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2권
5. 끝을 위한 전주곡 (2)
그날 오후였다. 애쉴은 따사로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이 손에 들린 책을 훑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첫 페이지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꿈이야. 그래, 꿈이야.’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보다는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꿈을 꾸는 동안 잠결에 스스로 한 짓이라고 여기는 것이 편했다.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는 순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목이 졸렸고, 그 충격으로 기절했었다고.
무슨 꿈을 꾸었길래 혼자 목을 조른 것일까. 몽유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쉴은 무심결에 목에 감긴 붕대를 살살 쓰다듬었다. 고용인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 엘린만 하더라도 큰일 날 뻔했다며 펄펄 뛰지 않던가.
당장에라도 공작 각하를 뵙고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시녀를, 애쉴은 잠결에 혼자 그런 것 같으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며 간신히 뜯어말렸다.
‘아니, 대체 무슨 꿈을 꾸셨길래?’
어떤 악몽을 꾸었길래 저 지경이 되도록 제 목을 조를 수가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오는 엘린에게, 애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얼버무렸다. 사실대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심지어 어머니와 같은 외형을 가진 손님이 왔던 적도 없다는데.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 뻔했다.
‘알겠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악몽을 꾸시게 된다면, 늦은 시간이어도 괜찮으니 얼마든지 불러 주세요.’
‘그럴게. 고마워.’
잠결에 자해라도 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불러 달라는 소리였다. 그걸 인지할 수 있었다면 이런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걱정해 준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므로 애쉴은 감사치레를 했다.
“하아.”
붕대에서 손을 뗀 애쉴은 의자에 등을 가깝게 기댔다.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눈을 감았다. 목의 상처에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으려니 자꾸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다른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요즘 사교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책이래요. 한번 읽어 보세요.’
멍한 시선이 책의 첫 페이지에 달라붙었다. 자꾸만 흩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애쉴은 눈싸움을 하듯 책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그녀로서는 진절머리가 날 만한 것이었으나 최근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신다며 엘린이 건네준 것이라 대충이라도 읽어 보기로 했다. 그래야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똑똑.
힘겹게 첫 페이지를 읽어 나가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고용인들뿐이니 보나 마나 엘린일 터다. 밀린 일거리만 끝내고 케이크와 물을 -애쉴이 차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엘린은 따뜻하게 데워진 맹물을 내오고는 했다.- 가져다준다고 했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보다.
“들어와.”
누군지 묻지도 않고 애쉴이 입을 열었다. 끼익, 하며 방문이 열렸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경쾌한 엘린의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고, 규칙적인…….
“……오라버니?”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퇴궁하자마자 온 것인지 외출복 차림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딱딱히 굳어 있는 얼굴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마침 어제 일에 대해 할 말도 있었기에 ‘그러세요.’라며 수긍했다.
라인하르트는 불필요한 격식을 차리는 대신 침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몸은 좀 어떠니?”
그와 만날 때마다 받는 질문이었다. 벨키에로트가 찾아온 어제를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받아온 것이기도 했다.
“나쁘지 않아요.”
애쉴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평소와는 달리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어수선한 마음에 글자가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기 위해 읽는 척을 했다. 자신이 벨키에로트를 싫어하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불렀냐는, 무언의 반항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인하르트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느냐, 혹시 갖고 싶은 것은 없느냐, 요즘 날이 좋은데 밖을 나가 보는 것은 어떠냐 등등.
겨우 저런 말을 하러 퇴궁하자마자 온 것은 아닐 텐데. 앵무새처럼 영양가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으려니 피곤해져 목덜미를 주물렀다. 긴 머리카락이 딸려 올라가면서 가려져 있던 붕대가 드러났다.
그것을 본 라인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그는 유심히 환부를 살폈다.
“이거, 언제 다친 거야.”
“어젯밤에요. 잘 때 어디 부딪혔나 봐요.”
“많이 다쳤니? 의사에겐 보여 봤어? 약은 어떻게…….”
“오라버니.”
무표정한 시선이 안쓰러움과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닿았다.
“별거 아니에요.”
“…….”
“평소보다 일찍 퇴궁하시고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지 않으신가요?”
“…….”
“먼저 말씀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말할까요.”
“……후. 그래, 내가 먼저 말하마.”
침대로 돌아가 그녀와 마주 보는 상태로 앉은 라인하르트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애쉴은 일부러 소리 내어 책을 탁, 덮었다. 앞뒤 설명 없이 응접실로 밀어 넣은 것만 생각하면 꼴도 보기 싫었으나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들어봐야 했다.
“벨키에로트가 청혼한 거, 거절했다며.”
“네.”
“왜 그랬어?”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대방의 표정에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
왜 그랬냐니. 그럼 그의 청혼을 당연히 받아줘야 했다는 말인가?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오라비와 맥이 풀려 할 말을 잃은 누이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패자는 라인하르트였다.
“벨키에로트와 손 한번 잡아보고 싶어 난리 난 영애들이 몇인지 너도 잘 알잖아. 게다가 그는 황태자고.”
“오라버니.”
가시 돋친 부름이 말허리를 잘랐다.
“오라버니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살지도 못 하…….”
“잊어버려.”
“……뭐라고요?”
어젯밤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툭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 것이 책이 아니라 심장인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잊어버리라고.”
“…….”
“돈도 없고, 작위도 낮고, 아무런 쓰잘머리 없는 그런 자식 따위. 잊어버려.”
“……진심이세요?”
“그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힘들게 토해낸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답이 나오자 머리가 빙글 돌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애쉴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움켜잡고 목구멍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탄식 어린 숨이 새어 나왔다.
“잘 생각해 봐, 애쉴.”
라인하르트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의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보지 못한 애쉴은 오라비의 다음 말을 무조건 받아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푹 들어간 살점 사이로 비릿한 맛이 흘러나왔다.
“그와 결혼하면 너는 황태자비가 될 것이고, 나중에는.”
“황후가 되겠죠. 팔라디움 공작가는 외척이 될 것이고요. 그 어느 때보다도 공작가의 힘이 강해질 터이니, 귀족들을 휘어잡는 데에는 딱이겠군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좋으시겠어요.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애쉴!”
“황실의 외척인 이상, 누구든지 기어들어 올 테니까요. 뭐, 그 전에 제가 죽어버리면 아무 쓸모 없겠지만요.”
이를 악문 채 소리치는 라인하르트를 무시하며 애쉴이 싸늘히 말했다.
직전의 회귀에서 벨키에로트와 그녀가 약혼하던 순간,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난 귀족들의 모습에 착잡해 하던 라인하르트와 공작이 떠올랐다. 그게 다 연기였다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까 촉박해지셨나 보네요. 아, 그래서 이제까지 잘 대해주셨던 건가요? 제가 이 가문의…….”
권력 상승을 위한 밧줄이어서?
뱉고 보니 해서는 안 될 말인지라 급히 삼켰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앞에 있는 누이의 것처럼.
애쉴은 눈을 내리깔았다. 스스로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에 그를 마주 보기가 거북해졌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라인하르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가난한 귀족과 제국의 황태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세상 그 누가 오더라도 제국의 황태자를 선택할 것이다. 부와 권력, 어느 하나도 빠짐이 없으니까. 따라서 그의 조언은 합리적이었고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도 않는다. 애쉴은 가난한 귀족을 선택했다. 에르도안이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터다. 벨키에로트가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과거의 라인하르트는 그 선택을 지지해 주었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었다.
그리나, 지금은.
벨키에로트를 선택함으로써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눈에 띄게 됨으로써 인생이 어떻게 파멸했는지도 모르면서.
그동안 보인 모습이 전부 다 연기였구나, 싶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약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던 신뢰의 고리가 완전히 깨졌다.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이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계속 대화해 봤자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애쉴은 상황을 돌파하는 대신 회피하기로 결심했다. 에르도안과의 관계가 끝나 버린 지금. 왜 그를 잊으라 하는 거냐며 왈가왈부할 이유도, 기운도 없었다.
“제발, 애쉴.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팔라디움 공작가는.”
피가 끓는 듯한 애절함이었으나 애쉴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곳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던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진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애쉴은 흔들의자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온 신경이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가끔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날 뿐,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달칵이는 소리가 들렸다.
* * *
혼자 남은 애쉴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애쉴리아 팔라디움으로서 살아야 할 까닭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평민이 되면 에르도안을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원히 애쉴리아 팔라디움으로 남아 있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버렸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기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보며 버티기로 했다. 벨키에로트라는 매서운 폭풍우를 견딜 수 있게 해 줄 든든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버팀목이 아니라 가시나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지쳤다. 완벽하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외로이 내던져진 새가 떠올랐다. 작은 몸 하나 뉘일 곳 없이 위태롭게 날아다니는, 불쌍한 새 한 마리가.
암울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애쉴은 삶을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도 없이 살해당했던, 그리고 이제는 자신에게 버림받은 남자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유언으로 남을 쪽지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생각 같아서는 팔라디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벨키에로트가 왜 에르도안을 건드렸는가. 자신이 공녀라서였다. 팔라디움이라는 뒷배경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가 없어서였다.
뒷배경이 사라지고 평민으로 내려가는 순간, 살아서는 황궁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평생 의지 없는 도구로써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참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도 싫었다. 팔라디움의 이름을 버릴 수 없다면, 하다못해 수도라도 떠나고 싶었다. 어디론가 훌훌 날아가고 싶었다. 수도는 그녀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곳이었다. 에르도안과 만나고, 벨키에로트의 눈에 들고, 시간을 돌리게 된 빌미를 제공한.
게다가 수십 번의 회귀 동안 데이트를 빌미로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어디를 가든 에르도안과 함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일 터다. 지금과는 정반대인 느낌, 감정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속이 비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자.’
팔라디움의 이름을 버리지는 않되, 그들을 피해 도망치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아무도 애쉴리아 팔라디움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그렇게 딱 1년만 버티면. 모든 것이 끝날 테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하자 기운이 솟았다. 애쉴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툭툭 치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무희 시절의 기억을 뒤적거리며, 그때 들렀던 마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수도로 오기 직전 들렀던 마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조용하고 인구수가 적어 좋긴 했지만 수도와 너무 가까웠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많다든지, 팔라디움의 별장이 있는 곳과 가깝다든지, 유동인구가 많아 정체를 들킬 우려가 있다든지 등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사실, 생각나는 마을이 거의 없는 것도 있었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일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이렇게 떠오르는 곳이 없을까. 다시금 의자 손잡이를 치며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아!’
왜 여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애쉴은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상체를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프레디아.
낙원이란 뜻이자,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었다. 애쉴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마을이자 그녀의 어머니가 잠든 곳이기도 했다. 외지인의 방문이 드물어 정보가 늦은 편이니 그녀의 신분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모든 면에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어머니.’
시간을 돌리기 시작한 이후, 애쉴은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무덤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에르도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보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조언을 무시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 터다. 어머니의 환상이 증오 섞인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은.
언젠가, 언젠가는 하며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수십 년이 되었다. 이제는 미룰 수가 없다. 미룰 시간이 없으니까.
마음을 결정하자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새까매진 속을 내보이며 울고, 속상했던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지언정 그리하고 싶었다.
애쉴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벨키에로트 때문에라도 혼자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비록 거리감이 느껴져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의 라인하르트만큼 신뢰가 쌓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뿐이었기에.
* * *
“아버지. 애쉴리아입니다.”
똑똑. 가벼이 노크하며 입을 열자 오크나무로 된 문 너머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언제 들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음성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메마름에 기가 죽어 본인이 먼저 거리를 두었을 것이나 오늘은 안심이 되었다. 감정이 격렬한 라인하르트와 다른 반응이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실례하겠습니다.”
애쉴은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늦은 시간인데도 공작은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책상 한 귀퉁이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서류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다. 반대쪽에는 각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들이 새겨진 서신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거대한 창문을 뒤로한 채, 그 속에 파묻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애쉴은 양손을 모은 채 그를 바라보며 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공작은 보던 것을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앉거라.”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공작과 애쉴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애쉴은 한 손으로 반대쪽의 엄지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공작은 얘기해 보라는 듯 시선을 주었다. 애쉴은 어색하게 굳어진 공기를 억지로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청혼하신 것…… 알고 계시지요?”
“그래.”
그는 답지 않게 뜸을 들이다 대꾸했다. 심히 언짢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며.
애쉴은 그 반향에 용기를 내어 재질문했다. 초조하게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동작은 세게 누르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 생각하십니까?”
그는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네가 원했다면.”
“제가 원하지 않았다면, 거절하는 게 맞다는 말씀이시지요?”
“당연히.”
흔들림 없는 대답에 애쉴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토해냈다.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를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던 공작이 물었다.
“리히가 무어라 책망하기라도 하더냐.”
‘책망하다 못해 속을 긁고 가셨지요.’
애쉴은 말로 표현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 늦은 밤, 자신을 어려워하던 딸이 찾아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인지를 눈치챈 남자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급격하게 피로함을 느낀 탓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이길래 너와 황태자 전하를 이어 주려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다만,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닐 테니 너무 속상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해하라 하실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따뜻한 내용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당황하며 쳐다보고 있으려니 공작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이런 위로의 말이 듣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지.”
본론을 말하라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바뀐 말의 온도에 애쉴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팔라디움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한결같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내렸다. 애쉴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바로잡으며 되뇌었다.
“팔라디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단, 겉으로는 팔라디움으로 남아 있고 싶습니다.”
“가문의 이름은 필요하지만, 관계는 끊고 싶다는 소리로구나.”
“……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냉정함을 잃은 공작은 허탈한 얼굴로 애쉴을 보다가 그녀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뇌까렸다.
“너는 영락없는 프리하의 딸이로구나.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게 이리도 같으니.”
“죄송합니다.”
“무슨 연유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애쉴은 말하기 싫다는 의미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모녀라지만 저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는 것일까. 공작은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정확히 20년 전. 프리하가 그랬었지.”
딸을 보고 있는 공작의 눈에 한 인영이 떠올랐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하늘빛 머리칼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 프리하였다.
“너를 찾지 말라고. 만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네?”
그런 예언을 들었으면서도 자신을 데려왔다는 말인가?
할 말을 잃은 여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흐름으로 주름진 그의 얼굴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너에 대한 소문이 들려온다면. 그땐 이미 늦었으니 만나서 최선을 다해 주라고도 했었다.”
“…….”
“미안하구나.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숨이 막혔다. 입술을 벌리자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에르도안의 문장을 찾아주려 시간을 돌린 순간 자신의 운명은 결정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먼 사랑에 빠져 제 수명을 갉아먹는 저주받은 운명이.
어머니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셨던 걸까. 시간을 돌리다 모든 수명을 잃고, 끝끝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보셨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아버지에게 만나서 최선을 다해 주라는 예언은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아니면, 모두가 죽은 다음 시간이 한 번 더 돌아가리라는 것까지 보셨다든지.
‘거짓말.’
혼란스러워진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애쉴은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남긴 것이었나. 시간을 돌려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지 말라 하신 것이었나. 어차피 바꿀 수 없으니 시작도 하지 말라고. 헛된 희망 따위 품지 말라고?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했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예정된 미래였다는 걸 알게 되자 허무하고 허탈해졌다. 치기 어린 과거의 행동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썩어 문드러진 속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공허하게 비어 있던 눈동자에 되돌릴 수 없는 그림자가 들어서려던 그때였다.
“너를 데려온 후, 혹시라도 너 스스로 팔라디움을 떠나겠다 한다면 이 말을 전해 달라 했었다. 원하던 바를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으니 무척이나 힘들겠지만.”
“네? 그게 무슨.”
입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하던 바를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니. 모든 것을 잃긴 했어도 마지막 회귀에서 에르도안을 살리는 데는 성공했거늘, 이게 무슨 말일까. 마지막 회귀의 결과는 예정되어 있던 미래가 아니었다는 것인가?
애쉴은 먼발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들었다. 그러나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의아한 눈빛에 그녀는 일단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열심히 살라 하더구나. 그리고.”
공작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미래를 의도적으로 바꾸려 하는 건 금기지만, 뜻하는 대로 행동하다 바뀌는 것은 정상이라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더구나.”
툭.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등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다섯 방울.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눈물방울들은 이내 다른 것들과 엉겨 붙어 작은 웅덩이를 이루다가 손등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무표정하게 울던 여자가 상체를 숙였다. 눈가에 고인 눈물들이 비처럼 카펫을 적셨다. 굳게 악문 잇새로 끅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은 바들바들 떠는 애쉴을 안쓰럽게 보면서도 몸을 일으켜 위로하지는 않았다. 그는 딸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고, 프리하의 말을 전해 주면서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공감 없는 거짓된 위로야말로 상대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의 철학이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해요.”
한참을 울던 여자가 더듬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잔뜩 충혈된 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으나, 인형처럼 감정 없던 아까에 비한다면 훨씬 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에르도안의 동선이 변한 것이, 라인하르트의 생각이 변한 것이, 벨키에로트의 행동이 변한 것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비틀리지는 않을지를. 미래가 기이하게 변화하지는 않을지를. 미래를 바꾸려고 의도적으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수많은 근심거리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일 뿐인데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근심거리 하나가 아니라,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던 거대한 족쇄였으니.
“네가 무엇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잔뜩 메말라 있으면서도 슬퍼하는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공작은 여태껏 보지 못한 포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아버지.”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울먹거리던 애쉴은 혀끝에서 맴돌던 단어를 간신히 끄집어 올렸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구나. 그것이 설령 너를 다시 잃는 것이라 해도.”
“아버지.”
“행복해지거라. 그것만이 나의 바람이다.”
진작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의 예언을 알았더라면. 이토록 마음을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팔라디움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복받치는 설움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애쉴은 결국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그날 밤, 집무실의 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 * *
탁, 탁.
오늘따라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가 퍽 길게 느껴졌다. 카펫 위를 걷고 있는데도 발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애쉴은 치맛자락을 끌어 올리며 더욱 부지런히 걸었다.
공작과 면담을 한 것이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수도를 떠나게 해 달라 간청했다. 애쉴리아 팔라디움이 아니라 애쉴로서, 자유로운 무희로서 움직일 수 있게 해 달라 부탁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녀를 신녀로 의심하고 있는 황태자에게 꼬리를 밟히기라도 했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을 보호해 줄 이도 함께 요청했다.
기실 얼마 살지 못한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도 같았으나,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기에 보험을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황태자에게 자신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넘겨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시한부가 된 원인에게 시한부가 되었다는 말을 건넬 만큼 애쉴의 마음은 단단하지 못했다.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내보내야 하는 것도 모자라 혹시라도 있을 황태자의 무력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했으니. 팔라디움의 사병들에게 호위를 맡겼다간 공작가의 움직임에 예민한 벨키에로트가 즉각 알아차릴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맡기자니 믿음직스러운 자가 없었다.
때문에 공작은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딸의 호위가 될 사람을 직접 찾았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사람이 저택의 응접실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황궁에서의 급한 호출로 공작은 저택에 없었고, 라인하르트나 고용인들에게는 비밀에 부친 일이었으므로 애쉴은 홀로 그를 만나 보기로 했다.
듣자 하니 용병이라지만 한 자루의 검과 같이 냉정하다고 소문난 아버지가 직접 데려온 것이니 이상하거나 믿지 못할 이는 아닐 것이다. 실력이든, 인간 그 자체로든. 그렇게 생각한 애쉴은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빛 눈동자에 방금 응접실로 들어온 사람이 비쳤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발에 장미 같은 적안을 가진, 우울한 고양이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목에 새하얀 붕대가 감겨 있는.
멍한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응시하던 남자는, 별안간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상급자에게 향한 예를 보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감정 한 조각 섞여 있지 않은 무심한 어투에 마음이 쓰라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자리에 앉았다.
“말씀은 대강 들었습니다만. 직접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온기 없는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애쉴은 어쩐지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샅샅이 훑었다. 용병이라길래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통의 체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푸른빛이 도는 흑발에 기묘한 빛을 띠는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저 눈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보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신기하고 강렬한 빛깔인데도.
그 외에 특이한 건 콧잔등 위까지 내려오는 무늬 없는 검은색의 나비 가면 같은 걸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붉은 입술이나 강한 턱선,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수려한 이목구비로 보아 가면을 벗으면 미남일 것 같았으나 실제로 보지 못했으니 알 턱이 없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전반적으로 잘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머릿속에 박혀 드는 인상이 굉장히 흐릿하다는 점이었다. 뒤를 돌면 곧바로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을 정도로. 가면을 쓰고 있으니 더 기억에 남아야 할 것 같은데, 의아한 일이었다.
“십수 년간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하다 좋은 기회를 얻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미천한 실력이나마 아가씨를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에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성은 없습니다.”
“아.”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름에 애쉴이 흠칫 놀랐다. 에드가 급히 말을 이었다.
“제 눈 색이 에메랄드를 닮았다고 해서, 에메랄드의 앞뒤 글자를 따서 에드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
애쉴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쿵쿵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음이 아릿하게 저며 왔다.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에드 님께서는.”
살짝 떨리는 음성에 거친 숨이 섞여 나왔다. 굉장히 불안정해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에 에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을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이 깊게 파고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제 신변을 보호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이것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늘져 있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황실 기사분들과 충돌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황실 기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혼비백산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그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흡사 황실 기사가 아니라 건달들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았다.
애쉴은 자신이 황실 기사들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용병 생활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그 외의 것들에 무지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황실 기사분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계시지요? 제국 내 기사 중 최상위만을 뽑아 만든…….”
“무력집단이지요. 그들과 겨뤘을 때 한 합이라도 버틸 수 있다면 어디 가서 검으로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의 실력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들었습니다.”
애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괜찮다고 하다니. 단정한 목소리와 용병임에도 어딘가 모르게 기품 있는 몸짓으로 보아 허풍을 칠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당장 주위에도 있지 않은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라인하르트마저…….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못 미더웠다. 많이 쳐줘 봤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황실 기사쯤이야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게 거슬렸다. 멋모르고 날뛰는 망아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께는 잘 말씀드릴 터이니.”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혹시 보수 때문이라면, 제가 다른 일을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요즘 들어 변경 지역을 가는 상단들이 실력 있는 용병을 찾고 있다던데. 차라리-”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요점을 정확히 파고드는 말에 애쉴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신중히 단어를 골라가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쪽이 맡으시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서요.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제가 아니면 누구한테 맡기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공작 각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저를 데려오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본인이 이 일의 최고 적임자라는, 어찌 들으면 오만함이 깃든 말이었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것이 없어 애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한 자루의 검처럼 냉철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가 그를 데려오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테니까.
“무엇을 우려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아가씨께서 걱정하시는 것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저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면 제가 아가씨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 될런지요.”
거만한 내용과는 달리 그녀를 향한 눈빛에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애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자신을 배려해 준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지는 않았다. 눈앞의 용병도 어렵사리 구했다 들었으니 그를 물리쳤다가는 영영 출발을 못 하게 될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에드는 누가 보면 목숨을 구해 준 건가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기사들과 마주쳤을 때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치셔도 됩니다.”
애쉴은 그의 눈을 피하며 작게 우물거렸다. 이 시점의 벨키에로트는 그녀를 신녀로 의심하고 있을 터이니 가능한 상처 없이 사로잡아 구슬리려 할 것이 뻔했다. 어쩌면 억지로 차를 먹여 인형으로 만든 후 진실을 캐내려 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에드는 달랐다. 계획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인 그를 벨키에로트가 곱게 놔둘 리가 없었다. 시종들을 대할 때처럼 사지를 자르고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앞날이 창창한 남자를 살날이 1년도 남지 않은 자신 때문에 죽을 자리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던가. 그랬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애쉴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과연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지요?”
“저, 말을 잘 타시는 편입니까?”
“네?”
의외의 질문에 애쉴이 미간을 좁혔다. 에드는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가실 거라고 공작 각하께 들었던지라. 실력이 어느 정도 되시는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호흡을 맞춰야 할 테니까요.”
“아아.”
그래, 그 문제도 있었구나.
더욱 심해져 오는 두통에 애쉴은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말이라. 전혀 못 타지는 않지만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에르도안과의 데이트를 위해 교양으로만 배웠을 뿐이다.
“잘은 아니고, 조금은 탈 줄 압니다.”
“다행이네요. 출발하기 전에 한번 호흡을 맞춰 보는 것은 어떠실런지요?”
“네, 그렇게 하죠.”
모든 용건이 끝났다.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다는 상대방의 발언에 애쉴은 드레스를 추스르며 나갈 준비를 했다. 슬슬 라인하르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크게 다툰 날 이후로 일이 바빠졌는지 새벽을 틈타 퇴궁과 입궁을 하곤 했지만 또 누가 아는가. 오늘은 일찍 퇴궁할지.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가벼이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후 응접실을 나가려는데, 문득 괴리감이 들었다. 왜 ‘그걸’ 묻지 않은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돌려 에드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더 하실 말씀이 있느냐며 되레 물을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의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신의 눈빛을 한 여자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에드님, 왜 황실 기사들과 충돌할 수 있다 하는데도 연유를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기사들에게, 그것도 제국 내 최고로 일컬어지는 황실 기사들에게 쫓기는 일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애쉴은 공녀였다. 역모나 반역 같은 1급이 아닌 이상 웬만한 죄목들은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황실 기사에게 쫓길 수도 있다는데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무언가가 찝찝했다.
“아버지께 들으신 것이라도 있나요?”
에드는 상체를 살짝 숙이며 막힘없이 답했다.
“아니요, 공작 각하께는 목적지까지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외엔 들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 왜…….”
“음, 저는 용병입니다. 저희는 보통 의뢰를 맡을 때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게 습관이 되어 여쭙지 않았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혹여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됐습니다.”
필요 없다는데 굳이 말해 줄 까닭은 없었다. 애쉴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싸늘하니 냉기가 묻어나오는 말과 몸짓이었으나 에드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곡선이 걸렸다. 어쩐지 애달파 보이는 미소였다.
* * *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인지라 정원은 후덥지근했다. 그러나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승마를 즐기라고 마련된 드넓은 벌판에서 승마복을 입은 애쉴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손에 눈처럼 흰 백마의 고삐를 쥔 채로.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불현듯 단정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자신처럼 말고삐를 느슨히 움켜잡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의 뒤쪽에는 검갈색의 갈기를 가진 덩치 큰 말이 우아하게 서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팔라디움의 마구간지기가 지극정성으로 키우던 명마 중 한 마리였다.
“네. 에드 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응접실에서의 첫 만남 이후 거의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라인하르트 몰래 집을 떠날 준비를 하던 애쉴에게 공작이 한 통의 서신을 가져다주었다. 이른 시일 내에 말 타는 호흡을 맞춰봤으면 한다며 에드가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 흑마는.”
“아, 공작 각하께서 주셨습니다.”
마구간지기가 알면 울겠군. 애쉴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등자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힘껏 발돋움하며 말에 몸을 실으려다, 신음성을 흘리며 주춤했다.
“흐읏.”
마찬가지로 말에 오르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린 후 간신히 말에 올라탔다. 누가 다 죽어가는 몸 아니랄까 봐 마지막으로 말을 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가 볼까요?”
자세를 정리하자 에드가 말을 걸어왔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도 힘든데 달리기까지 해야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삐를 당겼다.
가볍게 산책하듯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아름다운 백마와 갈색빛이 도는 흑마의 발굽 소리가 듣기 좋게 어우러졌다. 약간의 간격을 둔 채 사이좋게 걷고 있는 두 말의 속도는 비슷했다. 그러나 타고 있는 기수의 상태는 절대 비슷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이 타고 있는 것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여자에게 에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애쉴은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고삐를 움켜잡으며 작게 대꾸했다. 가녀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가누기도 벅찬데 아래에서 움직이는 짐승까지 제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지러웠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에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애쉴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나마 걷다시피 해서 이 정도지 달리기라도 했다간 낙마할지도 모른다. 그가 속도를 올리자고 한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해야 했다.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천만다행으로 그는 속도를 올리자고 제안하는 대신 말을 멈춰 세웠다. 굴러떨어지다시피 하며 내려와 털썩 주저앉으려는데, 에드가 바닥에 제 겉옷을 깔아 주었다. 애쉴은 흐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옷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편했지만 기껏 깔아 준 것을 거부했다간 더 불편해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걸터앉아 소매로 땀에 젖은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딱 봐도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남자의 녹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시선을 느낀 애쉴이 힐끗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 깜짝할 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잘 타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여기서 속도를 조금 더 올리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네요.”
“흐음. 연습이라.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글쎄요.”
연습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연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심하게 대답한 애쉴은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잠든 마을 프레디아는 꽤 먼 곳이었다. 부지런히 말을 타고 달려도 꼬박 한 달이 걸릴 정도이니. 따라서 두 발로 걸어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말이나 마차 두 수단 중 하나를 이용해야만 했다.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말을 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차를 이용했다간 벨키에로트의 눈에 띄기 쉬울뿐더러 위급한 순간에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터다. 수도를 빠져나가는 수단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니. 착잡함에 붉은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졌다.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던 에드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도와드릴까요?”
“네? 뭘 말씀하시는…….”
“말을 더 잘 타실 수 있게끔. 연습 없이, 빠르게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의아함으로 물든 얼굴이 그에게로 향했다. 진심으로 던진 말인지 가늠해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원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말한 남자가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된다면 좋은 거고, 안 되더라도 손해 볼 일은 없었다.
* * *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되물었다. 에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말을 같이 타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 말을 잃은 애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같이 타면 혼자보다야 낫겠지만……. 자주 보는 팔라디움의 사병들조차 옷깃만 스쳐도 죄송하다며 피하기가 바쁘던데. 이 사람은 상대방이 공녀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제 무례함에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바로 사과하는 걸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기실 그의 제안이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살갑게 다가오는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허리를 깊게 숙인 남자를 뒤로한 채, 애쉴은 흑마의 고삐를 잡고 등자에 발을 올렸다. 백마보다 두 배는 커서 그런지 타기가 더욱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먼저 말을 꺼낸 건 본인이면서 왜 망설이는지. 애쉴은 무심히 대꾸했다. 혼자서는 말을 몰지 못하고, 마차를 타기는 싫으니 이 방법뿐이라는 걸 인지한 탓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한 발을 떼는 순간. 더 이상의 머뭇거림은 없었다. 번개처럼 말에 올라탄 남자는 애쉴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고삐를 움켜잡았다. 등에 닿는 온기에 애쉴은 반사적으로 말 등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에르도안과 데이트할 때도 이런 식으로 말을 탄 적은 몇 번 없었는데.
“불편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말이 워낙 컸기에 둘이 타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그에게 붙지 않도록 자리를 잡자 에드가 가볍게 말 옆구리를 찼다. 부드러운 흔들림과 함께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꽃향기를 실은 은발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힘을 좀 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산책하듯 천천히 말을 몰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가 봐도 애쉴은 불편해 보인다 싶을 정도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이면 다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의 말마따나 허리가 아파져 오고 있었다. 애쉴은 살짝, 아주 살짝 힘을 풀었다. 등 뒤의 남자가 어려워서인 것도 있었고, 어색한 상황인지라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녀는 힘을 풀었으니 속도를 높여보라 했다. 말이 어찌 움직이든 말든 몸만 신경 쓰면 되었기에 혼자 백마를 타고 있을 때보다는 확실히 편했다.
“알겠습니다.”
애쉴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속도를 높였다. 점점 크게 올라오는 진동에 애쉴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힘이 빠져 뒤로 확 쏠렸다. 셔츠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팍이 등에 닿았다. 재빨리 몸을 추스르려 했으나 빠르게 움직이는 말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윽.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매끄러운 은발이 뺨을 간지럽히고,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찰나의 순간 에드는 숨을 멈췄다. 지금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고갯짓 한 번으로 다잡으며, 그는 낙마할 수도 있다는 명목으로 멀어지려는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상대에게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바뀐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애쉴은 멍한 표정으로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기마술이 뛰어나서인지는 몰라도 말을 함께 타고 있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가 않아, 프레디아까지 이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싫었지만.
“저, 외람된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수긍의 대답을 했다.
“목에 붕대를 감고 계시길래. 어쩌다 다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이거요. 자다가 부딪힌 거라 별거 아닙니다. 금방 나을 거예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마지못해 대답한 에드는 이후 묘하게 침체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쉴은 침묵을 유지한 채 멍하니 정면만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경쾌한 말발굽 소리만 정원에 울려 퍼졌다.
정원을 한 바퀴 돈 그들은 출발 장소로 돌아왔다. 넓은 초원 위, 주인 잃은 백마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말에서 미끄러지다시피 내려온 애쉴이 비틀거렸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눈은 피곤함으로 약간 풀려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내려와 부축해주려는 남자의 손길을 밀어내며 입술을 떼었다.
“기마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프레디아까지 이렇게 갔으면 좋겠는데요. 불편하실까요? 승마를 따로 연습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
뜻밖의 제의에 놀란 에드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 철회하면 안 되니까.
“저야 당연히 좋……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둘이 함께 타면 오랜 시간 말이 버티기 힘들 텐데…….”
기실 우려한 것은 본인의 체력이었으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 말 핑계를 대었다. 에드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중간중간 쉬어 주면 됩니다. 워낙 튼튼한 녀석이라 별로 지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쉬는 게 좋겠습니다.”
“분부대로.”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는 부디 그녀에게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며칠 동안 함께 말을 타며 호흡을 맞추었다. 애쉴이 팔라디움을 떠난다는 것은 공작만이 아는 비밀이었기에, 그들은 라인하르트나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정원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서 만남을 가졌다.
한참 열정적으로 불타오를 때인 20대 두 남녀가 수차례에 걸쳐 밀회했다.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무언가가 싹터도 진작은 싹텄을 터이나 이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애쉴은 항상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대했고, 에드는 용병답지 않게 예의를 갖출지언정 일정 선을 넘지는 않았다.
영원히 수평선을 걸어갈 것 같은 두 사람. 그것이 그들이었다.
* * *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발 없는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그동안 애쉴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아무에게도, 심지어 엘린이나 라인하르트에게도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저택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과 마주할수록 심란하거니와 곧 끊길 인연에게 깊은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공작의 의견에 따라 병이 깊게 들어 방을 나가기도 힘든 것으로 꾸며두기 위한 것도 있었다. 벨키에로트가 그녀의 부재를 최대한 늦게 알아채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닷새가 지나고…….
마침내, 팔라디움을 떠나는 날이 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저택의 입구 앞에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애쉴이 허리를 숙였다.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공작은 침묵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애쉴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지금 이것이 딸과의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이 문을 나서면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열심히 살라던 프리하의 전언도 있었지만, 세상 모든 것을 등진 것 같은 딸의 얼굴 때문에 알아차린 것도 있었다.
애쉴은 회귀 후 처음으로 옅게 미소 지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었던 남자를 향해.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을 향해.
그것이, 말라비틀어진 여자가 아버지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이었다.
“건강하세요.”
이번에도 공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보던 애쉴은 최후의 최후까지 가지고 있던 망설임마저 훌훌 털어버렸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었기에.
차디찬 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리던 그때였다. 애쉴의 눈에 불 꺼진 라인하르트의 방이 들어왔다.
‘방금 창문이 움직이지 않았나?’
가늘어진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칠흑 같은 시야에 잘못 본 것일 터다.
“하.”
드넓게 펼쳐진 암흑에 자조 섞인 숨을 토해냈다. 팔라디움에 발을 들였을 때에는 밝은 대낮이었는데. 죄를 지은 것도 없건만 어두운 밤에 쫓겨나가듯 도망치는 꼴이라니.
벨키에로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착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처지였다.
애쉴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말 위에 올랐다. 자고 있던 것을 깨운지라 심기가 불편한 짐승이 투레질을 했다. 능숙한 몸놀림으로 뒤쪽에 자리 잡은 에드가 고삐를 그러잡았다.
“가요.”
“소공작님께는 인사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가시라고요.”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단호한 말투에 뾰족하니 날이 숨겨져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움찔거리던 남자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한숨을 쉬며 말을 출발시켰다.
규칙적이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눅눅한 여름 바람이 로브로 덮이지 않은 손등을 할퀴었다. 애쉴은 한 손으로 자꾸만 벗겨지려는 후드를 내리누르며 눈을 감았다.
이것으로 정말 끝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수도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한 벨키에로트와의 악연이.
행운인 줄 알았으나 불행이었던 팔라디움과의 인연이.
그리고…….
에르도안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추억들이, 감정들이.
“해가 뜨는군요.”
마음을 정리하던 여자가 눈을 떴다. 그의 말대로 앞쪽에서 환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몇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렇네요.”
밤새도록 움직인 탓에 한계까지 도달한 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러나 티를 냈다간 쉬다 가자 할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쓰러지더라도 수도 밖에서 쓰러지고 싶었다.
참으로 다행이게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관문과 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저것이 수도와 엮인 마지막 기억이 될 터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안녕히.’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인사에 모든 미련을 묻었다.
애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래도 내가 널 믿어야 할까?”
애쉴이 수도를 떠난 후, 며칠 뒤.
황태자 궁 안에 있는 접대실이었다.
의자에 앉아 반대편의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으나 입꼬리는 바짝 올라가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방금 떠난 찻잔의 주인 대신 그 자리에 앉은 하늘빛 머리칼의 여자가 무심히 입술을 달싹였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맞은편의 벽안과 맞부딪혔다.
“믿으시든, 믿지 않으시든 그건 전하의 자유십니다. 저를 믿지 않음으로써 발생하게 될 불상사 또한 전하께서 온전히 책임지셔야 할 것입니다.”
심히 주제넘은 말이었으나 벨키에로트는 눈썹만 꿈틀거릴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저 말을 한 것이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목이 날아가도 두 번은 날아갔을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애쉴을 건드리지 마.’
주종관계가 아닌 친우관계로서 독대를 청해온 라인하르트의 첫마디였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문 채였다.
애쉴의 데뷔탕트 이후 만날 때마다 들어왔던 말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벨키에로트는 항시 그래왔듯 눈매를 살짝 접으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내가 왜?’
라인하르트는 대답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이런 놈과 엮어 주려 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분노로 귓가를 새빨갛게 붉히면서. 그것을 보지 못한 벨키에로트는 긴 다리를 꼬며 유유자적하게 차를 마셨다.
‘조금 섭해지려 하는군. 친우의 동생을 아껴주려 한 것뿐인데.’
‘그럴 필요 없어.’
꽉 악물린 잇새 사이로 거부하는 말이 힘겹게 토해졌다. 짧은 용건을 마친 라인하르트는 곧장 접대실을 나가려 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이성을 잃고 주먹을 날릴 것 같았으니까. 막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는데, 뱀처럼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공녀께선, 차도가 좀 있으신지?’
관심을 두지 말라 한 지 5분도 되지 않았건만. 친우의 동생에게 굳이 ‘공녀’라는 호칭을 써 가며 신경을 긁는 것이 정말이지 참기 힘들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문고리를 잡은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던 라인하르트는, 이내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거칠어진 감정을 숨기지 못했는지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
‘쯧.’
그때까지 이죽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걸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죽일 수도 없고 팔다리를 자를 수도 없으니. 말 안 듣는 장난감처럼 다루기 어려운 것도 없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노려보던 그는, 탁자 위 제 앞에 놓인 서신으로 눈길을 돌렸다. 본래 라인하르트에게 보여 주고 반응을 볼 생각이었는데.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대감이 확 식어 버렸다.
서신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애쉴리아 팔라디움이 수도를 떠났습니다.」
그녀를 감시하라 붙여놓았던 심복의 메시지였다. ‘팔라디움 공녀께서는 몸이 아파 두문불출하고 계신다.’라는 세간의 소문을 떠올리던 남자가 조소했다. 가짜 소문을 퍼뜨리면서까지 몰래 떠난 연유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뭐, 얼마 살지 못하는 건 사실이니 완벽한 가짜 소문인 건 아닐지도.
‘흐음.’
청혼을 하긴 했지만, 기실 벨키에로트는 애쉴에게 관심이 없었다. 신녀가 아닐까 의심하고는 있었으나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흥미가 뚝 떨어졌다. 공작가의 여식이니 손에 넣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렇게 공을 들여 봤자 얼마 가지고 있을 수 없다니. 설사 애쉴이 진짜 신녀라 한들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녀에게 청혼한 이유도 진짜 결혼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들은 ‘예언’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안타깝게도 틀린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예언이 틀린 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에서 오는 불쾌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탁자를 두드리던 것을 멈춘 벨키에로트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 어렵사리 구한, 제국의 마지막 신녀의 초상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키에로트가 비아냥거렸다.
“공녀가 나와 약혼한다는 말부터 틀렸는데. 이건 어찌 생각하지?”
“…….”
“대답. 이 자리에서 혀가 뽑히기 싫다면.”
답지 않은 과도한 친절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경고 대신 억지로 입을 열어 기어코 피를 보았을 터다. 여인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침묵으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것이 겁을 먹지도 않은 듯했지만.
“미래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도 같습니다. 나비의 날갯짓만으로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벨키에로트가 기껍지 않다는 듯 콧소리를 내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제가 본 것을 토대로 조언 드리는 것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말을 신뢰하실지의 여부는 온전히 황태자 전하의 몫이십니다. 혹여 거짓이라 생각하신다면 얼마든지 제 혀를 뽑으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하는 여자의 음성에는 두려움 한 조각 묻어 있지 않았다.
가소로운 것. 혀를 뽑지 못할 걸 아니 저리 말하는 거겠지. 여유롭게 한쪽 턱을 괸 벨키에로트가 키득거렸다.
애초에 혀를 뽑을 생각 따윈 없었다. 하나를 틀렸다는 것으로 죽여 버리기엔 그녀가 맞춘 것이 꽤 많았던 탓이다. 가령 이미 죽어 버린 자들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라든지, 혹은 애쉴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든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워낙 유명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신녀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침으로써 타인의 과거를 엿볼 수도 있었다.
자고로 미래란 과거에서 비롯되는 것.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능력이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몰랐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연연해봤자 소용이 없으니까.
그러나 벨키에로트는 이를 알고 있었고, 눈앞의 여자가 신녀라는 추측에 힘을 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뭐, 좋아. 그래서 왜 그 얼마 살지도 못하는 반푼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거지?”
몇 달 전 멀쩡히 데뷔탕트를 치른 여자가 곧 죽는다니. 의구심이 들었으나 라인하르트를 살짝 떠보자 정답이라는 것이 바로 드러났다. 비록 애쉴과 약혼할 것이라는 예언은 틀렸으나. 그다음 예언이 제국이 단 한 사람의 손에 멸망하리라는 것이었기에 차마 여인의 조언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절반의 확률로 맞는 예언이라면, 어찌 되었든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이니까.
“그딴 일에 신경 쓰는 것보단 놈을 찾는 게 더 급선무일 것 같은데.”
“애쉴이 그 이정표가 되어 줄 겁니다.”
“공녀가?”
“예. 그 남자는 애쉴의 곁을 맴돌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확신이 깃든 말에 벨키에로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그는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이끌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찾고 있으나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그 어떤 성과도 없었다. 그런 철두철미한 남자가 고작 몇 번 만난 공녀에게 그렇게까지 매달린다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밑져야 본전이었다. 아닌 말로 제국이 멸망하면 손해를 보는 것은 벨키에로트 자신이지 저 여자가 아니었다. 거짓말이라 해봤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펜과 종이를 집어 든 그는 빠르게 휘갈기기 시작했다.
「1. 에르도안 트라펠로의 행적 파악 및 사살.
2. 애쉴리아 팔라디움의 행적 파악 및 확보.
2번을 먼저 처리하되, 1번이 가능할 경우 즉시 이행 후 복귀.」
“클라우드.”
부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늘진 곳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부복했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 로브에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나 체격은 보이지 않았으나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분홍색 눈동자만은 선명했다. 그는 벨키에로트가 건넨 지시서를 소중히 받아 들었다.
“분부대로.”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2번은 곱게 데려오도록. 사지도 붙여놓고. 최대한 신사적으로. 반항한다 해도 상처는 입히지 말고.”
그랬다간 공작가와 사이가 크게 틀어질 수도 있으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지 않는가.
제아무리 공작가가 날고 기어봤자 황실의 힘과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여차하면 제 2황자 칼리아스에게 붙을 확률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건국 이래 팔라디움이 황태자로 책정된 이를 배신한 적은 없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 공작이나 라인하르트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것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괜히 불화의 씨앗을 키워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예.”
정곡이 찔렸는지 엎드려 있던 남자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벨키에로트는 차를 마시며 고고히 말을 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필요 없다. 죽여 버려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남자가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왜 하필 공작가의 여식인 것인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인데. 벨키에로트가 한탄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클라우드가 사라진 자리만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