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두 번째 (3/22)
  • 2. 두 번째

    “……씨, 아가씨! 트라펠로 자작가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 있던 애쉴이 눈을 번쩍 떴다.

    시간을 돌아온 반동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수명이 줄어든 걸 경고라도 하듯 왼쪽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욱신거렸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수명을 상징하는 모래시계의 모래도 일부 사라졌을 터다.

    익숙한 고통은 아니었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가슴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며 침대를 뛰쳐나왔다. 쿵쿵 소리를 내며 책상 앞으로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허겁지겁 편지를 뜯자 은색 바탕에 붉은 보석이 달린 팔찌가 툭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목이 메어 왔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세상에, 아가씨!”

    놀란 눈으로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던 엘린이 경악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부축하려던 순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난 애쉴이 팔찌를 힘껏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를 잃지 않겠다는 듯이.

    “나, 지금 당장 나가야 해. 외출 준비를 해 줘.”

    * * *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도 전이었다.

    준비를 마친 애쉴은 외출을 허락해달라며 잠들어 있던 저택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팔라디움의 사병들이 호위 준비를 위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공작은 급한 볼일이 있어 출타 중이었기에 그녀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오랜만의 쉬는 날에 한가로이 늦잠을 자던 라인하르트까지 일어난 후에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혼자 돌아다니다 위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에르도안 경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제야 애쉴은 난리 치던 걸 멈추고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아, 얌전히는 아니었다. 가능한 빨리 준비해 달라며 사병들을 열심히 볶아 대었으니.

    라인하르트와 함께 저택을 나온 애쉴은 곧바로 마담 엘리노아의 보석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보석상은 매정하게도 닫혀 있었다.

    생각 같아선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으나 에르도안이 나타날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보석상에 직접 찾아가 엘리노아를 만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애쉴은 오라비를 이끌고 카페, 플랑드르로 향했다. 회귀하기 전에 엘리노아와 에르도안을 봤던 곳이었다.

    주인은 영업 준비 중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며 곤란해했으나, 애쉴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앉아만 있게 해 달라 부탁했다. 신분이 워낙 높았던 탓에 말이 부탁이지 반협박이었다.

    “아직도 안 온 거야?”

    딱. 눈앞에서 튕기는 손가락에 넋이 나간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던 애쉴이 시선을 돌렸다. 조각상 같은 은발의 미남자, 라인하르트의 붉은 눈동자에는 짜증과 걱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네.”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한 애쉴은 한시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루에 50개 한정으로만 파는 고급 티 세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것을 애쉴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벌써 몇 시간 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자 좀이 쑤셨다. 라인하르트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피어나려는 미간의 주름도 가라앉혔다.

    “정말 오는 거 맞아?”

    “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동생을 보며 라인하르트는 더욱 깊은숨을 토해냈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이 망할 자식은 왜 먼저 나타나진 못할망정 사람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인지.

    아무래도 애쉴에게 좋은 남자 하나 소개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는 알고 있는 괜찮은 귀족 영식들의 명단을 떠올리며 툴툴거렸다.

    “이 정도로 기다릴 거였으면 차라리 저택으로 오라 하지 그랬어?”

    “수도에 오신 줄 몰랐어서요.”

    “음?”

    동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오라비가 얼굴을 구겼다. 설명이 부족한 탓에 그의 머릿속에는 끝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수도로 말도 없이 올라왔다고? 약속한 게 아니었던 건가? 그럼 왜 애쉴은 여기에서 그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이건 마치…….

    “그놈, 혹시 다른 여자라도 생겼니?”

    조심스럽게, 하지만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라인하르트가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아!”

    창밖을 뚫어지라 보던 애쉴의 동공이 확 커졌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그녀는 이번에도 오라비를 버리고 황망히 나가버렸다. 일어나다 테이블을 치는 바람에 식어 빠진 차가 쏟아졌으나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카페 입구를 나서자마자 애쉴은 그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에르도안!”

    “……레이디?”

    눈 깜짝할 새에 상대방의 앞까지 달려간 여자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똑같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차례다.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당황하고 있는 에르도안의 팔을 잡고 매달리려던 순간,

    “에르도안 경!”

    우레와도 같은 외침이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애쉴과 마담 엘리노아가 말리기도 전이었다.

    눈동자만큼이나 화끈한 성격답게 라인하르트는 에르도안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 *

    “미안하게 되었군.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아닙니다.”

    한쪽 볼이 퉁퉁 부은 에르도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앞에 앉은 라인하르트는 멋쩍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등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애쉴은 그의 옆에 앉아 차가운 음료가 담긴 컵을 부어오른 볼에 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떡해. 많이 아프죠? 가서 약이라도 좀 지어올까요?”

    “……다녀오마.”

    “괜찮습니다.”

    애쉴의 눈치를 보던 라인하르트가 일어나려 하자 에르도안이 급히 만류했다. 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차기 공작에게 감히 심부름을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데뷔탕트 때 그를 개자식이라 부른 것에 대한 업보라 생각하니 아프지도 않았다.

    “이러다 덧나면 어떡하시려구요.”

    이러한 에르도안의 마음과 달리, 단둘만 있고 싶었던 애쉴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초조함과 간절함, 소망을 눈치챈 라인하르트가 다시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금방 다녀오-”

    “아닙니다! 제가 몸 하나는 튼튼해서. 정말 괜찮습니다.”

    “여긴 아직도 피가 나잖아요.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빨리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프잖아요.”

    “레이디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뭐 어쩌란 말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꼴 시린 사랑싸움을 보고 있던 라인하르트는 슬슬 짜증이 났다. 그가 보기에 에르도안의 상처는 다친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약재상까지 가기도 귀찮았고, 외간 남자와 동생을 단둘만 내버려 두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숨을 길게 내뱉은 그가 자리에 앉았다. 당황한 애쉴이 빤히 쳐다보았으나 팔짱만 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애쉴한테 말도 없이 올라온 사연을 듣고 싶다만?”

    “기사단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워낙 급박했던지라 연락을 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기사단에서 왜 부른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기밀인지라 이런 공개된 자리에선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르도안은 살짝 고개를 숙였고, 라인하르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거와 달라진 상황에 애쉴은 당황했다. 예전에는 묻지 않아도 알려주었는데. 어딜 가는지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가지 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연인의 한쪽 팔을 붙잡은 여자가 간곡하게 매달렸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뭘 하러 가시는지 힌트라도 주시면.”

    “애쉴.”

    흔치 않은 단호한 목소리에 애쉴이 고개를 돌렸다.

    “기밀이라잖니.”

    “하지만, 오라버니.”

    “기밀을 함부로 내뱉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에르도안 경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절망 어린 눈이 에르도안에게 닿았다. 그는 난처하다는 듯 웃어 보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애쉴은 알 수가 없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걸까. 정말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기밀이라서? 아니면 위험천만한 곳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싫어서?

    어느 쪽이든 곤란한 상황이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으며 말을 꺼낼 방법을 찾고 있던 그때였다.

    “정말 죄송하지만 급한 볼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다독거리던 에르도안이 운을 뗐다.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받았다.

    “우리도 슬슬 가야 할 때라서.”

    “자주는 힘들겠지만, 편지로나마 안부 드리겠습니다. 일이 마치는 대로 방문을 청하겠습니다.”

    애쉴이 어어어 하는 사이 인사를 마친 두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라인하르트는 옆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애쉴에게 눈인사를 한 에르도안은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안 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아, 모르겠다. 애쉴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에르도안을 붙잡았다.

    “안 돼요!”

    “음?”

    “예?”

    몸을 일으키던 두 남성의 당황한 시선이 곧게 떨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외치다시피 속삭였다.

    “서부 지역에 마물을 처리하러 가시는 거죠? 절대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짧은 정적이 세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건 혼란스러움으로 눈동자가 확장된 에르도안이었다.

    “……레이디께서, 그걸 어떻게?”

    애쉴은 반쯤 일어난 그를 강제로 앉혔다. 그리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가지 마세요. 제발, 제발.”

    그녀를 향한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심히 당황한 눈치였다. 반쯤 벌려진 입은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애쉴의 연이은 부탁에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정말 위험한 곳이라는 것도요.”

    “아니, 하지만…….”

    “꼭 가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가지 않으셔도 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대체 어디까지…….”

    에르도안의 안색이 갈수록 창백해져 갔다.

    최근 국경 서부 지역에 마물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지원 요청을 받긴 했다. 그러나 이 일이 퍼졌다간 서부 기사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은 물론이요, 사람들의 불안감을 괜히 증폭시킬 우려가 있어 쉬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급비밀을 기사와 전혀 관련 없는 레이디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혹시 라인하르트가 말해 주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힐끔 보았으나 그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 네? 제발.”

    두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애쉴은 에르도안의 팔을 애타게 흔들었다. 만약 그가 끝끝내 가겠다고 한다면 기사단을 찾아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거의 울다시피 하는 애원에 라인하르트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꿈이라도 꿨어?”

    난데없는 말에 애쉴과 에르도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꿈…… 이라뇨?”

    “그…… 본 건가 해서.”

    미래 말이야.

    라인하르트가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그는 애쉴의 어머니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다.

    입 모양이 무슨 뜻인지 에르도안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쉴은 똑똑히 알아보았다.

    머릿속에 한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신녀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네, 꿈에서 봤어요. 에르도안의 미래를요.”

    “아.”

    “제 미래…… 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라인하르트는 그제야 애쉴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는 듯 표정을 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태도 변화에 당황한 에르도안은 애쉴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연인의 팔을 더욱 단단히 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제 어머니가 신녀셨어요. 꿈으로 미래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으셨죠. 저도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은 가능해요.”

    실은 방금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신녀인 건 사실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애쉴은 미래를 보는 능력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수명을 잃어가며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었을 터다.

    “예? 그렇다면 설마 차기 공작께서도.”

    “아뇨, 라인하르트 오라버니와 저는 이복 남매예요.”

    “흠흠. 민감한 사항이 아니라면 뭘 보았는지 나한테도 알려 주면 안 될까?”

    어색한 헛기침 소리에 그제야 라인하르트의 존재를 깨달은 두 사람이 귓불을 붉히며 황급히 떨어졌다.

    “아, 네. 그러니까, 그게.”

    막상 말을 하려니 혀끝에 맴돌기만 할 뿐 나오지를 않았다. 과거에서 겪었던 장례식을 떠올리자 목이 따끔거렸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입 안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눈치만 볼 뿐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자 좋지 않은 이야기란 걸 직감한 에르도안이 살짝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괜찮다는 듯.

    “좋지 않은 미래라면 더더욱 알아야겠지요.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차게 식은 찻물로 입 안을 적신 애쉴이 입술을 뗐다. 이제는 닥쳐오지 않을 미래라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울고 싶은 걸 참으며 더듬거리자,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죽는 꿈을 꿨어요. 서부 지역에 가신 지 정확히 1년 후에요.”

    조금 전에 애쉴이 서부 지역에 가지 말라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한참 사람들이 돌아다닐 시간이었기에 주변엔 사랑을 속삭이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죽음과 관련된 예언 앞에서는 아무것도 부질없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애쉴이었다. 그녀는 혓바닥을 살짝 내밀어 사막처럼 말라버린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그게 좋을 것 같군. 신녀의 예언은 함부로 무시할 게 못 되니까.”

    얼굴을 굳히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동조했다. 그의 말마따나 신녀의 예언이란 국가 차원에서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소름 끼치게 들어맞곤 했으므로.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1년 후 죽는다는 말에 핏기없이 얼어붙어 있던 에르도안이 머뭇거렸다.

    “네?”

    “……혹시 제가 어떻게 죽는지도 보셨습니까?”

    어떻게 죽느냐니. 왜 그런 질문을?

    이번엔 애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관 속에 누워 있던 에르도안을 떠올려버린 탓이다. 그녀가 선물해 준 손수건을 꼭 쥔 채,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숨이 가빠졌다.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놀란 에르도안이 급히 그녀를 껴안았다.

    “힘드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부드럽고 진한 머스크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요란 맞게 날뛰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에르도안에게서 떨어져나왔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가만가만 말했다.

    “죽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검상, 이, 심장 쪽에…… 헉.”

    진정되었나 싶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애쉴은 피멍이 들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아연실색한 에르도안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목이 메어 끅끅거리는 애쉴을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고 있던 그때였다.

    에르도안의 사인을 이야기하는 동안 먼 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라인하르트가 끼어들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였다.

    “검상이라고? 경, 서부 지역에 나타난 건 슬라임 계열이라 하지 않았나? 포이즌과 에시드 종이라 들었는데.”

    “아, 네. 맞습니다.”

    그제야 에르도안도 무언가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챘다. 슬라임 계열을 처리하러 가는데 검상으로 사망하다니. 산성으로 몸이 녹거나 독에 중독되어 죽는 게 아니라?

    그들은 얼굴을 구긴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신녀의 예언이 틀릴 수도 있습니까?’

    에르도안이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뭐, 어쩌다 한두 번쯤은.’

    나는 새도 떨어질 때가 있다고, 아주 가끔 틀리는 일이 있긴 하지만. 과연 그게 지금일까?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대꾸한 라인하르트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손가락으로 제 팔을 툭툭 두드리며 눈을 한곳에 고정했다. 말 상대가 사라진 에르도안도 눈길을 돌리며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두 남자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애쉴은 훌쩍거리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세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자 가벼운 정적이 찾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인하르트가 얕게 숨을 내뱉으며 말문을 열었다.

    “괜한 참견으로 들리겠지만, 애쉴의 말대로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설사 잘못된 예언이라 해도 굳이 그걸 판별하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에르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겁쟁이란 꼬리표가 붙을지언정 목숨을 잃고 싶진 않으니.”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말에 애쉴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장례식을 떠올려서인지 곱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상해 있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낸 에르도안에게 얼굴을 맡긴 채 그녀가 울먹울먹 입을 열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안도감이 넘실거렸다.

    “정말이죠? 정말 가지 않으시는 거죠?”

    “예. 신녀의 예언이란 쉽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보다 저를 위한 예언까지 하실 정도로, 저를…….”

    에르도안은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검은 머리카락으로 덮인 귓불은 뜨겁게 붉어져 있었다.

    상대방의 쑥스러워하는 듯한 태도에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리던 여자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더니 그의 품 안에서 후다닥 빠져나와 얼굴을 붉혔다.

    신녀라고 해서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언가에 대한 간절한 염원, 바람, 소망 등이 있어야지만 그 무언가에 대한 미래를 볼 수 있을 뿐.

    때문에 웨이센 제국에서는 신녀로 의심되는 이를 발견하는 경우 궁에 가둬놓고 철저히 세뇌했다. 오직 제국만 생각할 수 있도록, 황실만 생각할 수 있도록. 약소국이었던 웨이센이 한순간에 제국으로 발전한 뒷배경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시점 기준으로 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신녀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어쨌든,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 알고 있겠지?”

    라인하르트가 입가에 주먹을 대고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끌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핑크빛 기류를 흘려대는 두 남녀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제일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그들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확 낮췄다.

    “애쉴이 신녀라는 걸 알면 황실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끌고 가려 하겠지. 제국법상 제국 출신의 신녀는 황실 소유이니, 아버지께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

    이제까지의 대화에서처럼 라인하르트는 ‘신녀’라는 단어를 거의 들리지 않게 입술만 벙긋거렸다. 에르도안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으며 긴장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혼 떠난 껍데기가 벌레에 파먹힐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멋없는 놈 같으니라고.’

    서슬 퍼런 말에 애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며 라인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 좀 가려서 할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디 앞에서 기사들의 서약을 하는 건 또 뭔가. 참으로 고지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지.”

    라인하르트는 에르도안에게 꼭 붙어 있는 애쉴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팔라디움 저택으로 바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먼발치에서 에르도안이 혹시 무슨 해코지라도 하진 않을까 감시하고자 따라붙을 예정이었다.

    “아, 저도 일어나야 하는-”

    “약속해요. 반드시, 반드시 가지 않으시겠다고.”

    따라 일어나려는 에르도안을 애쉴이 붙잡았다. 약속을 다짐하는 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민 채였다. 급한 일이 있어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아, 하, 이거.”

    이런 걸 대체 몇 년 만에 해 보는 건지.

    에르도안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큰 손과 부드럽고 작은 하얀 손이 서로를 얽은 채 위아래로 흔들렸다.

    “고마워요. 부탁을 들어주셔서.”

    멋쩍어하는 에르도안에게 애쉴이 옅게 웃어 보였다.

    에르도안은 이제 죽지 않을 것이다. 사지로 가지 않으니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 믿었는데.

    에르도안은 죽었다. 고작 3개월 만에.

    * * *

    “에르도안, 우리 동굴탐험 가 볼래요?”

    발단은 애쉴의 제안이었다.

    할 일 없으면 당장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흐린 눈으로 보던 에르도안이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양 팔꿈치를 기댄 채 손으로 얼굴을 받친 애쉴이 그를 기대감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팔라디움 저택의 손님용 방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애쉴이 에르도안이 묵고 있는 여관을 드나들자, 보다 못한 공작이 아예 방을 하나 내어 준 것이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거절하려 했으나 ‘감히 애쉴을 피곤하게 만들어?’라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라인하르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무르고 있었다. 뭐, 그녀를 자주 볼 수 있으니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동굴이라 하시면?”

    “저희 가문의 별장 근처에 동굴이 하나 있대요. 굉장히 시원해서 피서 가기 딱 좋은…… 어라, 그 편지. 트라펠로 자작님께서 보내신 건가요?”

    “아, 네.”

    별장이라는 말에 새삼 그녀와의 격차를 느끼던 에르도안이 움찔했다. 그는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갈무리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로 편지를 흘깃거리던 애쉴이 물었다.

    “뭐라고 보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잘 지내고 있냐는 간단한 안부 인사였습니다.”

    살짝 미소 지은 남자의 긴 속눈썹이 낮게 가라앉았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방금 본인이 한 말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한 것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그녀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쁘다 하지 않으셨나요? 돌아가지 않으셔도 괜찮은 거예요?”

    “네. 집안일은 걱정 말고 천천히 오라 하시더군요.”

    트라펠로 자작이 들었다간 뒷목 잡고 쓰러질 말을 한 에르도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럽게 웃으며 우아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 * *

    제국 동쪽에 있는 지역, 카르타는 한때 보석 광산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캐낼 수 있는 보석들이 전부 동난 지금은 고위 귀족들의 동굴 탐험을 위한 장소였지만.

    팔라디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카르타의 입구에 도착했다. 함께 온 사병들은 별장에 남겨두고 왔기에 도착한 마차는 한 대뿐이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에르도안이 손을 뻗어 애쉴을 에스코트했다. 가벼운 나들이 옷차림을 한 여자가 땅 위에 내려섰다.

    세상과 연결된 남쪽 숲을 제외하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회색의 깎아질 듯한 바위산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탁한 돌 냄새, 흙냄새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은색과 검은색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던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스캔들을 직접 본 눈들은 하나같이 커져 있었다.

    “끄응.”

    애쉴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남들이 뭐라 한들 상관없다지만 시선이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귀족으로만 살아왔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을 텐데. 평민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다 보니 자꾸만 위축되었다.

    교제 상대가 에르도안이 아니었더라도 열렬한 관심은 똑같았을 것이다. 돌아온 공녀의 스캔들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화제가 되는 법이니까.

    눈들 돌리시죠, 애쉴이 보지 못한 틈을 타 에르도안이 귀족들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작위가 낮다 한들 그는 중앙기사단의 기사였다. 사교계라면 모를까 이런 자리에서는 우습게 볼 이가 못 되었다. 차가운 눈으로 수군거리는 자들을 쏘아보자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눈을 돌렸다.

    에르도안은 하이에나 같은 귀족들이 애쉴을 보기 힘들도록 몸을 약간 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며 동굴로 향했다.

    동굴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횃불 대신 벽에 자리 잡은 새하얀 빛 덩어리들이 요정처럼 흔들거리며 동굴 구석구석을 밝혔다. 그 빛을 받은 내벽과 아무렇게나 자란 종유석, 석순에 박힌 보석 부스러기들은 제각기 고유의 색깔로 반짝거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물구덩이가 무지갯빛으로 물결쳤다. 깊게 들어갈수록 환상적으로 변하는 풍경에 애쉴은 감격 어린 마음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요한 동굴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려 펴졌다. 1년 만에 열린 근처 마을의 축제를 구경하러들 간 것인지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어쩐지, 동굴 밖에도 사람이 많이 없더라니.

    넋을 반쯤 놓은 채 열심히 구경하던 와중이었다.

    휭-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얕은 바람이 불어왔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으으.”

    애쉴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양팔로 몸을 감쌌다. 가디건을 입고 있긴 했지만 얇은 여름용이라 추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에르도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에…….”

    괜찮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이가 딱딱거렸다.

    난감한 기색이 된 그는 입고 있던 푸른색 재킷을 벗어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겉옷에 주변의 한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싹 사라져 버렸다.

    애쉴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옷에서 나는 은은한 머스크 향 때문이었을까. 추위로 창백해진 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몸이 상하십니다.”

    에르도안은 옷을 돌려주려는 몸짓을 저지하며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하지만, 추우실 텐데.”

    더 두꺼운 가디건을 가지고 올걸, 하고 후회하던 여자는 곁눈질로 얇은 셔츠 차림의 남자를 흘깃거렸다. 그러다 단추 틈새로 상반신의 탄탄한 근육을 보고는 시선을 확 내렸다. 부끄러움으로 귓불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에르도안이 무해하게 웃었다.

    “전혀요.”

    “……거짓말.”

    그는 뾰루퉁히 입을 내민 여자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레이디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레이디의 어머니께서는 황실의, 그러니까 제국의 신녀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애쉴이 그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에 당황한 에르도안이 더듬거렸다.

    “혹시 민감한 질문이었다면.”

    “아뇨, 민감한 건 아닌데.”

    말꼬리를 흐린 애쉴이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만이 깊은 동굴에 메아리쳤다.

    가벼운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무표정해진 그녀의 얼굴에 에르도안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순간의 호기심을 참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속으로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던 그때.

    마침내 애쉴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예?”

    의외의 대답에 에르도안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애쉴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사방의 빛을 머금은 은발이 오색으로 반짝였다.

    “어머니는 지나간 일들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부질없는 것이라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아라. 네가 살아가야 할 곳은 현재이자 미래이니. 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세요.”

    ‘비록 저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지만요.’

    죽어 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만나면 온전하게 살지 못할 거란 경고도 외면하고 그를 택했다.

    언젠가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다. 어머니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를 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에르도안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후회하는 편이 나으리라.

    애쉴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보는 표정에 당황한 에르도안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할 말을 찾던 바로 그 순간,

    콰앙-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동굴이 크게 흔들렸다. 깜짝 놀란 애쉴과 에르도안이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던 그때.

    콰앙-!

    아까보다 더욱 큰 폭발음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번엔 그들과 굉장히 가까운 곳이었다.

    순간적으로 애쉴이 얼어붙었다. 그런 그녀를 에르도안이 급히 잡아끌었다.

    “뛰어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애쉴의 손을 꽉 잡은 채 전력 질주했다. 혼자 달리는 것보다 훨씬 느렸음에도 불평 한번,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녀도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 천장에 달려 있던 종유석들이 힘없이 추락했다. 사방으로 튄 돌 부스러기들이 마법진을 훼손시키면서 빛무리들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어두워진 사방이 흙먼지로 자욱해지고 여기저기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 *

    “헉, 허억.”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살짝 열린 입술 새로 가쁜 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흐릿했다.

    무언가가 무너지고 터지는 소리가 온 천지에 메아리쳤다. 있을 리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화약 냄새가 동굴 내에 가득했다. 하지만 애쉴은 알아채지 못했다. 정신도 없었을뿐더러 흙과 돌 냄새 덕분에 화약 냄새가 묻혀 버린 탓이다.

    “젠장.”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앞서 달리던 에르도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이 보여 거의 다 도착했나 싶었거늘. 바로 앞쪽의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들이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곧 무너질 듯싶었다.

    이대로라면 둘 다 빠져나가지 못한다. 에르도안은 혀를 차며 애쉴을 확 잡아끌었다.

    “무, 무슨, 꺄악!”

    애쉴의 허리를 움켜잡은 에르도안이 그녀를 들쳐 안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앞쪽으로 내던졌다.

    기겁한 애쉴이 양손으로 머리를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놀람으로 커진 붉은 눈동자에 메마른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똑똑히 박혀 들었다.

    “에르…… 악!”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여자가 몇 바퀴를 굴렀다. 돌바닥에 긁힌 원피스가 찢겼다. 여린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그녀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흔들거리던 종유석들이 쿵, 떨어졌다. 그 파편에 맞은 주위의 석순들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단단한 돌벽이 둘 사이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에, 에르도안!”

    경악으로 아픔조차 감지하지 못한 애쉴이 몸을 일으켰다. 절뚝거리며 다가가 돌벽을 두드리며 절박하게 외쳤다. 그들에겐 다행이게도, 방금의 종유석을 마지막으로 동굴의 무너짐은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였다.

    “에르도안! 괜찮아요? 에르도안! 에르도안!”

    “……괜찮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에르도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픔을 참는 것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불길함을 감지한 애쉴이 정신없이 돌을 두드렸다. 바닥에 긁힌 손끝과 손바닥, 팔뚝이 피로 엉망진창이었으나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어떻게든-”

    “……애쉴.”

    처음 듣는 애칭에 애쉴이 몸을 떨었다. 공녀님을 애칭으로 부를 수 없다던 그의 변화가 무섭고 두려웠다.

    그는 돌무더기에 짓뭉개진 다리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끔찍한 통증으로 정신이 기분 나쁘게 선명했다. 말을 길게 내뱉기가 힘들었다.

    “가세요…… 당장…… 밖으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핏물 섞인 숨이 새어들었다. 꺼질 듯한 목소리에 애쉴이 울부짖었다. 그들을 가로막은 돌덩어리 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엉엉 울었다.

    “안 돼요! 어떻게 저 혼자서!”

    “사람들을, 불러오세요…….”

    “흑, 흐윽…….”

    “혼자서는…… 무리…… 어서…….”

    ‘당신까지 나갈 수 없게 되기 전에…….’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에르도안은 엎드린 상태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돌벽 건너편에서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그대로였다. 오열하는 음성도 멀어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에르도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한순간에 토해냈다.

    “애쉴!”

    돌무더기를 붙잡은 채 울고 있던 애쉴이 몸을 흠칫 움츠렸다.

    “가!”

    처절한 외침에 놀란 몸이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우르르릉. 동굴이 다시 무너지기 시작하려는지 에르도안의 뒤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다해 소리쳤다.

    “어서!”

    새하얗게 질린 애쉴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섯 걸음……. 그러다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외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바로 올게요!”

    뒤로 홱 돌아 절뚝이는 다리로 있는 힘껏 달렸다. 거머리 같은 미련이 발목을 잡았으나 억지로 외면하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상처투성이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동굴 밖으로 나가 허둥지둥 달려오던 마부를 만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아가씨! 갑자기 큰 소리가 나길래 와 봤는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에르…… 도안…… 아직, 안에…….”

    마부에게 기댄 채 애쉴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빨리 그를 구해 달라고 거칠게 씨근거리던 그 순간.

    쾅!

    불길한 굉음과 함께,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 * *

    에르도안의 장례가 끝났다.

    팔라디움으로 돌아온 애쉴은 몇 날 며칠을 방 안에 틀어박혔다.

    깊은 슬픔에 잠긴 그녀는 식음을 전폐했다. 저택의 모두가 걱정했으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르도안의 마지막 모습이, 마지막 대화만이 주변에 유령처럼 맴돌았다.

    그날 함께 동굴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살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동굴 안에서 그녀를 버리고 도망쳤더라면 틀림없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 가며 그녀를 구했다.

    “에르도안…….”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부르며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 끝에 매달린 작은 모래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황금빛이던 그것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모래시계 밑바닥을 기준으로 4분의 1 정도는 황금빛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나머지 4분의 3은 여전히 불에 탄 것처럼 검었다.

    입술을 깨문 애쉴이 모래시계를 꽉 쥐었다. 되돌렸던 1년이 지나지 않았기에 모래시계를 사용할 수 없었다. 모래시계가 완전히 황금빛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린 후 고작 3개월이 지났다. 앞으로 9개월간은 그 없이 살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에르…… 도안…….”

    에르도안 트라펠로.

    가슴 속 가장 깊숙한 곳에 깊게 아로새겨진 이름.

    어쩌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

    사무치는 그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분홍색 잠옷을 붉은색으로 짙게 적셨다. 심장이 사라진 듯 공허했다. 이번에도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한참을 울던 애쉴은 주먹을 펴고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유리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 안색을 싹 바꿨다. 물기 젖은 눈동자가 열의로 타올랐다.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에 모래시계를 대었다. 반드시 그를 살리겠노라고, 제 수명을 걸고 다짐했다.

    그녀는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모래시계가 금빛으로 돌아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돌렸다.

    1년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대가는 1년의 수명이었다.

    그 회귀의 끝이 어디일지, 그때의 그녀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 * *

    「애쉴리아 팔라디움의 회귀록」

    「3회차.

    기록을 남기기 위해 회귀록을 쓰기로 했다.

    시간을 돌리게 되면 전부 다 지워지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2회차와 마찬가지로, 마물을 퇴치하러 간다는 에르도안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저택에 그를 초대해 손님용 방을 내주고 함께 지냈다.

    이번에는 별장에도, 동굴에도 가지 않았다. 에르도안이 절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사병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가려고 하면 침대에 온종일 누워 아픈 척을 하기도 했다.

    미안, 에르도안. 하지만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어.

    5개월이 지났다. 에르도안이 답답해하는 것 같아 함께 수도 구경을 나갔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갑자기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 마차에 치여 죽었다.」

    「6회차.

    5회차의 에르도안이 저택 내에서 죽었으므로 이번에는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매일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 찾아갔다. 라인하르트 오라버니가 싫어하시는 게 눈에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6개월이 지났다. 그는 아직 무사하다. 트라펠로 자작님께서 에르도안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걸 빼면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

    .

    .

    아니. 잘 돌아가고 있지 않다.

    누군가가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 불을 질러서…….」

    「9회차.

    시간을 돌린 직후에만 느껴지던 심장의 고통이 조금씩 남아 있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수면제를 탄 차를 먹여 그를 재웠다.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사람의 운명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맨 처음의 에르도안이 마물에게 죽었던 날만 지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왜 그날이 오기도 전에 자꾸 죽는 걸까?

    그가 잠든 사이, 나는 3년의 수명을 지불하고 모래시계를 사용했다. 그의 심장에서 인간의 운명을 보여 주는 실을 꺼내 들었다.

    이 실을 확인하면 그가 언제 언제 죽는지 알 수 있을 터다.

    …….

    운명을 나타내는 실은 본래 눈부신 황금색이어야 한다.

    가끔, 아주 가끔 죽음의 고비가 있는 시점만 검은색 점으로 찍혀 있어야 하는데.

    에르도안의 운명의 실은, 내가 그의 문장을 되찾아 준 후부터, 마물에게 죽었던 날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문장을 찾아준 일이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13회차. 아니, 14회차던가?

    기억에만 의지하다 보니 이게 몇 번째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거라곤 나만이 알고 있는 에르도안과의 추억, 그리고 갈수록 심해지는 심장의 고통…….

    아냐. 우울해하지 마. 정신 차리자.

    6개월이 지났다. 이번엔 트라펠로 가에 돌아간다는 에르도안을 막지 못했다. 11회차와 헷갈리는 바람에 대답을 잘못했다. 아직 그때보다는 나를 의지하지 못하는 걸까.

    이해는 하지만, 마음은 아프다.

    11개월이 지났다. 이 정도로 오래 살아 있는 건 1회차 이후 처음이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한 건가?

    ……아니.

    죽을 운명이 끝나기 보름 전, 그는 유례없는 산사태로 목숨을 잃었다. 가족분들도 함께.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적은 없는데. 대체 왜……?

    ……뭐가 되었든, 나는 다시 시간을 돌려야 한다.

    그럼 이 기록도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약 18회차.

    심장이 너무 아프다.

    이번 회차에선 내가 뭘 했더라…….

    그가 가는 곳마다 빠짐없이 쫓아다녔나? 아냐, 그건 지난 회차였던 것 같은데…….

    트라펠로 저택에 같이 내려간…… 그건 지지난 회차였어…….

    몰라, 기억 안 나.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이번 회차의 에르도안은 기사단에서 대련 중 사고로 죽었다.」

    「대충 20-23회차.

    이번 회차에서는…….

    됐어. 이번에는 기록하지 않을래. 떠올리기도 싫어.」

    「26회차. 혹은 그 이상.

    심장이 아파.

    그가 나와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아파.」

    「30회차?

    아파. 힘들어. 이제 그만…… 쉬고 싶어.」

    「마지막.

    가끔 정신을 잃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게 남은 수명은 단 1년.

    더 이상의 회귀는 없다.

    기록을 남기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인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수십 차례의 회귀로 알아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에르도안은 내게서 멀어질수록 오래 살아남는다.

    두 번째, 에르도안의 죽음은 벨키에로트와 관련이 있다.

    세 번째, 에르도안이 사망하면 벨키에로트는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본 결과, 드디어 그를 살릴 방도를 찾아냈다.

    이제 그는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늦은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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