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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른 가지에 새하얀 눈꽃이 피면 (16/22)

15. 마른 가지에 새하얀 눈꽃이 피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애쉴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낡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

눈을 떴는데 보이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질끈 감았다가 떠 봐도 마찬가지인지라 덜컥 겁이 났다. 애쉴은 힘겹게 손을 들어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다.

그 순간.

뚜벅, 뚜벅, 뚜벅, 쾅.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었던지 짧게 숨을 들이켜는 것 너머로 다급하게 방을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애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선명해지는 감각에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눈에 천 비스름한 게 아주 살짝 덧대어져 있음을.

근처에서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눈을 가린 천에 손을 뻗었다. 애초에 시야를 강제할 생각은 없었던지 천의 매듭은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천을 치우자, 비로소 방 안이 보였다.

방은 어두웠으며 작고 조촐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 조각난 천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그게 전부였다.

애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곳이 어머니의 집도 팔라디움의 저택도 아님을 알아차린 탓이다. 커튼 사이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낮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러나 무거운 몸을 반쯤 일으킨 순간. 갑작스레 찾아온 강한 두통으로 인상을 쓰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을 감자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애쉴은 에르도안의 모든 과거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장면은 보았다. 그의 시간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며 진심을 담아 말하던 것. 그 두 장면만은 똑똑히 보았다.

‘이게, 이게 뭐야.’

혼란스러웠다. 현실에서 마주했던 그의 모습과 꿈속에서의 장면이 계속해서 겹쳐져 보였다.

‘아가씨.’

‘레이디.’

그게 정말 꿈이었을까?

‘아가씨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애쉴리아 팔라디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게 정말…… 꿈이었다고?

……아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과거였다. 자신과 에르도안의.

그리고 오직 에르도안만이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애쉴은 깨달았다.

“아, 아.”

입을 벌리자 비탄 섞인 숨이 새어 나왔다. 애쉴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내려 두 눈을 가렸다. 손바닥 틈새로 흘러내린 눈물이 팔을 타고 옷자락을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굴러떨어지다시피 하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 쪽으로 바삐 향했다.

덜컥, 덜컥.

문고리를 힘껏 돌렸으나 돌아가지 않았다. 꼭 밖에서 누군가가 잡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의식중에 소리치며 문을 두드리려다 흠칫하며 그만두었다.

이 너머에 있는 것이 에르도안이 아닌 벨키에로트라면. 그에게 붙잡혀 와 감금당한 것이라면.

문고리와 맞닿아 있던 손에서부터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애쉴은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비척비척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뒤꿈치가 침대 기둥에 닿자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여자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악몽을 꾸었다.

* * *

꼬박 하루가 지난 후. 애쉴이 다시 눈을 떴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야 할 그녀는 침대 위에 편안히 눕혀져 있었다. 이번에도 눈은 가려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 치니 풀릴 만큼 엉성한 매듭이었다.

악몽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린 것 같았는데. 누군가가 갈아입혀 준 건지 옷은 뽀송뽀송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대체 어디인 걸까. 누가 이리로 데려온 걸까. 아직 졸음기가 가시지 않아 게슴츠레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추스르던 와중이었다. 툭, 툭.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자 어두운 밤하늘을 외로이 밝히고 있는 손톱 같은 초승달이 보였다. 창을 두드린 건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였다.

바깥이 많이 추운지 창문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손바닥으로 닦자 뿌옇던 바깥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앙상한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 빼고는 새하얀 이불이 덮인 허허벌판이었다. 헐벗은 마른 가지들에는 하나같이 눈꽃이 피워져 있었다. 쓰러질 땐 늦가을이었는데. 어느새 한겨울이 된 것이다.

애쉴은 무심코 창문을 열어 보려 했다.

“야옹.”

“……?”

구석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기묘한 빛을 내는 한 쌍의 녹안이 보였다.

아무 기척도 없다가 나타난 것이니 놀라야 했거늘.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애쉴은 자신에게 뛰어오는 고양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다행이다. 잘 있었구나.”

품을 파고들며 고롱거리는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자 안도감이 들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키우던 고양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벨키에로트에게 끌려온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반갑다는 듯 골골거리던 짐승은 어느 순간 놓아달라는 듯 바르작거렸다. 애쉴은 원하는 대로 해 주었고, 고양이는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달려가 앞발로 문을 득득 긁어댔다. 재촉이라도 하는 양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열어 보라는 거야?”

애쉴은 고양이를 한 번, 그리고 열리지 않았던 문을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하면서도 이 문밖에 벨키에로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하지만…….

평소 봐 왔던 고양이는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총명했다. 그녀에게 불호를 보인 사람 혹은 그녀가 불호하는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니 바깥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인물은 아닐 터였다.

애쉴은 용기를 내 손잡이를 힘껏 비틀었다. 그러나 지난번과 같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처럼 문고리가 아예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문고리는 돌아가는데 밀리지가 않는 것이 커다란 물건 같은 게 문 앞을 막아서고 있는 듯했다. 온몸으로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아 애쉴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야옹, 야옹.”

그녀가 동작을 멈추자 고양이가 정신 사납게 울었다. 계속해서 요란하게 문을 긁어대면서. 점잖기 짝이 없던 짐승의 이상한 모습에 애쉴이 눈을 깜빡거렸다.

바깥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러는 걸까.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었다.

“거기 누구 계신가요?”

바로 그때였다. 문 너머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쿵 하는 소리를 낸 것은. 높은 데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아, 누가 있긴 한가 보구나. 그렇게 추측한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이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여 듣지 못하고 가 버린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때마침 발밑에서 울고 있는 고양이의 목청이 커졌다. 그에 맞춰 애쉴이 조금 더 크게 소리쳤다. 문고리를 강하게 비틀고, 문을 더욱 세게 두드리면서.

“제발 도와주세요! 문이 안 열려요. 아무도 안 계신가요?”

여전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겁에 질린 애쉴의 호흡이 거칠어지려던 찰나.

“……하아.”

잠깐의 정적 끝에 들려온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탄식 어린 숨소리였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으나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애쉴은 똑똑히 들었다.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가시 박힌 사슬이 되어 심장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려던 작은 손이 툭 떨어졌다.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이 빠졌다. 고양이는 문을 긁으며 야옹거리던 것을 바로 멈추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대립 끝에 바깥쪽에 있던 사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더듬더듬. 바람이라도 불면 흩어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애쉴은 떨리는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 에드 님……?”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애쉴이 환청인 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질 때가 되어서야 대답했다. 귀를 기울여야지만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네.”

“…….”

애쉴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 그가 저를 가둬놓은 것인지, 그리고 에르도안의 목소리가 아닌 에드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에드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애쉴은 창백하게 질렸고, 그녀의 반응을 보지 못한 남자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비로소 애쉴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해쓱해진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것이 없자 그는 무거운 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씹어 먹듯 말을 뱉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깊게 가라앉아 있던 적안이 거센 풍랑을 만난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탓이다.

그는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회귀 후 처음으로 그와 마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응접실에서 그가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도 벅차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꿈에서 보았던 내용이 진짜라면. 그의 반복되는 회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매번 회귀할 때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 반응에 곪다 못해 시꺼멓게 썩어 들어갈 때까지 상처받으면서도 오롯이 감내했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처럼.

“……에드 님.”

애쉴의 눈가에 눈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문 좀 열어 보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문을 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밀리지 않았다.

“에드 님.”

“미안합니다.”

짧은 사과를 끝으로 에드는 입을 딱 다물었다. 두렵다는 말이 사실인지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애쉴은 천천히 문에 몸을 기댄 후 뺨을 가져다 댔다.

“에드 님.”

다 알고 있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이 문이 곧장 열리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그랬다가는 그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신녀도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고마웠어요.”

그래서 애쉴은 택했다. 직접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서 전달하기로.

“항상 저를 지켜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애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에드 님, 아니, 에드.”

“……!”

친밀감이 느껴지는 부름에 녹색 눈동자가 확 커졌다. 등에 문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던 남자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맨 처음 애쉴이 들었던 쿵 소리는 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전에 그러셨죠. 저와 친해지고 싶으시다고.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까지 전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으시다고.”

“……네.”

아주 긴 뜸 들임 끝에 에드가 대답했다.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울고 있던 애쉴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문에 최대한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저도 그래요. 저도 당신과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요.”

“……아가씨.”

“이름을……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누군가가 떨어뜨린 눈물방울이 마룻바닥을 짙게 적셨다.

애쉴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애쉴이라고 불러주세요, 에르도안.”

순간, 그녀가 기대고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기대고 있던 게 사라지자 몸이 확 기울었다. 어떻게 수습할 새가 없어 애쉴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그녀를 반긴 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누군가의 품이었다.

안타깝게도 애쉴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도를 감지하지 못했고, 때문에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남자의 체온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닿은 것은 향긋한 비누 냄새 속에 숨어 있던 미처 지워내지 못한 혈향이었다. 애쉴은 본능적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

얼떨결에 그녀를 받아 든 에르도안도 몸을 굳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이 찌푸려진 얼굴이었기에. 그녀가 제게 닿자마자 얼어 버렸기에 입술을 짓씹으며 자책했다.

역시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지막이 한숨을 쉰 에르도안은 애쉴을 살며시 안아 든 후 침대로 향했다.

바뀐 자세에 애쉴은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심지어 가면을 쓰고 있어 에르도안이 아닌 에드의 모습인데도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아서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다 그녀를 침대에 눕혀 놓은 남자가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황급히 일어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연약한 입술 새로 가냘픈 음성이 길게 흘러나왔다.

에르도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애쉴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자 꽉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지 말아요.”

그가 돌아보지 않자 애쉴이 재차 말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애원하듯이.

“제가 싫은 게 아니면…….”

가느다랗게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그에게 향해 있던 붉은 눈동자에 잠깐 멈추었나 싶던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애쉴은 파르르 몸을 떨며 힘없이 옷자락을 놓았다.

떠오르는 대로 뱉긴 했는데.

막상 뱉고 나니 겁이 나서.

‘싫어한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가지 말라 하는데도 몸을 돌리지 않자 저를 거부하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 같아 무서워졌다.

“미안…… 해요.”

애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힘없이 늘어뜨린 손이 바르르 떨렸다.

더 이상 막아서는 게 없었음에도 에르도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쉴은 그런 그를 보며 몸서리쳤다.

꿈에서 본 것이 그의 과거가 맞을지언정. 아직도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인 것을.

너무 경솔하게 굴었다 싶었다. 아닌 말로 그가 왜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는지, 뭐를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듣지도 못했으면서.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 꿈에 기대어 멋대로 추측해 버렸다.

명백한 실수였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하으…….”

견디기 힘든 두통이 찾아왔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놀란 에르도안은 고꾸라지려는 그녀를 허겁지겁 받쳐 안았다.

“아가씨!”

정체가 들켰음을 알면서도. 애쉴에게 ‘애쉴’로 불러 달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에르도안은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끙끙거리는 애쉴을 바르게 눕힌 후 허둥지둥 열을 쟀다.

“열은 다 떨어졌는데. 어디 더 아프시기라도 한 건.”

“제가…… 아가씨예요?”

울음 섞인 말에 에르도안의 손이 멈췄다. 빠르게 말을 뱉어대던 입도 멈췄다.

애쉴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두 눈을 가렸다. 차마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제가, 아가씨예요?”

말문이 막힌 남자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애쉴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아가씨…… 으흑.”

꿈에서처럼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죽어가는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지독하게 이기적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걱정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에 조금 전의 제 행동이 경솔했다는 생각조차 사그라져 버렸다.

그의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간신히 손끝에 닿은 불씨를 잃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진짜 에르도안이 아닌 거냐고, 그저 에드라는 사람인 거냐고 묻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저를 부를 때마다 쓰던 아가씨라는 단어를 뱉을수록 혹시나 하던 기대감이 무너져 내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 쌓아두었던 설움이 터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던 그 눈물은, 그러나 단 한 단어에 순식간에 멎어 들었다.

“레이디.”

“……!”

그였다. 목소리는 다를지언정 분명 그였다.

애쉴이 끅끅거리던 상태 그대로 굳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르도안은 눈을 가린 손을 살그머니 치웠다.

그는 보았다. 자신을 담은 채로 잘게 흔들리는 물기 젖은 붉은 눈동자를. 그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감정과 시간이 담겨 있어 그는 감히 애쉴이 어떤 기분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 달라며 간절히 호소하는 마음은 읽었던지라.

“레이디.”

가면을 쓴 그는 깊고도 울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똑똑히 확인했다. ‘레이디’라 부르는 순간 공허하기만 하던 붉은 것에 반짝, 빛이 짧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 반응에 용기를 낸 에르도안이 애달프게 미소 지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적안이 작게 일렁거렸다. 여린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색소 옅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그녀를 다독이듯 작은 손에 깍지를 끼고 꼭 잡아 주었다. 체온은 느끼지 못하였으나 감촉만은 선연하였던지라. 차츰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애쉴이 저를 거부하지 않자 그는 맞잡은 손을 천천히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애쉴의 표정을 살피며 입술에 그녀의 손가락을 대고 꾹 눌렀다. 하나하나, 입맞춤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등과 손바닥에까지 제 것이라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멍한 얼굴로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행동을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가 더듬거렸다.

“에르…… 도안……?”

살짝 미소 지은 에르도안이 제 뺨에 그녀의 손바닥을 대며 대답했다.

“네.”

애쉴의 눈동자가 한층 커졌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짜…… 예요……?”

“네.”

낮고 깊은 대답에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에르도안은 제 뺨에 얹은 그녀의 손을 힘 있게 포개 쥐었다. 저를 향한 적안에 두려움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그보다는 놀라움,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감정들이 훨씬 더 많은 것에 용기를 얻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

“죄송합니다.”

연이은 사과에도 애쉴은 말이 없었다. 동공이 차츰 커지는 걸 제외하면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초조해진 에르도안은 그간의 마음고생으로 갈라지고 터진 입술을 슬쩍 핥았다.

“레이디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사라져 달라 하시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 하시면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주세요. 에르도안이 눈빛으로 애원했다.

불현듯 쥐고 있던 작은 손에 힘이 들어왔다. 놓아달라는 건가 싶어 힘을 뺐다. 그런데도 그녀의 손은 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애쉴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눈앞의 남자가 환상이 아님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에 오직 그녀와 저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 에르도안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는 누워 있는 그녀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기울였다. 그에게서 풍기는 혈향이 조금 더 짙어졌지만 애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르…… 도안…….”

“네.”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이 신호라도 되듯 그는 제 뺨을 애쉴의 손바닥에 살포시 비볐다. 커다란 늑대가 애교를 부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바람에 손가락 끝이 가면에 닿았다. 생소한 감촉에 애쉴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며 가면도 얼굴의 일부분인 양 함께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점차 위로 올라와 가면만 어루만졌다.

그녀의 다음 행동을 예상한 남자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가면의 끈을 타고 간 부드러운 손길이 매듭에 닿았다. 애쉴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녹색 눈동자에 옅은 숨을 내쉬며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드디어, 매듭이 풀렸다. 그의 가면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역시나 예상했던 얼굴이었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 매끈한 콧대와 붉은 입술.

한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감히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만의 기사님이자 사랑했던 연인이었다.

“아, 흐, 흐흑…….”

잿빛 세상에 빛이 돌아왔다.

꿈꾸는 듯 몽롱하던 표정이 허물어졌다. 혹여 계속 보고 있으면 닳아 버리기라도 할까.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 버리는 건 아닐까. 애쉴은 손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가락 틈 사이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예고 없는 눈물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남자가 크게 당황했다. 속였다며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며 도망치려 할 줄 알았지 이런 반응은 예상에 없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가면을 벗자마자 달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에게서 나는 익숙한 머스크 향도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애쉴은 하릴없이 울었다. 제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오열했다.

에르도안은 그녀를 달래지도,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지도 못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최선의 답으로 보이는 것을 골라 입을 열었다.

“사라져 드릴까요?”

“아니요.”

대답은 즉각 나왔다. 당황한 에르도안이 재차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냥, 그냥…… 있어 주세요…….”

애쉴이 거의 들리지 않을 크기로 울먹였다.

에르도안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인 자세 그대로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한참을 울다 지친 여자가 스르르 잠들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곁을 지켰다.

* * *

이른 새벽녘이었다.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선잠을 자던 남자가 깨어났다.

자리가 불편해 깊게 잠들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애쉴을 살폈다. 그녀는 어젯밤 그가 눕혀준 자세 그대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에르도안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침대 위에 팔을 얹고 기댄 채 눈가가 발갛게 부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항상 있던 가면이 없었다. 무려 그녀가 직접 벗겨 준 것이었다.

본모습을 봤는데도 밀어내지 않다니.

직접 겪어 놓고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그는 한참이나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양팔을 포개어 침대에 놓고 그 위에 붉어진 얼굴을 반쯤 묻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레이디.”

애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에 가득 찼다.

머뭇거리던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애쉴.”

이번에도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애쉴이란 단어를 혀끝으로 굴리며 홀로 행복해했다.

‘애쉴이라고 불러주세요, 에르도안.’

문을 사이에 두고 들었던 말이 귓가에 뱅뱅 맴돌았다.

얼굴을 마주한 채 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문을 열어 달라 했을 때 거부했던 건 본인이었으므로 아쉽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잠깐 망설이다 베개 위 흐드러진 은발에 살며시 손을 뻗었다. 잘못 만지면 깨지기라도 하는 물건처럼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고생해서 그런지 조금 거칠어지긴 했어도 기분 좋은 감촉은 그대로였다.

“애쉴.”

애쉴, 애쉴. 기분 좋은 울림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머리카락에 입술을 맞췄다. 그 순간, 욕망을 가둬놓았던 빗장이 열렸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머리카락을 놓고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금단의 과실을 탐하는 사람처럼 느리고도 간절하게.

손가락 끝으로 창백한 뺨을 톡 쳤다. 끝마디로 살짝 스쳐 보았다. 손가락 두 개로 살살 어루만지다 손을 뒤집어 손등으로 쓸어 보았다. 그래도 애쉴은 고른 숨소리만 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자극을 준다 한들 그녀는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니, 못 하리라는 것을.

수명이 3개월도 남지 않은 그녀가 하루에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못했으니까.

“하…….”

숨 쉬는 인형 같은 여자를 보며 에르도안이 깊게 탄식했다.

그녀의 삶을 행복으로 채워 주고 싶었다. 1년이란 시간을 그 어떤 불행한 일 없이 온전히 살다 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반복되는 회귀가 멈출 터였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살아 숨 쉬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곁을 지켜주며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1년을 온전히 살아가길 바랐다. 도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딱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애쉴이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안개 같은 혼란에 휩싸인 남자에게 길을 알려주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만족스럽나?”

홀로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에르도안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소곤거렸다.

“목소리 낮추십시오. 깨면 어떡하려고.”

“네가 만진 게 더 영향 있을 것 같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단테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질문에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난 에르도안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결과가 좋아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는 몰랐다. 애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앞선 시도들에서 애쉴은 기억을 공유받았음에도 그의 과거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파편’만을 건네받았을 뿐이었기에.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애쉴이 저를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정체를 들켰음에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녀가 저를 보지 못하도록. 혹여 자신이 방 안에 있을 때 깰 것을 대비하여 눈까지 가려놓았다. 쓰러지기 직전 자신을 보았으니 나쁜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싶어 창문을 잠그고 위험한 물건들은 모조리 치워놓았다.

만약 단테가 문을 긁지 않았더라면. 용기를 얻은 애쉴이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신히 붙잡은 새가 죽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며 남은 시간을 부질없이 보냈을 것이다.

“그랬으면 뭐, 어쩔 수 없고.”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사나운 표정이 된 남자가 바닥에 있는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그대로 먹힐 생각이었나?”

“그건…….”

단테의 말대로였다. 가면을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힘에 먹혔을 터다. 현재에서 지워져 영원히 과거를 떠도는 망령이 되었을 터다.

지금도 늦은 감이 있었다. 지겹도록 찾아오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끌어올릴 때면 그는 종종 피가 역류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면을 오래 쓰고 있던 탓에 몸에 단테의 힘이 너무 쌓인 탓이다. 그때마다 그는 주춤하며 피를 토했고 그 틈을 노린 적들에게 검상을 입었다. 지금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왜 저를 신경 써 주시는 겁니까.”

할 말이 없어 눈을 굴리며 뜸을 들이던 에르도안이 질의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 아직도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회귀를 끝내야 한다 하면서도 빨리 끝낼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제가 사라져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애쉴이 돌렸던 횟수만 채워지면 알아서 끝날 텐데요.”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왜? 아니, 애초에 왜 도와달라 한 겁니까, 언제 끝나든 상관없는 거였으면?”

“그래서. 불만인가?”

무언가 말하려던 에르도안이 입을 다물었다. 불만일 리가 없었다. 그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애쉴에게 다가갈 수 없었을 테니까. 아닌 말로 도움을 받고 있는 건 단테가 아니라 자신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니 그가 제안을 철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가라앉히기란 쉽지 않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가 있을 리 없으니까.

저를 향한 보랏빛 눈동자에서 그 뜻을 읽은 단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다는 듯이.

“편애라고 해 두지.”

“……편애?”

“나는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녀는 신녀의 혈육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한가?”

아, 설마.

‘신녀, 혹은 그 혈족들은 그나마 괜찮아요. 시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니까.’

예전에 애쉴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 그래서였나. 고양이의 모습으로 그녀를 잘 따르던 것은.

“보기 싫은 겁니까? 그녀의 ‘반복되는’ 죽음을?”

드물게 단테가 침묵했다.

그제야 에르도안은 왜 단테가 저를 신경 쓰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도 완벽히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는데, 막상 애쉴이 죽어 갈 때는 눈 하나 깜빡 않던 존재가 새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모순이라 생각해서였다.

시간이 말하는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란 다른 것일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다.”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싫었던지 단테가 말을 돌렸다. 밑도 끝도 없었으나 에르도안은 바로 알아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짧게 숨을 내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옷 속에 감춰 두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 탓에 인상을 확 찡그리면서. 어떤 것은 거의 다 아물어 불그스레하기만 했으나 어떤 것은 이제 막 딱지가 앉고 있었으며, 또 어떤 것은 움직일 때마다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애쉴이 맡았던 혈향의 정체였다.

‘짜증나는군.’

상처를 살피던 그가 작게 혀를 찼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들인데.

몸에 쌓인 단테의 힘을 제거하는 법은 간단했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잘 먹고 푹 쉬는 것. 그러나 그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대로라면 애쉴의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뒤를 따를 터였다.

물론 에르도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기도 슬슬 떠나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면이 벗겨지고 정체가 탄로 났던 그날 밤. 에르도안은 클라우드를 놓쳤다. 온 신경이 애쉴에게 쏠려 있던 탓에 그가 도망치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이 찾아왔다. 벨키에로트가 보낸 정예 기사들과 병사들이었다.

만만치 않은 숫자였으나 에르도안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프레디아를 떠나야 했는데, 적들이 죽어 가며 던진 ‘반역자’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반역자를 숨겨주면 같은 처벌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두 남녀를 배척했다. 에르도안은 정신을 잃은 애쉴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 숨었다. 반역자인 그를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황실의 명령이 있던 탓이다.

다행히도 반역자로 낙인찍힌 것은 그뿐이었지만. 에르도안은 애쉴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황실에서 보낸 자들이 어디에 숨든 며칠 안에 그들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녀를 위한답시고 거리를 벌렸다가는 황태자에게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그는 번거롭고 힘들지언정 그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애쉴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새 이곳도 발각되었는지 사방에서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황실의 중앙기사단뿐 아니라 각 지역의 기사들 혹은 귀족들의 사병까지 차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를 떠나기 싫어 머뭇거리던 남자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주저한다면 애쉴이 전투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애쉴의 뺨에 입을 맞춘 후 등을 돌렸다.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 * *

그가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난 후. 애쉴이 일어났다. 더 자고 싶은지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몸을 추스른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찾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침대에서 나와 바닥에 두 발을 디뎠다.

어제와 달리 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열렸다.

처음으로 방 바깥의 광경을 본 애쉴이 눈을 깜빡거렸다. 버려진 집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망가지고 부서져 있던 탓이다. 저녁때가 다 된 시간이라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그는 어디 있는 걸까.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는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져 줄까 하며 묻더니, 정말 사라져 버린 걸까.

공허한 마음에 찬 바람이 불었다. 애쉴은 거실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야옹!”

그녀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고양이가 후다닥 달려왔다. 나가지 말라는 듯 발밑을 돌며 야옹거렸으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애쉴은 보지 못했다.

잠시 머뭇대던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뽀드득, 발에 닿는 감촉에 그제야 신발도 신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밤사이에 눈이 또 왔는지 사방은 온통 새하얬다. 주변에 눈꽃이 핀 나무들만 무성한 것이 숲속의 버려진 여행자 쉼터인 듯싶었다.

집에서부터 멀어지는 발자국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깐 망설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겨울바람이 살갗을 에일 듯 차갑게 몰아닥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은 그녀는 온도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이 추운지 더운지도 알지 못했다.

“애쉴!”

채 몇 발자국 가기도 전이었다.

멀찌감치서 애쉴을 발견한 에르도안이 아연실색했다. 그는 곳곳에 피를 묻힌 제 모습도 잊고 황망히 달려와 얇은 옷차림의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왜,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

짙은 피 냄새에 놀란 애쉴이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에 떤 것이라 생각한 에르도안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야옹거리며 주위를 뱅뱅 돌던 검은 고양이를 한번 노려봐 준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새 창백하게 질린 여자에게 모포와 이불을 몇 겹이나 둘러준 후 물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혹여 누군가가 찾아왔나 잔뜩 경계하는 눈빛을 한 채로.

“아니요.”

애쉴은 추위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오들오들 떨며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시선은 그가 아닌 바닥을 향해 있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던 에르도안은 제가 뭐라도 잘못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바람처럼 사라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누 향을 풍기며 돌아왔다.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던 옷은 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죄송합니다.”

그가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던 애쉴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에르도안이 제 옆에 앉기를 기다렸으나 에르도안은 그녀를 마주 보는 식으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발을 따뜻한 손으로 꼭 쥐었다.

“……!”

애쉴이 당황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우물거리며 허둥지둥 발을 빼려 했으나 에르도안은 놔주지 않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그랬습니까.”

“아, 아니, 저기.”

“다행히 가시가 박히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그가 유심히 발을 볼 때마다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비누 향을 뚫고 날아든 미처 감추지 못한 피비린내에 수심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애쉴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가 버리신 줄…… 알았어요.”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뭐 하다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근처에 위험한 동물들이 있길래. 처리 좀 하고 왔습니다.”

인간도 동물에 속하니 거짓말이 아니긴 했다.

“가만두었다간 이쪽으로 올 것 같아서.”

“……그렇군요.”

다정한 대답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 건 왜일까. 애쉴은 재차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다시 물어도 진실로 답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았으므로.

주저하던 그녀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 에르도안.”

“네. 말씀하세요.”

애쉴은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다 정성스레 발을 주무르던 에르도안과 눈이 마주치자 우물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왜 여기 계세요? 기사단의 일은 어떡하시고…….”

“그만뒀습니다.”

배가 고프니 식사를 해야겠다는 말처럼 에르도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애쉴은 당황했다.

“그만두다니요?”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서요. 지켜 드리고도 싶었고.”

애쉴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사랑하지 말고, 당신만의 삶을 사시라 했는데. 왜 당신은 여기에 있는 건지. 그녀는 물기 어린 음성을 내었다.

“약속하셨잖아요.”

“예?”

규칙상 꿈에서 본 미래를 언급해서는 안 되었기에. 정확히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애쉴은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는 의미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에르도안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설마.”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약속하셨으면서. 왜 그 약속을 저버리신 거예요.

이를 악물고 얘기하던 여자의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에르도안은 애쉴에게 공유된 기억이 ‘그때의 기억’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참이나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훌쩍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지라 일어나지는 못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당신이 진짜인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감춘 제 잘못입니다.”

“다 저 때문인데…… 제 탓인데…….”

기실 그의 반복 회귀를 유발한 것은 단테였으나. 설명하려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에르도안은 말하지 않았다. 잘못해서 미래를 언급했다간 곤란해지기도 했고.

그러나 에둘러 다독이는 것만으로는 그녀를 달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슬피 우는 애쉴을 애타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

부드러운 숨결이 발등을 간질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애쉴은 울던 것도 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르도안은 따뜻해진 그녀의 발을 놓은 후 작게, 그러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지 마요, 애쉴. 사랑해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애쉴은 젖은 눈으로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리에 몸을 바짝 붙이며 에르도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을 살살 비비는 것이 꼭 애정을 갈구하는 길들여진 맹수 같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모든 것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목이 메었다. 어제부터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또다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불안해진 에르도안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울고 있는 것에 놀라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아뇨, 아니에요.”

작은 주먹을 꼭 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이불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곧 죽는다고, 그러니 곧 떠날 여자에게 관심을 주지 마시라고 해야 하는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기심이 심장을 조이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애쉴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 했으나 흐느끼는 소리 외에는 뱉어낼 수가 없었다.

순간, 몸이 기울어졌다. 누군가의 셔츠에서 비롯된 기분 좋은 감촉이 뺨에 닿았다. 달콤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스쳤다.

“받아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무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녀를 안은 에르도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우는 여자를 달래고자 등을 살살 다독거리면서.

“다만, 제가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애쉴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품에 갇힌 채 울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긍정의 의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 *

그날 이후.

애쉴과 에르도안. 두 사람의 행동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애쉴은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과 곧 떠나야 한다는 현실의 벽으로 괴로워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는 에르도안은 금세 눈치챘다.

때문에 그는 철저히 숨겼다. 프레디아를 떠난 이유와 주기적으로 머무는 곳을 바꾸는 까닭을. 이따금 사라졌다가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사정까지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끔 그녀의 이목을 끌어 주던 단테가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움으로써 의구심 어린 시선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게 되었으나. 그는 절대로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알고 있었다. 현재 애쉴의 욕망과 현실은 완벽한 수평 상태라는 것을. 여기에 무언가가 더해지는 순간 그쪽으로 돌이킬 수 없게 기울리라는 것을.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법.

“이게…… 뭐예요?”

찰나의 실수로 몸에 아로새겨진 상처들이 드러난 순간.

그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 * *

“에르도안.”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상처약의 양을 가늠하던 애쉴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단호함이 담긴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시선을 피하며 본래 하려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약이 거의 떨어졌어요.”

에르도안은 그녀가 감아 준 붕대를 더욱 힘 있게 조여 마무리하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남은 건 아껴놓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나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그가 말하는 ‘쓸 일’이라는 건 자신이 아닌 애쉴을 뜻하는 것이었다. 애쉴 또한 이를 눈치챘기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당신은.”

“저도 괜찮습니다.”

거짓말. 저렇게 많이 다쳤으면서 괜찮을 리가.

애쉴은 치료를 마무리하고 셔츠를 입는 남자를 힐끔거렸다. 조금 전에 보았던, 지금은 붕대 아래에 숨겨져 있는 끔찍한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약은 거의 다 사라졌는데.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그대로, 혹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상처가 아물 시간도 없이 공격받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대로는 안 돼.’

며칠 전. 우연히 그의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상처들을 목도하고 한참을 추궁한 끝에 그녀는 쓰러지기 전과 달리 벨키에로트가 대놓고 기사들을 보내고 있다는 진실을 들었다.

그제야 애쉴은 그가 왜 프레디아를 떠났는지.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지도 않고 타인의 눈을 피해 외진 곳만 돌아다니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애쉴이 죄책감을 가지자 에르도안은 이제까지의 전투에서 느꼈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 당신을 데려가는 것보다 저를 죽이는 걸 우선시하는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일이 이렇게 된 건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그러나 애쉴은 믿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박힌 죄책감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 에르도안이 반역자라는 누명을 썼다는 것도, 벨키에로트가 진심으로 에르도안을 죽이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를 수도로 보내주세요. 어떻게든 전하께 잘 말씀드려 볼 테니까-”

“싫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거절하는 남자 때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의 눈동자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할 말을 고르던 애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이라도-”

“괜찮습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주제에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가는 아무리 공작가일지언정 황태자의 눈 밖에 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공작가와 황태자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늘. 재앙의 씨앗이 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애쉴은 답답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최후의 수단이자 에르도안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꺼냈다.

“겨우 저 같은 것 때문에-”

“이미 수차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요.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애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하릴없이 약병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약이라도 더 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침 식량 문제도 있어서 근처 도시에 잠깐 들르려고는 했-”

“그리고, 그때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대화가 뚝 끊겼다.

상상도 못 한 말에 에르도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본인의 귀를 의심하다가, 단호한 결의가 서려 있는 상대방의 표정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안 됩니다.”

“오라버니께 편지를 보내려 해요.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간단히 안부만-”

“주시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직접 보내고 싶어요.”

“절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요?”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하니까요.”

평소 같으면 호위하는 데 지장이 있어 그러겠거니 하며 물러섰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데려가 주시지 않으면 혼자라도 나갈 거예요.”

“……!”

“부탁이에요, 에르도안. 제발 데리고 가 주세요.”

혼자라도 나가겠다는 말에 확 커진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기실 에르도안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도시에 가려 하는 까닭을. 편지는 핑계이고 수도로 올라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방법을 찾아내도 상관없었다. 막으려면 못 막을 것도 없었으니까. 그녀가 마차를 잡든 말을 타든 그보다는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는 데다가 설사 황실 기사가 나타나 데려가려 한다 한들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가 애쉴을 막는 까닭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반역자가 되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여자에게 돌덩이를 얹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에르도안은 애쉴이 시도 때도 없이 떠나게 해 달라 하는 바람에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언짢아진 상태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들거늘 두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아…….”

에르도안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무언가를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입에 올린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데려가 주지 않으면 그가 자리를 비운 새 정말 혼자 나갈 터였다.

단테라도 있으면 시간이라도 끌어 달라 할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를 제지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아 재차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은 내렸지만 영 내키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에르도안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아귀에서 순간적으로 눈동자와 같은 보라색 빛이 반짝였으나 워낙 찰나였던지라 애쉴은 보지 못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그건…….”

그가 꺼내 보인 것은 은색 줄에 붉은색의 마정석이 달린 익숙한 팔찌였다. 때때로 두통을 호소하는 애쉴을 위해 차기만 해도 정신이 맑아지는 마법을 걸어놓았다며 걸어주려 하던 것을 그녀는 수차례 거부해 왔었다. 그걸 받으면 그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물건에게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복잡한 심경이 된 애쉴은 묵묵히 팔찌를 응시했다. 에르도안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희망을 주었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의 절망을 주었던 것과 똑 닮은 것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이걸 벗어 던질 때만 해도 두 번 다시 찰 일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회귀 첫날만 하더라도 에르도안이 주는 것들은 절대 받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문득, 아직도 서랍 깊숙한 곳에 있을 뜯지 않은 편지와 그 안에 있을 물건이 떠올랐다.

에르도안은 알고 있을까. 본인의 마지막 편지가 뜯기지도 않은 채 버려졌다는 것을.

기분이 심히 미묘해졌다.

“……별다른 뜻이 없는 거라면 받을게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팔을 내밀었다. 팔찌를 받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간신히 떨어진 긍정의 대답에 에르도안은 살짝 웃으며 팔찌를 채워 주었다.

비로소 몇 달 만에 팔찌는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 * *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푹 뒤집어쓴 애쉴과 에르도안은 도시에 도착했다. 그들을 수상하게 여긴 경비병이 막아서긴 했으나 금화 몇 개를 던져 주자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홀로 다닐 때에는 방벽을 넘거나 했던지라. 아무리 지방 도시라지만 경비병의 썩어빠진 행동에 기사 출신인 에르도안은 어이없어했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떠나기 위해 쉴 새 없이 발을 놀렸으나 안타깝게도 얼마 가지 못하고 벽보 앞에서 얼어붙은 애쉴을 보며 멈춰 서야 했다.

“이게…… 뭐죠?”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벽보를 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당혹감 어린 눈길에 옆에 서 있던 에르도안은 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뭐라도 하신 건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안다면 이토록 어처구니없지나 않을 텐데. 에르도안은 얼굴을 굳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투만으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챈 애쉴은 다시금 벽보에 시선을 주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황실에서 내려온 공고였다. 감히 반역을 도모하여 제국의 안녕을 해친 인물 에르도안 트라펠로와 그 식솔들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에르도안의 우려와는 달리 애쉴은 죄책감이 아닌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의도치 않게 몇 달간 벨키에로트를 누구보다 가까이 관찰했던 적이 있었고, 때문에 그가 이유 없이 귀찮은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없던 죄도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라지만 이건 뭔가 이상했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지 않은가. 공녀를 호위하는 이의 정체를 알았다 한들 가치 없는 일에 관심도 두지 않는 남자가 집요하게 구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과거에 벨키에로트가 이렇게까지 에르도안을 적대한 적이 있었던가. 그에게 있어 에르도안은 그녀가 신녀인지 확인할 수 있는 미끼이자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손안의 날파리 같은 존재였다. 반역죄까지 씌워 몰아갈 이유가 없었다.

수도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반역이라 공표한 이상 단순히 벨키에로트를 설득해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눈치챘다. 애쉴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있었잖아. 에르도안이 반역을 했던 적이.’

마지막 회귀에서 그는 소드마스터이자 연합군의 우두머리였으며 제국을 멸망시킨 주범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설마, 그럼 이건.

애쉴은 반사적으로 에르도안을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흠칫하며 주변을 살핀 후 근처의 행인 중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속삭였다.

“진짜로 하시려는 건 아니죠?”

“예?”

난데없는 질문에 에르도안이 당황했다.

되묻는 말투에서 그가 정말 반역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한 애쉴은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모님을 만나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달루아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데서 튀어나오는 이름에 에르도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인의 혈육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차마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일 수 없었다.

애쉴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이모님이 제국의 미래를 예언하신 것 같아요.”

“가짜 예언입니다. 저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잠깐 망설이던 애쉴이 조심스레 요구했다. 문득 떠오른 무서운 상상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에르도안이 반역을 저지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시점에서일 뿐. 미래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전적도 있지 않은가.

에르도안과 과거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현 시간대에서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점이니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죽기 직전 끌려가면서 들었던 것들만 알고 그가 제국을 함락한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가족을 잃은 탓에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당신이 안전하다는 전제하에서는 얼마든지요.”

그냥 약속해 주었으면 했는데.

에르도안이 전제 조건을 달았다. 애쉴은 시선을 내리깔며 웅얼거리다시피 말했다.

“아니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요. 부탁드릴게요.”

사나운 눈빛이 된 에르도안은 살포시 애쉴의 턱을 들어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싫습니다.”

“에르도안.”

“제 모든 것은 이미 당신에게 바친지라.”

낮게 읊조린 에르도안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두 사람의 얼굴은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얼굴 위로 뜨거운 숨결이 훅 쏟아져 애쉴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후드를 뚫고 내려오는 듯했다.

“제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웬만해서는 우려하시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제국을 두 번이나 건드려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절대 제국만큼은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쉴이 벨키에로트에게 끌려간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애쉴은 말이 없었다. 그녀 또한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었기에 에르도안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불현듯 그는 후드 아래 유일하게 보이는 반쯤 열린 색소 옅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리하는 대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불꽃 같은 욕구를 억누르며 애쉴의 손목을 잡고 뒤로 돌았다.

분명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이 선연한데도 형체 없는 안개를 잡아둔 것처럼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나약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가시죠. 더 늦어지기 전에 떠나야 할 터이니.”

“에르도안.”

다급한 부름에 움직이려던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시간 말없이 머뭇거리던 애쉴은 에르도안이 저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려 하자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따로 돌아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의외의 말에 에르도안이 굳었다. 애쉴은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빨리 볼일을 마치고 떠나려면 그편이 나을 테니까요.”

빼달라는 듯 잡고 있는 것이 움찔거렸다. 지금 그녀의 입가는 틀림없이 떨리고 있을 것이라고 에르도안은 판단했다.

“아뇨, 안 됩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체하며 어투를 바꾸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큰 변화 없는 표정과 달리 속마음은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일렁였다.

“그러다 위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얼굴을 잘 가리고 다니면 괜찮을 거예요.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도 않을 거고요.”

“그래도 위험합니다.”

“아까 다 확인하셨잖아요. 이 도시에 위험한 사람들은 없다는 거.”

“하지만.”

“그리고,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애쉴은 마른침을 삼킨 후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구하러 와 주실 거잖아요.”

“…….”

미동조차 없을 것 같던 굳은살 박인 손이 순간적이나마 흔들렸다.

찰나 에르도안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체 뭐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서.

그가 고민하는 것이라 착각한 애쉴이 재차 설득했다.

“간만에 바깥에 나온 김에 저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안 될까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려던 남자가 입매를 경직시켰다. 그동안 바라는 것 하나 없던 여자의 간절한 부탁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이기며 한참을 주저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야 말았다.

“먼저 가 계시면…… 볼일이 끝나는 대로 찾아가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나중에 봐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놓아주기 싫다는 기색을 여실히 풍기며 에르도안이 손을 풀었다. 그와는 반대로 애쉴은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를 스쳐 골목길로 사라졌다. 어찌나 다급한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에르도안은 애쉴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맞닿아 있던 손이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구하러 와 주실 거잖아요.’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이 귓가에 윙윙 울렸다.

분명 그의 의지를 묻는 말인데. 왜 ‘무슨 일이 생겨도 구하러 오지 마세요.’처럼 들리는 건지.

독을 삼키기라도 한 듯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텅 빈 손을 꽉 움켜쥔 남자가 이미 엉망이 된 입술을 짓씹었다.

* * *

에르도안과 헤어진 후 애쉴은 곧장 정보 길드로 향했다.

혹여 에르도안이 따라오기라도 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그가 없음을 여러 번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했다. 문의 정중앙에 박힌 길드의 문장이 왜인지 눈에 익었던 탓이다.

흔한 문장은 아닌데, 어디서 봤을까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등장한 뜻밖의 인물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날이 갈수록 마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알고 있는 자들 중 괜찮은 사람 없나?”

“벌써 몇 번째 물어보시는 겁니까? 없다니까요. 있었으면 당장 소개해 드렸죠!”

카운터 뒤에서 정말 안타깝다는 듯 안경을 끌어 올리는 비쩍 마른 남자와 그 앞에서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몸집이 비대한 남자.

후자는 애쉴도 잘 아는 이였다.

“체이카……?”

비슷한 문장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비 내리던 그날 오두막집에서 봤던 거였다.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주축이 되는 새 모양이 똑같았음을 이제야 인지했다.

무심코 그의 이름을 되뇐 애쉴이 급히 몸을 뒤적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다며 그가 건넸던 추천장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추천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기에 챙겨오지 않은 탓이다.

그냥 가서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바보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뭘 믿고 정체를 밝히려 했던 건지. 에르도안과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풀어지기라도 했나 싶었다.

생명을 구해줬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익을 좇는 상인이었다. 구두로 한 약속 따위 모르는 척할지도 몰랐다. 믿었다가 괜히 곤란해지는 것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게 상책이리라.

생각을 정리한 애쉴은 등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체이카가 나간 후 다시 와야겠다 하면서.

그러나.

“이게 누구십니까. 공녀님 아니십니까?”

과장되게 움직이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체이카가 한발 빨랐다. 내부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친 그는 반가운 이를 보는 얼굴로 뛰어오듯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실내에는 오직 세 사람뿐이었으나 공녀가 여기 있음을 대놓고 알리는 것 같은 행동에 애쉴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 바람에 등이 문에 닿았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데다가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으면 되었을 것을. 애쉴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을 열어 변명했다.

“잘못 보신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은발. 그리고 이 오묘한 분위기. 목소리까지 들으니 확실히 알겠군요.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그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요?”

“아, 저기, 그러니까-”

“저놈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체이카는 카운터 뒤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눈짓했다.

“저놈이 입을 열었다간 한낮에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입도 무겁다는 소리죠.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이리 들어오십시오. 어서요.”

체이카는 귀빈을 모시듯 얼어붙은 애쉴을 정성스레 안으로 이끌었다. 얼떨떨해하던 카운터 뒤의 남자도 어느 순간 합류해 그녀를 안내했다.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힘이 달려 어쩌지를 못했다. 애쉴은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을 따라 길드의 가장 구석지고 비밀스러운 방으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체이카와 애쉴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자신을 펠릭스라 소개한 비쩍 마른 남자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흥미로운 눈으로 애쉴을 힐끔거리다 체이카가 큼큼 헛기침을 하자 뭐라도 대접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오늘은 혼자이시군요.”

살갑게 말을 붙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애쉴은 여전히 후드를 벗지 않은 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체이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넉살 좋게 웃으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고할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했겠지요.”

“신고…… 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대외적으로 팔라디움의 공녀는 병에 걸려 두문불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경비대에 공녀가 나타났다며 신고한다 한들 헛소리로 치부될 게 뻔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체이카는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다는 태도로 눈을 끔뻑거렸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아닙니까? 공녀님과 같이 다니던 기사 말입니다.”

“……!”

심장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애쉴이 멀거니 그를 응시했다. 체이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전해 들은 것과 그때 본 외모가 좀 다르긴 하지만. 제국 내 단신으로 역모를 꾸밀만한 자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거기에 요즘 도는 소문까지 합치면 바로 견적 나오지요.”

“소문…… 이라니요?”

“모르셨습니까? 허, 이거 참. 그동안 어디에 계셨길래.”

의외라는 듯 혀를 짧게 찬 체이카가 찬찬히 설명했다. 그사이에 차와 다과를 가져온 펠릭스는 체이카의 옆에 앉아 눈을 빛내며 조용히 경청했다.

“공녀님이 두문불출하고 계신 이유가, 사실은 사랑의 도피 때문이라고-”

“콜록.”

입에 댄 것도 없건만.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애쉴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거하게 기침했으나 체이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들었습니다만. 그날 오두막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공녀님의 반응을 보아 아닌 것 같긴 하군요.”

“사, 콜록, 사랑의 도피, 라니요?”

“뻔하지 않습니까. 뭐든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음유시인들의 짓이겠지요. 신분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반역을 저지른 남자. 그리고 이에 실패하자 가문을 등지고 도망친 두 사람. 아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인가.”

“…….”

“아무튼 그렇습니다. 뭐, 이런 소문을 들으러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요.”

캑캑거리던 애쉴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체이카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에게 옆구리를 찔린 펠릭스도 거들었다.

“아, 예, 예. 맞습니다. 저희 네이스는 제국 내 최고의 정보 길드로서 한 번도 의뢰인을 만족시키지 못한 적이 없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습니다.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와 우리 상단을 봐서라도 더욱 잘 해 드려야 할 것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들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애쉴은 무의식중에 몸을 뒤로 뺐다.

‘부담스러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과한 호의는 목숨을 구해줘서인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떻게든 공작가와 연줄을 만들어 보려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거기에 소드마스터인 에르도안과 친해질 수 있으면 더욱 좋고. 황실에 신고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이득이라 판단한 것일 터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지금까지 바깥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정말 신고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지라. 애쉴은 목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어를 골라가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한 명 찾으려 합니다.”

“사람이라 하심은, 어떤?”

애쉴이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안에 대충 말아놓았던 은발이 사르륵 떨어져 내렸다.

“저와 비슷하게 생긴 서른 후반에서 마흔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입니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를 지니신.”

“그 외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어디쯤 있을지 예상되는 지역이라던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깃펜을 쥔 채 빠르게 인상착의를 적어 나가던 펠릭스가 질문했다. 일을 시작해서인지 안경알 너머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애쉴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습니다. 어디에 계실지는, 글쎄요. 수도에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수도라……. 흐음. 네, 알겠습니다.”

“그분을 찾으시면 애쉴이 꼭 좀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세요.”

“예, 그러도록 하지요. 공녀님께서는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실 예정입니까? 아니면 어디에서 뵙자고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애쉴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냥 제가 뵙기를 청한다고만 말씀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장소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고요?”

“네.”

어디에 숨어 있든 단 며칠 만에 발각되는 까닭은 달루아 때문일 터였다. 미래를 읽는 게 아니고서야 평범한 사람이 작정하고 숨은 소드마스터의 위치를 알아낼 리 없을 테니까.

만나자는 말만 전하면 그 후에는 그쪽에서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애쉴은 그리 여겼다.

“참, 이건 혹시나 싶어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분이 어려움에 처해 계신다면 최대한으로 도와주세요. 보수는 충분히 드릴게요.”

호수에 빠졌던 날 후로 달루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 이제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그녀가 제국의 미래를 예언했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벨키에로트는 신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저를 찾아오지 못하는 까닭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벨키에로트의 손아귀에서 먼저 빼내야 했다.

저를 죽이려 하는 여자를 도와달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에르도안의 누명을 벗길 수만 있다면 제 어두운 감정쯤은 묻어둘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꼭 말아 쥐었다.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처럼 땅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거리다, 마음을 정했는지 옅은 숨을 내뱉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뛰어난 연금술사분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뢰하고 싶은 약이 있어서요.”

“실례지만 어떤 약을 제조하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연금술도 워낙 분야가 넓다 보니 종류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서요.”

“기억을…….”

애쉴이 뭐라 웅얼거렸으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던 탓에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펠릭스는 콧잔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추켜올렸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억을 지우는 약이요.”

힘들게 요구사항을 말한 애쉴이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대충 그 약의 용도를 짐작한 체이카도 얼굴을 굳혔고, 펠릭스만이 줄곧 쾌활하게 의뢰서를 적어나갔다.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 예, 알겠습니다. 그쪽 방면으로 뛰어난 자들을 찾아보죠. 혹시 연금술사 자체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약만 전달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가끔 사람을 극도로 만나기 꺼리는 괴짜 연금술사들이 있어서 말이죠. 상단주님의 지인분이시니 이 정도 서비스는 해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네. 그래도 상관없어요.”

“좋습니다. 이 외에 따로 의뢰하실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의뢰를 마친 애쉴은 ‘기억을 지우는 약’에 대해 얼마만큼의 기억을 지워야 할지, 몇 병이 필요한지 등 추가 사항을 말했다. 펠릭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끔 몇몇 질문도 하며 열심히 받아 적었다.

반드시 무색무취여야 한다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애쉴이 덧붙였다.

“당연하지만 이 의뢰는 아무에게도 언질 주셔서는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뢰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 저희 길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항입니다.”

펠릭스는 어마어마한 착수금을 받은 후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며 나갔다. 지금 당장 괜찮은 연금술사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올 테니 기다려 달라 하면서.

알겠다며 대꾸한 애쉴은 초점 없는 눈으로 제 앞의 손도 대지 않은 차를 내려다보았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체이카는 펠릭스가 나가자마자 차를 들이켠 후 일부러 큰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녀님. 주제넘다 생각하시겠지만.”

애쉴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기억을 지우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한들 대화로 해결해야지 기억을 건드리려 하시다니요. 공녀님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남자. 에르도안이라는 자 말입니다. 딱 한 번 보았습니다만 공녀님을 절절히 연모하는 게 느껴졌었습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공녀님의 말을 들어줄 테니-”

“저도 알아요.”

길게 늘어지는 말을 툭 잘랐다.

체이카는 뜻밖이라는 얼굴이 되었다. 애쉴은 그의 시선을 피하고자 비스듬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상대할 필요가 없는 자의 질문이니 차갑게 한 번 쏘아봐 주면 그만일 터인데.

질문을 듣는 순간 지독한 현실이 느껴져서. 거대한 돌을 얹어 놓은 듯 가슴이 묵직하니 뻐근해져서.

애쉴은 그를 보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 빠른 체이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나 싶던 그때.

시기 좋게도 볼일을 마친 펠릭스가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한없이 밝았다.

“마침 연이 닿는 연금술사 중 그 방면으로 뛰어난 자가 있어서 약은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한 3일쯤 걸릴 것 같군요.”

“그보다 더 빠르게는 안 되나요?”

한 번 더 이 도시를 들러야 하나 싶어 언짢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펠릭스는 말도 안 된다며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재료 수급이나 숙성을 생각하면 3일도 상당히 빠른 겁니다.”

3일이라. 또 어떤 핑계를 대며 보내 달라 해야 할까.

또다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애쉴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이러고 있다 한들 해결되는 건 없는지라 혼란스러운 감정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애쉴은 체이카와 펠릭스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중천에 있던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이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큰일 났다 싶어 편지를 부칠 만한 곳이 어디 있나 하며 바삐 두리번거리는데, 별안간 키가 큰 한 사람이 나타나 시야를 가로막았다.

“여기가 편지를 부치는 곳은 아닐 텐데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자신에게 향해 있는 그늘진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에르…… 도안.”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지. 뒤따라오기라도 한 것일까.

에르도안이 팔찌에 제 기운을 묻혀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가 난 것을 참는 것 같은 분위기에 겁을 먹은 애쉴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에르도안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깊은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그러다 별안간 예고 없이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며 발을 옮겼다.

“가시죠.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자, 잠시만요. 아직 편지를-”

“애당초 편지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

“나중에 제가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애쉴은 저항 한번 못 하고 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아, 아파요, 에르도안. 아파요.”

잡아끄는 손아귀의 힘이 너무 셌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놓아달라 애원했으나 에르도안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대로 분노해서가 아니었다. 귀에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도시에 데려가 달라 한 게 이런 이유에서인 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애쉴을 놓아주었다. 그에게 잡혀 있던 곳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으나 에르도안은 보지 못했다.

“정보 길드에는 왜 가셨습니까?”

에르도안이 답지 않게 퉁명스레 물었다. 모든 것을 들킨 건가 싶어 애쉴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연이어 쏘아붙였다.

“뻔하죠. 수도로 가실 방법을 찾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 순간, 에르도안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달루아를 찾아 달라 한 것이나 기억을 지우는 물약을 의뢰한 건 다행히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그러나 그의 말을 수긍하기에도 문제가 있던지라. 애쉴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

그 침묵을 긍정이라 여긴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면서. 착잡하고 답답한 마음에 마른세수만 벅벅 하던 그는 언뜻 스쳐 본 것에 이질감을 느끼고 그곳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퉁퉁 부은 손목을 보았다.

분노가 당황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거 제가 이랬습니까?”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들어 재차 확인하니 제 손자국이 맞았다. 에르도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 한들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스스로를 향한 모멸감에 에르도안이 자책했다. 치료해 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그녀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으나 애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잘못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고 있던지라. 너무나도 속이 쓰려서 에르도안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그녀를 책망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졌다.

복잡한 얼굴이 된 그는 죄를 지은 듯한 애쉴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힘을 주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피를 끓는 듯한 음성을 내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싫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애쉴의 몸이 굳었다. 에르도안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팔은 허리에, 다른 팔은 머리에 대고 자신에게 밀착시키며 재차 물었다.

“제가 그렇게도 싫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아, 니요…….”

애쉴은 바르르 떨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그런데 왜 자꾸 떠나려 하시는 겁니까?”

“…….”

“수도 없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어떤 것을 해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 달라고. 당신이 없으면 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런데 왜 자꾸 버리려 하시는 겁니까?”

“……버리려는 게 아니에요.”

주저하던 애쉴이 힘겹게 대꾸했다. 놓아달라며 바르작거렸으나 에르도안은 오히려 그녀를 껴안은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제발, 애쉴. 제발.”

에르도안이 간절하게 애원했다.

“날 버리지 말아요.”

“버리려는 게 아니라-”

“내 곁을 떠나지 말아 줘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에 말이 뚝 끊겼다.

“제게 그냥 있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사라져 드리겠다 했을 때 그러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

“들어주겠다는데.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데. 왜 당신은…… 왜…….”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느낌에 에르도안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었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애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려 하자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마음이 쓰라렸다.

“……미안해요. 그때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게 남은 시간은-”

“알아요, 말 안 해도 알고 있어요!”

끝내 화가 난 에르도안이 버럭 고함쳤다. 깜짝 놀란 애쉴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더 옆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남은 시간만이라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에, 에르…….”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모자를 시간에. 행복하게만 있어도 부족할 시간에. 왜 당신은, 대체 왜!”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찢었다. 극심한 아픔이 짙게 밴 목소리에 애쉴은 헐떡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친 숨을 토해내던 에르도안이 이를 악물었다. 손을 풀고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의 양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뒤로 밀었다. 그래도 애쉴이 자신을 보지 않자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를 담아 낸 붉은 보석이 잘게 흔들렸다.

“저와 있는 게 그렇게도 싫으십니까?”

“…….”

“대답해 주세요. 싫으십니까?”

“……아니요.”

가빠진 숨을 뱉어내며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게 대답했다.

“그럼 왜 떠나려 하시는 겁니까?”

“……잖아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에르도안이 재차 묻자 애쉴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랑 있으면 당신이 아프잖아요.”

간신히 참아왔던 눈물이 기어코 터지고야 말았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에르도안의 팔을 따라 소매를 적시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으면 좋겠어.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에르도안이 이를 악물었다. 엉망진창이 된 그의 마음에 애쉴이 대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나를 잊어 줘요. 나 같은 건 잊고 행복하게……!”

뒷말은 할 수 없었다. 제 것을 덮쳐 온 그의 입술 때문에.

뜨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서로의 타액이 얽혀들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에르도안은 격렬히 그녀를 탐했다.

부드러운 혀로 윗천장을 쓸고 고른 치열을 쓸었다. 달콤한 과실을 맛보는 것 같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살며시 핥아 올렸다. 도망치려는 듯 몸을 빼는 애쉴의 뒷머리를 잡고 벌을 주듯 혀를 쭉 빨아들였다.

정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농밀한 키스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놓아달라며 그의 어깨와 등을 때렸으나 헛수고였다. 에르도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의 것을 삼켰다. 그러다 지친 애쉴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입술을 떼어내었다. 은빛 실선이 길게 늘어지다 툭 끊겼다.

제 품에 안긴 채 할딱거리는 애쉴을 보며 에르도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행복할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

“만족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당신이 아닌 다른 이의 곁에서 행복하더라도 정말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른 이가 아닌 제 옆에서야 합니다. 저는 당신만큼 이타적이지가 못한지라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다시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에르도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에게서 불어오는 숨결이 참으로 홧홧하기 그지없었다.

“당신도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든 저를 놓지 않고 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않고.”

“에르도안…….”

“제발, 이기적으로 굴어 주세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피가 끓는 듯한 절실함을 토해낸 에르도안이 거듭 입을 맞췄다. 애쉴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 * *

이기적이라는 건 뭘까.

이제까지 애쉴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간을 되돌렸다가 수십 번을 죽게 했으니까. 고의는 아닐지언정 마지막 회귀에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으니까.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 욕심을 버리려 했다. 곁에 있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고 그를 놓으려 했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이기적인 것이었다. 곁에 있어 달라는 청을 무시하고 배려라는 이름 아래 마음 가는 대로 그를 휘두르려 한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결과. 또다시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말았다.

‘이기적으로 굴어 주세요. 제가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않고.’

‘가짜’에 상처받은 남자는 ‘진짜’로 이기적으로 굴라고 말해 주었다. 자신이 어찌 되든 아무런 상관없이 행동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바란 대로 애쉴은 처음으로 제 이득만을 위해 움직였다. 간절히 원하던 것을 소리 내어 말했다.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차마 음습한 진짜 소망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이 삶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있고 싶어요.

큰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는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영원히, 사랑해 주세요.

그 소망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며 고백했다.

“사랑해요, 에르도안.”

“하…….”

비로소 듣게 된 진심에 에르도안이 탄식했다.

그는 애쉴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이룰 수 없는 염원을 끝없이 떠올렸다.

소복이 눈이 쌓인 거리를 그녀와 함께 걷고 싶었다. 향긋한 봄꽃들이 가득 핀 들판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더운 여름날이 되면 시원한 계곡에 가 더위를 식혀 주고 싶었고, 선선한 가을에는 단풍 빛으로 물든 명소를 구경 다니며 탐스러운 열매들을 맛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럴 수가 없어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랑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녀의 영혼에 새기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에르도안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애쉴. 세상이 끝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영원토록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그날 밤.

하나가 된 그림자는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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