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3권
9. 진짜와 가짜
“저, 아가씨.”
“…….”
“잠시만 쉬다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앞에 앉아 있는 애쉴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대답을 하진 않았으나 이대로 더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던 에드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러고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끌어내려 주변의 나무 그늘에 앉혔다.
“…….”
앉자마자 책을 꺼내 들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땅만을 쳐다보았다.
‘공녀님을 연모하나?’
놀리는 듯 짓궂은 질문이 귓가에 윙윙 울렸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공녀님을 연모하나?’
연모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존경한다거나, 경외한다거나.
‘공녀님을 연모하나?’
아니면 자다가 꿈이라도 꾼 것이라든가…….
“아가씨?”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코앞에 나타나더니 위아래로 흔들렸다. 애쉴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안 피곤해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눈 밑은 퀭했다. 누가 봐도 밤을 새운 사람의 몰골이었다.
역시 수면 시간이 부족했던 탓일까. 고집을 부려서라도 오두막에서 조금 더 쉬다 출발했어야 했거늘. 상단주와의 대화가 새어 나갔음을 알지 못한 에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런가요.”
거울이 없으니 얼굴이 어떤지 알 턱이 없었다. 애쉴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렸다. 평소보다 매끄럽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좋지 않나 보다, 싶었다.
“주무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또 쓰러지실지도 모르니까요.
작게 중얼거린 에드가 애쉴을 반강제로 눕혔다. 짐 꾸러미를 베개 삼아 머리 아래 뉘이고, 모포를 깔개 삼아 바닥에 깔고, 제 겉옷을 이불 삼아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에드 님.”
“……예?”
애쉴이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은 거의 없던지라 반응이 늦었다. 상대방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남자는 적잖이 긴장했다.
“저를…….”
애쉴이 입을 벙긋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한 듯 나오지 않았다. 길지도 않은 문장인데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물어보았는데, 맞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불현듯 머릿속에서 질문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지. 더 이상 그와 다녀서는 안 돼.’
프레디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헤어진다면 다른 사람을 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갈수록 몸이 안 좋아지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아니에요.”
애쉴은 시선을 돌렸다. 혀끝에 맴돌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기라도 한 듯 지독한 구토감이 가슴을 쑤셨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을 해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물러갔을 텐데. 표정이 워낙 좋지 않았다. 에드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애쉴은 도리질하며 덮고 있던 것을 코끝까지 올렸다. 그러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향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목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에게 안길 때마다 생각했었지만, 동일인물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누군가’와 지나치게 비슷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신지요?”
“예…….”
애쉴은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에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하게 할 말을 하던 평상시와 전혀 다른 모습에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일정 거리를 두는 대신 그녀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무 그늘이 지지 않은 곳이었다. 늦여름이라 덥지는 않았으나 햇볕은 아직 따가웠기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
왜 여기 있냐는 의미로 상대방을 올려다보자 그는 산뜻하게 웃으며 ‘햇볕을 받고 싶어서요.’라는 답을 내놓았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러든 말든 관심도 두지 않을 것이었으나, 어제 들은 말 때문에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몸짓이, 시선이, 하다못해 숨소리마저 심히 자극적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는 끝내 상체를 일으켰다. 상단주의 말을 못 들었다면 모를까 이 상태로 동행할 수는 없었다.
“누워 계시지, 왜.”
“여쭤볼 것이 있어요. 사적인…… 질문이긴 한데.”
“저한테 말입니까?”
애쉴이 사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과 기대, 당황으로 뒤섞인 녹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핥은 여자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예전에…… 제가 여쭈었었죠. 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이 있냐고.”
그 질문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걸까.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빗겨 내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애쉴은, 어느 순간 주먹을 꽉 쥐며 숨도 쉬지 않고 본론을 내뱉었다.
“혹시 지금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분이 있으실까요?”
“…….”
어찌나 당황했는지 예고도 없이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정까지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입을 반쯤 열린 채로 굳어 버렸고, 상대방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애쉴은 그가 불쾌함으로 얼굴을 붉혔다고 착각했다.
“죄송합니다. 언짢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요. 무시해 주세요.”
답답한 마음에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방의 붉어진 얼굴을 본 순간 왜 그랬을까 싶었다. 몽롱하던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찬물이 끼얹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급히 고개를 숙이려는데, 에드가 저지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빨개진 얼굴 위로 진심이 드러나기라도 할까 싶어 에드는 손으로 가면이 덮지 못한 부분들을 가렸다. 뜨거웠다.
“그, 대답해 드릴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한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없으시다면 아는 분이라도 소개해 드릴까 해서요. 어제 너무 고마웠어서…….”
변명을 떠올릴 시간이 부족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용병에게 누군가를 소개해 준다는 발상도 황당했지만, 그것 외에도 그는 애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진심을 얘기할 때와 다르게 입꼬리가 작게 떨렸으므로.
눈썰미가 좋은 사람도 알아차릴 수 없는, 무수히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관찰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왜 뜬금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금방 답이 나왔다.
‘어젯밤, 상단주의 말을 들었구나.’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자신에게는 늘 무감각했던 그녀였으니까.
이런 제길. 그는 더워 죽겠다는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
경악한 여자의 눈이 커졌다. 정신을 차리고 뭐라 하기도 전, 에드가 급히 덧붙였다.
“고향에서 만났는데, 제가 워낙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터라. 지금쯤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어깨까지 오는 짧은 금발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는데……. 아가씨와는 정반대로군요. 아무튼, 네.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가씨가 훨씬 더 아름다우시긴 합니다만.”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는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아가씨를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애쉴에게 반했다는 식으로, 그러나 마음에 둔 여자는 따로 있다고 주입하듯 반복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기나긴 극찬이 끝났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상대방에게 휘말린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뭐라 할 말이 없어 애쉴은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요.”
‘빌어먹을.’
겉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쌍욕이 절로 나왔다. 상단주의 주둥아리를 막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속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보람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대답을 들은 애쉴이 마음을 놓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으니까.
어제 왜 상단주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긴 했지만, 깊게 파고들수록 머리만 아파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차피 프레디아에 도착하는 대로 끝날 인연인데 신경 써서 뭐 하겠나 싶었다.
* * *
여름이 끝나감에 따라 날씨가 선선해졌다. 예측할 수 없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들도 사라져갔고, 에드와의 동행도 끝나길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본래 한 달이면 도착할 거리를 애쉴의 몸 상태 때문에 지지부진하게 끈 결과였다.
“저 숲만 통과하면 프레디아입니다.”
에드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숲을 가리켰다.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으나 숲속은 그저 암흑이었다. 워낙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있던 탓이다. 아마 낮이 되어도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해 어두울 터다. 바람을 타고 부딪치는 나뭇잎 소리만 무성할 뿐, 숲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음습하기 그지없는 장소이건만. 애쉴은 묘하게 풀어진 얼굴이었다. 약초와 열매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자주 돌아다니던 곳이었기에. 하얀 천에 검은 물감이 스며들듯 그녀는 아련한 과거의 향수에 젖어 들었다.
“늦었으니 이 근처에서 하루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친숙하다지만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위험한 짐승이 살지 않는 숲이라지만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목적지가 바로 앞이라는 것에 초조해지긴 했지만 애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뜻에 승낙을 표했다.
항시 그래왔던 것처럼, 에드가 마련해 준 잠자리에 누운 애쉴은 곱게 접혀 있던 라인하르트의 쪽지를 펼쳤다. 망설이며 계속 미뤄오던 것이었는데.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애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일단은 미안하다는 말 먼저 전하마.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너와 처음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한단다.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조그마한 손발을 꼬물거리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그때 다짐했던 것 같다.
너를 꼭 지켜주겠다고. 팔라디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랬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프리하 님과 사라져 버렸지.
20년. 장장 2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간신히 찾은 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땐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너를 살리고 싶었다…….
벨키에로트가 그러더구나.
네가 많이 아픈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자기에게 널 보내면 네 수명을 연장시켜 주겠다고.
대륙 내 모든 의사를 불러 모으는 한이 있더라도 치료해 주겠다고.
너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짓을 네게 하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애쉴.
내 욕심보다는 네 행복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너를 떠나보내게 되었으니, 나는 너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애쉴, 사랑하는 내 동생.
너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팔라디움의 일원이자 내 동생이다.
그러니 혹 마음이 풀린다면 언제라도 돌아오너라.
항상 기다리고 있으마.
라인하르트 팔라디움.」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듯 들여다보던 눈동자가 쪽지의 끝에 닿았다. 애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쪽지를 가슴 위로 내리눌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은발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라인하르트는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벨키에로트의 유혹에 넘어간 것일 뿐이었다. 그런 오라비에게 ‘가문의 권위를 위해 자신을 데려온 것이 아니냐’라는 독설을 퍼붓고,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돌아오라 말했지만, 애쉴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은 수도를 출발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나빠져 있었다.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져 가며 이동했다고는 하지만 밖에서 쉬는 것이 어디 쉬는 것이던가. 힘에 부칠 때마다 이를 악물어가며 참았지만 이젠 슬슬 한계였다. 아마 프레디아에 도착하면 평생을 마을 밖으로 나오지 못할 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끊어내야 할 인연들이니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쪽지를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적어도 얼굴은 보고 왔어야 했다.
뒤틀린 오해로 점철된 대화가 한평생 자신을 그리워했다는 사람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눈을 감더라도 한이 남을 것 같았다.
“에드 님, 주무시나요?”
애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변을 경계하느라 불편하게 앉은 자세로 선잠에 빠져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호위가 끝나는 대로 의뢰를 하나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무슨……?”
“라인하르트 오라버니께 편지 한 통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보수는 원하시는 대로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그토록 실력이 대단하다는 자를 겨우 편지 배달부로 쓰는 게 미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프레디아는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마을. 외지인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아주 가끔 떠돌이 무희나 음유시인 등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어쩌면 공작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편지를 넘길 수는 없었다. 에드는 기존에 팔라디움과 연이 있는 데다 글을 읽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사람은 없을 터다.
“…….”
애쉴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던 남자는, 그러나 이번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을 의아하게 여긴 애쉴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른 의뢰라도 있으실까요?”
“의뢰는 아니고…… 할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대로 오라버니와는 영영 이별이로구나.
붉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잘못이니 뭐라 탓할 사람도 없었다.
애쉴은 껴안고 있던 쪽지를 잘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달빛에 의지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계속 읽기라도 하면 그 속에서 라인하르트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벨키에로트가 그러더구나.
네가 많이 아픈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자기에게 널 보내면 네 수명을 연장시켜 주겠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처음부터 거슬렸다. 보면 볼수록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수명을 늘려주겠다는 건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를 알고 있는 건지의 문제였다.
라인하르트가 고명한 의사를 수소문하던 것이 벨키에로트의 귀에 들어간 건가 싶다가도, 아무렴 소공작인데 그리 일을 허술하게 할까 싶었다. 무엇보다 라인하르트는 데뷔탕트 이후 벨키에로트가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그녀와 관련된 보잘것없는 정보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답답한 마음에 오라버니가 벨키에로트에게 실마리라도 흘린 것일까? 무슨 방도가 없겠느냐며 돌려 물어보다 들키기라도 한 것일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의 성격상 스스로 대륙을 뒤져가며 의사를 찾으면 찾았지, 좋지 않게 여기는 황태자에게 물어보지는 않을 터였다. 답답한 마음에 손이 저절로 입가로 향했다. 애쉴은 손톱을 뚝뚝 물어뜯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해져 애쉴을 훔쳐보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에드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침으로써 주위를 환기했다. 예쁜 손톱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란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애쉴은 어두워진 얼굴로 손톱을 뜯곤 했다. 이제까지는 그녀와의 거리감 때문에 보고도 보지 못한 척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상단과의 조우 이후, 애쉴은 그를 대하는 것에 꽤 유해진 상태였다. 필요한 게 아니라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말하기 곤란한 것이나 선을 넘은 경우에는 부드럽게 알려 주었다. 싸늘한 눈동자로 말없이 응시하던 때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때문에 그는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단단하게 굳은 얼음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살얼음이나 단단하게 굳은 얼음이나 얼음은 얼음이었지만.
“……아니에요.”
애쉴은 입가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할 일은 아니었다. 설사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한들 말해 주지 않을 터였다.
에드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것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내용을 읽어 본 적은 없었지만 라인하르트가 보낸 쪽지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출발할 때 인사도 하지 않더니 역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소공작님이 많이 그리우신가 보군요.”
“…….”
되새김질해 봤자 심란해지기만 할 뿐 해결되는 것은 없다. 어떻게든 혼자 추슬러야 한다. 애쉴은 쪽지를 접어 품속에 고이 갈무리했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이라 여긴 에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래 걸려도 괜찮으시면 전해드릴까요?”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애쉴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우울함이 감도는 눈동자에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어렸다.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에드가 뺨을 긁었다.
“호위가 끝나고 바로는 어려울 것 같고, 내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마저도 안 될 확률이 높지만.
“전해 주시기만 하면 상관없어요. 에드 님이 아니면 평생 전하지 못할 테니까.”
반달 같은 눈썹이 살며시 휘었다.
아, 또 웃는다. 그는 옷을 정리하는 척하며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자신이 그녀를 웃게 했다는 것이, 자신만을 향해 웃어 준다는 것이 기꺼웠다. 저만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편지를 전해 주겠다 한 것이 최근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수십, 수백 통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네, 그럼. 주시면 전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드는 은은히 미소 짓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대방의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애쉴은 천천히 자리에 누워 표정을 지웠다.
웃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에서 빙빙 돌았다. 윗사람을 내려다보는 건 큰 결례인지라 곁눈질로 힐끗거리니, 그녀는 잠을 청하는 듯 눈을 감은 상태였다.
달빛을 머금은 은발, 조금은 창백해 보이는 피부. 풍성하게 드리워진 긴 속눈썹, 살며시 다물린 입술. 꼭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에드는 무례라는 것도 잊은 채 애쉴을 깊게 응시했다. 간신히 진정되었나 싶던 심장이 쿵쿵거렸다.
불현듯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프레디아에 도착할 텐데. 이렇게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없을 텐데. 그녀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아가씨께서는.”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했다.
“최근 들어 잘 주무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잠든 그녀를 깨운 것이다.
“……네? 잘 못 들었어요.”
그새 잠이 들었는지 애쉴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졸음을 쫓아내려는 듯 한쪽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무방비한 그녀를 홀린 듯 바라보던 남자가 다급히 뇌까렸다. 자는 사람을 깨우다니.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다.
“아, 자고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최근 들어 잘 주무시는 것 같다 했습니다. 예전에는 밖에서 잘 주무시지 못하셨던 것 같아서요.”
“……아.”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은 별안간 화드득 진저리를 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나 날랜 동작이었는지 곁에 있던 남자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근처의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 뻑뻑한 눈두덩이를 양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피곤했으나 오늘 잠은 다 잤다 싶었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을까. 잊는 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가씨?”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그만큼 이 사람에게 기대고 있던 걸지도.
애쉴은 눈을 들어 물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심히 위태로워 보이는 눈동자에 크게 당황한 남자는,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다 뒤늦게 결례를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요.”
입가를 볼 필요도 없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자신일 터다.
잠깐의 아집이 기어코 일을 쳤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에드는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말을 꺼내서.”
“아니에요.”
추운 날씨도 아닌데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있던 모포를 끌어 제 몸에 둘둘 매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나무에 몸을 바짝 기대고 무릎을 끌어모아 깍지를 꼈다. 여행 초반 때나 보았던, 어떻게든 잠을 자지 않으려 하는 몸짓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채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에드 님.”
내버려 두었다간 머리를 찧으며 사죄의 말을 내뱉을 기세인지라, 애쉴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불편하니 그러지 좀 말았으면 했다. 남들에게는 냉정하기 짝이 없게 굴면서, 왜 자신의 눈치는 이리도 보는 것인지. 고위 귀족이라 부담스러워서 그런 걸까.
“에드 님 탓이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해서.”
“아니에요. ……제가 겁이 많아 그래요.”
머리를 찧을 준비를 하는 남자를 멈추기 위해서는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팔라디움 가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것도 들켰는데 개인적인 일을 숨겨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말해 봤자 철부지 공녀님의 쓸데없는 걱정이라 하겠지.
잠시 뜸을 들이던 여자가 입술을 떼었다.
“오늘은 달이 밝아 좀 덜하지만. 사방이 뻥 뚫린 공간에 누워 있으면, 꼭 땅속으로 파묻힐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속에 내던져지는 것. 죽을 때의 느낌을 상기하고 있으려니 착잡했다. 어두워진 붉은 눈동자가 깊게 침전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무서워하느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한 반응에 애쉴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에드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니, 울고 있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가면 속으로 스며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 맺혀 있던 눈물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네? 아니, 왜…….”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
묘하게 말투가 바뀌었으나 애쉴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이해할 수 없는 말의 내용으로 크게 당황한 탓이다.
그는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고, 애쉴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 우는지 이유를 모르니 달래 줄 수도 없었다.
그날 밤, 애쉴은 잠들지 못했다. 두려운 것이 떠오른 것도 있거니와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간간이 들려오는 물기 어린 한숨 때문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하며 당황스러워하자 에드는 ‘저 같은 놈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눈을 붙이시는 게 좋겠다.’라는 말을 남긴 후 자리를 떴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으나 호위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한 채 등을 보이고 섰다. 그리고 울었다. 환한 달빛이 저물고,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간신히 잠들었나 싶었는데 아침이었다. 애달프게 웃는 그의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었다. 어젯밤 일에 대해 제발 묻지 말아 달라는 분위기가 느껴져서, 애쉴은 그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 * *
겉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숲 내부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초반에는 그저 뿌옇기만 해서 약간 불편한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구름 속을 걷는 듯 앞쪽의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위험하겠다고 판단한 남자는 말 위가 아닌 옆에서 고삐를 잡고 걷고 있었다. 애쉴도 마찬가지였다. 편하게 말에 타고 계시라고, 천천히 가고 있으니 괜찮다고 에드가 만류했으나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에 바칠 꽃을 찾겠다며 기어코 내렸다.
숲에 들어온 후 시간이 꽤 지났지만 두 사람은 필요한 것 외에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에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정면만을 보고 있었고, 애쉴은 고개를 숙인 채 주변 땅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할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분위기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항상 귀찮게 굴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왜 이리 어색한 건지. 꽃을 찾고 있으면서도 은연중에 그를 향해 눈이 돌아가는 것을 애쉴은 깨닫지 못했다. 닮은 구석 하나 없는 꽃을 보고 착각하길 수십 번이었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그녀는 주먹으로 두 눈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바닥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해 몸이 확 기울었다.
“꺄악!”
차가운 흙 대신 따뜻한 무언가가 볼에 닿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에드에게 폭 안겨 있었다. 볼에 닿은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셔츠였다. 또다시 찾아오는 익숙한 느낌과 체취에 애쉴은 파르르 몸을 떨며 상대방을 밀어냈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힘이었으나 그는 그대로 밀려났다. 자주 겪었음에도 익숙해질 수는 없는 반응에 상처받은 채로.
“괜찮으십니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설움을 삼키며 물었다. 괜찮다고, 잡아 줘서 고맙다고 웅얼거리던 여자가 한 발을 뒤로 내디딘 순간.
“흐윽.”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찌릿함에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기겁한 에드가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는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그루터기에 애쉴을 앉힌 후 바지를 걷고 발목을 살폈다. 새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것이 제대로 접질린 듯했다.
“이런…….”
다 와서 이리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에드는 제 짐에서 붕대와 약초를 꺼냈다. 그러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약초를 덧대고 붕대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환부의 압박감으로 애쉴이 끄응, 소리를 내며 힘들어했으나, 그는 움찔거리면서도 하던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말을 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가 약한 사람 아니랄까 봐 그새 앞머리가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에드는 손수건으로 젖은 이마와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애쉴이 자기가 하겠다며 달라 하는데도 꿋꿋이 닦아 주었다.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남자의 분위기가 묘하게 ‘그’와 닮아 있어서, 애쉴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대체 ‘그’는 언제쯤이면 완전히 잊을 수 있을런지.
“찾고 계시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주시면 제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노란색에, 나팔처럼 꽃잎이 벌어져 있어요. 네 장, 혹은 다섯 장의 꽃잎이요.”
“알겠습니다.”
꽃을 찾겠다며 호위 대상자를 두고 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에드는 근처 나무 둥치에 말을 묶어둔 후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와는 약간 떨어진, 그러나 평소보다는 조금 더 먼 거리에서.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각사각. 책 넘어가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사방은 그저 고요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지 않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쉴 때마다 에드가 계속해서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말을 걸어대는 통에 읽을 수가 없던 탓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조용한 휴식시간은 퍽 오랜만이었다.
무성히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불 삼아 애쉴은 책을 읽었다. 그나마 안개가 없는 곳이라 글자가 보이긴 했다. 그러나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다. 자꾸만 눈이 다른 쪽으로 갔다. 에드가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까지 겪어왔던 그는 자신에게만 친절한 사람이었다. 호위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성격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항상 다른 이들과는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자신에게 접근하는 자에게는 더욱 가차 없었다.
그래서 실제의 그는 꽤 냉정한 사람일 거라고, 호위가 끝나는 대로 다정함이 어느 정도 벗겨질 거라고 여겼었다. 아직 뭐라고 쓸지 생각하지도 않은 라인하르트의 편지 얘기를 미리 꺼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젯밤. 에드가 우는 것을 본 순간.
한순간이나마 애쉴은 그의 민낯을 본 것 같았다. 가면 밑에 잠들어 있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본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고작 말 한마디에 펑펑 울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정말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쉬이 이해할 만한 것은 아닐 터인데.
찝찝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십여 분을 한 페이지에서 넘어가지 못하던 애쉴은 결국 책을 덮었다. 출발하자는 신호인 줄 알고 에드가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애쉴이 대뜸 입을 열었다.
“눈은 좀 괜찮으신가요?”
“……아, 네,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설마…… 걱정해 주는 건가?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미안함과 슬픔이 뒤섞여 파도처럼 몰아쳤다. 하루 종일 날뛰는 감정들을 가라앉혔나 싶었는데 무심한 질문 하나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빨개진 얼굴을 또 보여 줘야 했을 테니까.
“다행이네요.”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가 뚝, 끊겼다.
일단 던지기는 했는데, 그다음으로 할 말이 없어 애쉴은 입을 다물었다. 에드는 숨을 죽인 채 뒷말을 기다렸다. 이 주제에 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모처럼 그녀가 보인 관심의 불꽃을 꺼뜨리긴 싫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애쉴은 멍하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목에 묶인 붕대를 만지작거렸고, 에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마침내, 기다리다 지친 애쉴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빠르면 오늘, 늦어도 며칠 내로 헤어질 사람인데 왜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 울든 말든 했을 것이고, 그 사정이 어떤 것인지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그를 부르려던 찰나.
‘……?’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크기의 무지갯빛 나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불투명한 몸체 너머 풍경이 보였다.
기묘한 위화감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비를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별안간,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진한 초콜릿 케이크보다도 더욱 달콤하고,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던 향수보다 더욱 향기로운 냄새가, 나비의 몸에서 흩날리는 무지갯빛 가루에서 나고 있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아, 아. 뭔가 이상해. 에드 님을…… 불러야 하는데…….
입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들었다. 힘을 주어 억지로 붙들려 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툭. 무릎을 껴안고 있던 양팔에 고개가 떨어졌다. 애쉴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슬슬 가실까요?”
그때까지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에드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뒷말이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이 주제를 이어가다 난처한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음?”
그제야 잠든 여자를 발견한 남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런 자세로 잠들었을까. 아침 일찍 출발한 터라 날이 지기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기왕 자는 거 편하게 잤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를 살살 불렀다.
“아가씨.”
“…….”
“아가씨?”
“…….”
수차례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가 불길했다.
야외에서 애쉴은 잠귀가 어두운 편이 아니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밝아서 문제였다. 이상함을 느낀 에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확 구기며 욕설을 뇌까렸다.
“제길.”
애쉴의 몸에는 희미한 마법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설마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마법까지 동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법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면 어지간한 고위급 이상의 마법인데.
‘살기가 없던 것으로 봐서 공격계는 아닌 것 같다만. 왜 잠든 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은 좀 더 깨워 보자. 그렇게 생각한 남자가 어깨를 한 번 더 흔들려던 그때.
애쉴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리더니, 감겨 있던 눈꺼풀이 소리 없이 열렸다. 무릎에 묻혀 있던 얼굴이 스르르 들리고, 초점 없는 적안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울창한 숲에 울려 퍼졌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뒤로 확 쏠렸다. 애쉴은 더듬더듬 몸을 뒤로 물렸다. 공포로 짙게 물든 붉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왜, 대체 왜. ‘저런 것’이 여기에?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상한 나비를 보다 깜빡 잠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집채만 한 검은 늑대가 코앞까지 다가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늑대의 털이 검푸르다는 것이나 눈동자가 기묘한 녹색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소리 높여 에드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자극받은 늑대가 덤벼들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에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돌덩이에 눌린 듯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턱턱 막혔다.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저 표정을, 저 몸짓을 본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영원히 잊지 못할 그날에…….
설마 ‘그날’의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한 것일까? 부디 그런 것이 아니길 바라며, 그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가씨?”
“……!”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 애쉴이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뭘 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위협적인 무언가’로 보인다는 것은 알겠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에드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휘익-
예상이 들어맞았다. 근처 풀숲이 흔들린다 싶더니 느닷없는 습격이 그를 덮쳤다. 에드가 일정 경지를 넘어선 검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애쉴을 달래느라 엉거주춤하게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힘을 주어 쳐올리자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쨍, 울렸다.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복면을 쓰고 있던 자가 비틀거렸다. 옷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벨키에로트, 그 개자식의 짓이로군.”
작은 중얼거림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에드는 달려드는 복면의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두 동강 낼 생각으로 힘을 주었으나 흠을 내는 데 그쳤다. 능숙하게 흘리는 자세로 보아 어지간한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아무렴 그래야지. 어중이떠중이를 보냈을 리는 없지.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것인지 에드의 검에 보랏빛 기운이 은은하게 실렸다. 눈빛도 흉흉하게 변했다. 그녀의 앞에서 살기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전투 중에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복면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몇 합을 주고받았다. 실력이 대충 가늠이 갔다. 죽이는 건 쉬웠다.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복면의 기교 때문이었다.
애쉴에게 피를 보이고 싶지 않아 검만 부러뜨리고 끝내려 했거늘,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것이 심히 거슬렸다. 그러나 어찌할 방법이 없어 시간만 속수무책으로 흘렀다.
‘곤란한데.’
불행 중 다행으로 상대하는 자를 제외하면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를 오래 끌어 봤자 좋을 것은 없을 터다. 피만 보이지 않을 뿐 그녀에게는 꽤 충격적인 장면일 테니까. 그냥 죽여야 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애쉴을 훑었다.
그게 실수였다.
“……!”
애석하게도 애쉴의 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먹잇감을 두고 싸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그때. 두 늑대 중 몸집이 커다란 놈이 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먹이가 도망치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대로 있으면 잡아먹힐 거야.’
저들끼리 싸우는 지금이 기회였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소리를 죽여 가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쪽을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무에 기대 일어섰다. 약초 덕분에 다친 발목의 통증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참을 수 없더라도 참아야 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한 발을 내디뎠다. 야속하게도,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깐만, 어딜 가는, 컥!”
어느새 멀어진 모습에 에드가 기함했다. 상대하던 자를 밀쳐내고 쫓아가려 했으나 뒤이어 날아온 검의 궤적에 허리를 깊게 베였다.
“흐윽…….”
자신에게 달려들려던 큰 늑대를 작은 늑대가 물어뜯었다. 그것도 모자라 몸으로 들이박았다. 풀잎이 휘날리고, 흙먼지가 일고, 피가 튀었다. 애쉴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던 비명을 간신히 주워 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절뚝거리며 도망쳤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 * *
달렸다. 무작정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달려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멈췄다간 늑대에게 목을 물어뜯길 것 같았다. 거의 다 왔는데 어머니를 보지도 못한 채 죽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계속 달렸다.
어지러웠다.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 입 안은 비릿한 맛이 감돌았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후들후들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새빨갛던 발목은 다른 쪽의 두 배는 되어 보일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때까지, 애쉴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흑!”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싶더니 땅을 뒹굴었다. 어찌나 세게 넘어졌는지 양팔과 무릎이 얼얼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다 그대로 쓰러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이번에는 양팔로 바닥을 밀었다. 그러다 왼손에 걸린 팔찌를 보고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단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왜 진작에 이걸 쓰지 않았을까. 위력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결코 약하지는 않을 터인데.
애쉴은 눈을 감은 채 할딱거렸다. 늑대의 발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천만다행으로 사방은 고요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몸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땀이 식어감에 따라 오한이 들었다. 이대로는 정신을 놓을 것 같아 애쉴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감기려는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힘이 없어 옆으로 굴러 버렸다.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푸른 하늘도 언뜻 보였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과 지독하게 선명한 흙내음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무와 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둑어둑한 공간에 홀로 누워 있는 자신의 처지가.
‘에드 님은 어디로 가신 거지?’
힘이 없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애쉴은 덜덜 떨었다. 발밑이 휑한 것이 섣불리 움직였다간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눈을 가리고자 손을 들어 올렸다가 땅에 쓸린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그만두었다. 비슷한 고통이 반대쪽 팔과 양 무릎에도 있으니 꼴이 비슷할 터다.
‘잠들기 전만 해도 옆에 계셨는데.’
잠깐 자리라도 비운 것일까? 설마 늑대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한 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공녀’라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이지 않나. 겨우 짐승 따위에게 당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사라진 것에 걱정이 되어서든, 임무를 완수하고 돈을 받기 위해서든. 지금쯤이면 그 자리에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직 늑대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머니와 다닐 땐 늑대는커녕 토끼 한 마리 보지 못했다. 숲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않는 종이었다. 곤충이라면 모를까 짐승이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안심하고 다닐 수 있었다. 음침한 탓에 밤에는 잘 다니지 않았지만.
십여 년 사이에 환경이라도 바뀐 것일까. 짧지 않은 시간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집채만 한 늑대라니. 늑대들은 떼를 지어 다닌다는데. 늑대 무리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마정석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텐데…….
‘그래도 여기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익숙한 숲인지라 마을로 가는 방향은 알았다. 애쉴은 상체를 느릿느릿 일으켰다. 바닥을 짚은 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양손에 힘을 주어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어지러웠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가쁜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채 두 걸음도 가지 못하고 침음을 흘리며 풀썩 쓰러졌다.
“윽…….”
부어오른 발목의 통증이 심했다. 새하얗던 붕대는 흙과 풀물로 엉망이 된 채 볼품없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기어서라도 가야겠다 싶었는데, 깨진 무릎이 너무나도 아팠다. 총체적 난국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을에 가까워져야 했다. 발목이 다친 쪽을 질질 끌며 애쉴은 기다시피 걸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갔다.
원래도 밝지 않기는 했으나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의 여기저기서 질러대는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이를 악물고 걸었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을 지지대 삼아 의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그러다 순간 힘이 빠져 나무에 기댄 채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하윽…….”
한번 주저앉은 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머리는 이대로 있으면 큰일 난다며 빽빽거리는데, 몸은 될 대로 대라며 축 늘어져 버렸다. 피멍이 든 입술을 잘근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어젯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에 젖은 솜처럼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던 그때.
사각사각.
“……!”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가까운 곳에서 풀잎이 짓밟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질끈 깨물며 흐트러진 정신을 주워 모았다. 팔찌의 마정석을 꽉 움켜쥐면서 여차하면 시동어를 외칠 준비를 했다.
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근처의 풀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려 하지 않는 몸뚱어리를 뒤로 빼며 숨을 죽였다.
마침내, 풀숲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의 얼굴을 본 순간.
“…….”
애쉴은 할 말을 잃었다.
서슴지 않고 걸어오던 상대방도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습한 여름 바람이 검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앞머리가 붕 뜨면서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깔끔하게 보였다. 놀랐는지 그것은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 그러다 이내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 겨우 찾았네.”
말도 안 돼. 목소리마저 똑같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애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본 붉은 눈동자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당황하고 있던 사이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기묘한 위화감이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는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 방해 없이 다가온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상처투성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놀림이었으나 극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모르는 이를 마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덜덜 떨던 여자가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금방 뒤쪽의 나무에 몸을 부딪쳤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건가요? 하. 이럼 혼날 텐데.”
애쉴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냥하게 말한 남자는 그녀의 등 뒤에 한 손을 끼워 넣었다. 반대쪽 손은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무릎 아래를 받쳐 들었다. 뭘 하려는지 깨달은 애쉴이 기겁하며 그를 밀쳤다.
“시, 싫어! 하지 마요!”
들어 올리려던 몸짓이 뚝, 끊겼다. 밀어낸 반동으로 바닥을 구른 애쉴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최대한 멀어질 수 있도록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나무에 닿았다.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여자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러더니 다시금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경쾌하다 싶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오, 오지 마!”
“……레이디?”
잠시나마 멈칫하던 남자가 계속해서 걸어왔다. 애쉴은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왜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 이상한 분위기는 뭘까.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한이 맺혀 죽어서 찾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제, 제발, 오지 마, 제발…….”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텁텁한 흙 내음이, 손안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풀의 촉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니라고. 현실이라고.
나무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처럼 애쉴은 등을 비비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꿈에서 깨어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책망하듯 에르도안이 이마로 애쉴의 것을 콩 찧었다. 자신을 밀쳐내려 하는 두 손에 깍지를 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면서 가만가만 속삭였다.
“당신의 연인이잖아요.”
“아, 흐윽, 아흑.”
애쉴이 숨 가쁜 소리를 내었다. 손을 잡은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건 에르도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얼른 치료받지 않으면 예쁜 얼굴에 흉이 질 거예요. 그래도 괜찮나요?”
“싫어, 제발, 저리 가!”
“역시, 레이디도 싫죠?”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을 멋대로 해석한 에르도안이 예고 없이 확 껴안았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애쉴이 발버둥 치고 등과 팔을 마구 때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힘줄이 단단히 선 팔뚝으로 그녀의 등과 무릎을 감싸 안았다. 분명 에르도안인데 남이 안아 주는 것처럼 불편하고 불쾌했다. 싫어, 싫어! 애쉴은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 개자식이!”
그녀의 발이 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분노에 찬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이 번쩍였다. 무릎과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이 사라지면서 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애쉴은 크게 신음했다.
“아흐윽!”
“쯧, 입부터 막을 걸 그랬군.”
땅을 몇 바퀴 구른 에르도안이 침을 퉤 뱉었다. 명백히 아쉽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지.”
거친 숨소리에 욕설이 섞여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가물가물한 시야 속 기묘한 빛의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은빛의 무언가도 보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비릿한 혈향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애쉴이 가냘프게 그를 불렀다.
“에, 에드 님…….”
아, 마법이 풀렸나 보다. 자신을 알아보는 음성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에드는, 에르도안이 애쉴 쪽으로 뛰어가자 황급히 품속의 단검을 던졌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검을 앞세워 그에게로 내달았다.
캉! 몸을 비틀어 단검을 피한 남자가 칼을 뽑아 들었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검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비아냥거렸다.
“이왕 늦은 거 조금만 더 늦었어도 얼마나 좋아.”
“닥쳐.”
에드는 힘을 살짝 빼 검을 자신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땅을 세게 디디며 균형 잃은 상대방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검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더니 보랏빛 기운으로 둘러싸인 검이 대각선으로 길게 그어졌다. 그것을 간신히 받아낸 에르도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 정말.”
아까도 느꼈지만 이건 정말 괴물 새끼였다. 인정사정없이 휘둘러진 검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에르도안은 검을 막기에만 급급할 뿐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하지 못했다. 단정했던 제복이 흐트러지고 찢겨 나간 곳곳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에드는 서릿발이 몰아칠 것 같은 얼굴로 쉴 새 없이 검을 놀렸다. 막힘없는 물줄기처럼 찌르고, 베고, 쳐올렸다. 허리를 다쳤다는 것도, 애쉴이 보고 있는 앞이라는 것도 잊고 상대방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감히 저 얼굴로 그따위 짓을 하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가 않을 터다.
“에드 님, 잠깐만……!”
늘어가는 에르도안의 상처에 새파랗게 질린 애쉴이 더듬거렸다. 에르도안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저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에드의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공격을 피하는 에르도안의 몸놀림도 조금씩 둔해져 갔다. 이대로 가면, 에르도안은……!
바닥에 엎드린 채 애타게 에드를 불렀다. 그러나 분노에 삼켜진 그는 듣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를 멈출 수 있지? 돌이라도 던져 볼까 싶었지만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풀뿐이었다.
“에드 님! 안 돼요!”
풀을 쥐어뜯던 애쉴의 눈에 팔목에 걸린 것이 보였다. 은색 줄에 붉은 보석이 달린 마정석 팔찌였다. 이럴 때를 위해 준 건 아니라지만 시선을 끌 수는 있지 않을까.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사생결단으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근처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노려보았다. 마른침을 삼킨 후 부디 화려한 마법이기를 바라며 시동어를 읊조렸다.
“플랑…… 드르!”
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내려쳤다.
문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애쉴이 겨냥했던 나무는 형체를 잃고 숯 더미가 되었다. 벼락에서부터 파생된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가 싶더니 바닥에 닿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오직 목표물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처럼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태우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위력에 놀란 애쉴의 동공이 커졌다. 이런 걸 사람에게 썼다가는……. 그녀는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던 본래의 목적도 잊고 멍하니 ‘나무였던 것’을 쳐다보았다. 매캐한 연기와 검은 잿더미만 남아 있을 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무슨 효과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에드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싸우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저절로 몸이 쏠렸다.
그리고 에르도안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윽!”
회심의 일격을 날렸으나 팔을 얕게 벤 것에 그쳤다. 그러나 에드를 주춤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에르도안은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인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를 갈며 그를 쫓아가려던 남자의 발목을 떨리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아…….”
에르도안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애쉴이 넋을 놓고 있었다.
생김새와 목소리만 같을 뿐 눈빛도, 말투도, 풍기는 분위기마저도 모조리 달랐다.
하지만 알맹이야 어쨌든 껍데기는 에르도안이었다. 그가 제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순간 마음속 무언가가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진짜 에르도안이 저를 외면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툭, 눈물이 뺨을 적셨다. 어느샌가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짓는 애쉴을 복잡한 얼굴로 응시하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쓰러져 있는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조금 전의 에르도안처럼 등과 무릎 아래에 손을 대고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기자 늘 그래왔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에르도안이 안아 주는 것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평소 같으면 바로 내려달라 했을 것을, 만신창이인 몸과 정신은 그럴 여유가 되지 못했다. 역하기만 하던 피 냄새조차 이젠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영원히 흘러내릴 것 같던 눈물도 뚝 멈췄다. 그의 발걸음에 힘없이 흔들거리던 애쉴은 저도 모르게 너른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짓밟힌 풀들이 사각거리는 것 너머로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몸이 너무 아파. 피곤해. 졸려…….
애쉴은 힘겹게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힘을 줄 때마다 왈칵왈칵 피를 뱉어내는 허리의 상처를 무시하며 에드가 중얼거렸다. 인상은 미미하게 일그러진 채였다.
“어디에 계셨어요……?”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어딜 간 것이 아니라 그녀가 떠난 것이었으므로. 비록 마법에 걸린 상태긴 했지만.
그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애쉴이 작게 소곤거렸다. 눈은 거의 감겨 있는 수준이었다.
“앞으로는 말하고 가요…… 무서웠어요…….”
“……예. 죄송합니다.”
그의 사죄는 뒤이은 읊조림에 흔적도 없이 삼켜져 버렸다.
“에르도안…….”
“……!”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기겁한 남자는 품속의 여자를 살폈다. 애쉴은 평화로운 얼굴로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에드는 한참 동안 못 박힌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나무들 사이 작은 틈으로 부서져 내린 달빛에 은빛 머리칼이 은은하게 젖어 들었다. 바람결에 사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 * *
현실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을까. 애쉴은 퍽 오랜만에 에르도안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에르도안!”
선선한 가을날이었다.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도도도 뛰어오던 여자를 본 에르도안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의 뒤에는 가장자리의 단풍나무들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호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아지처럼 폭 안겨든 애쉴은 그의 셔츠에 얼굴을 비비며 헤헤 웃었다. 그에게서 나는 머스크 향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커다란 손이, 자신을 꽉 껴안아 주는 단단한 몸이 좋았다.
“그러다 넘어지면 어떡하시려고요.”
에르도안은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속살거렸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훅 쏟아졌다.
“에르도안이 잡아 줄 거잖아요.”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아직 자신이 에르도안의 운명을 바꿨다는 사실을 모를 때의 회귀 시점이었다. 그래서 밝게 웃을 수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는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애쉴이 얼굴을 흔들 때마다 예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도 같이 흔들거렸다. 오늘 그녀는 절반은 땋고, 절반은 그냥 풀어 내린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장난스레 웃으며 땋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남자는, 목을 가다듬은 후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반만 묶은 거예요?”
“아, 이렇게 하는 게 요즘 유행이라고, 엘린이……. 이상한가요?”
“음.”
에르도안은 고민하는 척하며 애쉴을 선착장으로 이끌었다. 먼저 배에 오른 후, 그녀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한 손에 피크닉 바구니를 든 채 다른 손으로 그를 붙잡으며 애쉴이 불안하게 물었다.
“그렇게 이상해요?”
요즘 사교계의 최신 유행이라던데, 엘린이 비장의 기술을 보여 주겠다고 해서 하고 온 건데. 애쉴은 연신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그를 힐끔거리면서.
“아니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냥…….”
“그냥……?”
“이러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노를 잡으려던 에르도안이 기습적으로 입술을 부딪쳐왔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손은 등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풀어 내린 은발을 만지작거리면서.
“……!”
깜짝 놀란 애쉴이 얼굴을 뒤로 뺐다. 그러자 에르도안은 입술을 포갠 채 짓궂게 웃었다. 보드랍고 말랑한 것이 그녀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헤엄 잘 쳐요?”
“아, 아니요.”
“그럼 가만히 있어요. 배 뒤집어버리기 전에.”
못된 사람. 이럴 계획으로 뱃놀이를 하러 가자고……! 당황한 애쉴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덮쳐들었다. 뜨겁고 말캉한 무언가도 밀려들었다.
예고 없이 시작된 키스에 아랫배가 뭉근히 조여들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막혔다. 어떻게든 숨을 쉬려 노력하자 흐응흐응, 귀여운 콧소리가 났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키스할 때마다 그는 항상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분방한 손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하아, 하아.”
그가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애쉴이 할딱거렸다. 에르도안은 반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이 정도는 괜찮네요. 하지만, 이 이상은 묶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다 묶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궁금하면 해 봐도 좋아요. 제가 짐승으로 변하는 걸 보고 싶다면.”
“……안 할래요.”
짐승. 그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애쉴은 귓불을 붉혔다.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라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한 남자가 노를 저었다.
널따란 호수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팔라디움 별장에 있는 호수인지라 아무나 출입할 수 없던 탓이다.
호수 중앙 부근에 도착하자 에르도안은 애쉴이 단풍을 구경하기 편하도록 배를 호수 가장자리에 대었다. 경사가 심한 절벽이라 내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단풍 모양의 그늘이 졌다.
피크닉 바구니를 열자 따끈한 샌드위치와 주스,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나왔다. 에르도안에게 샌드위치를 물려 준 애쉴은 제 입에도 하나를 넣었다. 고소한 버터 향이 감도는 빵과 햄, 치즈, 베이컨 등이 입안을 휘저었다. 다 먹고 또 하나를 집어 드는데, 에르도안이 상체를 기울였다.
“앗, 또……?”
싫은 건 아니지만, 자주 하는 건 좀 부끄러운데.
보는 사람도 없건만 애쉴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닿은 것은 입술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정리하던 그것은 볼일이 끝나자마자 무심하게도 싹 거둬져 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외의 것은 없었다.
뭐야. 이게 정말 끝……?
“하하하.”
살며시 눈을 뜨자 에르도안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얼마나 웃겼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민망함에 애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머리 위의 단풍잎 같았다.
“기대했어요?”
“아, 아니요!”
“뭘 기대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쑥스러운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 한 조각 없는 얼굴로 에르도안이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대 안 했어요? 정말?”
그랬다면 좀 섭섭한데.
에르도안이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순진한 애쉴은 그가 정말 상처받은 것이라 착각했다.
“아, 니요…….”
그녀는 양 검지를 부딪쳐 꼼질 거리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에르도안이 귀여워 죽겠다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보지 못했다.
“그럼?”
“그, 하실 줄, 알았어요…….”
“뭐를?”
“…….”
“말을 해야 알죠, 뭐를 기대했는지.”
“키…….”
“키?”
애쉴의 얼굴은 이제 톡 치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에르도안은 정말 모르겠다고, 반드시 정답을 들어야겠다고 재촉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제의 단어를 작게 토해냈다.
“키스…… 읍!”
문장이 완성되기도 전 에르도안의 입술이 그녀의 것을 삼켰다. 이번에도 애쉴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타액이 뒤섞이고, 감미로운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의 단단한 팔뚝을 붙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타고 있는 조각배가 삐걱거리며 불안하게 흔들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술이 부르트고, 머리 위 해가 서쪽으로 질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탐했다.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 * *
눈을 뜨자 빽빽이 들어찬 나뭇잎들이 반겨 주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도. 살짝이 들어오는 아침 햇살도. 어느새 현실이었다.
‘에르도안…….’
꿈이 남긴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애쉴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꾸욱 눌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가만히 그러고 있자 조금씩, 멍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누워 있는 자리의 거친 질감이 느껴지면서 잔인한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다정했던 에르도안은 없다.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그를 버렸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황태자가 보낸 자객의 손에.
자객이라 하자 불현듯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에르도안과 같은 모습으로, 에르도안과 같은 목소리를 지닌 채, 에르도안답지 않게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던 남자.
‘정말 뭐였을까.’
외형을 바꾸는 마법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로 똑같을 줄은 몰랐다. 가짜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무섭고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때마침 나타난 에드가 아니었다면 기절한 채 끌려갔을 터다.
애쉴은 깊게 숨을 토해냈다. 그제야 온몸이 뜨겁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살이라도 난 걸까. 하긴. 어제 그렇게 뛰었는데 안 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눈을 가린 손을 떼자 어쩐지 불안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눈빛을 한 채 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가볍게 수긍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어나라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신음만 절로 나왔다.
“가만히 계십시오.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는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어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무슨……?”
어제 뭘 했었지?
이맛살을 찡그리며 곰곰이 떠올렸다. 싸움을 막느라 마정석을 쓰고, 한참을 울다 그의 품에 안겨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은데.
잠결에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 눈치를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애쉴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혹시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됐습니다.”
이걸 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상대방은 기억도 못 하는 것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고민했던 저가 바보 같았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남자가 쓰게 웃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 주시면.”
“별거 아니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에드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결에 무슨 실수라도 했나 보다. 그를 볼 면목이 없어진 애쉴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다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셔츠를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저 셔츠는 원래 흰색이었다.
“다, 다치셨…….”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토록 피 냄새가 짙었는데.
수십 명과의 싸움에서도 멀쩡했던 그였기에 은연중에 다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상대방을 압도하던 건 에드 쪽이었는데. 어느 틈에 이렇게나?
“아, 음, 네. 괜찮습니다.”
어제 들은 말을 수도 없이 되새김질하느라 정신이 없어 걸치고만 있던 건데. 저렇게 놀랄 줄 알았더라면 겉옷으로라도 가릴 걸 그랬다.
애쉴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괜찮냐고 더듬거렸고, 에드는 곤란한 얼굴로 괜찮다고,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대답했다. 순 거짓말이었다. 하루아침에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저 붕대로 압박해 출혈만 간신히 막아놨을 뿐이다.
대체 누가 그를 저 정도로 다치게 만들었단 말인가. 에르도안의 모습을 한 자 외에 다른 사람이 더 있던 것일까? 두려움으로 애쉴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혹시 늑대들과 싸우셨나요?”
“늑대, 요?”
예상치 못한 말에 에드가 당황했다.
“네. 저희가 있던 자리에 늑대 두 마리가 있었는데. 못 보셨나요?”
“늑대 두 마리…….”
그래서 도망친 거였나.
에드가 짧게 혀를 찼다. 환각계 마법이었군.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마도구라도 ‘그’에게 받아올 걸 그랬다.
상대방을 상식선에서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그는 애쉴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이 고작 늑대로 비쳤다는 것일까.
“못 보셨군요.”
“네. 이건 다른 자들과 싸우다 생긴 상처입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진실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에 당했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불안해할 테니까. 마도구만 있으면 완벽하게 차단될 일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에게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아아.”
애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벨키에로트겠지. 그럼 그 가짜 에르도안도 그의 짓이었으려나?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무탈하다 싶었는데 다 와서 꼬리가 잡힐 줄은.
‘에드와의 계약은 여기까지인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공식적으로 애쉴리아 팔라디움은 수도의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팔라디움의 이름을 내세워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눈앞이 암담해졌다. 손톱을 뚝뚝 물어뜯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려던 그때.
에드가 입을 열었다.
“저, 어제 그 인간은-”
“그 인간이요?”
“저랑 싸우던 사람 말입니다.”
“아, 네. 그 사람이 왜……?”
“그 얼굴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사랑을 속삭이던가요? 아니면 입에 발린 말로 유혹이라도 하던가요. 뭐가 되었든 진심이 아닙니다. 그는 가짜예요.”
에드는 숨도 쉬지 않고 뇌까렸다. 어찌나 빠르게 말했는지 그만 중간에 혀를 씹을 뻔했다.
애쉴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을 살짝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저도 알고 있기는 한데, 에드 님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 그, 검을 섞어 보니까.”
“아니, 그 전에.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사랑이니, 유혹이니. 자신과 에르도안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알더라도 함부로 뱉을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자칫하면 상대방의 기분만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진작에 그가 가짜 에르도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애쉴은 그 언사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가 에르도안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가뜩이나 에르도안과 느낌도, 분위기도 비슷한 남자가 아니던가.
유명한 고위 귀족도 아닌 하급 귀족의 얼굴을 용병이 알긴 힘들 텐데. 에르도안과 긴밀한 사이인가 하기엔 수십 번을 회귀하는 동안 눈앞의 용병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불협화음을 들은 것처럼 무언가가 거슬렸다.
왜 항상 그녀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인지. 에드는 목울대를 움직여 있지도 않은 침을 억지로 삼켰다. 주먹을 꽉 쥐고,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생각해라, 생각해. 일을 벌였으면 수습을 해.
그는 여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과거를 회상하는 척 먼 곳을 바라보며 긴장한 몸을 파르르 떨자 옆에 내려놓은 검에 손등이 닿았다.
그래, 이거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경. 아가씨와 좋은 연을 맺고 계신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아닙니까? 재작년이었나, 기사단과 합동 작전을 할 때 우연찮게 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세를 진 터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후에 따로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국의 기사단이 뭐가 아쉬워서 용병들에게 손을 벌리겠느냐마는. 무력이나 전술을 알지 못하는 애쉴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에르도안과의 접점을 발견한 여자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혹시, 제 호위를 맡으신 이유도?”
“아니요, 전혀 관련 없습니다.”
단호하게 끊은 에드는 애쉴이 추가로 질문하기 전에 자연스레 주제를 돌렸다.
어제의 에르도안이 가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데 더 말해서 무엇할까. 엊저녁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게 만든 고민 중 가장 큰 두 가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보다 아가씨, 목적지를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아버지와 에드 님만 알고 계세요.”
손으로 입가를 가린 남자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성격상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사실 확인을 받자 번잡스럽던 머릿속이 착 가라앉았다.
어제 애쉴이 도망친 후.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기습해온 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애쉴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겠다는, 습격자의 진짜 목적을 파악한 에드는 구태여 그를 쫓지 않았다. 애쉴을 찾는 게 더욱 급했으니.
기척을 느끼고 따라가면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비명을 듣기 전까지 에드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수십 킬로 내에 있는 사람까지도 느낄 수 있는 그가 겨우 수백 미터 떨어진 여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숲 전체적으로 발동된 방해 마법 때문이었다. 스크롤이나 마도구로는 절대 불가능한 범위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마법진과 재료, 두 가지가 필요했다. 재료야 미리 갖춰 놓으면 그만이라지만 마법진은 사용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위치, 기후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 편이라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황실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난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이 숲에 마법을 깔아놓은 사람은 애쉴이 이곳을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무슨 일 있나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애쉴이 불안하게 물었다. 찰나 갈등하던 남자는, 그러나 이번에는 사실대로 내뱉었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그녀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애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버지야 말씀하셨을 리가 없고, 에드도 마찬가지로…….
그가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마정석을 넘겨줬을 리도 없고, 어제 자신을 구해줬을 리도 없을뿐더러,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준 아버지의 안목부터 의심해야 할 터다. 소중한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은 이제 지쳤다. 그녀는 라인하르트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벨키에로트에게 정보를 흘렸다는 말인가. 대체 누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여자는, 문득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예전에도 느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언제였나 싶어 곰곰이 떠올려 보니-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어 궁 안에 갇혀 있던 시절, 라인하르트에게 몰래 줬던 편지가 벨키에로트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애쉴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확 일으켰다. 덮고 있던 모포가 접히고 이마 위에 얹어져 있던 수건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기겁한 에드가 힘없이 무너지려는 몸을 감싸 안듯 받쳐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알고 있나 봐요.”
“예?”
“제가 하는 걸 모조리 알고 있나 봐요.”
주어 없는 문장이었으나 이해하기에는 한 점의 부족함도 없었다.
에드는 얼굴을 굳혔고, 애쉴은 양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까지 벨키에로트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에게 농락당하는 것은 지난 회귀로 끝난 줄 알았는데. 왜 시간을 직접 돌리지도 않은 이번 시간대에서까지?
“아가씨, 아가씨.”
두려움에 떠는 여자의 등을 두드려 주며 에드가 속삭였다. 그래도 애쉴이 반응하지 않자 그녀의 한쪽 뺨에 손을 얹고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살며시 힘을 주었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가 차분한 녹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모를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진작에 나타났겠죠. 경로를 죄다 꿰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희는, 비 때문에 중간에.”
“경로를 바꾸었죠. 달리 말하면, 설사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중간에 바뀌는 건 모른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리는 전혀 없고요.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닌데.”
“미래…….”
왜일까. 미래라는 단어에 제멋대로 시간을 돌린 것에 분노하던 어머니의 환영이 떠오른 것은.
목이 졸리는 기분에 애쉴이 진저리를 쳤다. 에드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뭘 알고 있다 한들 막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막는다고, 벨키에로트를? 미래를 알고 있을 때도 막지 못했는데 미래가 알 수 없게 꼬여 버린 지금은 대체, 어떻게?
끌려가서 신녀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놓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할까? 그래봤자 듣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든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죽겠지. 지난번처럼. 애쉴은 고개를 떨구며 있는 힘껏 모포를 움켜쥐었다. 속이 뒤틀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투에 에드가 움찔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지, 소름 끼치는지 모르니까.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사실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처럼 힘들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는 말을 아끼는 대신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내던 애쉴은, 그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스러져 내리는 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다는 잔인한 현실을.
“흑.”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어 버린 걸까. 그의 부축에 의지해 앉아 있으려니 서러움에 목이 메어왔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눈물을 참으려다 기어코 모포 위에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왜, 왜…….”
놀란 에드가 더듬거렸다. 무심결에 눈물을 닦아 주려는데 애쉴이 손을 탁, 쳤다.
“만지지 말아요. 되지도 않는 말로 날 위로하려 하지 말아요. 눈치도 볼 필요 없어요.”
“아가씨.”
“어차피 우리 계약은 여기서 끝이잖아요.”
프레디아에 도착하면 다신 볼 일 없는 사이잖아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도착하는 대로 보수는 지급할게요.”
그러니까 나를 신경 쓰지 말아요.
끅끅거리며 말을 맺은 애쉴이 에드를 노려보다시피 쳐다보았다. 눈물을 멈추고자 눈에 힘을 준 것일 뿐이나 에드는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기 젖은 상처투성이 눈동자에 마음이 수만 갈래로 찢어졌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럴 염치도 없었다.
죄책감과 슬픔으로 뒤범벅된 눈이 상대방을 훑었다. 그를 묵묵히 응시하던 애쉴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을 마주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위로하려 했을 뿐인데.
“미안해요. 그쪽에게 화를 낼 게 아니었는데.”
남자의 얼굴이 더욱 음울하게 변해 가는 것을, 애쉴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메스껍고, 몸은 뜨겁고 무거웠다. 정말이지 버티기가 힘들었다.
“몸이 아파서 너무 예민해졌나 봐요. 미안해요.”
아프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애쉴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었다.
깜짝 놀란 에드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차라리 본인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수도 없이 바라왔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쓰러지려는 여자를 뒤에서 껴안듯이 부축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몸이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접촉에 불편해할 기운도 없었다. 애쉴은 눈을 감았다. 팔뚝이나 목 등 맨살이 드러난 곳에 상대방의 체온이 느껴졌다. 부끄럽게도, 참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거칠고 불규칙한 호흡이 마음을 찢었다. 에드는 은빛 머리카락에 제 입술을 묻었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예전에 말씀하셨지요. 마정석을 드리는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뜨거운 숨결에 부딪힌 은발이 살랑거렸다. 에드는 그녀에게 배어 있는 꽃향기가 제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한껏 들이마셨다.
“그 소원, 지금 써도 되겠습니까?”
애쉴이 힘겹게 대답했다.
“말씀, 하세요.”
“호위 의뢰가 끝나면.”
에드는 그녀를 껴안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아가씨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대답이 늦었다. 애쉴은 그를 돌아보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친구 같은 관계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애쉴은 얼굴을 굳혔다. 벨키에로트에게 위협받는 데다 혼자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그와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곁에 있어 주겠다는 것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터다.
하지만…….
“왜, 그런 소원을?”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감정이 진득하니 묻어나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뜩이나 여린 심장이 쿵쿵거렸다.
“엊그제만 해도 의뢰가 끝나는 대로 하실 일이 있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가씨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워하시는 것으로부터.”
“그렇다면, 다시 계약을-”
“하지 않는 게 소원입니다.”
“왜죠? 그게 에드 님께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도 용병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늘 이득만 좇고 살지는 않지요.”
“…….”
“그리고 그편이, 제게는 더 이득이라서.”
그러니까, 대체 뭐가 이득이라는…….
애쉴이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과거의 일 때문에.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제가 마음에 품은 사람이 없었다면 아가씨를 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요.’
“에드 님, 혹시.”
지난번과 같은 문장이 이번에도 목구멍에서 막혔다. 애쉴은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그와의 관계가 이상하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꺼내 보려 노력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에.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은 되었으나 에드는 침착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애쉴은 컥컥거리며 무겁게 말을 뱉었다.
“저를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아시잖아요.”
“그에 대한 답은, ‘아니요.’입니다.”
에드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 향한 마음은 겨우 ‘좋아한다.’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양심이 조금 찔리기는 했으나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
혹여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변명할 거리는 충분했다. 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의심을 아예 털어 버리자 싶어 조금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보수로 저를 호위해 주실 만한 이유가 없어 무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분명 부정의 답을 들었는데 왜 이리도 안심이 되질 않는 건지. 애쉴은 주먹을 꼭 쥐었다.
에드가 작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긴장한 것을 숨기기 위한 거짓 웃음이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냥, 작은 변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원을 들어드릴 수가 없는-”
“아가씨께서는, 왜 황실에 쫓기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제 소원으로 언젠가 저희가 친해진다면,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까지 전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에드는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애쉴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 몰래 준비해 두었던 것에 손을 뻗었다.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고 곁에 사람을 두기에는.”
“제가 아가씨께 해를 끼칠 것 같습니까?”
애쉴의 허벅지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은 남자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가 건넨 것을 본 여자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어머니의 무덤에 바치려 했던 노란 꽃다발이었다. 처음 만드는 것인지, 아이비 덩굴로 매듭지어진 꽃다발은 잘못 건들었다간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엉성하게 묶여 있었다. 그러나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여간해선 찾기 힘든 꽃을 다발로 만들었다는 것에 놀란 애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언제 이만큼이나.”
“얼마나 필요하실지 몰라서, 일단 보이는 대로 꺾었습니다. 부족하실까요?”
“아니요, 충분해요. ……고맙습니다.”
기실 정신이 없어 놓치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챙겨 줄 줄은 몰랐다. 조심스레 꽃다발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향이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싱그러운 꽃향기였다.
묘하게 풀어진 표정을 본 에드가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어디까지나 제 희망 사항일 뿐, 강요가 아닙니다.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에드 님, 저는.”
“지금 바로 대답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의뢰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호위 수준을 넘어서는 도움을 받고 있으려니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그러나 또다시 찾아올 황태자의 수하들 때문에 딱 잘라 버리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 된 애쉴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앞면은 보들보들하고, 뒷면은 까끌거리는 것이 예전 그대로의 감촉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숲속을 돌아다니던 것이 떠올라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참, 하나 더 보여 드릴 것이 있었는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반드시 보여 주고 싶던 것이었기에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예의상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가 자세를 바꿨다. 한 손은 그녀의 등을, 한 손은 그녀의 무릎 아래를 받치고 확 일어났다. 도저히 허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몸짓이었다.
“이젠 묻지도 않는 건가요?”
뻣뻣하게 얼어 있던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계약 관계에서도 이러는데 친구 같은 관계가 되면 얼마나 더 허물없어질지 걱정스러워졌다.
정면을 보며 걷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허락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니까요.”
“뭐라고요?”
“꼭 보여 드리고 싶었어서.”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선을 넘은 태도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여자는, 상대방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화를 내야 할 상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탄성 소리를 내었다.
“아…….”
그들의 앞에는 널따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가장자리에 푸르른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그림 같은 호수였다.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었다.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침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물이 아롱거리며 물결쳤다. 여기까지라면 팔라디움의 호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으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동그랗고 흰 빛의 구체들이었다.
“이 시간에만 볼 수 있거든요. 요정들의 춤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숲에 사는 요정들은 부끄러움이 많아 춤을 추는 시기나 시간 등을 끊임없이 바꾸고는 했다. 일종의 규칙이 있긴 했지만 워낙 복잡하여 가까이 사는 프레디아의 주민들도 모르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지도에서 프레디아가 어딘지도 모르던 사람이 그 규칙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애쉴은 무심결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드는 어쩐지 멍해 보였다. 흡사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는 사람처럼.
“말해 준 사람이 있었거든요. 같이 오자고 약속도 했었는데.”
같이 오자고, 라는 말에 애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과거, 에르도안과 뱃놀이를 하던 그날.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마을 프레디아의 근처에 요정의 호수가 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같이 가자고 했던 것을 떠올려 버린 탓이다.
열심히 연구해서 알아냈던 규칙도 알려주고, 혹시나 멀다고 오기 싫어할까 봐 말도 안 되는 전설까지 급조했었는데.
이젠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그거 아십니까?”
“……네?”
상념에 빠져 있던 여자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에드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표정이나 음성이 흡사 그리움에 사무친 사람 같다는 것을, 수심에 잠겨 있던 애쉴은 알지 못했다.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요정들의 춤을 보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 합니다.”
“네?”
의외의 말에 크게 놀란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는 안타깝게도 순식간에 바뀐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했다.
“물론, 진실일 리는 없겠지요. 하루도 빠짐없이 볼 정도의 정성이면 소망하고 있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은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1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봐야 한다 하더라도 볼 자신이 있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 것이 있어서요. 에드가 중얼거렸다.
“아가씨는 어떠신가요.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나요?”
에드는 ‘지금’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애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할 정신이 없었다.
‘그게 왜, 당신 입에서 나오는 거죠?’
자신이 꾸며냈던 전설을, 에르도안에게만 말해 주었던 거짓말을.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 * *
푸드덕. 황궁 위를 낮게 날아다니던 까마귀 한 마리가 황태자의 궁에 들어섰다.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고 있던 벨키에로트는 딱딱,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만 인간미라고는 없는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서렸다. 그는 곧장 창문을 열고 까마귀의 발에 묶인 것을 풀어내었다.
그의 심복, 클라우드의 편지였다.
‘프레디아라는 마을에 갈 것이라 미리 언질 줬으니 성공했겠지.’
벨키에로트는 곧장 편지를 펼쳤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성공’이란 글자가 아닌 ‘실패’였다. 벽안에 깃들어 있던 흥미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임무를 실패한 부하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황태자가 얼굴을 굳혔다.
“소드마스터?”
혹여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여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보랏빛 검기를 쓰는 소드마스터의 재림’이라는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벨키에로트는 인상을 확 구겼다. 애쉴리아 팔라디움. 대체 뭐 하는 여자이길래 장차 제국을 멸망시킬 거란 남자와 150년 만에 나타난 소드마스터가 동시에 달라붙는단 말인지.
혹여 그 소드마스터가 에르도안은 아닌가 싶어 편지를 끝까지 훑었으나 그런 내용은 없었다. 보랏빛 검기를 쓰는, 검푸른 머리칼에 녹안을 지닌 사내. 그것이 전부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정보에 불쾌해진 벨키에로트가 편지를 확 구겼다. 아무 데서나 검기를 날려댄다면 또 모를까, 머리칼과 눈 색만으로 사람을 수색하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 정도만으로는 소드마스터의 뒤를 캘 수 없었다.
“어떡할까.”
벨키에로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팔라디움 공작에게 직접 묻는 것이었다. 그토록 귀히 여기던 딸의 호위를 아무 인물에게나 맡기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애쉴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까지 들키게 될 터다. 청혼 사건 이후 틀어진 관계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거늘. 여기서 더 틀어져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공작은 대체 어디서 그런 인물을. 그런 인재가 있다면 황궁에 데려왔어야지, 홀랑 딸의 손에 쥐여 주다니.’
충직한 사냥개인 줄 알았는데. 길을 잘못 들였군. 벨키에로트의 입매가 지독하게 비틀렸다.
여하튼, 귀한 인물을 숨긴 팔라디움도 가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들의 처벌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소드마스터를 뚫고 애쉴을 데려올지가 급선무였다.
소드마스터를 건드렸다간 제국의 또 다른 위협 거리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벨키에로트는 명령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신녀는 제국의 멸망 원인으로 에르도안을 지목했고, 애쉴은 자취를 감춰 버린 그를 찾을 수 있는 이정표였다. 소드마스터의 눈을 피해 데려오면 될 일이다.
단순한 호위와 호위 대상자.
그는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명령은 번복하지 않는다. 소드마스터와 최대한 충돌 없이 데려오도록.」
답장을 지닌 까마귀를 날려 보낸 벨키에로트가 자리에 앉았다. 계속해서 정무를 보고자 서류를 집어 들던 도중 흰 종이에 아른아른 떠오르는 한 여인의 얼굴에 픽 웃어 버렸다.
데뷔탕트 때의 소심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덜덜 떨면서도 꼬박꼬박 할 말은 다 하던 여자. 얼마 살지도 못하는 시한부 인생 주제에 왜 이리도 거물급들이 달라붙는 것인지.
그런 여자가 자신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망가뜨리고 매달리게 만들면 얼마나 짜릿할까.
몇 개월 전 식었던 흥미와 욕구가 급격히 샘솟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것 같은 기분에 벨키에로트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젠 애쉴이 에르도안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가 아니더라도 손에 넣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