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프레디아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소녀 데이지는 프레디아의 하나뿐인 여관 베르하의 주인 부부 딸이었다. 솜사탕처럼 몽실거리는 분홍색 머리칼에 옅은 회색빛의 눈을 지닌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일주일 전 프레디아에 온 손님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손님도 아니건만. 데이지는 그의 곁을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새끼 새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흔치 않은 손님이 반갑기도 하거니와 차림새나 행동이 워낙 특이했던 탓이다.
“미안하지만 데이지, 물 좀 바꿔와 주겠니?”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에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뛰다시피 걸어와 제 얼굴만 한 대야를 낑낑거리며 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수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 언니는 언제 일어나는 거예요?”
“이제 곧.”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희망 사항을 말했다.
‘며칠 전에도 곧 일어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며 눈을 굴리던 아이는, 검은 가면 위를 덮은 거짓된 미소를 보자마자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며 휑하니 나가 버렸다.
마침내, 단둘만 남았다.
“아가씨.”
미소를 지워 버린 에드는 애원하듯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끊어질 듯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숨소리만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그가 두려워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음을 방증했다.
금방이라도 울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드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정성스레 닦았다. 창백하게 질린 양 뺨과 목덜미도 꼼꼼히 닦았다. 그동안 애쉴은 미동조차 없었다. 꼭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 같았다.
“제발 일어나 줘요.”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열이 오른 애쉴의 손을 꽉 잡았다. 신의 앞에서 죄를 용서해 달라 비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빌었다.
비록 나를 향한 감정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가슴에 내리꽂히는 비수가 된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눈을 뜨고 나를 봐 달라고.
일주일 전.
함께 요정의 호수를 보고 있던 그때.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애쉴이 별안간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일반 사람보다 차갑기 그지없던 몸은 어느새 불덩어리가 되어 펄펄 끓고 있었다.
‘아, 아가씨!’
에드는 그대로 마을을 향해 달렸다. 울컥울컥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말도 짐도 놓고 와서, 그는 애쉴을 여관 침대에 눕혀 놓은 후 숲속으로 다시 달려가야 했다.
그 후로는 쭉 이 상태였다. 애쉴은 고열로 끙끙 앓았고, 꿈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헛소리를 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싫어…….”
굳게 닫힌 눈두덩이 아래 눈물이 들어차는가 싶더니 또르르 흘러 거미줄 같은 은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또 그 빌어먹을 악몽일까.
시큰해지는 눈시울을 참아내고자 입안의 여린 살을 굳게 깨물었다. 이미 너덜거리는 살덩어리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차게 식은 수건을 톡톡 두드리며 눈물을 닦아 내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리는 앞머리를,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를, 살짝 열린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결심하며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깊게 잠든 여자의 얼굴 위로 음영이 졌다. 점차 짙어지고, 좁아지는 음영이…….
쾅!
“물 떠왔어요!”
여린 음성이 가라앉은 공기를 찢었다.
뛰어갔다 왔는지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흠칫한 남자는 순식간에 몸을 바로 했다.
“고마워요. 무거웠을 텐데.”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거짓으로 웃었다.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속을 뒤로한 채.
* * *
그 무렵.
애쉴은 꿈을 꾸고 있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도 할 수 없는 꿈을.
당연하게도 꿈의 대다수는 에르도안이었다. 그와 관련된 과거의 추억이 나올 때도 있었고, 스스로가 만든 그의 환영이 나올 때도 있었다.
환영은 잔인한 말로 괴롭히기도, 달콤한 말로 달래 주기도 했다. 한번은 달래 주다가 예고 없이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는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무언가가 입에서 입으로 넘어왔다. 그것을 느낀 순간 시야가 빙글 돌며 여지없이 이상한 것이 보였다.
애쉴 자신의 죽음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에서 그녀는 복부에 칼을 맞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이번에도 타인의 시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애쉴은 꿈속의 자신을 보며 한없이 오열했다. 절규하고 절망했다. 얼마나 강한 감정이었던지 에르도안이 키스한 후로 납덩이처럼 무겁던 몸이 가벼워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꿈이 끝난 다음에도 애쉴은 깨어나지 못했다.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에르도안 외에도 라인하르트나 팔라디움 공작 등 그리운 사람들을 보았다. 현실에서는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울었다.
가끔은 반갑지 않은 자가 나올 때도 있었다. 벨키에로트였다.
꿈속에서조차 그녀는 황궁의 깊은 곳에 갇힌 채 벨키에로트에게 쫓겼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늘 헛걸음질만 할 뿐 제자리였다.
벨키에로트는 멀어지려는 그녀를 비웃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며 뱀처럼 속살거렸다. 그때마다 애쉴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가까워지는 그를 노려보았다. 두려웠으나 약한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되었다. 아무 효과 없을지언정 미약한 저항이라도 하고 싶었다.
뺨을 쓸어내리려 뻗어오는 손을 쳐내려던 그때.
“보지 마십시오.”
크고 굳센 손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훅 불어 들고, 다른 이에게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가 등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던 애쉴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 님?”
“네.”
그는 눈을 가리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를 꼭 껴안으며 답했다. 작은 머리가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애쉴이 더듬거렸다.
“여긴 어떻게?”
“지켜 드리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귓가에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와 상대방의 심장 박동 소리에 몸의 경련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진정된 애쉴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그는 그녀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고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까지나.”
“네? 뭘…….”
뭘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전. 시야가 빙글 뒤집혔다. 다른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애쉴은 때때로 벨키에로트와 관련된 꿈을 꾸었다. 도망치는 것에 실패하고 잡힐쯤에는 어김없이 에드가 나타났다. 그는 눈을 가려 주고, 꼭 껴안아 주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애처롭게 읊조렸다.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일까.
애쉴은 알지 못했다. 대화를 이어나가려 할 때마다 꿈이 끝나버렸던 탓이다.
다른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그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수도 없이 듣고 나서야,
“끄으응.”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막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꾸밈 하나 없는, 원자재인 통나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여긴 또 어딘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까지와는 달리 선명하게 느껴지는 촉감들에 그곳이 꿈이었음을, 이곳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불현듯 답답해져 몸을 움찔거렸다. 겹겹이 쌓여 있던 낡아빠진 솜이불의 진동이 그 위에 상반신을 기댄 채 잠들어 있던 남자에게까지 전해졌다.
에드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얼굴은 초췌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져 있었으며, 턱선은 살이 빠져 안쓰럽다 싶을 만큼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애쉴이 입술을 달싹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에드 님?”
“……!”
풀썩, 먼지가 일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애쉴을 와락 껴안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붉은 눈동자가 커졌다. 몸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에드는 애쉴이 또 잠들기라도 할세라 그녀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열이 다 내린 몸은 차게 돌아와 있었다. 기쁘면서도 못내 슬펐다. 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긋한 꽃내음으로 폐부를 가득 채워나갔다.
검푸른 머리칼이 목을 간질이는 바람에 굳어 있던 몸이 풀렸다. 애쉴은 그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다. 무겁고, 당황스러웠다.
“에드 님, 이것 좀, 놔주세요…….”
신음 섞인 가느다란 음성이 잘게 떨렸다. 숨이 찬지 호흡이 가팔랐다. 그제야 에드는 자신이 그녀를 누르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황급히 떨어지자 애쉴이 콜록거렸다. 에드는 이제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밀어놓은 후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쯤 뜨인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적안을,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죄스럽고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응시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기침이 멎었다.
에드는 흐트러진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었다. 헝클어진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도 정돈해 주었다.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여긴 어디죠?”
일어나자마자 겪은 일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행동을 지적할 기운조차 없어 작은 목소리로 묻자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프레디아에 있는 여관입니다.”
“아아.”
어떻게, 도착하긴 했구나.
다음 습격의 걱정과 더불어 일단은 도착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한데 섞여 깊은 숨소리로 새어 나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깨어나는 대로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는데.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틀에 박힌 질문을 던졌다.
애쉴이 눈을 깜빡거렸다. 푹 쉰 덕이었을까. 쓰러지기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정도로 가뿐했다. 어디까지나 애쉴의 기준일 뿐 일반인에 비한다면 심히 안 좋은 상태이긴 했지만. 혼자서 몸을 추스르는 것은 물론이요, 걷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괜찮아요.”
색소가 옅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한순간 확, 커졌다. 그녀가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본 탓이다.
“가만히 계시는 것이-”
뒷말은 고갯짓 한 번에 부질없이 사라져 갔다. 끙끙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여자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그동안 꿔 왔던 꿈의 횟수로 미루어보아 하루 이틀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닌 듯했다. 나흘, 혹은 닷새 정도 쓰러져 있었으리라.
벨키에로트의 습격이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데, 허무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남자는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을 내놓았다.
“열흘이요.”
“예?”
“열흘 동안 누워 계셨습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뒤를 이은 확인사살에 그렇지 않아도 핏기없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챈 남자가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그동안 습격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수상한 자도 느끼지 못했고요.”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애쉴은 허둥지둥 덮고 있던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침대 밖으로 나오려 바르작거렸다. 깜짝 놀란 에드가 황급히 저지했다.
“당장 떠나야 해요. 저 때문에 마을에 피해가 가기라도 한다면.”
“이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요.”
그의 말이 맞았다. 수도를 출발하던 여름 때처럼 쉬면서 달린다 한들 그때보다 훨씬 더 안 좋아진 몸은 버텨주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벨키에로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파리 목숨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인간이었다. 그를 따르는 수하들 또한 피차일반일 터다. 곧 죽을 자신 때문에 한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에드의 다독거림에 마지못해 다시 누웠다. 그의 보랏빛 검기를 보지는 못해 실력은 알지 못했지만, 괜찮다며 침착하게 달래는 목소리가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불안해하는 애쉴을, 에드는 안심시켜 주겠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아가씨께서 주무시는 동안, 마을에는 절대로 해가 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고, 당신만을 생각하세요.”
왜일까. 별생각 없이 던진 것 같은 저 말이, 짐 속에 잠들어 있을 쪽지를 연상케 하는 것은.
애쉴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모른 체하며 그는 몸을 일으켜 등을 돌렸다.
앓다가 열흘 만에 일어났으면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 마을 걱정이라니. 착잡했다. 안타깝고 속이 쓰렸다. 이런 기분으로 계속 있다가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올 것 같아, 에드는 이미 피투성이인 입 안쪽의 살덩어리를 깨물며 짐짓 쾌활하게 뇌까렸다.
“많이 시장하실 텐데.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요.”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남자를 애쉴이 불러 세웠다.
“예, 말씀하세요.”
“혹시, 제가 누워 있는 동안.”
꿈속의 그가 말한 것을 현실의 그에게 물어보려 하자 어쩐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궁금증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나요?”
예상치 못한 말에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문고리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하릴없이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심장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무시하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웃어 보였다.
“예. 빨리 깨어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번 혼잣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꿈에서 얼핏 들었던 것 같아서요.”
“……그 외에, 저와 관련된 다른 것을 보거나 들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네. 없어요.”
벨키에로트에게 쫓길 때 에르도안도 아닌 에드에게 도움받았던 것을 떠올리자 약간 민망해졌다.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애쉴은, 뒤이어 든 생각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위급한 순간에 나타날 만큼 그에게 의지하고 있던 것이로구나.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애쉴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에드는 뭐가 다행이냐는 질문이 날아오기라도 할세라 다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식사 거리와 약을 가져오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 * *
“제가 먹을게요.”
에드가 가져온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맑은 수프와 이상한 녹색 빛깔의 약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약 그릇을 창틀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수프를 한 수저 떠서 후후 불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잠이 덜 깬 듯 몽롱하던 여자의 얼굴이 살포시 굳었다. 남자는 숟가락을 빼앗으려는 손을 막아내고는 강건히 대꾸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흘립니다.”
“저 혼자서도 먹을 수 있어요.”
“제가 하고 싶어 그럽니다.”
그에게 지금 이상으로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먹지 않겠다는 의미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리자 에드가 작게 한숨 쉬었다.
“약을 드시려면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약, 이요?”
“예. 이제 열은 없다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일주일 정도는 더 꾸준히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일주일 정도는 더 꾸준히’라니. 그 말은,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약을 먹고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애쉴의 의문에 에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제가 먹여 드렸습니다.”
“…….”
“식사도, 마찬가지로.”
“…….”
“그러니까, 어색해하지 않으셔도…….”
“주세요.”
“예?”
쌀쌀맞아진 목소리에 남자가 흠칫했다. 그가 무어라 더 반응하기도 전. 애쉴은 입을 벌려 그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앙, 물었다.
예고 없는 행보에 에드가 당황하던 그때, 애쉴은 빠르게 숟가락을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그의 허벅지 위에 있던 수프 그릇까지 가져가 벽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제가 먹을게요. 나가 계세요.”
말만 그렇게 했을 뿐, 그녀는 숟가락을 수프 그릇에 올려놓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가기 전에는 손을 대지 않을 심산이었다.
퉁명스러워진 태도에 크게 당황한 에드가 얼어붙었다. 은발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귀가 붉어진 것으로 보아 자신의 행동이 어지간히도 불쾌했나 보다 싶었다. 최근 들어 가까워진 듯하여 방심해 버린 탓이다. 그는 애꿎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외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미안함으로 점철된 남자의 음성을 듣자 복잡하던 마음이 더욱 꼬여갔다.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식사와 약을 먹여주었다 해서 불쾌하게 여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순간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설명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애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 아가씨.”
그런 그녀의 태도에 초조해진 건 에드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화 난 거 아니에요.”
거듭된 사과에 애쉴이 머뭇머뭇 답했다. 그녀는 수프 그릇의 가장자리를 만지작대며 정처 없이 시선을 움직이다, 에드의 허리께를 보았다. 그리고 주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웅얼거렸다.
“너무 늦게 여쭤보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치신 건 좀 어떠신지요. 그리고 몸도 편찮으신데 저를 보살펴 주신 것,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에드에게 했던 의뢰는 ‘프레디아에 도착할 때까지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이었다. 즉, 프레디아에 도착한 후로 그는 애쉴을 내팽개쳐도 상관이 없었다. 아픈 그녀를 보살핀 것은 순전히 호의였다는 의미다.
애쉴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만두었다간 머리카락이 수프 그릇에 들어갈 것 같아 에드가 급히 손을 뻗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은 자세가 되었다. 당황한 여자의 시선에 에드가 어설프게 더듬거렸다.
“머리카락이, 들어갈 것 같아서.”
“아…….”
“별거 아닌 상처라 금방 나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에드는 몸을 붙인 채 조곤조곤 말했다.
“제 소원을 들어주십사,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저는 아가씨께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의뢰가 끝나는 대로 친구로서 곁에 머물 수 있게 해 달라는 그의 소원이.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는 친구 이상의 것인데.
애쉴은 얼굴을 굳혔다. 에드는 그녀가 숟가락을 잡도록 유도하며 부드러이 소곤거렸다. 나지막한 숨결이 귓가로 불어 들었다.
“식었는데, 데워 올까요?”
“아니요.”
문득, 에드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해졌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것들을 다 먹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것 같아 들고 있던 것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누가 보든 말든 빠르게 수프 그릇을 비웠다. 차게 식어 덩어리졌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빈 그릇을 받아든 남자가 다른 그릇을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약이라는, 이상한 초록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애쉴은 얕게 떨리는 손으로 그릇을 받아 들었다. 불투명한 액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씁쓸한 약초의 냄새가 훅, 끼쳤다. 자고 있을 때 먹여 줬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처음 맡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자고 있을 때도 먹었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몸에 좋은 거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그릇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릇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미안해요. 못 먹겠어요.”
애쉴은 조금도 비워지지 않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색깔 있는 액체를 볼 때마다 늘 그래왔듯 새파랗게 질린 채 굳어 버렸다.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리적인 현상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드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들고 있는 것을 놓칠 것처럼 흔들리는 손을 본 그는 조심스레 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너무 쓸 것 같아서, 그래서.”
애쉴이 황망히 변명했다. 에드는 그릇을 깨버리기라도 할 듯 힘껏 움켜쥐었다. 이토록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중에 먹으면, 아니,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먹지 않아도……!”
애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방이 약을 모조리 마셔 버린 탓이다.
“조금 쓰긴 하네요.”
입술에 남은 물기를 살짝 핥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걸 왜 당신이……. 애쉴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쓰지 않은 것으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 혹시 필요하실까 싶어 식후 입가심할 만한 것을 가져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양 싱긋 웃은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짙은 갈색빛인 것이 애쉴이 좋아하는 초콜릿 맛인 듯했다.
수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을, 그것도 귀족들이나 먹을 수 있는 것을 본 여자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서 났는지 묻는 듯한 눈빛에 에드가 은은히 미소 지었다.
“어쩌다 보니 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초콜릿 케이크를 가져다드리고 싶었는데…… 이곳에서는 구할 수 없더군요.”
멋쩍게 뺨을 긁은 남자가 사탕을 건네주었다. 애쉴은 손안의 동그란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초콜릿 케이크라.
초콜릿 케이크는 애쉴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초창기 에르도안과 데이트할 때마다 항상 먹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좋아하는 척했고, 몇 차례의 회귀 후 진실을 알게 된 애쉴은 더 이상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았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라서, 아가씨께도 맛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여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먹으러 가시겠습니까?”
“그래요.”
그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먹어 보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대방의 눈빛에 어떤 기대감이 서렸다. 부담스러워진 애쉴이 천천히 사탕의 봉지를 벗겼다. 그리고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맛본 사탕은 무척이나 달았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의 초콜릿 케이크보다 더 달콤한 것 같다고 착각할 만큼.
* * *
그 후로도 애쉴은 며칠을 앓았다. 침대 밖으로 쉬이 나가지 못할 정도로. 에드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애쉴이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나가서 볼일 보시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게 못내 부담스러웠다.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얼굴에 에드는 이유를 물었다. 애쉴은 습격을 핑계로 대강 둘러대었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남자는 어떻게든 잊게 해 주고자 더 잘해 주었다. 그럴수록 애쉴의 얼굴을 뒤덮은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래서요, 그때 세실이 뭐라고 그랬느냐면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애쉴은 부드러이 눈매를 접으며 옆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때때로 ‘그래?’ 혹은 ‘그렇구나.’라며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아이가 워낙 살갑고 활기찼던지라 친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자기네 집에는 이따만 한 오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보여 달라 했더니, 그다음 날에 와서는 날아가 버려서 없다고 하더라고요. 순 거짓말쟁이예요, 세실은!”
“그렇구나.”
“언니는 이따만 한 오리 본 적 있어요?”
“아니…….”
흐려진 뒷말 사이로 소리 없는 한숨이 섞여 나왔다.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 판국에 아이까지 상대하고 있으려니 심히 피곤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아이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양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고, 애쉴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에드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침대와 조금 떨어져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순식간에 폈다.
에드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데이지, 엄마가 찾으실지도 모르는데 내려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얘기하고 올라왔거든요!”
환장하겠군.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구겼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기실 데이지가 멋대로 방에 들어오는 것을 여관 주인 부부가 방관하도록 만든 사람이 애쉴인 것도 있었다.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주인 부부가 시도 때도 없이 놀러 가는 데이지를 꾸짖을라치면 애쉴은 괜찮다고, 적적하던 와중에 잘되었으니 그냥 두어도 된다고 말렸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보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에드조차 영락없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애쉴이 데이지를 곁에 두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에드와 단둘만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에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있죠, 어제는 스테판이.”
“미안한데, 데이지.”
이제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여자가 말을 툭 끊었다. 데이지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놀 수 있을 것 같아. 언니가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히잉, 어디 가는데요? 저도 같이 갈래요!”
“미안. 묘지에 가는 거라, 데이지는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묘지?”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쉴은 에드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께 가 볼까 해서요.”
“하지만, 아직 몸이.”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괜찮지 않더라도 가야 해요. 너무 늦었어요.”
프레디아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부터 찾아뵈었어야 했거늘.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너무 늦어버렸다. 지금도 썩 좋은 편은 아니라지만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니 가 봐야 했다.
불안하게 쳐다보는 남자를 외면한 애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지에 간다 하긴 했으나 숲에 먼저 가 볼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 바칠 꽃을 구해야 하니까.
그날, 에드가 만들어 준 꽃다발은 끙끙 앓는 동안 바짝 시들어 버린 지 오래였다. 늑대와 다시 마주치진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데이지에게도, 그리고 데이지를 데리러 온 여관 주인 부부에게도 여러 번 물어보았으나 숲에는 위험한 맹수 따위는 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늑대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했다.
그렇다면 그날 보았던 늑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잠결에 환상이라도 보았던 걸까? 하지만, 환상이라 하기엔 무척이나 생생했는데.
“어? 이번 주, 오웬의 주인데. 묘지에 못 가요.”
“……!”
“오웬의 주?”
에드가 막 애쉴을 따라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알 수 없는 단어가 발목을 붙들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오웬의 주’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여자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이번 주가 아니라 다음 주였나? 한번 엄마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두 사람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 쾅. 데이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부서지라 열어젖히고 달려 나갔다. 쿵쾅쿵쾅, 2층 복도에서 나던 요란 맞은 소리가 1층과 이어진 계단에서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오웬의 주라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애쉴은 옷을 챙기려다 말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번 주가 정말 오웬의 주라면 최소 열흘간은 묘지에 방문할 수 없을 터다. 붉은 눈동자에 잠시나마 서렸던 빛이 죄책감과 실망감으로 훅 꺼져 버렸다.
“저, 아가씨?”
그런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웬의 주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눈에 띄게 실망하고 있어 말을 걸기도 미안했지만 어떻게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오웬의 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애쉴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바짝 붙은 단풍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고 있었다.
“마을의 이름인 ‘프레디아’가, 낙원이라는 의미인 건 알고 계신가요?”
“아니요.”
웨이센의 마을 이름들은 건국 초기에나 사용되던, 지금은 죽은 언어로 지어진 것이었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도 않건만 에드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는 알고 자신은 모른다는 게 부끄러웠다.
애쉴은 무심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렇군요. 그럼, 왜 이 마을에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부터 간단히 설명 드릴게요.”
웨이센에서 ‘낙원’은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천국을 의미한다. 산 자들의 마을에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한때 이 마을 전체가 ‘공동묘지’였기 때문이었다.
“웨이센이 건국될 무렵, 그러니까 대륙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제국은 시신들을 처리하는 것에 곤란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태워 버리기엔 전쟁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나 고위급의 사망자들이 많아 함부로 처리하기 힘들었다고 하네요.”
“아아,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결국 시신의 중요도 순위에 차등을 두어, 수도에서 멀지 않은 몇 개의 마을에 공동묘지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곳이 이곳, 프레디아예요.”
“예? 하지만, 이곳은 수도와 멀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때의 시신이 프레디아에 안치되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에드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애쉴은 창문을 두드리는 단풍잎을 보며 멍하니 답했다.
“고위급이 아닌 유가족 중 시신이 온전하길 원하던 자들이 있었어요. 한둘이 아니었겠죠. 무시하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고,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수습하게 두기엔 땅과 인력이 부족하니-”
“……설마.”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한 곳에 싹 다 묻어버렸어요. 묘비도 없이요. 그리고 잠든 자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며 낙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지금 프레디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그 유가족들의 후손이에요.”
애쉴이 고저 없이 뇌까렸다. 에드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프레디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외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뭐, 대놓고 티를 내진 않지만요.”
“그렇다면 그 ‘오웬의 주’라는 것은…… 그때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일 같은 겁니까?”
나라를 지키다 죽은 자들을 한곳에 묻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역사에서도 지워버리다니. 시신에 침을 뱉고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증오스럽던 황실이 더욱 끔찍하게 싫어지는 것을 느끼며 에드가 더듬거렸다.
애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낭만적인 게 아니에요. ‘오웬의 주’는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주예요.”
“뭐라고요?”
순식간에 높아진 목소리가 따갑게 울렸다. 자세를 바꾸는지 의자가 날카롭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그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보는 바보 같은 표정에 경직되어 있던 여자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물론, 진짜로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마을이 막 만들어졌을 때는 유령을 보거나 실체 없는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곤 하지만…… 세월이 꽤 지났으니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원한도 어느 정도는 희석되었겠죠.”
“그렇다면, 지금은.”
“마을이 생긴 날로부터 열흘간, 묘지로 향하는 입구가 닫혀요. 누가 닫는 게 아니라 저절로.”
“…….”
“그 기간에는 절대로 묘지에 들어가서는 안 돼요. 입구를 건드려서도 안 되죠. 아이와 노약자는 외출도 최대한 자제해야 하고요. 약한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영혼에 홀려 육체를 빼앗길 수 있다는 말이 있거든요. 물론 미신이겠지만.”
에드는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이나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다 조심스레 더듬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애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뭐가요?”
“몸도 안 좋으시면서 이런 불길한, 음, 좋지 않은 곳에 머무셔도.”
“오웬의 주에 묘지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애쉴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창문을 두드리는 단풍들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거세어져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바람이 강해진 탓이다.
“지낸 햇수는 꽤 되는 편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를 뵈러 올 때마다 오랫동안 머물다 갔었거든요.”
뒷말은 급히 덧붙였다. 공녀가 시골 마을에서 오래 지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에드는 정작 그 부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애쉴의 변명을 듣고서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랄 판에 이런 불길하고 음침한 마을에서 지낸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잠든 곳이거니와 그녀가 직접 선택한 장소이므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가벼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딸깍, 하는 작은 소리였다.
“엄마 아빠가 집에 안 계셔서 세실네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왔어요! 오웬의 주는 다음 주부터래요. 이번 주는 묘지에 가도 된대요.”
데이지였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아이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혀를 쭉 내빼고 헉헉거렸다. 분홍색 머리칼과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애쉴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걷혔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에드가 그녀를 막았다.
“쉬고 계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네?”
“숲에 가시려던 것 아닙니까.”
어머니를 보러 간다고 했지 숲에 간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잘게 웃었다. 설마 그런 것도 몰랐을 것 같냐는 그런 의미로.
“시든 꽃을 계속 쳐다보고 계셨으니까요. 처음에는 시드는 대로 새로 구해드리려 했는데, 향이 빠지도록 창문을 열어 놓으시길래. 향 때문에 머리가 아프신 건가 해서. 나중에 묘지를 가실 때 새로 구해드리려 했었습니다.”
애쉴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속마음을 읽힌 것 같아 묘하게 민망해졌다.
두통 때문이 아니라 꽃향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이 싫어 창문을 열어 놓았던 것이긴 하지만. 환기가 잘 된다면 모를까 밀폐된 공간에서는 아무리 좋아하는 향이더라도 계속 맡고 싶지 않았다. 실루트와 황태자가 연상되어서였다.
“어차피 숲에서 묘지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을 가로질러야 하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번처럼 비슷한 양이면 될까요? 아니면, 그보다 좀 더 많게.”
“아뇨, 그것도 많았어요. 같이 가요.”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를 에드가 막았다.
“아직 다 낫지도 않으셨으면서.”
“거의 다 나았어요.”
“거의 다 나았을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정말 괜찮-”
“무리하시다가 또 쓰러지시는 것보다는.”
에드는 그녀를 감싸 안듯 하며 침대에 다시 앉혔다.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과 걱정이 깃든 부드러운 목소리에 애쉴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쉴 수 있을 때 푹 쉬시는 것이 낫습니다.”
“…….”
“금방 다녀올게요.”
당신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은데.
가슴 속에 켜켜이 돌덩이가 쌓여 갔다. 그런데도 애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에드의 말대로 무리했다가 또 쓰러지는 것보단 쉬는 게 나을 테니까.
그는 푹 쉬라며 데이지를 데리고 나갔다. 애쉴은 깜빡 잠이 들었다.
* * *
아, 보고 싶다.
다섯 장의 꽃잎이 나팔처럼 벌어진 노란 꽃을 꺾으며 에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녹안은 꿈을 꾸듯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헤어진 지 이제 30분 남짓인 것 같은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최근 몇 달 동안 온종일 붙어 있었다고 적응이라도 됐나 보다.
그는 하던 것을 내팽개치고 당장에라도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다른 곳에 가 있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데이지가 외치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빠, 그거 아니에요!”
누런 기가 도는 흰색 꽃을 꺾으려던 손이 멈췄다. 내가 왜 이걸.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얼떨떨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의 손에 있는 노란 꽃은 겨우 네 송이뿐이었다. 그마저도 반은 데이지가 찾은 것이었다.
넋이 나간 에드를 순진무구한 눈으로 힐끔거리던 소녀가 쫑알거렸다.
“오빠도 어디 아파요?”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 곱절은 더 아파도 좋으니 대신 아팠으면. 아, 그렇게 되면 지켜줄 수 없겠구나. 그녀가 떠나는 날까지라도 건강해야…… 그녀가 없어지면,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머릿속에서 상반된 생각이 들끓었다. 부정적인 감정들도 같이 찾아왔다. 에드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예전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프레디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에게서 멀어지겠노라 다짐했을까.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같은 사람임이 분명한데, 도저히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요, 데이지가 하나 더 찾았어요.”
이제 꽃을 찾는 일은 데이지만 하고 있었다. 에드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꺾인 꽃을 받아 들거나, 줄기가 질겨 잘 꺾이지 않는 꽃을 뽑아내는 정도만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합세하면 빨리 끝날 것인데. 한 여인으로 가득 찬 머릿속은 그 당연한 사고를 하지 못했다.
‘잘 쉬고 있을까.’
또 침대에 걸터앉은 채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여나 제대로 누웠어도 무겁다고 이불을 반만 덮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악몽을 꾸며 울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기분 좋은 꿈을 꾸며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또 있…… 앗!”
꽃을 꺾어 오겠다며 쪼르르 뛰어간 소녀가 놀란 듯한 소리를 내었다. 다급한 음성이 아니었기에 에드는 그쪽으로 뛰어가는 대신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데이지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제가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노란 꽃들이 허공에서 나풀거리다 풀숲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데이지에게 닿아 있던 벽안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파도처럼 굽이치는 하늘빛 머리칼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애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 닮은.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는 애쉴과 전혀 달랐다.
애쉴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이면에는 비웃음이 숨겨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애쉴과는 달리 눈앞의 여인은 드세면서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이라더니 그쪽 친척뻘이라도 되나. 하지만, 친척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낯익은 얼굴에 절로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누구-”
“애쉴 언니? 아닌데, 머리랑 눈 색이 다른데.”
그러나 그가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 데이지가 선수를 쳤다.
“애쉴? 너, 애쉴을 알고 있구나.”
“네, 그럼요! 우리-”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우리 집에 머물고 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에드가 끼어들었다. 저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애쉴에 대한 걸 더 이상 알려주지 말라고. 애쉴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여자의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던 것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에드는 금방 따라갈 테니 노란 꽃을 찾고 있으라며 은근슬쩍 데이지를 빼냈다. 여인은 에드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푸른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갈 곳 없는 네가 여기로 올 줄 알았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용케 여기까지 왔군. 그런데 왜 내겐 말해 주지 않은 거지? 설마, 그쪽 때문인가?”
꿰뚫는 듯한 시선이 에드에게 닿았다.
벽안과 녹안이 공중에서 뒤얽힌 그때. 에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맹수 앞에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으로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뜻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감추어왔던,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들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 불쾌한데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저 여자, 대체 뭐지?’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느낌이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에드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동자에 서려 있던 비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동정만이 남았다.
“불쌍하게도…….”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따윈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에드는 그녀를 경계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일종의 혐오감 때문에.
“그 계집애의 농간에 휘말려 몇 번을 반복한 건지…….”
명확한 주어는 없었으나,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은 남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인은, 울고 있는 상태 그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상대방을 명확히 업신여기는 미소였다.
“그런데 왜, 찌꺼기를 달고 다니는 거지? 몰라서 달고 다니는 건 아닐 테고.”
여인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벗기기라도 하고 싶은 듯, 한 손을 들어 올리면서.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그녀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던 에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르르 떨리는 양손을 말아 쥐어 아래로 내렸다. 그러면서 여인과 같은 보폭으로 거리를 벌렸다.
과하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라지만 힘없는 여인에게 취할 반응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애쉴과 닮은 여인이었다. 아니, 애쉴이 그녀를 닮은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와 닮은 얼굴에 칼을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명백히 적대심이 깃든 음성에 여인의 발걸음이 멎었다.
어느새 그녀는 에드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는 듯 가만히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런히 정돈된 눈썹을 반달처럼 휘었다. 참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그 찌꺼기,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곧 본체도 물들여 버릴 테니까.”
의뭉스러운 말을 듣고 나서도 남자의 단호한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인은 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 데이지가 꺾으려 했던 노란 꽃을 꺾어 들었다. 그제야 에드는 그녀의 반대쪽 손에 그들이 찾고 있던 꽃이 여러 송이 들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님 그 전에, 그 아이를 죽여 버리던지.”
지금, 뭐라고?
아연실색하게 시선을 들어 올리자 빙긋 웃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 속에 스친 붉은 기운을 얼핏 본 것 같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에 소름이 끼쳤다. 제 앞을 가로막는 수백 명을 도륙한 직후 피바다 속에 서 있을 때에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느 쪽이든 도와줄게. 필요하면 숲에 와서 나, 달루아를 찾아.”
얼어붙은 그와 마주한 여자가 빙긋 웃었다.
* * *
쿵쿵쿵.
바닥을 부수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조용하던 복도를 메웠다. 데이지인가? 하지만, 데이지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무거운 발소리인데.
잠들어 있던 애쉴이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 문이 벌컥 열렸다.
쾅! 평소 데이지가 여닫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소리에 애쉴이 몸을 확 움츠렸다. 이번에야말로 저 문이 부서지는 건가 싶었다.
“아가씨!”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아니라 건장한 남성이었다. 숲에 다녀온 사람답게 그에게서는 싱그러운 풀내음과 꽃향기가 솔솔 풍겼다. 묘한 열기와 더불어 평소보다 진해진 체향도 함께였다. 여기까지 뛰어온 사람처럼.
그새 습격이라도 있었던 걸까. 애쉴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 기준에서의 급히였기에 에드가 달려드는 것이 더 빨랐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고 물으려던 여자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시거나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또 껴안을 줄 알았는데.
약간의 거리를 두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신을 담아내는 녹색 눈동자도, 아래쪽에 잇자국이 남은 채 살짝 부어오른 입술도 보였다.
가면에 반쯤 가려져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처럼 제 아래에 늘어져 있는 여자를 부지런히 훑었다. 짧은 은발로 덮여 있는 고운 이마를, 의아함이 담긴 붉은 눈동자를, 살며시 벌어져 있는 입술을. 그리고 희고 가는 목덜미와 간단한 외출복 차림을 한 상체를…….
“에드 님?”
민망할 정도로 세심한 눈길이었으나 그의 태도가 워낙 진지해서인지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애쉴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어디 상처라도 있을까 싶어 몸을 살피던 남자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풀빛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검은 불꽃이 선명한 적안을 보자마자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한 채 말이 없었다.
애쉴은 그가 질문에 대답해 주기를, 그리고 알아서 위에서 비켜나 주기를 기다렸다. 직접 비켜 달라 하기엔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하였던지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구나 싶었다.
에드는 애쉴을 보며 숲속에서 보았던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달루아. 애쉴과 닮은, 그러나 애쉴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여자. 대체 뭐 하는 여자이길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이 든단 말인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무엇이고, 애쉴을 죽이겠다 하는 건 또 무슨…….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누군가가 노리고 있음을 알려야 하는데, 조금 전의 대화를 전해 주어야 하는데.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이야기해도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 애쉴…… 이런.”
황급히 입을 닫았으나 뱉어 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제가 한 행동에 놀란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멀쩡한 것에 잠잠해졌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며 뜨거운 피를 뿜어내었다. 온몸 구석구석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일시에 깨어나 상대방의 동태를 살폈다.
미쳤지, 미쳤어. 그는 속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혹시나 지금 행동으로 뭐라도 눈치채진 않았을까, 알아차리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딱딱하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침대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들이 오므라들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심장이 콱콱 조여들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무감각하게 올려보던 애쉴이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네?”
“이름 부르신 거, 괜찮아요. 그런 거로 예민하게 굴진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보다 좀 일어나 주시겠어요? 슬슬 허리가 아파서.”
“죄, 죄송합니다.”
에드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애초에 이름 하나 부른 거로 추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과대망상이거늘. 그는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선 애쉴이 그를 힐끗거렸다. 이름 하나 부른 거로 벌벌 떠는 것을 보자 신분의 격차가 새삼 느껴졌다.
팔라디움을 버린 그녀는 이제 공녀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아는 건 공작뿐이었다. 대외적으로 애쉴은 팔라디움 공작가의 영애이자 귀족이었다. 평민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무리 동생과 비슷하다지만 그동안 그가 왜 그렇게 과하게 친절했는지도,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던 소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 *
고즈넉한 오후.
불그스레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두 사람은 한적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중천에 있던 해가 서쪽으로 지기 시작한지라 일단 묘지에 가기로 한 것이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길 양옆,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던 나무들에서 붉은 단풍 비가 내렸다.
애쉴의 손에는 노란 꽃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전에 에드가 만들어 준 것보다는 작은, 그러나 꽃다발이라 부르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뒤늦게 도착했다가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에 기가 눌린 데이지가 문 앞에 두고 간 것이다.
꽃다발을 만드는 데 데이지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에드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다음에 보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지. 그녀는 꽃다발을 들어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자 싱그러운 꽃향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까 하시려던 얘기가 무엇인지요?”
“친인척분들 중 이곳에 살고 계시는 분들이 있으신지 여쭤보려 했었습니다.”
침묵을 고수하던 남자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여관에서부터 고민해오던 것에 대한 나름의 결론이었다.
앞서가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미간은 살짝 찌푸려진 채였다.
개인적인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그건 갑자기 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여관에 쭉 머무시는 건가 해서요. 호위 문제 때문에.”
“아아. 아니요, 없어요. 그리고 여관에 계속 머물지도 않을 거예요. 어머니와 살던 집이 있거든요.”
그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을 테니 이미 무너져 내렸을 수도 있지만. 기운 없이 중얼거린 애쉴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낙엽들이 밟히며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여관을 나온다니.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데이지가 골치 아팠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변명이 잘 먹혀들어 간 것에 자신감을 얻은 남자는, 그러나 발전 없는 상황에 잠시간 머뭇거리다 입술을 떼었다. 정답이 없어 보일 땐 정공법으로 나가는 것이 맞을 거라 자위하면서.
“그렇군요. 혹시, 달루아를 아십니까?”
“……달루아요? 네, 알고 있어요.”
애쉴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어찌 보면 어이없어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크게 놀란 에드는 그 미묘함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지? 그쪽에서 연기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느낌은, 그 지독한 살의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드는 장담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애쉴과 마주치는 순간, 애쉴을 죽이려 들 것이라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게다가 그 여자를 보는 건 이번이-
“누가, 이런 짓을.”
어느새 그들은 묘지 안에 들어온 상태였다.
상념에 젖어 걷고 있는데, 목이 메어 헐떡거리는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던 에드가 황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의 작은 회색 묘비 앞에 애쉴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발밑의 무언가를 내려다보며 파르르 떨고 있었는데, 주위에 흩뿌려진 노란 꽃잎들로 보아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드는 잰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애쉴과 마찬가지로 분개했다.
“이게 무슨!”
몇 시간 전, 데이지와 함께 찾아다니던 꽃들이 처참히 짓이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조금도 시들지 않은 줄기의 끝부분에 수액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막 왔다 간 것 같았다. 아니면, 꽃을 가져다 놓은 사람과 범인이 동일인이라든지.
‘그 여자다.’
본능이 속삭였다. 달루아, 그 여자의 짓이라고. 왜 힘들게 찾은 꽃을 전부 다 짓이겨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탄식 소리를 낸 애쉴이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이 어머니의 무덤 앞에 볼품없이 망가져 있는 것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참하게 밟힌 것이 꽃이 아니라 제 마음이라도 되는 양 슬프게 바라보던 그녀는, 세찬 바람이 불자 날아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 한곳에 그러모았다. 에드는 바람에 날아간 노란 꽃잎 몇 장을 주워 와 말없이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애쉴이 웅얼거렸다. 딱 봐도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은 모습에 에드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혹여 아직 이 근처에 있으면 잡아 와야겠다 생각하면서. 안타깝게도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곤 그와 애쉴뿐이었다.
애쉴은 흐트러진 꽃잎들을 한데 모아 볼품없이 버려진 줄기의 위쪽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가져온 꽃다발과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했다. 멀쩡한 꽃들이 엉망이 된 부분들을 가려 준 덕분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한데 엉겨 붙어 거대한 꽃다발처럼 보였다.
“아가씨.”
“괜찮아요. 지나가던 누군가가 장난이라도 친 거겠죠.”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에드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묘지에서 나가는 대로 달루아라는 여자에 대해 심도 있게 물어보리라 생각하면서.
초점 없는 눈동자로 꽃다발을 내려다보던 애쉴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초라한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선을 내리자 묘비에 바쳐진 꽃다발 위로 물방울들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비가 오나 싶어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무언가를 무심코 쓸자 투명한 것이 묻어나왔다. 눈물이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번 터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운 마음에 애쉴은 고개를 푹 숙였다.
떨어진 눈물방울이 꽃잎 위로 아롱아롱 달라붙었다. 끅끅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참고자 입술을 깨물었다. 표출되지 못한 슬픔이 혈관을 타고 돌며 전신을 흔들었다. 슬피 우는 여자에게 다가가지 않을 자신이 없어, 에드는 아예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어머니, 저 왔어요.’
한참이 지나도 눈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 쌓아뒀던 설움들이 터진 둑처럼 밀려드는 바람에 갈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애쉴은 결국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을 포기한 채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아주 많이.’
다짜고짜 울어서 죄송해요. 오랜만에 와놓고서는 이런 꼴이나 보여 드리고.
저,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하셨던 거 모조리 하고 돌아다녔어요. 아버지를 만났고,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돌렸죠.
저는 바보인가 봐요. 후회할 걸 알면서도 했어요. 이러나저러나 후회할 거라면 하고 나서 후회하자 했어요. 어머니께서 하지 말라 하셨던 이유가 있었을 텐데. 아, 이제는 알아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너무 늦어 버리긴 했지만요.
어머니. 저, 꿈속에서 어머니를 봤어요. 사실 꿈인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선명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가 되살아나셨을 리는 없으니까, 설령 되살아나셨다 해도 저를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하니까. 꿈이라고 생각할래요. 꿈 맞죠? 그렇죠? 어머니가 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실 리가 없으니까…….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머니셨다면. 용서해 주세요. 멋대로 행동했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 이제 남은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단 말이에요…….
……죄송해요, 응석 부려서.
어머니는 요즘 어떠신가요? 몸은 건강하신가요? 식사는 잘하고 계시고요?
……알아요. 죽은 사람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거.
어머니는 모르시겠지만, 저도 이미 한 번 죽어 봤거든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시간을 돌렸는지 어떻게 살아나게 됐어요. 뭐, 그마저도 1년뿐이지만요. 아쉽지는 않아요. 왜 살아났나 싶기도 하고.
사실은, 무서워요. 죽는다는 게. 내가 알던 세상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그냥 죽은 상태로 계속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지난번에는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랑 같이 있을 테니까……. 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으흑.”
참다못한 신음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서러움에 굴복한 애쉴은 끝내 묘비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보드라운 풀을 쥐어뜯으며 울다가 손톱을 세워 부드러운 흙 안으로 깊게 파고 넣었다. 풀에 베여 상처투성이가 된 손에 진흙이 달라붙었다.
수천 개의 비수를 내리꽂아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으리라. 가슴이 찢어지는 울음소리에 몸을 돌린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완벽히 가만있지도 못한 채 제자리를 지켰다.
정말이지, 저가 대신 죽고 싶었다.
* * *
머리 위를 비추던 해가 뉘엿뉘엿 지고, 노을이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것을 풀어낸 만큼 애쉴은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를 만나 속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이제까지 버틸 수 있게 하던 원동력을 잃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며 허무하게 살아가느니,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의 곁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몹쓸 생각을 떠올려 버린 그 순간.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따뜻한 체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간 에드는 주저앉아 있던 여자를 꼭 껴안았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감돌고, 등에서 시작된 친근한 감촉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휑해진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채워 주는 것 같아 애쉴은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포근했다.
“이상한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이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동생을 나무라는 것 같은 말투에 애쉴이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본심을 들킨 것 같아 자조 섞인 미소가 나왔다.
“이상한 생각 아니에요.”
“아무튼, 하지 마세요.”
에드는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숨이 막혀 기침이 나왔으나 애쉴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뻥 뚫려버린 마음을 온기로 채우듯 가만히 안겨 그를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위로해 주려는 마음이 퍽 고마웠다. 아무것도 모를 텐데도.
* * *
해가 완전히 진 시간이었다. 하늘에 장식된 둥근 보름달이 오솔길을 어스름히 비추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은 춤추는 낙엽들의 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 사박사박, 두 남녀의 발소리 사이에 이름 모를 벌레의 찌르륵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섞여들었다.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을 절반 정도 걸을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애쉴은 평소보다 가벼워진 얼굴을 한 채 본인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고, 에드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은발이 유난히도 눈부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약간 얼굴을 숙이고 있었는데, 혹여 애쉴의 그림자라도 밟을까 싶어서였다. 그만큼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에드 님은 고향에는 안 가세요?”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여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릴세라 에드가 흠칫했다.
“예, 예? 고향이요?”
“네. 고향에는 동생분도 있고, 애인분도 있으신데. 의뢰를 다 완수하셨으면서도 왜 가지 않으시는 걸까 해서요.”
“아, 아뇨. 그러니까, 어.”
생각이 막히자 말문도 막혔다. 고향에 가지 않는 이유 따위 생각해 본 적 없거늘. 그럴듯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자 애쉴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사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던 남자는 간신히 ‘네’라고만 답했다. 애쉴은 눈꼬리를 내렸다.
“괜한 것을 여쭈어보았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대화가 뚝, 끊겼다.
풀벌레 소리와 낙엽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고요하던 그때. 별안간 애쉴이 발을 멈췄다. 넋을 놓고 걷던 에드는 그만 그녀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뒤로 돈 여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보았다. 움찔하며 두 발자국 뒤로 몸을 물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소원 말이에요.”
“네.”
당황하던 남자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과거에 대한 비탄으로 느리게 뛰던 심장이 빨라지면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사형선고를 받는 듯한 느낌에 그는 주먹을 있는 힘껏 말아 쥐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원하시는 건 변함없으신 건가요?”
“네.”
애쉴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바닥으로 내려앉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에드는 수백 년은 족히 지난 것 같다는 착각을 받았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애쉴이 입술을 떼었다.
“에드 님께서 말씀하셨던, 친구 같은 관계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도 충분히 가까운 관계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하지만 에드 님은 그게 아니신 것 같아서.”
간절히 기다려 왔던 바인데. 막상 자리가 마련되자 입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여긴 애쉴이 부드러이 말을 이었다.
“말씀해 주세요. 들어보고, 너무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신분의 격차도 있거니와 항시 자신을 향한 눈동자에 은근하게 서려 있던 거리감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겠다 하긴커녕 당장 떠나라 하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는데.
상대방이 자신의 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마냥 기뻤다. 아직 소원에 대한 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행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혀끝에서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를 ‘에드’라고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애쉴은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에드는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이상은 과한 욕심일 터다.
“아닙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애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항상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그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인 것 같다. 깜깜한 밤인데도, 가면으로 얼굴의 반 정도가 가려져 있는데도 어쩜 이렇게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인지. 꼭 에르도안을 보는 것 같…… 그만두자.
애쉴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왜 자꾸 에드와 있으면 에르도안이 떠오르는 것인지. 그와 비교하게 되는 것인지.
“저를 ‘애쉴’로 부르고 싶으신 거로군요.”
이미 애쉴이라 부른 전적이 있었기에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높낮이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요요히 허공을 갈랐다. 상대방이 본심을 읽어낼 줄 몰랐던 남자는 고개 숙인 상태로 얼어붙었다. 항상 기묘하게 빛나던 녹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공녀에게 그딴 청을 하는 거냐며 화를 낼까. 아니면 들을 가치도 없다며 비웃을까. 양쪽 다 애쉴의 성정과는 거리가 먼 반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드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걸로 충분한가요? 그 외의 건 필요 없으신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꾸지람이 아닌 질문이었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거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서 나온.
에드는 벼락에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애쉴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안타깝게도 눈은 웃고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제야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은 본인뿐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 또한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긴장한 상태였다. ‘겨우 애칭을 허락해 주는 것으로 만족할 리가.’라고 생각 중인 것이 눈에 보였다.
당신은 모르겠지. 그 애칭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대꾸했다.
“네. 충분합니다.”
“그런가요?”
“네.”
반신반의한 물음에 흔들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쉴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네?”
“이제부터 에드, 라고 불러 드리면 되나요?”
에드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모습에 애쉴이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었다. 가끔 친구 이상의 분위기를 내긴 하지만, 그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일정 선을 넘지는 않을 터이니 신분을 벗어나 조금 더 편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때마침 불어온 가을바람에 은발이 아름다운 물결을 그렸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그 위로 떨어지면서, 흔치 않은 그녀의 미소와 어우러져 환상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 애쉴. 나는, 당신을…….’
에드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본심을 간신히 삼켰다.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다는, 하지만 물러나고 싶지는 않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정신 차려야 했다. 음습하게 변한 마음을 들키지도, 빼앗기지도 말아야 했다.
기실 여기서 더 빼앗길 마음도 없었지만.
“별난 사람인 것 같아요, 당신은.”
평생을 놀고먹을 만큼의 돈을 준다 해도 시큰둥해하던 사람이었는데. 겨우 애칭을 허락해 줬다고 저리도 좋아할 줄이야.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이었으나 그녀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에드는 똑똑히 들었다.
‘별난 사람…….’
그래요. 당신의 기억 속에, 그저 별난 사람으로만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이상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 바보 같은 욕망일 뿐이니까.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애환의 파도를 감추고자 남자가 예쁘게 웃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던지라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미소가 완성되었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미소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애쉴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