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 마을이 낙원이라 불리는 이유
쾅, 쾅, 쾅. 위쪽에서 망치로 나무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붕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게 천장을 힐끗 올려다본 애쉴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여관에서 빌려온 걸레로 집 안 곳곳을 깨끗하게 닦는 일 말이다.
지붕을 수리하고 있던 남자는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당장에라도 뛰어 내려와 걸레를 빼앗고 여관으로 돌려보냈을 터다. 다 정리되면 부를 테니 그때까지 쉬고 있으라면서.
그들은 지금 프리하,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애쉴이 어머니와 살던 집을 단장하고 있었다.
* * *
3일 전, 어머니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아침. 간만의 외출에 극심한 피로감에 몸부림치던 그때.
“어제 얼마 못 놀았으니까 오늘 많이 놀아요!”
평소처럼 데이지가 쳐들어왔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에드까지 놀라 뛰쳐 들어올 정도로 문을 세게 열어젖히면서.
같은 성별이라 편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오빠가 그곳에 자주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데이지는 항상 애쉴의 방에 쳐들어오곤 했다.
“오늘도 갈 곳이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데이지. 나중에 놀아 줄게요.”
해맑게 웃는 아이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피곤함에 젖은 채 뭉그적거리며 일어나고 있으려니 에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동의를 구하듯 침대 위의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차림새에 귓불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막 일어나서 그런지 부스스한 게 심히 무방비해 보인 탓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가…… 애쉴.”
어젯밤에도 부른 이름이었는데. 생전 처음 부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얼굴에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쿵쿵거리면서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던 그는 아쉬워하는 데이지를 데리고 황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달아오르는 얼굴과 몸을 진정시키고자 애쉴이 나올 때까지 머리에 찬물을 부어댔다. 그는 어제 만났던 여인에 관해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굳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 혼자 안 되겠다 싶으면 여관에 계속 묵으면 되니까.”
에드는 부지런히 고개를 저었다. 여관에 계속 묵는다니. 그럼 매일 데이지가 찾아올 텐데.
오붓하게 둘만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집이 많이 낡았으면 새로 지어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프리하의 집은 수년간 쓰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찾아와 신경 쓰기라도 한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당장 들어가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벌어진 통나무의 틈을 채우고, 빗물이 새는 지붕을 수리하고, 쓸 만한 가구들을 골라 먼지만 닦아 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에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여관에 머물러야겠네요.”
그러나 애쉴의 생각은 달랐다. 혼자 하기엔 적은 양도 아닐뿐더러 고작 몇 개월 살겠다고 그 정도의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돈이야 충분하고, 데이지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싫은 것은 아니니까.
그러자 에드가 답지 않게 정색했다.
“안됩니다. 불편하시지 않습니까.”
“아뇨, 별로 불편하지는.”
“제가 불편합니다.”
“예?”
“……호위하기에 불편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기실 누가 있건 없건 그녀를 호위하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애쉴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아, 그렇군요.”
“며칠이면 다 수리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그 말마따나, 정확히 3일 후 에드는 낡아빠진 집을 단장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밤낮없이 진행한 결과물이었다.
그동안 여관과 묘지를 오가던 애쉴은 ‘오늘이면 전부 다 끝날 것 같다.’라는 말에 정말인가 싶어 몰래 와 본 참이었다. 머리로는 호위와 관련된 것이니 부담감을 느낄 필요 없다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내내 불편했다.
‘세상에.’
정말로, 3일 만에 다 해낼 줄은.
통나무로 된 오두막집에 들어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것을 본 여자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볼품없이 망가졌던 가구들은 깨끗이 수리되어 있었고, 통나무가 수축하면서 만들어진 벽의 구멍들은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쾅쾅거리는 소리에 위를 보니 빛이 새어 들어오던 천장이 잘 고쳐져 있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먼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으로 봐서 아직 수리 중인 것 같긴 했지만.
그나마 집 안에 먼지와 거미줄이 남아 있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는 혹시나 싶어 빌려왔던 청소도구를 챙겨 들었다. 이따금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드가 내려오기 전에 끝내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까지 남에게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침대 머리맡 위의 벽을 닦아 내던 와중이었다.
‘이게 뭐지?’
벽 쪽에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새긴 듯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삭아 버린 침대 헤드를 제거하면서 드러난 것이다.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게 딱 봐도 아이가 휘갈긴 낙서 같았다. 눈높이보다 약간 낮은 곳에 있어 애쉴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프리하는 달루아를 좋아해.」
그 밑에는 조금 다른 글씨체로 다른 문장이 쓰여 있었는데, 취소 선이 쭉쭉 그어져 있어 알아볼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달루아는…… 프리하…… 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어머니의 이름에 무표정하던 여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애쉴은 그리움이 담긴 손길로 ‘프리하’라는 단어를 어루만졌다.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듣긴 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셨을 것 같아 별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남긴 흔적과 마주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머니도 어릴 때가 있으셨구나.’
언제부터인가 위쪽에서 나던 소음이 멎었다. 그러나 향수에 젖어 있던 애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헛숨을 들이키는 것도, 다급히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에드는 애쉴이 들고 있던 걸레를 빼앗았다.
“헉.”
혹여 놀라기라도 할까 싶어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왔거늘. 깜짝 놀란 애쉴이 휙 뒤로 돌았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채 두 걸음도 가지 못하고 등이 벽에 닿았다.
잔뜩 경계하던 그녀는 땀에 젖어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몸에 붙은 셔츠를 보자마자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게 귀를 붉히면서.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오셨으면 말씀이라도 하시지, 왜 청소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지금 제 꼴이 어떤지 생각하지 못한 남자가 황망히 뇌까렸다. 애쉴은 더러워진 그의 신발 끝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음에도 쿵쿵거리는 가슴은 진정 되지 않았다.
“너무 열중하고 계신 것 같아, 떨어지기라도 하실까 봐.”
“그런 거로 떨어지지 않으니 언제든지 불러주셔도 됩니다.”
땀에 젖어 그런지 평소보다 체취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은은한 열기도 함께였다. 이 느낌이, 분위기가 낯이 익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훈련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신 겁니까?’
오랜 시간 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그림자처럼 덮쳐들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쿵.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항시 있었던 미미한 고통이 곱절로 증가했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움츠리며 입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찢어질 듯 아팠다. 심장이.
“괜찮아요. 아니에요.”
그녀는 부축하려 다가오는 손 대신 그가 들고 있던 걸레를 잡았다. 가슴을 움켜쥐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심장의 통증과 청소의 피로감에 팔이 달달 떨렸다. 빼앗으려는 듯 제 쪽으로 힘을 주어 당겼으나 걸레는 상대방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애쉴은 숨도 쉬지 않고 뇌까렸다.
“이리 주세요. 거의 다 했으니까 마무리만 좀 하면.”
“제발, 애쉴.”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말을 뚝 끊었다. 눈을 들자 처참하게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쉬세요. 제발.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머리 아픈 건 신경 쓰지 말고, 당신만을 생각하면서. 제발 그렇게만 살아요. 바보같이 굴지 말고.”
“…….”
“행복하게만 살아도 모자를 시간에……. 주제넘게 굴어 죄송합니다.”
거침없이 내뱉어지던 말이 기어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뚝 멈췄다.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올려다보는 여자를 보자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탓이다. 그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 음.”
가벼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여자가 흘린 침음성이었다.
일순간 그녀는 두 가지 착각을 했다. 첫 번째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였고, 두 번째는 ‘꼭 에르도안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였다.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바람에 날린 민들레 홀씨가 들판에 퍼져 나가는 것처럼 의심이란 이름을 가진 씨앗들이 텅 빈 마음에 퍼져 나갔다.
“저, 에드. 저는.”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가슴을 꾹 내리누르며,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예쁘고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건 하고 있어요. 이게 지금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 주시면 안 될까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묵직한 압박감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것들을 모른 체하며 다시 한번 힘을 주자 걸레가 그의 손에서 쑥 빠져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애쉴은 옆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생하셨어요. 쉬고 계세요.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애쉴.”
굳어 있던 남자가 도망치듯 빠르게 나풀거리는 옷깃을 잡아챘다. 그녀는 금지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움찔하며 멈춰 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부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에드가 걸레를 낚아채 갔다.
들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데도 애쉴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텅 빈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다, 에드가 있는 곳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관에서 하나 더 빌려오겠다며 더듬거린 후 종종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쿵.
나무로 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따라가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에드는 꽉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품은 채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는 여자를 실제로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 * *
애쉴이 떠나고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는데, 노크 하나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예상보다 일찍 왔다 싶어 긴장하며 뒤로 돌았으나 보이는 것이라곤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 휑한 풍경뿐이었다. 밑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집에 들어온 것은 애쉴이 아닌 데이지였다. 늘 반짝이던 소녀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빛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싱글벙글하던 표정도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나 역광이라 잘 보이지 않았던 데다가 애쉴 때문에 반쯤 넋을 놓고 있던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 데이지. 어떻게 알고 왔나요?”
여관을 나가 다른 곳에 머물 예정이라 하긴 했지만 어디서 머물 건지 알려 준 적은 없었는데. 애쉴의 뒤라도 밟은 것일까? 하지만, 여관까진 꽤 거리가 있는 편인데. 근처의 집들과 비슷하게 생겨 찾기도 쉽지 않은 편이고.
에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소녀를 반겨 주었다. 위험인물도 아니고, 애쉴이 좋아하는 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폴짝거리며 달려들어야 할 아이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데이지?”
비로소 데이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안색을 굳혔다.
“애쉴이…….”
데이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워할 겨를도 없었다. 툭.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표정해서 더더욱 슬퍼 보이는 눈물이었다.
“애쉴이?”
평범한 아이가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에드는 저도 모르는 새 소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불길함을 감지한 것이다.
“위험해…… 호수…… 도와줘, 내 딸…….”
젠장.
이 근처에 호수라면 단 한 곳뿐이었다. 요정들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숲속의 호수.
그는 데이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숲을 향해 달려갔다. 어찌나 급했는지 검 한 자루 챙기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데이지는 ‘애쉴, 내 딸…….’만을 반복하며 표정 없이 울뿐 움직이지 않았다.
* * *
에드와 막 헤어진 시점이었다. 애쉴은 정신없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목덜미와 등도 마찬가지였다.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녀는 달리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으윽.”
눈앞이 핑핑 돌았다. 초라하게 무너진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코끝에 흙내음과 풀냄새가 맴돌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닥에 깔린 풀들을 쥐어뜯다시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근처에 누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애쉴은 두서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
고개를 왼쪽으로 비튼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당연하게 있어야 할 집들과 길은 어디로 가고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과 드넓은 호수가 보였던 탓이다. 바람에 부딪히는 잎사귀들의 소리를 제외한다면 새소리, 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두 갈래로 나뉜 길 중 다른 쪽으로 향했어야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여관이 아닌 마을 밖으로 빠져나와 버렸다. 정확히는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반영되어 숲으로 온 것이었지만.
“하아.”
자조 섞인 숨을 토해내며 풀과 흙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정반대로 올 수가 있나. 숲에 혼자 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부끄럽게도 애쉴은 데이지도 혼자 돌아다니는 숲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예전에 봤었던 늑대들 때문에.
에드와 데이지, 여관 주인 부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모아 숲에 사는 짐승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보았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에르도안으로 변장했던 황태자의 수하가 부린 농간이라도 된단 말인가?
답답했으나 물어볼 이가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음을 에드가 알았더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게끔 설명해 줬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애쉴은 그가 늑대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 이후 그날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괜찮겠지.’
아무도 위해를 가할 수 없도록 마을과 숲에 전반적으로 조치를 취해 놨다고 하니까.
애쉴은 근처에 있는 나무둥치까지 엉금엉금 기어가 등을 기댔다. 걷기도 힘들어 숲을 빠져나갈 기력이 없었다.
이럴 때 마정석에 마법이라도 담겨 있으면 든든하겠건만. 가짜 에르도안과의 조우에서 쓴 후로 정신이 없어 에드에게 미처 부탁하지 못한 탓에, 마정석에는 아무 마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머리 아픈 건 신경 쓰지 말고, 당신만을 생각하면서. 제발 그렇게만 살아요. 바보같이 굴지 말고.’
땀이 식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조금 전 들었던 말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꼭 에르도안과 대화하고 온 것 같지 않은가.
그 느낌을 지우고자 먼발치에 닿아 있던 눈길을 들었다. 정오의 햇살을 받아 잔잔하게 빛나고 있는 호수가 보였다. 문득, 호수 앞에서 들었던 말이 꿈결처럼 귓가에 밀려들었다.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요정들의 춤을 보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있었다. 에드가 에르도안과 닮다 못해 같은 말을 한 적이. 심지어 과거의 에르도안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과거의 그녀가 한 거짓말이었다.
사실, 호수 위를 떠돌아다니는 빛의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을에서 평생을 산 노인들조차도.
낭만적인 이들은 요정이라 했고, 현실적 혹은 비관적인 이들은 프레디아에 억울하게 묻힌 시체들의 원혼이라 했다. ‘프레디아’의 유래를 떠올려 보면 후자가 맞아 보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누구라도 한번 보면 잊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광경에는 틀림이 없었기에 그와 꼭 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들의 춤이라고.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에.
‘대체,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애쉴은 무릎을 감싸 안고 있던 양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감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추측들이 나왔으나 그중 인상적인 건 두 가지뿐이었다.
‘에르도안과 닮은 남자에게 누군가가 과거의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거짓말을 했다.’라는 합리적이고도 이상적인 추측과, ‘에드와 에르도안은 동일인물이다.’라는 황당하고도 비이상적인 추측이 그것이었다.
‘말도 안 돼.’
소설도 이처럼 황당하지는 않으리라.
애쉴은 쓰게 웃으며 비이상적인 추측을 지워 버리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지워버리는 노력을 해야 할 만큼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는 뜻이다.
‘그냥, 많이 닮은 사람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마침내 결론을 내린 애쉴이 몸을 일으켰다.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난 터라 마을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며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호수 위쪽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게 요정들의 춤이 시작된 것이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겠지.’
기실 요정들의 춤이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이긴 했지만. 평소처럼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에르도안이 자꾸 떠오를 것 같았다.
애쉴은 마을이 아닌 호수 쪽으로 발을 옮겼다.
* * *
눈은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는 빛덩어리들을 향해 있는데.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신비롭다는 감정 따윈 전혀 없었다. 반짝거리는 빛을 담고 있음에도 낮게 가라앉은 적안은 어둡고 공허하기만 했다.
‘아직…… 살아 있겠지?’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다 문득 뭘 하나 싶었다. 애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힘겹게 묻어놓은 추억들인데. 에드와 에르도안이 동일인물이라는 걸 부정하고자 꺼내 본 순간 무너진 둑처럼 하염없이 터져 나왔다. 두 번 다시 그와 엮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떠올리는 자신이 싫어졌다.
평생 지녀온 마음이, 인생을 바꾼 감정이. 고작 몇 개월 만에 사라질 리 없거늘.
‘보고 싶어…… 아냐, 안 돼.’
뜨거운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빈손을 들어 쓰다듬자 투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잔잔하던 마음에 거센 풍랑이 들이닥쳤다. 한때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자마자 텅 비어 버린 마음이 요동쳤다. 마치, 빈자리를 메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삶의 목표를 되찾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가자. 가서 뭐라도 하자.’
에드를 보고 싶지 않아, 에르도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마을로 돌아가지 않은 것인데.
혼자 있어서 그런지 자꾸 생각이 났다. 이래서는 여기 있는 의미가 없었다. 그와의 추억 따위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움직여야 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눈가가 발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쓰라릴 때까지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아 옷소매로 눈을 가려 버렸다.
팔에 힘을 주어 꾹꾹 누르고 있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뒤쪽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을 타고 풀들이 부딪히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무언가의 발소리였다.
‘늑대는 아니겠지.’
풀어졌던 마음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에 큰 미련이 없다고는 하나 짐승에 뜯어 먹혀 죽고 싶진 않았다.
애쉴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숨을 죽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들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들어 뒤로 돌았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역시, 너로구나.”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듣고 있으면서도 거짓말 같았다. 애쉴은 제 눈을, 제 귀를 의심했다.
혹여 너무 울어서 보이는 환상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도 눈앞의 인영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네 충성스러운 개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보지? 함부로 숲에 오지 말라고.”
시리도록 푸른 벽안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 적안을 비웃었다.
충성스러운 개?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시는 거냐 물어보지는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쪽에선 그냥 내버려 두라 했지만. 너무 거슬려서 말이야.”
사박, 사박.
연약한 것이 짓밟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애쉴은 여인의 발밑에 있는 것이 풀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다.
상대방이 앞에 오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애쉴에게는 영원의 순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오도 가도 못 하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가을 하늘처럼 맑은 하늘색 머리칼에 차가운 벽안을 가진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거슬려. 네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게. 누구는 널 살리려고 죽었는데. 그 목숨으로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애쉴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 누구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직접 들은 적은 없었으나 어머니가 공작가를 떠난 건, 편한 자리를 포기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된 건 자신 때문일 것이 뻔했다. 아기를 낳자마자 몸조리도 하지 않은 채 사라졌다 했으니까.
“죄, 죄송해요.”
힘겹게 토해낸 말에 물기가 섞여들었다.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붉은 눈동자가 푸른 눈에 담긴 증오와 마주한 순간. 그녀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흠칫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간신히 말랐나 싶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
“어머니?”
여인이 키득거렸다. 참으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내가, 네 어머니라고?”
절망적이었다. 얼마나 싫길래 저런 말까지 하시는 걸까. 단 세 마디의 짧은 문장이 독을 바른 비수가 되어 마음을 찢었다. 서러움과 참담함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 잘못했어요.”
충격으로 마비된 머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이 오웬의 주인지라 ‘어머니도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라고 은연중에 자신을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테니까. 말씀하신 것 모두 잘 들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정말, 다 들을 자신이 있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쥔 채 경련하고 있는데, 천국과도 같은 말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애쉴은 물기 어린 눈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없던 말로 하자 하시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네. 절대로 어기지 않을게요.”
“그럼, 저기 뛰어들어 봐.”
애쉴은 여인이 턱짓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왜. 못하겠어?”
그럼 그렇지.
비웃음을 걸친 여인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애쉴이 더듬거렸다.
“호수…… 에, 뛰어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
“싫으면 됐고.”
여인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거짓으로 점철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몸짓이었으나 애쉴은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버림받을세라 허겁지겁 옷깃을 붙들고 울먹였다.
“하, 할게요. 할 테니까, 제발 가지 마세요.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럼 빨리해.”
인상을 찌푸린 여인이 제 등 뒤를 힐끔거렸다. 먼 곳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곧 도착할 것 같았다. 방해꾼이.
천천히 몸을 돌린 애쉴이 호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고개를 숙이자 잔잔한 수면 위에 눈물로 처참해진 얼굴을 한 여자가 보였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파문을 만들어내는 통에 금방 일그러지긴 했지만.
몸을 던지기 위해 한 발을 떼었으나 차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다 뒤를 보자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 노려보고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주먹을 꼭 쥐고 심호흡을 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부지런히 다잡았다.
‘차라리, 잘된 거야.’
어차피 삶에 미련도 없었잖아. 어머니가 직접 데리러 오셨으니까 이번 죽음은 외롭지 않을 거야. 쓸쓸하지도 않을 거야. 잠깐 괴로운 것만 참으면 어머니랑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어머니도 나를 용서해 주실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애쉴, 안 돼!”
별안간 뒤쪽에서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몸이 확 기울었다.
“정말, 답답해서 원.”
경악으로 물든 적안이 화가 난 듯한 여인을 훑었다.
“이번에도 살아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게끔 만들어 줄게. 그러니 제발 죽어 버려.”
저런 말을 하는 여자가…… 정말 어머니라고?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애쉴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물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빨랐다.
풍덩.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크헉, 어흑!”
괴로운 신음이 메아리쳤다. 첨벙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허우적대는 애쉴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표정으로 유유히 발을 옮겼다.
“가, 가지, 커흑…….”
가지 말라 하고 싶은데.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왜 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데.
입을 열 때마다 차가운 물이 밀려들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수면 위로 나오려 노력했다. 손을 뻗어 어떻게든 호수 가장자리의 풀들을 잡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멀어지기만 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달려들었다. 그는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여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까득 이를 갈면서도. 가라앉고 있는 애쉴을 구해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풍덩.
두 번째 파문이 일었다. 그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여자를 향해 순식간에 헤엄쳐갔다. 애쉴은 물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연신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아무렇게나 휘저어지던 손에 무언가가 닿은 순간, 애쉴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있는 힘껏 당겼다. 에드가 입고 있던 셔츠였다.
‘잠깐, 윽, 잠깐만 좀.’
그는 목이 조여 컥컥거리면서도 그녀가 이끄는 대로 다가갔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얼굴을 툭툭 쳤다. 그러나 애쉴은 힘만 더 줄 뿐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셔츠를 잡은 손을 떼어내려 제 양손에 힘을 주었다. 가만두었다간 사이좋게 빠져 죽기 십상일 터다.
‘……미치겠군.’
다 죽어가는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겨우 떼어내자 의지할 것을 잃은 손이 크게 휘둘려졌다. 그러고는 나뭇잎이나 작은 부유물들을 닿는 족족 밑으로 끌어당겼다.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무의식적 행동인 것 같았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이래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옷깃을 당기는 손아귀를 떼어내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
어떻게 말릴 틈도 없었다. 힘없이 허우적대던 손이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을 움켜잡더니 단번에 뜯어 버렸다. 놀란 남자는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법이 풀리면서 작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에 반사적으로 애쉴이 눈을 떴다. 그리고 에드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소란스럽던 팔과 다리의 움직임까지 멎어버린 채.
“에…… 에르…….”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열려 있는 입으로 쉴 새 없이 물이 밀려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면서 숨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작은 불꽃들이 팡팡 터졌다. 눈앞이 뿌예지는가 싶더니 심이 얼마 남지 않은 초처럼 의식이 꺼져 들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일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거짓이라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일 터다.
충격으로 얼룩져 있던 붉은 눈동자에서 빛이 잦아들었다.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풀어진다 싶더니 부릅떠져 있던 두 눈이 스르르 감겨들기 시작했다.
애쉴은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 *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바다. 깎아질 듯 가파른 절벽에 부딪힌 파도가 만들어내는 새하얀 물보라. 그리고, 그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애쉴 자신과 한 남자.
그동안의 꿈들과는 달리 이번 건 불분명하고 흐릿했다. 꼭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애쉴은 꿈속의 자신에게 갇힌 채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하릴없이 관망했다.
탁.
별안간, 무슨 말을 했는지 상대방이 다급히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나 꿈속의 애쉴은 쌀쌀맞은 태도로 쳐내 버렸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절벽 끝에 우뚝 섰다. 기겁한 남자가 꼭 껴안는 것이 느껴졌으나, 가볍게 밀어내며 입술을 달싹이자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는 것인지 자신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꿈이 끝나가고 있는지 부자연스럽게 빠르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종장에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게 제 소원이에요.”
“기다릴게요.”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는 피가 끓는 듯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현실의 애쉴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꿈속의 애쉴은 살며시 미소 짓는 걸 제외하곤 미동조차 없었다. 뒤 한번 쳐다보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 * *
“허억.”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프리하의 집이었다. 기억의 미로에서 빠져나온 여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한 듯이. 두꺼운 이불에 둘둘 쌓인 전신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든 상태였다.
꿈이 남긴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양손으로 시트를 꽉 붙잡고 덜덜 떨고 있던 그때. 기묘하게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꿈의 내용이 어느 순간 싹 사라져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하얀 잉크를 부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뛰어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묘한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뭐라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슬픔이, 죄책감이, 애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아프고 싫으면서도 고맙고 좋았다. 한편으로는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꿈속에서 무엇을 했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궁금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타닥.
애쉴의 움직임을 감지한 무언가가 창틀에서 침대 위로 우아하게 뛰어내렸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침대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것’은 그녀가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귀엽게 울었다.
“야옹.”
“……고양이?”
“야옹.”
질문에 긍정하듯 한 번 더 운 고양이는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애쉴의 얼굴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에메랄드를 닮은 녹색 눈동자에 윤기 나는 검푸른 털을 지닌 작은 아기고양이였다.
분명 처음 보는 생물인데,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숙한 느낌까지 들었다. 애쉴은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었다.
고양이는 손이 있는 위치에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시늉을 하며 갸르릉거렸다. 쓰다듬어 달라는 것인가 싶어 이불 밖으로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제 머리를 비볐다. 기분이 좋은지 골골거리면서.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최고급 비로드와도 맞먹을 만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지더니 규칙적인 발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당신 말대로 도구들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뚝, 멎었다. 시선을 돌리자 검푸른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를 닮은 녹안, 콧잔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눈을 뜬 애쉴을 본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애쉴……!”
길게 뽑혀 나오던 감격 어린 음성이 혀끝에서 목구멍으로 사그라들었다. 금방이라도 침대 쪽으로 달려갈 것 같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뒤늦게 호수에서 가면이 벗겨진 것을 떠올린 탓이다.
창백하게 질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차마 그녀의 반응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그가 나타난 직후부터였다.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듯 어린 짐승이 야옹거렸으나, 그녀의 시선은 에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으면서도 의기양양해하긴커녕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왜 그러고 계세요?”
왜 그러고 있느냐니.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설마?
에드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방의 표정을, 몸짓을, 분위기를 슬슬 살폈다. 평소 자신을 대하던 것과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거짓말이로구나.’
그는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사경을 헤매던 그녀가 며칠 만에 깨어난 것을 떠올리며 환히 미소 지었다. 늦었지만 침대까지 뛸 듯 걸어갔다. 그리고 이불 밖에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있는 힘껏 마주 잡았다. 종일 집 안에만 있었으면서도 숲속을 헤매고 다닌 자신의 것 못지않게 차가워서 마음이 아팠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지럽거나, 춥거나, 구토감이 있거나 하지는 않으신가요?”
“네, 저-”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얼른 요깃거리 할 만한 걸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렇게-”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상대방의 말을 뚝뚝 끊어먹은 남자가 주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자 최대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던 그때.
“에르도안.”
고저 없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에드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분은, 갑자기 왜?”
한참이 지나고 난 뒤. 얼어붙어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애쉴조차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애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와 관련해서 제게 뭐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하실 말씀이라 하심은?”
“……아닙니다.”
대화가 뚝, 끊겼다. 에드는 황망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가 주방에 들어간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긴커녕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애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아기고양이가 주방으로 뛰어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동요하고 있었어.’
뒤로 돌아 있어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에르도안’이라는 이름에 그는 분명 반응했다.
‘환상이 아니었나?’
물속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그녀는 에드의 옷을 입은 에르도안을 보았다. 꿈이나 환상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했다. 그러나 현실이라 여기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그가, 에드의 옷을 입고 여기에 있단 말인가.
물을 많이 먹어 헛것을 보았나 했다. 어머니인 줄 알았던 여자에게서 받은 충격 탓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죄를 지은 듯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남자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왜 저러지?’
그동안 겪어왔던 에드는, 쓰러졌다 일어날 때마다 부리나케 달려와 자신을 껴안던 남자였다. 혹은 일어날 때까지 시종일관 붙어 있다가 괜찮으시냐며 껴안는다든지.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둔 채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애쉴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질문했다. 왜 그러고 계시느냐고. 불안이란 안개가 올라오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랬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그러지 말라 할 때도 꼬박꼬박 껴안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듯 손을 한번 꼭 잡을 뿐 그 이상의 접촉은 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을 꼬박꼬박 끊어먹는 것도 거슬렸다. 괜찮으니 가서 할 일 하시라 할 땐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곁에서 떠나지를 않더니, 오늘은 말까지 끊어가며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에 대한 것마저 묻거나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에 올렸다. 환상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이름을. 그리고 보았다. 동요하는 모습을.
‘설마……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애쉴은 양 손바닥으로 눈을 모두 가려 버렸다. 이를 앙다물며 욕지기를 억지로 삼켰다.
‘그가 여기 왜 있겠어.’
에르도안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기사단의 부름을 받아 서부 지역으로 파견 가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죽는 것.
그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했으니 회귀를 시작하기 전과 똑같이 흘러갈 것이다. 비록 벨키에로트나 라인하르트의 행동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에르도안이 이곳에 있을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때 보았던 건 현실일 리가 없다고, 애쉴은 수도 없이 되뇌었다.
뚜벅뚜벅. 낮고도 규칙적인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애쉴은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았다. 몸을 작게 움찔거리면서도,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었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더듬거렸다.
“주무십니까? 드실 만한 걸 조금 가져와 봤는데.”
“괜찮아요.”
“그럼 약이라도.”
“죄송해요.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잠시 머뭇거린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곁에 있던 남자가 저만치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아예 집 밖으로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그와 떨어져 있다가 죽을 뻔했으니 당분간 호위를 명목으로 꼭 붙어 있을 것이 눈에 보였다.
애쉴은 벽 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물에 빠진 것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정식으로 인사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그러지를 못했다.
에드가 정말 에르도안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머리가 아팠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자니 점점 나른해졌다.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은 물결처럼 밀려드는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씨근거리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 * *
발소리를 죽인 채 침대 가까이 다가와 애쉴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감이 오지 않았다. 혹여 자는 데 방해라도 될까 커튼을 치고,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채 식탁으로 와 의자에 앉았다. 어두운 곳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꼭 제 앞날을 보는 것 같아 암담했다.
기묘한 빛깔의 녹안으로 그가 하는 짓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고양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단숨에 식탁 위로 뛰어올라서는, 꼬리를 말고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잘하는 짓이군.”
“비꼬는 겁니까?”
“경고했을 텐데. 너무 오래 붙어 있지 말라고.”
“…….”
“별수 있나. 사실대로 말하고, 죽이고, 또 해야지.”
에드는 눈앞의 고양이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듯 노려보았다. 테이블을 꼬리로 무심하게 툭툭 치던 고양이 또한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마주 보았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은 빛깔을 띤 두 쌍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시라 했습니다. 있던 운도 다 사라지겠군요.”
“말만으로 바뀌는 게 있다면 진작 끝났겠지.”
“그래서, 계속하실 겁니까?”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꽤 긴 시간을 함께 있었거늘. 도통 익숙해질 수 없는 대화 패턴에 진절머리가 났다. 거친 숨을 토해낸 남자는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됐습니다.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하시죠. 당신 말대로 애쉴을 지키고 있는 마도구들에는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그녀를 물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겁니까?”
“흠.”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된 고양이가 꼬리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흡사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사람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답지 않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짐승이 입을 열었다.
“신녀겠지.”
길게 뜸을 들였던 것과는 반대로 대답은 간결했다. 에드는 인상을 확 구겼다.
“신녀? 그럴 리가. 미래를 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애쉴을 호수에 밀어 넣으며 제발 죽어버리라 악담을 퍼붓진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언제 죽는지, 그 시점을 봤을 테니까.”
“그 외에 다른 말을 들은 것은 없나?”
“제게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 건지’라 하더군요. 꼭 제 과거라도 본 사람처럼. 아, 그리고 찌꺼기를 달고 다닌다는 말도 했습니다.”
“신녀 맞군.”
고양이가 느른하게 웃었다.
“나를 찌꺼기라 부를 만한 자는 그 여자들밖에 없으니.”
“하지만, 미래를.”
“볼 수 있으면서도 못 본 척한 걸 수도 있지. 그녀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었나?”
“예. 머리카락 색이나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애쉴이라 착각할 수 있을 만큼. 어머니 쪽의 친척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대충 알겠군. 그 여자는 미래를 보지 못하…….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엇나가려는 주제를 환기하려는 듯 고양이가 꼬리로 테이블을 세게 쳤다. 그래 봤자 워낙 체구가 작아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신녀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상극이라서. 그리고 그건.”
고양이는 맞은편의 남성이 쓰고 있는 가면을 향해 턱짓했다.
“그걸 쓰고 있는 너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지. 벗으면 또 달라지겠지만.”
“그렇군요.”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남자는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였나. 무방비한 여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던 건. 그나마 세 치 혀를 놀리는 것 외에 무력 쪽으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무심하게 그를 보던 고양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으니 주제를 바꾸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지?”
찔린 얼굴이 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을 전에 떠나겠다 했던 것 같은데.”
“겨울이 오기 전엔 떠날 겁니다.”
“슬슬 한계다. 알고 있겠지. 내 힘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압니다. 그 정도는.”
“그렇군.”
드물게 뜸을 들이던 고양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에드가 쓰게 웃었다. 눈가를 좁히고 있는 저 얼굴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그는 ‘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자신이 그의 힘에 먹혀 버리면, 세상에서 지워져 버리면 오랫동안 잘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이번에는 꼭 끝낼 테니 신경 쓰지 마시죠.”
“그 말을 벌써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군.”
고양이의 모습을 한 남자, 단테는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눈가를 더욱 좁혔다.
* * *
애쉴이 물에 빠진 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야옹아, 이리 와.”
“냥.”
대답하듯 짧게 운 고양이가 애쉴의 품에 덥석 안겼다. 부드럽게 눈매를 접은 여자가 골골거리는 짐승의 등을 다독거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내려옵니까?’
애쉴이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던 터라, 에드의 입 모양을 볼 수 있는 건 그쪽으로 얼굴을 기울인 단테뿐이었다. 무감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으로 봐선 벙긋거리는 것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여자에게서 떨어지는 대신 눈을 감아 버렸다. 제 작은 머리통을 그녀의 목덜미에 비비적거리면서.
‘저 인간이 진짜.’
에드가 더욱 화난 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빨리 꺼져 달라는 마음을 담아 눈을 부라렸다. 애쉴과의 사이가 어색해진 상태라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경고하러 왔으면 경고만 하고 갈 것이지 왜 눌러살고 있단 말인가. 규칙이니 뭐니 하며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쩐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도 뭉그적거리며 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길 잃은 고양이인 척 불쌍하게 굴던 단테는 애쉴의 동정심을 사 함께 살게 되었다. 애쉴 말로는 주인이 찾으러 오면 돌려주겠다 하지만, 단테에게 주인이 있을 리 만무하니 결국 그녀가 계속 키우게 될 터다. 고양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에드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뜨겁게 쏟아지는 눈빛을 느낀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딱 봐도 불편해하는 것 같은 몸짓에 에드의 얼굴이 굳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남자가 조용조용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고양이를 다독이던 손이 멈췄다. 습관적으로 식사를 하시겠냐고 물어보려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그다음 행동을 알 수 있었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하겠지. 그다음엔 벽을 보고 이불을 뒤집어쓰겠지.
아니요, 괜찮아요, 죄송해요.
물에 빠진 애쉴을 구한 후 가장 많이 들은 세 가지 문장이었다. 왜 그러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입 한번 뻥긋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호수 속에서 있었던 일뿐 아니라 또 다른 신녀라는 달루아란 여자나 이상 행동을 하던 데이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잘못 말했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뭐라도 말을 꺼낼 때까지.
“괜찮으시다면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은 짧고도 긴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었다. 애쉴이 드디어 말을 건 것이다.
“예, 얼마든지요.”
에드가 대답하자 그녀는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놓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시선을 내리깐 채 그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향했다.
그는 애쉴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긴장으로 가득한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애쉴은 제 무릎 위의 양손을 꼭 말아 쥐었다.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에르도안을, 알고 계신다고 하셨죠.”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낼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 심장이 따끔거렸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이 혼합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쉴은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나 자동으로 거칠어지는 숨소리까지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이라는 단어에 몸을 흠칫 떤 남자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으나 이 정도면 자연스러우리라 생각했다. 어떤 질문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지금과 같은 상황을 족히 수십 번은 떠올려 본 보람이…….
“당신은…… 에르도안인가요?”
없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녹색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진실을 들켰을 때, 그녀의 결말이 어찌 되었더라?
목구멍 끝에 걸려 있던 목소리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에드는 파편처럼 남은 목소리들을 끌어모아 간신히 대답했다.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아닙니다.”
“아…….”
애쉴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에드는 보지 못했다. 찰나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무수한 감정들을.
애쉴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상한 질문을 해서 미안해요. 정신을 잃기 전에 봤어요. 당신의 옷을 입은 그 사람이 제 앞에 있는걸. 그래서 여쭤봤어요.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환상이었나 봐요.”
직감은 그때 보았던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에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애쉴은 그 말을 무시했다. 아니라 했으니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머리가 아팠다. 마음도 너무 아팠고.
“진작 물어볼 걸 그랬네요…….”
정말이지, 에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느샌가 애쉴의 음성이 물기에 젖어 있던 탓이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으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거짓말에 의지하는 여자를 보자 심장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한 자 한 자 씹어 먹듯 말을 뱉었다.
“그 외에,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고개를 끄덕거린 여자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주변 공기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에드는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분위기를 전환할 방법을 궁리했다. 자극적인, 그래서 그녀가 조금 전의 대화를 잊을 법한 주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간신히 찾아냈다. 슬픔으로 절절하게 끓어오르던 마음이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달루아’ 말입니다. 어떤 관계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시길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이제까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만.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이젠 알아야 할 듯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사이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애쉴이 물기 젖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입가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거짓말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에드가 당황했다.
“당신을 호수에 밀친 사람 말입니다.”
“그분 이름이 달루아인가요?”
비로소 자신이 말하는 ‘달루아’와 그녀가 말하는 ‘달루아’가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고 계시다던 달루아는 뭡니까?”
“꽃이요. 노란색에, 나팔처럼 꽃잎이 벌어진, 저희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이요.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기가 막혔다. 그녀가 몰랐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는 자조 섞인 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 것 같은 남자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은 별안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 그럼 혹시, 그게 꽃이 아니라.”
끼이익.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밀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애쉴이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에드도 그녀를 따라 침대로 향했다.
“예전에 청소할 때 발견했었던 건데. 그때는 어머니께서 꽃을 많이 좋아하셨구나, 하면서 그냥 넘어갔었거든요.”
애쉴은 침대 머리맡 위의 벽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낙서들을 가리켰다.
「프리하는 달루아를 좋아해.」
「달루아는…… 프리하…… 해.」
“꽃을 주어로 쓴 두 번째 문장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분 이름이 달루아가 맞다면, 이 문장들의 달루아는 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 그 여자를 지칭하는 것 같군요.”
낙서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받았다.
어머니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외모. 일반인은 볼 수 없는 모래시계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을 잘 아는 듯하던 행동.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에서 찾아낸 그들만의 낙서.
어두워진 얼굴로 낙서들을 살피던 애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쌍둥이 자매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달루아라는 분은.”
“그 정도로 어머님과 닮았습니까?”
“네. 부끄럽지만, 호수에 빠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신 줄 알았어요. 아…… 그렇다면 저택에서 보았던 것도 꿈이 아니었던 건가?”
“저택이라 하심은?”
“아, 수도를 떠나기 전 뵈었…… 아니에요, 아무것도.”
……설마. 저택에서 목에 붕대를 감고 있던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었나.
본인을 죽이려던 여자에게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위험인물을 고스란히 보내준 자신에게 분통이 터졌다. 입을 열면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 어금니를 꽉 물었다. 푸른 핏줄이 손등 위에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우울한 표정이 된 애쉴은 긴 손가락을 뻗어 벽에 새겨진 ‘프리하’라는 글자를 어루만졌다. 귀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섬세한 손길로.
“어머니께 자매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당신을 싫어하는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 아, 혹시. 저를 살리려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건 또 무슨.”
“미안해요. 그 얘기는 하기가 좀 어렵겠네요.”
세간에는 애쉴이 어릴 적 납치되었다가 20년 만에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 스스로 공작가를 나왔다는 것을 어찌 타인에게 말할 수가 있으랴. 이 사실은 팔라디움만의 비밀이었다. 에르도안에게도 말한 적 없는.
개인 사정이라는 말에 에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
“그래요. 화가 나실 수도 있겠네요. 어머니께서 주신 목숨을 소중히 여기진 못할망정 함부로 다루었으니. 어쩌면 어머니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저 같은 걸 살리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셨던 걸 후회하고 계실지도 모르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이었으나 애쉴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자신 없이 우물거렸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머니와 꼭 닮은 여자, 달루아의 살기 어린 눈을 본 다음부터는 자신이 없어졌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그런 눈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는. 스스로가 벌인 일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면서도 침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이 호수에 있는 줄 알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야…….”
반사적으로 입은 열었는데, 나오는 말은 없었다. 할 말이 없던 탓이다.
여관을 간다 하고 집을 나온 데다가 숲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얼마나 좋았던지. 거의 물에 빠지자마자 나타나지 않았던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여자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에드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진실이니 믿어 달라는 것처럼.
“어머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제, 어머니께서요?”
“예.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웬의 주에는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고. 아이나 노약자의 경우 그들에게 쉽게 홀릴 수 있으니,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고.”
“그건, 그저 미신일-”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점의 거짓도 숨기지 않은 녹안이 불신 어린 적안과 뒤얽혔다.
“데이지의 몸에 들어오셔서 말씀하시더군요. 호수에 당신이 있다고. 위험하니, 구해달라고.”
“말도 안 돼.”
“믿기 어려우시리라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제가 그 시간에 호수를 갈 수 있었을까요.”
“…….”
“만약 그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더라면. 제게 당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지 않으셨겠죠.”
할 말을 잃은 여자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던 눈가에 눈물이 들어찬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다, 입술을 꾹 깨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부들거리는 손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에드는 쐐기를 박았다.
“애쉴.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당신을 여전히.”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비명과도 같은 말을 토해냈다.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 가녀린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주먹을 꽉 쥐면서.
간절히 듣고 싶었던,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던 말이었다. 팔라디움에서 자신을 증오하는 어머니를 본 후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환상일 거라 여기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항상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짜로 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을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진실이라면 꿀보다 더 달콤하지만 거짓이라면 지독하게도 끔찍한 말이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애쉴은 울먹거리며 끊임없이 읊조렸다.
거짓인 게 뻔한 말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거짓이라는 게 판명 나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처참하게 부서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에 에드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잘못한 거라곤 진실을 말한 죄 밖에 없건만. 그는 애쉴의 의자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허벅지 위의 작은 손을 부여잡으며 고해성사를 하듯 고통스럽게 그녀를 달랬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 위로 따위 필요 없어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연이라 하기엔 제가 지나치게 딱 맞춰 도착했다는 것을.”
“제게 가짜 희망을 주지 마세요.”
“거짓말이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물었다.
애쉴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 그 어떤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다. 부정의 침묵이었다. 내심 말실수를 했나 싶어 걱정하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손을 들자 손등에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팔을 타고 소매 안쪽을 적셨다. 차가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살리고 싶어 하셨어요.”
“…….”
“그러니까 그런 나쁜 생각은 그만 하세요.”
대답도, 고갯짓도 하지 않았으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애쉴은 얌전히 에드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숲속의 깊은 샘이라도 된 것처럼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왔다.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새빨갛게 부을 거라 생각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긴밀한 접촉은 하지 않을 거라더니. 일주일도 가지 못해 다짐을 깬 그를 한심하게 보는 고양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애쉴만이 중요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얼마나 지났을까.
셔츠의 앞섶이 젖다 못해 축 늘어질 때가 되고 나서야 애쉴은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자신이 벌인 짓을 보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민망한 마음에 엉망이 된 부분을 그가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잡고 있는데, 에드가 은은하게 웃으며 붉어진 눈가를 어루만졌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네. 저, 옷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여자가 눈을 깜박거렸다. 에드는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계속 머무실 생각입니까? 달루아라는 여자가 정말 어머님의 자매라면,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을 텐데요. 익숙한 곳이니 한 번쯤 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애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분을 또 볼 수도 있다고? 다음에 볼 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게끔 만들어 주겠다 하지 않으셨나.
이성적으로 봤을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힘이 달리기도 한 데다 어머니와 같은 얼굴을 한 이에게 모질게 굴 수 없을 것이 자명했기에. 아무리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저는, 계속 머물고 싶어요.”
“진심이십니까?”
“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떠나겠다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말에 에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달루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단테의 힘을 버려야 했다. 어차피 무력과 관련된 힘이 아니니 버리든 말든 호위하는 데 지장은 없다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뵙고 싶어서요.”
“예?”
순간, 에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살기를 풀풀 날리다 못해 저를 죽이려 했던 여자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그의 반응이 워낙 당연하였던지라 애쉴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여쭤보고 싶어요.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시는지. 정말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런 건지. 그리고.”
‘어머니와 어떤 사이셨길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그분에 대해 언질 주지 않으신 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순순히 대답해 주진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달루아 외에는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질문들이니까.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고민하던 남자는, 그러나 애쉴의 의견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 사정 때문에 감히 안 된다 할 수 없던 탓이다.
그는 전에 들었던 달루아를 만나는 방법을 떠올렸다. 내키진 않았으나 애쉴에게 알려 주었다.
애쉴은 그 말을 들은 즉시 에드와 함께 숲에 가 달루아를 찾았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찾아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