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을의 끝에 선 당신에게
“그래서 있죠, 에르도안? 제가 그때 오라버니께 뭐라 그랬냐면요.”
평화로운 어느 가을날.
꿈속의 애쉴은 수도의 번화가를 거닐었다. 에르도안의 한쪽 팔에 꼭 달라붙은 채 헤헤 웃으면서. 그녀가 만든 환영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에르도안은 가끔 맞장구만 쳐 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목이 말랐다. 애쉴은 그를 데리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플랑드르로 향했다. 자연스레 음료와 초콜릿 케이크를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아 고즈넉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수다를 떨었다.
가게에 손님이라곤 그들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광장을 거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애쉴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행복한 얼굴로 영혼 없는 연인과 사랑을 속삭일 뿐.
그만큼 그녀는 지쳐 있었다.
“요즘 들어 잠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요.”
종달새처럼 신나게 떠들던 애쉴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다가, 포크로 먹기 좋게 썰린 케이크 한 조각을 콕 찍었다.
“자도 자도 피곤해요. 몸도 무겁고요.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죠.”
“그렇군요.”
“이게 가을을 탄다는 걸까요? 봄에 이럴 수도 있다는 건 들어봤는데.”
이러다 종일 잠만 자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쉴은 별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입안 가득 초콜릿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에르도안을 바라보자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기계적인 답을 내뱉었다.
그걸로도 애쉴은 만족했다. 그녀는 포크로 케이크 한 조각을 찍어 내밀었다.
“사실, 지금도 조금 졸려요.”
에르도안은 그녀가 내민 케이크를 받아먹느라 말이 없었다. 애쉴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제가 갑자기 잠들어 버린다 해도 이해해 주세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일 날씨가 좋다면 별장의 호수에 뱃놀이하러 가자던지, 새로운 디저트 카페가 생겼으니 한번 놀러 가 보자던지 등등.
제안을 건네는 건 애쉴뿐이었고, 에르도안은 긍정만 할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애쉴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 너무 졸려요.”
수다를 잔뜩 떤 여자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반밖에 보이지 않는 붉은 눈동자에는 졸음기가 가득했다. 에르도안은 웃으면서 망설임 없이 뇌까렸다.
“주무세요.”
집도 아닌 곳에서, 하물며 에르도안의 앞에서 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걸리는 것만으로 졸음을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미안해요.”
애쉴이 분홍빛 입술을 우물거렸다. 혹여 잠든 사이에 어디 가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연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엎드린 채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불규칙적이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뀐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녀가 잠들자마자 에르도안의 표정이 싹 지워졌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쉬는 것 외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꿈을 이끌어야 할 이가 정신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눈을 꼭 감은 채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윽…….”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마를 짚은 쪽의 팔꿈치가 테이블에 닿았다. 그것도 모자라 이마까지 닿을 듯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이마가 테이블에 닿기 직전.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 * *
현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여자의 꿈에 들어온 에르도안이 눈을 떴다. 그녀가 저와 관련된 꿈을 꾸고 있지 않았더라면 들어오지 못했을 것인데.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카페인가.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불현듯 오른쪽 손등에서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웠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의 체온이었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 위에 얹혀 있는 것과 그것의 주인에 차례대로 시선을 주었다.
아, 안 돼.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애쉴을 본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레이디? 일어나요, 레이디!”
“…….”
“제발, 제발 눈 좀 떠 봐요!”
“…….”
“레이디 팔라디움, 제발!”
“우웅…….”
다행히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애쉴이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다물려 있던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을 보며 에르도안은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면 이번 회차는 이것으로 끝이었을 터다.
“에르도안……?”
“잘 들어요.”
에르도안은 눈을 비비는 여자의 손을 끌어내려 꼭 붙잡았다. 애쉴은 반쯤 뜨인 눈으로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가엽게 여기지도, 동정하지도 않아요.”
“네?”
“그러니까 제발 자신을 탓하지 말아요. 다 내 잘못이니까. 나를 탓하고 나를 원망해요.”
“그게, 무슨…….”
훅 쏟아지는 졸음 탓에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에르도안은 툭 떨어지는 고개를 받쳐 들었다. 장미 같은 적안이 눈꺼풀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생사를 오가는 이에게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
“우웅…….”
뜨거운 무언가가 입에서 입으로 넘어왔다. 갓난아이가 입에 들어온 것을 삼키듯 애쉴은 비몽 사몽하게 그것을 받아 삼켰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시야가 빙글 돌았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오롯이 에르도안만이 기억하는 과거가 눈앞에 펼쳐졌다.
* * *
“다, 알고, 있다고요.”
등 뒤에서 축제용 불꽃이 펑펑 터지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러 나와 대화에 즐거이 빠진 이들, 정처 없이 길을 지나가던 이들 모두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단 두 사람, 에르도안과 애쉴을 제외하고는.
“제가 시간을 돌린 것도…… 당신을 살리기 위해 수명을 잃은 것도……?”
“미안해요. 당신의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요.”
그녀의 양손을 꼭 잡은 에르도안이 목멘 소리를 내었다. 바짝 마르다 못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몇 달간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는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숨이 막혔다. 크게 뜨인 적안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치부를 들킨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던 여자가 더듬거렸다.
“당신이, 왜 죽었는지도, 알고, 계신 건가요?”
“…….”
에르도안은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하, 하하.”
덜덜 떨리는 입술 새로 자조 섞인 숨이 흘러나왔다. 애쉴은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더러운 집착을 집착의 대상자인 그가 낱낱이 알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한다며 속삭이는 남자에게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했다.
무수한 죽음들의 원인이 된 여자에게 바치는 사랑 따위 진심일 리가 없었다. 시한부가 된 여자를 향한 싸구려 동정일 게 뻔했다.
“사과, 하지, 말아요.”
투둑.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땅을 짙게 적셨다. 애쉴은 그를 노려보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의 말을 용서를 빌 자격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에르도안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건만. 눈앞이 아찔했다.
“레이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애쉴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짓말에 홀랑 넘어가게 될까 두려워졌다.
그녀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듣는 고함에 놀란 남자가 몸에서 힘을 뺐다. 그 틈을 타 애쉴은 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뒤돌아 달렸다.
“멈춰요, 레이디!”
기겁한 에르도안이 뒤쫓았다. 그러나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앞서간 여자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속절없이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애쉴은 밧줄로 출입이 통제된 구역까지 들어갔다. 이제 곧 황실의 행렬이 지나갈 터인데, 큰일이었다.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잠깐만 멈춰 봐요!”
“따라오지 말아요!”
앙칼지게 외친 여자가 계속해서 달렸다. 언제 황실의 행렬이 시작될지 몰라 에르도안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꺅꺅거리는 군중들의 비명과 놀란 경비병들의 고함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비틀거리던 여자가 넘어졌다. 드디어 그녀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에 안도하기도 전. 저만치서 말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행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꺄아아악!”
“누가 어떻게 좀 해 봐요!”
곧 있을 참사를 예견한 외침들이 허공을 갈랐다.
안 돼, 안 돼! 에르도안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보다 말이 빠른 건 당연지사였다.
“……?”
넘어져 있던 애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기수가 어떻게든 말을 멈춰 보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앞발을 들게 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하필 그 위치가 쓰러져 있던 여자의 바로 위였다.
“안 돼!”
부질없는 비명이 공기 중으로 흐트러졌다. 높이 들어 올렸던 앞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 깜빡할 만큼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에르도안에게는 영원의 순간처럼 보였다.
콰직.
애쉴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녀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 * *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장례식이 끝났다. 야속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에르도안은 묘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죽은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갔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잃고 뻥 뚫려버린 마음은 조금도 메워지지 않았다.
언제나 땅속에 묻혀 있던 건 그였고, 묘비를 지키고 있던 건 애쉴이었다. 그런데 이젠 반대였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홀로 떠나버린 이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을 그녀 또한 겪었을 거라 생각하자 묵직한 압박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숨을 쉴 때마다 칼로 폐부를 쑤시는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고통을 수십 번도 더 견뎌냈나요. 나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데…….’
충혈된 눈으로 회색 묘비를 응시하던 에르도안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묘비가 아니라 연인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부드럽고 따뜻하지 않았다. 딱딱하고 서늘하기만 했다. 붉게 부어 있는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혹여 그녀가 하늘에서 보기라도 할세라 그는 얼굴을 땅에 묻어 버렸다. 그러면서 간절히 빌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때 그 지하 감옥에서처럼.
* * *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차가운 지하 감옥에 애쉴을 던져놓고 돌아온 부하의 질문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에르도안의 얼굴이 아닌 손목에 시선을 주었다. 손목에는 은색 줄에 손톱만 한 자수정이 박힌, 사랑하는 여인이 선물해 줬다며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있던 팔찌가 걸려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찌를 어루만지던 에르도안이 멈칫했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팔찌를 들여다보다가, 분노 어린 음성으로 짧게 일침을 가했다.
“나가.”
부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그가 만든 마음속의 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벽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죄의식과 죄책감이 뱀처럼 엉겨 붙었다.
애쉴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나를 버렸느냐고. 농락했느냐고. 사랑한다며 속삭이던 달콤한 말은, 내게 향해 있던 아름다운 표정은 전부 다 거짓이었냐고.
그러나 결국 묻지 못했다. 앞으로도 평생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멍청하기는.”
그는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전리품이라고만 생각했던 여자에게 입을 맞췄을 때였다. 무표정한 얼굴 위의 눈물을 보자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요동쳤다.
그 언제보다 빠르게 고동치며 뜨거운 피를 뿜어내던 그것은 그녀가 배신했을 리 없다고, 전부 다 오해일 거라고 악마처럼 유혹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다잡고 또 다잡아놓아 얼음처럼 차가워진 이성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키스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처럼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싫어졌다. 증오스러웠다. 그렇게까지 농락당해 놓고도 왜, 대체 왜!
누구에게도 표출할 수 없던 분노는 사로잡은 여자에게 옮겨붙었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노예 구속구를 채우고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구속구가 채워지던 순간, 끝없이 무너지던 적안이 떠올랐다. 끌려가면서도 눈물만 흘릴 뿐 반항 한번 하지 않던 모습이 선연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게 흡사 죽음을 앞둔 사람 같았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우스웠다.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사람은 본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걸 빼앗겼으니 본인이 지어야 옳았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자신에게 분노했다.
그는 그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어차피 그녀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그녀가 자신을 버린 순간, 황태자에게 안겨 트라펠로가(家)를 몰락시켜 달라고 한 순간 모든 게 끝난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다. 그녀는 이제 자유의지를 빼앗긴 전리품일 뿐이다. 그게 전부다.
“죽었군.”
에르도안과 약간 떨어진 곳에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단테가 메마른 사막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에르도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제발 그만 좀 할 수 없나? 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불쾌감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남자는 에르도안을 보자마자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하는 걸 들어줄 테니 여기까지만 해라.’
단테는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무언가를 그만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의 에르도안은 노예였으며 애쉴이 황태자와 약혼을 했다는 소식을 막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는 애쉴이 황태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녀가 황태자와 억지로 약혼했다고 생각했다. 트라펠로를 몰락시켜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것도 황태자가 한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단테에게 바랐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웨이센가(家)를 몰락시킬 힘을 달라고.
단테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해질 기회를 주었다. 에르도안은 그가 만든 지옥에서 굴렀고, 80년 같은 8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여기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런 줄 알았다.
황태자가 트라펠로를 건든 이유가 연인이라 생각했던 여자의 청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또 누가 죽었습니까?”
에르도안이 퉁명스레 물었다. 소중한 이를 전부 잃은 그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아무런 감흥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단테가 입을 연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지하 감옥으로 뛰쳐 내려갔다.
“내 잠을 방해하던 여자가 죽었다.”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단테는 애쉴의 죽음을 선고했다.
* * *
단테가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지하 감옥은 대낮처럼 밝았다. 철창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에르도안은 떨리는 손으로 철창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손이 미끄러져 몇 차례 헛손질하고 나서야 간신히 열 수 있었다. 차디찬 문을 열자마자 그는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처져 있는 여자를 급히 안아 들었다.
그녀의 핏기없는 얼굴은 피와 눈물로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굳게 닫힌 눈두덩이는 부어올라 있었고, 긴 속눈썹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피멍이 든 입술은 다 해져 너덜거렸고, 목에 걸린 구속구는 붉게 얼룩져 있었으며, 양손은 손톱이 모조리 깨져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한때 제국을 쥐락펴락하던 공작가 영애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참한 말로였다.
아아, 이런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그제야 에르도안은 제 심정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애쉴을 사랑하고 있었다. 곁에 둘 수 없다면 날개를 꺾어서라도 가둬놓고 싶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게 웨이센의 귀족들을 전부 다 죽이고도 그녀만은 살려놓았던, 지하 감옥에 가둬놓았던 이유였다.
그랬는데, 그녀는 날아가 버렸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으로. 영원히.
“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덮쳐들었다. 눈앞이 아찔해져 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얼굴을 한 남자는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자결했다고 하기엔 혀를 깨문 흔적이 없었다.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와 식어가고 있는 몸이 아니라면 깊은 잠에 빠진 사람 같았다.
“왜 죽은 거지?”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봐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설사 영혼 없이 텅 비어 버린 눈동자라 해도.
지독하게 이기적인 마음이란 걸 안다. 그런데도 그걸 바랐다. 갈구하고 갈망했다. 차게 식은 연인의 시신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를 따라온 단테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허락된 시간이 끝났으니까.”
“허락된, 시간?”
앵무새처럼 따라 읊었으나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는 뿌예지는 시야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애쉴의 목에 걸린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금빛 모래시계였다. 죽을 때까지 쥐고 있었던 것인지 겉면은 피로 새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부는 모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에르도안은 떨리는 손으로 모래시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섬광탄이 터지듯 모래시계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태양처럼 찬란한 빛 속에서 모래시계는 제 주인의 기억을 토해내었다.
그제야 에르도안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 * *
진실을 알게 된 에르도안은 이성을 놓고 미쳐 날뛰었다. 연인의 시신을 부여잡은 채 이름을 부르짖으며 오열했다. 그러다 눈이 돌아간 상태로 제 심장에 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그러나, 예리한 검 끝이 가슴에 닿기 전.
애쉴의 목에 걸려 있던 모래시계가 이번에는 피를 머금은 것 같은 붉은 빛을 뿜었다. 에르도안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 1년 전이었다.
제가 소드마스터가 된 것이, 그녀가 지하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저를 두려워하는 애쉴을 보며 회귀한 것임을 깨달았다. 늦게나마 그녀를 보듬어 주고자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같은 실수 따윈 하지 않을 텐데.
에르도안은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염원을 절실히 빌었다. 그 정성이 통한 것이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하 감옥에서 애쉴이 죽던 날. 그는 다시 회귀했다. 1년 전으로.
그게 과연 기적이었을지는…… 글쎄.
* * *
두 번째로 돌아간 시간에서 에르도안은 최선을 다했다. 그를 볼 때마다 경기하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고, 발밑에서 기었다.
기실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될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용서를 빌려 했다. 그 행동이 상대방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것을, 그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차에서도 에르도안은 눈앞에서 그녀를 잃었다.
“레이디!”
보여 줄 것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여관에 애쉴을 홀로 두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위험하니 가까이 가지 말라며 만류하는 주변 사람들을 뿌리친 남자가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었다.
자욱하게 깔린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버티기 힘든 열기가 넘실거렸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건물의 최상층에 있던 한 방에서 연기에 중독된 채 이미 숨져 있는 애쉴을 발견했다.
그의 방은 원래 최상층이 아니었거늘. 불길을 피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안 돼, 안 돼!”
또다시 허무하게 잃어버렸다. 연인의 시신을 껴안은 남자가 하릴없이 오열했다. 그러다 밀려드는 연기에 숨을 쉬지 못해 졸도했다. 눈을 뜨니 보름이 지나 있었다. 애쉴의 장례식은 끝난 지 오래였다.
또다시 그녀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정신을 좀먹었다.
차라리 같이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에르도안은 정처 없이 길거리를 헤맸다. 헤매고, 또 헤매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묘비 앞이었다. 그는 회색 묘비 앞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풀린 눈에 퀭한 얼굴이, 꼭 미친 사람 같았다.
“왜……?”
왜 그 시간에, 왜 하필 그곳에서 불이 난 것일까.
이번 시간대의 에르도안이 묵고 있던 여관은 과거, 단 한 번도 불이 난 적이 없었다. 그도 처음 묵는 여관이었고.
벨키에로트가 벌인 일이라 하기에도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매 회귀에서 색다른 방법으로 그를 위협에 밀어 넣던, 지독하리만치 집요하던 남자가 갑자기 그가 아닌 신녀일지도 모르는 귀중한 여자를 죽일 리 없었다.
그러나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에르도안은 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벨키에로트가 애쉴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복수를 하고자 황실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이는 연이은 회귀에도 그가 여전히 소드마스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술에 대한 지식은 머리에 남아 있다지만 몸으로 익힌 마나를 끌어 올리는 법은 잊었어야 정상인데. 어쩐지 찝찝한 마음에 사용하지 않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녀를 잃은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깊은 밤, 검 한 자루에 의지한 채 에르도안은 황실로 쳐들어갔다. 앞길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황태자의 침실에 다다랐다. 무방비한 황태자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증오를 표출한 후 검을 찔러넣으려던 그때.
시간이 돌아갔다. 1년 전으로.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여관에서 깨어난 남자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범벅이 된 상태였는데, 지금은 깨끗하기만 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으로 기꺼워하던 정신은 깨끗해진 몸과 반대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왜 자꾸 시간이 돌아가는 걸까. 그리고 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나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죽어 버린 연인이 살아날 터이니.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터이니.
이번에는 지켜야 했다. 그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모조리 없애 버려야 했다. 그것이 설령 황태자가 아니라 웨이센 제국 그 자체라 해도.
황실 때문에 눈앞에서 세 번이나 연인을 잃은 남자가 맹목적인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유일하게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여자는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몰랐다. 결국 이번 시간대에서도 예기치 못한 재앙이 벌어졌다.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내전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2황자 칼리아스였다. 당연하게도 그의 뒤에는 에르도안이 있었다.
바로 이전 시간대처럼 벨키에로트를 암살하자니 도망자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그런 신분으로 애쉴에게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웨이센 가문 자체를 몰락시켜 버리기엔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전이었다.
칼리아스 또한 황자였기에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 황태자인 벨키에로트가 너무나도 뛰어나 납작 엎드려 있었을 뿐. 황후인 어머니가 이트라의 힘을 빌려주겠다 하긴 했지만, 외세의 힘을 빌리고 싶진 않아 눈치만 보던 차였다.
에르도안의 제안을 받은 칼리아스는 귀족들의 사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고, 무력으로 황실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황태자는 칼리아스가 되었다. 강건했던 전 황태자의 세력은 1세기하고도 반 만에 나타난 소드마스터의 압박에 스산히 흩어졌다. 절반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서 등을 돌려 새 주군을 찾아 나섰고, 나머지 절반은 유폐된 벨키에로트의 복권을 꿈꾸며 지하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명망 있던 귀족 가문들의 이름이 하루아침에 역사에서 지워졌다. 주로 벨키에로트의 힘이 되어 주던 곳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강대했던 가문, 팔라디움은 건재했다. 여기저기서 피바람이 불 때 공작가만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겉으로만.
새로이 권력을 잡은 이들의 눈에 잔존 세력이 좋게 비칠 리 없었다. 그들은 팔라디움을 은근히 따돌렸다. 살아남은 벨키에로트의 세력들은 공작과 그 식솔들을 향해 배신자라며 손가락질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공작가가 살아남은 것이 에르도안의 연인, 애쉴리아 팔라디움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입조심을 시켜도 세간에는 그녀에 대한 욕이 파다하게 퍼졌다.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딸자식을 팔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소문은 예사였고, 밤마다 밑에 깔려 얼마나 앙앙 울었길래 소드마스터가 저러겠냐는 남사스런 구설수까지 돌았다.
“……괜찮아요.”
애쉴은 눈에 띄게 시들어 갔다. 감정이 아니라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더 이상 에르도안을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텅 비어 버린 눈으로 괜찮다는 말만 반복할 뿐 그 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에르도안은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복수심에 눈이 먼 나머지 다른 것들을 모조리 간과했다. 애쉴을 생각하면 벨키에로트는 치워 버려야 할 적이었으나, 팔라디움 공작가를 생각하면 무조건 지켜야 할 자였다. 잔인하게도 모순적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뒤늦은 깨달음의 말로는 연인의 죽음이었다.
“하윽…….”
평소 몰락한 공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에르도안의 추종자가 암살을 시도했다. 에르도안이 발 빠르게 발견한 탓에 깊은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삶의 의지를 잃은 여자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깊었다.
안 된다며 기절할 듯 오열하는 남자의 품 안에서, 그녀는 네 번째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또다시 1년 전으로 돌아왔다.
* * *
이쯤 되자 에르도안은 애쉴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갈 때마다 멀쩡하던 여자가 부서지고, 망가지고, 끝내 죽어 버렸으므로.
회귀 첫날. 팔라디움 공작가를 매번 방문하던 그는 동선을 바꿨다. 기사단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내려와 버렸다. 기겁한 트라펠로 자작이 미쳤느냐며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가문에서 제명하겠다 엄포를 놓았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래시계가 보여 준 기억 속에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애쉴은 한 번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회귀하고 나서부터는 미래가 바뀌었다. 대체 어째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나왔다. 죽어야 할 자신이 죽지 않아서였다. 틀에 박힌 행동을 하지 않아서였다. 본래라면 그는 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서부 지역에 가, 애쉴과 얽히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 앞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애쉴은 죽지 않을 것이다. 짧은 수명이나마 살아가다 평안히 잠들 것이다.
그때의 그는 안일하게만 생각했다.
“누가, 죽었다고요?”
몇 달 후. 수도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하던 남자가 얼어붙었다. 트라펠로 자작은 부인에게 코트를 넘기며 혀를 끌끌 찼다.
“팔라디움 공녀 말이야. 사고사라는 말도 있고, 병사라는 말도 있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던데. 어느 쪽이든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되었지.”
수도에 갔던 아들이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오던 편지가 뚝 끊긴 상태였기에 자작은 공녀와 아들의 관계가 파탄 났다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떠도는 소문을 전해 주었을 뿐인데.
새파랗게 질린 에르도안이 뛰쳐나갔다. 막 집에 도착한 말을 마구간에 넣으려던 종자를 밀치고 고삐를 그러잡았다. 그리고 곧장 수도로 향했다. 황급히 뒤따라온 아버지나 어머니의 만류 따위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다.
“……오랜만이로군.”
삼 일 밤낮을 새워 가며 말을 달렸으나 장례식은 이미 끝난 후였다. 급한 대로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상복 차림이던 라인하르트가 그를 맞았다. 동생을 보낸 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는 에르도안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동생의 애인에게 대한 예우로써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에르도안은 격식도 차리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라인하르트는 즉각 대답하는 대신 한차례 그를 훑었다. 땀에 절은 이마,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동공. 바르르 떨리는 입술. 사시나무처럼 경련하는 몸과 먼지에 덮여 더러워진 옷까지.
집에 급한 일이 있어 당분간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는 애쉴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례식에까지 오지 않은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우울증이었네.”
“…….”
“살고 싶지가 않다 하더군.”
“…….”
“혹시 자네는 뭐 들은 거 없었나?”
“…….”
들은 게 없어도 알고는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린 원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인하르트는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표정을 보아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을 해 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자네…….”
그는 에르도안을 다그치려다 그만두었다. 지나간 일을 헤집어 봤자 후회되고 아프기만 할 뿐 동생은 살아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앞으로 다시 볼 일 없었으면 좋겠군.”
모질게 말한 라인하르트가 등을 돌렸다. 에르도안은 피가 차게 식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혈흔이 손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 * *
어떻게 하면, 당신을 살릴 수 있을까.
수십, 아니 수천 번을 고민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유일하게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에르도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 시간 내내 그녀의 묘지를 찾아가 혼잣말을 했다. 그를 본 사람들 모두 미친놈이라 수군거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애쉴이 지하 감옥에서 죽었던 그날이 되자,
“……하.”
어김없이 시간이 돌아갔다. 1년 전으로.
에르도안은 진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태엽을 감아놓은 인형이라도 되는 것일까.
저녁 식사를 가져다준 하녀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에르도안이 중얼거렸다. 회귀하는 동안 그가 마주한 사람들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정신을 다잡으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있던 그때. 거울을 본 그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5년이란 시간이 지났건만 거울 속의 자신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머릿속에 새겨진 5년의 세월과는 달리 몸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괴리감이, 지독하게 소름 끼쳤다.
“……!”
넋이 나간 얼굴로 거울을 매만지던 남자가 흠칫했다. 혹여 이 모든 일이 단순히 환상인 것은 아닐까. 현실의 자신은 애쉴의 죽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실신한 게 아닐까. 눈을 뜨면 여전히 지하 감옥이지 않을까.
쾅. 에르도안이 거울을 쳤다. 큰 소리와 함께 작은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튀었다. 주먹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쩌적, 금이 갈라져 사방으로 퍼졌다.
그는 피로 점철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자 자잘하게 박힌 유리 조각들이 더욱 깊게 박혀 들며 상처의 고통을 증가시켰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일 리 없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통증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왜, 왜 자꾸 시간이 돌아가는 것일까. 그녀는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 것일까.
은연중에 느끼고는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이유가, 애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과거 그녀는 죽어 버린 연인을 살리고자 시간을 돌렸다. 무려 수십 번이나. 그리고 지금, 죽은 사람과 남은 사람이 바뀌었을 뿐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그녀를 살려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회차에서 그가 살아남았듯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가 죽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죽었다. 죽음의 원인인 벨키에로트를 치워 버렸는데도 죽었다. 그래서 아예 곁을 떠나 주었는데도 죽었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걸 수십 번이나.’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자신이야 불가항력이라지만 애쉴은 수명까지 바쳐 가며 시간을 돌렸다.
그랬던 결과가, 가족들을 잃고 지하 감옥에 갇혀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라니.
깊숙이 밀어두었던 죄의식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에르도안은 그 자리에서 끅끅 울었다. 그녀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며 사죄하고 싶었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아직 안 죽었군.”
모래를 씹는듯한 버석한 목소리가 텅 비어 있어야 할 방 안에 울렸다. 어찌 들으면 ‘왜 아직까지 안 죽었냐’고 묻는 것 같은 말투에 에르도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단테?”
지하 감옥에서 헤어진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꼭 어제 본 사람을 오늘도 만나는 느낌이었다.
침대에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꼰 단테가 중얼거렸다.
“소원도 들어줬는데, 왜 자꾸 반복하는 거지?”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황급히 눈물을 씻어낸 에르도안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쪽이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네가 한 거 아니었나?”
“그런 게 가능했다면 그녀가 시간을 돌리도록 놔두지 않았겠죠.”
“아, 그래. 그걸 잊고 있었군.”
‘그녀’라는 단어에 무표정하던 단테가 곱게 눈매를 휘었다.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남자의 미소에 에르도안이 흠칫, 놀랐다. 분명 웃고 있음에도 웃는 것 같지 않았다. 표정 없는 조각상에 가면을 씌워 둔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모래시계 말이야.”
“모래…… 시계? 애쉴, 아, 아니. 레이디가 가지고 있던 것 말입니까?”
머릿속으로는 항상 애쉴이라 부르면서도 입 밖으로는 섣불리 내지 못했다. 그녀에게 ‘애쉴’이라 불러도 되겠느냐 허락을 구한 적이 없었으니까.
무심코 나온 호칭을 고친 남자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단테가 느른히 웃었다.
“그때 부숴 버렸어야 했는데.”
“그 모래시계 때문입니까? 시간이 돌아가고 있는 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래시계에 자유의지가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왜 멋대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는 말인가. 애쉴이 돌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살기 싫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대체 왜……?”
에르도안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린 단테가 뇌까렸다.
“물어봐야지.”
“……모래시계에게?”
“아니, 모래시계를 폭주시킨 여자에게.”
“……?”
“신녀들의 물건은 신녀들의 말만 듣지.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때 부숴 버렸어야 하는 게 맞았군.”
“레이디는 신녀가 아니-”
“물건 정도는 혈육도 다룰 수 있어. 그 여자가 한 게 맞아.”
그럼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게 애쉴이라는 말인가.
에르도안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여자가 계속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정말 그녀가 돌리고 있는 게 맞다면 왜 돌아간 시간에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지.
그러나 단테가 허튼소리를 할 만한 자는 아닌지라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그 방법 외에는 마땅히 다른 수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어떻게.
지금의 애쉴은 그를 두려워했다. 부들부들 떨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여자에게 뭘 묻는단 말인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편지를 보냈다. 시간이 계속 되돌아가고 있다고, 그런데 그 시간에서 당신만 다른 행동을 하고 있어 혹시 이에 대해 알고 있냐는 식으로 돌려 물었다. 자신이 여러 번 죽었다는 것이나 그녀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걸 안다는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또 도망치려 할 테니까.
편지를 보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답장이 왔다. 그사이 부고가 날아오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남자가 반색했다. 속지가 상하기라도 할세라 조심조심 겉봉투를 뜯자 단정한 글씨체의 짧은 답변이 눈에 들어왔다.
「3일 후, 마차를 보내드릴 테니 에트나에 있는 팔라디움의 별장에서 뵈어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썼는지 글자마다 잉크가 짙게 배어 있었다.
아, 이게 얼마만의 만남인지.
비록 여전히 그를 두려워할 테지만. 살아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웠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져, 에르도안은 편지가 젖기라도 할까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 편지가 치워지자마자 뚝뚝 떨어진 눈물방울에 연갈색이던 책상이 짙은 갈색으로 물들었다.
* *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바다.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리고, 짭짤한 소금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어난 파도는 바위와 부딪쳐 새하얀 물보라를 만들어내나, 높다란 절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는다.
그 절벽의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웨이브 진 은발에 장미 같은 적안을 가진 병약하게 생긴 여자가.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뚜벅뚜벅.
뒤쪽에서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여자가 뒤로 돌았다. 제비꽃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급히 시선을 내렸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그 몸짓을 본 남자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네.”
한참을 망설이던 애쉴이 가냘프게 대답했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애쉴은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분명 이런 말을 해야지, 저런 걸 물어봐야지 하며 단단히 다짐하고 왔는데.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백치라도 된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쉴은 한참이나 입술을 잘근거렸고, 에르도안은 그런 그녀를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애쉴이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한 채였다.
“시간이, 돌아가고 있다고요.”
“예.”
“얼마나…… 몇 번이나?”
“1년 단위로. 이번이 다섯 번째던가요.”
애쉴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인데, 예상한 답변을 듣게 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꺼내 끝에 달린 물건을 멍하니 응시했다.
1년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붉게 변한 모래시계. 정확한 건 모르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다. 그의 반복된 회귀에 이 모래시계가 얽혀 있다는 것을.
하릴없이 모래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어떤 다른 행동을 하던가요.”
할 말을 잃은 에르도안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걸 당사자에게 얘기해도 되는 것일까.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정확한 답을 드릴 수 있을 터이니.”
상대방이 뜸을 들이자 별로 좋은 일이 아님을 알아차린 애쉴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는 그보다 더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는 모래시계에 향해 있었다.
망설이던 에르도안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회차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모래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멎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 속, 파도만 외로이 철썩거렸다. 그 노랫소리에 뿌우우,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섞일 때쯤이 되어서야 애쉴이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잇새로 나오는 숨소리는 거칠었고,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 저를, 살리려, 하셨나요?”
“네.”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쉴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에르도안은 울고 있었다. 맞은편의 여자처럼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표정을 한 채로.
“노력, 했는데.”
울음소리 너머 그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살릴 수가, 없어서.”
“…….”
“미안해요.”
“…….”
“정말 살리고 싶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말소리가 뚝, 끊겼다. 난데없는 상황에 에르도안이 얼어붙었다. 조그마한 체구가 달려들어 어느새 그를 와락 안고 있었으므로.
짭짤한 바다 내음 너머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약간 서늘하다 싶을 정도의 체온이 얇은 옷가지를 타고 전해져왔다. 혹여 환상인 건 아닐까.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안으면 부서지는 게 아닐까. 그는 감히 팔을 올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미안, 해요, 미안해요.”
그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여자가 오열했다.
그녀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억울한 마음에,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죽기 직전 스쳐 지나가듯 떠올렸을 뿐이다.
지금 제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에르도안이 알게 해 달라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 진심을 알게 해 달라고.
그저 그랬을 뿐인데.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어요.”
기실 단어 그대로 정말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애쉴은 그의 반복 회귀 원인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용서를 구했다.
“나는, 정말, 이런 걸 바란 게…….”
울먹이던 여자가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황급히 그를 놓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눈물 젖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비애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넋이 나가 있던 남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레이디?”
“미,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공포심으로 혀가 뻣뻣이 굳었다. 발끝을 타고 올라온 마지막 회귀의 기억이 그녀를 먹어치웠다.
에르도안이 당황해하는 틈을 타 애쉴은 무릎을 꿇었다. 무서운 것을 보듯 덜덜 떨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울부짖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전 정말, 이런 걸, 바라지 않았-”
입술에 닿는 감촉에 말이 뚝 끊겼다.
애쉴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분노하며 검을 들이댈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품에 꽉 안기게 된 탓이다. 따스한 체온이 옷에 가려지지 않은 살갗을 타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주위에 퍼진 그만의 진한 머스크 향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꿈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신께 감사하고 있어요.”
너무 놀라 굳어 버린 여자에게 에르도안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이렇게 당신을 볼 수 있어서.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당신의 진심을 알고,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게 되어서.”
비로소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여자의 적안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에르도안은 애쉴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녀를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애쉴.”
허락받지 못했어도 상관없었다. 제 진심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는 동굴에서 죽었던 날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항상 신분 차이를 들먹이며 보이지 않는 선을 긋던 남자의 진심에 애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항상 그려왔던,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꿈같은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품속에 가둬놓은 여자의 가느다란 떨림을 느끼며, 에르도안은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한 번도 마음 편히 꺼내 본 적 없던 말들을 쉼 없이 토해내었다.
“부디, 나를 용서해 줘요.”
당신의 진심을 알지 못했던 나를. 정말 그런 거였냐고 단 한 번이라도 물어보지 못했던 나를.
“무서웠습니다. 물어보는 게,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게 한순간의 짧은 유희였노라 답할까 봐. 처참하게 찢겨 버린 마음이 이어붙일 수 없을 만큼 조각나 가루가 되어 버릴까 봐.
“미안합니다. 그 시간들을 홀로 겪게 만들어서. 그리고, 그걸 보듬어 주진 못할망정 처참하게 짓밟아 버려서. 너무 늦게 알게 되어서.”
애쉴의 떨림이 차츰 심해졌다. 에르도안은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았다. 머리에 얹은 손가락들이 부드러운 은발에 감겨들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주변을 맴돌고, 그녀의 미지근한 체온이 팔을 타고 그의 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애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에르도안은 피가 끓는 음성을 내었다.
“애쉴리아 팔라디움. 당신을 사랑합니다.”
두근, 두근.
말라비틀어졌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크게 뜨인 적안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애쉴은 간절히 바라왔었다. 그가 자신의 더러운 집착을 알게 된 후에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그리고 그 소망이, 지금 막 이루어졌다.
“하, 흐, 으흑.”
순식간에 눈물이 들어찼다. 그 눈물이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애쉴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항상 그리웠던 부드럽고 진한 머스크 향이 바다 내음을 배경으로 주위를 감돌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에 쥐어 보았다. 자신의 얼굴에 닿아 있는,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셔츠를. 선명한 촉감에 비로소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곳은 현실이었다. 매번 그려왔던 꿈이 아니었다. 그는, 에르도안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돌린 건 헛된 게 아니었다. 그를 살리고자 한 건 부질없는 게 아니었다.
“저도,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랬기에 다시 한번 그를 위해 삶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시간은 여기까지예요.”
“……왜, 왜 그런 말을?”
여기까지라는 말에 에르도안의 몸이 굳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마지막이 될 온기를 마음속에 갈무리하며 애쉴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얼굴로 그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훔치며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미래는 누군가에게 엿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신녀, 혹은 그 혈족들은 그나마 괜찮아요. 시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신녀 외의 사람이 신녀조차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말하면 큰 화를 입게 되어요.”
몸을 일으키며 애쉴이 중얼거렸다.
“그걸 피할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그 미래를 지금 당장 현실로 만드는 것.”
에르도안은 멍하니 상대방을 올려다보다가, 그녀가 뒤돌아 걸음을 떼는 순간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뭔가 다른 방법이.”
“이게 최선이에요.”
애쉴은 쌀쌀맞은 태도로 그의 팔을 쳐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정을 주면 뛰어내리지 못할 것 같았다. 미래를 말한 남자를 살려야 했다. 매번 그래왔던 것처럼 그를 살려야 했다.
“지금 여기서 제가 죽지 않으면 당신은 큰 화를 입게 될 거에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건 시간이 되돌아가도 지워지지 않을 수 있어요.”
할 말을 잃은 남자가 넋을 놓은 사이 그녀는 절벽 끝에 우뚝 섰다. 시선을 내리자 아찔한 높이 아래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보였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맞는 죽음이라니. 그녀는 잠시 낭만적이라는, 때에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저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불현듯, 커다랗고 따뜻한 감촉이 등 뒤에 포개졌다. 울먹이는 소리도 함께였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함께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르도안.”
그녀의 가족을 죽인 후로 처음이었다.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에르도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껴안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애쉴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를 밀치며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낮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미련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다시 돌아갈 거예요. 1년 전으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애쉴의 말에 에르도안이 침음했다.
그래요. 만날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저를 두려워할 테죠. 이렇게 말을 하지도,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겠죠.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조차 힘들겠죠.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에르도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을 간신히 삼켰다. 애쉴은 미련을 털어 버리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에르도안.”
“말씀하세요.”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당신만의 삶을 사세요.”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아 에르도안은 이를 악물었다. 모진 말을 내뱉은 여자는 긴 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도 알게 해 달라는 생각 탓에 계속해서 회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걸 멈추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그녀가 시간을 돌린 횟수만큼 참고 기다리던가.
혹은 그 전에 죽을 운명을 비틀어 그녀를 살려내던가.
“미안해요. 제가 시간을 돌린 횟수만큼이 되면, 회귀는 알아서 멈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뜻을 알아들은 에르도안이 말허리를 잘랐다. 애쉴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차피 1년밖에 살지 못해요.”
정해진 운명을 비트는 게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누구보다 잘 안다.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 곁을 떠나는 슬픔 또한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서 애쉴은 저를 살리겠다는 남자를 만류했다. 멋대로 돌아가는 시간을 멈출 수 없다면 그의 마음이라도 지켜주려 했다.
“운명을 바꾸려 들지 마세요. 당신만의 삶을 살면서 회귀가 끝나기를 기다리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소원이라는 단어까지 들먹여 가면서.
에르도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올 정도로. 손톱이 살갗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싫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언과도 같은 소원에 거절의 의사를 표할 수는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짓씹던 그는 결국 피가 끓는 듯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에르도안 모르게 살며시 띤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 * *
애쉴이 세상을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테가 찾아왔다.
그녀의 묘비 앞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던 에르도안은 사정을 대강 전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팠으나 일이 어찌 되었느냐며 물어보는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 때문이었군.”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단테는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것과도 같았다.
“뭐가 말입니까.”
“모래시계가 폭주한 것 말이다.”
“뭐라고요?”
믿을 수 없는 말에 에르도안이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단테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죽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가 내게 빌었던 소원이 뭔지 알고 있나?”
“소원……?”
생각해 보니 그랬다. 단테는 시간을 돌리는 것을 멈춰 달라며 그를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회귀의 시발점은 그가 아닌 애쉴이었다. 그러니 단테는 그녀에게도 똑같이 소원을 물어보았을 터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에르도안이 멍하니 묻자 단테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두 번 다시 너를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더군.”
“……하.”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닌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눈앞이 뿌예졌다. 에르도안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눈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보려 애를 썼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하지만 애쉴은 저를 사랑한다 했습니다.”
“그랬겠지. 그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니까.”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에르도안은 제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단테는 애쉴의 묘비에 시선을 주었다.
“유일하게 마법이 들어먹지 않는 분야가 있지. 사람의 마음이라는. 그래서 다른 걸 들어줬다.”
“그게 뭡니까.”
“제 고통이 얼마나 큰지 네게 알려 달라는 것.”
에르도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표정에서 그의 감정을 읽은 단테가 담담히 뒷말을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회귀시키려던 게 아니었다. 기억만 보여 주려 했었지.”
“그렇다면 그, 기억이…….”
모래시계에서 터져 나오던 황금빛을 떠올리며 에르도안이 더듬거렸다. 그러다 그 후 터져 나온 붉은 빛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단테의 말 대로라면 그때가 모래시계가 폭주한 시점일 터다.
“……죄송하지만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과 모래시계가 폭주한 게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내 힘 때문이지. 주인의 의지를 들어준 것이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남자가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 힘은, 신녀들의 힘과 상극이라서.”
찰나 에르도안은 그의 힘이라는 게 평범한 마법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제국 역사상 신녀와 마법사가 충돌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단테가 범인이 아닐 거라고는 추측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에르도안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처음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한 번도 답을 들은 적이 없었을 뿐. 그러나 이번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단테는 옅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예?”
“그러는 너는 네가 누군지 정의할 수 있나? ‘인간’이라는, 남들이 정의한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말이야.”
말문이 막힌 에르도안이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자 단테가 그를 마주 보았다. 단테의 녹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꼭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에르도안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뭐, 신녀들이 나를 부르는 명칭이 있긴 하지. ‘시간의 찌꺼기’라는.”
“시간의…… 찌꺼기?”
인격을 가진 생명체에게 찌꺼기라니. 거침없다 못해 도를 넘어서는 단어에 에르도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단테는 그보다 더 자신을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는 표정으로 제 입술을 툭툭 쳤다.
“조금 길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지.”
“아니, 그건…….”
“평범한 인간들은 백이면 백 다 그런 얼굴을 하더군. 찌꺼기가 아니라 신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인간도 있었고.”
단테가 재밌다는 듯 큭큭거렸다.
“나는 그저 단테라는 존재일 뿐인데. 아니, 사실 단테라는 것도 나라는 존재를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군. 이것도 다른 누군가가 붙여 준 명칭일 테지.”
“……왜 시간의 찌꺼기라는 명칭이 붙은 겁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 말에 에르도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단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의 찌꺼기에서 파생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시간의 찌꺼기가 무슨 의미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되돌아간 시간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에르도안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단테가 쉽게 풀어 재질문했다.
“시간이 돌아가면 과거는 지워진다고, 대부분의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나 지워지는 게 아니라 틀에서 빠져나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게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나?”
“어디로…… 가다니요. 그냥 그건 말 그대로 지워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거라면 너나 그녀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야 정상 아닌가?”
할 말이 없어 에르도안은 입을 다물었다. 단테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안부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사라진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게 나다.”
“……!”
“그러니 시간의 찌꺼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럼, 당신이 말하던 그 ‘잠’이라는 건-”
“평소의 나는 잠들어 있지만, 강한 자극이 반복되면 잠에서 깨어나지. 그리고 지금처럼 내 형제가 될지도 모르는 것의 곁을 배회한다.”
단테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너희들 말로 하자면, 그래. 짧은 시간을 반복해서 돌린 부작용으로 사라졌어야 할 시간이 유령처럼 현재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되겠군.”
“…….”
“좋지 않은 일이지. 인과 관계에 맞지도 않고. 게다가 내가 직접 건든 것들은 시간이 돌아가도 변하지를 않아서. 그래, 바로 너처럼.”
무슨 말이냐는 듯 에르도안이 눈빛으로 물었다. 단테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힘 말이다. 소드마스터의 힘. 시간이 돌아가도 그대로지 않나.”
“아.”
에르도안은 바보 같은 탄성을 뱉었다. 왜 회귀해도 소드마스터로서의 능력이 남아 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단테는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게 참으로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물건에 깃들이는 건 상관없지만 인간에게 직접 힘을 쓰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지. 그러니 넌 몇 번을 회귀하든 죽을 때까지 소드마스터일 거다.”
죽을 때까지 소드마스터라는 말에 에르도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드마스터의 힘을 사용했던 회차치고 좋게 끝난 적이 없었는데.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테는 복잡한 그의 기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뱉었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예?”
묵묵히 듣고 있던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커졌다. 그 의미를 다른 뜻으로 착각한 단테가 긴 숨을 토해내었다.
“폭주한 모래시계는 제 주인의 마지막 의지를 따랐겠지. 제가 겪은 고통을 네게 알려 달라는 그 소망 말이다.”
다시금 찾아오는 죄책감에 에르도안이 입술을 짓씹었다. 단테는 메마른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군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이 뭔지 알고 있나?”
“그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똑같이 겪어보는……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에르도안이 경악했다.
폭주한 모래시계는 그녀의 소망을 가장 효율적이자 잔인한 방법으로 들어주고 있었다. 애쉴이 짐작한 대로 그는 애쉴이 1년을 온전히 살아갈 때까지, 혹은 애쉴이 시간을 돌린 횟수만큼 회귀를 겪어야 할 터였다.
“좋지 않아. 나야 상관없지만.”
제게 쌓여 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현재의 인과가 꼬일 거라며 단테가 중얼거렸다.
에르도안은 애쉴이 당부한 것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라는 그 잔인한 소원을.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욕망이 소원에 눌려 단단하게 억압되었다. 삼켜서는 안 될 것을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렇다면 저를 도와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를 도와주실 겁니까?”
“……내가 왜?”
드물게 뜸을 들이던 단테가 대꾸했다.
“네가 해야지.”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에르도안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상대방의 당황해하는 모습에 단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었을 때 제국이 멸망했지. 예정되지 않았던 수천 명의 죽음이 발생했고, 수만 명의 운명이 바뀌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 개입했어도 이 정도인데. 그녀를 도와주려면 몇 명에게 개입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나?”
“…….”
“다시 한번 말하지. 내가 직접 개입한 사건은 시간이 돌아가도 바뀌지 않는다. 제국을 멸망시킨 게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지금 시점에서도 제국은 멸망한 상태였을 거라는 소리다.”
“그렇, 군요.”
“그러니 네가 해야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에르도안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당신만의 삶을 살라던 그녀의 유언을 받들어야 한다는 고집과 대립하던 욕망에 단테의 제안이라는 불이 붙었다.
수평을 이루고 있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에르도안은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정말 고맙습니다.”
갑자기 달려오는 마차에 깜짝 놀라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어디선가 달려온 남자 덕에 목숨을 구했다.
애쉴은 저를 꼭 껴안은 채 바닥을 뒹군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체를 숨기고자 단테에게 받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가 에르도안인 줄 몰랐다.
“아, 피가…….”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와 얽히지 않기 위해 매번 그래왔듯 빠르게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할 애쉴은, 이상하게도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치료해 드릴게요. 같이 가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는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에르도안은 그녀를 따라 팔라디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왜, 왜지?’
정체를 숨긴 채 그녀를 구해 준 적이 수십 번. 그러나 그녀가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작은 변화에 혼란스러웠으나 찰나의 변덕이라 생각하며 넘어갔다.
“아, 또 뵙네요.”
그런데. 찰나의 변덕이 아니었다.
같은 시간대에서 두 번째로 목숨을 구해주었을 때였다. 가면에 걸린 마법 탓에 저를 잊었어야 할 여자는 어여쁘게 눈꼬리를 휘며 반가워해 주었다. 에르도안은 크게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자, 인연이 이어졌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대화를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떠돌이라 이름이 없다 하자 애쉴은 그의 눈동자와 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 보석, 에메랄드의 앞뒤 글자를 따 ‘에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공녀라는 딱딱한 호칭 대신 편하게 ‘애쉴’이라 불러 달라 하기까지 했다.
돌아올 리 없는 애정을 갈구하던 사막에 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맛본 행복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사고로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허겁지겁 단테를 찾아갔다.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살릴 수 있는 법?”
단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수상태에 빠졌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뭐하러 그러느냐는 눈빛이었다. 회귀를 멈추기 위해서는 애쉴이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 번도 생사를 넘나드는 여자를 초조하게 보지 않았다. 이번이 안 되면 다음번에 하면 되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무심함은, 그의 기원이 무생물이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르도안이 사납게 중얼거렸다.
“이번은 좀 다르단 말입니다.”
에르도안은 이제까지의 회차와는 달리 애쉴이 제게 관심을 보였다며 토로했다. 그제야 단테는 아, 하며 애쉴이 왜 바뀌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신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신녀의 혈육도 조금씩 바뀔 때가 있나 보군.”
“바뀐다고 하심은?”
“평범한 이들처럼 매번 틀에 박힌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다.”
평범한 이들은 무조건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나.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녀들은 반복되는 미래 혹은 과거를 보고 제 행동을 바꿀 가능성이 있었다. 애쉴은 신녀가 아니긴 하지만 신녀의 핏줄인 만큼 과거의 반향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주 가끔 있는 일일 거라고 하자 에르도안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럼 반드시 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애석하게도 단테는 에르도안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애초에 에르도안이 왜 정체를 숨기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상대가 저를 무서워하든 말든 목숨만 구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왜 힘에 먹힐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그의 힘이 깃든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인지.
그에게 있어 이번 회차의 애쉴은 다음 회차의 애쉴과 같은 존재였다. 어차피 같은 존재인데 누구를 살리든 조금 빠르고 늦는 것 외에는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에르도안이 크게 화를 내자 한숨을 쉬며 순순히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꿈에 들어가 기운을 약간 넘겨주면 된다.”
“감사합니다.”
“단, 그 행동으로 네 기억이 어느 정도 공유되는 건 감수해야 할 거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에르도안의 발목을 버석한 목소리가 잡았다. 에르도안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단테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심드렁히 말했다.
“네 기운이 넘어가는데 기억도 당연히 넘어가겠지.”
“……그럼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지워진 미래를 함부로 알려주었다간 그때처럼 죽으려 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로 묻자 단테가 부정했다.
“전부는 아니고 파편만 넘어갈 테지. 네가 말하지 않는 한 그 파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 쉽지 않을 거다. 혹여 눈치챈다 한들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니 미래가 개입하지도 못할 거고. 그렇다고 남용하지는 마라.”
페널티 없이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에 에르도안이 들뜬 표정을 짓자 단테가 급히 덧붙였다.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사경을 넘나들 때만 쓸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한 회차에 세 번까지, 그 이상은 효과가 없다.”
“……알겠습니다.”
살짝 실망한 에르도안은 밤을 틈타 애쉴에게 찾아갔다. 그러고는 키스하며 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음 날 애쉴은 기운을 회복했고, 며칠 후 그를 만나 오래간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쏴아아-
사정없이 비가 오던 어느 늦가을. 애쉴은 세상을 떠났다. 저택 안에서, 사고로.
저택 안에서의 일은 제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르도안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얽매였다. 먼발치서 그녀의 장례식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안타깝게도 애쉴은 그 후로 ‘애쉴’이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에르도안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다 그녀가 죽으면 비로소 그 감정을 잠시나마 겉으로 드러내며 하늘에 빌었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의 곁에 항상 있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리할 것이라고. 그러니 단 한 번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 * *
“레이디의 호위, 제가 맡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처음이었다. 팔라디움을 떠나려 하는 그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완벽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르도안은 팔라디움 공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소드마스터라는 것 외에는 왜 기사단을 그만두었는지, 정체를 숨겨가며 그녀의 호위를 자처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연하게도 공작이 제 청을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알겠네.”
그랬기에 한참의 공백 끝에 찾아온 대답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
“소드마스터 정도면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해야겠지.”
공작은 제 딸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가볍게 묵례했다. 기겁한 에르도안이 머리를 조아렸다.
“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애쉴을 잘 부탁하네.”
공작은 저를 향한 보라색 눈동자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었다. 팔라디움을 떠나고 싶다 청하던 딸의 눈에서도 같은 것을 보았기에 같은 눈빛을 한 그를 믿기로 했다.
그렇게 에르도안은 애쉴의 곁에 항상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간신히 손에 넣은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절대로 정체가 발각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바로 지금, 그 오랜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