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새벽이 오기 직전
“잘 잤어요?”
눈을 뜨자 진한 머스크 향과 달콤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잠이 덜 깬 애쉴은 게슴츠레한 눈을 비볐고, 품속의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던 에르도안은 이마에 살짝 입술을 내렸다.
그들은 지금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고프죠, 저녁 먹을래요?”
그의 질문에 그제야 지금이 밤임을 알았다. 눈을 뜰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는 가운데 기상 시간도 제멋대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에르도안이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이불이 벗겨지고 그 속에 있던 옷이 드러나면서 애쉴은 오늘도 그가 누군가와 싸우고 왔음을 깨달았다. 어두워진 표정에 에르도안은 그녀가 제 얼굴을 보도록 턱을 들어 올렸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요.”
“……저, 붕대는-”
“제가 다 갈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타이르듯 말한 에르도안이 가볍게 키스했다.
에르도안이 이기적으로 굴라 한 이후. 애쉴은 더 이상 수도에 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우는 물약이나 달루아에 관한 것도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다. 상처가 있을 만한 곳을 볼 때마다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에르도안이 주제를 돌리며 깊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슬슬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게 버거워졌다. 계속 움직이고 있으면 괜찮은데 자다가 일어난 직후에는 늘 이 모양이었다. 키스의 여운에 얼굴을 붉힌 채 끙끙거리며 몸을 추스르려 하자 에르도안이 그녀를 확 안아 들었다.
“가져 왔으니까 여기에서 먹어요.”
“이, 이러고요?”
지금이 어떤 자세냐 하면, 에르도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고 애쉴은 아이처럼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그런 자세였다. 애쉴이 귓불까지 새빨갛게 붉히며 부끄러워하자 에르도안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싫어요?”
“시, 싫은 게 아니라…….”
서로를 사랑한 지는 참 오래되었는데. 서로의 비밀을 알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지라.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토록 자극적일 수가 없었다. 애쉴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고, 에르도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금방이라도 날뛰려 하는 제 속의 짐승을 잠재워야 했다.
애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욕망을 참아내던 그가 짓궂게 말했다.
“이번에도 먹여 줄까요?”
“아, 아뇨!”
프레디아에 막 도착했을 때를 상상하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에드가 에르도안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다 알게 된 지금은…….
황급히 고개를 저은 애쉴은 그가 가져온 음식을 허둥지둥 입에 넣었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먹으라고 잘게 웃다가, 문득 장난치고 싶어져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핥았다.
“흐읏.”
깜짝 놀란 애쉴이 묘한 신음과 함께 몸을 확 움츠렸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저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관통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들고 있던 그릇도 그만 놓칠 뻔했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큭큭거렸다.
“왜 그래요?”
“그, 지금, 무슨……!”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 먹여 달라는 뜻인가요?”
그가 손을 뻗자 애쉴이 그릇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럼 왜 안 먹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먹을 거예요.”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가 목덜미를 핥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간신히 대답한 애쉴이 포크로 샐러드를 찍었다. 그러나 채 입에 넣기도 전에 다시 한번 그가 목덜미를 핥았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아랫배가 뭉근하니 조여들었다.
“하으읏, 그, 그만 해요.”
“뭘 그만하라는 건가요?”
“그, 방금 한, 그거요.”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정확히 말을 해 줘야 알죠.”
짓궂게도 에르도안은 아예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댄 채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부드러운 깃털이 목을 간질이는 것 같아서. 애쉴은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러다 그가 왜 먹지 않느냐고 연이어 묻자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려 주세요…… 내려가서 먹을래요.”
“안 돼요. 다 먹을 때까지 못 내려갈 줄 알아요.”
“너무해…….”
“뭐가 너무한데요?”
“뭘 말하는지 다 알고 계시면서도…….”
“제가요? 항상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정확히 짚어 주시지 않으면 모른다고. 바보인지라.”
에르도안이 무해하게 웃었다. 애쉴은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던 식기를 들었다.
“흐으으으-”
기다렸다는 듯 에르도안이 하던 짓을 반복했다. 그녀가 손으로 막으려 하자 식기를 놓지 못하도록 포개 쥐면서.
그는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주 정확히 말해 달라 했다. 왜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도 함께. 그를 멈추기 위해서는 낯 뜨거운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쉴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꾹꾹 참아가며 식사를 했다. 장장 한 시간 동안이나.
* * *
꿈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잠들 때와 일어날 때 모두 그의 품속이었다. 그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부드러이 사랑을 속삭여 주는 말에 깨어나곤 했다.
식사는 언제나 함께였으며 때때로 그에게 안긴 채로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쫓기고 있었기에 며칠마다 은신처를 옮겨 다녀야 했지만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몸이 얼마나 아픈지, 괴로운지도 몰랐다. 그저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애쉴이 눈을 떴을 때. 응당 옆에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누운 자세 그대로 텅 빈 옆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더는 온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아렸다.
요즘 들어 애쉴은 에르도안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퍽 아쉬웠다. 그가 아무리 꽉 껴안아 줘도 체취만 짙어질 뿐 따뜻하다는 감각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비록 그 온기가 마음으로는 전해졌다고 하지만 몸으로도 느껴보고 싶었다. 몇 달 후에는 두 번 다시 닿지 못할 테니까.
“후우…….”
씁쓸한 마음을 달래 가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백날 바라봤자 불가능한 일인 것을. 쓸데없는 상념에 젖어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애쉴은 힘겹게 침대 밖으로 나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역시나 그는 없었다. 사방은 적막하기만 했다.
전에도 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 깨어난 적이. 그때의 그는 먼저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연인을 보며 기쁨과 슬픔이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녀가 마중 나와 준 것에 기뻐했고, 하루 중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 일부분을 날려 버린 것에 슬퍼했다.
오늘도 같은 표정을 지어 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애쉴은 문과 가장 가까운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앉을 수 있을 만큼 멀쩡한 의자가 없어서였다.
할 일 없이 세월의 흐름에 망가진 가구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매번 버려진 집에 숨어들면서 어떻게 침대만은 그렇게도 멀쩡한 건지. 어디서 만들어 오기라도 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설득력이 없지는 않았다. 은신처의 변경은 그녀가 잠든 새에 이루어져 한 번도 보지 못하긴 했지만. 요즘 에르도안이 보여 주는 행동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바닥에서 자도 되니 그러지 말라 해야겠다.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피로가 쌓여서였을까. 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싸우러 나가지 않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스러웠지만 지적하는 족족 말을 돌려 버리는지라 그 주제로 길게 대화해 본 적은 없었다.
애쉴은 발밑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딱딱한 게 조금 불편할 것 같긴 했지만 가득 쌓인 먼지만 닦으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오래 있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갈 것이기도 하고.
그녀는 바닥을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뭐라 할 거면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람. 일찍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게 아닌데. 나도 딱 맞춰서 일어나고 싶은데…… 보고 싶다.’
쾅쾅.
무언가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누군가가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애쉴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두드려진 것이 문이 아니라 심장이기라도 한 듯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에르도안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애당초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이곳으로 온 첫날, 문의 걸쇠가 고장 난 걸 확인한 그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돌아올 것이거니와 이런 산골짜기까지 올 사람이면 열어놓든 잠가놓든 부수고 들어올 테니 굳이 고쳐놓지 않겠다고 했다. 애쉴도 그 의견에 동의했던지라 이제까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라도 되는 걸까? 그녀는 몸을 바짝 경직시킨 채 미지의 인물이 그냥 지나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쾅쾅.
애쉴은 처음으로 에르도안의 의견에 동의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누가 와 있는 걸까. 에르도안은 왜 오지 않는 거지?
천 쪼가리로 만든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어 밖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심장 소리가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고 숨을 죽인 채 벽에 귀를 대고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쾅쾅.
세 번째 소음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숨을 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 집 안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일단 문과 최대한 멀어지기라도 해 보자 하며 발을 옮기던 와중.
끼익, 하며 야속한 마룻바닥이 듣기 괴로운 소리를 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 돌아가려 하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떨리는 눈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문이 열리고 벨키에로트가 보낸 기사들이 쳐들어오리라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바로 그때.
“여기 있는 거 다 아는데 빨리 열지 그래? 슬슬 짜증 나려 하는데.”
신경질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달루아였다.
* * *
그녀가 정체를 밝힌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애쉴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머리끝까지 화난 달루아가 빨리 열라며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자 그제야 허겁지겁 열었다.
달루아는 애쉴을 밀치다시피 하며 들어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꼴은 가관이었다. 온통 엉키고 헝클어져 엉망이 된 머리.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는 얼굴. 본래 검은색인 것 같았던, 지금은 먼지와 흙으로 더러워져 누런 회색빛을 띠고 있는 로브까지.
애쉴은 무의식중에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잔뜩 날이 선 눈빛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정신없어하면서도 예전처럼 목이 졸리지는 않을까 긴장한 표정으로 닫힌 문에 등을 기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상을 구기고 있던 달루아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슷하지만 서로 정반대의 느낌인 적안과 벽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루아가 시선을 돌리며 자조했다.
“이걸 진작 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욕설을 내뱉으며 제가 입은 로브를 툭툭 털었다. 로브에 쌓여 있던 먼지가 나풀나풀 부유했다.
“네가 나를 찾았다며?”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대답할 박자를 놓쳤다. 달루아는 더욱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입이 붙었니? 왜 말을 못 해.”
“……네.”
들릴 듯 말듯 애쉴이 입술을 달싹였다. 놀람과 두려움으로 마구 요동치는 심장을 꾹 누르며 가빠지려는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문고리에 손을 얹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달루아가 답답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어떻게 용케 나를 볼 생각을 했대?”
아아, 이제야 확연히 보였다. 눈앞의 여인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이. 거울을 비춘 듯 외형은 같았으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매사에 자애로웠던 어머니, 프리하. 모든 일에서 한겨울의 벌판을 떠올리게 하는 냉혹한 여자, 달루아. 꼭 닮은 외모로 보아 쌍둥이인 것 같긴 한데. 정말 혈육 관계가 맞을까.
머뭇거리던 애쉴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제가 이모님을 뵙자고 한 건-”
“누가 네 이모님이야. 그 이모 소리 당장 집어치우지 못해?”
기가 찬다는 듯 달루아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분노에 못 이겨 몸을 크게 떨자 하늘색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먼지들이 풀썩 떨어졌다.
“난 너 같은 애 인정한 적 없어. 언니에게도 수십 번은 더 말했지. 그딴 저주받은 운명을 가진 애 따위 당장 버려 버리라고.”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말에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럼에도 달루아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놓치지는 않았다.
언니, 언니라.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니 역시 눈앞의 여자는 어머니의 쌍둥이 이모가 맞았다. 상대방은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자신과 얽히기 싫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건 처음 겪는 일인지라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가 애당초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애쉴은 순응하겠다는 의미로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모래를 씹은 듯 입 안이 까끌거렸다.
“……달루아 님께서는 신녀가 맞으신지요?”
애쉴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달루아가 진저리를 쳤다. 마치 그조차도 끔찍하게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지적하는 대신 얼굴을 확 찌푸리며 대꾸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면서도 그런 걸 묻다니.”
“죄송합니다.”
사죄의 말을 하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상대방이 어머니의 쌍둥이 동생임을 아는 것과 신녀가 무슨 관련이 있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건 과거 황궁 도서관에서 보았던 신녀들의 역사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쌍둥이인 신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신녀가 둘이라며 다들 환호하는 분위기였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던 탓이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밖에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를 볼 수 있는 신녀 또한 반쪽짜리인 것이 밝혀졌다.
미래는 과거를 보지 못하고, 과거는 미래를 보지 못하니. 신녀의 힘이 완벽하게 양분된 사례였다.」
‘어머니는 미래를 보실 수 있었어. 하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하지 않으셨지. 단순히 떠올리기 싫어서 그러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과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숨기고자 하셨던 거라면……?’
번개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는 미래만을 본다. 달루아는 과거만을 본다. 반쪽짜리 신녀. 그것이 두 사람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달루아는 어떻게 에르도안이 제국을 멸망시킬 거란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달루아를 담은 붉은 눈동자가 깊게 침전했다. 어두운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보셨…… 군요. 제가 돌린 시간을.”
“멍청하기만 한 건 아닌가 보군.”
기실 달루아가 본 것은 오직 애쉴이 회귀시켰던 마지막 1년뿐이었다. 모래시계가 폭주함에 따라 에르도안을 기준으로 되돌려진 시간들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기록되지 않은 탓이다. 그 외에 애쉴이 돌린 것들은 같은 구간이 여러 번 반복됨에 따라 여러 겹 쌓인 천처럼 덮여 가려졌다.
그녀의 말을 듣자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애쉴은 이를 악물며 화를 토해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뭐가 말이지?”
“에르도안이 제국을 배신했던 건 과거의 일이잖아요. 지금의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가짜 예언을 하신 거죠? 그 예언 때문에 에르도안은!”
“너 때문이었어.”
사나운 고함이 뚝, 끊겼다.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뒤를 따랐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애쉴은 상대방의 성난 눈초리에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더듬거렸다.
“저…… 때문이라고요?”
“아무렴 심심해서 그랬을까. 내가 그 모래시계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너는 모르겠지.”
한 자 한자 씹어 먹을 듯 말한 달루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문에 달라붙으며 목에 걸린 모래시계를 꽉 움켜쥐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어. 언니가 살아 있을 적으로. 너 같은 걸 가지지 않았을 때로. 언니가 네게 물려주었을 거라 생각하고 너를 찾아다녔었는데. 어느 날 보니 네가 팔라디움의 공녀가 되었다고 하더군.”
달루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내가 공작가랑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팔라디움이란 울타리 속의 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우연찮게 내 과거를 보게 되었고.”
이 시점에 달루아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애쉴이 모래시계를 사용했다는 것을. 모래시계의 규칙상 언니가 살아 있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미련에 포기하지 못했다.
“그걸로 황태자를 속였어. 어차피 시간이 돌아가면 전부 다 지워질 일이니까 과거를 예언처럼 꾸며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달루아는 손을 들어 목걸이에 매달린 모래시계를 가리켰다.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에 애쉴은 몸서리를 쳤다.
“모래시계는 빨갛게 변해 있고. 모래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고.”
그때를 떠올린 여자가 이를 갈았다.
“너 때문에 언니를 살리지 못하게 됐어.”
살기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흉흉하게 번뜩였다. 창백하게 질린 애쉴은 문 쪽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그래도 네가 죽으면 귀속이 풀리고 주인이 바뀌니까. 시간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어. 그래서 널 죽이려 했지. 어쩌다 보니 실패했지만.”
저택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달루아가 조소했다.
애쉴의 목을 조르고 있던 그때.
폭주로 불안정해진 모래시계는 반쪽짜리이긴 하나 진짜 신녀에게 반응해 붉은빛을 뿜었다. 그 빛에 휩싸인 달루아는 잠깐이나마 애쉴이 지하 감옥에서 죽은 후의 장면을 보았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고, 함께 왔던 벨키에로트와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하며 애쉴을 놓아주게 되었다.
그 후 달루아는 모래시계를 통해 보았던 에르도안이라는 남자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과거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애쉴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황태자와 손을 잡았으니 언젠가는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도망쳤다지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달루아가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어찌나 빠른 동작이었는지 애쉴은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막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 남자를 이용했어. 너를 찾기 위해서. 네가 죽으면 모래시계를 가져가기 위해서. 답변이 되었니?”
비꼬듯 말을 던진 달루아가 목걸이에 달린 붉은 모래시계를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황급히 그녀를 밀치며 저항했으나 힘이 달려 역부족이었다.
“언니가 널 어떻게 살렸는데. 하찮은 데 목숨을 내버리다니, 멍청한 계집.”
“놔, 놔주세요!”
“왜 남은 모래가 없는데도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죽을 거 좀 더 일찍 죽어도 되지 않겠어?”
달루아는 모래시계를 더욱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잔인하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애쉴은 눈물이 고인 채로 힘겹게 도리질을 했다. 숨이 막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 돼요. 안, 돼요!”
“어째서?”
어째서냐니. 달루아의 논리대로라면 세상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애쉴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너무 심하게 졸려서 기침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탓이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을 밀어냈다. 그러나 달루아는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애쉴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고 나서야 선심 쓰듯 모래시계를 놓아주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애쉴이 문밖으로 나동그라졌다. 얇은 옷차림으로 눈밭을 구르는 여자를 보며 달루아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싫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애쉴은 몸을 반쯤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툭 치면 깨질 것처럼 새하얗게 변한 얼굴에 달루아가 씨근거리며 비수를 내리꽂았다.
“언니를 죽여 놓고도 뻔뻔스럽게 들고 다니는 그 낯짝이 끔찍하게 싫어.”
“…….”
“언니에게 받은 목숨으로 허튼짓이나 하고. 너 같은 건 그때 그냥 죽었어야 해!”
가슴을 후벼 파는 말에 애쉴이 이를 악물었다. 달루아가 쐐기를 박았다.
“틀림없이 언니도 너 같은 걸 살리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고 있을 거야.”
“아니에요!”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쉴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악을 쓰며 소리쳤다.
“어머니는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하?”
마치 직접 만나 보기라도 한 듯 이야기하는 애쉴을 보며 달루아가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어머니와 직접 이야기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뭐?”
“저는 있어요.”
비록 에르도안이 그 의지를 전해 주었을 뿐이지만.
애쉴은 부르르 떨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달루아를 응시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방금과는 전혀 다른 표정에 달루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죽은 사람과 대화라도 나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달루아 님도 아시겠죠.”
차가운 바람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온도를 느끼지는 못했으나 전신의 감각이 둔해지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쉴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조금 전과 같은 묘한 대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애쉴의 표정이 변했다는 것이다. 기죽어 있던 형상에서 결의에 차 있으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프레디아의, 오웬의 주.”
“그게 뭐 어쨌다고.”
“제가 호수에 빠졌을 때가 그 주였어요. 그때 나타난 어머니의 영혼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한 달루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널 구한 남자에게 언니의 영혼이 씌어 있기라도 했나 보지?”
“아니요. 그 사람에게 제가 있는 곳을 알려 주셨어요.”
“……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어떻게 호수에 빠지자마자 바로 온 건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원하시는 대로 되었을 텐데.”
“그건 그냥 내가 운이 나빠서-”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에르도안이 말해 준 것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작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적안에 굳센 확신이 깃들었다.
“어머니가 알려주셨어요. 한 아이의 몸에 들어가서 저를 구해 달라 하셨어요.”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저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니까.”
그래. 눈앞의 여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프리하이지 달루아가 아니었다. 죽어서도 이승으로 잠시 넘어올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애쉴은 거기에 용기를 얻었다.
“저도 알아요. 제가 배은망덕하다는 것. 어머니가 주신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곧은 눈동자에 달루아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애쉴은 한 손을 가슴께에 얹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알아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게 달루아 님의 심기를 거슬렸다면 사과드릴게요. 혹시라도 피해를 보신 게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네가 그런다고 해서 언니가 살아 돌아오지는-!”
“만일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때로는 시간을 돌리지 않을 거예요.”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달루아가 얼어붙었다. 애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달루아 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만큼 저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죽을 수 있을 정도로요.”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도, 돌리고 싶었어요.”
“…….”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러지 말라 하셨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로 본인을 살리고자 시간을 되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으니까.”
달루아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언니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깨달은 것이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게 마지막으로 받은 부탁이니까.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설움에 목메어 이를 악문 애쉴이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눈으로 쌓인 벌판을 아롱아롱 적셨다.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 있는 게 끔찍하게 싫으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달만 더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께서 제게 살라 하셨으니까, 그 바람을 들어드리고 싶어요. 몇 달만 지나면 달루아 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테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달루아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죄하는 조카에게서 제 언니 프리하의 모습이 보였다.
‘진심이야? 자식은 또 낳을 수 있잖아.’
‘달루아, 너는 아무것도 몰라.’
달루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운명이 꼬인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마다한 언니를.
그녀는 언니가 한순간의 정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숨어 사는 프리하를 찾아갈 때마다 그딴 거 당장 버리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날이 갈수록 말다툼은 더욱 심해졌고, 그 끝에 사이좋은 자매였던 그들은 결국 남남이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프리하는 초라한 몰골로 세상을 떠났다. 갈 곳을 잃은 달루아의 분노는 십여 년 후 만난 조카 애쉴에게 폭설처럼 퍼부어졌다.
그리고 달루아는.
죽어가면서까지 그런 유언을 남길 정도로 언니가 딸을 사랑했음을 깨달은 여자는.
비로소 제 잘못을 깨달았다.
그러나.
잘못을 깨달았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는 애쉴을 싫어했다. 사랑하는 언니의 하나뿐인 파편이라 할지라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간 쌓인 분노가 한순간에 녹아내릴 리 없었다.
하지만…….
달루아는 차디찬 벌판에 맨발로 서 있는 애쉴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러고는 꽁꽁 얼어붙은 애쉴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앞에 서자마자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널 죽이러 온 건 아니었어.”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는 모진 소리를 내뱉지도 않았다.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보자마자 죽였겠지.”
냉정하다 싶을 정도의 차분해진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내리깔렸다. 달루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카를 묵묵히 응시했다.
알고 있었다. 애쉴을 죽이고 모래시계를 빼앗는다 한들 프리하가 살아 있을 적으로는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설사 가능하다 한들 그 반향으로 대부분의 수명을 잃고 자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리라는 것을.
멋대로 궁을 빠져나와 애쉴을 호수에 밀친 건 순전히 충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충동 때문에 달루아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나를 찾았다길래 한 번 와 본 거야. 경고도 할 겸.”
“경고…… 라니요?”
“당했어. 황태자한테. 네가 예전에 당한 것처럼.”
네 과거를 진작 보았더라면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전에 본 것을 떠올린 달루아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애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손등 위의 푸른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만큼.
“서, 설마.”
“도구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싫다더군.”
달루아가 애쉴을 죽이려 했다는 걸 전해 들은 벨키에로트는 격노했다. 그는 유용하나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여자를 애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애쉴과 달리 황궁 바깥에서 그리했다는 것이다.
벨키에로트는 신녀를 오롯이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다. 아무리 숨긴다 한들 귀족도 아닌 여자를 계속 황궁으로 부른다면 남들의 이목이 쏠릴 터였다. 그렇다고 시녀나 황태자비로 만들기엔 달루아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때문에 그는 종종 사찰을 나간다는 명목으로 정체를 숨기고 황궁 밖으로 나가 달루아를 만났다.
“운이 좋았지. 너처럼 황궁에서 당했으면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애쉴과 다르게 반쪽짜리이긴 하나 신녀인 달루아는 초반부터 세뇌에 강하게 저항했다. 이따금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다.
철두철미한 벨키에로트가 직접 관리했다면 거기서 허무하게 끝났을 텐데. 그보다는 허술한 수하의 관리하에 있던지라 달루아는 정신이 나간 척 연기하며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구름이 달을 삼킨 어느 어두운 밤. 달루아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쳤다. 그녀가 사라진 걸 알아차린 수하들은 바로 쫓아왔다. 코앞까지 쫓아온 그들을 보며 포기하려던 그때.
그녀는 애쉴이 의뢰했던 정보 길드의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벼락 맞을 인간 같으니.”
달루아는 애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대신 황태자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해쓱해진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애쉴이 더듬거렸다.
“그,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저희의 위치를 자의로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아니, 잠깐. 과거만 볼 수 있을 뿐 미래는 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혼란스러워하자 한 차례 뜸을 들이며 격앙된 감정을 갈무리한 달루아가 찬찬히 설명했다.
“그 남자 때문이야. 찌꺼기의 힘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에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게 되었지. 신녀가 아닌 너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찌꺼기?”
“찌꺼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간을 되돌린 거였어?”
달루아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헛숨을 토해냈다. 언니는 왜 그런 것도 안 알려주고 모래시계를 넘긴 거냐고 한탄하면서.
“그래서였군. 멋대로 일어나 세상에 개입하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럼 이것도 모르겠군. 그 남자,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망가져 있어. 반쪽짜리인 나를 감지하지도 못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망가졌…… 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에르도안도 저처럼……?”
차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저처럼 죽느냐, 라고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변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심하다는 눈빛이 된 달루아가 혀를 쯧쯧 찼다.
“먹히지만 않았으면 상관없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가정하에 말이지.”
“충분한…… 시간?”
“몸에 쌓인 찌꺼기의 힘이 빠져나갈 충분한 시간.”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세뇌당하고 있던 동안 자신이 끊임없이 위치를 알려주었기에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을 거라며 달루아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크게 뜨인 적안이 마구 요동쳤다. 애쉴은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충분한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죽겠지. 아니면 먹히던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어투로 달루아가 간단히 정리했다.
“안 돼요!”
어쩐지 날이 갈수록 얼굴에서 핏기가 없어지더라니. 버럭 소리친 애쉴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그를 찾아내고자 뛰어갈 기세였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온 무정한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가서 뭐 하려고?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몸은 문 쪽을 향한 채 뒤를 돌아보는 자세가 된 애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달루아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포기하는 게 나을 거야. 똑같은 내용을 내가 황태자에게도 말해 버렸거든.”
그래서 잠시도 쉴 틈 없이 군대를 보내 몰아붙이고 있는 거겠지. 달루아가 중얼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애쉴은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문고리를 꽉 잡았다. 그러다 문득 찾아낸 모순점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달루아 님께서 도망치셨으니까 황태자는 더 이상 에르도안의 위치를 모르지 않을까요? 그럼 이번만 넘기면, 그러면…….”
“아니지. 그러려면 진작부터 몰랐어야지. 내가 어제 도망친 것도 아닌데.”
달루아는 소매를 걷어 팔뚝의 흉터 자국들을 보여 주었다. 형태가 획일화되어 있고 굉장히 깊어 보이는 상처도 몇 개 있는 것이 피를 보고자 일부러 긁은 것 같았다.
“내 피로 만든 마법 덕분에 내가 없어도 그쪽은 찌꺼기의 기운을 추적할 수 있어.”
“그럼 그 피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만 버티면…….”
“그 전에 그 남자가 죽을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애쉴을 달루아가 담담히 일깨웠다.
“포기해.”
“…….”
“그 남자에 대해서는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왜인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거가 엉망진창으로 꼬였다는 건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도 미치지 않은 게 용하지.”
달루아라고 에르도안이 죽는 게 기꺼울 리 없었다. 애쉴 때문에 그와 관련된 거짓 예언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다 재수 없게 걸린 게 그였을 뿐 에르도안은 무고한 사람이었다. 그뿐이랴. 과거가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불쌍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안…… 돼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애쉴이 입술을 움직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
“절대 안 돼요…….”
절대 그런 식으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가 수십 번도 더 죽을지언정 그는 살아야 했다.
꿈을 통해 알고 있었다.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면 에르도안의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을.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죽을 거라는데 저주를 풀어봤자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그를 회귀시키는 게 나았다. 그가 죽은 상태로 시간이 고정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안 돼, 에르도안, 에르도안…….”
그의 이름을 되뇔 때마다 비수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전신의 모든 수분을 빼내기라도 할 것처럼 애쉴은 하염없이 울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달루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작게 움찔거렸다.
“언니가 준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 하는 건 여전하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애쉴이 몸을 떨었다. 달루아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네 마음대로 해.”
“……!”
크게 꾸지람 받을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란 애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달루아는 언니가 허락했는데 자신이 뭘 어찌하겠느냐며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기실 운 나쁘게 휘말린 에르도안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장단에 어울려 주지. 착각은 하지 마. 네게 휘말려 인생이 꼬인 게 너무 불쌍해서 그런 거니까.”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애쉴이 물기에 젖은 눈꺼풀을 팔랑거렸다. 달루아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도와주겠다고. 그 남자를 살리는 것.”
“저, 정말이신가요?”
황망히 달려온 애쉴이 넋이 나간 얼굴로 달루아에게 매달렸다.
“정말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너는 죽는 것만 못하게 될지도 몰라.”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애쉴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루아는 정보 길드에 의뢰해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일 뿐이라며. 언젠가 갚아야겠다 생각했던 게 바로 지금일 뿐이라며 애쉴을 돕는 것에 대해 불쾌해지려는 심정을 합리화했다.
“찌꺼기의 기운으로 그를 찾아낸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찌꺼기가 없으면 못 찾아낸다는 소리야. 일반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달루아는 검지로 애쉴의 가슴 중앙을 쿡 찔렀다.
“모래시계를 쓸 수 있는 너라면 가능하겠지.”
“……?”
“그 남자에게 쌓인 걸 네게 옮겨.”
달루아는 에르도안에게 쌓인 것을 옮기는 방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눌어붙어 있던 걸 강제로 떼어내는 작업이니까. 너야 별 상관없겠지만 상대방은 충격을 크게 받을 거야. 최소 한 달은 일어나지 못하겠지.”
“한 달…….”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어디에 숨겨 놓느냐가 관건이었다. 애쉴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달루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팔라디움에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인하르트가 언제든지 돌아오라 하긴 했지만. 스스로 박차고 나온 가문에 손을 벌리기도 낯 뜨거울뿐더러 반역자가 된 사람을 맡아 달라 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각된다면 그날로 가문이 뒤집힐 테니까.
애쉴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괴롭혔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 달루아가 흐응, 콧소리를 냈다.
“뭐, 황태자가 요즘 공작가를 주의 깊게 보고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미끼 역할만 잘하면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들키지 않을걸. 시선이 온통 네 쪽에 쏠릴 테니까.”
달루아는 언니와 꼭 닮은 외모 탓에 자신도 오랜 시간 숨어다닌 적이 있다며 누군가의 이목을 피하는 건 이골이 날 지경이니 들킬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알고 있지? 네가 직접 가야 소드마스터가 죽었다고 믿을 거라는 거. 처음이야 어떻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그놈 성격상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그때는 이미 팔라디움이 보호하고 있을 텐데.”
뒤통수 맞는 꼴을 옆에서 두 눈으로 봐야 하는데, 하며 달루아가 이죽거렸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일이 끝나는 대로 이 나라를 뜰 거야. 그러니-”
“저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이 이상의 도움은 기대하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달루아는 이상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애쉴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게 진심으로 던진 말인지 가늠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달루아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애쉴은 물기가 남아 있을지언정 결연하고도 흔들림 없는 적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하겠지.”
달루아는 품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 필요할 때 부르라면서.
애쉴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받아 챙겼다. 그러고는 허름한 가죽 주머니에 라인하르트의 반지를 담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도와달라며 서신만 덜렁 보내면 믿지 않을 테니 인장 또한 같이 보내야 할 거라면서.
“그럼 수고해라.”
냉정하게 말한 달루아가 후드를 뒤집어썼다. 저를 찾는다고 했으니 이유나 한번 들어보고, 그 남자가 위험하다는 것만 경고해 주고 바로 이 나라를 뜨려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자조하면서.
진득하니 붙은 시선을 무시하며 그녀는 애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을 때 즈음 뒤늦게 떠오른 것에 아, 하며 몸을 반쯤 틀었다.
“길드에서 전해 달라 하더라. 네가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맡긴다면서.”
그녀가 꺼낸 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약병 두 개였다. 코르크 마개로 덮인 부분에서 잘름거리지 않았다면 뭐가 들어 있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애쉴은 그것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예전에 의뢰했던 기억을 지우는 약이었다. 에르도안과 행복하게 지낼 심산으로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와 안면이 있는 체이카가 나름 신경 써 준 듯했다.
그녀는 멍하니 병들을 내려다보다, 문이 열리며 달칵거리는 소리에 그쪽을 쳐다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달루아 님.”
달루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이야기하라는 의미로 고개만 까딱했다. 애쉴은 혀를 살짝 내밀어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적셨다. 잠시간 뜸을 들이다 극히 작게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니. 뭘 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인지. 황궁에서 당할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터인데.
그러나 달루아는 입을 열어 묻는 실수까지는 하지 않았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왜 그렇게 그 아이를 챙기느냐’는 질문에 묘한 미소를 짓던 언니를 본 후로 버리라 할지언정 아이를 죽일 시도는 하지 못했던 것처럼. 애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애쉴을 싫어하는 마음에 금이 갈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
짧은 대답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떴다.
* * *
홀로 남은 애쉴은 기다렸다. 문과 가장 가까운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물기 어린 눈을 한 채,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따라 늦는 에르도안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괜찮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강하니까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되뇌며 속절없이 무너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햇볕이 차츰차츰 옅어졌다. 애쉴의 두 눈에도 졸음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를 못 보고 잠들어 버리는 걸까.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달칵.
그녀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문이 열렸다. 애쉴은 만지작거리던 약병을 황급히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혹여 눈물 자국이 남아 있기라도 할까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머리를 매만지고,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정리한 후, 잰걸음으로 문 앞으로 향했다.
“일어나 계셨군요.”
망가져 있다는 말을 들은 후였을까. 살짝 웃는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핼쑥해 보였다.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
왜일까.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 스스로 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은.
애쉴은 거짓으로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겼다.
* * *
“있죠, 에르도안. 그때 말씀하셨던 이기적으로 굴라는 것 말이에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늦은 저녁 무렵, 침대에 누워 있던 애쉴은 그사이에 더욱 상태가 나빠진 남자를 향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네. 제가 어찌 되든 신경 쓰지 마시고 원하는 것을 하시라는 말이었습니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따뜻하게 데워 놓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대답했다. 견디기 힘든 두통 탓에 조금 일그러진 미간을 웃음으로 감추면서.
“그렇군요. 그럼 정말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거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타이르듯 말했다.
“떠나겠다는 말씀만은 하지 마세요.”
“안 떠나요. 에르도안이 저를 기억하고 있는 이상 떠나지 않을 거예요.”
“……?”
전제 조건이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입을 열어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 애쉴이 말갛게 웃으며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에 맴돌았다.
“사랑해요.”
거미줄 같은 은발이 턱을 간지럽혔다. 불안한 표정이 된 에르도안은 단단한 상체에 그녀의 얼굴이 밀착하도록 힘껏 껴안으며 속삭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죠?”
“그럼요.”
“……절대, 절대 떠나지 말아요.”
애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촉감을 머릿속에 깊게 새겨 넣었다. 그러다가 육신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부담 때문인지 욱신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붉은 모래시계를 에르도안 몰래 목걸이에서 떼어냈다.
“잠깐 눈 좀 감아 주세요.”
에르도안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애쉴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을 감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내린 은발을 한쪽으로 모아 그러쥔 후, 어린 새가 모이를 쪼듯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가볍게 부딪쳤다.
“……!”
“가만히 있어요.”
애쉴이 먼저 입을 맞춰 온 적은 없었기에. 에르도안은 놀라움을 뒤로 한 채 곧장 키스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얌전히 몸을 굳혔다.
애쉴은 장난치듯 그의 입술을 쪼고 어루만졌다. 그걸로도 모자라 뺨을 쓸어보고, 굳게 닫힌 눈두덩이를 지분거리고,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생김새를 두 눈에 새기려는 듯 시선을 떼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섬세한 손길로.
무언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했다. 참다못한 에르도안이 결국 입을 열었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그러나 그가 문장을 완성하는 것보다 애쉴이 덮쳐 오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붉은 모래시계를 머금고서는 그의 입술로 제 것을 곧장 내렸다. 에르도안은 무심결에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
애쉴은 물고 있던 모래시계를 그의 입속으로 반쯤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제 숨을 모래시계에 깊게 불어넣었다.
순간, 그에 반응해 몸속에 있던 단테의 힘이 크게 요동쳤다. 눈꺼풀이 뜨이는가 싶더니 보랏빛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충격에 에르도안은 그대로 졸도할 뻔했다.
“애…… 쉴……!”
가물가물한 정신을 움켜쥐며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애쉴은 그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셔츠를 잡아당겼다.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셔츠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달뜬 숨이 뒤얽혔다. 키스가 이어질수록 몸 곳곳에 심겨 있던 이물질이 강제로 뜯기는 것 같았다. 에르도안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만…….”
그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르도안은 어떻게든 애쉴을 밀어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처음의 고통이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제발…… 이러지…….”
부질없는 애원이 입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전신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다.
“제…… 발…….”
애원 섞인 신음을 끝으로 바들거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던 침대도 잠잠해졌다. 옷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을 뺐으나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몸을 다시 일으켰을 때. 에르도안의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애쉴은 그의 눈가를 쓸어 주고, 뱉어낸 모래시계를 목걸이에 걸며 중얼거렸다.
인간에게 치명적이긴 하나 본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힘이었기에. 모래시계는 단테의 힘과 부딪쳤음에도 폭주하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일렁이는 검은 기운에 휩싸여 있긴 했지만.
그 기운은 애쉴이 손을 뻗자 잉크가 종이 위로 퍼지듯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몸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윽…….”
진짜 신녀였다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을 것을. 무거운 추가 구석구석 매달리고 가시 박힌 사슬이 전신을 옭아매는 느낌에 작게 신음했다. 굉장히 음울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은 몸이었는데 심히 괴로웠다. 애쉴은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을지언정 핏기가 돌아온 얼굴을 보자 불쾌감은커녕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전제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소망이었다. 그랬기에 애쉴은 선택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갈라지고 터진 입술에 제 것을 눌렀다. 차게 식은 손으로 깊게 잠든 남자의 뺨을 가만가만 쓸어보며 한탄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수도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텐데. 이런 몹쓸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미안해요.”
상처투성이다 못해 곪아 터진 마음이 아려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제 가슴께에 닿도록 와락 끌어안아 본 것을 끝으로 애쉴은 주머니에 있던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이 너무 떨려서 마개를 뽑는 데만도 수십 초가 걸렸다. 무취라는 말이 걸맞게 약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조심스레,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그의 입에 부어 넣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서인지 에르도안은 도통 삼키지를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남은 것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불을 머금은 듯 입안이 화끈거렸다.
애쉴은 그대로 에르도안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을 열고 제가 머금은 것을 살살 흘려 넣었다. 아기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그제야 그는 그녀가 건넨 약을 모조리 삼켰다.
“……행복하세요. 꼭.”
애쉴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남자에게 마지막 미련을 담아 키스했다.
벽보 앞에서 대화하던 그때. 애쉴은 한순간이나마 에르도안의 눈에 스친 살기를 보았다.
정말,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국을 멸망시켰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서. 황태자와 약혼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억을 지우는 약을 의뢰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제 팔에 채워진 마정석 팔찌를 풀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침대에서 나와 짐 속에서 본래 라인하르트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밑에 추신으로 에르도안은 반역자가 아니며 몸이 회복되는 대로 타국으로 빼돌려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문장을 적어놓았다.
모든 일을 마친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후 달루아에게 받은 스크롤을 찢었다. 허공에서 화르륵 불꽃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잿더미로 변해 사라졌다.
“생각보다 늦게 불렀네. 이야기는 잘 됐어. 곧 있으면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이 올 거야.”
잠시 후. 오두막을 방문한 달루아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녀는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애쉴을 보며 잠시나마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싹 굳히며 바깥을 향해 고갯짓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더라. 기다리지 말고 바로 가는 게 좋을 거야.”
“……!”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뒤처리도 해야 하니까.”
에르도안이 떠나는 것까지는 보고 싶었는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미련이 담긴 눈동자에 잠들어 있는 남자가 비쳤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을 떠난 애쉴은 황태자가 보낸 군대와 맞닥뜨렸다. 한밤중이었던지라 얼굴이 보이지 않아 선두에 있던 정예 기사들은 기운만 보고 그녀를 죽이려 덤벼들었으나, 가까이서 마주하고 정체를 확인하자 크게 놀라며 급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죽었어요.”
소드마스터의 행방을 묻는 기사들에게 애쉴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의 죽음을 입에 담아서였을까. 심장에만 고여 있던 눈물이 그제야 봇물 터지듯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지라.”
기사 하나가 눈짓하자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인원 중 절반이 오두막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쉴은 그들을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능욕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양해해 주십시오.”
“임무를 완수하고 싶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협박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서였을까. 좁아지는 포위 사이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기사들이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이렇게 하려 하긴 했지만. 애쉴은 사뭇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난 경고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애쉴은 주머니 속 만지작거리던 약병을 꺼내 곧장 들이켰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용암을 삼킨 듯 속이 활활 타올랐다.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눈밭이 가까워졌다. 그 현실에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풀썩 무너져 내렸다.
“고, 공녀님!”
기절초풍한 기사의 외침에 모든 이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임무 중 하나가 공녀를 ‘무사히’ 데려오는 것이었기에, 독약이라도 마신 줄 알고 당황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애쉴에게 달려들어 먹은 것을 게워내게 하려 했다.
“커흑, 쿨럭!”
기사들의 거친 손길을 피하며 애쉴은 땅에 얼굴을 묻었다. 기침이 끝없이 이어졌다. 밭은 숨에 섞여 나가기라도 하는 것인지 숨을 한번 토할 때마다 머릿속에 있던 것들이 잘게 쪼개져 부스러졌다.
누군가가 송곳으로 헤집기라도 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차가운 눈이 닿으면 좀 괜찮아질까 했으나 아무 쓸모없었다. 거기다 정신이 약해진 틈을 타 에르도안에게서 빼앗았던 검은 기운이 무정하게도 날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괴로워 애쉴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반쯤 넋을 놓았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던 그때였다.
“이, 이런!”
“제기랄!”
저만치서 커다란 불꽃이 일었다. 오두막이 있는 위치였다. 애쉴이 불을 붙여놓고 나온 것이라 생각한 기사들은 다 타기 전에 뭐라도 건져야 한다며 황급히 움직였다.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인데.
그걸 알면서도 미련이 남아서.
애쉴은 불꽃 쪽을 향해 처연하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날카롭게 메아리치는 목소리들이 아련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에 사랑했던 연인과의 추억이 한 톨씩 담겨 사라져 갔다.
이젠 그가 누구인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부디 신이 있다면……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떨리던 손이 눈밭으로 툭 떨어졌다.
적안은 빛을 잃었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