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마지막, 파멸 (4/22)

3. 마지막, 파멸

“……씨, 아가씨! 트라펠로 자작가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또다. 이 지겨운 패턴은.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씁쓸해졌다.

“……일어났어.”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 있던 애쉴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심장이 비틀리는 것만 같은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며 천천히 일어났다. 짜증 날 정도로 익숙한 고통이었으나 아픈 건 여전했다. 아니, 그동안 있었던 회귀 첫날 중 가장 심하게 아팠다.

마지막 회귀이니 당연하리라.

자칫하다간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침대 밖 가지런히 놓여 있는 슬리퍼에 느릿느릿 발을 넣었다.

분명 방금까지 이불 속에 있었던 발인데 왜 이리도 차가운 건지.

손등에 손바닥을 대자 한기가 느껴졌다. 곧 죽을 목숨이라고는 하지만 몸이 안 좋아도 심히 안 좋았다.

달팽이 같은 몸짓, 얼음장 같은 표정에 엘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제만 해도 트라펠로에서 온 편지라면 벌떡 일어나던 아가씨였는데. 악몽이라도 꾸신 걸까.

“저, 아가씨? 따뜻한 차라도 한잔-”

“아니. 차는 필요 없고, 황태자 전하의 편지를 가져와. 오라버니께서 가지고 계실 거야.”

“예?”

처음 들어보는 냉기 서린 음성에 놀란 엘린이 움찔했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방을 나가는 대신 애쉴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고양이상으로 약간 올라가 있던 눈꼬리는 축 처져 있었다. 생기있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딱 다물린 입술은 입꼬리가 내려가 있는 게 만사가 귀찮아 보였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활달하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생김새가 조금만 달랐어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애쉴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색함이 깃든 얼굴을 마주했다. 텅 빈 붉은 눈동자와 당혹감이 서린 갈색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혔다.

‘……지겨워.’

하루아침에 왜 저렇게 바뀌었냐는 사람들의 눈을 보는 게 지겨웠다. 그래도 이젠 마지막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초기에는 저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연기했다. 첫 회차의 그녀처럼 소심하게, 순진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회귀를 반복할수록 초반의 기억이, 감정이 희미해져 갔다. 이 시점에 라인하르트 오라버니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어떤 얼굴을 했지? 고용인들에게 말을 걸 때는?

애쉴은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차피 또 돌아갈 텐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때부터 그녀는 연기하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다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자신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테니까.

그 패턴이 끊임없이 반복되다 보니 마지막 회귀에서도 애쉴의 행동은 이전 회차들과 큰 차이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당당하고 거침없이 굴었다.

어차피 1년 후면 죽을 텐데 뭐.

“안 나갈 거니?”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엘린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황급히 허리를 숙인 후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봄바람 같던 아가씨가 왜 저렇게 변한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서.

“흐윽.”

시녀가 나가자마자 얼굴이 고통으로 확 일그러졌다. 애쉴은 깊은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였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그러고는 찬찬히 심호흡하며 심장의 통증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익숙하지만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아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프지 않던 날들이.

“후우.”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애쉴은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 책상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에르도안의 편지를 뜯어 그 속에 있는 팔찌를 꺼내 들었다. 능숙하게 한 손으로 팔찌의 고리를 거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애쉴!”

라인하르트였다.

잠에서 깨자마자 달려왔는지 항상 단정하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옷은 무려 잠을 잘 때 입는 가운차림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헉헉거리며 들어오는 남자를 본 애쉴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제발 노크 좀 하시라고 몇 번이나.”

아차. 그녀는 급히 혀를 깨물며 뒷말을 삼켰다. 제 오라비가 노크도 없이 찾아왔던 것들은, 미래에 있을 일이자 이미 지워져 버린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천만다행으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라인하르트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뇌까렸다.

“벨키에로트의 편지를 가져다 달라 했다며?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꿈을 꾸었어요.”

고저 없는 음성이 말허리를 잘랐다.

밑도 끝도 없었으나 라인하르트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애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꿈이라면. 설마?”

“네. 미래를 보았습니다. 제국과 관련된 미래를요.”

무언가를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오랜 속담을 떠올리며 애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미소였다.

* * *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단 두 마디뿐이었으나 상당한 무게를 지닌 말이었다.

무심하게 예언한 애쉴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살포시 눈을 감으며 차향을 들이마셨다. 티타임이라도 하는 것 같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의 앞과 옆에 앉아 있는 남자들은 심란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팔라디움 공작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라인하르트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발을 덜덜 떨었다. 둘 다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달그락. 차를 한 모금 마신 애쉴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기한은?”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공작이 질문했다. 새벽부터 외출했던 그는 애쉴이 미래를 보았다는 연락에 급한 일도 미뤄두고 돌아온 상태였다.

“1년 정도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마른세수를 몇 번 한 라인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데. 현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수가 2황자를 지지하는 수보다 훨씬 더 많아. 미치지 않고서야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 리가 없잖아.”

“현 황후가 이트라와 연줄이 있지 않습니까.”

의미심장한 애쉴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현 웨이센 황실의 권력 구도는 황태자 벨키에로트에게 치우쳐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 반발하는 수 또한 적지 않았다. 황태자를 낳은 여성이 황제의 침실을 정리하는 시녀였던 탓이다.

벨키에로트가 태어났을 때는 후세가 없던 시기였다. 때문에 황제가 그를 황실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태어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능력 있는 후계자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특유의 영특함으로 제국 내 절반 이상의 귀족들을 포섭하기까지 했다.

차선책이 없긴 했지만 출신 성분과 성격에 하자가 있음에도 이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 벨키에로트의 총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벨키에로트가 7살이 되던 해에 황후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황후는 웨이센 제국의 북쪽, 얼음의 나라 이트라의 공주였다. 이트라는 성대한 선물과 축하 사절단을 보내 그녀의 출산을 치하했다. 또한 어떻게든 그들의 핏줄을 제국의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제국의 귀족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몇몇 힘 있는 귀족들에게는 이트라의 왕실과 사돈을 맺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까지 던져 가면서.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황후의 아들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늘어나지 않았다. 나이 차도 있거니와 개인 능력 차이가 너무나도 심했다.

때문에 이트라와 황후는 어떻게든 벨키에로트를 흠집 내기 위해 무수한 뒷공작을 펼쳤다. 장차 그가 피에 미친 폭군이 될 것이란 소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벨키에로트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 또한 2황자, 칼리아스를 깎아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간이 지난 후.

피 터지는 권력 싸움에서 차기 황좌를 거머쥔 건 벨키에로트였다. 병으로 쇠약해진 황제가 능력 하나만 보고 그를 후계자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이 벌써 3년 전 일이었다.

“잠잠하길래 포기한 줄 알았거늘.”

팔라디움 공작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라인하르트 또한 이를 갈았다.

“어떻게 감히 외세를 끌어들일 생각을…… 잠깐. 이트라 놈들이 수도까지 쳐들어올 동안 기사들은 뭘 하고 있었길래 막지 못한 거지?”

“최근 들어 변방 마물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웨이센의 병력 소모를 위한 이트라의 짓입니다. 수도와 가까우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대규모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게다가…….”

애쉴은 수십 차례의 회귀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모두 말했다.

단 한 가지, 황후의 계략을 눈치챈 누군가의 밀고 때문에 실제로는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제외하고. 그래야 벨키에로트를 쥐고 흔들 수 있을 터이니.

그녀의 바람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뻣뻣하게 굳어 있던 두 남성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제가 본 미래에서, 승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애쉴의 말이 끝나자 팔라디움 공작의 집무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 남성은 한동안 식어 빠진 차를 들이켜며 분노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하긴. 목숨을 건 일을 허술히 준비할 리 없지요.”

라인하르트가 침묵을 깨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상반신을 앞으로 기댄 채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깍지를 낀 상태였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눈동자는 격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몇십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깊은숨을 토했다. 그의 굵은 손은 당장에라도 황후를 잡아 처넣고 싶다는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후우,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로구나. 리히, 채비해라. 당장이라도 황태자 전하를 알현해야겠구나.”

“잠시만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난데없는 제안에 놀란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보름달만 하게 커졌다. 그들의 기절초풍할 것 같은 시선을 한몸에 받은 여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전하를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 말이죠.

애쉴은 상황에 맞지 않게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었다.

* * *

한가로운 오후였다. 여름이 시작되는 5월이었으나 한여름처럼 쨍쨍한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양산을 들고 거리로 나선 애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라인하르트는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연신 그녀를 흘깃거렸다.

“정말 괜찮겠어? 아무리 네가 공녀라지만 신녀라는 걸 밝힌다면.”

“황궁에 갇혀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겠죠. 여태껏 다른 신녀들이 그래왔듯이.”

“…….”

“아버지나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셔봤자 전하께서는 믿지 않으실 거예요.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증거를 찾는답시고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는, 제가 신녀라는 걸 밝히는 게 제일 빠르지 않겠어요?”

남의 이야기인 양 즐겁게 대꾸하는 그녀를 보며 라인하르트는 기가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녀의 힘을 각성하고 미래를 보기 시작하면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것과 실제 눈으로 본 것의 차이는 엄청났다. 찰나였으나 함께 걷고 있는 이 여자가, 동생이 아니라 동생의 모습을 한 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눈질로 점점 심각해지는 얼굴을 확인한 애쉴이 노래하듯 리듬감 있게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어차피 1년밖에 못 살거든요.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킨 여자가 싱긋 웃었다.

그들의 발길이 멈춘 곳은 한 액세서리 가게였다. 화려하긴 했으나 돈이 많은 귀족이라면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을, 기성품을 파는 그런 가게.

애쉴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어딘가로 향하더니 팔찌를 하나 가져와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은색 줄에 손톱만 한 자수정이 박힌, 에르도안이 그녀에게 선물한 것과 꼭 닮은 팔찌였다.

순식간에 쇼핑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정면만 바라보고 걷는 게 명확한 목적지가 있어 보였다. 심란한 얼굴로 뒤를 따르던 라인하르트가 급히 보폭을 맞췄다.

“장신구가 필요하면 보석상에 가서 맞출 것이지, 뭐하러 이런걸. 누누이 말하지만, 돈을 아낄 필요 없다니까?”

“저도 알아요. 아는데…… 시간이 없네요.”

‘시간’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애쉴의 얼굴이 슬픔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기에, 라인하르트는 그녀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만을 볼 수 있었다.

“신녀라는 걸 알리면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족들은 만날 수 있으니까, 주문을 넣어놨다가 완성되면 내가 가져다줘도 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정말’ 시간이 없어서요. 아, 에르도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동생이 멀어져갔다. 라인하르트는 환하게 웃으며 연인을 향해 뛰어가는 애쉴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우는 것처럼 보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평생을 가도 알지 못할 터였다.

* * *

팔라디움 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황궁 입구에 도착했다.

“이쪽입니다. 전하께서는 뒤뜰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실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애쉴은 황태자가 보낸 시종을 잠자코 따라갔다.

어찌나 이른 시간이었던지 여름인데도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절대로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난리 치던 가족들 몰래 나온 것이기에, 지금 황궁에 방문한 건 그녀 혼자였다.

애쉴은 부지런히 발을 옮기며 뒤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표정한 겉모습과 달리 마음은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자신이 없어졌다는 걸 안 공작이나 라인하르트가 쫓아오진 않을까 초조했던 탓이다. 당장 몇 시간만 지나도 들킬 일이긴 했지만.

‘제발 담판을 짓기 전에는 아무도 오지 않으셨으면.’

그들이 곁에 있다면 이야기를 제대로 끝낼 수 없다. 틀림없이 방해할 테니까.

애타는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나 길 안내를 하는 시종의 발걸음은 여유롭기만 했다. 심지어 못마땅한 얼굴로 뒤를 힐끗거리기까지 했다.

그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애쉴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모습이 황태자를 만나는 것이라기엔 수수한 탓일 터다. 가능한 조용히 움직이고자 엘린에게만 외출 준비를 부탁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드넓은 황궁 곳곳에 설치된 공간 이동 마법진을 통과하고, 걷고, 통과하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둡던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걷기 편하도록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손이 슬슬 아파지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황태자가 기거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쉴은 무의식적으로 치맛자락을 더욱 꽉 쥐었다.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그가 기다린다는 정원 안쪽에 가까워질수록 여름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꽃향기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공작가의 영애분이시니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만, 전하를 찾아오시는 모든 분께 말씀드리는 것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는 즉시…….”

그녀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종의 잔소리를 흘려보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노란 장미, 흰 작약, 붉은 엉겅퀴, 분홍 철쭉, 그리고…….

보라색의, 라벤더.

보라색 꽃을 보자 그와 같은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떠올랐다.

‘에르도안.’

카페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피어올랐다. 그녀가 세운 계획이 잘 진행된다면,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기사단에 급한 일이 생겨서. 당분간은 연락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처로움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에서 뱅뱅 맴돌았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이번 시간에서 애쉴은 마물 퇴치를 하러 간다는 남자를 막지 않았다. 1회차 이후 처음이었다.

1년 후 죽는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1년간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그를 떠나보낸 후 1년 안에 운명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어, 저기 좀 보세요. 저게 뭐죠?’

애쉴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쪽을 가리켰다.

에르도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모래시계를 꺼내 들었다. 모래시계의 벽면에 그를 위해 준비한 팔찌를 붙인 다음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황금빛 모래 한 알이 스르르 떠오르더니 모래시계 벽면을 통과했다. 하늘거리며 팔찌 쪽으로 날아가 팔찌와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일을 마친 애쉴은 모래시계를 다시 옷 속으로 넣었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으며 심장이 후벼 파이는 듯한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쉴은 잘못 본 것 같다며 대꾸한 후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은색 줄에 보라색 보석이 박힌 팔찌였다.

‘이걸 받아주시겠어요? 항상 차고 다니셨으면 좋겠어요. 행운을 부르는 팔찌거든요.’

죽음을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한들 1년간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남은 수명은 이제 1년여 남짓뿐. 에르도안이 죽음을 피하더라도 더 이상은 그를 만날 수 없다.

볼 수 없다면 생사라도 알고 싶었다.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수명까지 써가며 마법을 걸었다. 그가 팔찌를 차고 다닌다면 생사 정도는 알 수 있을 터다.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풀지 않겠습니다.’

팔찌를 채워 주자 에르도안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애쉴은 울고 싶은 걸 참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그의 미소를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의 눈동자와 닮은 라벤더 꽃을 보며 결의를 불태우던 그때였다.

“이게 누구신지.”

나긋나긋한 음성이 귀를 때렸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가 달려들 타이밍을 노리는 것 같았다.

애쉴은 몸을 흠칫 움츠렸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마음을 바짝 조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미 넝쿨을 배경으로 한, 흰 테이블과 두 개의 하얀색 의자.

벨키에로트는 그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몸을 비스듬히 틀어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댄 채 턱을 괴고 있는, 심히 여유로워 보이는 상태였다.

애쉴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황태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팔라디움 공작가의 장녀, 애쉴리아 팔라디움이 감히 제국의 작은 태양이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을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강녕?”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뀐 남자가 손짓했다. 길 안내를 마친 시종은 애쉴에게 의자를 빼 준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벨키에로트는 손수 그녀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졸린 듯 눈은 반쯤 감겨 있었으나 그 사이로 보이는 벽안은 차갑게 빛났다. 티포트를 내려놓은 그는 엄지로 입술을 훑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굉장히 퇴폐적인 모습이었지만 경계심 어린 애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내 연락을 깡그리 무시한 레이디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군.”

“죄송합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벨키에로트와 독대하는 게 처음도 아니거늘 항상 이 모양이다. 첫 만남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탓일까.

무더운 날씨인데도 척추를 따라 전신에 한기가 퍼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났다.

황태자는 잔뜩 긴장한 여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희귀 동물을 관찰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미묘한 기류가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도 날 피해 다니시던 분께서, 오늘은 왜 만나자 하셨는지. 들어나 볼까.”

벨키에로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애쉴은 마른침을 삼켰다. 허벅지 위에 얹어진 주먹에 힘을 꽉 주며 허리를 곧게 폈다. 혀를 약간 내밀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제가 전하를 뵙고자 한 까닭은, 한 가지 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쪽으로 고개를 깊숙하게 기울였다. 그러고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무슨 부탁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짙은 눈썹이 둥글게 휘었다.

그러나 애쉴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트라펠로 자작가의 작위를 박탈하여 주십시오.”

“흐음?”

의외의 부탁에 벨키에로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턱을 괸 손을 말아 올려 자세를 바꿨다.

“트라펠로 자작가라. 그런 가문도 있었던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순진하던 회귀 초반의 그녀였다면 벨키에로트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트라펠로 자작이 누구인지, 왜 작위를 박탈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을 것이다.

애쉴은 바로 앞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연한 초록빛 수면에 잔뜩 경계하고 있는 여자의 인영이 비쳤다.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상상했었다. 벨키에로트와 독대하는 지금 이 상황을. 그런데도 왜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 두렵고 힘든 것일까.

‘안 돼. 정신 차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어.’

침착하게 할 말을 고르던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데뷔탕트 때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불쌍하여 춤 한번 춰 주었더니, 꼴에 같은 귀족이랍시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동냥했다 하기엔 좋아 죽는 것 같았는데.”

“공작가의 평판이 있는데 싫어하는 티를 낼 수야 없지요.”

“춤 한번 췄다고 작위를 박탈해 달라. 참으로 무서운 여자로군.”

벨키에로트가 턱을 괸 상태 그대로 상체를 기울이며 비꼬듯 입을 놀렸다.

누가 누구보고 무섭다고 하는 건지. 애쉴은 속이 뒤틀리다 못해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싱긋 웃어 보였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그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벨키에로트가 다시 속을 긁었다.

“이렇게나 무서운 레이디께서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신 걸 보면. 거머리 하나 처리 못 하는 위인이었군, 팔라디움 공작께서는.”

“아버지께는.”

아차. 혀를 씹어 말을 멈췄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약점을 발견한 벨키에로트의 눈이 배고픈 맹수처럼 번뜩였다.

애쉴은 순간적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미간의 주름을 폈다. 절대로 휘말려서는 안 된다.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왜? 걱정하실까 봐?”

얼마나 우습게 보였는지 이젠 은근슬쩍 말도 놓는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태도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녀는 손톱이 파고 들어갈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꽉 붙들었다.

“팔라디움의 이름으로 건드렸다가 앙심이라도 품고 덤벼들면 저만 손해일 테죠.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 하지 않습니까.”

“팔라디움이 그 정도로 겁쟁이일 줄이야.”

가문을 싸잡아 모욕하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긁었다. 벗겨진 살갗 아래 붉은 기가 올라왔다.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따끔거렸다.

수십 번의 회귀로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생각했거늘. 수십 년의 세월도 눈앞의 남자와 대화하는 데에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대체 라인하르트 오라버니는 이런 사람의 비위를 어떻게 맞추고 다니는 것인지. 새삼스레 그가 존경스러워졌다.

벨키에로트는 살짝살짝 변하는 애쉴의 표정을 흥미 있게 관찰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비틀린 욕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울려 보고 싶었다. 그 고운 얼굴을 눈물 자국으로 망가뜨리고 싶었다. 제발 그만하시라 매달리는 꼴을 보고도 싶었다. 분노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것도 퍽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팔라디움을 욕보여도 애쉴은 새빨개진 얼굴로 빙긋 웃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여 주지 않았다.

‘김새는군.’

데뷔탕트에서 이랬었다면 울어도 진작 울었을 텐데.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그는 능글거리던 표정을 싹 지워 버리고는 톡 쏘듯 물었다. 새파란 동공이 흉흉하게 빛났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애쉴이 당황했다.

그녀의 변함없던 미소에 금이 가자 나락으로 치달았던 기분이 아주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벨키에로트는 미간을 구긴 채 애쉴에게 턱짓을 했다.

“내가 왜 그대의 청을 들어주어야 하나?”

“아.”

이제야 원점으로 돌아왔다.

애쉴은 머리카락 끝까지 타고 올라온 공포감을 내리누르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제 청을 들어주신다면.”

그녀는 얼굴을 당당히 들어 올렸다.

“미래를 엿볼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미래?”

나직하게 묻는 벨키에로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입매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올라갔다. 구미가 당긴다는 얼굴이었다.

애쉴은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빙긋 웃었다. 심호흡하며 벨키에로트가 그녀에게 이상하게 집착했던 이유를 천천히 내뱉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제국의 마지막 신녀, 프리하 님의 딸이라는 것을요.”

“큭.”

순간, 벨키에로트의 잇새로 승리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입꼬리와 광대뼈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벽안은 광기와 야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런 것도 꿈에 나오던가?”

웃음기 서린 어조였으나 다정하진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협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쉴은 몸을 부르르 떨며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털어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수천 번은 상상한 장면이었으나 막상 눈앞에 닥치자 두렵고 무서웠다.

“예. 그뿐 아니라 전하께서 저를 시험하기 위해 트라펠로 자작가의 영식을 죽이려 하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 에르도안의 허무한 죽음의 배후에 있던 사람은 황태자 벨키에로트였다.

데뷔탕트가 끝난 후, 벨키에로트는 애쉴에게 편지 공세를 퍼부으며 대놓고 접근했다.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어 과거를 파헤쳤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애쉴의 어머니가 제국의 마지막 신녀인 프리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애쉴 또한 신녀일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을까.

간단했다. 그는 애쉴이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를 죽여 보기로 했다.

애쉴을, 팔라디움을 직접 건드리기에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라는 타이틀이 발목을 잡았다.

벨키에로트는 애쉴이 정말 신녀의 힘을 물려받았다면 미래에서 본 에르도안의 죽음을 막고자 그를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신녀가 아니었고, 그 시도는 그대로 살인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에 벨키에로트의 미소가 약간 지워졌다.

“그래? 트라펠로 영식과 관련된 미래를 볼 정도로 호감 있는 사이였나 보지?”

“아뇨. 그 반대입니다. 제발 좀 떨어졌으면 하고 바랄 때마다 꿈에 나오더군요. 그때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타나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흐응.”

믿을 수 없다는 듯 벨키에로트가 코웃음을 쳤다. 애쉴은 손톱자국으로 가득한 손바닥을 가슴 위에 얹으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예상하셨다시피, 저는 신녀입니다. 제가 본 미래를 현실로 바꾸고자 오늘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벨키에로트가 뱀처럼 웃었다.

“두 번 다시 달라붙지 못하도록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은 어떨런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하나, 저는 전하께서 그자들을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예상한 상황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지근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난로를 삼킨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가라앉혔다.

애쉴이 에르도안을 위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벨키에로트가 이죽거렸다.

“왜지? 신녀께서 싫다 하시는데 겨우 작위 박탈 정도로 끝나서야 되나.”

“당연히 그걸로 끝날 리가 있겠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애쉴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초승달 같은 눈썹을 둥글게 휘고, 눈꼬리를 접으며 한쪽 입꼬리를 높이 끌어올렸다. 날카롭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혐오로 이글거렸다.

“감히 바라건대, 제게 그들의 신변을 양도해 주시길 청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귀족의 핏줄 하나만을 믿고 설쳐대던 자들을 진흙탕에 머리끝까지 쳐넣어 개처럼 기는 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귀족이었던 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하!”

한순간이었으나 벨키에로트는 똑똑히 느꼈다. 우습게 보던 여자의 가느다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그를 향한 것이었으나 벨키에로트는 에르도안에게 향한 것이라 착각했다.

죽여 버리겠다 하면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거늘. 그는 살기를 날려대며 더 심한 제안을 던지는 애쉴이 퍽 마음에 들었다.

‘역시 팔라디움은 팔라디움이라는 건가.’

하기야, 단숨에 죽여 버리는 것보다 명예를 빼앗고 비참하게 구르는 걸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터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짐짓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하지만 글쎄, 어쩌면 좋을까. 아름다운 레이디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해서 가문을 몰락시키는 건 너무 과한 처사 같지 않나?”

애쉴은 입꼬리를 더욱 비틀어 올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얼핏 스쳐 지나갔던 만족스러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빌미야 만들면 되지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쯤이야 전하께서는 일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거 참. 내가 완전히 사람을 잘못 보았군. 그댄 정말 무서운 여자야.”

데뷔탕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벨키에로트가 전율했다.

신녀의 힘을 각성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이 정도로 손바닥 뒤집듯 달라질 줄은. 겁먹은 것 같으면서도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쟁취하려 달려든다. 한치의 예측도 불가능한 게 정말이지 매력적인 여자였다.

최후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그를 살피던 애쉴이 활짝 웃었다. 자, 이제 이걸로 끝이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 귀족의 몰락을, 그리고 제국의 미래를.”

무해한 미소와 함께 다가오는 달콤한 제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대의 청, 받아들이도록 하지.”

벨키에로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애쉴의 승리였다.

* * *

벨키에로트와 손을 잡은 애쉴은 더 이상 팔라디움 공작가에 돌아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지 못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겠지.”

그 자리에서 황족 모독죄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트라펠로 자작가의 작위를 박탈해 버린 벨키에로트는 애쉴을 황태자 궁 안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본인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황태자비 방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전하?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행보에 애쉴이 적잖이 당황했다.

신녀라는 걸 밝히면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 내의 신녀들을 위한 거처에서 머물 줄 알았지, 황태자비의 방에 들어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흔들림 없던 표정이 무너지자 벨키에로트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왜, 싫은가?”

“……머리가 나쁜지라 전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초조함으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애쉴은 경계심 어린 몸짓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를 따라간 벨키에로트가 손가락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제법 총명한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애쉴은 부들거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멋대로 돌아가려는 눈동자를 그의 얼굴에 고정했다. 절대로 겁먹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대로 잡아먹힐 테니까.

악착같은 그 모습에 벨키에로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에 색기와 집착이 피어올랐다. 지독히도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결혼하지.”

“네?”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애쉴은 순간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충격과 공포로 적안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결혼이라니?

“하, 하오나 전하. 전하께는 약, 약혼하기로 결정되신 분이.”

“아, 그만두기로 했다.”

“예? 대체 언제……?”

약혼 파기라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인데. 이번 시간대의 오라버니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데.

그녀는 자신의 질문이 무례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벨키에로트는 실수를 지적하는 대신 입술이 닿을 듯 얼굴을 들이밀더니 충격적인 말을 속삭였다.

“지금.”

* * *

애쉴이 황궁에 방문한 다음 날.

벨키에로트는 애쉴리아 팔라디움과의 약혼을 공표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에 본래 그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던 후작가는 펄쩍 뛰었다. 후작가에 줄을 대고 있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벨키에로트는 단 한마디로 정리해 버렸다.

“황태자비 감으로 후작보단 공작 출신이 낫지 않나?”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이었다. 씨근거리던 후작이 입을 다물자 나머지 귀족들도 조용해졌다. 이미 결정된 사항에 반대해 봤자 미움만 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탓이다.

하루아침에 황태자비가 바뀌어 버린 상황.

그 상황을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공작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절대 생각 없다더니,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습니다.’라며 비아냥거려도 심통한 얼굴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이 또한 벨키에로트의 계략이었다.

새로운 신녀가 나타났다는 걸 알게 된다면, 2황자 칼리아스와 황후를 비롯해 시커먼 속내를 가진 자들이 애쉴에게 접근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온갖 수를 쓸 것이다.

벨키에로트는 그걸 가만히 지켜볼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신녀인 애쉴을 가까이에 두면서도,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는 방법.

바로,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애쉴은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만을 맹신한 나머지 중요한 부분을 놓쳐 버렸다. 에르도안을 황태자의 눈에서 빼돌리는 것만 신경 쓰느라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애쉴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정황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빌미로 약혼을 하는 선에서 그치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버리고, 자신의 수명을 잃게 만든 남자와 결혼이라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쫓겨난 에르도안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 * *

벨키에로트가 약혼을 공표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애쉴은 온갖 핑계로 약혼식을 차일피일 미뤘다. 정말이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채 1년도 살지 못한다. 약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면 엄한 팔라디움 공작가에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황태자의 눈을 피해 머나먼 타국땅으로 보내버린 에르도안이 혹시라도 소식을 들을까 불안했다.

그러자 벨키에로트는 약혼식을 하지 않으면 팔라디움의 황궁 출입을 금지시키겠다며 협박했다. 라인하르트를 통해 트라펠로 내외를 돌보고 있던 애쉴로서는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녀는 결국 벨키에로트와 약혼식을 올리고야 말았다. 소문이 제국 밖으로 퍼질 만큼, 아주 성대하게.

“미안하다. 이렇게 나올 거라 언질 줬어야 했는데.”

라인하르트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팔라디움 저택을 떠나기 직전, 애쉴은 그에게 전후 사정이 담긴 편지를 남겼다.

벨키에로트가 트라펠로 자작가의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

그들을 살리기 위해 트라펠로 자작의 작위를 박탈시키겠다는 것.

명예와 아들을 동시에 잃고 좌절에 빠질 트라펠로 내외를 잘 돌봐 달라는 것까지.

수명이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애쉴은 모든 계획을 그에게 공유했다. 그녀가 황궁에 갇힌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라인하르트 하나뿐이었으니.

“트라펠로 내외분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황태자 궁의 응접실에서 오라비와 마주한 여자가 물었다. 황태자의 약혼녀답게 그녀는 매우 화려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그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울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는 듯한 모양새였다.

“여전하시지, 뭐.”

트라펠로 내외는 어느 시골 마을에 유폐된 상태였다. 나이가 많아 노동력이 없을 거란 이유를 핑계로 노예가 되는 것은 면했다.

애쉴의 부탁을 받은 라인하르트는 이 모든 것이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진실을 귀띔해 주었다. 또한 사돈이 될 수도 있었던 가문을 챙긴다는 구실로 그들을 조금씩 챙겨 주었다.

진실을 모르는 벨키에로트는 작위를 박탈해 달라 해 놓고 구원자인 척 돌봐주는 꼴이 참으로 우습다며 비꼬았다. 한 가문의 몰락을 만족스럽게 지켜본 그는 더 이상 트라펠로 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쉴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현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다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에르도안은…….”

“노예가 뭐 별수 있나.”

툭.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손등을 적셨다. 애쉴은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인하르트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동생을 보았다. 에르도안의 소식을 전해 줄 때마다 애쉴은 늘 울곤 했다. 마음 같아선 꼭 껴안고 다독여 주고 싶었으나, 벨키에로트와 약혼을 한 이상 그녀는 동생이 아닌 미래의 황태자비였다. 함부로 만질 수가 없었다.

애쉴은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라인하르트가 헛기침하며 주의를 끌고 나서야 물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꼭 쥐고 있던 눈물 젖은 편지를 건넸다.

“잘 부탁드려요. 제겐 오라버니뿐이에요.”

편지에는 벨키에로트의 눈을 피해 에르도안을 데려오는 방법과 트라펠로 내외를 국외로 빼돌리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만이 고안할 수 있는 방법들이었다.

“그래. 항상 몸조심하고.”

라인하르트는 건네받은 편지를 재빨리 품속에 숨겼다. 애쉴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안다면 벨키에로트는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터다. 애쉴은 물론이고 팔라디움 공작가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겨우 그런 것이 두려워 그녀를 외면할 만큼 라인하르트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네, 오라버니도요.”

때마침 황태자의 시종이 응접실의 문을 가벼이 노크했다. 시간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애쉴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감옥 같은 황태자비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약혼식 후 벨키에로트는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녀를 붙잡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애쉴을 찾아와 미래에 관해 물었다. 제국에게 닥칠 재앙이 있을지, 후계자인 그가 언제쯤 황위에 오를지, 그의 정적인 황후가 무슨 수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곤란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애쉴은 두리뭉실하게 넘겼다.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대답하는 대신, 은유적으로 돌려 표현했다.

그때마다 벨키에로트가 위험한 눈빛을 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진짜 신녀가 아니니까. 모래시계로 직접 겪은 1년만을 알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한 답을 듣지 못한 황태자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그때마다 애쉴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내전’에 관한 키워드를 제공했다. 상대방이 안달 나게끔 정보의 핵심만을 쏙 빼고 전달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라인하르트가 에르도안을 구출할 때까지.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내일이면 괜찮을 거야, 내일이면…….’을 읊조리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지옥 같은 2달이 흘렀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애쉴에게 찾아온 것은…….

달콤한 성공이 아니라 끔찍한 파멸이었다.

* * *

다른 날과 다름없던 어느 날이었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애쉴을 찾지 않던 벨키에로트는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같이 마시자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애쉴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대 말이야.”

벨키에로트는 나긋하게 읊조리며 손등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의 뺨을 쓸었다.

따뜻한 손이었으나 칼날 같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상대방이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벨키에로트의 눈꼬리가 곱게 접혔다. 입매도 위협적으로 비틀렸다. 얼굴을 굳힌 채 얌전히 앉아 있던 애쉴은 약혼자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벨키에로트는 기분이 최악일 때 화를 내지 않는다. 평소보다 훨씬 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다. 몇 개월 동안이나 그의 성격을 받아주다 보니 알게 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몸이 찬 건 여전하군. 이렇게나 약해서야.”

날이 갈수록 애쉴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그녀의 몸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긴 한 걸까 싶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으며 조금만 오래 돌아다녀도 숨이 찼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마음의 병이 워낙 깊어서인 탓이 컸다. 그녀는 쿡쿡 쑤시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음 써 주신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항상 거짓으로 그를 대하는 애쉴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벨키에로트는 몸이 약한 황태자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방 안에 실루트라는 하얀 꽃을 도배해 놓았다.

실루트는 그 향만 맡아도 통증이 완화되고, 꽃잎을 빻아 물과 함께 마시면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일종의 마취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실루트의 효능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애쉴도 수많은 회귀 중 처음으로 실루트를 사용해 본 것이었다.

벨키에로트가 제안하기 전, 그녀는 실루트라는 꽃이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래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벨키에로트가 테이블 위의 찻잔을 향해 턱짓했다. 마시라는 뜻이다.

애쉴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심기를 거슬렸다가 그 자리에서 신체 일부가 날아간 시종들을 수도 없이 본 탓이다.

방 안에 가득 채워진 실루트의 향기를 찢고 차의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처음 맡는 냄새였다. 코끝을 찡그리며 억지로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매운 향이 목구멍에 닿았다. 숨을 참고 간신히 삼키자 벨키에로트가 물었다.

“어떤가, 차 맛은?”

“처음 맛보는지라, 콜록, 조금 당황했으나, 흐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고개를 돌려 기침하며 어렵사리 대꾸했다.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내던 그때.

톡톡. 벨키에로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애쉴은 그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그의 미소는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푸른 두 눈은 감출 수 없는 광기와 흥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머리카락이 쭈뼛하니 곤두섰다. 숨소리도 죽여가며 눈치를 살피고 있으려니 벨키에로트가 다시 한번 찻잔 쪽으로 턱짓을 했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시종들의 팔다리를 잘라 버릴 때 짓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큰일 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찻잔에 손이 가질 않았다. 무언가가 불길했다. 애쉴이 머뭇거리기만 하자 벨키에로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더니 반강제로 입을 벌려 들이붓다시피 마시게 했다.

“컥, 커헉.”

안에 있던 걸 다 쏟아내고 나서야 찻잔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정신없이 기침했다. 식도가 불타는 것처럼 쓰라렸다.

“깜빡 속았지 뭐야.”

“왜, 이러시는, 쿨럭.”

기침이 워낙 심했던 터라 그녀는 벨키에로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들고 있는지를.

“감히 나를 속여?”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내던지는 소리 또한 함께였다.

차게 식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기침을 참기 위해 이를 꽉 악물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

순간, 전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정지된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종이 위에는 누군가의 필체가 유려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도 잘 아는 필체였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간 라인하르트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으니.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길래 그냥 내버려 뒀더니. 이런 앙큼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무거운 돌덩이로 짓눌린 것처럼 가슴에 지독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눈밭으로 변한 머릿속에 끊임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왜 이게 여기에 있는 거야. 대체 왜. 어째서?’

라인하르트 오라버니가 배신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수십 번의 회귀를 통해 겪은 라인하르트는 좋은 오라비이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맡긴 거였는데. 대체 왜?

벨키에로트의 분노 어린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충격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윽!”

눈앞이 핑 돌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어지러워지더니 온몸의 힘이 빠졌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그녀는 의자째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의식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거운 쇳덩어리라도 묶어놓은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신의 감각이 둔해지며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 게…… 무…… 슨…….”

닫히려는 눈꺼풀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바들거리는 입술로 가까스로 글자들을 토해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에 다가온 벨키에로트가 피식 웃었다. 참혹하게 매력적인 그의 모습은 악귀처럼 섬뜩했다. 그는 헝클어진 은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며 짐짓 다정스레 입을 열었다.

“오직 주인만을 생각해야 할 도구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으니.”

이젠 입술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애쉴은 얼굴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 거의 보이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공포와 두려움으로 크게 흔들렸다.

“내 친히 가르쳐 주어야겠지.”

거대한 그림자가 얼굴을 덮었다.

그 그림자가 사라졌을 때, 애쉴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 *

그날 이후.

애쉴은 혼자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인형이 되었다. 오직 벨키에로트의 명령에만 따르며 미래를 알려 주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는 방에 있던 실루트 꽃과 그녀가 마신 피아르 차의 합작품이었다.

두 식물은 각각 있을 땐 위협적이지 않지만, 체내에 함께 흡수되는 순간 마지막으로 본 사람만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벨키에로트가 실루트 꽃으로 방을 장식한 진정한 이유였다. 그녀의 건강 따위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칼리아스 놈이 내게 반기를 든다, 이거로군.”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애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공에 고정된 붉은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무표정한 얼굴은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세뇌에 걸린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에르도안과의 관계와 트라펠로 내외를 빼돌리려던 계획은 물론이요, 1년 이내에 일어날 모든 일과 유사시를 대비해 최후까지 아껴두었던 내전에 관한 이야기까지.

말을 마친 그녀가 입을 다물자 벨키에로트는 빙긋 웃으며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그만 자도록. 내가 깨울 때까지.”

“네…….”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인사한 여자가 미끄러지듯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명령대로 눈을 감은 채 끝없이 펼쳐진 어둠에 몸을 맡겼다.

* * *

애쉴은 본래 신녀가 아니었다. 모래시계를 통해 겪은 미래로 신녀 행세를 하는 것일 뿐, 본질은 신녀가 아니니 잠을 잔다 해서 미래를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미래를 보는 대신 무언가에 대한 꿈을 꾸었다.

애쉴은 꿈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꿈속의 그녀는 어떤 사람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사람이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사람과 함께 동굴 속에서 아름다운 돌을 구경하며 깔깔거렸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거대한 호수에 놀러 가 배 위에서 알 수 없는 말을 속닥거렸고, 카페에 앉아 그 사람의 손으로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꿈속의 애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항상 웃었다. ‘그 사람’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댄 채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현실의 애쉴은 공허하게 꿈속의 그녀와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처럼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그 사람’에게서는.

‘그 사람’은 꿈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안타깝게도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얼굴이 까맣게 지워져 있던 탓이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거라곤 그의 손이 크고 따뜻하다는 것과 굳은살이 잔뜩 박인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어떤 미래를 보았지?”

하지만 그 느낌 덕분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때때로 찾아와 자신을 깨우는 남자와 꿈속의 남자는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꿈에서 본 것들은 그의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애쉴이 고개를 저을 때마다 벨키에로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쓸모없는 신녀를 재웠고, 그녀는 명령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꿈을 꾸었다.

장소와 계절은 계속 바뀌었지만 꿈속의 자신과 ‘그 사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텅 빈 마음으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벨키에로트가 찾아와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었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를 물었다. 그때마다 애쉴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노라 답했다.

점차 벨키에로트가 애쉴을 찾아오는 빈도수가 줄었다. 그러나 애쉴은 인지하지 못했다. 애초에 현실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차츰차츰 꿈을 꾸는 시간이 길어졌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주인을 맞이하는 것보다 꿈속의 자신과 ‘그 사람’을 구경하는 게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좋다……?’

어느 순간 현실의 애쉴은 제가 느낀 감정을 깨달았다. 영혼을 묶고 있던 사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에 덮여 있던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혀갔다.

먼발치에서 꿈속의 자신과 ‘그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던 여자는 이제 없었다. 애쉴은 한가로이 산책로를 걷는 커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코앞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애쉴의 인형 같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초점 없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 변화에 맞춰 ‘그 사람’의 얼굴도 선명해져 갔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남이었다.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사님.

‘기사? 기사가…… 뭐지?’

무의식적으로 나온 뜻 모를 단어에 애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말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꿈속의 자신과 ‘그 사람’을 보면 볼수록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죽음, 모래시계, 회귀, 마지막. 그리고…….

‘에르도안.’

그 어떤 단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르도안’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에서 시작된 묘한 감각이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으나 그저 행복했다.

회귀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건.

그 행복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온 것은 꿈속에 갇힌 지 7개월이 지나서였다.

어쩌면 영원히 깨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꿈에서 탈출한 날이 그녀 인생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 * *

그날도 애쉴은 꿈속에서 ‘그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7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은 그녀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꿈속의 자신만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애정이 그리웠다. 그를 계속 볼수록 그리움은 짙어지기만 할 뿐 가라앉지 않았다.

애쉴은 생각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바라봐 준다면 좋겠다고,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아무 의미 없는 몸짓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언제부터 이렇게 욕심이 많아진 걸까.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애쉴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 사람’에게 한 손을 뻗었다. 멍한 얼굴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를 어루만지듯 허공을 쓰다듬었다.

만지고 싶었다. 욕심이 났다.

그 순간.

짤랑, 손목에 감긴 팔찌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방울이라도 달린 것처럼.

항상 ‘그 사람’ 혹은 꿈속의 자신만이 담겨 있던 눈동자에 다른 것이 담겼다. 은색 줄에 붉은 보석이 달린, 수수하면서도 촌스럽지는 않은 팔찌였다.

이게 뭘까.

애쉴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팔찌를 어루만졌다. ‘그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잊고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의 손이라도 만지는듯한 그런 동작이었다.

팔찌를 쓰다듬을수록 가슴속 깊은 곳이 미어져 왔다. 무언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보고 싶어. 단 한 번이라도, 먼발치에서라도, 그림자만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올라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럼에도 애쉴은 팔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슬피 울면서도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때였다.

‘나, 오늘 외출할게. 나도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기쁨 어린 목소리였다.

‘……?’

당황한 애쉴은 눈물 젖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사랑을 논하는 두 남녀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다시 팔찌에 시선을 주었다. 깃털을 다루듯 부드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 손수건, 그분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누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리던 그 순간.

‘꼭 가셔야 하는 건가요?’

‘아프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이상한 목소리가 주변에서 메아리쳤다.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잠시 멈췄나 싶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런데도 그 소리는 계속 들렸다. 누군가가 마음속에 속닥거리는 것 같았다.

‘가지 말라 하면 됐는데.’

‘시간을 돌리면, ……도 살아날 수 있는 거잖아.’

‘또 실패했어. 대체 언제쯤 성공할 수 있을까?’

‘그만, 그만해. 제발 그만!’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애쉴은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그 와중에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시간을 돌리지만 않았어도.’

‘그러니까 내가 만회해야 해.’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야만 해.’

고개를 마구 휘젓고 있던 그때. 별안간, 은팔찌에 매달려 있던 보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빠르게 부풀어 오른 붉은 빛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붉게 변한 시야에 애쉴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아주 빨갛고 따스한 느낌이 드는 주먹 크기의 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했잖아.]

붉은빛이 속삭였다. 그 빛을 담은 적안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약속?’

[그를 살려내기로.]

‘그가 누군데?’

빛은 대답하는 대신 덩치를 크게 부풀렸다. 규칙 없이 모양이 이지러지더니, 한 남자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꿈속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꿈속의 그녀와 항상 같이 있던 ‘그 사람’이었다.

‘……!’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던 애쉴의 동공이 확 커졌다.

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에르도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저미던 그 단어가,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살리고 싶었던,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라는 것을.

* * *

기나긴 방황을 마친 여자가 눈을 떴다. 깊은 심연 속에 온몸이 짓눌린 채 가라앉아 있다 해방된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눈을 떠서였을까.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판단하기도 전,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애쉴은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잡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바스러져 내렸다. 침대보 위로 은빛 가루가 흩날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솟구쳐, 애쉴은 허겁지겁 옷 속에 숨겨진 모래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모래시계는 황금색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마지막 회차를 허무하게 보낸 것이다.

애쉴은 절망했다.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누르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에르도안의 팔찌에 걸어 두었던 마법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놀랐다.

‘살아, 있어?’

벨키에로트에게서 차를 받아 마신 뒤 쓰러진 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계획을 전부 다 들켰으니 에르도안이 죽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일단 나가야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숨소리를 죽여 가며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지듯 나왔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데다가 죽기 직전이라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기다시피 하며 방을 가로지르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주변을 살폈다. 마지막에 벨키에로트와 함께 있었으니 틀림없이 이곳은 황태자의 궁일 거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기이하게도 시종들이 있어야 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기울였으나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사방은 그저 고요했다.

‘뭐지?’

애쉴은 복도로 나왔다. 벽을 짚고 힘겹게 발을 옮겼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어 발소리가 날 위험 따윈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한 발을 뗄 때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점차 발걸음이 빨라졌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거야?’

바삐 움직이던 그녀가 이제까지 감금되어 있던 황태자 궁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빠져나온 순간.

“허억.”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애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복도의 꼴은 엉망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어야 할 화려한 샹들리에는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야 할 아름다운 그림들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처참히 찢긴 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붉은 양탄자는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는데, 이따금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로 그것이 핏자국임을 알 수 있었다.

보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났다. 먹은 것이 없어 신물이 올라왔다. 공포심이 머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소름 돋은 전신이 벌벌 떨렸다.

‘이, 이게 대체?’

충격에 물든 채 피로 물든 양탄자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때.

“뭐야, 이건.”

서늘한 칼날이 목덜미에 닿았다. 애쉴은 까무러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딱 봐도 황족, 혹은 그에 비등하는 직위를 가진 여자의 차림새에 검을 쥐고 있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칼등으로 애쉴의 얼굴이 자기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 낯이 익었다. 그는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끝에 기억해냈다.

자신의 주군이 보여 줬던 초상화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사로잡으라던 바로 그 여자였다.

* * *

애쉴은 남자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150년 만에 나타난 소드마스터를 선두로 제국에 원한을 가진 나라들이 연합군을 결성했으며, 단 몇 달 만에 제국을 멸망 직전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을.

왜 미래가 바뀌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연합군을 이끌었다는 소드마스터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났다.

그들이 칭하는 소드마스터란, 바로 에르도안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전.

그는 그녀의 앞에서 가족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구속구를 채워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차가운 말투, 그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멀쩡한 곳 하나 없는 영혼을 죽여 버렸다.

‘대체 왜……?’

그녀는 세뇌당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여 에르도안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를 노예로 만든 순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다뤄질 줄은 몰랐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트라펠로 가문의 작위를 박탈해 달라 청한 건 변하지 않는다.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오라버니에게 맡긴 편지가 발각되었으니 벨키에로트는 에르도안의 가족들을 처참하게 죽였을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성과 감정이 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알아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억울했다.

목숨을 바쳐가며 살린 결말이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신을 휘감았다. 수 없는 회귀 동안 곪아 왔던 상처가 한 번에 터졌다.

평생의 의미를 잃었다.

지쳐 버린 몸과 마음이 수만 갈래로 찢겨 나갔다.

그 심정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이 삶의 끝을 알려왔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떴을 땐, 차가운 지하 감옥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라인하르트를 믿고 계획을 세웠던 그때?

이번에는 성공할 거라며 자만하던 그때?

아니, 아니다.

마지막 회귀 전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정확히는 회귀를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어긋남의 시작은 애쉴, 자신이었다.

에르도안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팔라디움 공작가는 멸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라펠로 자작가는 평화롭게 살아갔을 것이다. 제국이 멸망할 일도, 뒤틀린 미래에 휘말려 운명이 바뀌어버린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것은 본인 탓이다.

놓았어야 할 것을 놓지 않은 벌이다.

그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운명을 거스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가시밭길의 끝이 천국인 줄 알았거늘, 그보다 더한 지옥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심장이 사라진 것 같은 공허함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무도 알지 못할, 허무하게 흘려보낸 시간을 후회했다. 그를 사랑했던 자신을 증오했다.

“원하는 게 있나?”

바로 그때였다. 기묘한 빛깔의 녹안을 가진 남자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 철창을 꽉 붙잡았다. 심장이 크게 한번 뒤틀리더니 차츰 잦아들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애쉴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자 끝인 그녀의 연인, 에르도안을 떠올리면서.

‘두 번 다시…… 그를 사랑하지 않게…….’

제가 느끼는 이 고통을…… 그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철장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비틀거리던 몸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기다란 은발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애쉴은 비참하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씨, 아가씨! 트라펠로 자작가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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