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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짓의 장막이 걷힐 때 (1) (13/22)
  • 12. 거짓의 장막이 걷힐 때 (1)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달칵. 잠에서 깨어난 여자가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덮고 있던 이불로 몸을 둘둘 감은 채,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마찬가지로 귓불을 붉힌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살며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혹시나 파자마 차림인 그녀가 보이기라도 할까 싶어서.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꽉 닫힌 고동색의 문뿐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이 아쉬움인지 안도인지는 그만이 알 터다.

    “별걸 다 부끄러워하는군.”

    식탁 위에서 그들을 흘깃거리던 고양이가 중얼거렸다. 이놈만 없으면 딱 좋을 텐데. 에드는 그를 째려보았다.

    그날 이후 애쉴과 에드는 프리하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달루아가 찾아와 목숨을 위협하진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 에드가 제안한 것이었다.

    애쉴은 적잖이 당황했으나 어머니의 집에 머물겠다고 한 이상 제안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때의 분위기로 보아 혼자서 마주쳤다간 질문을 받아주긴커녕 죽이려 달려들 것 같기도 했고.

    수도에서 출발한 이후로 그와는 쭉 같이 다녔으니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방이 없어 2인실에 묵어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적어도 같이 살기 시작하기 전엔 그러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주무신다고요?’

    그가 가리킨 곳을 보며 애쉴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네, 뭐.’

    에드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리킨 곳은 요 한 장 깔려 있지 않은 바닥이었으므로. 침대, 책상, 식탁, 의자, 옷장. 한 사람이 살기엔 부족함이 없는 가구들이었으나 그 이상은 곤란했다. 3일 만에 집 단장을 끝낸 부작용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뒷말이 입속으로 사그라들었다. 바닥에서 자지 않는다면 남는 곳은 침대뿐이니까.

    ‘괜찮습니다. 정 불편하다 싶으면 내일 어디서 소파 같은 거라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 날, 에드는 정말 불편했는지 소파를 하나 가져왔다. 누가 쓰다 버린 걸 들고 온 건지 양 손잡이는 나뭇결들이 일어나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쿠션은 푹 꺼져 있었지만 어쨌든 소파의 형상을 하고 있긴 했다.

    여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보지 마세요.’

    애쉴은 본인의 파자마 차림을 유난히도 부끄러워했다. 여행을 다닐 때에는 여행복 차림으로 잠이 들었고, 여관에서는 다른 방을 쓰거나 에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옷을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면 되었던지라 괜찮았는데.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다 보니 이러는 것이 여의치가 않았다.

    매일 밤, 애쉴은 집 안의 유일한 방에서 파자마로 갈아입은 후 보지 마시라 신신당부하며 침대 속으로 후다닥 기어들어 가 버렸다. 아침엔 기를 쓰며 에드보다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의 기상 시간은 날이 갈수록 늦어져 갔다. 본래 새벽부터 눈을 뜨곤 했으나, 애쉴이 자신을 신경 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조금이라도 더 늦게 일어날 수 있도록 자는 척을 한 탓이다.

    그리고 오늘은 애쉴이 늦잠을 잔 날이었다. 오늘만큼은 빠르게 나갔어야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보다 못한 남자가 그녀를 깨웠다. 애쉴은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방으로 달아나버렸다.

    에드의 날 선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며 단테가 다시 한번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벗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안 갈 겁니까?”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내뱉는 대신 에드는 한 손으로 고양이를 제 얼굴 위치까지 들어 올리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단테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뭣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귀엽다며 몸부림을 칠 그런 몸짓이었다.

    “어딜?”

    “어디든. 볼일이 다 끝났으면 여기서 나가시란 말입니다.”

    방에 있는 애쉴이 듣기라도 할세라 그들은 최대한으로 작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는 것으로 보아 단테도 자신의 정체가 애쉴에게 알려지는 것은 곤란한 모양이었다.

    “나를 내보내고 둘이서 뭘 하려고?”

    “아니, 뭘 하려고 나가라는 게 아니라. 어차피 옆에 있어도 구경만 하실 것 아닙니까? 구경을 하든 말든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만,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러고 계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애쉴의 옆에서.”

    고양이의 눈이 가로로 쭉 찢어졌다. 매우 탐탁지 않다는 듯.

    “너 때문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나?”

    “그게 무슨.”

    “네 행동을 보고 있으면, 떠나는 것보다 먹히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말이다.”

    ‘먹힌다.’라는 말에 심장이 옥죄었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에드의 얼굴이 스산하게 얼어붙었다. 단테는 그를 쏘아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약속을 지켜라. 겨울이 되기 전에 무조건 이곳을 떠나. 그렇지 않으면 이번 회차는 내 손으로 끝내겠다.”

    “뭐라고요?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난 늘 제정신이다. 그리고 허튼 말을 한 적도 없지. 그건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에드는 무의식적으로 고양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반적인 동물이라면 아파서 울부짖기라도 하겠건만, 단테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흡사 불꽃이 튀는 듯 두 쌍의 녹안이 치열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준비 다 끝났…….”

    가을이란 계절에 맞지 않게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가 멈칫했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양이를 봐 버린 탓이다.

    상대방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심상찮은 기운에 에드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이 굳어 버린 틈을 타 단테는 에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애쉴에게 후다닥 달려들었다.

    “냐아앙.”

    “아, 야옹아. 많이 아팠어?”

    “냐옹.”

    얼어 있던 여자는 발치에서 비비적거리는 고양이를 소중히 안아 들었다. 우악스럽게 잡혀 있던 등을 찬찬히 쓰다듬자 고양이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많이 아팠다는 듯 야옹거리며.

    저 가증스러운 자식을 어쩌면 좋을까.

    고양이를 노려보는 눈빛에 짜증 비슷한 것이 어렸다. 그러나 그 감정은 애쉴의 축 처진 시선을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칼로 베인 듯 마음이 따끔거렸다. 에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착잡한 눈으로 에드와 고양이를 번갈아 보던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나 봐요.”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그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양이를 볼 때마다 표정이 딱딱해졌으니까. 그래도 계속 같이 있으면 변하지 않을까 싶어 그냥 두었는데, 괴롭히기까지 하다니.

    “그게, 그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에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고 있거늘. 이 상황을 만든 범인은 낙천적이게도 갸릉거리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졌으나 티도 내지 못한 채 에드는 쓰게 웃었다. 애쉴에게 있어 단테는 위협이 되는 인물도 아니거니와, 정을 붙인 고양이를 내보내라 할 수는 없으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데이지가 고양이를 참 좋아하던데, 여관에 맡기는 게.”

    “동물을 처음 키워 보는지라 영 어색해서. 이젠 괜찮습니다.”

    아, 제길.

    애쉴과 동시에 입을 연 에드는 웃는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 박자만 늦게 대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미 말은 나왔고, 바닥에 흘린 물처럼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땅을 치고 싶은 남자의 심정을 모르는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저도 고양이 좋아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 않다 하고 싶었다. 한번 뱉은 말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는 보았다. 괜찮다고 하는 순간, 붉은 눈동자에서 반짝, 작은 빛이 도는 것을.

    고양이를 그렇게도 좋아했었나.

    긴 세월을 봐놓고도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졌다. 그래서 차마 여관에 맡기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단테를 봐서라도 더욱 그랬다. 강제로 떼어놓으려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애쉴의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고마워요. 허락해 주셔서.”

    반달 같은 눈썹이 휘어지고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반쯤 가려지며 일자로 누워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위로 올라간다.

    아, 얼마 만에 보는 미소다운 미소인 건지.

    에드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표정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고양이를 키워야겠다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잠깐만 안고 계셔 보시겠어요?”

    잔잔하게 웃으며 고양이를 쓰다듬던 애쉴은 불현듯 무엇이 떠올랐는지 고양이를 에드에게 넘겼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아 들자 심기가 불편한지 품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드는 절로 찌푸려지는 이맛살을 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단테가 애쉴을 잘 따르는 게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는, 묘한 위화감이.

    “역시, 엄청 닮았어요, 둘이. 머리카락이나 눈 색 외에도 분위기 같은 게 비슷해서. 너무 닮으면 잘 싸운다던데, 그래서인 걸까요. 그래도 앞으로는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에드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단테의 모습을 본떠 만든 외형이니 닮다 못해 똑같이 생긴 것이 정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쉽사리 인지하지 못하도록 가면에 인식 장애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더군다나 지금 단테는 사람이 아닌 고양이였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들을 줄은.

    가면에 걸린 마법의 효력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그에게 먹히고 있는 것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위험한 일이었다.

    에드의 품속에 있던 단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눈가를 좁혔다.

    * * *

    애쉴은 심란해하는 에드와 집을 나섰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프레디아의 동쪽 끝에 있는 농경지였다.

    오웬의 주가 막 끝나고, 추수가 한창인 시기.

    아무리 기존 주민이 아니라지만, 할 일 없이 묘지와 마을을 전전하는 남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한창 바쁜 시기에 도와주기는커녕 빈둥대는 청춘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기실 애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팔라디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일에 줄 마음 따위 이미 닳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에드는 아니었다.

    ‘마을의 추수를 도와주려 합니다.’

    며칠 전, 밑도 끝도 없이 그가 꺼낸 말이었다. 호위만 하느라 심심한가 싶어 그러라고 했다. 계약을 맺은 사이도, 상하 관계도 아니니 행동을 제어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있다 한들 제어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런데, 그가 일하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을 보는 듯하던 차가운 눈동자에 아주 조금, 온기가 깃들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따스해졌다.

    일을 하는 에드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게까지 호의가 닿는 것에 애쉴은 의구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아가씨가 도와달라 졸랐다지?’

    ‘네? 그게 무슨.’

    ‘이미 다 들었으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원래 전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가씨가 설득한 거라면서?’

    지나가던 마을 사람은 에드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퍼부었다. 더불어 애쉴에게는 그를 설득시켜 줘서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그날 오후, 애쉴은 에드가 돌아오자마자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냐고 물었다. 마중 나온 듯한 여자를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부끄러웠는지 귓불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당신이 마을 사람들과 좀 더 친해졌으면 해서.’

    그제야 애쉴은 깨달았다. 마을의 추수를 도와주겠다 한 이유가 자신의 평판을 높여주기 위함이었음을. 생각지도 못한 마음 씀씀이에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당황한 걸 숨기기 위해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다 입을 열었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였다면 전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굳이 황태자에게 끌려가지 않아도 6개월 후의 자신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터였다. 대가 없이 호위를 맡게 한 것도 미안한데 더 이상 부담이 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아차 하는 마음에 얼굴을 굳혔다. 어딜 가시는 거냐며 물어보기라도 하면 뭐라 해야 할까.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였다. 그녀보다 더 얼굴을 굳힌 남자는 어쩐지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오래 있지 않으면 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네?’

    ‘저는, 당신이 조금 더…… 아닙니다.’

    속이 꽉 막힌 표정으로 무언가를 내뱉으려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문 후 우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조금 있든 오래 있든 남에게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야 그렇긴 하지만.’

    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평판을 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그녀의 말을 따르던 남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쉴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그럼 저도 일할게요.’

    ‘예?’

    ‘간단한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내일부터 같이 가요.’

    몸도 아픈 사람이 뭘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드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했다. 데려가 주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당한 탓이다. 그는 마지못해 승낙했고, 그다음 날 그녀와 함께 집을 나서야 했다.

    * * *

    농경지에 도착하자마자 애쉴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쁘다.”

    아름다운 밀밭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저 멀리서부터 황금빛의 파도가 아스라이 물결쳤다. 황홀하고, 찬란했다. 남녀 구분 없이 허리를 굽히고 추수에 여념하고 있는 것조차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조화로워 보였다.

    아, 나도 이 장면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쉴은 바람에 흐트러진 은발을 귀 뒤로 정리하며 잠시나마 부질없는 희망을 꿈꿨다. 몸이 약해 보이니 여기 대신 과수원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 낫겠다며 밀밭의 총 책임자가 그녀를 거부한 탓이다.

    ‘진짜 잘하네.’

    과수원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애쉴은 일을 하는 에드를 멍하니 구경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움직이는 속도가 몇 배는 더 빠른 것이, 일을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잘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그는 허리를 펴고 애쉴을 보았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무언가를 애쉴은 똑똑히 느꼈다. 가슴을 간질이는 생소한 감각에 눈을 확 내리깔았다. 그러다 진정이 되면, 다시 시선을 들어 에드를 보았다.

    ‘내가 왜 이러지?’

    어쩐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바늘에 찔린 듯 심장이 따끔거렸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누군가를 보며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에르도안 외에는.

    그래, 애쉴은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호위로 시작되어 좋은 친구가 된 사람일 뿐. 에르도안과 많이 닮기는 했지만 그것뿐. 그게 전부일 뿐.

    그녀에게 있어 에드는 이성이 아니었고, 아니어야 했다. 하여 애쉴은 선을 긋고 그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는?

    불길함을 감지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애쉴은 직감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며, 그는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으니 여기서 더 가까워질 일은 없을 거라며 외면했다.

    ‘……어째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간 그가 저를 이성으로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떠나라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없으면 벨키에로트에게 끌려갈 수도 있다는 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벨키에로트에게 끌려가는 게 그녀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남자를 곁에 두는 것보다 나았다. 자신은 얼마 살지도 못하고, 마음을 받아줄 수도 없으니, 떠나보내야 했다. 괜히 에르도안처럼 엮였다가 벨키에로트에게 죽임당할까 무섭기도 했고.

    ‘그런데 왜 나는…….’

    “……!”

    또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애쉴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언가가 떠오르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때마침 과수원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애쉴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꼭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흘깃거리던 고양이가 뒤를 따랐다.

    * * *

    애쉴이 안내받은 곳은 사과 농장이었다. 사과 농장에는 애쉴을 잘 아는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데이지와 소녀의 엄마이자 여관 주인 부부 중 아내인 헬라였다.

    “어머,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애쉴을 알아본 헬라가 반색했다. 그녀에게 애쉴은 환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정신을 잃은 상태였던 탓이다. 애쉴이 도우러 왔다고 하자 헬라는 환자가 일하러 왔다는 것에 당황스러워했다.

    “일은 무슨 일이야. 거기 앉아서 말동무나 해 줘요.”

    “하지만.”

    “됐어요. 멀쩡한 사람도 골병들게 생겼는데 아픈 사람이 무슨. 보나 마나 촌장 그 양반이 시킨 거겠지. 하여간,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어정쩡하게 가위를 들어 올리자 헬라가 빼앗아갔다. 상대방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라 짐작한 애쉴은 잠자코 말을 따랐다.

    근처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힐끗거릴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깐깐하기로는 둘째가라 할 정도의 헬라가 저리 나오고 있으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많이 괜찮아졌다고는 들었는데. 그럴 때일수록 잘 먹고 푹 쉬어야 해요.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악화시키지 말고.”

    따각, 따각. 대화 삼매경에 빠졌으면서도 헬라의 가위질 속도는 일정했다. 매년 해왔던 일이라 익숙했던 탓이다. 데이지는 그 옆에서 그녀가 건넨 사과를 상자에 넣고 있었다.

    여관을 나온 후 며칠 만에 보는 것인지라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인사말들이 오갔다. 그 후에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요즘은 뭘 하고 지내느냐, 주인아저씨는 잘 계시느냐, 같이 다니던 청년이랑은 어떻게 잘 지내고 있냐 등등.

    그러던 중 헬라가 아, 하며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참, 그 청년한테 고마웠다고 좀 전해 줘요.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이야기도 못 했지 뭐야.”

    “그날이요?”

    “오웬의 주 때 말이에요.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데이지 이 녀석이 몰래 창문으로 빠져나갔지 뭐예요?”

    집을 빠져나간 소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는 애쉴이 얼굴을 굳혔다. 헬라는 쯧쯧 혀를 찼다.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여서 큰일 났다 싶었는데, 아가씨와 같이 다니던 청년이 데리고 왔어요. 숲속에서 쓰러져 있던 걸 찾았다면서. 그때 발견 못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참.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니까요.”

    “나 그날 숲에 안 갔다니까요!”

    “안 가긴 뭘 안 가? 숲에서 뒹굴었는지 아주 그냥 온몸이 풀투성이더만. 일주일간 쫄딱 굶기려다 말았어!”

    굶기려 했단 말에 데이지가 뿌우, 볼을 부풀렸다. 하늘에 맹세코 간 적이 없다고 징징대면서.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제풀에 지친 데이지는-

    “힝, 엄마 미워!”

    라는 말을 남긴 채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복잡한 얼굴로 아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애쉴이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집으로 돌아온 후 평소와 다른 점은 없던가요? 가령 이상한 말을 했다든지.”

    “이상한 말? 흐음. 울었는지 얼굴이 번들거리긴 했지만. 딱히 이상한 건 없었어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아니요. 괜히 미신이 생각나서. 큰일이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요. 한번 시간 되는대로 청년이랑 같이 놀러 와요. 크게 대접할 테니.”

    알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가벼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을 깬 건, 말없이 가위질하던 여자의 뜬금없는 질의였다.

    “참,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 청년이랑은 대체 무슨 사이예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애쉴이 얼어붙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상대방의 반응을 보지 못한 헬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남매는 아닌 것 같은데. 사귀는 거냐 물어보면 또 아니라 하고.”

    “…….”

    “궁금해서 그래요. 곤란하면 답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왜, 아가씨도 알잖아요. 우리 마을에 젊은이들이 몇 명 없다는 거.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걸 봐서 그런지 다들 관심이 많아요. 안 친하니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데이트, 요?”

    굳어 있던 여자가 더듬거렸다.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남녀가 종일 붙어 다니는데 그게 데이트지 뭐야. 보아하니 그 청년은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가씨도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서 말한 건데, 혹시 주책이었으면…… 어머, 얼굴 좀 봐!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깜짝 놀란 헬라가 가위를 팽개치고 달려왔다. 그러나 애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 같다는 문장이 천둥처럼 귓가에 내리쳤다. 아. 다른 이의 눈에 그렇게 보일 정도면, 그는 정말…… 자신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옷을 따뜻하게 껴입었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핏기없는 입술에서 가파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쉴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헬라의 부축을 밀어내며 괜찮다고, 괜찮다고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어디 갈 곳이 있어 먼저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에도 단테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 * *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에드가 더듬거렸다.

    새하얗게 질린 채 바삐 달려오길래 습격이라도 받은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보아 허투루 넘길 만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단테에게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단테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끼고 싶지 않다는 모양새였다.

    “저를…….”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라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한 여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목구멍을 꽉 막아놓은 것 같았다. 애쉴은 소리 없이 벙긋거리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심란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번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때는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좋아…….”

    하지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이들이 그렇게 볼 리가……. 그런 느낌이 들 리가…….

    “하…… 세…….”

    목소리가 죽었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을 꽉 쥐고, 전신을 잘게 떨었다. 말을 하기도 전 지레 겁먹은 것 같은 모습에 다독여 주려던 에드는, 그러나 들어 올린 손을 거뒀다. 상대방이 흠칫하며 손을 피한 탓이다. 명백한 거부반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건지. 평소와 다른 태도에 에드 또한 두려워졌다. 하지만 먼저 물어볼 만한 분위기가 아닌지라 묵묵히 기다렸다.

    애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토해냈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한 채였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이 있다 하셨죠.”

    “네? ……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예?”

    “따로 연락은 안 하시나요? 만난 지 오래되셨을 텐데, 슬슬 보러 가셔야죠. 언제쯤 가실 건가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람에게 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무례한 언사였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의 입에서 애인과 관련된 무언가가 나오기를 고대하며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었다.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그렇죠?”

    “…….”

    “보고 싶다 하셨잖아요. 그렇잖아요.”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근본 없는 거짓말이 불러온 참사에 에드는 할 말을 잃었다. 질문을 받기 전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무슨 말이라도 꾸며냈을 터인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애쉴은 고개를 확 쳐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죄지은 표정을 보자마자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레 더듬거렸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왜……?”

    그는 입을 여는 대신 눈을 돌렸다.

    대답과도 같은 몸짓에 다리가 풀렸다. 애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를 비춘 붉은 동공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거짓말…… 이었던 거예요……?”

    에드는 말이 없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하…….”

    더 이상 그의 표정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애쉴은 자조 섞인 숨소리를 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막연하게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닥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빙빙 도는 시야를 본래대로 돌리고자 피가 비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손톱 깊숙한 곳에 흙이 파고 들어갈 정도로 잔디를 꽉 쥐었다.

    이게 이유였던 거다. 그가 그런 소원을 말한 건. 그런 호의를 보여왔던 건.

    애쉴은 아찔해져 오는 정신을 다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여기까지만 해요.”

    “……네?”

    비로소 에드가 잔뜩 잠긴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독을 토해내듯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던 말을 힘겹게 토했다.

    “소원 들어주기로 했던 거, 없었던 일로 해요.”

    “잠깐만-”

    “그리고.”

    말허리를 자른 여자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추가로 말씀드릴게요. 절 떠나주세요.”

    “……!”

    “호위고 뭐고, 전부 다 괜찮으니까.”

    어차피 정해진 날짜에 떠나야 하건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에드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졸라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미안하다며 애원했다. 그러나 애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쳐냈다. 그녀의 눈빛에 온기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부탁드리는 게 아니에요. 팔라디움의 공녀로서 명령하는 거예요.”

    가문을 박차고 나왔다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걸 모를 터이니 명령이라 칭했다.

    애쉴은 차고 있던 마정석 팔찌를 풀어 얼어붙은 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의지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드는 절망 어린 눈으로 올려다볼 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무정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려던 여자가 멈칫했다.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벙긋거리다 간신히 한 문장을 내뱉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 * *

    애쉴이 떠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넋이 나간 얼굴로 못 박힌 듯 꿇어앉아 있던 에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이 다 끝나지도 않았건만 그는 농경지가 아닌 프리하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느리기만 하던 걸음걸이가 집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지더니, 이내 달음박질로 변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벽을 타고 올라간 진동이 천장에 고여 있던 먼지들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크게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가 불 꺼진 집 안을 샅샅이 훑었다. 벽을 이루는 통나무들의 문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그가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쉴이 집에 오지 않았다는 건 단테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에드는 집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녀를 보고 싶은 건지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찾아온 어지러움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너져 내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단테가 옳았다. 그의 말대로 프레디아에 도착하자마자 애쉴과 헤어졌어야 했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그녀의 온기가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조용히 숨어 살아야 했다. 필요할 때만 도와주되 앞에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과정은 틀어졌으나 결과는 같게 되었다. 애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 하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레디아에 도착하는 대로 헤어졌더라면. 소원 운운하지 않고 그녀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멀어졌더라면. 조금 전과 같은 차디찬 시선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잠시나마 찾아온 온기의 빈자리에 허덕대지 않아도, 다시 찾아올 리 없는 온기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애쉴이 ‘애쉴’이라는 호칭을 허락한 이후로, 그는 겨울이 오기 전은커녕 봄이 끝난다 하더라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테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약속을 어기는 대가로 이번 회차를 끝낼 거라는 무시무시한 엄포를 듣긴 했지만. 그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카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뒷일이 기다리고 있긴 하나 그녀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떠나주세요. 호위고 뭐고, 전부 다 괜찮으니까.’

    그러나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발밑의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온종일 굶었는데도 욕지기가 치솟았다. 속에 들은 게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게워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을 꽉 깨물며 억지로 토기를 삼켜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잘 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서 끝내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의 미련이 대체 뭔지.

    정해져 있는 끝이라면 최소한 마지막에는 따뜻한 눈길을 받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싸늘하게,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구차하다며 비웃음당할지언정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온기에 손을 뻗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메스꺼움을 가라앉히고자 마른세수를 했다. 등으로 벽을 쓸다시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애쉴을 만나기 위해.

    * * *

    에드가 아직 집에 도착하기 전.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농장을 빠져나온 애쉴은 여관으로 향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지금.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다. 에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를 좋아하는 게 맞았구나.’

    가게를 지키느라 추수에 참여하지 않은 주인아저씨를 제외하면 여관 1층은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자리에 앉은 애쉴은 차게 식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이제까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고양이는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올라와 그녀를 응시했다.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은 눈빛이었으나 애쉴은 알지 못했다.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물밀듯 두통이 밀려들었다. 간간이 직감이 경고했음에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고 애써 무시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마사지하듯 원을 그리며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애쉴은, 결국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왜, 나 같은걸.’

    눈을 감자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에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르도안에게 ‘이제 당신이 싫어졌어요.’라는 말을 한다면 딱 그런 얼굴이지 않을까. 그간 그가 얼마나 자신을 좋아했는지가 피부로 와닿았다. 지독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에드의 마음을 알고도 호위를 위해 모르는 척 곁에 둘 수는 없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양방향이다. 그가 계속해서 살갑게 군다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에드에게 못 할 짓이다. 희망 고문과 다를 바가 없다.

    ‘안 돼, 그건.’

    더는 누군가를 마음에 둘 여유가 없었다. 에르도안 하나를 지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마저도 다 지워내지를 못해서 그를 외면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고 있지 않은가. 바보처럼.

    “하…….”

    에르도안을 생각하자 속이 답답해졌다. 욱신거리던 심장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지나 싶더니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애실은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때였다. 딸랑, 하며 여관의 출입구에 달려 있던 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낸 건.

    “아이고, 시골구석이라 그런지 확실히 사람이…… 이게 누구야. 애쉴 아니야?”

    이제 막 여관으로 들어온 남자가 반색했다. 귀에 익은, 그러나 반갑지는 않은 목소리에 헉헉거리던 여자가 얼굴을 들었다.

    그는 금을 녹인 듯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음유시인이었다. 장난기 어린 얼굴과 가벼운 옷차림, 등 뒤에 빼꼼 튀어나와 있는 만돌린까지. 야시장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음유시인이 천연덕스레 말을 붙였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래, 오랜만이네.”

    마지막이 좋지 않았던지라 대답하는 애쉴의 목소리는 매우 쌀쌀맞았다. 그가 반대쪽에 앉자 애쉴은 이를 악문 채 제 허벅지를 톡톡 치며 고양이를 불러들였다. 자리를 뜰 생각에서였다. 몸도 마음도 좋지 않은데 누군가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하물며 인상이 좋지 않은 자는 더더욱.

    음유시인의 금색 눈동자가 사뿐사뿐, 테이블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안아 든 여자가 일어나던 찰나, 돌연 그가 말을 걸었다.

    “웬 고양이야? 그땐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키우게 됐어. 그럼 난 이만. 볼일이 있어서.”

    고통을 짓누르며 애쉴이 힘겹게 말했다. 음유시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아하게 물었다.

    “그때 같이 다니던 남자는 어디로 갔어? 계약이 끝나기라도 했나 봐? 오늘은 안 보이네.”

    그렇지 않아도 그 남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거늘.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 같은 말들이 이상하게 심기를 긁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몸과 마음이 상한 애쉴은 답지 않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 끝났어.”

    “그렇구나.”

    순간, 불길하기 그지없는 무언가가 금안에서 번뜩였다.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애쉴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려던 와중. 옷자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디에 걸리기라도 했나 싶어 몸을 돌리자 악마 같은 미소를 띤 채 옷자락을 잡은 남자가 보였다.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

    “오고 싶으니까 왔겠지.”

    “음, 아닌데. 잠깐만 기다려 봐. 보여 줄 게 있거든.”

    음유시인은 옷깃을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만 놔 달라며 잡힌 옷자락을 당기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상대방의 행동에 기분 나빠진 여자가 한소리 하려던 그때였다.

    딸랑.

    바깥과 연결된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문가를 바라보았다. 방해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음유시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가, 눈 깜짝할 새 장난기 가득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절반쯤 꺼내 들었던 물건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온 참인데. 애쉴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에트나의 음유시인을 마주하자 눈 녹듯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에드는 그들이 있는 곳까지 뛰다시피 하며 걸어왔다.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든 손을 노려보며 사납게 읊조렸다.

    “당장 놓지 않으면.”

    “놓았어요, 놓았어. 무서워서 이거 원, 말 한마디 할 수가 있나.”

    싱긋 웃어 보인 남자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활짝 펼치면서.

    그러나 자유를 찾은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가 길목을 막아 버린 탓이다. 비켜 달라 하면 될 텐데도 그녀는 마룻바닥만을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 손으로는 찌릿한 통증의 가슴을 움켜잡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에드 또한 그녀의 앞에 다다르자마자 속이 꽉 막힌 표정으로 입술만 잘근거렸다. 길을 비켜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들을 번갈아 보던 음유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남녀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찮음을 느낀 탓이다.

    결국, 불편함을 이기지 못한 애쉴이 말문을 열었다. 시선은 음유시인 쪽의 바닥에 둔 채였다.

    “그래서, 보여 주려 했던 게 뭔데.”

    애쉴이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에 음유시인은 순간적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 버리고 웃음이란 가면을 쓰며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를 품속에서 꺼냈다.

    “이거야.”

    아까 꺼내려던 것과는 모양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잘못 보았나 하며 그가 건넨 양피지를 펼쳐 들자 웬 오선지와 음표들이 나타났다.

    “악보?”

    “맞아. 이번에 내가 새로 써 본 곡이야.”

    도서관에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기에 애쉴은 별다른 위화감 없이 악보를 훑었다. 제목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에는 ‘클라우드’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음유시인의 이름인 듯했다.

    ‘클라우드, 클라우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어디서였지?’

    회귀 도중 들은 것 같긴 한데, 언제였는지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악보를 보던 여자가 별안간 미간을 찡그렸다. 악보의 곡이 황태자를 찬양하는 내용이었던 탓이다.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지금 시점에 쓰인 것이니 찬양의 대상자는 벨키에로트가 맞을 터다. 악보가 아니라 벌레를 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잘 봤어.”

    일그러졌던 표정은 어느새 무심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느끼는 대로 이야기했다간 황실 모독죄로 끌려갈 수도 있었으므로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클라우드는 혀를 쯧 찼다.

    “쓴 지는 꽤 됐는데 아직 불러 본 적은 없어. 아, 이 마을도 수확제 같은 걸 하겠지?”

    “하지 않을까.”

    “딱이네. 그럼 그때 연주하면 되겠다. 여기 이렇게, 같이할 사람도 있으니까.”

    “같이하다니? 뭐를?”

    “응? 너 춤추려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

    또다, 이 어처구니없는 화법은. 상대방의 의사 따윈 무시한 채 제멋대로 주제를 끌고 나가려 한다.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 애쉴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에드가 길을 비켜 준 것이다.

    “아니야. 네 계획에서 나는 제발 빼 줘.”

    “그래? 아쉽게 됐네.”

    말만 그럴 뿐, 그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애쉴은 쌩하니 그를 스쳐 지나갔다.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에드는 클라우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후 뒤를 따랐다. 보통 이상의 무력을 지닌 자가 내뿜는 살기이니 겁먹을 만도 하건만. 클라우드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별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 * *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애쉴은 뒤편의 남자가 신경 쓰이는지 걷는 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드는 그늘진 표정으로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쉴의 품에서 빠져나온 고양이는 구석의 창틀 위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이 불편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떠나 달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촛대에 불을 밝히고, 겉옷을 벗어 옷장 안에 넣으며 애쉴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 주제에 관한 더 이상의 대화는 사절한다는 뜻이었다. 시선은 정면이었으나 의식은 뒤쪽의 남자에게 가 있었다.

    평탄하니 고저 없는 말이 가시 달린 사슬이 되어 심장을 옥죄었다.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던 남자는 쿵, 옷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상처가 가득 밴 음성이었으나 순순히 승복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까지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곁에 있게 해 달라 하면 어찌해야 하나 싶었는데.

    애쉴은 에드가 있는 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지나가려 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숨소리만으로도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아서.

    눈에 들어올 리는 없으나 오랜만에 책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이 손목에 감겨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하는 자신을 볼 때와 같은 표정이었으나 느껴지는 감정은 달랐다. 마음이 쓰라렸다. 피가 흐르는 상처를 칼로 헤집는 것처럼.

    ‘안 되는데.’

    모질게 대해야 하는데.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야 하는데.

    “제발…….”

    그의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그래요.”

    승낙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애쉴은 그의 손에 이끌려 소파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에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애쉴이 당황해하며 일어나려 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앉아 있으라는 몸짓을 했다.

    “죄송합니다.”

    주춤주춤 가시방석에 앉자 앞뒤 없는 사과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무엇이 죄송하단 건지 몰라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감히 연모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고향에 계신 애인분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연모하는 사람은 아가씨 한 분뿐입니다.”

    “…….”

    “고향에 두고 온 애인 같은 거 없습니다. 아가씨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봤던 그 순간’이 언제인지가 중요했으나 그는 거기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고.

    처음이라는 단어에 애쉴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제가 다른 분과 교제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제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애쉴은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기만 할 뿐 책잡지 않았다. 고백하며 받아 달라 우기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결론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제 마음을 숨기려 했었다.

    “그래요. 이제라도 사실대로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화가 나진 않았다. 불쾌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행동 쪽을 믿었어야 했는데. 의심했으면서도 눈을 감고 모른 체한 자신을 탓했다. 모든 건 본인의 잘못이었다.

    “곁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울고 싶은 것을 참는 듯 떨리는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항상 위에 있던 녹색 눈동자가 이번에는 아래에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투명한 물방울을 가득 담고서는.

    “마음을 받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몰차게 대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곁에만 있게 해 주신다면.”

    “에드 님.”

    묵직하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에드가 몸을 굳혔다. 애쉴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그녀는 에드를 곁에 둘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나 더 있었다.

    첫 번째는 남은 수명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떠나는 사람도 고통스럽지만 남겨지는 사람은 그보다 더 고통스럽다. 수십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결말 때문이었다. 에르도안은 연인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라인하르트와 팔라디움 공작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더 이상 가까운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1년도 살지 못할 저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편안히 살겠다고 그런 선택을 할 바에야 차라리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좋으니 벨키에로트에게 끌려가는 게 나았다.

    그러니 독하게 끊어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안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를 힐난하는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해서 그런가 싶어 시선을 틀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혀끝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단 한 문장만을 토해냈다.

    “안 돼요.”

    에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애쉴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소파 아래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하도 뜯어 짧게 변한 손톱이 소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아이를 부드럽게 어르는 듯한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제가 싫으십니까?”

    그새 울었는지 남자의 눈가는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물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그 속에 든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정말 싫어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싫어한다고 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야지만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다고, 그녀를 떠날 수 있다고 침묵으로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웠는지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애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를 싫어하냐고?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답이 나왔다.

    흑심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위급할 때마다 몸을 던져 가며 도와줬는데. 그래놓고도 공치사 한번 하지 않았는데.

    “대답해 주세요. 제가 싫으십니까?”

    어떻게, 그런 남자를 싫어할 수 있을까.

    애쉴이 입술만 씹어 대자 에드는 그녀의 턱을 살짝 눌러 이 사이에서 입술을 빼냈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애쉴은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울지 마시고요.”

    그제야 애쉴은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손바닥과 소매로 얼굴을 정신없이 문질렀다. 그러면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한마디 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다못해 고개만 끄덕여도 되었을 텐데.

    평소 같으면 몸을 일으켜 끌어안고 달래 주었을 남자는,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울고 있는 그녀를 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접촉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자격 따윈 없다는 것을 인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보이는 그 모습에, 이상하게도 더 서러움이 밀려왔다.

    애쉴은 손바닥에 힘을 주어 두 눈을 내리눌렀다. 눈물을 꾹꾹 짜내면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불현듯 제 마음을 깨달았다. 아쉬움. 그래, 아쉬움이었다. 자신은 에드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를 꽉 악물고 눈물을 대강 닦아냈다. 싫어한다, 그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바로 했다.

    “아…….”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 떨며 바보 같은 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야에 물기가 남아 있어서였는지, 순간적으로 그의 모습이…….

    ……아니, 정말 잘못 본 것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느낌이었다. 멍한 눈으로 에드를 바라보던 애쉴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정확히는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드가 쓰고 있는 콧잔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가면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은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도 잊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심히 거슬렸다. 치울 수 있다면 치우고 싶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가면을 어루만지다가, 매듭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때까지 에드는 애쉴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이제 힘을 주기만 하면 가면이 벗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짜악!

    그는, 그녀의 손을 다급히 쳐냈다.

    맞은 손바닥이 얼얼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붉게 변해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쉴은 그 고통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픔을 느낀 순간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은 탓이다.

    그녀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고, 너무 놀라서 그랬다고, 많이 아프시냐고 더듬거리는 남자의 음성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실수였어요.”

    애쉴은 새빨개진 손으로 다른 손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면에 또 손을 뻗을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든 그의 본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떠나주세요. 호위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저는 괜찮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싫어한다는 말은 끝끝내 입에 담지 못하고.

    에드는 뭐라 더 하지 못했다. 상처에 짙게 물든 눈동자로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알겠다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무릎을 꿇은 채 앞을 지키고 있다가, 간절한 염원을 담아 최후의 한마디를 뱉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움찔한 여자가 시선을 주자 에드가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예상치 못한 말에 애쉴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못 들어줄 건 아니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부탁이었다.

    “……그래요.”

    그러나 거절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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