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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름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2) (8/22)

7. 여름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2)

여관으로 들어온 애쉴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자고 나서야 기운을 차렸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난 탓에, 에드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밤샘의 대가를 절실히 깨달은 여자는 그러라고 답했다.

할 일도 없으니 침대에 누워 잠이나 더 자려 했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도 했지만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탓이 더 컸다.

이제까지 그들은 여행하는 내내 각방을 썼다. 2인실은 처음이었다. 처음 입실했을 때는 너무나도 피곤했던 나머지 불편함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이 또렷해진 지금은 좁은 공간에서 단둘만 있는 것이 무척 껄끄럽고 신경 쓰였다.

애쉴은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어떻게든 그의 존재감을 지우고자 애를 쓰면서. 하지만 있는 사람을 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불 밖으로 나왔다.

에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음유시인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던 탓이다.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그는 애쉴이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거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는데도.

그래서 그녀가 옆에 다가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잔다던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일어나셨습니까?”

“예.”

건성으로 대답한 여자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항상 그렇듯 에트나의 밤은 대낮처럼 밝았다. 거리에는 행인들이 득시글댔다. 밤을 잊은 주점은 어떻게든 그들을 잡아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행인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갈 길만을 가고 있었는데, 방향이 모두 같아 애쉴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텅 빈 공터뿐이라고 얼핏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그녀를 훔쳐보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야시장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야시장…… 이요?”

“예. 에트나에서 열리는 야시장은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크고 화려하다 합니다. 바다 건너온 신기한 물건들도 많이 있다 하더군요. 소문에는 제국에서 금지된 물건까지 암암리에 들어온다 들었습니다.”

그의 설명에도 애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장이 밤에도 열리나요?”

“……혹시, 가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없어요.”

수도에서도 많이 열리기는 했지만 애쉴은 한 번도 야시장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것을 에르도안과 라인하르트 둘 다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설사 야시장에서만 판매하는 물건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시녀를 시키면 그만이었다.

밤에 열리는 시장이라니. 깜깜해서 물건들이 보이기나 할런지. 야시장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애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촛불을 들고 돌아다니며 힘겹게 물품을 확인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가 보시겠습니까?”

“야시장을요?”

“예. 마침 살 것도 있고 하니…….”

그는 애쉴의 붕대 감긴 손목을 힐끔거렸다. 평범한 회복력이었다면 나아도 진즉 나았을 것인데. 신경 쓰지 말라고는 했으나 볼 때마다 죄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쉴은,

“아뇨. 저는 괜찮아요. 혼자 다녀오세요.”

하며 거절해 버렸다.

한 번에 수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래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편이니까. 에드는 재차 설득했다.

“하지만, 아가씨. 제가 멀리 있는 사이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일리 있긴 한데…….

그렇게 따지자면 왜 도서관에서는 그냥 사라졌던 건지. 자고 있었다고는 해도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다못해 깨우기라도 하든가.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는 태도에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도서관의 불문율을 몰랐기에 생긴 오해였다.

애쉴의 반응을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 착각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수도의 것조차 에트나에 비하면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무엇을 사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싫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내일 사는 게 어떻겠냐 권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나지막한 대답에 애쉴은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어도 약간 놀랐다.

“약초를…… 조금. 손목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새 검이나 광택제 같은, 뭐 그런 걸 산다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붓기만 가라앉았을 뿐 걸핏하면 아려오는 손목이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그녀가 공녀라는 것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애쉴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매의 눈으로 그것을 포착한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야시장에서는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위해 가면이나 후드로 신분을 가리는 사람도 많고요. 그래도 걱정되신다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가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 할 수가 없었다. 애쉴은 그를 따라나섰다.

* * *

공터에는 성대한 규모의 야시장이 열려 있었다. 제국의 온갖 지역에서 모인 보석들, 갖가지 진귀한 마법서, 무기, 스크롤 등이 가판대에 그득히 쌓여 있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현란한 마법으로 주목을 끌고 있었다.

“오늘만 단돈 1에셀에 모십니다! 싸다 싸!”

“한 모금만 마셔도 마력이 전부 회복되는 회복제예요! 저희는 진품만 취급합니다!”

그 귀하다는 마법을 겨우 물건 파는 데 사용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애쉴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떤 상인은 은빛 비둘기 떼를 소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고, 또 다른 상인은 커다란 무지갯빛 나비들을 만들어 가판대 위의 물건에 오색 가루를 뿌리게끔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물의 공을 수십 개나 만들어 저글링을 하는 여자, 기분 좋은 향이 나는 꽃을 만들어 손님들을 유혹하는 여자, 그리고 제 얼굴보다 세 배는 큰 불꽃을 한입에 삼켜 버리는 남자까지.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보고 있던 애쉴은 불을 삼킨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것에 크게 놀랐다. 별생각 없이 있던 에드도 놀랄 만큼 몸을 흠칫 떨면서.

“괜찮으십니까?”

“불을 먹는 마법이라니. 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건가요?”

순진한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에드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내려야 했다.

“마법이 아니라 일종의 눈속임입니다.”

“눈속임…… 이라고요?”

애쉴은 불신의 눈빛으로 다시금 불을 붙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장장 세 번을 더 보고 나서야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지, 하던 애초의 계획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울함이 감도는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여기저기 돌아보는 것이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에드가 말문을 열었다.

“마법사가 귀하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지천에 널려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게요. 마법사는 황실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저 사람들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네?”

“스크롤을 쓴 거죠. 마법사들이 미리 마법을 담아놓은.”

그는 한 가판대를 가리켰다. 잔뜩 쌓여 있는 양피지 뭉치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초록색 고양이가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찢기만 해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신비한 양피지에 대해서.

에르도안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까 하며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있었지만, 단순히 환상만 보여 주는 것이라기에 일찌감치 접었다. 그게 저것이었구나.

“스크롤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하위 마법뿐이기에 가격이 저렴한 편입니다. 고위 마법을 쓰기 위해 마도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재료가 비싼 데다 절차도 번거로워 잘 쓰이지는 않지요. 혹시 마정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일회용인 마도구와 달리 영구히, 그리고 쉽게 고위 마법들을 담을 수 있는 돌이라 합니다.”

그는 마정석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애쉴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한때 에르도안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닌 것이기에 웬만한 이들보다 잘 안다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구하지는 못했다.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기에.

마법을 알지 못하는 자의 눈에는 평범한 보석처럼 보인다고 하니, 손에 넣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 또 모르죠. 여기 어딘가에 있을지도.”

이야기를 마친 남자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며 애쉴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저만치서 약초를 파는 곳이 보여 그를 일깨워 주었다.

“저기 있네요.”

“아, 찾으셨군요.”

기실 진작 발견했으나 늦게 돌아가고 싶어 모른 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은 에드는 약초를 파는 가판대로 향했다.

애쉴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

얼굴을 굳히며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느닷없는 행동에 에드가 급히 다가왔다. 근처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무슨 일이십니까?”

“우욱.”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코도 함께 막으며 숨을 참았다. 후각이 어지간히 예민하지 않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미미한 향이었으나, 애쉴은 향의 근원지가 코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받았다.

창백하게 질린 여자는 가판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실루트.

벨키에로트에게 세뇌당하는 데 일등 공신을 한 꽃이 거기 있었다.

사태파악을 하지 못한 남자가 애쉴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눈처럼 하얀 꽃을 보자마자 똑같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려 버렸다.

“잠시만, 이쪽으로.”

그는 애쉴의 손끝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잡고 근방의 스크롤 가판대로 이끌었다. 약초상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그러나 다른 상점들에 가려져 약초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얼어붙은 여자의 몸을 돌려 스크롤 무더기를 보도록 만들었으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코와 입을 막은 손도 그대로였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호흡 곤란으로 쓰러질 것 같아 조심스레 손을 떼어내었다. 그러고는 등을 다독거리며 숨을 쉬도록 유도했다.

“하아, 하아…….”

파르르 떨리는 입술 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몸 밖으로 나갈 것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에드는 잠자코 등을 토닥이며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상태가 좀 나아진 듯하자 무릎을 굽혀 그녀와 키를 맞췄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뇨…… 아니에요.”

애쉴은 멀쩡하게 보이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며 떨리는 몸을 멈추려 노력했다. ‘차만 마시지 않으면 돼.’를 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그것들이 효과가 있긴 했던지 여차저차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가빠진 숨을 제외한다면.

“괜찮아요……. 다시 가요.”

괜찮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에드는 움직이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돌아가시죠.”

“괜찮다니까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약초 냄새 때문에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여기서 물러난다면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특정 약초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들킨다든지.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으나 매사에 약점이라도 잡힐까 전전긍긍해온 그녀로서는 당연하게 들 수밖에 없는 불안함이었다.

“정말 괜찮다고요.”

그가 망설이기만 하고 움직이지를 않자 애쉴이 쐐기를 박았다. 에드는 속으로 이딴 상황을 만든 스스로를 욕했다. 미리 답사라도 할 걸, 저런 걸 팔 줄이야.

별수 없었다. 그는 근처에서 향수를 하나 산 다음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애쉴에게 뿌려 주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릴 만큼 한 병을 거의 다 썼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를 데리고 약초 가판대로 향했다.

그러나 가판대의 앞까지 다다른 것은 에드 혼자였다.

그는 실루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오는 여자에게,

“약초 냄새가 독하니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며 바로 옆의 상점에 있게 했다. 생각 같아선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게 하고 싶었지만 호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약초 가게 옆에서는 갖가지 마법 서적들을 팔고 있었다. 애쉴은 가판대 주인이 떠들어 대는 것을 멍하니 흘려버리며 조금 전 에드의 태도를 돌이켜보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를 챙겨 주는 거지?’

오늘만 봐도 그랬다. 비록 그가 상처 입힌 것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더 좋은 약초를 사겠다며 야시장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가진 것들을 사용한다면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나을 테니까.

향수도 처음에는 무슨 돈 낭비인가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약초 냄새를 쉬이 맡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머리가 아플 정도로 향수를 뿌려 대지는 않았을 터다. 냄새 때문에 어지럽다는 사람에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왜일까. 이토록 마음 써 주는 것은.

‘……아버지가 잘 부탁한다며 웃돈이라도 얹어 주셨나.’

귀족 애쉴리아 팔라디움으로 살면서, 그리고 떠돌이 무희 애쉴로 살면서 용병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들을 적잖이 들은 터였다. 때문에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잘 대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에 불쾌해진 상점 주인이 그만 가라며 손짓했다. 그러나 애쉴은 그것을 보지 못할 만큼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또 보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애쉴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어제 보았던 금발에 금안을 가진 음유시인이 서 있었다. 새하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도서관에서와는 다르게 후드를 쓰고 있거늘, 어떻게 안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어찌 되었든 그는 ‘애쉴리아 팔라디움’과는 관련 없을뿐더러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으므로.

“안녕.”

“마법에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냥 구경 중이었어.”

애쉴의 말소리에 호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에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음유시인을 보며 얼굴을 굳혔으나, 그와 대화하며 순수하게 즐거워하던 애쉴이 떠올라 마냥 싫어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재수 없는 인간.

못마땅했지만 별수 없었다. 에드는 약초의 효능에 대해 물으며 그들을 향해 귀를 바짝 기울였다.

“그렇구나. 아, 나 어제. 네가 해 준 이야기에 대해 고민을 해 봤는데.”

“무슨 이야기?”

“수도에서 많이 벌었다는 것 말이야. 나도 돈 좀 벌고 싶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상대방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던지라 애쉴은 몸을 뒤로 뺐다.

“나랑 수도에 가지 않을래? 혼자 가긴 좀 그렇기도 하고. 같이 다니면 더 많이 벌 수 있으니까.”

특정 도시에 함께 가자 제안하는 것은 떠돌이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갈 곳이 있어서.”

“그래? 어딘데?”

“몰라도 돼.”

“비싸게 굴긴.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꽤 가까워진 거리에 부담감을 느낀 애쉴이 옆으로 빠져나가려던 그때.

“……!”

아직 발을 떼지도 않았는데 몸이 한쪽으로 휙 쏠렸다. 얼굴을 들자 어느새 다가온 에드가 그녀와 음유시인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싫으시다잖습니까.”

“누구…… 아, 어제 그 호위 분?”

특이하게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인상이 흐릿했다. 하여 음유시인이 에드를 기억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그러는 동안 애쉴은 에드의 등 뒤에서 나왔다. 위험한 사람도 아닌데 과민 반응하는 것이라 여기면서.

“흠. 대체 어딜 가길래 호위까지.”

“에드 님, 볼일은 다 끝나셨나요?”

“예. 다 샀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우린 이만 가 볼게. 나중에 또 보자.”

“뭐가 그렇게 급해? 바쁜 일 없으면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는 떠나려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에드는 저 빌어먹을 손을 밟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녀가 곧바로 떨쳐내지 않았더라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네 호위한테 나도 좀 지켜 달라 하면 안 될까?”

“……뭐?”

“하?”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애쉴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에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도 음유시인은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마물들이 극성이라길래, 맨몸으로 돌아다니기엔 걱정이 돼서 말이지.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냐. 네가 낸 돈의 반을 낼게. 그럼 비용 절감도 되고-”

“아니, 잠깐만.”

애쉴이 말허리를 잘랐다. 황당한 제안 속에 합의되지 않은 전제가 깔려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따라온다는 거야. 난 너와 같이 다닐 생각이 없어.”

“왜?”

“왜라니. 우리가 언제부터 같이 다녔다고. 한 번 함께 공연한 것뿐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같이 다니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나, 이제 돈 필요 없어.”

단호한 어투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매가 접히더니 황금 같은 눈동자가 반쯤 가려졌다.

“예전에는 돈 버는 데 혈안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수도에서 엄청 많이 벌었나 보네? 아니면……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사람은 죽을 때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다던데. 어제부터 손도 차갑고…….”

체온을 확인하려는 듯 음유시인이 손을 뻗었다. 애쉴은 쌀쌀맞게 그의 손을 쳐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에 기분이 나빠진 탓이다.

“돈 버는 데 혈안이었던 적 없어.”

“그래? 미안.”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과였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성품을 알 턱이 있나.

애쉴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과거의 향수를 한 번 더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말을 섞은 것이 화근이었다.

“바빠서. 이만.”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애쉴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은커녕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불쾌했다.

저놈을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두들겨 패면 속이 시원할 텐데. 빈정거리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에드는 주먹을 있는 힘껏 말아 쥐었다. 그러나 애쉴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그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대신 꾹 내리누르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최악이었다.

* * *

애쉴은 정면만 주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깊어져 가는 밤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훨씬 더 화려해진 마법들이 사방에서 펼쳐졌으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사람은 죽을 때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다던데.’

무지한 남자가 아무렇게나 뱉은 문장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죽을 때라. 죽을 때…….

바늘에 찔리는 듯 가슴이 따끔거렸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했을 뿐인데. 살날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상기되면서 목에 걸린 정체 모를 물건의 감촉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애쉴은 저도 모르게 옷 속에 감춰진 핏빛 모래시계를 쓰다듬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이번엔 어떻게 죽게 될까.’

아직도 가끔 기억난다.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지하 감옥의 차디찬 공기와, 최후의 최후까지 붙잡고 있던 차가운 쇠창살의 느낌을.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던 그것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시간이 되돌아갔으니,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굳은 피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끔찍하도록 선명했던지라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바로 떴다. 죽기 직전의 제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죽지 않으리라. 어머니가 잠든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눈을 감으리라. 그러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겠지.

‘……?’

입술을 꼭 깨문 채 죽음을 곱씹어보던 도중이었다. 무언가가 문득 생각나 몸에 힘이 빠졌다. 잇자국으로 붉어진 아랫입술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그때 왜 그러고 있었지?’

기억 속의 자신은 있는 힘껏 쇠창살을 움켜잡은 채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목에 걸린 구속구 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인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지켜보는 이 하나 없이 죽었었는데. 누구와 대화하고 있던 거지?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아가씨!”

별안간, 옆에서 작게 소리치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공허한 붉은 눈동자와 기묘한 빛을 내는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불안해하는 그의 분위기로 보아 수십 번도 더 불렀던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뭐라 하셨죠?”

“여기 계속 있으시길래, 마음에 드시는 거라도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그제야 애쉴은 자신이 어느 장신구 판매대 앞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정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목소리로 그녀가 여자임을 알아차린 주인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아까부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뭐 하나 끌리는 게 있는가 본데. 어디 보자……. 이 귀걸이는 어떤가? 페르나에서 직접 갖고 온 것일세. 웨이센에서는 이 정도의 순도 높은 사파이어는 보기 쉽지 않지. 거기 신사분, 레이디께 하나 선물해 드리는 건 어떨런지?”

긴 문장 속의 특정 단어가 발목을 붙잡았다.

페르나. 에르도안이 노예로 끌려갔던 나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애쉴은 주인이 내민 사파이어 귀걸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신사와 레이디라는 단어에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걱정된 에드가 급히 변명했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럼 이 기회에 그런 사이가 되면 되겠네.”

두 사람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주인이 넉살 좋게 받아쳤다. 에드는 연신 애쉴의 눈치를 살피며 주인의 말에 반박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고, 다른 손님이 오고 나서야 간신히 끝날 수 있었다.

“하…….”

아니라는데 왜 자꾸 연인 같다 하는 것인지. 파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좀 할 것이지.

별로 덥지도 않은데 식은땀이 났다. 에드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곁눈질을 하자 여태까지도 귀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가 보였다. 멍해 보이기만 할 뿐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과 주인의 말싸움을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음유시인과 헤어진 직후부터 애쉴은 넋 나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개자식 때문이면 온 시장을 뒤져서라도 찾아내어 싹싹 빌게 만들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귀걸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 아니요.”

저보다 더 화려한 것도 팔라디움에 두고 왔거늘. 거추장스러운 장신구 따위 돌아다니는 데 방해될뿐더러 그녀는 사치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애쉴은 장신구에서 힘겹게 눈을 떼었다. 다리는 여전히 무거웠으나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뒤늦은 후회 따위 아무 쓸모 없으니.

“가요.”

“잠시만요.”

겨우 발을 떼었는데, 이번에는 동행인이 문제였다. 얼빠진 얼굴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에드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 쪽으로 끌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봐 달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액세서리를 보니 고향에 있는 애인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애쉴은 그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이 액세서리가 아니라, 가판대를 밝히고 있는 촛대라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저거 보이십니까?”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한껏 목소리를 낮춘 남자가 보이지 않게 턱짓했다.

“촛대요?”

“촛대에 장식된 보석 말입니다. 오팔과 자수정 사이에 있는 붉은 보석.”

페르나는 유일하게 노예제도가 합법인 나라이자 보석이 넘쳐나는 나라였다. 이를 증명하듯 평범한 촛대마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애쉴은 그가 말한 것을 바로 찾아냈다. 엄지손톱만 한 오팔과 자수정 아래에 붙어 있는, 새끼손톱만 한 보석이었다.

“저기 저 작은 루비 말인가요?”

“루비가 아닙니다. 마정석입니다.”

“……네?”

왜 그 귀하디귀한 마정석이 촛대 따위에 달려 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말에 애쉴이 경악했다. 그러던 중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상점 주인을 보자마자 표정을 갈무리했다. 푹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불현듯, 용병인 그가 어떻게 마정석을 알아본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법을 쓸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한번 쭉 둘러보셨습니까? 어떻게, 마음에 드시는 것이라도?”

“저 촛대가 마음에 드는데요.”

“촛대요? 그런 건 없…… 아이쿠.”

넉살 좋게 웃으며 그녀가 가리킨 것을 본 주인이 멈칫했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저건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돈은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공작이 넉넉히 챙겨 준 덕에 애쉴의 수중에는 제국을 네 번은 순회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 촛대는 물론이요, 이 가게에 있는 보석들을 전부 다 사고도 남을 양이었다.

안 된다고 답하려던 주인은 뜻밖의 행운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막상 제시했다가 듣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여기 있는 물건 중 제일 아끼는 것이라, 가치를 매기기가 좀…….”

“꼭 갖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안 될런지요?”

“정 그러시다면…… 10만 에셀만 주십시오.”

“……!”

말도 안 되는 단위에 에드가 입을 벌렸다. 10만 에셀이라니. 평민 넷이서 10년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액수가 아닌가.

가판대의 액세서리를 다 팔아 봤자 8만 에셀도 나오지 않을 것인데. 하지만 마정석에 매겨진 값치고는 굉장히 싼 것이었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쉴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지라 순순히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공간 압축 마법이 걸려 있어 부담 없이 돈을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돈주머니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지불하려 하자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겠다 생각한 주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안 될 것 같습니다.”

“……?”

“20만…… 아니, 30만 에셀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것이라.”

거짓말. 돈을 원하는 대로 주겠다 했을 때부터, 애쉴은 그의 눈에 비친 탐욕을 읽고 있었다. 정말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라면 팔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100만 에셀을 주겠다 했어도. 아니면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유품은 딱 그 정도의 값어치라든지.

“그게 무슨!”

순식간에 세 배로 뛰어오른 가격에 어이없어진 에드가 일갈하려는 것을 애쉴이 손을 들어 막았다. 화를 내는 에드와 달리 그녀는 차분하기만 했다.

“30만 에셀이라. 정말 그걸로 충분한가요?”

‘너무 과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걸로 충분하느냐’라니. 부족하다 하면 얹어 주기라도 할 것 같은 뉘앙스였다. 돈에 눈이 먼 상점 주인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당연히 충분하지 않지요! 아버지의 유품인데 최소 50만은 받아야……. 아가씨를 봐서 크게 깎아드린 거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딜 가든 항상 들고 다녔던 것인데. 떠나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물이 나네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에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관전했다.

애쉴이 무표정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시군요.”

“아…… 정말 안 되겠습니다. 40만! 딱 40만에-”

“그렇게 귀한 것인데. 함부로 살 수야 없죠.”

고저 없는 음성이 말허리를 잘랐다.

난데없는 날벼락에 할 말을 잃은 주인이 입만 벙긋거렸다. 애쉴은 주저 없이 돈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제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지만, 주인분께는 그게 아니시겠죠. 항시 있던 것이 사라졌을 때의 느낌은 저도 겪어봐서 압니다. 하마터면 큰 상심을 드릴 뻔했네요. 실례했습니다.”

“자, 잠시만…….”

“가시지요, 에드 님.”

“잠시만요!”

에스코트 받으며 떠나려던 그녀를 주인이 불러 세웠다. 애쉴은 왜 그러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그러니까…… 정말 안 사시는 겁니까?”

“네. 감히 누군가의 유품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니…… 그, 그게…….”

넝쿨째 들어온 행운을 걷어차 버린 주인이 더듬거렸다. 그러다 그녀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놓치기라도 할세라 버럭 소리 질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유품은 이게 아니라 다른 물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닌…… 아니, 원래 제시 드렸던 가격 10만 에셀에 팔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유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내셔서.”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가 봅니다.”

속 보이는 소리에 애쉴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에드는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았다. 주인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돈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마정석에 무지했던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오늘 장사 접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

“살펴 가십시오!”

“돈에 눈이 먼 놈을 상대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정말 소중한 물건이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죠.”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다. 살 것처럼 굴다가 사지 않겠다고 했을 때, 불필요하게 높은 금액을 낮추는 상인들의 수법을 애쉴은 잘 알고 있었다. 무희이던 시절 수중의 돈 계산을 잘못하여 본의 아니게 몇 번 체험해 본 탓이다.

“깎으려면 더 깎을 수 있었을 텐데요.”

가게에서 멀어지자 에드가 은밀하게 물어왔다.

장사의 기본은 흥정이라고들 하지 않나. 어쩌다 보니 40만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틀림없이 상점 주인은 10만 에셀에서도 머뭇거리면 깎아줄 심산이었을 터다. 겨우 촛대 하나가 그 정도의 가격이라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애쉴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런 건 별로 익숙지가 않아서. 기분 나쁘다고 팔지 않겠다 하면 이쪽만 손해이기도 하고요. 그보다 그건…… 마정석이 맞는 것인지요?”

에드는 제 눈높이까지 촛대를 들어 올렸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에 금색 촛대가 오색으로 물들었다. 장식된 보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새끼손톱만 한 붉은 보석은 달랐다. 물속에 검은색 물감을 푼 것처럼, 보석은 빛을 머금을수록 원래의 빛깔을 잃고 검어지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애쉴은 건네받은 촛대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다른 보석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마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 마정석은 일반 보석과 다를 바가 없으니. 그래서 상점주인 또한 마정석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촛대 따위에 박아 두었으리라. 그녀는 물건을 돌려주며 의구심을 제기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에드 님은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 보군요.”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접할 기회가 있었을 뿐. 보는 눈만 있고,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그런가요…….”

수십 년 동안 찾아다녔던 물건이 상상하지도 못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에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제 와서 찾아내 봤자 무슨 쓸모가 있는지. 심히 허탈했다.

……아니, 아니다. 직접 구매하긴 했어도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에드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것인즉슨 마정석의 주인은 그가 되어야 옳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애쉴은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에드는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말에서 느껴지는 씁쓸함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알은체를 해서도, 위로를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애꿎은 제 심장만 시꺼멓게 태웠다. 그 바람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란스럽던 주위가 조용해지고 거리의 인적이 드물어졌으나 야시장 외곽 부근이라 그런 것이라 착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무언가를 결심한 그가 입술을 떼던 찰나였다.

“저, 이거는…… 이런.”

별안간 멈칫한 에드가 계속해서 걸으려던 여자를 급히 멈춰 세웠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뭐를 잘못 들었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상한 깃털 가면을 쓴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에드는 고개를 한 번 젓는 것으로 그를 물리친 후 왔던 길로 곧장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애쉴을 이끌고서.

“방금 무슨……?”

애쉴은 깃털 가면을 쓴 남자가 흘렸던 ‘경매’라는 단어를 들었다. ‘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이라던가, ‘젊고 힘이 센’이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왠지 그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으나, 에드가 워낙 사납게 잡아끄는 통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워어어어-!

짐승인지 마물인지 모를 것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표범의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를 가진, 괴상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 철창 안에 갇혀 울부짖고 있었다. 눈이 흉흉하게 빛나는 것이 잔뜩 흥분한 듯 보였으나 채찍을 몇 대 맞자 이내 꼬리를 말고 조용해졌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말로만 듣던 금지된 생물을 직접 본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저런 것은 제국 내 반입이 금지되었을 것인데…….

“……!”

순간적으로 머리를 치고 지나간 생각에 그제야 이곳이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암시장임을 깨달았다. 입구를 찾기 힘들어 경비대도 수색을 포기했다 들었거늘.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생전 처음 보는 짐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여자가 다시금 끌려가기 시작했다.

“보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명령이라도 되는 듯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기만 하던 야시장의 민낯을 본 느낌이었다.

에드는 속으로 연신 욕설을 짓씹었다. 좋은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오자 한 것인데. 어떻게 된 게 좋은 것들보다 충격적인 것들을 훨씬 더 많이 보여 주게 된 것 같았다.

일반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트라우마로 작용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여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무너져 내렸다.

“똑바로 걸어!”

촤악. 살에 채찍이 감기는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에드가 말릴 틈도 없었다. 애쉴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헐벗은 채로 생선처럼 밧줄에 줄줄 엮여 끌려가는 남녀의 행렬을. 그들의 목에는 노예임을 상징하는 검은 구속구가 걸려 있었다.

채찍에 휘감길 때마다 그들은 아파하면서도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중간 즈음에서 끌려가던 노예 하나가 비틀거리자 전 대열이 휘청거렸다. 그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제대로 서라며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살이 찢기는 소리가 뇌리를 뒤흔들었으나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신분을 숨긴 채 삼삼오오 모여 ‘경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자들이 많았으나 흥미롭다는 듯 한 번 힐끔 보고 말았을 뿐이다.

“아…….”

“돌겠군.”

낮게 욕설을 뇌까린 남자가 껴안듯 하며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노예들이 고통받는 장면은 머릿속에 생생히 들어선 후였다.

에르도안도 저랬을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끌려가 저렇게 매를 맞았을까.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되어 같은 인간들에게 천대와 멸시가 깃든 시선을 받았을까. 조롱을 받았을까.

웨이센은 기본적으로 노예제도가 없는 나라였다. 몇몇 고위 귀족들은 밤 시중을 위해 암암리에 부리고는 했지만 팔라디움 공작 가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 때문에 애쉴도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노예를 다루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짐작만 하고 있던 것과 직접 본 것의 차이는 컸다. 비참하고, 끔찍했다. 저런 곳에 그를 밀어 넣었었다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다리가 쫙 풀렸다. 품위 있던 그가 누군가에게 개처럼 기었을 것을 생각하자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또한 자신에게 노예 구속구를 채웠다는 기억은 까맣게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제발!”

어떻게든 그녀를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기운 없이 축 처진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거나 업고 가면 편하기라도 하겠건만. 잠깐 안아 든 것으로 도서관에서 그 사달이 났으니.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녀가 패닉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펑펑 울던 여자가 정신을 놓고 기절해 버렸으니까.

* * *

기절한 애쉴은 꿈을 꾸었다. 에르도안과 관련된 꿈을.

그와 관련된 꿈을 꾸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꿈속의 그는 그때처럼 피 묻은 검을 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노예들이나 입는 허름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목에 구속구를 차고 있지 않았더라면. 애쉴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갔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피로 물든 검은 머리카락도,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보랏빛 눈동자도, 비웃음을 띠고 있는 입매도 모두 다 똑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까지도 같았다.

“흐으…….”

그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으나, 애쉴은 그가 구속구를 채우려 했을 때처럼 더듬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었음에도 꼭 핏물 고인 길 위를 지나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그와의 거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애쉴을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오…… 오지 마요…….”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멈추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놓고서는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검지로 턱을 올려 애쉴이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뭐가 그리 무서운가요?”

애쉴이 만든 환영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았다. 기에 눌린 애쉴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서로의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를 어르듯 상냥한 어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면서.”

“나…… 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가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눈앞의 그가 허깨비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거운 사슬에 칭칭 동여매진 것처럼.

“일부러…… 그런 것이…….”

“고의가 아니라 해서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답니다.”

차게 말한 그가 살며시 입술을 맞대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 똑같은 상황에 애쉴은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숨을 쉬지 못했다.

이다음은 분명…….

“미안…… 해요…….”

잔뜩 갈라진 입술 사이로 물기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황태자의 눈 밖에 나게 만든 것을. 그를 살려보겠다며 멋대로 시간을 되돌렸다가 수십 번 죽게 만든 것을.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을.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

고려할 가치도 못 된다는 듯한 숨소리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과 함께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설마, 설마.

“그 사과, 내가 받아줘야 합니까?”

“…….”

“당신도 한 짓이 있는데.”

에르도안의 허상은 그녀가 가장 괴로워할 말만 골라 야멸차게 쏘아댔다.

애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수십 개의 화살이 가슴을 꿰뚫는 듯한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곧 그의 손에 들릴 ‘그것’에 온 신경이 곤두서서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환영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걸 찾나 보죠?”

“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 붉은 보석이 달린 구속구가 생겼다. 그것을 본 애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보겠다며 발버둥 쳤으나 헛수고였다.

그의 더운 숨결이 얼굴 위로 훅, 쏟아졌다. 개구리 앞의 뱀처럼 잔인하게 웃던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이란 여자, 정말…….”

주저 없이 말을 이으려던 남자가 움찔했다. 인상을 확 찌푸리며 구속구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별안간 정신을 잃고 옆으로 휙 쓰러졌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애쉴이 덜덜 떨고만 있던 그때. 그가 벌떡 일어났다.

“아가…… 아니, 레이디?”

눈빛도, 말투도,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놀라는 것 같은 표정도. 조금 전의 에르도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애쉴은 온 신경을 구속구에 쏟고 있던 터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상대방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가느다란 음성으로 애원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걸 채우지 말아 주세요.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로 외롭게……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

공포 어린 시선을 좇아 본인이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경악했다.

그는 물건을 애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따뜻한 손바닥이 양 뺨에 닿자 애쉴이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해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울지 말아요.”

에르도안이 다정하게 다독거렸다. 눈 깜짝할 새 달라진 태도에 애쉴은 더욱 슬피 울었다. 너무나도 잔인했다. 꿈속이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막바지에 멈추기는 했으나 조금이라도 긴장을 푼다면 다시금 구속구를 채우려 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애쉴이 자꾸 고개를 숙이려 하자 그는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저는 그 일을 후회하고 있어요. 왜 참지 못했을까. 왜 믿지 못했을까. 왜 대화를 나누려 해 보지 않았을까…….”

에르도안은 촉촉하게 젖은 눈가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애쉴이 작게 몸을 떨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살리기 위해 애써 줬던 것들을.”

멈추었나 싶던 여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항상 바라왔었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을. 하지만 현실의 그에게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기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서부로 떠났을 테니까.

그래서 꿈속의 그를 향해 기꺼워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만든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기계처럼 읊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형상을 한 채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이 좋아서. 감격스러워서.

“……흐윽.”

또다시 울고야 말았다.

에르도안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기색으로 뺨을 긁었다. 그러다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고서는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애쉴은 그의 품에 안긴 채 훌쩍거렸다.

어느 정도 떨림이 멎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선 작은 미소를 띤 채, 상대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가만 이야기했다.

“만약 현실의 제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에르도안이, 내 비밀을?

애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치기 어린 생각에 수명을 바친 자신의 어리석음도, 남은 시간이 1년뿐이라는 것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진실을 알게 된 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볼지도 두려웠다. 무엇이 되었든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테니까.

1년밖에 살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동정심. 그게 전부겠지.

“싫…… 어요.”

애쉴이 더듬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르도안은 쓰게 웃었다.

“그래요. 이건 꿈이에요. 그러니 이만 현실로 돌아와요.”

“네…….”

“잊지 말아요. 아무 의미 없는 꿈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상한 게 보여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미안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르도안이 부드럽게 키스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애쉴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이내 눈을 감고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불에 덴 듯 홧홧하면서도 달콤했다.

불현듯, 입에서 입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전해져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혀에 닿는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 * *

언제부터인가 애쉴은 뛰고 있었다. 속도가 상당히 빠른데도 숨이 차지 않는 것과 더불어 주변이 불바다인 것으로 보아 꿈에서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과 의자, 가구들로 보아 어느 건물 안인 듯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몸은 때때로 쓰러져 있는 가구들을 들춰 가며 무언가를 확인했는데, 애쉴은 그 모양새가 꼭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굴 찾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꿈이 왜 이렇게 생생한 거지? 꼭 겪어 본 일인 것처럼…….

불바다가 된 건물을 본 적이 있긴 했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위험하다며 주위 사람들이 막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에르도안이 죽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그러니까 그와 관련된 꿈을 꾸는 거라면 이런 식으로 꿔서는 안 되었다. 불타는 건물을 밖에서 지켜보는 것이어야 했다.

거기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을 주고 애를 써 봐도 손발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꼭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졌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연기로 시야가 흐려져 갔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누군가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고, 그 층에 있는 모든 방을 뒤지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 층의 중간 무렵을 지날 즈음이었다. 회색 연기가 자욱이 낀 방에서 애쉴은 저만치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찾아 헤맸던 사람이라는 것을.

긴장이 풀렸는지 무릎이 털썩, 꺾였다. 그녀의 몸은 기다시피 하며 움직였다.

인기척을 느낄 만한 거리에서도 인영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늦었구나. 절망적인 마음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그 감정에 같이 휩쓸리려던 애쉴이 흠칫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휩쓸릴 필요는 없었다. 누군지 확인하고, 그 후에 절망감을 느껴도 늦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여긴 꿈일 뿐인데.

짙은 연기 탓에 인영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까이 붙어야만 했다. 애쉴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인영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애쉴, 바로 자신이었다.

* * *

“아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애쉴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에 머리를 댄 채 엎드려 있던 남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어느 틈에 에트나에서 묵고 있는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내, 내가, 내가…….”

그녀는 불바다가 된 건물에서 전력 질주를 하고 온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가슴을 꽉 움켜쥐자 가파르게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방금 대체 뭘 본 것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개꿈이라 치부하기엔 직접 겪은 일처럼 너무나도 선명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셨나 보군요.”

옆에 있던 에드가 들고 있던 수건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었다.

“악몽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기를.”

‘잊지 말아요. 아무 의미 없는 꿈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상한 게 보여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미안해요.’

왜일까. 그가 건넨 위로에 꿈속에서 들었던 에르도안의 말이 겹쳐서 들린 것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꿈인 걸까? 애쉴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에드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아무 의미 없는 꿈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시면 금방 잊으실 겁니다.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충격적인 꿈 때문인지 사고가 느릿하게 돌았다. 몸 상태……?

악몽을 꾸긴 했어도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팔라디움을 출발할 때와 비슷한 것이 그동안 쌓인 피로가 거의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도리어 쓰러지기 전보다 더 개운한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것일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들기 전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차, 테이블 위에 놓인 촛대가 보였다. 보석이 잔뜩 박힌 아주 화려한 촛대였다.

“……!”

비로소 기억이 돌아온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앞에서 기절해 버리다니.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들켜 버린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변명이 통할지도 모른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것들을 한꺼번에 봐서 놀랐던 것 같다고. 쓰러졌던 적은 그게 처음이라고. 그러니까…….

혼란에 빠진 여자가 횡설수설하려던 그때. 에드가 선수를 쳤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가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라는 것.”

애쉴의 몸이 굳었다. 에드는 최대한 그녀를 안정시키고자 자장가를 부르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에 한계가 올 때마다 애쉴은 본인을 챙기는 대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는 여자를 보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그녀를 보고 나니 털어놓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을지언정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가요?”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비를 맞고 도서관에서 비틀거렸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출발하기 전 말을 오래 탄 것으로 며칠을 앓아누워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는 애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으면 왜…… 왜 호위를 맡겠다 하신 거죠? 혹시, 기본적인 보수 외에 추가로 원하시는 것이라도…….”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에드는 이불 위로 그녀의 손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에 살며시 제 손을 얹었다.

“순전히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아가씨를 모실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필요 없습니다.”

“대체 왜…….”

예전에도 그랬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보수 때문에 지원한 거면 비등하게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알아봐 주겠다 했던 그때. 그는 그녀를 호위하는 일이 좋다고 했었다. 그때는 입에 발린 소리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는데.

몸이 아픈 걸 알면서도. 그 어떤 일보다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처음 보는 사람의 호위를 맡는 것이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드는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가씨를 보면,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이 생각나거든요.”

“동생…… 이요?”

“네. 물론 아가씨께서 훨씬 더 아름다우시긴 하지만, 나이대나 분위기 같은 것이 비슷해서. 그 애도 몸이 좋지 않아 제가 많이 챙겨 줬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만.”

“…….”

“병간호를 오래 하다 보니 얼굴색만 봐도 몸 상태가 대충 짐작되는지라. 그래서 알았습니다. 아가씨도 편찮으시다는 것을.”

“제 얼굴색이 그렇게나 안 좋나요?”

“아뇨. 제가 워낙 예민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에드가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혹시라도 평민과 비교해서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행입니다. 그럼 잠시만, 손을 주시겠습니까?”

반사적으로 붕대 감긴 손을 내밀자 그는 반대쪽을 달라 요청했다. 애쉴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에드는 품속에서 은빛의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녀의 희고 가는 손목에 조심스레 채워 주었다.

그것을 본 애쉴의 눈이 커졌다.

“이건……?”

“그냥 가지고 다녔다가는 잃어버리기 딱 좋을 것 같아서. 누워 계시는 동안 준비해 보았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에드가 그녀의 손목에 채워 준 것은 고급스럽게 세공된 은색의 줄에 새끼손톱만 한 붉은 보석이 달린 팔찌였다. 어찌 보면 에르도안이 선물해준 것과 비슷하게도 보였으나, 그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에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아가씨의 것이니, 당연히.”

“아뇨, 이건 에드 님의 것이에요.”

애쉴은 반대 손으로 팔찌를 풀려 들었다. 에드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눌러 그 행동을 저지했다.

“아가씨께서 구매하시지 않았습니까.”

“에드 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면 구매하지 않았겠지요. 마정석인지도 몰랐을 거고요. 그러니 에드 님이 소유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알았다고 해도 돈이 없었으면 사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가씨의 것이 맞습니다.”

두 사람은 마정석의 소유권에 대해 서로의 것이라며 설전을 벌였다. 마정석에 눈이 먼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통곡하며 지나갈 만한 광경이었다.

주홍빛이던 하늘이 검게 물들 때까지 의견 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겠다 생각한 에드가 타협점을 내놓았다.

“저나 아가씨,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마정석을 얻지 못했을 테니 공동의 것으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후우. 알겠습니다.”

기실 애쉴로서는 정말로 필요가 없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 산골짜기 마을로 들어가는 마당에 그 어떤 물건인들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러나 그가 원체 고집을 부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야 말았다. 헤어질 때 잘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에드의 다음 말에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저는 아가씨의 손목을 다치게 한 죗값으로 제 몫을 포기하겠습니다.”

“……네? 잠깐만. 그게 무슨.”

“그러니 이젠, 아가씨의 것입니다.”

순식간에 말장난에 휘말려버린 애쉴이 눈을 깜빡거렸다. 에드는 그녀가 반박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위급 상황에 단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마법이 편할 겁니다.”

“하, 하지만.”

비로소 그의 뜻을 이해한 애쉴이 더듬거렸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마정석을 팔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돈이 벌릴 텐데. 용병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단순히 동생과 닮아서 챙겨 주는 것이라 하기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생각을 읽은 남자가 싱긋 웃었다.

“벼락부자 같은 건 취향이 아닌지라.”

농담 같은 진담에도 애쉴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여전히 불편해하자 에드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 나긋하게 말했다.

“정 신경 쓰이시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 거창한 건 아닙니다. 들어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는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주었다. 에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네?”

상상치도 못한 말에 애쉴의 표정이 멍해졌다. 에드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고자 한 손으로 가면이 덮고 있지 않은 부분을 가렸다.

“동생한테 자주 그렇게 해 줬어서……. 도서관에서의 일로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누군가가 떠올라 밀어낸 것이었는데. 이 사람은 그걸 여태 신경 쓰고 있었구나.

순수한 호의를 거절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에게 안기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나, 애쉴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성적인 이유로 껴안겠다는 것도 아니거니와 마정석을 받은 대가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요구였으니.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마정석에 대한 소원으로 치기엔 약한 것 같으니 무리 되지 않는 선에서 소원 하나를 더 들어주겠다고도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남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감사합니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고작 몇 초의 시간이었으나 그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부드러운 몸을 안자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가느다란 진동이 팔을 타고 전해져왔다. 약한 숨소리가 가슴께에서 느껴졌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킬 것만 같아, 그는 그녀를 안은 손에 살포시 힘을 주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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