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끝을 위한 전주곡 (1)
“……씨, 아가씨! 트라펠로 자작 가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애쉴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분홍색 벽지에 금색 수가 놓인 낯익은 천장을 배경으로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왜 여기……?”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눈만 찬찬히 깜빡거리자 엘린이 툴툴거렸다.
“네? 아가씨께서 신신당부하셨잖아요. 트라펠로 자작 가에서 편지가 오는 대로 꼭 좀 알려 달라고.”
“아니, 내 말은…… 아니야.”
땍땍거리는 말투에 머리가 아팠다. 애쉴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엘린은 주인 아가씨의 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분부대로 방을 떠났다.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신 건가 싶었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애쉴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이불에 손이 스치는 감각이 선명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쭉 펴고 손등을 바라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손톱이 보였다. 손을 뒤집자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하얀 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지?’
구속구를 긁느라 손톱이 다 깨져 버렸던 것 같은데. 굳은 피로 딱딱하던 손바닥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게다가 방금 엘린이 그러지 않았나? ‘트라펠로 자작 가에서 편지가 왔다.’라고.
이건 마치…….
느릿하게 머리를 굴리다 결론에 다다른 순간.
두근.
심장이 찌릿 울렸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술을 깨물자 잇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몇십 분이나 지속되어야 할 그 아픔은 몇 초 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를 깨달은 애쉴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양팔로 침대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떨리는 손끝으로 목덜미를 더듬어 옷 속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줄 끝에 매달린 걸 확인했다.
“이게…… 뭐지?”
붉은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당황과 충격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목걸이의 끝에 매달려 있는 건 황금색도, 검은색도 아닌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한 모래시계였다. 모래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 * *
간단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애쉴은 팔라디움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벽을 짚으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움직였다.
에르도안의 편지를 가져온 엘린. 기분 나쁜 심장의 통증. 이 두 가지가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다. 수십 번 그래왔듯이.
‘대체 어떻게?’
모든 수명을 잃고 죽었다. 바칠 대가도 없을뿐더러, 심장의 고통이 이토록 흐릿한 것을 보아 시간을 돌린 것은 본인이 아니었다. 시간을 돌린 직후에는 항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찾아왔으니까.
비슷한 능력을 지닌 누군가가 시간을 돌렸을 수도 있다. 아닌 말로 시간을 다루는 아티펙트를 가진 사람이 그녀 하나뿐이라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간을 돌린 거라면. 왜 기억이 남아 있는 거지?’
과거로 돌아왔을 때, 지워진 미래를 기억하는 건 시간을 돌린 사람뿐이다. 때문에 애쉴은 홀로 1년이란 시간 속에 갇혀 외로운 싸움을 반복해야만 했다.
‘설마, 죽기 직전에 꿈을 꾸고 있는 건.’
상당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벽돌의 감촉과 그 위에 깊게 팬 복잡한 문양에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꿈이라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질 리가 없을 터이니.
‘아니면 어머니처럼 신녀의 힘이 각성 돼서 미래를 보았다던가…… 아냐. 그건 확실히 아니야.’
신녀라 해서 모든 미래를 보지는 못한다. 자신이 정말 간절히 염원하고, 여기는 것에 대한 미래를 ‘일부분만’ 엿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빠짐없이 보는 건 어머니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래시계는 또 왜…….’
애쉴은 무의식적으로 목덜미 부근의 옷 위를 쓰다듬었다. 붉게 변한 모래시계가 숨겨져 있는 자리였다.
수명이 끝난 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래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뭐가 묻은 건 아닐까 싶어 천으로 닦아도 보고, 반응이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흔들어도 보았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런 식으로 변한다는 말은 어머니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뭐가 되었든 중요한 사실들은 변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자신은 더 이상 시간을 돌리지 못한다는 것.
두 번째, 심장이 마지막 회귀 때와 같은 강도로 아픈 것을 보아 남은 수명이 1년뿐이라는 것.
죽음의 끝에서 뜻하지 않게 1년의 시간을 돌려받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우울했다. 소름 끼치기도 했다. 이제 좀 쉴 수 있나 싶었는데 또다시 시작이라니.
‘그냥 죽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으나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두려웠다. 마지막 회귀에서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팔라디움이 멸문당할까 봐. 자신을 원망하는 에르도안의 눈빛을 또다시 보게 될까 봐.
‘살아 있어 봤자 할 것도 없는데.’
수십 번의 회귀 동안 애쉴은 제 삶을 챙겨 본 적이 없었다. 회귀 직후 눈을 뜨면 에르도안을 만나러 달려갔다. 그다음에는 위험한 사고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쫓아다녔다. 오죽했으면 제국 기사단에서 레이디 팔라디움을 명예기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을까.
때문에 에르도안을 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치열하게 살던 무희, 애쉴의 삶.
에르도안 트라펠로를 빼면 남는 게 없는 귀족 영애, 애쉴리아 팔라디움의 삶.
애쉴이었던 삶이라면 모를까 애쉴리아 팔라디움의 삶에 미련 따윈 없었다. 어차피 남은 수명은 1년뿐이다. 할 일 없이 1년을 버티다 죽는 것보단 지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멍한 표정으로 정처 없이 저택을 돌아다니다 얕게 숨을 내뱉었다.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정도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았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발을 옮겼다. 숨죽여가며 1년을 살든, 아니면 이대로 죽든 방으로 돌아가 천천히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애쉴은 벽을 짚고 천천히 걷던 방금과는 다르게 보통 걸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갈색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그림들과 팔라디움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금색 휘장. 그 밑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테이블과 붉은 꽃이 담긴, 은색의 주둥이가 긴 크리스털 꽃병. 바닥에 깔린 은색과 붉은색의 카펫.
수십 년간 함께했던 것들이었으나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번에 죽는다면 다시 보지 못할 것들이라 생각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저택의 구조물을 눈에 담으며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앞을 제대로 보고 걷지 않던 그녀는 그만 마주 오던 남자와 부딪칠 뻔했다.
“앞을 보고 다녀야지.”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타일렀다. 라인하르트였다.
“아…….”
애쉴은 바보처럼 입술을 약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까지의 회귀 첫날에서 늦잠 자던 오라버니가 혼자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말인가.
넋이 나간 듯한 동생의 표정에 라인하르트가 당황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있지요. 오라버니를 믿었어요. 이제까지 본 오라버니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믿음이 부서졌어요. 제가 오라버니를 잘못 본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사정이라도 있으셨던 걸까요?
하고 싶은 말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다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 태도에 놀란 라인하르트가 채근하려던 그때, 애쉴이 선수를 쳤다.
“간밤에 악몽을 꾸어서요. 기분전환 좀 할 겸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하자 찰랑거리는 은발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했으나 귀족다운 우아함이 철철 넘치는 몸짓이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미숙하기 짝이 없던 동생의 달라진 모습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몸이 별로 좋지 않네요.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말투에 크게 당황한 라인하르트가 길을 비켜 주었다. 그녀는 짧은 감사 표시와 함께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따가운 시선이 등 뒤에 꽂혔으나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이에게 왜 그랬느냐며 묻게 될까 봐. 다정한 그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또다시 믿고 싶어질까 봐.
* * *
방으로 돌아온 애쉴이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 두 팔을 겹친 후 상체를 숙여 얼굴을 묻었다. 눈을 꼭 감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1년간 조용히 살아갈지, 아니면…….
‘하아.’
생각하면 할수록 허탈해졌다. ‘어떻게 하면 에르도안을 살릴 수 있을까’를 수 없이 고민하던 이곳에서 자신의 생사를 고민하고 있으려니 퍽 우스웠다.
어쩌겠나. 본인이 자초한 짓인데.
어머니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함부로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려다 수명을 잃고 마음을 다쳤다. 잃은 건 많은데,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본인이 직접 선택한 것이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도 없다.
‘스스로 불행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참으로 바보 같기도 하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에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상체를 책상 쪽으로 더욱 깊이 숙였다.
툭.
무언가가 팔꿈치에 닿았다. 고개를 들자 뜯지도 않은 에르도안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것을 집어 들었다. 팔찌가 들어 있어 그런지 묵직했다.
무게를 가늠하듯 편지를 가볍게 흔들어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숙여 가장 아래쪽의 책상 서랍 제일 깊숙한 곳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에르도안과 관련된 것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책상에 얼굴을 묻으며 우울한 고민을 이어나가려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어쩐지 들뜬 것 같은 엘린의 음성이었다.
묘한 불안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렸다. 애쉴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날, 이 시간에 저택에 있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누가 온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누군데?”
그녀는 머뭇거리다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설마 이 시간에 저택에 있는다고 해서 미래가 안 좋게 바뀌는 건 아니겠지…….
주인 아가씨의 마음을 모르는 시녀는 발랄하게 대꾸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님이라 하시던데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잘생기신…….”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애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갈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 * *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게 몸치장을 마친 애쉴이 방 밖으로 나왔다. 꾸밀 필요 없다고 수도 없이 말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에르도안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난리를 치던 과거의, 아니 하루 전의 모습 때문일 터다.
그녀는 에르도안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었다. 고운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붉은 눈동자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가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 선연했다.
왜 저택으로 직접 온 것일까. 길거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마주칠 일 없는 인연 아니었나.
‘설마, 운명이 또 바뀐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살그머니 혀를 깨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저며 오는 불안감을 억지로 털어내었다.
집에만 있었는데, 시간을 거슬러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미래가 바뀌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번에 시간을 돌린 건 본인도 아니었다. 다시 살아난 것도 피곤하거늘 대체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거면 기억이라도 없어지든가…….
발걸음이 멈췄다. 애쉴은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지금 시간대의 에르도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연기하자. 데뷔탕트 이후 편지만 주고받다가 몇 달 만에 보는 것이니까, 조금 반가워하다가…….
‘그게 가능할까.’
입 안의 여린 살을 콱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망함이, 거부감이, 그리고…… 두려움이.
‘반가운 척은커녕 웃을 수나 있을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냥 악몽을 꾼 탓에 기분이 좋지 않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어차피 에르도안은 오늘을 기점으로 마물을 퇴치하러 서부 지역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만 지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하.’
속이 답답해졌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 주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엮여서는 안 되니까.
큰 돌덩어리가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 무게를 애써 외면하며, 미래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 * *
10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은 족히 걸었다.
응접실의 입구에 도착한 애쉴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문고리를 붙잡았다가,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가……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기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선택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애쉴은 ‘만난다’라는 걸 가정한 상태로 모든 것들을 고민하고 있었다. 대체 왜일까.
고민만 해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문을 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응접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오래 기다리셨…….”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말이 뚝, 끊겼다.
애쉴은 잠시 호흡을 멈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바로 앞의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에르도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뻗은 상태였다. 상대방이 소리만 내고 들어오지를 않자 직접 응접실 문을 열려고 한 것 같았다. 눈동자가 부엉이처럼 커진 것이, 상당히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볼 줄은 몰랐다.
몰려오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려던 그때, 열어두었던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문 사이에 끼어 크게 다칠 터.
에르도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앞으로 당겼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은 터라 그의 체온이 맨살에 고스란히 닿았다. 순간, 애쉴은 그 부분부터 온몸으로 소름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아아아악!”
쿵.
비명을 지르며 붙잡힌 팔을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에르도안의 심장도 같은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떨어졌다.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보랏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몇 발자국을 뒤로 옮겼다.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보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린 마음을 주워 담고, 뜨거워지는 눈가에 힘을 주면서.
자유로워진 애쉴은 응접실 문에 등이 닿을 때까지 몸을 뒤로 물렸다. 맹수를 경계하는 것처럼 가느다랗게 뜨인 눈이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악마 같은 말을 퍼부을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여자는 결국 문에 기대듯 주저앉고 말았다.
“……!”
놀란 에르도안이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그러다 주춤하며 도리어 한 발 뒤로 멀어졌다. 그가 가까워질 기미를 보일 때마다 더욱 크게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봐 버린 탓이다.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경련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시선을 내리깔며 당장에라도 그녀를 껴안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억눌렀다.
“……레이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끊어질 듯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애쉴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았음에도, 에르도안이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어떠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의 손에 닿았던 팔이 전기라도 맞은 듯 저릿했다.
“레이디, 팔라디움.”
에르도안이 재차 불렀다. 제발 대답해 달라는 듯 물기 젖은 목소리가 깊고 간절하게 울렸다.
애쉴은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고자 무릎을 바짝 당겼다.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듯이 몸을 물리며 등을 비볐다. 그러면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왜…….”
에르도안이 고개를 들었다. 슬픔과 설움으로 일렁이는 두 눈이 그녀에게 곧게 꽂혔다.
“왜 오셨어요……?”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가 길게 뽑혀 나왔다.
에르도안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오셨냐는 말에 독을 삼킨 것과도 같은 심정이 되었다. 주먹을 꽉 쥐자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다. 만나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럼에도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손바닥의 살이 패일 정도로 힘을 준 채 애절하게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
“당신이, 보고 싶어서…….”
누군가가 심장을 뜯어내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졌다. 부어올라 있던 눈가가 뜨거워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넘실거렸다.
에르도안은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우는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눈물들을 떨구어 냈다.
애쉴은 침묵했다.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저런 이상 행동을 하나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를 보는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애쉴은 한참이나 덜덜 떨며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가, 문득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래요. 그렇군요. 그러니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벙긋거리는 입술 새로 가쁜 숨만 흘러나왔다.
무서웠다. 자신의 눈앞에서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남자였기에. 구속구를 채우고, 악담을 퍼부어 영혼까지 찢어 버린 남자였기에.
이제까지의 회귀를 토대로, 에르도안이 이유 없이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그동안 보고 겪었던 것들을 전부 덮어 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성적으로 사고가 돌아갈 리 없었다.
애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도망치고 싶다는 듯 몸을 빼며 문에 닿은 등을 비볐다.
“레이디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생각을 눈치챈 에르도안이 선수를 쳤다. 눈물을 지워 버린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가슴 찢어질 만큼 애달픈 표정을 지은 채로.
“일이 생겨 서부 지역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행동을 멈춘 애쉴이 아,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무언가가 달라지긴 했지만, 미래의 전체적인 틀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죽음의 길을 걷겠다는 말에 그런 감정을 느낀 자신을 혐오했다. 아랫입술 밑 여린 살을 콱 깨물자 비릿한 맛이 났다.
“그래서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눈에 띄게 진정된 여자를 보며 에르도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터였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네…… 정말…….”
섭섭하네요…….
아무리 노력해도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한참을 그러던 애쉴은 결국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위험한 곳에 보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해야 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그 감정들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
에르도안은 맨몸으로 맹수 앞에 던져진 사람처럼 잔뜩 겁먹은 애쉴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피가 날 정도로 볼살을 짓씹으며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길에 애쉴이 시선을 올렸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상반된 감정으로 두 남녀의 심장이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먼저 피한 건 애쉴이었다. 그녀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먼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수심 가득한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다 훅 꺼져버릴 것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저, 더 말씀하실 게 없으시다면…….”
“……저도 마침 가야 할 시간이라서요. 먼저 일어나셔도 괜찮습니다. 아직 할 게 남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주인이 떠난 응접실에서 손님이 홀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판단력이 흐려진 애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울먹이던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짚고 후들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덜덜 떠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열고, 마침내 천천히 한 발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
“레이디!”
갑작스럽게 그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회초리로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쿵쿵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애쉴은 반쯤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에르도안은 굉장히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것이 무어라 말하고 싶긴 한데 나오지는 않는 듯한 모양새였다.
애쉴은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느리게 호흡하며 마구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탓에 잘 되지 않았다.
초조함과 동요가 담긴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반쯤 나간 몸이 조금씩 밖으로 기울었다.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몸짓에 에르도안은 그대로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부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밀려 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름을…….”
“……?”
“제 이름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과거에는 종일 불러대던 그의 이름을 오늘은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불안해하던 여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예전처럼, 평소처럼 보이려면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했음에도 막상 부르려니 입이 움직이려 하지를 않았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위아래 입술을 적셨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그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심히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에르도안이 괜찮다고 하려던 그때였다.
“에르…… 도안…….”
바람이라도 불면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휘감겨왔다. 감동 어린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한 번 더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에르도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에르도안…….”
애쉴이 헉헉거렸다.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것은 이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네. 이제 충분합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 것인데 어쩐지 우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이상해졌다. 애쉴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밖으로 나와 문고리에서 손이 떨어지는 순간 뒤돌아 도망쳐 버렸다.
멀어지는 발소리 속에 누군가가 숨죽여 우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 * *
“헉, 허억…….”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하던 애쉴이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녀는 움켜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고 벽을 짚었다. 손바닥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고운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약간 열린 입술 새로는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심장이 요란 맞게 날뛰었다.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한 시야는 빙글빙글 돌았다. 쇳소리가 나는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맛이 났다.
“우욱.”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그것을 토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쓰러지듯 쪼그려 앉아 욱욱거렸다.
“애쉴!”
그러고 있노라니 지나가던 라인하르트가 경악하며 달려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오, 라버니…….”
애쉴이 고개를 든 순간 라인하르트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백짓장 같은 얼굴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를 보는 붉은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 댔다.
“저, 저 어떡해요…….”
두려웠다. 그런데도 미안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뼈저리게 그리웠다.
상반된 수십 가지의 감정들이 상처 입은 영혼을 때렸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입을 열면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면 가슴속에 맺힌 무거운 돌덩어리가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대체 왜 그러냐는 질문만 반복하는 오라비에게, 그녀는 어떡하냐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뱉어냈다. 그의 팔을 붙잡고 몸을 기대며 하염없이 오열했다.
동생의 자지러질 것 같은 모습에 기겁하던 라인하르트는 그녀의 얼음장 같은 손에 다시 한번 놀랐다.
“대체 왜 이러는…… 정신 좀…….”
눈앞의 남자가 무어라 하는 것 같긴 한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시야도 점차 흐려져 갔다. 호흡이 점점 빨라지더니 손끝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 저림은 손등을, 팔을, 상체를 타고 올라가-
“애쉴!”
전신으로 퍼졌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품에서 기절했다.
* *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분홍색 벽지에 금색 수가 놓인 자신의 방 천장이었다. 문득 솟구치는 불길한 느낌에 또다시 회귀한 건가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에르도안의 편지 도착을 알리는 엘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던 애쉴은 이불 속에 있던 한쪽 팔을 찬찬히 꺼내 들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보드라운 이불과 잠옷이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애쉴?”
허리 왼쪽 부근에서 부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를 고치는 듯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익숙한 은발의 미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라버니?”
“다행이다, 다행이야…….”
더듬거리며 부르자 라인하르트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붉게 충혈된 눈 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수십 번의 회귀 중 그의 앞에서 기절한 건 처음이었다. 하여 이런 얼굴도 처음 보았다.
애쉴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저를 챙겨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라든가, 그의 얼굴이 상한 것에 대한 안쓰러움이라든가. 머릿속에서 감정을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부서져 내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물수건을 갈아 준 라인하르트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말할 기운도 없었다.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몸, 많이 좋지 않다 하던데.”
“…….”
“본인은 알고 있었을 거라 하던데…….”
애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절한 사이에 주치의라도 와서 진찰하고 갔나 보다.
그녀가 부정하지 않자 라인하르트는 손바닥으로 열감이 올라오는 두 눈을 꾹 눌렀다. 부어오른 눈이 쓰라렸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들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애쉴이 침묵을 고수하자 그늘져 있던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더욱 음울하게 변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것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아버지가 그렇게도 미덥지가 못했니?”
“아뇨.”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라인하르트는 눈을 덮고 있던 손바닥을 얼굴에서 떨어뜨렸다. 물기 있는 적안이 공허하게 비어 버린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괴로울 때마다 항상 힘이 되어 주었는데. 비록 미래에 대한 것들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홀로 1년의 시간을 버티는 동안 말로 다 못 할 만큼 많은 위로를 받았었는데.
비록 마지막 회귀에서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을 정도인데.
“저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죄송해요.”
잠깐의 궁리 끝에 입을 열자 거짓말이 줄줄 나왔다. 감정이 격하게 흔들리는 상태가 아니라면 본심을 숨기는 일은 정말 쉬웠다. 쉽다 못해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죄송할 일이 아니라, 대체 언제부터. 데뷔탕트 때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 후, 아니다.”
아픈 사람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라인하르트는 입을 꽉 다물었다. 언제부터 아팠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픈 지금이 중요한 거지.
그 뒤로 애쉴과 라인하르트는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어디 더 아픈 곳이 있느냐는 오라비의 질문과 괜찮다는 누이의 답변이 주가 되었다.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 준 후, 마지막으로 상냥하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라인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고 싶지만.’
애쉴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기절했다. 주치의의 진단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더 주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살지 못하리라 생각하니 초조하긴 해도 마냥 붙잡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애쉴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터다.
게다가 누이를 고칠 수 있는 의사가 있을지 찾아보기도 해야 했다. 얼마 만에 찾은 동생인데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었다.
그럼 그만 쉬어라, 하고 나가려던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발을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적개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참, 네가 쓰러졌던 그날, 누가 왔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그자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
동생을 생각해 이름 대신 ‘누가’라는 칭호로 불렀으나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에르도안을 떠올리자 스트레스가 확 치솟았다. 그러나 애쉴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대강 얼버무렸다.
어차피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인데 굳이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아닌 말로 혼자 충격받아 쓰러진 것일 뿐,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세차게 타오르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정한 오라비로 돌아온 라인하르트는 그녀에게 곱게 접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네가 쓰러진 다음 날 잠깐 왔었어. 그때 너무 급하게 가는 바람에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다고 하더라. 제발 꼭 좀 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
에르도안이 보낸 쪽지였다.
홀로 남겨진 애쉴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손안의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금 마음이 답답해졌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 보기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녀는 과거를 되짚으며 쪽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를 상상했다. 마지막 회귀에서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회귀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쪽지를 보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아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에르도안이 꼭 좀 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앞으로도 모를 터였다.
왜냐하면,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쪽지를 열었으니까.
“…….”
내용을 본 애쉴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바늘 같던 그녀의 두 눈은 보름달처럼 커져 있었고, 혈색 없는 입술은 바보처럼 열려 있었다. 쪽지를 쥔 손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어떤 내용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다못해 ‘당신의 생일을 기념하여 반지를 의뢰했다’라는 말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랬는데.
쪽지의 내용은 매우 짧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부디 당신만을 위한 삶을 사시길.」
파르르 떨리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귀에 닿았다. 스르르 흘러내려 은빛 머리카락 속으로 사라졌다.
“미안…….”
애쉴이 울먹거렸다. 목이 메어 왔다.
“미안해요…….”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파견 나간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나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지 않다고.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심장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당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귓바퀴를 타고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목덜미 쪽 이불 시트가 축축이 젖어갔다. 벌어진 입술 새로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연신 새어 나왔다.
애쉴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다가, 붉어진 눈동자로 유언과도 같은 쪽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의 말대로, 1년이란 시간을 나만을 위해 살아 보기로.
* * *
애쉴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1년이란 시간을 대체 뭘 하며 보내야 할까.
자신만을 위한 삶이란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루, 또 하루.
아침에 눈을 뜨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고, 그러다 밤이 늦으면 잠자리에 들고.
애쉴은 집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시간일지언정 그녀에게는 의미 없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자기 자신의 삶을 찾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감각한 표정도, 고저 없는 말투도,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몸짓도 모두 그대로였다. 당연한 일이다. 수십 년의 수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다 못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는데. 고작 며칠만의 여유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애쉴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순간들은 회귀를 시작한 후 맛보았던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 되어 버렸다.
* * *
화창한 어느 날.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그날도 애쉴은 본인 방의 흔들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보며 덧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황궁에 간 줄 알았던 라인하르트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한 얼굴로.
그는 무슨 일 있으시냐며 의아해하는 누이를 반강제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들어가 보면 알 거라며 무작정 응접실로 밀어 넣었다.
영문도 모른 채 손님을 맞이하게 된 애쉴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녕.”
여유롭게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자 현기증이 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 아아.
순간 애쉴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벨키에로트가 건넨 차를 마시고 쓰러진 후 그에게 세뇌당해 모든 것을 실토하던 자신의 모습이 비로소 떠오른 것이다.
가파른 절벽 끝에 선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었는데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인사는커녕 빤히 바라보는 태도에 무례를 지적할 만도 하건만.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손을 까딱거렸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나도 일어날까?”
부드러운 미성이었으나 목덜미가 뱀의 가죽에 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쉴이 무어라 하기도 전, 그는 몸을 일으키는 척하며 가까이 올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두 눈에 힘을 주며 드레스 자락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드레스 자락이 없었더라면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지다 못해 핏방울이 맺혔을 터다.
“팔라디움 공작가의 장녀, 애쉴리아 팔라디움이…… 감히 제국의 작은 태양이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을 뵙습니다.”
“그새 말하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줄 알았지.”
벨키에로트가 이죽거렸다.
“죄송, 합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우아하게 손을 뻗어 제 앞자리를 가리켰다.
스스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애쉴은 그가 가리킨 곳에 가 앉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축축이 젖은 손바닥은 드레스 자락과 하나라도 된 양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대 앞에 선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앞의 사람과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온전히 떠오른 과거의 기억처럼 한낱 도구가 되어 또다시 농락당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향해 있던 겨울보다 시린 벽안이 위험하게 빛났다.
“참으로 비싼 여자야. 그렇지 않나?”
만나자는 서신을 모조리 무시한 것에 대한 답변이리라.
그가 말하는 바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애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둥둥 떠다녔다.
그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입가에 퇴폐적인 미소를 걸면서.
“왜 그렇게 떠는 거지?”
“아.”
벨키에로트와 만날 때 떨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지적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크게 놀란 애쉴은 바보 같은 탄식과 함께 그를 쳐다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적안과 알 수 없는 생각으로 깊게 가라앉은 벽안이 공중에서 뒤얽혔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럴, 리가요…… 전하.”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뇌까렸다. 그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 농락당했던 과거를 엿보게 놔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뜻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혈색 없는 입술 새로 가파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아직, 예법이, 부족하여.”
“그만.”
더듬거리는 말소리가 뚝 끊겼다. 황태자는 성가신 파리를 쫓는 것 같은 동작으로 한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오늘. 친히 이곳까지 온 이유는.”
벨키에로트가 위험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에게 청혼하고 싶어서.”
“……!”
“공작 가에 정식으로 제안하기 전에. 그대의 뜻을 물어보고 싶었지.”
낮은 귀족이라면 강제로라도 취할 수 있었겠지만 애쉴은 제국 내 유일무이한 공녀였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벨키에로트는 마치 큰 선심을 쓴 것처럼 지껄였다.
‘청혼. 청혼. ……청혼?’
현실감 없는 단어가 이미 망가진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고막을 찢는 것 같았다. 벨키에로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넋이 나간 여자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마치, 지금 이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그 말을 꺼낸 것처럼.
“……전하.”
충격이 큰 탓이었을까.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애쉴은 간신히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짝 마른 입술이 간신히 한 단어를 토해냈다. 극심한 갈증이 목구멍을 잠식했으나 감히 찻잔을 들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차를 입에 댄 적도 없거니와 눈앞의 상대방이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전하께서는. 미래를 약속하신 분이.”
“그랬지.”
‘그랬지.’라. 이번에도 과거형이다. 애쉴은 그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부터…….”
되살아나는 과거의 악몽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며칠 전에.”
‘지금’이 ‘며칠 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왜. 대체 왜?’
벨키에로트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에르도안이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미래는 이제 없다는 것을. 과정은 다를지언정 그가 사지로 걸어 들어간 것은 변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무언가가 비틀렸다. 아주 크게.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에르도안을 포기해서?’
과거의 행적 중 달라진 것은 그것뿐인데.
그를 살리러 갔어야 했나? 눈을 뜨자마자 그가 보낸 편지를 뜯고, 팔찌를 차고, 라인하르트와 함께 광장에 나가 그를 만났어야 했나?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극심한 고통에 애쉴은 코앞에 벨키에로트가 있다는 것도 잊고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내 잘못, 또…….’
부르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막혔다.
에르도안의 동선이 변했다. 라인하르트의 생각이 변했다. 벨키에로트의 행동이 변했다. 이번 회귀의 끝은 대체 어떤 재앙이길래 처음부터 이리도 뒤바뀐 것일까.
원하지 않는 회귀에서조차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니. 이럴 거였으면, 그 어떤 자유의지도 허락하지 않을 거였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나. 그대로 끝을 내지 그랬나.
그녀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원망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부디 당신만을 위한 삶을 사시길.’
왜일까. 사지로 향한 남자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 것은.
마음이 아팠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면서도 그를 포기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비수가 되어 사방에서 꽂혀 들었다.
그러나 그 고통 덕분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영혼이 길을 찾았다. 혼란스럽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않았기에 그의 유언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것만이 이 죄책감을 씻을 수 있는 길이니까. 비록 1년밖에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만을 위한 삶.’
자신만을 위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른다. 살아 보질 않았으니.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나?”
이 자 앞에서 덜덜 떠는 것은 아닐 터다.
눈두덩이를 들어 올리자 벨키에로트가 보였다. 얼굴의 웃음기를 싹 지운 그는 맹수가 사냥감을 관찰하는 듯한 날카롭고도 집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흡사 본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익숙한 그 모습에 애쉴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복잡하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움츠리고 있던 몸을 펴며,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기죽은 듯하면서도 의지가 담겨 있는, 띄엄띄엄 떨어지는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참으로 과분한 제안이기에…… 너무 놀라 그만.”
“그래서. 대답은?”
말허리를 뚝 자르며 벨키에로트가 치고 들어왔다. 애쉴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번 겪어 알고 있는 미래와 불확실한 미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죄송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택하리라. 설사 그것이 더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라도. 또다시 후회할지라도.
“저는.”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긴 뜸 들임 끝에 간신히 말을 맺었다. 애쉴은 마음에 두었다던가, 연모하고 있다던가 라는 표준적인 말 대신 생각하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안다.”
“그러니까.”
“그대는 귀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은근히 깔아뭉개는 말투에 애쉴이 고개를 들었다. 불안해 보이긴 했으나 아까처럼 연약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사랑만으로 맺어지지는 않지. 고위 인사들이라면 더더욱.”
데뷔탕트 때 귀족들의 신체 부위를 잘라 버리라 훈수하던 것과 같은 어투였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정의 의미였다.
벨키에로트가 나지막이 키득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고 싶게 벌벌 떨던 여자가 저러고 있으니 묘한 정복심이 솟구쳤다. 가지고 싶었고, 제 발밑에서 울며불며 매달리게 하고 싶었다.
간단하지 않나.
“에르도안 트라펠로.”
왜 그 이름이 여기서.
화들짝 놀란 애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벨키에로트가 만족스럽게 비아냥거렸다.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
애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뜻으로 에르도안을 거론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대답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짓말.
애쉴은 혀끝까지 올라온 단어를 간신히 삼켰다.
여기서 무엇이라 대답하던 에르도안은 죽는다. 맞다 하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일 것이고, 아니다 하면 믿지 못하겠다며 죽일 것이다. 자신이 마음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태껏 그래왔듯이.
풍성하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 반쯤 보이는 적안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뜻한 대로 되지 않자 벨키에로트의 미소가 진해졌다. 보통 때보다 입꼬리를 훨씬 더 끌어올린 것이 심기가 여간 불편한 상태가 아닌 듯했다.
이곳이 황궁이었더라면 이 공간에서 최소 한 구 이상의 시체가 실려 나갔을 것이라고, 애쉴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곳은 팔라디움 공작가였고,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으며, 눈앞의 여자는 함부로 손을 대기 곤란한 사람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벨키에로트의 눈에 붉은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애쉴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당장에라도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손톱 모양으로 파인 상처가 쓰라렸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격한 내용과는 다르게 잠든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듯 사근사근한 어조였다. 기가 눌린 여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벨키에로트가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안정하게 유지되던 평화가 순식간에 깨지고,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그를 따라 일어나던 애쉴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소파에 걸려 나동그라질 뻔했다.
“내, 그 뜻을 존중하도록 하지.”
에르도안과 애쉴을 싸잡아 죽여 버리겠다 해도 이상치 않을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애쉴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목덜미에 검이 겨눠진 것 같았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결혼하느니,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 이용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그 끝이 심히 비참할지언정.
할 말을 마친 벨키에로트는 쌩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참.”
그는 응접실의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몸을 틀었다. 뒤에 남겨진 애쉴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싫었나 보지.”
벨키에로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청혼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관계라면 말이다.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애쉴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차 한 잔 마시지 않은 것을 보면.”
아.
그제야 애쉴은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다. 티타임 내내 찻잔에 입술 한번 대지 않은 것이다.
대는 척이라도 해야 했는데. 상대방을 완벽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제껏 라인하르트나 공작은 가족이라 아무 말 없이 넘어갔으나, 벨키에로트는 달랐다. 그의 앞에서는 다르게 행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된 원인을 앞에 두고 어떻게…….
“…….”
입술을 떼었으나 죄송하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모래알을 씹은 듯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벨키에로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예?”
바보같이 벌어져 있던 입술에서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깔린 카펫의 복잡한 문양을 훑고 있던 여자가 눈길을 들어 올렸다.
벨키에로트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
비웃는 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쉴은 문을 열고 나가는 남자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그가 웃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쾅.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 * *
애쉴은 벨키에로트가 떠난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응접실을 나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그와의 만남에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진정시키느라 그런 것도 있었다. 복도에서 혹시 마주치진 않을지 두려워서이기도 했고.
팔라디움의 응접실은 1층에 있었다. 환한 태양 빛으로 가득 찬 복도를 걸으며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애쉴의 눈에 번쩍거리는 마차가 들어왔다. 온갖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의 양 측면에는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동물, 황금빛 사자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벨키에로트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실루트, 세뇌, 예언.
간신히 밀어 넣었나 싶었던 과거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어지러웠다. 그에게 세뇌당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애쉴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꼭 쥐며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오고자 애를 썼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가쁜 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제야 애쉴은 어떻게 벨키에로트가 팔라디움의 응접실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자신과 단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기억 속에 있던 라인하르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벨키에로트의 앞에 서게 한 적이 없었다. 황태자의 친우이자 충직한 신하로서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으니. 동생의 인생에 있어 벨키에로트가 도움이 되긴커녕 위험인물이라 여겨서 그랬을 터다.
그런데 왜.
오늘은 왜.
왜 벨키에로트가 있는 곳에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일까. 그것도 단둘이서만.
이야기 한번 하지 않고. 동의 한번 구하지 않고.
과거의 라인하르트가 이런 기질을 보였었다면. 애쉴은 절대 그에게 에르도안의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그동안은 어떠한 이유로 숨겨오고 있다가 무언가가 크게 뒤틀린 지금에 와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글쎄.’
단순히 그렇게 정의 내리기에는 무언가가 걸렸다. 그녀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모시는 주군에게 시한부인 동생을 떠맡기려 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들켰다간 가문의 이름에 흠집이 날 것이 뻔한데.
애쉴은 습관적으로 목걸이 끝에 매달린 모래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라인하르트와 알고 지낸 지는 수십 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년밖에 되지 않았다. 1년 동안의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모른다.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라인하르트가 전해 주었던 것들은. 동생을 향한 오라비의 확고한 애정들은.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하게도.
그렇다면 왜 갑자기 바뀐 것일까. 왜 이렇게 벨키에로트에게 우호적으로 되었나.
……아니. 바뀐 것이 맞긴 할까?
직접 보지 않았나. 라인하르트에게 주었던 편지들이 벨키에로트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 있던 것을.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벨키에로트의 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리라 믿고 싶지만.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심들을 외면하고 싶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정말, 믿어서는 안 될 이를 믿은 건가.’
헛바람이 나왔다. 애쉴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옷에 쓸린 상처가 따가웠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런 자극이라도 주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
그러다 문득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들었다. 환하던 1층 복도와는 달리 그녀의 방이 있는 3층 복도는 어둑어둑했다. 창문의 커튼들을 열지 말라 일러둔 탓이다.
불빛이라고는 복도 중간마다 놓인 장식용 촛불들뿐이었다. 집 안의 구조에 익숙한 애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앞쪽의 사람에게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는데,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성별이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체구는 애쉴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애쉴은 그가 서 있는 곳이 자신의 방문 앞임을 알아차렸다. 팔라디움 공작 가에는 업무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저택에 머무르는 손님들이 간혹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쳤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회귀하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녀가 이날 이 시간에 저택 내에 있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으므로.
왜 손님이 시종 하나 없이 복도를 헤매고 있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라인하르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애쉴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라인하르트 혹은 공작의 손님이 길을 잃었다고만 생각했다.
“저…….”
애쉴은 그가 놀라지 않도록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그녀를 눈치챈 상대방이 몸을 돌렸다.
“방을 잘못 찾아오신 것……!”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헛숨을 들이켰다. 촛불에 비쳐 주황색으로 물든 그 사람의 얼굴 때문에.
그는 파도처럼 굽이치는 하늘빛 머리칼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는데,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애쉴과 똑 닮아 있었다.
주춤주춤. 애쉴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다리가 풀려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어 올리자 유령처럼 서 있던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애쉴은 이제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벨키에로트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더욱 심한 떨림이었다.
무표정한 여자는 손을 들어 애쉴의 뺨을 쓸었다. 정말 애쉴의 분신이라도 되는지 몸이 좋지 않은 그녀와 비슷할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 꼭 땅속에서 방금 나온 것 같았다.
그게 신호탄이었을까. 경련하던 입술이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냈다.
“어…… 머니……?”
“많이 컸구나.”
여자는 애쉴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일체의 표정 변화 없이 차디찬 손바닥으로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반대 손을 들어 제 양손으로 애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차마 보고 싶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어머니가 죽던 날이 눈앞에 선연한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숨이 쉬어지질 않아 입을 벌렸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무질서하던 머리가 공포로 둔해져만 갔다.
뺨에서만 느껴지던 냉기가 턱으로 내려가더니 목 쪽에 자리 잡았다. 당황한 애쉴이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 여자는 목걸이의 줄을 그러쥐고서는 줄의 끝에 매달린 물건을 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호수 같은 벽안에 검붉은 모래시계가 담겼다. 여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너!”
“아악!”
쿵.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음에도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얼음 같은 손이 목을 움켜쥐고 있었으나 애쉴은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 대한 공포심이 가시지 않았거니와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시야가 깜깜했던 탓이다.
“누가 감히 마음대로!”
“죄, 송, 커헉…….”
격노한 음성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목이 세게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으나 여자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역시 너 따위를…… 하는 건…… 실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간간이 들려오는 단어들로 보아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았다. 바들거리는 팔로 상대방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흐릿해진 세상이 빙빙 돌면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 * *
애쉴은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도 구름 안을 걷는 듯 사방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익숙한 건물의 윤곽들로 자신이 달리는 곳이 수도 광장의 중심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여기저기에서는 화려한 불꽃들이 펑펑 터졌다. 가족 혹은 연인들로 구성된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다녔고, 날이 저물기가 무섭게 장사를 접던 상점들은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뒤를 힐끔거리며 달리던 애쉴은 막 가게로 들어가려던 사람과 부딪쳐 넘어질 뻔했다. 고성과 험한 욕설들이 뒤통수에 따갑게 내리꽂혔으나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정확히는 정신이 없어 듣지 못한 것이었지만.
“멈춰요, 레이디!”
축제를 즐기러 온 군중들의 소란 속에서도 그녀를 붙잡으려 하는 목소리만은 똑똑히 전달되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고,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 누가 쫓아오는지, 뭐에 설득당한다는 건지도 모른 채 애쉴은 열심히 도망쳤다.
“여긴 지금 위험합니다!”
밧줄로 출입이 통제된 구역에 뛰어 들어가자 근처에 서 있던 경비병이 기함했다. 부지런히 그녀를 쫓아왔으나 예식용 갑옷이 무거웠던 데다 애쉴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고 있었기에 역부족이었다. 지쳐 나가떨어진 경비병의 옆을 한 남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또한 애쉴과 마찬가지로 이를 악문 채 뛰고 있었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흔들렸다.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잠깐만 멈춰 봐요!”
“따라오지 말아요!”
자신을 잡으려 드는 경비병의 억센 팔을 간신히 피하며 애쉴이 사납게 소리쳤다. 양 뺨은 눈물로 얼룩진 상태였다. 반쯤 열린 입술에서 거친 숨이 쉴 새 없이 나왔다. 발목까지 오는 로브 밑에 감추어진 다리는 툭 치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후들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평소에는 잘만 다니던 길이 왜 통제 구역이 되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왜 소리를 지르는지, 사색이 된 경비병들이 왜 뛰어나오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 여유도 없었다.
눈물들로 시야가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눈가가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축축이 젖은 소매로 눈물을 닦다가 비틀거리기도 여러 번. 그러다 어느 순간, 애쉴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균형을 잃고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꺄아악!”
“누가 어떻게 좀 해 봐요!”
다들 목청 높여 소리만 질러댈 뿐 누구 하나 나서려 들지 않았다. 경비병들마저 사색이 된 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애쉴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
별안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히히히힝!
희고 거대한 말이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말 위에 올라 있는 기수의 당황한 얼굴도 보였다. 화려하게 늘어진 안장의 문장을 보는 순간 애쉴은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있는 이곳이 축제 때마다 황실의 일원들이 수도를 돌아보고자 사용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 돼!”
뒤쫓아 오던 남자의 절규 어린 음성을 마지막으로 애쉴은 눈을 감았다. 곧 말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가 꿈속의 그녀를 뒤덮었다.
* * *
꿈에서의 죽음과 동시에 현실의 애쉴이 부스스 눈을 떴다.
밤인지, 아니면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 때문인지 사방은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눈이 어둠에 익자 친근한 천장의 무늬가 보였다. 자신의 방이었다.
방금까지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 검은 천을 덮어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애쉴은 눈을 깜빡거리며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꿈에서 느꼈던 감정의 파편들만 돌아올 뿐 장면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끄러움, 수치스러움, 그리고…… 지독한 절망감.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딱 봐도 좋은 꿈은 아닐 것 같았다. 악몽이라면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으리라. 작게 한숨을 쉰 애쉴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얼마나 생생한 꿈이었으면 현실에서까지……. 잠옷 소매로 눈물을 콕콕 찍어내고 있으려니 비로소 꿈속의 일이 조금이나마 떠올랐다. 스치기만 해도 아릴 정도로 퉁퉁 부었던 눈가가.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훔치며 달리고 있던 자신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도 없이 회귀하는 동안 그녀가 그 정도로 오열했던 적은 딱 두 경우뿐이었다. 첫 번째는 에르도안의 장례식이었고, 두 번째는 모든 것을 잃고 죽기 직전에서였다. 회귀 초반에는 장례식 외에 울 일이 없었고, 회귀 후반에는 감정이 메말라 버려 울지를 못했다. 그랬는데, 대체 무슨 꿈이었기에.
스르르 내려간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애쉴은 무심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답답할 때,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던 버릇이었다.
혹여 이번에는 안 되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이제는 시간을 돌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연스레 손이 그곳으로 갔다.
‘역시 너 따위를…… 하는 건…… 실수……!’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음성에 몸이 굳었다. 꿈의 잔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애쉴은 양손을 들어 더듬더듬 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졸리는 것 같은 착각에 목을 감싸 쥔 채 작게 경련하며 앉아 있다가 황급히 목걸이를 빼내었다. 모래시계는 여전히 검붉었다. 모래알도 없었다.
‘어째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토록 증오에 찬 건 처음 들어보았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몸짓도,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도 모두 다 처음 보았다.
애쉴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런 환상을…….’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자신은 진짜 같은 꿈을 꾸고 있던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문 앞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비 내리던 밤, 관을 살 돈도 없어 볼품없이 구덩이 속에 묻히던 어머니의 시신을.
제발 일어나라며, 함께 들어가겠다며 울부짖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붙잡던 손들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틀림없다. 벨키에로트와 대화하느라 진이 빠진 틈에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죄책감이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무시했다는 죄의식이 증오하는 어머니를 만들어 낸 것이다.
게다가 복도에서 쓰러졌는데 침대 위에서 일어난 것도 꿈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들었다. 지나가던 시녀가 옮겨놓은 것이라면 이토록 홀로 두었을 리 없었다. 깨어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겠지.
애쉴은 마른세수를 하며 심란한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꿈이야. 전부 다 꿈이야.
그러나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그날 밤 잠을 설치고야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 인사를 건네러 방을 찾아온 엘린에게, 애쉴은 벨키에로트를 만나고 온 자신이 방문 앞에 쓰러져 있지는 않았는지를 물어보았다. 어제의 일이 꿈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진실을 직접 듣고 싶었다.
“네? 아니요, 방에서 잘 주무시고 계시던 걸요. 점심도 거르셔놓고 저녁까지 건너뛰시길래 기절하신 건 아닌가 했어요. 많이 피곤하셨나 보죠?”
엘린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키득거렸다. 아가씨의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례함이었다.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공작과 라인하르트밖에 없었으므로, 애쉴은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 최근 아버지나 오라버니의 손님 중에 하늘색 머리칼에 파란색 눈을 가진 여성분이 있었을까?”
“으음. 아니요. 그런 분은 없었어요. 여자 손님은 워낙 드물어서 다 기억하는데.”
“그렇구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애쉴은 양손으로 뻐근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몸을 뒤로 뉘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바보 같은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일까. 스스로가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머, 아가씨!”
옆에 있던 엘린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감지한 애쉴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했다.
“왜?”
“목이 왜 그렇게 되신 거예요? 자다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셨…… 잠깐, 이거 손자국 같은데?”
“손자국……?”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으나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거울을 보고 싶은데,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파르르 진저리를 친 엘린은 손거울을 가져와 그녀의 손에 들려 주었다.
“보세요. 시퍼렇게 멍이 들었잖아요? 세상에. 이거 누가 그런 거예요? 당장 다른 분들께 알리고 올게요. 아니, 혹시 모르니까 같이 가시는 게 좋겠어요! 목 외에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
크게 놀란 애쉴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엘린이 말한 대로 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던 애쉴이 손거울을 놓쳤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