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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진실과 거짓 (9/22)
  • 8. 진실과 거짓

    에트나에서의 마지막 밤 이후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애쉴은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에드는 그런 그녀를 충실히 따랐다.

    물론, 변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추우실 테니 두르고 계십시오.”

    “고마워요.”

    애쉴은 그의 호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폭우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들은 허허벌판 위의 작은 오두막에 머물고 있었다. 지어진 지 오래되었는지 바닥이 삐걱거렸다. 한쪽 구석에서는 지붕이 새는지 쉴 새 없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애쉴은 그가 건넨 모포를 어깨에 두른 채 몸을 웅크려 앉았다. 오두막 안은 사물의 형태만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지나가던 도적들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을 켜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곁에 앉은 에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피곤하실 텐데, 슬슬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주무세요.”

    “저도 조금 있다 자겠습니다.”

    불침번을 서야 하니 자도 자는 것이 아니겠지만. 이제는 외우다시피 한 저녁 인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애쉴은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야시장에서 산 약초 덕에 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중앙 부분의 붉은 보석을 빙글빙글 돌리자 붉은 보석이 어둠을 빨아들이듯 밝게 빛났다.

    ‘시동어는 ‘플랑드르’입니다.’

    며칠 전, 마정석에 마법을 담아 오겠다며 팔찌를 가지고 외출했던 남자의 첫마디였다.

    왜 하필 ‘플랑드르’란 말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그는 ‘때마침 생각나는 것이 그것뿐이어서’라며 얼버무렸다.

    ‘플랑드르’는 매 회귀의 첫날 에르도안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카페의 이름이었다. 흔하지도 않은 그 단어가 시동어라니. 곤란했으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온 남자에게 고맙다 하진 못할망정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아무 때나 ‘플랑드르’라 말하면 마법이 나가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가씨의 의지가 없다면 발동되지 않을 겁니다.’

    마법을 담아 뒀다고는 해도 겉으로 봤을 때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때가 되면 알 거라며 말해 주지 않아 어떤 마법이 담겼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실험을 해 보지는 않았다. 다시 부탁하면 되니 마음대로 써도 된다 하긴 했지만.

    ‘마법사분과 상당한 친분이 있으신가 보네요.’

    웬만한 마법사라면 마정석을 보는 순간 도와주기는커녕 빼앗으려 들었을 텐데. 그들에게 있어 마정석이란 꿈의 물건과도 같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합리적인 추측에 에드가 쓰게 웃었다.

    ‘너무 친분이 있어 탈이죠.’

    마법사와 친분 있는 것이 탈이 된다니. 황실 마법사들의 위상을 익히 들어왔던 그녀로서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딱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평소 묻지 않은 정보들도 술술 얘기해 주던 남자 또한 입을 꽉 다물었다. 어두워진 표정으로 보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왜 하필 플랑드르인 건지…….’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단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의지가 없으면 발동되지 않는다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어 시도하지는 않았다. 애쉴은 지나가듯 속으로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보석 안쪽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더니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꼭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

    깜짝 놀라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밝게 빛나던 보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의지와 상관없이 시동어를 말하는 순간 무조건 발동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슨 일이시냐는 눈빛을 한 남자가 보였다.

    애쉴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웬 비가 이렇게 오는 건지.”

    “이쯤에 쉼터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 아이쿠. 이미 손님들이 계시는걸?”

    쿵. 별안간 요란 맞은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오두막에 우르르 들어왔다.

    깜짝 놀란 애쉴이 몸을 확 움츠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에드는 검집에 손을 얹은 채 그녀를 등 뒤로 숨겼다.

    대놓고 경계하는 모습에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주었다. 그는 짧은 갈색 머리에 짙은 콧수염을 가진, 몸집이 비대한 사내였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 우리는 근방을 지나가던 비르고 상단이네. 그쪽과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기 위해 온 것일세.”

    상단의 문장을 날렵하게 잡아챈 에드는 물건과 상대방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되던졌다.

    “주인님께서 주무셔야 하니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군.”

    “아, 다른 일행이 있나?”

    그제야 다른 이의 존재를 알아챈 남자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에드는 그들이 애쉴을 볼 수 없도록 몸의 각도를 틀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슨 상관이지.”

    “실례했네.”

    대화를 단절시키는 태도에 상단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애쉴과 에드가 있는 쪽 반대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에드를 힐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쉬이.”

    왜 저렇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걸까.

    에드는 의아해하는 여자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어깨 위에 있던 모포를 머리 위로 끌어올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푹 뒤집어씌웠다.

    “문장에 새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정보 길드와 긴밀한 관계라는 뜻입니다. 아가씨의 신상이 새어 나갈 수도 있으니 저들과 말을 섞어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

    “날이 밝는 대로 여길 뜨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시길.”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한 여자가 벽을 보고 누웠다. 그러나 평소 자던 때보다 이른 시간이었던 데다, 야식을 먹는지 상단의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통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애쉴이 뒤척이는 것을 눈치챈 남자가 사나운 기색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같이 들겠나?”

    자신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단주는 계속 친밀하게 굴었다. 과연 상인다운 모습이었다.

    에드는 필요 없으니 조용히나 해달라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상대방에게 애쉴이 보이지 않도록 모포를 더욱 끌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항상 친절하기만 하던 남자의 반전된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어색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꺼웠다. 흥에 겨운 상인들의 노랫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자정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새어 나오는 밝은 빛에 애쉴이 눈을 떴다.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무슨 일인지 귀를 기울이자 먼 곳에서 울리는 것 같던 목소리들이 선명하게 꽂혀오기 시작했다.

    “여기 자네들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잠깐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는데 내가 왜 그 말을 따라야 하지?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지금 낮추게 생겼나!”

    상단주와 에드의 목소리였다. 잔뜩 성이 난 것이 심하게 다투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반쯤 일으키자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에드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상인들이 보였다. 모포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애쉴은 멍하니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있던 물건이 없어졌단 말일세! 증거도 없이 도둑으로 몬 건 사과하지. 그러니 서로의 오해도 풀 겸, 짐을 보여 주면.”

    “당신들 것은 꼼꼼히 다 확인했나? 바닥에 어디 굴러다니는 건 아니고?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따지고 들기 전에, 당신들끼리 먼저 의심을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에드의 날카로운 지적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상인 중 하나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상단주는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 상단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사람은 없네!”

    “아, 그럼 우린 그런 짓을 했을 거라 보나 보군.”

    에드가 비아냥거렸다. 할 말을 잃은 상단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신세 한탄을 하듯 사정을 피력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까 일은 실수였네. 나도 자네들이 훔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생각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짐을 보여 줬으면 하는 것이고. 이번 순회의 목표라 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물건이라 그러니 양보 좀 해 주시게나. 이렇게 부탁하겠네.”

    에드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에게는 뭐라 하든 상관없었지만 그녀를 도둑으로 몰아간 것은 심히 불쾌했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다 엎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애쉴이 깰 터다.

    어떻게 할까. 그는 입술을 두드리며 할 말을 골랐다. 그때였다.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저러는 것 아닐까요? 훔치지 않았으면 그냥 보여 줬으면 될 일이잖아요. 어차피 숫자도 이쪽이 더 많은데, 강제로 풀어 보게 합시다.”

    “맞아요, 맞아.”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겐가!”

    “……하.”

    휘하 상인들의 속삭임에 상단주가 눈을 부라렸으나 이미 늦었다.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은 남자가 냉정하게 웃었다.

    “강제라……?”

    녹색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계절이 바뀌기라도 한 듯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검 손잡이를 잡지도 않았건만. 한 자루의 검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에 상인들은 저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원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할 수 있으시면 해 보시던가.”

    “미안하네. 방금 건 정말 실언이었네.”

    “무슨 소리입니까, 체이카 님!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쪽은 두 명이고 이쪽은…….”

    겁도 없이 뇌까리던 남자는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말을 멈췄다.

    “어딜 가든 있지. 머릿수만 믿고 설쳐대는 것들이.”

    “…….”

    “정작 본인들은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말싸움하던 상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더니 분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어딘지 모르게 엉거주춤한 것이 검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의 자세는 아닌지라, 에드는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비웃었다.

    “그래 가지고는 옷깃 하나 못 건들겠는데?”

    “이…… 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인이 그를 향해 달려들려던 찰나.

    “이 미친 자식이!”

    “안 돼요!”

    두 남녀의 고함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상단주, 체이카는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려던 상인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애쉴은 발도하려던 남자의 팔을 꼭 붙들었다. 기실 그녀의 눈에는 에드가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순간적으로 느낀 익숙한 무언가에 반사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아가씨? 언제 일어나셨…….”

    언제 그랬냐는 듯 흉흉한 기운을 지워 버린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첫 번째는 그녀와 붙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해서였고, 두 번째는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찬 것을 보아서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떨어지는 여자를 보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가까워졌는데.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애쉴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방을 가득 채운 살기에 가슴이 선득해진 것도 있었지만 정확히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대로 두었다면 위험해지는 건 에드였는데. 왜 상인이 아닌 그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여, 여자다!”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바닥에서 들려오는 외마디소리에 툭, 끊겼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체이카의 밑에 깔린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툭 불거진 눈으로 애쉴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젠장! 이제 곧 도적들이 올 거야! 그 전에 빨리 저 여자를…… 읍!”

    “계속해서 사과하게 되는군. 미안하네. 미신에 빠져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빠져 있을 줄은.”

    미쳐 날뛰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은 체이카가 부끄럽다는 듯 깊게 숨을 뱉었다. 주인을 폄하하는 내용에 화가 난 에드가 따지려던 그때. 애쉴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미신이라 하심은?”

    “여행자의 쉼터에서 여자를 마주치면 도적과 조우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상단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듣겠군. 에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사방에 불을 밝히고 있는 마법 도구에 턱짓했다.

    “도적과 조우한다면 저것 때문일 것 같은데.”

    “그런 부담을 감수하고 찾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라 말일세. 아가씨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 아가씨와 일행의 짐을 확인하고 싶네. 양해해 줄 수 있겠나?”

    체이카는 느꼈다. 여자가 용병의 팔을 잡는 순간 팽팽하던 주변 공기가 느슨해지던 것을. 저 괴물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복종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설득하고자 하는 주체를 바꿨다.

    맞은편의 여자는 귀티가 흐르긴 했으나 귀족 같지는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 평범한 여행복인 데다 자연스럽게 높임말까지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귀족이 용병 하나만 대동하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어느 부유한 상인의 딸이 유람을 다니나 보다 싶어 자연스레 하대가 나왔다.

    에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으나 신분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꾹 참았다. 애쉴은 개의치 않고 대꾸했다.

    “다른 분들의 것은 확인하셨는지요?”

    “당연하지. 전부 다 확인했네. 몇 번이나 말이야. 어디에도 없었어서 하는 말일세.”

    “그렇군요. 듣자 하니, 저희를 도둑으로 몰아가셨다던데. 저희 것을 확인하셨을 때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에드의 반응으로 보아 굉장히 무례한 언행들이 오고 갔을 터다. 말로 하는 사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거기에 짐을 보여 줘야 한다는 불쾌함까지 더해지면서 가시 돋친 말이 나갔다.

    체이카가 허, 웃었다. 순진하게 생겨서 쉬울 줄 알았는데.

    “그에 따른 보상은 내 충분히 하지. 이제까지의 실언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상인이 줄 보상이라 봤자 재물과 관련될 것이 뻔했다. 이미 충분한 부를 가지고 있어 필요 없는 것이긴 했지만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받지 않겠다고 해도 평화롭게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그의 제안을 수락해야 할 터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알겠다고 수긍하려던 찰나. 뒤에서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에 그녀는 아차 싶어 말을 꺼냈다.

    “그러시다는데, 에드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실수였다. 협상하기 전에 의견부터 물어보았어야 했는데. 조금 전 같은 압박감은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져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발도하려는 그에게서 누군가를 느낀 탓이다.

    “저도……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하는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몸짓이나 어투로 보아 원점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후퇴한 것 같았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에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역시 애쉴이 있는 곳에서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곧바로 주먹이 나가지 않은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야 어떻건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는 남녀는 제각기 짐을 풀었다. 당연하게도 상단의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옷가지들 외에 지도나 약초, 책 등 여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전부였다. 단 하나, 애쉴이 가지고 있던 작고 허름한 가죽 주머니를 제외하고서는.

    체이카는 그 주머니를 끌러 보라 요청했다. 애쉴은 완곡히,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게 들어 있어서였다.

    잃어버린 물건이 주머니보다는 컸기에 상단주는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몸수색을 할 수 있게 해 달라 청하려다가,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눈을 부라리는 남자 때문에 그들의 물건을 직접 확인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마저도 애쉴의 물건은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야 한다는 조항이 붙었다.

    “하아…….”

    애쉴은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바닥에 펼쳐져 있는 물건들을 보았다. 그것들을 주의 깊게 훑고 있는 사람들도 흘겨보았다. 한번 봤으면 되었지 뭘 자꾸 보는 건지.

    그와는 정반대로, 에드는 상인들이 어찌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만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불을 밝히는 마법 도구 덕에 주홍빛으로 빛나는 은발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애쉴을 불렀다.

    “저, 아가씨.”

    “네?”

    오두막에 한 명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움찔하며 얼굴을 틀었다. 에드는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그러나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낮고도 강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왜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보여 주기로 한 거냐며 뭐라 할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죄송하다니.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남자를 향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란을 피워 주무시고 계시던 걸 깨운 것과 놀라게 해 드린 것 전부 다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것까진.”

    “아니요. 정말 죄송합니다.”

    에드는 연신 그녀를 살폈다. 분위기는 물론이요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여기저기 금이 간 유리 다리를 걷는 듯한 느낌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후우.’

    애쉴은 남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자다 깬 탓에 눈은 뻑뻑했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자신의 물건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검열당하는 것도 기분 나쁘던 차에 호위마저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가만두었다간 죄송하다 하는 것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여느 때와 달리 길게,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죄송해하실 것 없습니다. 소란이란 게 혼자 피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하셨겠지요. 놀랐던 것도 잠이 덜 깨서 그런 것이라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애쉴은 조금 전 그에게서 ‘누군가’를 느낀 까닭을 최근 꾼 꿈 때문이라 여겼다. 평상시 버릇이나 안길 때의 감촉 등이 그와 비슷했기에. 그래서 방금도 잠결에 그렇게 보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남아 있던 여운을 억지로 털어내었다.

    “하, 하지만.”

    “에드 님.”

    선을 긋는 듯한 어투에 당황한 남자의 말허리를 애쉴이 잡아챘다.

    “괜찮습니다. 저를 위해 그러셨던 것을 알고 있으니, 그만 하세요.”

    순간 에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미미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를 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알지 못했다. 애쉴은 그에게서 눈을 돌려 상인들을 쳐다보았다. 분실물에 대한 절실함은 이해하지만, 물건 하나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닌가 싶어 한마디 하려던 순간.

    “찾았다!”

    흥분으로 점철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오두막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쏠렸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사내가 무언가를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에드와 상단주가 다투던 때 남몰래 몸을 떨던 상인이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 선두에는 체이카가 있었다. 작은 거북이 모양의 조각상을 건네받은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두 남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애쉴이 에드를 보았다. 하, 그는 자조 섞인 숨을 토해냈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 발견된 장소가, 바로 그의 옷가지 안에서였기에.

    ‘사실대로 이야기한들 나를 믿어줄까?’

    옆에서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에드는 감히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저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두려워서.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암담했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건만. 작게 한숨 쉰 애쉴은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아까 저희가 직접 확인시켜 드렸을 땐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일부러 물건이 있는 곳만 피해서 보여 줬나 보지!”

    체이카는 화가 난 것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문제의 옷가지들을 가리켰다.

    “정말 저곳에 숨겨 놓았었다면, 애초에 여러분들에게 확인해 보시라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너무 쉽게 발각되는 곳이라 생각되지는 않으신가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희 쪽에서 훔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지막한 음성에 오두막이 떨릴 정도로 웃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믿고 싶은 건 알겠지만 적당히 해야지.’, ‘너무 순진해 빠진 거 아니야?’, ‘증거가 이리 있는데도 저런 말이 나와?’ 등 멸시하는 언행이 쏟아졌으나 애쉴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에드가 정말 재물에 눈이 먼 사내였다면 자신에게 마정석을 넘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지분을 주장하며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려 했을 터다.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보물도 포기한 사람이 겨우 저까짓 것에 욕심을 부릴 리 없었다. 바로 옆에 돈이 넘치는 물주도 있거늘, 뭐가 아쉬워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말인가.

    ‘믿어주는…… 건가?’

    에드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자 그렇지 않아도 새하얗던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물건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신뢰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지 오래였다.

    눈길을 의식한 애쉴이 몸을 살짝 틀어 그를 보았다. 에드는 생전 처음 말을 해 보는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저, 그게.”

    “에드 님이 하지 않으신 것, 맞지요?”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고서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에드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럼 됐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애쉴은 볼일을 다 마쳤다는 듯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에드는 순간적으로 오두막에 봄바람이 불어든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으려 입술을 깨물자 그 반동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동에 겨운 몸짓이었다.

    “이봐, 아가씨. 당신들이 정말 훔치지 않았다면, 이게 왜 저기서 나왔다 생각하나?”

    “바닥에 굴러다니던 것이 섞여 들어갔나 보지요.”

    아니면 훔친 사람이 몰래 섞어 놓았다든지.

    사나운 음성이었으나 애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물건을 찾으려 상인들이 바닥을 쓸다시피 했을 때 나오지 않았으니 후자가 더 높은 확률이겠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몸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간 머릿수가 부족한 이쪽이 불리하다 생각했기에.

    “네가 말해 봐라. 찾았을 때 상태가 어땠는지.”

    오만상을 찌푸린 체이카는 물건을 최초로 발견한 상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당당하게 주절거렸다.

    “옷으로 꽁꽁 싸매져 있었습니다!”

    “이 친구 말대로라면 아가씨의 가정은 틀린 것이 되겠군. 손도 없는 것이 스스로 옷을 묶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저분께서 찾아내신 것을, 목격하신 분이 있으실까요?”

    “……뭐?”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럿이서 보았을 땐 분명 없었는데. 설마 그러셨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바닥에 있던 것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몰래 손을 써 두셨을 수도 있고…….”

    애쉴의 의미심장한 시선에 상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를 보지 못한 체이카가 으르렁거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데, 저희도 여러분들을 마냥 믿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유쾌하진 않았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숨길만 한 공간이 없기도 했고. 샅샅이 뒤졌을 땐 없던 것이 지금에야 나왔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상단주는 뒤쪽의 상인들에게 물건을 찾았을 때의 순간을 본 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얼핏 본 것 같다.’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읊는 자만 있을 뿐, 자신 있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복잡해질 것 같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모양새였다.

    “없으신 것 같군요.”

    “끄응…….”

    애쉴의 일침에 그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상대방의 주장이 억지도 아니거니와 무시하고 강제로 끌고 가기에는 용병이 뿜어 대었던 살기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도 좋지 않은 소리 좀 했다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쪽수로 밀어붙이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손해도 막심할 터다. 밑지는 장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증인이 있든 없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든 없든 물건이 그들의 짐 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므로.

    그는 짜증 섞인 숨을 길게 토해냈다.

    “좋네. 물건을 찾긴 했으니, 누가 훔쳤는지를 판별하는 건 일단 보류하도록 함세. 하지만, 그 전에. 이쪽에서 한발 물러난 만큼 아가씨 쪽에서도 양보해 주어야 할 것일세.”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격하던 말투가 돌아왔다. 애쉴은 묵묵히 뒷말을 기다렸다.

    “아가씨의 짐 검사. 그리고 두 사람의 몸수색. 이 두 가지를 수락해 준다면 나도 물건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겠네.”

    “잃어버리신 물건은 하나라 하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이 좋아 양보지 실제로는 강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용이나 어투로 보아 거절은 무력으로 돌아올 터다.

    체이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우리 쪽에서 확인하지 못한 다른 물건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듣자 하니 대놓고 도둑 취급이다. 이래서였을까. 에드가 그렇게 화냈던 것은.

    애쉴은 먼발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서,

    “……그러세요.”

    하며 수긍하고야 말았다.

    “잠시만요.”

    기겁한 에드가 끼어들려던 찰나.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잠시만 참으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불쾌함을 애써 외면하며 다가오는 상인들을 보던 와중이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뒤늦게 입을 열었다.

    “몸수색은 짐을 다 확인하신 후 하는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것이 또다시 섞여들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한 마디로 너희를 믿지 못하겠으니 같이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순서야 어찌 되었든 결과는 같았기에 상단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편이 뒷말도 없을 터이니.

    ‘제길.’

    애쉴의 옷가지가 파헤쳐지고, 항상 보던 책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에드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욕을 중얼거렸다.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지킴 받기나 하고. 좋은 것들만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호위라 칭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물건에서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상인이 허름한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든 순간. 여태까지 무심하기만 하던 여자가 움찔했다.

    “잠깐만, 그건.”

    애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상인이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을 쏟아내는 것이 빨랐다. 팅, 두 개의 쪽지와 함께 떨어진 반지가 바닥에 튕기며 맑은소리를 내었다.

    ‘왜 저게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담은 애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건 반지를 본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허.”

    옷가지들이 스치던 소리, 물건이 집어 던져지던 소리, 그리고 귀찮게 왜 이런 짓을 하냐며 투덜거리던 상인들의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모두의 시선은 주머니에서 나온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지 옆에는 두 개의 쪽지가 떨어져 있었다. 하나는 여러 번 접었다 핀 것처럼 너덜너덜했으나 다른 하나는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듯 구김이 없었다. 하지만 오두막 안의 그 누구도 쪽지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웨이센의 귀족들은 반지로 가문을 증명했다. 그중 금색은 공작만이 사용 가능한 색상이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바닥의 반지는, 금색이었다.

    끼익.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듣기 괴로운 소리를 냈다.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가 나는 곳에 눈길을 주었다. 크게 충격받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채 일곱 발자국도 되지 않는 거리이건만.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 것인지.

    애쉴은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엄지손가락에 껴도 헐렁할 것 같은 것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어 살폈다.

    화려한 꽁지깃을 우아하게 펼친 공작새. 팔라디움의 문장이 그곳에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잘못 보았나 싶어 여러 번 눈을 깜빡였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도, 흡사 공기를 들고 있는 듯한 무게감도 그대로였다.

    크기로 보아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챙기지도 않았다. 저택을 떠나던 날 밤 아버지의 책상에 몰래 올려놓았거늘. 이게 왜 여기 있다는 말인가.

    현시점에서 팔라디움을 상징하는 반지의 소유자는 세 사람뿐이었다. 팔라디움 공작, 라인하르트 팔라디움, 그리고 애쉴 자신.

    가주인 아버지는 반지를 빼는 법이 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도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라버니.’

    라인하르트의 소유일 터다.

    애쉴은 지그시 입술을 물어뜯었다.

    팔라디움을 떠나겠다는 것을 그에게 알린 적은 없었다. 싸운 이후로 대화한 적이 없던 탓이다.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라인하르트는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침 일찍 출궁했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퇴궁을 하곤 했다. 불편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싸우기 전만 하더라도 매일 찾아와 눈도장을 찍던 그는, 싸우고 난 다음 날부터 직접 찾아오는 대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베이커리의 한정 메뉴를 시녀를 시켜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애쉴은 손도 대지 않고 모조리 되돌려 보냈다. 저택을 떠나던 날 오후까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드렸으니까.

    그런데, 그의 반지가 여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셨던 건가.’

    팔라디움을 떠나던 날 밤, 오라버니의 방 창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나.

    ‘알면서도, 내 앞에 나타나질 않으셨다고?’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뜨거운 것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의 입궁 시간이 왜 그렇게 빨랐는지. 퇴궁 시간이 왜 그렇게 늦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반지를 넘겼는지.

    ‘언제 어디서든 넌 팔라디움의 일원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귓가에 뱅뱅 맴돌았다.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라인하르트…… 오라버니…….’

    애쉴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눈을 꼭 감자 손바닥 위의 반지에 물방울들이 아롱져 맺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눈물로 젖어 들어가던 그때, 바로 앞에 그림자가 졌다.

    “팔라디움 공녀.”

    “……?”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애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묘하게 흥분한 것 같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맞나 보군요.”

    체이카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팔라디움의 영애, 애쉴리아 팔라디움에 대한 소문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20년 만에 찾은 딸이라는 것부터 몇 달째 저택에서 아프다는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얼굴에 뭐가 나서 나오지를 못한다더라’ 혹은,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고,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자작가 영식에게 차여서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만 있다더라’와 같은 악의적인 소문들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으나 실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가문의 문장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하다니. 넝쿨째 들어온 행운이었다.

    행색을 보아 신분을 숨긴 채 움직이고 있던 것 같은데. 어디를 가는 것일까.

    누구보다 빠른 정보는 힘이요, 부가 된다. 체이카는 끊임없이 추측하는 것과 동시에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번 정보는 얼마의 가치가 될지를 셈해 가면서.

    그의 표정을 본 애쉴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상인들의 앞에서 울지 말았어야 했다. 하다못해 ‘팔라디움 공녀’라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어야 했다.

    엎질러진 물을 수습하고자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아직 라인하르트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에.

    “…….”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애쉴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또 한 명의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영락없이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에드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쪽지들을 집어 든 그는 반지를 들고 있는 쪽이 아닌 반대쪽 손에 부드러이 쥐여 주며 말했다.

    “찾…… 아요?”

    뭐를 찾았다는 말이지? 평소보다 사고가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쉴은 기계적으로 그의 말을 따라 했고, 에드는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예.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장난삼아 소공작님과 반지를 맞바꾸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도통 모르겠다고요. 찾자마자 눈물을 흘리실 정도라니, 마음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아.”

    그제야 그가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이제 와서 팔라디움의 공녀라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반지를 보며 운 이유는 숨길 수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건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다.

    “네. 오라버니께 뭐라 말씀드려야 될지 몰라 걱정이 많았는데…… 찾아서 다행이네요.”

    은근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얼굴을 닦은 애쉴은 눈앞의 덩치 큰 남자를 쏘아보았다. 두 눈과 입가에 남아 있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져 있었다.

    “공녀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내려다볼 건가요?”

    신분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혐오하는 쪽이었으나 현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기선제압 하여 그의 입을 막아야만 했으니까.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여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싸늘한 눈초리였다. 체이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입가에 띤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짐 검사는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몸을 수색할 차례인가요?”

    “어이쿠, 어찌 감히 공녀님과 호위분의 몸을 수색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에게 믿음을 주려면 그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공녀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희를 믿겠다는 말씀이시로군요.”

    “당연한 말씀이지요.”

    공녀의 몸에 잘못 손이라도 댔다간 목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거기다 누가 훔쳤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공작가와 싸워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향기로운 돈 냄새를 풍기는 사건이 코앞에 펼쳐졌으니까.

    그의 노골적인 굽신거림에 애쉴이 비아냥거렸다.

    “그렇다면 짐을 멋대로 뒤진 것에 대해 보상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공녀님의 눈에 차지는 않겠지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이라. 공녀가 아니었으면 주지도 않았겠군.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벨키에로트와 마주했을 때를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았다. 애쉴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첫째, 저희를 도둑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합니다. 둘째, 이곳에서 저 애쉴리아 팔라디움을 만났다는 것을 무덤까지 가져가셨으면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전부 다.”

    “진심 어린 사과라 하심은?”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아, 물질적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차고 넘치니까요.”

    그녀는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콧수염을 비비적거렸다.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도록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만…….”

    “다만?”

    “두 번째로 요구하신 것은, 조금 들어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지금 저를 상대로 흥정을 하시려는 겁니까?”

    “흥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체이카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저도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워낙 보고 있는 눈들이 많은지라, 완벽하게 들어드리기는 힘들다는 뜻입니다.”

    거짓말. 상단에서 상단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상인들은 죽는시늉까지도 할 것이었다. 입을 막고 싶으면 그만한 대가를 내놓으라는 것이겠지. 이번 한 번이 아니라 팔라디움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주기적으로.

    예상하던 바였으나 현실이 되자 머리가 아파왔다. 얼마를 원하는지는 몰라도 넉넉하리라 여겼던 자금에 구멍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둑으로 몰아 미안하니 입을 다물어주겠다.’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역시 너무 긍정적인 생각이었나 보다.

    질질 끌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렇게 생각한 애쉴이 입을 떼려던 순간.

    “도적이다!”

    “아아악!”

    별안간,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진짜 도적들의 습격이었다.

    * * *

    어둡기만 하던 창밖이 환해진다 싶더니 이내 꺼져 들었다. 바깥의 상단 인원이 횃불을 켜 들었으나 어둠 속을 대낮처럼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금세 꺼 버린 탓이다.

    쾅!

    요란한 우렛소리 너머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와 쇠붙이가 부딪히며 꽝꽝거리는 소리, 누군가의 고함, 비명이 뒤섞였다. 오두막 안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렸다.

    “이런 젠장!”

    뒤늦게 불을 밝히고 있던 도구에 손을 대려는 상인을 체이카가 막았다. 이미 들켜 버린 이상 켜 두고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물건을 찾은 직후 바로 꺼 버렸어야 했는데.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낭패였다.

    “여, 역시, 저 여자 때문에, 억!”

    덜덜 떨며 미신을 읊으려던 상인이 픽 쓰러졌다. 근처의 동료가 명치를 후려쳐 기절시킨 탓이다. 체이카는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검을 차고 있던 남자들을 손가락질했다.

    “일라스, 비요르! 가서 도와라. 캐시, 셰이드! 너희는-”

    “으아악!”

    “나가서 창 쪽으로 가! 절대로 여기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창밖 바로 밑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날이 살갗을 꿰뚫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지 족히 수십 명은 되는 듯한 발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애쉴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창가에서 멀어지고자 뒷걸음질 쳤다. 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진동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소란스러운 상황을 보지 못하도록 제 가슴께에 머리를 누르고,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주었다. 아기를 달래듯 괜찮다고 속삭이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오두막 안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꽤 많은 숫자가 싸우러 나갔으나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기울어진 전세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애쉴은 그때까지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에 에르도안에게 끌려갈 때 보았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 버린 탓이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열심히 다독이고 있었다.

    “그쪽은 왜…… 싸우지 않는 거지?”

    체이카가 고통스럽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물건을 다 빼앗기게 생겼다는 절망과 더불어 곧 닥칠 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드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공녀님과 함께 죽기라도 할 생각인가?”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 말에 에드가 반응했다. 흉흉하게 번쩍이는 눈이 흡사 우리 속의 맹수를 보는 것 같았다. 공녀를 껴안고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달려들었을 터다. 그렇게 생각한 체이카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짐승을 어르듯 신중히 단어를 골라 말했다.

    “그렇다면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곧 이리로 들이닥칠 텐데.”

    “나는 아가씨만 지키면 돼.”

    상인들이야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과 동시에 도적들로부터 공녀를 지켜낼 자신이 있다는 말에 체이카가 인상을 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기사의 자만심인가, 아니면 정말 그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그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설마 공녀가 용병 하나와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는 에드를 용병처럼 꾸민 기사로 보고 있었다.

    “공녀님을 지키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싸우는 것이…….”

    “이봐.”

    에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난 네 밑이 아니니까.”

    애쉴을 도둑으로 몰고, 그녀의 물건을 뒤졌으며, 공작가의 영애라는 것을 알아내 협박하는 것에 피가 거꾸로 솟던 차였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고 있건만. 애당초 도적의 출현도 상단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해도 모자를 참에 입맛대로 휘두르려 하다니. 에드는 잠시나마 그를 바닥에 짓쳐 누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뜻을 반영한 녹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을.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자가 공녀뿐이라는 걸 깨달은 체이카는 이번에는 애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짜’ 상급자에게 하는 듯한 말투였다.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도와주십시오.”

    “……?”

    무엇을 도와달란 말인가. 멍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던 애쉴은, 귓가에 들려오는 찢어질 듯한 비명에 몸을 움츠렸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그녀는 에드가 허락 없이 자신을 껴안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바깥의 도적들을 상대하는 데 공녀님의 기사께서도 힘을 보태시도록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공녀님의 신분에 대해 입을 닫는 것은 물론이요, 저희 상단에서 가능한 모든 범위의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죽느냐 아니냐가 걸린 문제였기에 서슴없이 제안할 수 있었다. 체이카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정중하면서도 비굴하지는 않은 몸짓이었다.

    “아…….”

    그의 간절한 부탁에 애쉴은 조금 당황했다. 기사라니.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기사라면 응당 모시는 레이디의 말을 따를 것이겠으나 에드는 용병이었다. 돈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호위’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단어란 자고로 얼마든지 다른 범위로 해석될 수 있는 법이다.

    위협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미리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닥쳐오기 직전에야 피하는 것까지 전부 다 ‘호위’였다. 어찌 되었든 고용인을 보호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에드가 체이카에게 한 말로 미루어보아 그의 기준은 후자인 듯싶었다. 자신이 도적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이상 그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애쉴은 생각했다.

    그러니 그를 잘 타일러 설득해야 할 터인데…….

    방금 똑똑히 듣지 않았나. ‘네 밑이 아니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돈을 주고 고용하긴 했지만 그녀와 에드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에드는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애쉴은 그랬다. 그래서 말을 놓아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받았음에도 꿋꿋이 존댓말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도적들을 상대하기 싫은 듯한데. 자신이 말한다고 해서 들어줄까. 혹여나 들어준다고는 해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닐까.

    체이카가 약속한 보상들은 사실 애쉴과 에드,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상단이 전멸하면 공녀가 여기 있는지를 아는 자들도 사라지는 것이니.

    하지만, 저런 부탁을 받았는데 모른 척하는 것도…….

    ‘누군가의 죽음은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애쉴은 에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그와 딱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점철된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 속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은 에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을 해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애쉴이 머뭇거렸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이대로는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그에게 싸워 달라 청할 수가 없었다. 꼭 사지로 몰아넣는 것만 같아서.

    에드는 망설이는 여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한 손을 조심스레 잡아 들어 손등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기사들이나 할 법한 몸짓에 당황한 애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는 당신의 검이자, 방패이자, 신념을 지키는 도구이리니.”

    “…….”

    “제 심장이 멎고, 바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원토록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경애를 담아 손등에 키스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애쉴은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방금 그가 한 것은 기사들이 마음을 바친 상대에게 하는 행동이자 에르도안에게 매번 받았던 맹세였다. 그걸 왜 이 사람이 하고 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흔히 볼 수 없는 표정에 에드가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다.

    아, 어쩜 놀라는 것조차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그러니 명령을 내려 주세요, 아가씨.”

    거대한 야생 늑대가 길들여 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체이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애쉴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도와…… 주셨으면 해요, 상단 분들을……. 하지만, 내키지 않으신다면…….”

    “아가씨의 말씀은 언제나 기쁘게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은 남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른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애쉴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혹여 다치시거나 위험해지신다면.”

    “위험? 제가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에드가 경쾌하게 웃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흔들리는 창문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발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얼어붙어 있는 상단주에게 다가갔다. 그는 애쉴이 들을 수 없도록 최대한으로 밀착 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없는 사이,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

    “죽여 버린다. 그러니 똑바로 처신하는 게 좋을 거야.”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애쉴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과 동시에 혹여 도적이 오두막 안에 들어오면 몸으로라도 막으라는 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한 말이었으나 체이카는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목줄이 풀린 맹수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걱정 말고 다녀오시게.”

    에드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체이카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뒤에서 의아해하는 애쉴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긋 미소 지어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 마리의 새와도 같은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 *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빗소리 사이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날카롭게 벼려진 쇠붙이가 춤을 출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꺼져 들어간다. 바닥에 고인 물구덩이들이 첨벙거릴 때마다 심장이 선득하게 조여온다. 사방은 피 냄새로 가득하다.

    다음에 쓰러지는 건 나일까. 오늘 밤을 넘길 수는 있을까. 이제 갓 성인이 된 남자, 캐시는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간신히 추슬렀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살고 싶어.’

    빗물과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그는 소리 없이 되뇌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다. 큰돈을 벌 수 있다길래 지원한 것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보겠다며 상대하던 자의 몸뚱이에 들고 있던 것을 찔러 넣었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이 검을 타고 전해져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찰나의 방심이었으나 전장에서는 영원의 독과도 같았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이의 날붙이가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으나 검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땡그랑.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에서 손잡이가 미끄러졌다. 두 번의 요행은 없을 것이다.

    ‘이제 끝인가.’

    칼날이 다가오는 느낌과 함께 거친 파공음이 공기를 찢었다. 이번 생에서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이리라. 곧 닥쳐올 고통을 상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봐도 고통은 오지 않았다. 캐시는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에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 있던 자리에 낯익은 자가 서 있었다. 오두막 안에서 보았던, 기묘한 녹안을 가진 남자. 콧잔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가면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발밑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도적이 양 손목과 발목에 피를 철철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검, 안 잡고 뭐 하나?”

    눈썹까지 내려온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녹안의 남자가 물었다. 심기가 불편한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캐시가 바닥에 나뒹굴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도적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챙-

    원인을 알 수 없는 보라색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칼날이 가파르게 흔들거렸다. 얼마나 힘이 강했는지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캐시는 당황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기 짝이 없는 녹색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못하게만 해. 죽이지는 말고.”

    “……예?”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주어 없이 말을 내뱉은 남자가 등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검을 막 내려치려던 도적의 손과 발에서 피가 솟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줄을 자른 것이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캐시는 입을 떡 벌렸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검의 궤적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위험하게 번쩍이던 보랏빛 실선, 단 하나였다.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바닥에 점차 쌓여가는 도적들의 모습에 캐시는 남자의 뒤태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스친 생각에 ‘그럴 리가 있나.’ 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주절거렸다.

    “설마…… 소드 마…….”

    “거기까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날이 목덜미에 닿았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 틈에.

    혹한보다 더 시린 말투로 남자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 이상 입 밖으로 냈다간.”

    차가운 날붙이가 외피를 꾹 눌렀다.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그를 훑었다. 맹수의 앞에 맨몸으로 선 듯 묵직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조금 전에 맡았던 죽음의 향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캐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절, 절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미심쩍다는 듯 캐시를 전체적으로 훑던 사내는,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검을 거뒀다. 그러고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과 함께 도적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픽픽 쓰러졌다. 한꺼번에 몇 명이 달려들어도 결과는 같았다. 번개와도 같은 검의 궤적을 쫓을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수십 명을 홀로 상대하고도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숨소리 한 번 거칠어지지 않았다. 저것이 정녕 인간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도적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캐시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훔쳐보았다. 도적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던 탓에 여유가 생긴 다른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몸놀림을 본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았다.’

    여기서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오더라도 그가 곁에 있는 이상 질 것 같지 않았다. 질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남자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날 밤, 그곳의 모든 이들은 오두막에서 분노하던 그를 말려 준 여자에게 수도 없이 감사의 뜻을 표해야만 했다.

    * * *

    “마, 말도 안 돼…….”

    채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에드가 나간 것이. 점차 잠잠해지는 소리에 희망 반, 절망 반으로 마음을 졸이던 체이카는 푹 젖은 사내들이 차례차례 들어오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피를 철철 흘리며 동료에게 업혀 오는 이도 있었고, 팔 혹은 다리가 사라진 채 끙끙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마냥 어둡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뚜벅뚜벅.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새하얗게 질린 채 얼어 있는 여자의 앞에 우뚝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인들과는 달리 그는 산책이라도 한 듯 평화롭기만 했다.

    “다녀왔습니다.”

    “몸은……?”

    “멀쩡합니다. 보시다시피.”

    피가 튄 건 아니었지만. 혹여 피 냄새라도 묻어 왔을까 싶어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말했다.

    거리낌 없는 대답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애쉴은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가기 싫어하는 사람을 보낸 게 자신이었기에 다치기라도 했으면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해 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걱정해 주는 것 같은 태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에드는 잘게 웃었다. 빗물로 몸이 차게 식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별일 없으셨는지요?”

    “네. 아무 일도 없었-”

    “고맙네. 정말 고맙네!”

    가느다랗게 이어지던 말이 확 끊겼다.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을 에드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쏘아보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체이카는 환히 웃으며 제 할 말을 했다. 그 또한 비에 젖어 있는 것이 애쉴과 에드가 대화하는 사이 밖에 나가 상황을 확인하고 온 것 같았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네. 다들 그쪽의 활약이 대단했다며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 요구한 것들 외에 다른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주겠네.”

    “감사의 인사는 아가씨께 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군.”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니까. 애쉴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표정과 말투로 에드가 읊조렸다.

    “아, 그러지.”

    멋쩍을 만도 하건만, 체이카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녀에게 연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속에는 모욕적인 언사에 날뛰려던 용병을 말린 일도 포함되어 있어 애쉴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대체 에드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길래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 * *

    체이카는 상단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팔라디움의 영애를 보았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상단으로 찾아오라며 친필로 추천장을 써 주기까지 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에 애쉴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추천장을 받았다. 뒤바뀐 이유를 알고 있는 에드는 쓰게 웃었다.

    “왜 그러셨어요?”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이었다.

    에드는 젖은 옷을 말리고자 가벼운 셔츠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딱 달라붙은 옷 위로 단단한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애쉴은 시선을 아래로 두며 물었다.

    그녀가 말을 먼저 걸어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무릎을 끌어모은 채 앉아 있던 남자는 두근거리는 것을 숨기고자 손등에 턱을 지그시 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 기사의 맹세요.”

    머뭇거리던 애쉴이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지를 눈치챈 에드가 아,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도적들을 처리하러 가기 직전 에드가 애쉴에게 읊었던 것은 기사들이 마음을 바친 주군 혹은 연인에게 하는 맹세였다. 말이 기사의 맹세지, 워낙 잘 알려진 터라 단어를 바꿔 프로포즈에 쓰이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목적이야 어쨌든 그 맹세가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당신 하나만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말이야 바꾸면 그만이라지만. 기사의 맹세는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박혀 있었다. 때문에 로맨틱한 문장임에도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듣지 못한 것으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용병이 한 사람만을 따르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와 자신은 돈으로 맺어진 인연 아니던가.

    왜 갑자기 기사의 맹세를 읊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단주야 헤어지면 그만인 사람이니 자신만 눈감아 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애쉴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제가 왜 맹세를 읊었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알아주기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방의 진지한 태도에 애끓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툭 뱉어버렸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던 여자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상체 탓에 눈 둘 곳이 없었다.

    에드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 같으면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할 터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애쉴은 그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 보았다.

    ‘제가 왜 맹세를 읊었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기사의 맹세는 대개 마음을 바친 주군 혹은 연인에게 하는 것이다. 장난 혹은 생각 없이 읊을 만큼 무게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주군 혹은 연인. 그렇다는 것은…….

    ‘……설마.’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애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달리 친절하던 용병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고향에 있는 동생을 닮았다는 말에 넘어갔던 일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면……?

    “아가씨!”

    작지만 강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실수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죠?”

    “……예?”

    “왜 맹세하신 거죠?”

    깊게 가라앉은 적안이 곧게 꽂혔다.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기분에 에드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진심을 고하려다가, 아릿한 손바닥의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급히 선회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양 손바닥에는 각각 다섯 개의 작은 반달이 붉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기사처럼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기사…… 요?”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애쉴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팔라디움의 영애께서 웬 이름 없는 용병과 둘이서만 다닌다고 하면. 그래서 그랬습니다. 상단주를 속이기 위해서. 그 외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

    “기분 상하셨습니까?”

    잔뜩 굳어진 얼굴에 에드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애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탁 풀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순간이나마 어처구니없는 것을 떠올린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그 감정을 숨기고자 앞을 바라보며 얼굴을 더욱 굳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해를 사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표정에 에드는 갈수록 초조해졌다. 별 뜻 없다는 것에 기분이 많이 상하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이대로 또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결국 매번 해 왔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겹도록 들은 말에 애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을 다른 의미로 착각한 남자가 재차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시죠?”

    “아가씨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려서…… 그게, 그러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크게 당황한 그가 더듬거렸다. 애쉴은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하지만, 표정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다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에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에드는 억울했다. 그러나 반박할 거리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애쉴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린 채 손목으로 관자놀이를 괴었다.

    “저, 그렇게 예민한 사람 아닙니다.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

    “프레디아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드린 보수는 정확히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기분을 맞춰 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수 때문이 아닙니다.”

    또다.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보수 때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활동하기 편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정했다. 그럴듯한 핑곗거리도 준비해 놓지 않은 주제에. 멍청하게도.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에 사죄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온 대화에 애쉴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지만 이건 너무 과하다 싶었다. 저택을 떠난 후부터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별일 아닌 것에 벌써 몇 번을 들었는지. 좀 저를 편하게 대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입을 열어 편하게 대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바닥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진심으로 언짢아하는 듯한 표정에 에드는 어쩔 줄 몰랐다.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입술만 벙긋거릴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던 탓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턴가 애쉴은 ‘죄송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그는, 그러다가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평상시와 같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으나 부드러움이 실려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 무표정하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항시 보아왔던 모습에 눈썹만 약간 휜,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작은 변화였으나 에드는 아까처럼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워서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예?”

    눈만 잘못된 줄 알았는데. 귀도 같이 잘못된 것일까.

    뜬금없는 인사에 남자가 얼어붙었다. 애쉴은 맞은편의 상인들에게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도적들에게 당한 상처를 치료하느라 그들은 대낮보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상단에 힘을 보태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나, 기사인 척하시면서 제 체면을 살려 주신 것이요. 반지 때문에 곤란했을 때도 도와주셨고.”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은 에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쉴이 상인들의 앞에서 울든, 공녀의 신분으로 용병과 다닌다는 게 알려지면서 체면이 구겨지든, 상인들이 죽든 말든 그녀를 프레디아까지 호위해야 한다는 임무와는 하등 관련이 없었다.

    애쉴은 그 점을 지적했다.

    “그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에드는 한 손을 들어 가면으로 미처 가려지지 못한 뺨과 입 주변을 가렸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뜨거웠다.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쿵쿵거렸다.

    “정신이 없어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불쾌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기본 보수 외에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전혀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뻤……!”

    애쉴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거늘. 뇌를 거치지 않은 문장이 날것 그대로 나가다가 끊겼다.

    다짜고짜 큰 소리에 놀란 붉은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연이은 실수에 당황한 남자는 이제 귓불까지 새빨갛게 붉어졌다. 불을 켜지 않은 오두막은 꽤 어두웠던 터라, 애쉴은 그의 낯빛까지는 볼 수 없었다.

    “죄송합니……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가씨를 도울 수 있어 기뻤다는 뜻인데……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가씨를 보면 동생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더듬거렸다. 애쉴은 눈매를 곱게 휘었고, 그것을 본 에드는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다. 심장이 달아날 듯 뛰었다.

    “좋은 오라버니…… 시네요. 동생분이 많이 따르시겠어요.”

    오라버니라, 오라버니라.

    제가 내뱉은 단어에 움찔거린 애쉴은 가지고 있던 것을 만지작거렸다. 사각거리며 종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또 다른 밤손님들이 찾아오기라도 할까 싶어 불을 켜지 못해 아직도 읽지 못한 것이었다. 보지는 않았으나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착잡하고 심란했다.

    “소공작님과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세간에는 라인하르트가 애쉴을 지극히 아낀다는 평으로 자자했다. 웬만한 영애라면 제 오라비에 대해 자랑을 할 법했으나 애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인하르트에 대한 미안함, 그리움, 서러움 등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다 죽어 버린 감정들인 줄 알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다 이제야 튀어나온 것인지.

    그렇게 아픈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사이, 기나긴 밤이 끝나갔다. 창밖에 별빛이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훔쳐보며 조용히 앉아 있던 에드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는 여자에게 잠깐이라도 주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차라리 늦게 출발하는 것이 낫지, 밤을 새웠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애쉴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차가운 바닥만큼이나 가슴 시린 새벽이었다.

    * * *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애쉴은 결국 눈을 떴다. 수면 부족으로 붉게 충혈된 눈이 뻑뻑했다. 머리가 멍했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몸과는 달리 정신은 각성제를 들이키기라도 한 듯 멀쩡했다.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았다. 괴로웠다.

    ‘왜 이러지…….’

    오늘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던 탓일까? 아니면 펼쳐 보지도 못한 라인하르트의 쪽지가 신경 쓰여서였을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든 생각에 이상하게 오한이 들어 애쉴은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그때,

    “자네 같은 실력자가 겨우 귀족의 휘하에 있을 줄이야.”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체이카였다. 술에 취했는지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네도 한잔 들겠나?”

    “사양하지.”

    머리맡의 친숙한 음성에 애쉴이 흠칫, 몸을 굳혔다.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났다고 하면 될 일인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한 것이 두 사람 외에는 모두가 깊게 잠든 듯했다.

    그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남자가 묵묵히 벽에 등을 기댔다.

    “피곤할 텐데 한잔하지 그러나.”

    “…….”

    상대하기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에드는 이제 눈까지 감아 버렸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무안할 법도 하건만. 체이카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들고 있던 술잔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참, 아까 말했어야 했는데 깜빡했군. 우리 쪽에서 잃어버렸던 물건 말일세. 이런 말 하기 참 낯부끄럽네만, 우리 쪽 잘못이었네. 조르단…… 그러니까, 자네의 옷가지 속에서 물건을 발견했던 놈이 사실 자기가 훔쳤던 거라고 실토하더군. 들킬까 봐 겁이 나서 그랬다고. 쯧,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누명을 씌워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네.”

    “…….”

    “자네에게도, 그리고 공녀님에게도 미안하게 되었네. 조르단 그놈은 돌아가는 대로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일세. 특별히 원하는 처벌이 있나? 참고해서 처리하겠네.”

    “없어.”

    그 사건으로 애쉴과 멀어지기라도 했다면 갈아 마셔도 시원찮았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믿어준다 했기에 아무 상관 없었다.

    에드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체이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며 말을 이었다.

    “알겠네.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네. 정말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지금 얼마를 받고 있든 두 배 이상으로 줌세. 원한다면, 상단과 연줄이 있는 귀족들에게 소식을 넣어 자네의 실력이 폐하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네. 그러니.”

    “내가 못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에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멋모르는 것 같은 기사를 데려다가 입맛대로 휘두르려 하는 것이 퍽 불쾌했다.

    어금니를 드러낸 사나운 맹수가 낮게 우는 것 같았다. 멋들어진 갈색 콧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체이카는 팔에 돋은 소름을 잠재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술을 마셨다.

    “그렇다면 왜 그러고 있는 겐가? 상인으로서가 아니라 자네보다 연륜이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지. 자네는 고작 공녀님의 호위 따위를 맡아서는 안 되네. 그보다 훨씬 큰-”

    “고작, 공녀?”

    차갑게 가라앉은 녹안이 위험한 빛을 뿜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체이카는 답지 않게 몸을 떨었다.

    “……아무튼, 실력이 아깝다는 이야기일세.”

    “하.”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그딴 말을.

    되지도 않는 참견질에 짜증이 났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상인 놈들 때문이었다. 본 것을 입 밖으로 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었는데. 꼴에 윗사람이라고 나불거리나 하고,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건지.

    “내 오늘 있었던 일은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상단을 걸고 맹세하겠네.”

    싸늘해지는 공기에 체이카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에드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뒤로 젖히며 거칠게 숨을 토해내었다. 이번 일로 계획한 것들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데,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걸리적거렸다. 촉감이 좋아 무심코 만지작거리다 뭔가 싶어 보니 거미줄 같은 은발이었다. 애쉴의 머리카락이었다.

    실수로 당기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 깨지는 않았을까. 애쉴이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그로서는 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조심조심, 손가락에 엉킨 머리카락을 풀고 있는데 옆에서 술 취한 남성이 중얼거렸다.

    “혹시,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중인가?”

    “……뭐?”

    “표정이나 눈빛, 행동 같은 것들이……. 아무리 봐도 평범한 기사와 레이디의 관계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일세. 어디까지나 상인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질문이니 깊게 신경 쓸 필요는 없네. 나도 생명의 은인을 저버릴 만큼 파렴치한은 아닌지라.”

    “……아니야.”

    “흠. 확실히 공녀님은 그래 보였지.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가?”

    머리카락을 풀어내던 손이 멈췄다. 정확히는 ‘사랑의 도피’라는 단어가 나올 때부터 헛손질만 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공녀님을 연모하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요하는 눈을 간신히 들어 올려 잠이 든 여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달싹거리는 것에 깊게 잠들었구나 싶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그 안에 제 심장이 있기라도 한 듯 있는 힘껏 비틀어 쥐어짰다.

    “왜…… 그런 말을?”

    “말했잖은가. 행동이 딱 그러하다고. 이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보이지.”

    애쉴은 모포를 말아 쥐고 있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고작 공녀’라는 말이 나올까 하던 의문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입을 열면 거친 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가 쥐고 있는 머리카락이 살살 당겨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최대한 느리게 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귀는 활짝 열어 두었다.

    ‘아니잖아요.’

    우리는 고용인과 고용주, 그 이상의 관계가 아니잖아요.

    그저, 동생분이 생각나서 잘 대해 준 것일 뿐이잖아요.

    애쉴은 하염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날이 새고, 상단이 떠날 때까지도.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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