으므로.
* * *
엘린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뒤에서 저를 따라오는 남자를 힐끔거렸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아가씨께서 무사하시냐 물었을 때 대답하던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어딘가 모르게 어정쩡하면서도 왜 그걸 저에게 묻나, 그런 느낌이 묻어나와서.
그래도 믿었는데. 아가씨를 아껴 주는 분의 말씀이시니 믿고 의지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시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비로소 듣게 된 진실에 간신히 멈췄나 싶던 눈물샘이 다시금 터지려 했다.
이미 붉게 부어오른 눈가를 소매로 훔치며 엘린은 어두운 복도를 부지런히 걸었다. 혹여 다른 고용인들과 마주치진 않을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들이 지금 향하는 곳은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마침내 애쉴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저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라인하르트에게 받아온 방 열쇠를 넘기며 엘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가씨의 방을 보여 드리면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련님을 설득하여 겨우 받아낸 것이었다.
“주인도 없는 방에 시녀가 들어가는 건 안 되니까.”
“그렇다면 저도-”
“기사님은 특수한 경우니까요. 아가씨도 뭐라 하지 않으실 거예요.”
“…….”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복잡미묘한 표정이 된 에르도안은 손안의 열쇠에 시선을 주었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는 건 그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주인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더더욱.
에르도안이 선뜻 들어가려 하지 않자 엘린이 말로 재촉했다.
“아가씨의 책상 세 번째 서랍에 편지함이 있어요. 마지막 서랍에는 일기장이 있고요. 일기를 쓰실 때마다 항상 내용을 말해 주셨는데 대부분이 기사님과 관련된 것들이었어요. 틀림없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말을 마친 엘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에르도안을 바라보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머뭇거리던 에르도안은 어쩔 수 없이 공녀의 방에 들어섰다.
* * *
몇 달간 비어 있다던 말이 사실이었는지 사람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공녀가 쓰던 방답지 않게 사치스러운 물건 또한 거의 없었다. 귀여운 인형들로 꾸며진, 아기자기하지만 텅 빈 침대를 바라보던 에르도안이 조심스레 책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엘린의 말마따나 세 번째 서랍에 편지함이 있었다. 사이좋은 연인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보관상태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던 편지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얼마나 많이 봤는지 찢어지기 직전인 것도 있었다.
에르도안은 그중 몇 개를 꺼내 천천히 살폈다.
하나같이 수신인에게 애타는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눈에 익은 글씨체에 에르도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도 자신이 보낸 것임을 알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았나 하며 그는 생경한 눈으로 제가 쓴 편지를 주욱 훑었다.
머리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가슴은 날카로운 게 헤집기라도 하는 듯 쿡쿡 쑤셨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끓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 감정을 다스리고자 에르도안은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비릿한 맛이 났다.
가지런히 편지함을 정리해 다시 넣고 그는 마지막 서랍의 일기장을 꺼냈다. 그러다 손끝에 걸리는 게 있어 같이 꺼내 보니 뜯지도 않은 편지였다. 뭐가 들어 있기라도 한 것인지 만질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찰나 에르도안은 고민했다. 아무리 권유받았다고는 하나 남의 일기장을 보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을 모두 보고, 그런 후에도 기억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면 그때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일기장이 아닌 편지에 시선을 주었다.
편지에 적힌 날짜를 보아하니 약 1년 전에 온 편지였다. 편지가 도착하기 전 실종 된 건가 싶다가도 편지를 받은 게 시녀였으면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 이런 식으로 버려두진 않았으리라 추측했다.
싸우기라도 한 것일까.
‘뜯어 봐도 될까.’
제가 보낸 것이니 뜯어봐도 되지 않을까.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듯 흔들어 보던 그는 결국 편지를 뜯었다. 반드시 뜯어 봐야 한다며 누군가가 등을 떠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별 통보라도 적힌 건가 하던 예상과는 달리 편지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고이 보관된 다른 편지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왜 이건 뜯지도 않고 버려두었던 것일까. 의구심을 표하며 에르도안은 봉투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고자 손바닥 위로 툭툭 털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은줄에 붉은 보석이 달린, 이전에 그의 방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그러나 그것보다는 훨씬 덜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성용 팔찌였다.
그 물건이 보랏빛 눈동자에 비친 순간. 에르도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팔찌에 달린 보석을 천천히 굴려보았다. 보석이 손바닥에 배기는 느낌이 지독한 현실감을 선사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심장 위에서 굴려지는 듯 마음이 쓰라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립고, 아프면서도, 저를 구성하는 것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에르도안은 절실함이 담긴 손길로 팔찌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한참을 어두침침한 방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뭐라도 떠오른 듯 편지와 팔찌를 가지고 허둥지둥 자리를 옮겼다.
* * *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애쉴의 방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본인의 방이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여전히 쪽지와 팔찌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 팔찌를 집어 들었다.
‘……해요, …….’
조금 전 복도에서처럼 한 여자의 인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반짝이는 은발과 장미를 닮은 적안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극약을 삼킨 듯 심장이 화끈거렸다.
에르도안은 팔찌를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도 내려놓았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팔라디움의 공녀이니 그녀 또한 소공작과 마찬가지로 은발에 적안을 가졌으리라. 그러니 방금 떠오른 사람이 공녀일 것이고 이 팔찌들은 그녀를 위해 자신이 준비한 선물일 터다.
그렇다면 이 선물들을 받아주어야 할 공녀는 어디로 갔는가.
‘애쉴, 나는 당신을…….’
이번에는 제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두통에 에르도안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심장에서 뽑혀 나온 뜨거운 숨결이 반쯤 열린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분명 제가 한 말인데. 이토록 심장이 옥죄는 것으로 보아 가슴은 기억하고 있는 듯한데. 가끔 스치는 환영을 제외하면 머릿속은 그저 뿌옜다. 완벽한 백지는 아니었지만 회색 안개 속에 휩싸인 것이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데. 허공을 휘젓는 듯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극심한 답답함에 에르도안은 얼굴을 구겼다.
“야옹!”
그때였다. 평소보다 날카롭게 우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느새 침대 위로 뛰어 올라온 고양이는 두 개의 팔찌 중 더 고급스럽고 화려한 것을 물어 들었다. 그러고는 차보라는 듯 주둥이를 손목에 툭툭 쳐댔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 귀찮고 성가시게 구는구나 싶어 인상을 쓰며 밀어내었으나 어린 짐승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야옹! 야옹!”
“하……. 제길.”
꼭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처럼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었다. 에르도안은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말도 알아듣지 못할 한낱 고양이에게 짜증을 내고 있자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빨리 떨어뜨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는 마지못해 고양이가 고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윽!”
손목에 팔찌를 감고 고리를 걸자마자 에르도안은 긴 신음성을 내며 이마를 짚었다.
뜨겁던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시원하다 못해 얼음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안개가 걷히는 것과 동시에 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이 느껴져 에르도안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있죠, 에르도안.”
그녀의 몇 번째 회귀 기억이던가. 겨울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 가을의 끝자락 어느 날이었다.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함께 호숫가를 산책하고 있던 애쉴이 말을 걸었다. 에르도안은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살짝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에요.”
발걸음을 멈춘 애쉴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스쳐 지나가듯 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죽…… 아니,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왜 그런 질문을.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무슨 일은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는 떨리고 있었다.
바람이 흩트려 놓은 주홍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애쉴은 노을빛으로 붉게 빛나는 호수에 시선을 주었다.
“그냥. 궁금해져서요.”
“찾아야지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에르도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찾지 못하는 곳에 있다면요?”
“그런 곳은 없습니다.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애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여 에르도안은 그녀의 양팔을 꼭 잡았다. 어디 아픈 사람처럼 연한 분홍빛 입술에 살며시 제 것을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요.”
“……고마워요. 하지만.”
그의 시선을 빗겨 땅을 내려다보며 애쉴이 웅얼거렸다. 그와 있을 때 항상 반짝이던 적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약속해 주세요. 만약 그런 날이 오게 되면 저를 찾지 않으시겠다고.”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만약이에요. 사람의 일이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니까.”
에르도안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애쉴은 방긋 웃었다. 그러면서 상냥하게 속살거렸다.
“저는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의 곁에 있고 싶은걸요. 혹시 싫으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같은 마음입니다.”
“다행이에요.”
애쉴이 까치발을 들어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약속해 주세요, 에르도안.”
그런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찾지 않으시겠다고. 잊으시겠다고.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에르도안이 그때 했던 말은…….
* * *
“하, 하하, 하…….”
마정석에 걸린 정신이 맑아지는 마법 덕분이었을까.
눈을 뜨자 잃어버렸던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로소 모든 것을 떠올린 에르도안이 자조했다. 침대에 쓰러진 채 팔뚝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눈을 가리며 미친 사람처럼 스스로를 비웃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런 게 가능할 리 있겠습니까.
“애쉴…….”
제가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애쉴-!”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왜. 대체 왜.
공녀님께서는 무사하시냐는 질문에 그럴 거라 대답하며 어물쩍 덮으려던 모습이.
고용인들이 자신과 공녀를 엮을 때마다 부담스러워하던 모습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걱정 따위를 왜 하냐며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남아서. 지워지지를 않아서.
“하…… 하하…….”
수천 번도 더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없는 세상은 내게 의미가 없다고. 당신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그러니 내가 어찌 되든 이기적으로 굴어 달라고.
그런데 왜 당신은. 만신창이가 된 지금에서까지 당신은.
“죽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습니까!”
차라리 싸우다 죽었더라면. 당신을 지키다 죽었더라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딴 망언들을 지껄이지도 못했을 텐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놀란 고용인들이 뛰어올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 라인하르트를 불러올 때까지 에르도안은 울부짖었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절규하며 오열했다.
* * *
“황태자의 궁에 있을 겁니다.”
발갛게 눈이 부은 에르도안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약간 숙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쪽은 이미 샅샅이 다 찾아봤다만.”
그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부정했다. 퇴궁하자마자 달려온 탓에 외출복 차림이었던 그는 벨키에로트를 만난다는 핑계로 황태자 궁을 수십 번도 넘게 돌아봤으나 누이는 찾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셨겠지요. 숨겨진 공간에 감춰두었을 테니까요.”
“숨겨진 공간?”
“황태자의 궁 복도에서 천사가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을 보셨을 겁니다. 그 그림에 현 황족의 피를 묻히면 숨겨진 공간이 나타납니다. 애쉴은 거기 있을 테지요.”
에르도안에게 향해 있던 붉은 눈동자에 의구심이 깃들었다.
“자네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나?”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애쉴이 죽은 후 벨키에로트를 암살하러 가다 알아낸 거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몇 차례 더 추궁했으나 에르도안이 계속 얼버무리자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저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쉴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알고 있는 건 오직 에르도안뿐이니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 아래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 황족의 피라. 피만 있으면 되나?”
“아니요, 황족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나올 때는 상관없지만 들어갈 때는 황족의 동의가 필요한지라.”
“골치 아프군.”
황실 전체로 놓고 보면 그 후손이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퍼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현 황실은 손이 귀했다. 황제가 비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자식이라고는 침실을 정리하던 시녀에게서 얻은 벨키에로트와 현 황후에게서 얻은 칼리아스 둘뿐이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어 움직일 수가 없으니 벨키에로트 몰래 숨겨진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칼리아스를 회유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나?”
“황태자 궁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꼭 해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는군.”
찰나의 순간 에르도안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것을 보지 못한 라인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버지와 이야기 좀 해 보지. 자네는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어찌…… 라니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자네를 제국 밖으로 내보내려고 준비 중이었지. 소드마스터라지만 기억도 못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그렇고, 애쉴의 부탁도 있었고. 반역자를 계속 숨겨주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서.”
“그 반역자라는 건-”
“누명이겠지. 알고 있다. 벨키에로트의 수법쯤은.”
꼴에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미친놈 같으니라고.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라인하르트가 폭언을 퍼부었다.
“어찌 되었든 자네는 지금 반역자야. 그 미친놈이 황태자인 이상 영원하겠지.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만 떠나고 싶거든 부담 없이 말해 줘도 괜찮아. 애쉴의 부탁도 있고 하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부디 도와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벌떡 일어난 에르도안이 무릎을 꿇었다.
“애쉴을 지키지 못한 건 전부 다 제 탓입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기실 라인하르트나 팔라디움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들 에르도안은 애쉴을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벨키에로트를 암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간 그가 벨키에로트를 암살하지 못한 까닭은 도망자 신분으로 애쉴에게 갈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애쉴을 벨키에로트의 손아귀에서 빼 와야만 했다.
“……그래. 고맙군.”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에르도안을 보며 라인하르트는 깊은숨을 토해내었다.
그동안 기억 잃은 그를 볼 때마다 속이 부글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흠씬 두들겨 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쉴의 부탁 때문에 참았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를 괴롭혀 봤자 뭐 하겠나 하며 삼켰다.
어제만 해도 원수 같은 놈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비록 몇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애쉴을 걱정하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겠다 다짐하며 라인하르트는 무릎 꿇은 에르도안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소공작께서 저를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일이 어디 예상하는 대로만 흘러가겠습니까.”
역사적인 날이었다. 한 번도 황태자를 배신한 적 없던 팔라디움 공작가의 후계자와, 황태자가 아닌 제 2황자의 사적인 밀회가 이루어지는.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봄을 알리는 빗방울이 사납게 쏟아졌다. 이따금 번개가 내리치기도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나운 날씨에 수도 외곽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두 남자가 만났다.
미리 도착해 있던 라인하르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칼리아스가 피식거렸다. 그는 금발에 남색 눈동자를 지닌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로 애쉴과 비슷한 나잇대였으나 황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날 한번 제대로 잡으셨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진흙탕에 마차 바퀴가 몇 번이나 빠졌던지. 그냥 돌아갈까 하다 소공작의 얼굴을 봐서 왔습니다.”
“저런. 하마터면 걸어서 오시게 할 뻔했군요.”
칼리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족을 궂은 날씨에 불러냈다는 것으로 기선제압 좀 해 보려 했거늘. 자신이 반드시 약속장소에 나오리라 생각하는 저 자신감이 거슬렸다.
그러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라인하르트였고 이 모임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아쉬운 건 본인이었으므로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님의 눈을 피해 나를 만나려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황태자를 바꾸려 합니다.”
라인하르트의 뒤에 로브를 뒤집어쓴 채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에르도안이 소리 없이 놀랐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탓이다.
칼리아스와 그의 뒤에 있던 호위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직 가게에서 물건을 바꾸듯 황태자를 바꾸겠다 말을 꺼낸 라인하르트만이 태평한 표정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아무렴 농이겠습니까?”
진지한 표정이 된 칼리아스는 손끝으로 소파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 들어 형님의 입지가 좁아지기는 했다. 귀족원과의 협의 없는 군대 사용 및 실종과 더불어 팔라디움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약간, 아주 약간 좁아진 것일 뿐. 그를 지지하는 귀족의 수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 팔라디움이 형님을 아예 외면한다면……?
팔라디움이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국 내 하나뿐인 공작가이자 대를 이어 내려온 황태자들의 절대적인 지지 가문으로서 무시 못 할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의 천한 태생이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팔라디움이 지키고 있어서가 아니던가?
당장 팔라디움이 떨어져 나간다 해서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하물며 단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칼리아스를 지지한다면 많은 피가 흐를지언정 황태자가 되는 것이 꿈은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왜, 어째서?”
그러나 칼리아스는 당연하게도 라인하르트의 손을 바로 잡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다는 듯 예리한 눈길로 맞은편을 훑었다. 라인하르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
“자고로 군신의 관계란 상호 간의 존중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팔라디움은 황태자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강인한 방패가. 그러니 황태자는 날카로운 검과 같은 존재가 되어 제게 충성을 맹세하는 팔라디움을 지켜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벨키에로트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팔라디움을 물어뜯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서 가셨을 겁니다.”
팔라디움이 황태자를 저버린다는 건 자칫 ‘웨이센 황실’ 전체를 저버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므로 공작은 일을 벌이기 전 황제를 이해시키고자 황궁으로 향한 참이었다.
“혹시나 하고 말씀드리자면 이 일은 제 독단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제의하신 겁니다.”
“……공작이?”
평생 놀랄 일을 오늘 다 놀라는 것 같았다.
칼리아스는 표정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대체 형님께서는 팔라디움의 뭘 건드리셨길래 그 고지식한 공작마저 등을 돌린 것인지 의아해졌다. 때와 장소도 잊고 물어보려 하자 라인하르트가 고갯짓 한 번으로 말을 끊었다.
“깊은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어쩌시겠습니까?”
“반대로 묻지요. 내가 손을 잡지 않겠다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제안 드린 게 아니겠습니까.”
“자신만만하군요. 하지만, 소공작.”
미간을 살짝 찌푸린 칼리아스가 몸을 라인하르트 쪽으로 기울였다.
“세상은 펜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 말씀하시다니 이유를 모르겠군요.”
날이 갈수록 황제의 병환이 깊어짐에 따라 대부분의 실권이 벨키에로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그중에는 각 지역을 수호하는 기사단과 더불어 황실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그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귀족원과 협의를 해야 한다지만. 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들이 벨키에로트의 편이 되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팔라디움이,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저를 지지한다 한들 한낱 귀족들의 사병이 황실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아 칼리아스가 라인하르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라인하르트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뒤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에르도안이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칼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에르도안이 뒤집어쓰고 있던 것을 벗자마자 안색을 바꾸며 뒤쪽의 호위병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나. 당장 체포하지 않고!”
“진정하십시오, 황자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소공작, 아니, 공작께서는 제정신이 아니신 게 틀림없군요. 내전을 일으키겠다 하신 것도 모자라 반역자까지 거두셨으니 말입니다!”
칼리아스가 노호했다.
저와 아버지를 비난하는 내용에 기분 상한 라인하르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황자의 명령대로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미하게 몸을 틀어 그들을 피한 에르도안이 발도하는 순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보랏빛의 검기가 이목을 사로잡은 탓이다.
“서, 설마…….”
“소드마스터?”
“…….”
세 명의 호위기사 중 유일하게 한 명만이 입술만 잘근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청색 머리칼에 갈색 눈을 가진, 별다르게 외모가 특이하지는 않은 자였다.
에르도안은 무심한 눈길로 저를 에워싼 기사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그러다 군청색 머리칼의 기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비릿하게 웃으며 튕기듯 쏘아져 갔다.
“너였구나, 쥐새끼가.”
“빌어먹을!”
쾅. 목표물을 잃은 보랏빛 검이 마룻바닥을 갈랐다. 평범한 기사로 변장하고 있던 남자가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서슬 퍼런 눈이 된 에르도안은 그를 쫓았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빗물을 뚝뚝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끌고 돌아왔다.
“이, 이게 무슨! 펠로드 경!”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칼리아스가 벌떡 일어나며 숨 막히는 음성을 토해냈다. 라인하르트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에르도안의 난데없는 행동에 당황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쥐새끼가 도망치려고 하던지라.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에르도안은 두려움이 깃든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던 기사들에게 초주검이 된 남자를 던진 후 비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별안간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크, 클라우드?”
“……?”
클라우드라면 형님을 지지하는 델라스 백작가의 장남 아니던가.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것인지.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에르도안을 노려보던 칼리아스가 쓰러져 있는 기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군청색 머리칼의 기사가 아닌 백발의 남자 클라우드 델라스였다.
“왜 이자가 여기에 있는……. 아니, 아니. 지금 펠로드 경과 델라스 영식이 동일인물이라는…… 그런……?”
에르도안에게 향한 칼리아스의 눈동자가 제 형제의 것과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어두운 남색 빛으로 물들었다. 라인하르트 또한 칼리아스와 같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에르도안을 돌아보았다.
졸지에 두 권력자의 시선을 받게 된 에르도안은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듯하더군요.”
“……마법을 두르고 있는지 정도는 입단할 때부터 다 검사를 하는데.”
“단순한 마법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세한 건 조사를 해 보면 아시겠지요.”
믿었던 기사가 형님이 심어놓았던 첩자라는 것에 충격받은 칼리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라인하르트가 질문했다.
“이 자가 정체를 숨긴 클라우드였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순간적으로 느꼈던 살기가 전에 싸웠던 자의 것과 같아 알게 되었습니다.”
“전이라 함은. 설마?”
에르도안이 가볍게 수긍했다.
비로소 라인하르트는 애쉴의 납치 배후에 클라우드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팔다리를 끊어놓을 것 같았다.
“이야기가 잠시 샌 것 같습니다만. 아까 드리려던 말씀, 지금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자 짧게 헛기침을 몇 번 한 에르도안이 칼리아스를 바라보았다. 큰 충격으로 그가 반역자라는 것도 잊은 칼리아스는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께서 멋대로 군대를 움직인 사건 말입니다. 그 전말을 알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이 입을 열 때마다 칼리아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미리 들어 알고 있던 라인하르트마저 재차 치를 떨었을 정도이니 오죽했을까.
그날,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칠 때까지 오두막의 밀회는 끝나지 않았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인 것 같은데.”
경비병과 시종들의 눈을 피해 아기 천사들이 말을 타고 있는 그림 앞에 다다른 칼리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그의 옆에 있던 에르도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두 명이 이쪽으로 올 겁니다. 빨리하시죠.”
“아아, 알겠다니까.”
멀리서도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에르도안의 능력 덕분에 황태자 궁에 진입한 후로 마주친 자는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 그마저도 황자인 칼리아스를 보자마자 황망히 머리를 조아렸지만.
지금 하고 있는 걸 들킨다면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위험한 일에 엮이게 된 것인지. 칼리아스는 다시금 한숨을 쉬며 지니고 있던 단검으로 제 손바닥을 주욱 찢었다.
팔라디움의 손님인 양 위장한 에르도안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낸 건 칼리아스였고, 벨키에로트가 눈치채는 것을 방지하고자 그를 찾아가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는 건 라인하르트였다. 본래 팔라디움 공작이 하겠다 한 일이었으나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대비해 라인하르트가 자원한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크흠. 실언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날 밤. 칼리아스는 라인하르트와 손을 잡았다.
에르도안이 반역자가 아니라는 말을 온전히 다 믿지는 못했으나. 대화를 더 이어나가다 보니 팔라디움이 반역자를 숨겨주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거니와 공작과 손을 잡는다면 소드마스터가 제 휘하에 들어온다는 달콤한 유혹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소드마스터는 있는지도 몰랐던 첩자 클라우드까지 잡아 주었다. 잡아내지 못했으면 그다음 날 소공작과 저는 사이좋게 형님에게 끌려가 시체가 되었으리라.
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반역자에게 상을 내리기도, 그렇다고 체포를 하기도 애매했다. 때문에 칼리아스는 약조했다. 모든 일이 끝나는 대로 반역 사건의 진상을 다시 조사해 주겠다고. 제대로 조사만 된다면야 누명으로 끝날 일이었으니 에르도안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형님께서 건드셨다는 게 대체 뭡니까?’
대체 뭘 건드렸길래 공작가와 소드마스터의 분노를 동시에 받게 된 것인지. 뭔지를 알아야 저도 조심할 게 아닌가.
그런 의미를 담아 물어보자 라인하르트의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농이 지나치시군요.’
‘농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속사정과 함께 반역자와 형님의 궁에 잠입해야 한다는 현실을 들은 황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무를 수도 없는 것인지라 마지못해 그러겠노라 했다. 이 대가는 아주 톡톡히 받아낼 거라 경고하면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황족의 피를 빨아들인 그림이 밝게 빛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사라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로의 입구가 되었다.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다는 듯 불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칼리아스가 먼저 발을 들여놓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짧은 통로의 끝은 화려한 복도였다. 어찌 보면 이제까지 있던 복도와 비슷해 보였으나 세월의 흐름이 담긴 물건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아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런 장소가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칼리아스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무심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에르도안을 의식하고 멋쩍어진 마음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더 필요한 게 있나?”
“황궁 주치의를 대기시켜 주십시오.”
기실 라인하르트는 칼리아스에게 애쉴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려 했다. 황태자와 대립하고 있는 인물이긴 했으나 칼리아스 또한 황족이었고, 공녀가 황궁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걸 들은 이상 어찌 나올지 우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겠다며 칼리아스가 완강하게 나간 탓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아닌 말로 칼리아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황태자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밀 공간을 외부인이 알고 있다는 것도 모자라 출입까지 시켜 달라 청하니 마땅한 사유가 있어야 들어주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광증이라도 있으신 건가.’
라인하르트의 걱정과는 달리 칼리아스는 오히려 납치당한 애쉴을 걱정해 주었다. 형님께서 그 정도로 미치셨을 줄은 몰랐다며 벨키에로트를 욕하는 것은 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도안의 말을 들은 칼리아스는 혹시 모르니 신관도 대기시켜 놓겠다며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이토록 호의적인 까닭은 본래의 성품 탓도 있거니와 벨키에로트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럼, 나중에 보지.”
할 일을 끝낸 칼리아스가 통로로 사라지자 복도에는 에르도안만이 남았다.
“도와주어야 하나? 기억을 찾는 데 도와준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가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단테도 함께 있었다. 에르도안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
“그건 당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그러셨던 것 아닙니까. 규칙이니 뭐니 하며 도와주지 않으실 거라는 것, 다 압니다.”
“다행이군. 잘 알아서.”
“뭐, 딱 한 가지 도와주십사 하는 게 있긴 합니다. 벨키에로트 그 개자식을 처리하는 것 말입니다.”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게 직접 죽여 주셨으면 좋겠군요.
살기등등하게 에르도안이 중얼거렸다. 단테는 한번 생각해 보지, 하며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후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출발하기 전 에르도안은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힘을 운용하기엔 최적의 상태였다. 그는 제 기운을 곳곳에 퍼뜨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는 한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에 애쉴이 있으리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검을 빼어 든 에르도안은 앞으로 나아갔다.
* * *
“크아악!”
“빨리 전하께, 전하께 알려야…… 컥!”
단말마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이 괴물 새끼가!”
“아아악! 내 팔, 내 팔!”
시뻘건 피가 사방에서 솟구쳤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기며. 에르도안은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만으로 이루어졌던 감시자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폭풍 속의 낙엽처럼 스러져갔다. 누구 하나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베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도안은 숨겨진 공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무늬 없는 문의 앞에 다다랐다. 턱을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 문을 열자마자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고, 상대방의 심장에 자루가 들어갈 만큼 검을 깊게 박아넣었다. 이제 그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빛의 연기가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코가 아릴 만큼 매캐한 냄새였으나 에르도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의 중앙까지 달려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으로 길게 선을 그어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훼손한 후, 그 한가운데에 축 늘어져 있던 여자를 안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매우 야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보다 너무 가벼워져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에르도안의 심장이 무너져내렸다.
“애쉴!”
피가 끓는 음성으로 불렀으나 굳게 닫힌 눈두덩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도 지나치게 차가웠다.
검을 내려놓은 에르도안은 떨리는 손을 그녀의 코끝에 가져다 댔다. 미약하긴 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숨은 쉬고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늦었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투명한 눈물방울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닦아 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에르도안은 오열했다.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여자를 꼭 껴안고 슬피 울었다.
그때였다.
“……아.”
아주 작은 신음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에르도안은 다급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그 안에 있던 적안이 살포시 드러났다.
분명 제게 향해 있는데. 저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며 에르도안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몰라.”
멀거니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애쉴이 별안간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몰라요, 몰라…….”
“……애쉴?”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만…… 그만!”
발악하듯 소리 지른 애쉴이 몸을 뒤틀었다. 놀란 에르도안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싫어, 그만해, 싫어!”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아아아, 제발 그만. 그만!”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는 건 없어요. 애쉴, 제발!”
몸부림치는 여자를 억누르며 에르도안이 울부짖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내버려 둬서 미안하다고. 이 지옥 같은 곳에 홀로 있게 해서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애쉴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적적으로 발버둥이 뚝 멈췄다. 그가 이곳을 나가자고 할 때였다.
“나가, 자고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애쉴이 되물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알아듣는 것 같자 에르도안이 황망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턱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여길 나갈 거예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안 돼요. 그건, 그건…….”
애쉴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있었다.
“애쉴?”
“안 돼요.”
“왜…… 어째서?”
“그 사람이 죽을 테니까…… 내가 여길 나가면…….”
삽시간에 차오르는 눈물들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나가면 안 돼요.”
말문이 막힌 에르도안은 하염없이 눈물만 떨구었다. 일어났을 때부터 쭉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던 애쉴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러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기억도 어떻게든 떠올려 볼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애쉴.”
목멘 음성으로 에르도안이 그녀를 불렀다. 가녀린 어깨를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저 여기 있어요. 지금 당신의 곁에 이렇게 있어요.”
“…….”
“죽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절대로 죽지 않고 곁에 있을게요.”
에르도안은 우는 아이를 다독이듯 쉴새 없이 속삭였다. 애쉴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만 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연인이 오랜만의 재회를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 미안해서 어쩐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차디찬 비아냥이 공기를 찢었다. 반사적으로 문가 쪽으로 몸을 튼 에르도안이 기함했다.
“벨키에로트!”
“역시 살아 있었군.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서슬 퍼런 눈빛의 기사들을 배경으로 벨키에로트가 히죽 웃었다.
에르도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애쉴을 뉘어놓고 검을 집어 든 그는 그대로 벨키에로트에게 달려들었다. 기세등등한 살기에 기사들은 긴장으로 몸을 뻣뻣이 굳히면서도 주군의 앞을 막았다.
수백 명이 가로막는다 한들 벨키에로트를 베는데 방해될 건 없었다. 검을 크게 휘두르자 허공에 기사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에르도안은 곧장 황태자의 목덜미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검이 그에게 닿는 것보다 황태자가 입을 놀리는 게 더 빨랐다.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도록.”
“네…….”
뒤쪽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음성에 놀란 에르도안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자리에서 멈춰 선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벨키에로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애쉴?”
조심스레 불러보았으나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초점이 더 흐릿해진 게 둘만 있을 때보다 더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벨키에로트가 키득거렸다.
“이를 어쩌지. 애쉴은 내 말만 듣는데.”
“벨키에로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에르도안이 그의 목덜미에 검을 겨눈 채 이를 갈았다. 당장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았으나 애쉴이 정말 그의 말을 따른다면 황태자의 목을 치는 순간 애쉴도 죽을 것이기에 움직이지를 못했다.
벨키에로트는 손을 휘휘 저어 자신과 에르도안의 사이를 막아서려 하는 기사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에르도안의 멱살을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이죽거렸다.
“보나 마나 칼리아스와 라인하르트, 두 놈의 합작품이겠군.”
“소공작께서는 어떻게 되었지?”
“자꾸 귀찮게 굴길래 잠깐 따돌리고 왔지. 왜, 죽일 줄 알았나?”
벨키에로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팔라디움은 버릴 수가 없는 패라서. 애석하게도 말이야.”
미친 새끼.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에르도안이 욕설을 뇌까렸다.
“가능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긴 했는데. 개가 주인을 물었으니 봐줄 필요가 없겠지. 애쉴.”
강아지를 부르듯 이름을 부르며 손짓하자 애쉴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경악한 에르도안이 검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제발 정신 차리라며 절실히 소리쳤으나 세뇌당한 여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자 벨키에로트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곧장 혀를 깨물라 명령하겠다며 협박했다. 에르도안은 그를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몸을 굳혔다.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는 제 휘하의 기사들에게 고갯짓했고, 그들은 에르도안을 무장해제시킨 후 강제로 꿇려놓는 한편 애쉴을 주군에게 바쳤다.
흐느적거리는 여자를 품에 가둔 채 턱을 고정시켜 무릎 꿇은 남자를 보게 한 황태자가 나지막이 지껄였다.
“진작 이럴 걸 그랬어. 겨우 이거 하나로 공작가와 소드마스터 둘 다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는 애쉴을 인질 삼아 공작가를 제게 복종하도록 만든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대로 치워 버릴 심산이었다. 그 생각을 눈치챈 에르도안은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는 기색으로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벨키에로트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에르도안을 포박하고 있던 기사가 황태자 전하께 예를 갖추라며 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커헉!”
분노한 에르도안이 몸을 크게 비틀었다. 있는 힘껏 기사의 복부를 후려친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빼앗아 상대방의 급소에 찔러넣었다. 기겁한 다른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달려들려던 찰나. 벨키에로트가 나른한 음성으로 저지했다.
“그만.”
주군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여유로운 미소를 띤 황태자는 검을 제게 겨눈 채 저를 쏘아보는 남자를 비웃었다.
“날뛰어봤자 소용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래, 그 말대로다. 애쉴이 그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자신은 저 빌어먹을 놈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르도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미세한 틈이라도 생기면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그러나 벨키에로트는 그런 기회가 생길 때까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릇 소드마스터란 검을 쥐고 있지 않아도 사람 하나쯤은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신호를 보내자 휘하의 기사 중 하나가 지니고 있던 단검을 건넸다. 벨키에로트는 무게를 가늠하듯 단검을 몇 번 흔들어보다 에르도안을 보며 뱀처럼 속살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선택권을 주지.”
큰 자비라도 내린다는 양 황태자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여기에 누구의 피를 묻힐지.”
* * *
애쉴은 앞에 있는 남자를 무감각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는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칼에 자수정처럼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저를 보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애쉴. 정말 미안해요.”
뭐가 그리 미안하다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아 애쉴은 고개를 기울였다. 옆에서 기사가 검을 겨누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 두려움 없이. 목덜미에 닿아 있던 날카로운 검날에 은발 몇 가닥이 잘려나가 허공을 부유했다.
그녀는 명령을 받았다. 저 단검에 누구의 것이라도 좋으니 심장에서 나온 피를 묻혀오라고. 애쉴은 망설이지 않고 제일 쉬운 방법을 택하려 했다. 제 것에 찔러넣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부리나케 단검을 빼앗아가더니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크게 혼날 텐데. 애쉴은 뒤쪽을 힐끔거렸다. 다행히도 화를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주인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기분 좋은 것처럼.
빨리 달라는 의미로 단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단검을 자신의 뒤쪽으로 숨기며 그녀의 눈가를 쓸고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있지도 않은 눈물을 닦아 주려는 것처럼.
“절대로 죽지 않겠다 했는데. 그 약속, 이번에도 못 지키게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약속?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더욱 슬피 울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물어보고 싶은데.
명령이 없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애쉴은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갓난아이가 세상을 알아가고자 손에 닿는 것들을 입에 넣는 것처럼 눈물 젖은 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짜고, 썼다.
이제까지 먹었던 것들과는 다른 맛이었다.
어쩐지 한 번 더 맛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반복했는데도 그의 눈가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꼭 끝없이 솟아나는 숲속의 샘 같았다.
‘……이상해.’
그녀는 무심코 제 감정을 곱씹어보았다. 이상해. 이 남자는 정말로 이상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이 남자는 이상했다. 매번 다른 약들을 먹이고 왜 효과가 없느냐며 다그치던 이들과는 달랐다.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다. 다그치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젠 괜찮다며. 다 끝났다며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괜찮다는 게, 다 끝났다는 게 뭐를 의미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말들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졌어서. 그래서.
‘괜찮아요.’
그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돌려주며 눈가를 지분거렸다. 그도 저처럼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럴수록 남자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한 걸까 하면서도 애쉴은 그를 달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손으로 닦아 주기엔 끝이 없어서.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또다시 맛보고 싶어서 발돋움을 했다.
“……!”
검이 스쳤는지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놀란 표정이 된 남자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양어깨를 잡고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가까이 대 주었다.
애쉴은 살짝 혀를 내밀어 그의 눈가를 핥았다. 그러다 핥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입술을 가져다 대고 키스하듯 눈물을 삼켰다.
두 눈에 고여 있는 물기를 다 삼켰을 때, 그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애달프게 웃고 있었다.
“사랑해요.”
“사랑…… 해요……?”
눈물을 먹어서였을까. 신기하게도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나왔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긴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쉴은 눈을 깜빡거렸다.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네. 애쉴,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그 혼란스러움은 살며시 웃으며 수긍한 남자가 입을 맞춰오자 더욱 가중되었다.
그의 키스에서는 눈물 맛이 났다.
애쉴은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하자 쿡쿡 쑤셔오던 심장을 누군가가 깃털로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색하면서도 익숙하고, 낯설면서도 그리웠던 것인지라. 애쉴은 그에게 달라붙었다.
긴 은빛 실선을 이으며 두 입술이 떨어졌다. 그녀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남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애쉴.”
“사랑해요…….”
아이가 어미를 따라 하듯 그가 뱉은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던 애쉴이 멈칫했다.
사람들은 모두 저를 부를 때 ‘애쉴’이라 불렀다. 그러니 ‘애쉴’은 저를 칭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를 칭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알 수가 없어 불안하다는 기색으로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사실대로 모른다고 하면 이 남자 또한 화를 낼 것이다. 뒤쪽에 있는 주인처럼.
그러나 남자는 도리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에르도안.”
“에르…… 도안?”
“에르도안 트라펠로. 그게 제 이름입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에르도안. 에르도안…….
혀끝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던 여자의 적안이 작게 물결쳤다. 그의 이름은 나비가 꽃에 앉은 것처럼 나풀나풀 날아와 가슴에 콕 박혀 들었다.
이런 느낌을 언젠가 받아 본 것 같은데. 언제였을까.
“제 이름을 불러주실 수 있나요?”
“……에르도안.”
“한 번만 더.”
“에르도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에르…… 도안…….”
그의 이름을 부를수록 무표정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초점 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한 남자는 짧은 입맞춤 후 거리를 벌렸다.
멀어지는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사슬에 칭칭 동여매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뚱어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눈 한번 깜빡했을 뿐인데 자신은 주인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으로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에르도안, 에르도안…….’
방금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무언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남자는 그녀의 뒤편을 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먹을 듯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팔라디움은 절대 건들지 않겠다는 것, 꼭 지켜라.”
“아무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 죽일까.”
사랑스럽다는 듯 말한 주인이 뺨을 쓰다듬었다. 이제까지는 아무 느낌도 없던 그 동작이 지금은 마치 괴물의 표피에라도 닿은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애쉴은 몸서리치며 작게 신음했다.
“으…….”
“가만히 있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에 깃든 빛은 그대로였다.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어야 하지? 왜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야?
‘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을 테니까.’
아직 남아 있는 약 기운이 악마처럼 소곤거렸다. ‘그 사람’이라는 단어에 눈동자의 빛이 훅 꺼져 들었다.
그래, 맞아. 이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죽을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내 주인이야…….
‘그 사람이 누군데?’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애쉴이 자답했다. 누구냐니, 당연히…….
‘……?’
떠올라야 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였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누구였지? 나는 누구를 살리려 한 거지?
“애쉴이 보지 못하도록 해 줘.”
“그 정도 부탁쯤이야. 들어줘야지.”
속박하고 있던 팔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기사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잡아당겼다. 애쉴은 방 밖으로 끌려나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내리꽂을 듯한 기세로 제 심장 위에 단검을 치켜들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살리려 했던 사람은. 그 사람은…….
모르겠어. 누군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아냐. 이건 절대 아니야……!
“안 돼!”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지른 애쉴이 저를 잡은 손을 뿌리쳤다.
* * *
“안 돼!”
“애쉴!”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던 보랏빛 눈동자가 커졌다. 에르도안은 황급히 달려나가며 제게로 오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있던 벨키에로트가 애쉴을 잡아채 제품에 가두는 게 더 빨랐다.
“하, 정말. 예상이 안 되는 여자로군.”
“안 돼요, 죽지 말아요. 죽으면 안 돼!”
“입 다물어.”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며 벨키에로트가 낮게 경고했다. 잠깐 멈칫한 애쉴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힘껏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하…….”
꼬여가는 상황에 벨키에로트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었다. 한 번 걸어둔 세뇌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거라더니, 절대로는 무슨.
여길 나가자마자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의 혀를 잘라버리겠다 다짐하며 손을 움직였다. 희고 가는 여자의 목덜미에 실선이 그어지더니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애쉴의 세뇌가 풀린 것을 눈치채고 검을 휘두르려던 에르도안의 움직임이 멎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를 포위했다.
“네가 움직이는 것과 내가 움직이는 것. 둘 중 누가 더 빠를까?”
“…….”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하던 거 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보여 주겠다는 듯 벨키에로트의 검이 살갗에 깊게 파고들었다.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이를 갈던 에르도안이 천천히 단검을 들어 올렸다.
물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와 공허한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그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켠 애쉴은 안 된다며 외치던 것을 멈췄다.
에르도안이 ‘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만 없으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요.”
미약한 부름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를 담은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표정 없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히나 싶더니 톡, 떨어졌다. 애쉴은 울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이름을 몰라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중얼거리면서.
“사랑해요, 에르도안.”
“……하.”
이러면 죽을 수가 없는데.
에르도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싶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의 날 방향이 아래로 내려갔다. 상대방의 행동 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벨키에로트는 이대로라면 일이 틀어질 것을 직감했다.
그는 이를 갈며 곧장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죽여!”
황태자의 주의가 느슨해진 틈을, 애쉴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목덜미에 닿아 있는 검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더욱 깊이 박힐 수 있도록. 제 목숨이 끊어질 수 있도록.
그 돌발 행동에 경악한 벨키에로트는 순간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애쉴의 모든 행동을 두 눈에 담고 있던 에르도안이 절규하며 달려들었다.
“애쉴, 안 돼!”
그의 고함에 놀란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에르도안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기사들을 베어 넘겼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벨키에로트는 다급히 애쉴을 저지했다.
그러나 애쉴은 이미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벨키…… 이 개자식……!”
“뭣들하고 있…… 빨리……!”
사방에서 우레같은 고함이 울렸으나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해진 몸에 깊은 상처, 거기에 심한 출혈까지 겹쳐지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부디…… 죽지 않기를.’
그에게 향한 간절한 바람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 후로는 온통 암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