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여름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1) (7/22)
  • 6. 여름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1)

    웨이센 제국의 여름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했다. 햇볕이 쨍쨍하다가도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린다든지, 몇 날 며칠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오다가도 순식간에 맑게 개는 일이 잦아서였다.

    쏴아아-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빗소리였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세찬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여관 1층의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적안이 바깥의 풍경을 훑었다. 늦은 오후였으나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 탓에 어둑어둑했다.

    “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에드가 비척비척 말을 걸었다. 애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예요.”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이 그녀의 양 손목에 닿았다. 세게 힘을 주었다간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여린 손목에는 눈처럼 새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는 안쪽의 짓이겨진 약초 모양대로 살짝 튀어나온 상태였다.

    “식사 나왔습니다.”

    때마침 여관 주인이 두 사람분의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빵과 묽은 수프뿐 조촐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애쉴의 식사량이 워낙 적은 탓도 있었고, 난데없는 폭우 덕에 지도에도 없는 시골 마을에 들어온 터라 이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탓이다.

    그녀는 왼손을 놀려 어색하게 수프를 떴다. 본래 오른손잡이이나 조금 전에 입은 상처가 욱신거려 스푼도 쥘 수 없었다. 죄책감에 물든 남자는 그 모습을 뚫어지라 보았다. 너무 미안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안 드세요?”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불편해진 애쉴이 얼굴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그는 허둥지둥하며 제 앞에 놓인 식기를 잡았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식사를 이어나가려는데, 계속해서 상대방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왼손으로 무언가를 할 때마다 강해졌다.

    “…….”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고 나서야 행동이 멈췄다. 괜찮다는데 왜 자꾸 저러는 건지. 그녀는 남몰래 긴 숨을 내뱉었다.

    사건의 발달은 그러니까, 정확히 10분 전의 일이었다.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매번 같은 인사말을 마친 남자가 방에서 나갔다.

    머리칼에 맺힌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있던 애쉴은 그가 나가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오래되었는지 삐걱거리는 데다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것이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포근했다. 비에 젖은 옷 탓에 침대보도 함께 젖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지쳐 있었다.

    ‘피곤해.’

    저택을 떠난 지 벌써 보름여가 지났다.

    말의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로 자주 쉬었기에 하루 움직이는 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때문에 마을이나 도시에서 숙박하는 것보다 야영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물론 미리 정해둔 지점 외의 곳에 방문하여 쉬어도 되긴 했으나 애쉴은 그러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프레디아에 가고 싶었으니까. 오늘도 폭우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별을 보며 잠들었을 터다.

    ‘짐 정리만 하고 쉬자.’

    일어나면 대충 쑤셔 넣고 출발하기 바빴던 관계로 짐은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지금 잠들었다간 또 못 할 게 뻔했다. 애쉴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위로 제 품만 한 짐꾸러미를 가져와 뒤집었다.

    얇은 책 한 권과 옷가지들, 허름한 주머니, 마지막으로 팔뚝만 한 단검 한 자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제대로 봉해지지 않은 단검은 작은 충격만으로도 가죽 검집을 벗어던지고 시퍼런 칼날을 내보였다.

    손 넣었으면 베였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여자가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사용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공작 몰래 챙겨온 것이었는데, 꽤 묵직한 것이 들고만 있는데도 벅찼다. 불시의 상황에 휘두를 수 있기는커녕 도망치는 데 짐만 될 터다. 아니면 적에게 무기를 하나 더 제공해 주는 꼴이 된다든지.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마도구를 챙겨올걸.’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하며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려던 애쉴은, 거울처럼 검신이 비춰내는 형상을 보자마자 동작을 멈췄다.

    넋이 나간 듯한, 영혼 없는 얼굴.

    애쉴은 딱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바보 같네.’

    수 없는 회귀 중. 언제부턴가 애쉴은 거울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웃고, 울고, 화를 내야 하는 것에 지친 순간부터였다.

    형형색색이던 세상이 검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감정을 잃은…… 아니,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잃은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이 싫어 거울을 피했다.

    애쉴은 단검을 쥔 손을 움직여가며 검신의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었다. 다른 측에서 보면 뭔가 다른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바보 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싫어 인상을 구기고, 입가에 힘을 주어 끌어 올리려는 등 애를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무표정한 가면에 물감으로 덧칠해 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 그만두자.’

    멍청해 보이면 어떠한가.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없는데.

    의미 없는 짓에 시간을 투자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검집을 집어 든 그때.

    끼이익.

    “벌써 주무시는…… 안 돼!”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다급한 구둣발 소리, 그리고 기절초풍할 것 같은 목소리가 뒤범벅되어 머리를 울렸다.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싶더니 자신은 어느새 침대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머리 위로 올려진 양 손목에 강한 힘이 몰아쳐 와 각자 쥐고 있던 것을 놓쳤다. 특히 단검을 쥐고 있던 쪽은 극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조여 왔다. 아팠다.

    “으윽.”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어 말도 하지 못하고 잡힌 팔들만 놓아 달라는 뜻으로 퍼덕거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에드는 있는 힘껏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침대에 내리눌렀다. 깊게 가라앉은 녹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것, 좀, 놔요…….”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왜 얼마 되지도 않아서, 대체 왜!”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본 순간.

    녹색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남자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그러나 애쉴은 끙끙거리기만 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손목의 통증이 무척이나 심했던 탓이다.

    “아가, 씨……?”

    꿈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에드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애쉴은 고개를 돌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피했다. 장미를 닮은 적안에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비켜 주세요.”

    “…….”

    “손도 좀 놓아주시고요.”

    현실을 자각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쉴이 다시 잡기라도 할세라 침대에 나뒹구는 단검을 움켜쥐면서.

    “죄송, 합니다.”

    부어오르다 못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파랗게 변한 손목을 본 그가 더듬거렸다. 몸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는데도 애쉴은 쉬이 일어나질 못했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탓이다.

    눈을 깜빡이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은발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작은 신음성을 흘리며 그나마 덜 다친 왼손에 힘을 주어 납덩이 같은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쿵. 무릎을 꿇은 남자가 연신 죄송하다 빌었다. 가만두었다가는 머리까지 조아릴 기세였다.

    “아가씨께서 다치시기라도 할까 봐, 당황해서 그만.”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심하게 다친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붉게 부어오른 제 손목을 내려다보며 불쾌함으로 일렁이던 눈동자는, 그러나 에드가 한 번 더 사죄하기도 전에 곧장 침전했다.

    그에게 감정을 표출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왜 이랬느냐고 따져 봤자 무슨 이득이 있을까.

    평소처럼 무감각하게 변해 버린 적안이 그를 훑었다.

    “됐습니다. 일어나세요.”

    “……아가씨.”

    에드는 한때나마 감정을 내비치던 눈동자의 빛이 훅 꺼져 드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걸까 싶어 저도 모르게 애타는 음성을 내었다.

    차라리 욕을 했더라면.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냈더라면. 이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두렵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제 방에 오신 용건이 뭐죠? 노크도 없이.”

    고저 없는 무심한 음성이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에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참으로 상황에 맞지 않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웠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으셔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인데……. 일단 치료부터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요?”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약방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애쉴이 반문하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응급처치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제 방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나가 버린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약초와 붕대, 지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눈가가 약간 벌겋게 변해 있었으나 그에게 관심이 없던 애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드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약초를 짓이긴 후 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주시겠습니까?”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그의 것 위에 얹혔다. 그나마 검집을 쥐고 있던 쪽은 손자국만 남았는데, 단검을 들고 있던 쪽은 피멍으로 엉망이었다.

    그것을 보자 또다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이토록 가느다란 손목에 붕대를 감게 된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에 미안해졌다. 지켜주긴커녕 다치게 만들다니. 호위로서 실격이었다. 목에 감고 있던 것을 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끝없이 자책하며 약초를 얹은 후 새하얀 붕대를 감았다. 그러고는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며 애쉴을 1층으로 잡아끌었다.

    “그래요.”

    입맛은 없었으나 소동으로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그녀는 짐을 대충 챙긴 후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안 드세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이었다.

    * * *

    “왜, 더 드시지 않고.”

    애쉴은 제 몫의 빵을 반도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평상시에도 먹는 양이 많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유난히 적어 보였다. 손이 아파서 그런가 싶어 직접 잘라 주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배가 불러서요. 그보다, 하실 말씀이란 건?”

    “……프레디아까지의 경로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말랐으니 조금 더 먹었으면 좋겠는데.

    못내 아쉬운 눈으로 남은 빵 덩어리들을 보던 남자가 그릇을 치우고 지도를 펼쳐 들었다. 붉은 잉크로 수도에서 프레디아까지의 경로가 표기된, 출발 전 애쉴이 건네준 지도였다.

    “며칠 전부터 내린 비 때문에 마을 뒤편의 계곡에 물이 많이 불어났다 합니다. 산사태의 위험도 있다더군요.”

    “그렇군요. 혹시 봐 두신 루트가 있나요?”

    “예.”

    에드는 반원 형태로 계곡 주변의 장소들을 빙 돌려 짚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살짝 뜸을 들인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이 도시에는 팔라디움의 별장이 있습니다.”

    아. 바람 빠진 소리를 낸 애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상대방이 왜 이리도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출발하기 전, 팔라디움 저택에서 그에게 지도를 건네줄 때였다.

    ‘이렇게 가시면 더 빠를 텐데요. 왜 돌아가시는 겁니까?’

    여행 경로를 표시하는 지도 위의 붉은 선은 산이나 협곡 등 통과하기 힘든 곳들뿐 아니라,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될 몇몇 장소들까지 빙 둘러 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지적했다.

    ‘가고 싶지 않은 곳들이 있어서요. 이를테면, 저희 가문의 별장이 있는 곳이라던가.’

    팔라디움의 고용인들은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수도의 저택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애쉴이 별장에 나타나 봤자 벨키에로트의 귀까지 들어갈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팔라디움을 나온 것은 애쉴의 의지였을 뿐. 공작은 가문에서 그녀를 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별장에 간다면 푹신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 극진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애쉴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별장이 있는 도시에 가는 것조차 피했다.

    에르도안 때문이었다.

    ‘에르도안, 우리 이번에는 여기로 놀러 가요!’

    아직 멋모르던 시절의 그녀는 에르도안을 끌고 팔라디움의 별장이란 별장은 죄다 돌아다녔다. 때문에 그 어디를 가던 그와의 추억이 남아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미련을 묻어두기는 했으나 일부러 그런 장소를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틀림없이 마음이 아플 테니까.

    “여길 들르지 않고 다른 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데.”

    에드는 문제의 도시 주변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여러 곳을 거치는 게 한눈에 봐도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지금 속도라면 가을 끝에나 도착하지 않을까. 그건 너무 늦을 것 같은데. 잠깐 망설이던 애쉴은, 결국 주먹을 꽉 쥐며 피를 토하듯 입을 열었다.

    “그냥 도시를 통과하는 게 좋겠네요. 별장 근처에만 가지 않으면 될 테니까. 도시 이름이 뭐죠? 지워져서 잘 안 보이네요.”

    “에트나입니다.”

    아, 하필 그곳이라니. 도시 명을 들은 여자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에트나. 귀족들의 별장이 포진해 있는 휴양 도시이자, 팔라디움의 별장이 있는 곳. 그리고…… 최초로 에르도안을 눈앞에서 잃었던 장소, 카르타의 동굴과 붙어 있는 곳.

    그야말로 악몽으로 점철된 도시였다. 그나마 다른 귀족들과 마주치기 싫어 마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써 도시를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될 뿐. 별장 근처에만 가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잠깐만 참으면 된다고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심란하던 마음은 어느 정도 추슬러졌으나 머리는 지끈거렸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으며 이마를 짚으려던 그녀는, 그러나 조그맣게 신음을 내뱉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목이 다쳤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탓이다.

    그 행동에 애쉴이 죽으라면 바로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진다. 벨키에로트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탓도 있었지만 지난 회귀만 하더라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쓰러졌었다. 프레디아에 도착하기 전에 그렇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귀족들이 많은 곳이니 누군가가 아가씨를 알아보시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요.”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후드를 쓰고 다닐 생각이라 괜찮습니다. 신원을 숨기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대개 하는 짓이니 이상하게 보지도 않을 테지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도시를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묘하게 만류하는 듯한 행동에 지도상에서 에트나를 응시하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정리한 그녀의 눈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여길 들리지 않으면 빙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에드 님께서는 에트나에 가시면 안 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에드도 본인이 이상했음을 인식했는지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다 눈길을 비스듬히 내리며 입술을 깨물더니, 입가를 굳히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없습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지금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목소리 톤이나 몸짓으로 보아 불편한 게 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본인이 아니라는데 뭘 어쩌겠는가.

    애쉴은 결단을 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언제 폭우가 내렸냐는 듯 비가 뚝 그쳤다. 그들은 곧바로 마을을 떠났다.

    하루, 이틀, 사흘…….

    매일매일,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말을 달리고, 쉬고, 달리고, 쉬고. 그러다 밤이 오면 안전한 장소를 찾아 야영을 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하루 푹 쉬고.

    그렇게, 저택에서 출발한 지 한 달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같이 있는 시간은 길어졌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필요한 말만 하다 보니 하루에 나누는 대화가 채 열 마디도 되지 않은 탓이다.

    “잠깐 쉬다 가실까요?”

    정오를 막 넘긴 시간. 오늘의 세 번째 대화였다.

    ‘날이 더워서’, ‘비가 올 것 같아서’, ‘말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등 별별 이유로 쉬자던 남자는 ‘집중력이 흐려져 말을 몰기 힘들다.’며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을 세웠다.

    “그러시죠.”

    쉰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애쉴은 두말하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며칠 연달아 바깥에서 밤을 보낸 탓에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한쪽 손목에는 여전히 새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단검을 쥐고 있던 쪽이었다. 손목의 상처는 한눈에 보더라도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부어올라 있었다.

    뼈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었으나 애쉴의 회복력이 워낙 낮아 벌어진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나았어야 했을 것인데.

    에드는 상처를 볼 때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어떻게든 그녀의 손이 되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애쉴은 무감각한 얼굴로 ‘고마워요.’라고만 할 뿐 별말이 없었다. 아프다고 투덜거리거나 짜증 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그의 속은 날이 갈수록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애쉴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에드는 곧바로 말에 매달려 있던 그녀의 짐 꾸러미를 근처의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그늘 밑으로 가져다주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과 같이.

    “고마워요.”

    기계적으로 입을 연 여자가 짐 꾸러미 옆에 사뿐히 주저앉았다.

    넓게 펼쳐진 들판 위로 여름 바람이 불었다. 풀잎끼리, 나뭇잎끼리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애쉴은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뺨에 스치는 시원한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본 에드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바람에 나부끼는 아름다운 은발. 여유롭게 감긴 두 눈. 부드럽게 다물린 입술. 핏기가 없어 창백한 피부까지 더해지니 꼭 산책을 나왔다가 쉬고 있는 요정처럼 보였다. 잘못 손을 뻗었다간 금방이라도 도망쳐 버릴 것 같아 쉬이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존재.

    어느덧 바람이 멎었다. 살며시 눈두덩이를 들어 올린 애쉴은 비로소 에드를 눈치챘다. 넋이 나간 듯한 남자를 보며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자 그는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본인의 의무를 다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사람.’

    한숨을 쉰 애쉴은 옆에 있던 짐 꾸러미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생각 같아선 잠시 자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애쉴은 아직 그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밤에 자는 것마저 지쳐 기절하다시피 잠드는 것이 아니면 선잠을 잘 정도로.

    사실, 알고는 있었다. 그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당장에라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굳이 잠든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무력에 있어 무방비했으며 그에게 있어 약자였다. 지금까지 쑤셔오는 팔목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힘의 격차가 상당하다는 것을. 그러니 잠을 자든, 자지 않든 그가 행동하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애쉴은 섣불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타인을 경계하는 것. 그것은,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습관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렸으므로.

    파라락.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치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자기도 보고 싶다는 듯 심술을 부렸다. 애쉴은 찢어지지 않도록 페이지를 꼭 붙잡고 있다가, 바람이 어느 정도 멎자 찬찬히 다음 장을 넘겼다.

    이미 수십 번은 읽은 페이지였다. 대충 훑고만 지나가도 무슨 내용인지 선명히 그려졌으나 그녀는 한 자 한 자 공을 들여 읽어 나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잠이 들 것 같았으니까.

    “재밌으십니까?”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애쉴이 고개를 들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에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는 항상 쉴 때마다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한 자루의 날 선 검 같은 모습.

    그랬던 그가 말을 걸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쉴은 책으로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네.”

    기실 재미로 읽는 것은 아니었으나 길게 대화할 생각이 없어 짧게 끊었다. 이제까지의 그들은 필요한 사항이 아니라면 말을 거의 섞지 않았고, 어쩌다 이어진다 하더라도 채 몇 마디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떤 내용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독서를 방해받은 여자가 다시금 그를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에드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상급자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큰 결례였으니까. 애쉴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틈이 날 때마다 보시길래.”

    그가 뺨을 긁으며 멋쩍게 뒷말을 덧붙였다. 애쉴은 알고 있는 사람과 똑같은 버릇을 가진 남자에게서 눈을 떼며 중얼거렸다.

    “그냥…… 시답지 않은 책입니다.”

    고용주와 고용인. 처음 만난 후 그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 조금의 가까워짐도, 멀어짐도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다시금 느껴졌다. 애쉴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금세 알아차렸다. 에드는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심심하기라도 한가 보지.’

    기본적으로 애쉴은 낯선 이와의 대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무희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의지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쓰인 소설이에요.”

    “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녀가 대화를 이어 나가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탓이다. 애쉴의 의아해하는 눈빛에 당황한 그가 아무렇게나 주절거렸다.

    “재미있겠네요.”

    “……네.”

    아, 이게 아닌데.

    순식간에 끝나 버린 대화에 에드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껏 생긴 기회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걷어차 버리다니.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각거리는 풀잎 소리 사이로 팔락,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걸고 싶었으나 독서를 방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애쉴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때.

    “보실래요?”

    하며, 애쉴이 펼치고 있던 것을 덮어 내밀었다. 크게 당황한 남자가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예, 예?”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정면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짧게 돌아온 대답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면 왜 자꾸 쳐다보는 것일까.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에드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애쉴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이 신경 쓰여 도저히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 그녀는 에드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 판단했다. 책을 보지 않으면 잠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다 읽은 내용이라 지겹기도 했고.

    역시 그가 원하던 것은 대화가 아니라 책이었나 보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것이었으나, 그것을 몰랐던 애쉴은 몽롱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집중할 수 있던 것이 사라지자 수마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겁던 눈꺼풀이 절로 스르르, 감겨들었다.

    이렇게 잠들어서는 안 되는데. 그녀는 양 뺨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잔디가 밟히는 소리에 멍하니 책의 겉표지를 보고 있던 남자가 눈을 들었다.

    “저 나무까지만 갔다 올게요.”

    애쉴이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휴식시간을 망쳐 버린 남자가 다급히 앞을 막았다.

    “잠시만요.”

    “네?”

    “저, 그게. 그러니까.”

    책을 빌미로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이런 걸 읽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가지 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엔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입 밖으로는 나오지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해서 목구멍 끝까지 끄집어내는 데는 성공하더라도 무심한 적안을 마주하는 순간 눈 녹듯 혀끝에서 녹아 내려간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처럼.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에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와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심기가 불편해진 여자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질 때 즈음에야 말을 꺼냈다.

    “제가…….”

    겨우 생각해 낸 같잖은 변명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럴 때는 차라리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글을 읽지 못해서요.”

    “아.”

    그제야 왜 이렇게 뜸을 들였는지 알게 된 여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그가 내민 책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았다.

    “그렇군요.”

    글을 모른다는 게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배우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모른다고 해서 실생활에 큰 불편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은 글을 배우지 않았다.

    물론 글을 몰라 사기를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일들이 번번이 발생하고는 했지만. 확률적인 일 때문에 돈과 시간을 소모해 가며 글을 배우려는 평민들은 없었다. 귀족 중에서도 귀찮다며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인데 오죽할까. 애쉴 또한 팔라디움에 들어간 후로 배운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에드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상태로. 글을 읽지 못하는 귀족도 있는 마당에 용병이 글을 모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그는 유난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혹시, 읽어 주실 수 있으신지.”

    의외의 요구에 애쉴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점점 작아진 목소리는 이제 웅얼거림으로 들렸다.

    어떻게든 잠을 깨야 하는 애쉴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고 있으려니 지루하던 참이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에 에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애쉴이 몸을 돌려 원래의 자리로 걸어가며 말했다.

    “읽어 드릴게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얼굴에 안타까움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일말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기꺼웠다.

    어찌 보면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방증 같은 것이었으나, 일반적인 귀족들이 글을 모른다는 평민을 대할 때의 얼굴은 아니었던지라. 게다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여 준다는 것 자체가 마냥 기뻤다. 가슴이 뛰었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그녀가 짐 꾸러미에 책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이제 출발하자는 말을 돌려 한 것이다.

    정신을 차린 남자는 급히 뛰어가 짐을 들어 올리려는 여자를 만류했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직접 말에 짐을 매달았다. 거짓말에 대한 민망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기쁨과 설렘 때문이었다.

    * * *

    그 후에도 두 사람은 말을 달렸다. 여전히 에드는 본인이 피곤하다는 명목으로 말을 세웠다.

    멈추는 장소는 그때마다 달랐다. 어떤 때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초원이었고, 또 어떤 때에는 바닥까지 보이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 근방이었으며, 때로는 여름꽃이 잔뜩 피어난 푸르른 들판일 때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여러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경로를 살짝 이탈해 근방의 경치 좋은 곳을 갈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애쉴은 알지 못했다. 말을 모는 사람은 에드였고, 그녀는 말 위에서 자기 몸 하나 가누는 것도 벅찼으므로.

    그를 믿지 못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함께 다니다니. 모순이었다. 아닌 말로 그가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아도 애쉴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에드와 함께 다니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녀는 모순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와 단둘이 있을 때면 더더욱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에드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말이 없었다. 백날 말해 봤자 그녀는 아무것도 믿지 못할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애쉴이 그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한순간에 끝이 났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남자에게 찾아온 것은…….”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소소하게 다가오는 행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한 챕터가 끝났다. 낭랑하게 책을 읽어 내려가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느슨히 풀어지려는 경계심을 추스르고 있던 에드가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다 읽으셨겠지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던 애쉴을 여러 번 보았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 번 보았습니다.”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여기까지 갖고 오실 정도로 말이죠. 합당한 추론이었으나 애쉴은 먼 곳을 바라보며 부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저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예?”

    놀란 에드가 되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지고 있는 책 중 제일 얇고 무게가 가벼워 가져온 것이었다. 속사정을 세세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애쉴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또다. 허무하게 대화가 단절되어 버린 것은.

    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언제 평화가 깨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말을 걸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는 초조하게 애쉴을 흘깃거렸다. 낭독을 시작하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

    순간,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관련된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막상 물어보려니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던 그때.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애쉴이 책을 집어 들었다.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서는 조금 전까지 읽던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가씨께서는.”

    “네?”

    애쉴이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일단 부르기는 했는데.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에드는 찰나의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애쉴이 말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더불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유혹이 판단력을 흐려놓았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큰 결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애쉴은 하얗게 질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도 표정이 없긴 했으나 방금 그 질문으로 인해 영혼까지 빠져나간, 꼭 잘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처럼 보이는 얼굴로.

    실수했구나.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졌다.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주워 담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싶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제까지와는 다른 패턴에 마음이 풀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어찌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던지 변명의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세찬 바람이라도 불면 제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애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던 나무에서 하나둘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이파리들이 수십 개가 될 때까지.

    부스럭. 잔디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쭉 뻗고 있던 다리를 접어 가슴 가까이 가져왔다. 무릎 위 양팔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눈, 코, 입 중 유일하게 다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랑…… 이라.”

    하.

    그녀가 차게 웃었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던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남자의 눈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애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 초반에는 사랑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그만을 생각하고, 그를 보고 싶어 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었고, 나쁜 일이 있으면 함께 짊어지고 싶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아니라, ‘그의 죽음’만을 생각하게 된 것은.

    ‘오늘은 그와 어디서 데이트를 하면 좋을까’가 아니라 ‘어디서 데이트를 해야 죽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가 좋아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를 살리기 위해’ 의무적으로 만나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았던 일은 뭐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머릿속엔 혼자 감당하려 했던 나쁜 일들만 수두룩하게 채워져 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길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남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응당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그 생각이,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는 수십 번의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에는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까지 했다. 동의는 받지 못할지언정 언질이라도 주었어야 했는데.

    그를 살리고자 했던 건 온전히 자신의 욕심이었다. 어쩌면 에르도안은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무 중 전사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동굴이 폭파되고, 마차에 치이고, 산사태와 같은 재해로 사망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노예로 불명예스럽게 목숨을 이어 나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같은 순수한 감정이 아니다.

    더러운 집착일 뿐.

    “아니요.”

    잘 벼려진 날붙이와도 같은 싸늘한 대답이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남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해 본 적 없어요.”

    수도 없이 같은 시간을 반복한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순수하게 그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그를 보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나. 그를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있었나.

    애쉴은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면.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들끓는다. 간신히 묻어두었나 싶다가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와 괴롭게 만든다.

    지겨웠다. 할 수만 있으면 후회와 실수로 얼룩진 과거 따위 인생에서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에르도안도, 황태자도, 팔라디움도.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것이 시간을 마음대로 돌려댄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헛된 희망 따위는 품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워져 버린 시간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여나 누군가가 그 수치스러웠던 시간들을 알고 있다 한다면. 다른 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치기 어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애쉴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에드 님은 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이 있나요?”

    뾰족하니 날 선 질문이 돌아왔다. 머릿속의 잡생각을 털어내고 싶어 반사적으로 던진 것이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남자가 심히 당황했다. 애쉴과 동행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거니와 이런 내용의 질의를 받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네.”

    그래서 찰나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와 버렸다. 대답이.

    “그렇군요.”

    애쉴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그게 끝이었다. 에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두 사람이 에트나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다 된 시각이었다.

    본래 예상이라면 자정이 되기 전 도착해야 했으나 각자의 생각에 깊게 빠져 버린 그들은 어느 누구도 출발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 주변에는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찾아왔고, 몇 시간을 헛되이 보낸 다음에야 먼저 마음을 추스른 애쉴이 그를 일깨웠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야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충분히 쉰 탓에 체력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도 있었다. 애쉴은 가능하면 에트나까지 바로 가기를 원했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에드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팽배해진 죄의식 때문이었다.

    귀족들의 휴양 도시답게 에트나는 그 입구에서부터 휘황찬란함을 자랑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임에도 길가를 따라 쭉 이어진 기다란 장대 위 등불들 탓에 사방은 대낮처럼 밝았다. 주위의 건물들에 장식된 값비싼 보석들은 그 빛을 머금어 우아하게 빛났다. 수도만큼이나 단정하게 정돈된 길 위에는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보았다면 어김없이 시선을 빼앗길 것이었으나 그들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여관으로 향했다.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밤새 말을 달리다 보니 무척이나 피곤했던 탓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쉴 수 없었다.

    “방이 없는데요.”

    귀족들을 위한 도시, 에트나의 주변에는 널린 것이 별장이었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본인들의 별장에서 머물면 되었기에 숙박 시설이 많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건 돈 있는 귀족들만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도시에 새로운 건물을 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라, 에트나의 몇 개 되지 않는 여관에서는 방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과거, 팔라디움의 별장에 머물렀던 애쉴은 이 점을 몰랐다. 에드도 마찬가지였다.

    ‘피곤해.’

    애쉴이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적거렸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보며 간신히 화를 삭였다.

    그들은 지금 한 여관 앞에 있었다. 하나 남은 2인실을 간신히 찾긴 했으나 정리 중이라는 이유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1층에서 쉴 수도 없는 것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에트나의 여관 1층은 타 도시처럼 식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로비였다. 손님을 위한 의자 따윈 없는.

    정 피곤하면 마구간에라도 가서 자고 있으라며 빈정거리는 말에 에드는 그만 주인장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애쉴이 누군지를 알았더라면 그따위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에트나를 방문하는 고위 귀족들 대부분은 별장에 머물렀으므로,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하위 귀족 혹은 작위가 없는 평민이었다. 때문에 비싼 숙박비에도 불구하고 여관 주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숙박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곤 했다. 그들의 배를 누가 불려 주는지 생각하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일인데. 웃기지도 않는 짓들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방이 정리될 때까지 쉴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누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앉아 있을 만한 곳은 필요했다.

    “조금 걸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아니요.’라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애쉴의 의견을 물었다. 애쉴은 비몽사몽 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기 직전 오랜 시간 쉬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선잠이라도 잠을 잔 것과 아예 자지 않은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눈이 뻑뻑하고 머릿속이 멍했다. 아직까지 붕대가 감겨 있는, 때때로 찌릿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거세진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몸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애쉴이 말을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말을 여관에 맡긴 후 에트나의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여관에서 광장까지는 별로 멀지 않았다.

    에트나의 중앙 광장은 거대한 분수를 중심으로 부티크, 카페, 마법 상점 등 각양각색의 가게들이 둥그런 원 모양으로 즐비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나팔을 불고 있는 아기 천사상으로 장식된 분수대 주변에는 길을 가던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벤치가 몇 개 있었다.

    애쉴은 벤치에 앉자마자 늘 갖고 다니던 얇은 책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잠들기 싫다는 듯한 모습에 에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내에서는 그나마 자는 편인데 실외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웬만해서는 자려 하지 않는다. 도시 밖 야영이라 불안해서 그런 줄 알았거늘 도시 안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보다 못한 그가 물었다. 실눈으로 책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답했다.

    “들어가서요.”

    끄응. 인상을 살짝 찌푸린 남자가 곤란하다는 소리를 내었다. 뺨을 긁적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이른 시간 탓에 카페는 전부 닫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저만치 멀지 않은 곳의 새하얀 건물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도서관에 가지 않으실런지요?”

    “도서관이요?”

    뜬금없는 제안에 애쉴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에드가 은은하게 웃었다.

    “예. 책을 좋아하시니, 도서관에서 조금 주무시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책을 좋아하는 것과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 그 전에.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지 잠을 자는 곳이 아닐 텐데요.”

    “……지금 가지고 계시는 것 외에 다른 책을 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말이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 본심이 튀어나온 것일 뿐이지만. 민망해진 남자가 정정했다. 빤히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애쉴이 시선을 돌렸다. 예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로.

    “그래요.”

    긍정의 대답이었다.

    * * *

    사실, 애쉴은 에트나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에르도안과의 추억 때문이었다.

    여러 귀족과 섞이고 싶지 않았기에 에트나를 적극적으로 돌아다닌 적은 없었다. 근처의 팔라디움 별장으로 갈 때 시간이 비면 마차를 타고 가볍게 구경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었다. 때문에 별장만 가지 않으면 큰 문제 없을 일이었으나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에트나에 들어온 직후에서부터 중앙 광장, 그리고 지금 도서관에 가기까지 애쉴은 그와의 추억을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떠오르지 않은 것이 맞았다. 지나치는 건물들이 전부 다 처음 보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에드가 일부러 길을 바꾸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다행이었다.

    그런 애쉴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후드득.

    “……!”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여름비였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것이 수십 방울로 늘어나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되어 사정없이 퍼부어 댔다. 애쉴은 에트나로 들어온 후부터 쓰고 있던 후드를 꼭 잡은 채 바삐 뛰기 시작했다. 매우 느린 속도였으나 에드도 박자를 맞춰 같이 뛰었다. 옷이라도 벗어 머리 위를 덮어 주기에는 너무 많이 내렸다. 뭘 하든 쫄딱 젖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하아.”

    도서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애쉴은 벽을 짚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입 안에서 비린 맛이 났다. 도서관에 다 왔을 때부터 비가 내린 탓에 얼마 뛰지도 않았건만. 몸이 굉장히 약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아프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호흡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같이 뛰었으면서도 고른 숨소리를 내는 바로 옆의 남자와 대비되어 더욱 신경 쓰였다. 귀족 영애와 용병의 체력을 비교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데도.

    위에서 떨어지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애쉴은 반쯤 숙였던 허리를 억지로 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가씨!”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그녀를 에드가 황급히 받아 안았다. 후드를 걷어 내자 반쯤 감긴 눈으로 할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로비를 부숴 놓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들어가게 해 달라 할 걸 후회했다.

    “괜찮, 아요. 괜찮아요…….”

    그 와중에도 애쉴은 괜찮다며 속 뒤집히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두 발로 서려고 노력하며 그를 밀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아.

    깊은숨을 내뱉은 남자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애쉴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 손을 놀려 그녀가 입고 있던 로브를 찢어 버렸다. 항상 몸이 찬 그녀를 위한 것으로서 겨울에 입어도 될 만큼 두꺼운 옷감과 양털로 만들어진 로브였다. 지금은 그저 물 먹은 짐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무슨-”

    말을 마치기도 전, 애쉴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 먹은 로브를 벗어 던지자 몸이 훨씬 가벼워진 탓이다. 푹 젖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옷 하나의 무게에 큰 차이를 느낄 만큼 그녀의 몸은 평소보다도 더욱 약해진 상태였다.

    로브가 아깝긴 하지만 뒤집어쓰는 형태인 데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상태였기에 빠르게 벗기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단검을 다시 갈무리한 에드는 조심히 그녀를 부축하면서 제 발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 올리고 싶었으나 거부할 게 뻔했다. 가능하다면 애쉴이 싫어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중심을 잡은 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정쩡하게 인사했다. 그를 한 번, 바닥에 축 늘어진 무늬 없는 천 쪼가리를 한 번 보면서. 그제야 그 천 쪼가리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린 남자의 얼굴이 낭패로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으나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벌써부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는데, 로브를 찢은 그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두 발로 서 있을 수도 없었으리라.

    기실 그녀는 라인하르트나 팔라디움 공작 등 여타 고위 귀족들 대비 얼굴이 알려진 편이 아니었다. 사교계에 나간 것은 데뷔탕트 때뿐이었고, 그마저도 팔라디움이 초대한 소수의 귀족만이 참석했다. 거기다 사람을 꺼리는 듯한 태도 덕에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 숫자는 많지 않았다.

    또한 팔라디움의 특징인 은발에 적안 또한 드물기는 했어도 간간이 있는 조합이었다. 그토록 희귀했다면 애쉴의 무희 시절은 20년이나 유지될 정도로 길지 않았을 것이다. 팔라디움 공작가에서 딸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암암리에 퍼져 있던, 꽤 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따라서 후드를 쓰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생길 여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황태자가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뭐가 되었든 도서관 입구에서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의 입구와 메인 로비를 잇는 복도로 들어섰다. 제국에서 가장 큰 도서관답게 건물의 규모가 상당했기에 복도는 길었다.

    “조금 있다 가서 사 오겠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직 부티크가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이었다. 얼굴도 가리지 않은 애쉴을 혼자 두어야 하는 것이 못내 불안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제국 초기에 건설된 에트나의 도서관에서는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 한들 그녀가 도서관 밖으로 끌려나갈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설사 황제의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네…….”

    나지막이 들려오는 대답에서 숨기지 못한 떨림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양팔로 몸을 감싸 안은 채 달달 떨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뭐라도 걸쳐 주고 싶어도, 자신의 옷도 다 젖어 버렸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그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철퍽, 철퍽. 그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물웅덩이를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메아리쳤다. 깨끗한 바닥에 발자국이 선연하게 남았다. 그러나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복도의 끝은 보이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느린 애쉴의 걸음 속도가 계속해서 느려지고 있는 탓이었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쓰러진 다음에야 움직일 셈이냐, 이 멍청아.

    마음을 정한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더니 아무런 예고 없이 애쉴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한 손은 그녀의 등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무릎 아래를 받치는 흡사 공주님 안기 같은 자세로.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애쉴이 품속에서 바르작거렸다.

    “내, 내려 주세요!”

    “떨어집니다. 가만히 계세요.”

    에드가 짐승이 울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는 연달아 실수를 저지른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저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

    그가 말을 끊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라는 단어가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듯, 애쉴의 몸이 딱 멈췄다.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

    “힘드시지 않습니까.”

    “…….”

    싫은 소리를 들을 각오로 한 것이었으나 예상외로 애쉴은 주먹만 꼭 쥘 뿐 말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내렸으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답답하고도 초조해진 남자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 *

    커다란 돔 모양의 홀에 발소리가 퍼졌다. 고풍스러운 벽화가 그려진 로비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그려진 표지판과 함께 다섯 갈래 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책 냄새와 천장을 날아다니고 있는 책들이 아니었다면 신전이라 해도 믿을 법한 분위기였다.

    소나기를 피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던 것일까. 로비 한쪽에는 고이 접힌 깨끗한 수건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그는 애쉴을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가져온 수건을 내밀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겠으나, 갈아입을 옷이 없는 지금은 불가능했다.

    애쉴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향한 채 수건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대강 몸을 닦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인지라 방문자는 그들밖에 없었다. 고요한 홀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에드였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애쉴이 몸을 다 닦자 그는 새 수건 하나를 더 내밀었다. 성인 여성이 망토처럼 두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대형수건이었다. 그때까지도 외면하고 있던 여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필요 없다는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면서.

    “감기라도 걸리시면.”

    찰나, 에드는 고민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녀와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애쉴은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와도 같다는 것을. 자신의 몸 상태를 들키기라도 할까 봐 불안에 떨고 있는 어린 고슴도치.

    그는 마른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니까.”

    “……그렇겠네요.”

    정답인 모양이었다. 몸 상태를 직접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을 핑계로 어쩔 수 없이 챙겨 준다는 것처럼 구는 것이.

    붉은 눈동자에 담겨 있던 적대심이 한층 가라앉았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입 안은 썼다.

    상대방의 심정을 모르는 여자는 커다란 수건을 망토처럼 몸에 둘러매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수건의 온기에 달달 떨리던 몸이 많이 진정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수건의 귀퉁이를 잘 여민 후,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예?”

    “……그냥, 그렇다고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는 건 안다. 오히려 변명 같은 것을 함으로써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마음에 애쉴은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사방에 펼쳐진 다섯 갈래 길 중 하나로 발을 옮겼다. 책을 읽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한 의미 없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심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 * *

    ‘들켰을까.’

    몸이 형편없이 약하다는 것을.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 전, 조금 뛰었다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비에 푹 젖은 채 새파랗게 변한 입술로 달달 떠는 모습을 보았다면. 에드가 아니라 누구라도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는 참는다고 참고, 숨긴다고 숨긴 것이었지만.

    ‘들키면 안 되는데.’

    애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몸이 아프다는 건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과거 ‘에르도안’이라는 약점을 들킴으로써 벨키에로트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호위를 구해주겠다던 공작에게도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저, 심심해서 가짜 소문을 내고 유람을 하러 가는 귀족 영애인 것처럼 말해 달라고.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힘드시지 않습니까.’

    조금 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힘들지 않다고 해야 했는데. 괜찮으니까 내려 달라고 해야 했는데. 왜 말을 못 했을까. 왜 가만히 있었을까. 바보 같아…….

    “아가씨?”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머리 하나 정도 위에서 자신을 불안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기묘한 빛깔의 녹안이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방금까지 하고 있던 생각을 숨기고자 가시 돋친 말투가 튀어나갔다.

    에드는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본래 하고자 했던 것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조금 전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댄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

    깊숙이 허리 숙인 남자를 보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 그가 손을 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까.

    정상적인 반응으로는 함부로 만진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불쾌감 정도는 표현해야 했다. 동의를 구한 것도 아닐뿐더러 같은 성별도 아니니까.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왜. 어째서. 말을 함께 타고 다니면서 그와의 접촉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 아니다.

    그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쾌감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방금은 불필요한 접촉이었다. 그녀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내려 달라 했으나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불쾌해야 했다.

    불쾌해야 했는데…… 도대체 왜.

    ‘그의 손길과 닮았으니까.’

    “……!”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도 안 되는 답에 눈앞이 빙글 돌았다. 애쉴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앞에 있는 책장을 짚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동안 복도를 지나 책장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에드가 그녀를 부르고,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던 건 그 이유에서였다. 책을 고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몇십 분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었으므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길래.

    “……!”

    눈앞의 작은 발이 비틀거렸다. 황급히 허리를 들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던 그때.

    “하지 마요.”

    바람이라도 불면 훅 꺼져 버릴 듯한, 그러나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 손목을 잡아챘다.

    애쉴은 책장에 몸을 기댄 채 힘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말아요.”

    명백한 거부반응이었다.

    에드의 손이 툭, 떨어졌다. 애쉴은 책장 쪽으로 몸을 틀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방금 떠오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지우고자 노력하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손이 가는 대로 책을 하나 고른 후 시선을 내리깔며 발을 옮겼다. 앉을만한 자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사과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세요.”

    몸이 좋지 않아서, 정신이 없어서 착각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은 그대로였던지라 눈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얼마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지.

    * * *

    애쉴이 고른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창문을 넘어온 새벽빛이 은은하게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여자가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채 열 페이지도 보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잠을 깨워 보고자 눈을 비비적거렸으나 헛수고였다. 밤을 꼬박 새운 데다 비까지 맞았다. 실외가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고, 옆에 앉은 남자가 먼저 잠들어서인 것도 있었다.

    ‘자러 가자더니, 정말 대놓고 잘 줄은. 하긴 글을 모르는 사람이 도서관에서 할 일은 없겠지.’

    책 한 권 가져오지 않은 남자는 앉자마자 책상 위에 양팔을 얹고 얼굴을 묻은 상태였다.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보아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뒤통수를 봤을 뿐인데도 그에게 안겼던 감촉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아까 들었던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몸이 좋지 않아 감각이 둔해진 탓이다. 애쉴은 파르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카락이 까맣기만 한 것은 아님을, 어느 정도 푸른색이 들어가 있음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버렸다.

    부스럭.

    그녀가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물기에 젖어 있을지언정 잠에 취해 있지는 않았다. 애쉴이 편히 잠들 수 있게끔 자는 척을 한 것이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잠든 것을 본 다음에야 잠을 청하고는 했다. 그가 잠을 잔다는 것은 경계에 구멍이 생긴다는 뜻이니 더욱 불안해야 할 터인데도.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깊은숨을 토해낸 남자는 팔에 뺨을 괸 채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검을 통해 예민해진 감각 덕에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관찰하다 잠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유심히 봐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인데.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는지 모를 일이다.

    가느다란 은발 몇 가닥이 어깨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무심코 그것들을 정리하려던 에드가 멈칫했다. 건들지 말라던 그녀의 명령 때문이었다.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머리카락을 치우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뺨을 쓸어 봤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워 보이는 여자를 보며 간신히 욕망을 억눌렀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그는 항상 애쉴이 잠들지 않기를 바람과 동시에 잠들었으면 했다. 전자는 혹시라도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였고, 후자는 잠든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여뻤던 탓이다.

    평상시의 애쉴은 무표정함과 동시에 우울해 보였다. 매사에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으며, 때로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을 때의 그녀는 표정이 풀어져 있었다. 감정 표현도 풍부했다. 악몽을 꿀 때에는 무섭다는 듯 칭얼거렸고, 좋은 꿈을 꿀 때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일어나 있을 적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에드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좋아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으니 그녀에게 말한 대로 로브를 사러 나가야 하건만.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처로운 미소를 띤 남자는 깊이 잠든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의 아가씨.”

    지나가는 바람에 속삭이듯 에드가 조용히 되뇌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그가 무어라 더 말하려던 순간.

    “우웅…….”

    애쉴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리더니,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꼭 대답하려는 것 같은 자세에 에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깬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몇 마디 웅얼거리던 여자는 곧 입을 다물었다.

    고르게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에드가 눈을 떴다. 그는 묘한 아쉬움이 담긴 눈길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 비로소 아침 해가 뜬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빠르게 다녀와야 했다. 어차피 깨우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잘 테지만.

    “다녀올게요, 잠꾸러기 아가씨.”

    다녀오겠다는 쪽지라도 남겨둘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글을 모른다고 해 놓고서는 쪽지를 써두면 이상하지 않겠나. 왜 하필 해도 그런 핑계를 댄 것인지. 다른 것도 많았을 터인데.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자리를 떴다.

    * * *

    에드의 예상과 달리, 애쉴이 일어난 것은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자의가 아니라 누군가가 깨워서긴 했지만.

    “……어나.”

    뺨이 꾹꾹 찔렸다. 애쉴은 잠결에 인상을 쓰며 찔린 부분이 책상에 닿도록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에드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애쉴의 몸을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일어나라고.”

    “으…….”

    웬만한 사람이라면 일어날 법한 충격이었지만 애쉴은 끙끙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는 곤히 잠든 여자의 얼굴과 환히 밝아온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차며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가 간지럼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아아악!”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깜짝 놀란 애쉴이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의자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같이 놀란 남자가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미안. 아무리 불러도 안 일어나길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는 몽롱했고, 눈은 뻑뻑했으며, 온몸은 욱신거렸다. 걸치고 있던 수건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아픈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그때. 옆쪽에서 들려오는 처음 듣는 목소리에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한 벌꿀로 물들여 놓은 듯한 금발에 따뜻해 보이는 금안을 가진 미남자였다. 아무 데서나 뒹군 것 같은 부스스한 머리나 남루한 옷차림으로 보아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을 방증하듯 그의 무릎 위에는 만돌린이 놓여 있었다.

    “누구?”

    자는 것을 방해받았는데 고운 소리가 나갈 리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여자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애쉴 아니야?”

    애쉴이라니. 예상치 못한 호칭에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공작가의 영애를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인 공작, 오라비인 라인하르트, 연인이었던 에르도안.

    그리고…….

    그녀가 무희이던 시절, 만났던 모든 사람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기도 전이었다. 애쉴의 침묵을 긍정이라 여긴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맞구나! 나 기억 안 나? 몇 달 전에 투르크에서 만났었잖아.”

    그에게는 고작 몇 달이겠지만 애쉴에게는 수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무희였을 때의 추억도 가물가물한데 스쳐 지나간 인연을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훑자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하네. 나중에 만나면 알은체하기로 해 놓고서는.”

    만돌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음유시인이리라. 보나 마나 한두 공연 정도 협력하며 친해진 사이이겠지.

    혼자서 춤을 추는 것보다 음유시인과 함께 하는 것이 수익이 더 좋았으므로, 그녀는 같이 하자는 자들의 제의를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눈앞의 남자는 무수히 스쳐 지나갔던 많은 음유시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놓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애쉴이 제국 내 떠들썩하게 퍼진 ‘팔라디움의 공녀’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애초에 그녀가 떠돌이 무희였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으니.

    생각을 정리한 애쉴은 남자가 누군지 고민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최대한 맞장구를 쳐 주기로 했다.

    “미안. 이제 기억나네.”

    “미안하기는. 나도 가까이서 보기 전까지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는 정말이지 반갑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애쉴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냉랭한 감촉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왜 이렇게 차가워?”

    “……비를 좀 맞았거든. 너는 잘 지냈어?”

    “그럼.”

    그는 애쉴과 헤어진 후 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녔다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애쉴은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받아주었다. 누군가를 거짓으로 상대하는 것은 회귀 시절 항상 해왔던 일이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만족스럽게 수다를 떤 음유시인이 씨익 웃었다.

    “그동안 내가 어떤 곡들을 썼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한번 들어 보…… 아, 참. 여기 도서관이지.”

    무심코 만돌린을 튕기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가사를 작은 목소리로 속닥이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풍년이 든 마을에서 농부들이 즐겁게 추수하는 것이라든지, 포도주를 담그는 것이라든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노는 것이라든지 등등.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듣고 있는 애쉴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뛰어난 솜씨 덕에 실제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희이던 시절 자주 보았던, 그러나 공녀가 된 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 흰 종이에 검은 잉크가 번지듯 예전에 대한 그리움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과거의 향수에 아련히 젖어 들었다.

    “……어때?”

    본인의 실력을 한껏 과시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랑하는 것 같은 모양새에 애쉴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남자가 얼굴을 약간 붉혔다.

    “그렇게 별로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아가씨.”

    별안간 낮게 퍼지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로브를 들고 있는 에드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처음이었다.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그녀는.

    웬 이상한 놈이 붙어 있어 허겁지겁 온 것이었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는 미소에 그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이분은……?”

    “예전에 잠깐 신세를 졌어요. 이쪽은…… 내 호위를 맡고 계신 분이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개 떠돌이 무희에게 호위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마땅히 설명할 거리가 없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허리춤의 검이 떡하니 보이는데 음유시인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상대로 음유시인은 입을 쩍 벌렸다. 오랜 여행으로 옷이 많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그는 에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애쉴이 부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위? 우와……. 수도로 간다더니, 정말 많이 벌었나 보구나!”

    “응. 많이 벌긴 했지.”

    춤을 춰서는 아니지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와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이 아니므로 더 이상 곤란해지기 전에 음유시인과 헤어져야 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많이 바쁜가 보네. 좀 더 이야기했으면 했는데.”

    그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붙잡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별의 악수를 청했다.

    “기회 되면 나중에 또 보자. 그때는 먼저 아는 척 좀 해 줘.”

    “그래.”

    다시 볼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을 잡은 애쉴이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해 준 것에 고마움을 담아서. 그것을 본 에드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 * *

    도서관을 나온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원래 대화가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애쉴은 에드에게서 누군가를 떠올렸다는 것 때문에 평소보다 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에드는 자신과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그녀의 미소를 곱씹어보고 있었다.

    대체 그 남자가 누구길래.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뜨거운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것을 억지로 내리누른 남자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제가 방해한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오시는 대로 일어나려 했어요.”

    “많이…… 친해 보이시던데.”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요.”

    “……신세를 지셨다는 게 어떤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우뚝, 걸음이 멈췄다.

    애쉴은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일일이 설명해 줄 의무도 없거니와 무희였던 과거는 함부로 밝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죄송합니다.”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지는 똑똑히 전달되었다. 선을 넘은 것이다.

    속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사죄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에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 * *

    한편, 애쉴과 헤어진 후.

    “잠깐 길 좀 묻고 싶은데.”

    만돌린을 등에 메고 부지런히 걷던 음유시인의 뒤쪽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등을 기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짙은 그늘 아래 서 있던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저도 여기 주민이 아닌지라.”

    위험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음유시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지나가려 했다. 그러자 정체 모를 남자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금화 두 개를 꺼내 보였다.

    “도서관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금화 두 개라니. 한 달 내내 연주를 해도 만지기 어려운 금액이 아니던가. 게다가 도서관은 이제까지 그가 있던 곳이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행운에 음유시인은 조심성 없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쪽으로 쭉 가시다가 오른편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워낙 큰 건물이니 바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 이름은?”

    “……예?”

    난데없는 질문에 음유시인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 동작이 채 세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때.

    “뭐, 상관없으려나.”

    라는 읊조림과 함께 정체 모를 남자가 음유시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우둑.

    그것으로 끝이었다. 음유시인이 낼 수 있었던 소리는.

    “전하께서도 참. 상처를 입히지 말라니. 왜 이렇게 어려운 명령을 내리시는지.”

    다른 이들처럼 그냥 죽여서 끌고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시신을 치운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흉흉하게 빛나던 분홍색 눈동자는, 몇 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금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가 방금 죽인 음유시인의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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