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첫 번째 (2/22)

1. 첫 번째

언제부턴가, 애쉴은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날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지독한 운명 따윈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 * *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밝은 대낮이었으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은 어둡기만 했다. 사방에 메아리치던 여자의 목소리는 부질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불길하도록 능글맞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것만 주면 얌전히 보내 준다니까?”

“서로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넘겨.”

두 남자에게 둘러싸인 애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려 했으나 등이 벽에 닿아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한없이 가벼운 돈주머니를 몸 뒤로 숨겼다. 앙상하게 마른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제발 보내 주세요. 벌써 며칠째 굶었어요. 다음엔 꼭 드릴 테니, 오늘만은 제발.”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봐주는 건 한 번뿐이라고.”

“아님 뭐, 다른 수단으로 때우는 방법도 있지.”

남자는 말꼬리를 늘리며 더러운 욕정이 느껴지는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그의 반대쪽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도 히죽 웃더니, 가판대에 널려 있는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를 알아차린 애쉴은 몸서리를 치며 벽에 딱 달라붙었다. 벽과 한 몸이 될 기세로 마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들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만 했다.

음욕 어린 손이 그녀의 몸에 닿으려던 그때였다.

“그만들 하지?”

느긋한 음성이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없이 가벼운 옷차림을 한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역광이었던지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난데없는 방해에 긴장했던 남자들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일반적인 체격의 한 명뿐인 난입자. 잠시나마 긴장했던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린 그들은 하던 짓을 이어나가려 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난입자가 혀를 쯧, 찼다.

“기회를 줘도…….”

다음 순간, 애쉴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건달을 제압했다. 그는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구는 자들의 머리를 후려쳐 사이좋게 기절시킨 후, 우아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애쉴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 대신, 돈을 뺏기지 않으려 주머니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고 몸을 뻣뻣이 경직시키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일렁였다.

그녀의 두려움을 알아차린 남자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제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훔쳐보던 그녀는, 민망해진 남자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어제 그, 기사단의 문장을 놓고 가셨던……?”

“네, 맞습니다.”

그제야 애쉴은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남몰래 연모하던 제국의 기사라는 걸 알아차린 탓이다.

그녀는 품속에 돈주머니를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골목 밖으로 나왔다. 더러운 손이 누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끝끝내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깨어난 건달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하는 애쉴에게, 그는 경비병을 불러 건달들을 체포하는 것을 보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경비병에게 보여 주라며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은장 단추를 주기까지 했다.

“비록 자작밖에 안 되는 가문입니다만. 언젠간 도움이 될 겁니다.”

남자는 구김 없이 웃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에 불안해진 애쉴이 더듬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어제 기사단의 문장을 찾아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잃어버리면 기사단에서 쫓겨나거든요. 가문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녀는 상대방의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약간의 죄책감도 함께 느꼈다.

어제저녁, 광장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던 그때. 비번이던 제국 기사단 몇이 놀러 왔더란다. 그중에는 그녀가 몰래 연모하던 기사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따금 놀러 와 잔잔하게 웃어 주던 그는, 그날도 그녀를 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함께 놀러 온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미소 짓긴 했지만 전해지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말 한 번 걸어 본 적 없지만. 이름조차 모르지만. 그에 대한 마음을 키워 나가며,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열심히 춤을 추었다.

몇 시간 후, 공연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들어왔다. 기사 중 하나가 실수로 놓고 간 제국 기사단의 문장이었으나, 그녀는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다. 그래서 지나가던 이가 가져가겠다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장을 잃어버린 기사가 돌아왔다. 그녀가 연모하던 남자였다. 그는 광장을 청소라도 할 기세로 샅샅이 뒤지고 다녔으나, 당연하게도 문장을 찾지 못했다.

‘하, 이거 큰일인데.’

남자는 이대로 찾지 못한다면 기사단에서 쫓겨날 거라며 착잡해 했다.

비로소 제 잘못을 깨달은 애쉴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옷 속에 감춰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해진 가죽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엔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금빛 모래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모래시계를 뒤집는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녀가 눈을 뜬 순간, 새까맣던 하늘은 저녁노을로 붉게 변해 있었다.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애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연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아 세운 후, 떨어진 문장을 돌려주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정말 고맙습니다.’

시간을 돌린 대가는 그만큼의 수명이었다.

비록 약간의 수명을 잃긴 했으나 괜찮았다. 고작 몇 시간일 뿐이고, 우상으로 여겼던 이와 말을 섞어 본 대가로는 충분했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상대방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 자수정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 매끈한 콧대와 붉은 입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아름다운 기사님.

‘또 볼 수 있기를.’

조금 더 자주 찾아와 달라는 소망을 담아 그를 배웅했다.

그랬는데…….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어제 일을 상기하며 수줍게 웃던 애쉴에게 환상 같은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탐스러운 은발이 얼굴을 살짝 가렸다. 부드럽게 웃은 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뺨과 귀에 열이 올랐다. 향긋한 봄바람이 심장을 휘감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두근두근, 가슴이 기분 좋게 요동쳤다.

아, 이건 꿈인 걸까.

“애, 애쉴이라 해요.”

“애쉴, 애쉴. 잊지 않겠습니다. 참, 제 이름은…….”

“여기 있었구나!”

턱. 크고도 거친 손이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돈 그의 표정이 굳었다.

“단장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이분, 아니, 사람은?”

애쉴의 허름한 옷차림을 확인한 기사단장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이분’이라 하려던 단어가 ‘이 사람’으로 격하되었다.

수치스러워진 애쉴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공연, 또 보러 가겠습니다. 꼭 보러 갈 테니까 그때 더 얘기해요. 이만 가시죠, 단장님.”

꼭 다시 만나자고 신신당부를 한 남자는 단장의 등을 밀며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쉴은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도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어디서 저딴 천한 계집과 놀아나냐며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잘 들렸던 것은, 함부로 모욕하지 마시라며 두둔해 주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 * *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달이 지고, 해가 뜨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애쉴은 변함없이 광장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벚꽃이 지고, 매미가 울고, 낙엽이 지는데도 오겠다던 남자는 오지 않았다.

계절의 흐름에 맞춰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어 갔다. 행동 패턴도 바뀌어 갔다. 날이 추워짐에 따라 광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점점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애쉴은 광장에 남아 있었다. 어리석은 미련인 걸 알면서도. 꼭 다시 만나자는 말에 의지해 하루도 빠짐없이 얼굴을 비췄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 * *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워진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안 오시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춤을 추지 않았다. 노래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걸음을 멈추고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도 애쉴은 하루도 빠짐없이 광장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렸다.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 얇은 옷차림을 한 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벤치에 앉아 있는 형상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림 같은 모습에 발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이 불러들인 것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으로 도배된 화려한 마차였다.

마차에서 나온 중년의 남성은 애쉴과 같은 은발이었다. 눈도 애쉴의 것처럼 붉었다.

“애쉴…… 입니다.”

더듬더듬 말하자 상대방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유심히 상대방을 관찰하던 남성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애쉴이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확인해 볼 게 있으니 따라오너라.”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냉철하던 어투는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감히 귀족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애쉴은 마차에 올라탔다. 혹시라도 그가 오진 않을까, 텅 빈 광장을 뒤돌아보면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달리던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제국에서 유일무이한 공작가, 팔라디움의 저택이었다.

그 저택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애쉴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20년 전, 실종되었다고 알려져 있던 팔라디움 공작가의 영애, 애쉴리아 팔라디움. 그게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 * *

팔라디움 공작가에서의 삶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럼에도 애쉴은 종종 저를 구해주었던 검은 머리 기사님을 생각했다. 먼발치에서나마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다.

‘이름이라도 여쭤볼걸.’

어쩌면, 팔라디움의 힘을 통해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쉴은 그러지 못했다. 20년 만에 본 가족들과의 거리감에 그런 부탁을 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애쉴이 그 거리감을 좁히기 전이었다.

그녀의 뒤늦은 데뷔탕트에서였다.

* * *

“애쉴.”

“예, 라인하르트님, 아니, 오라버니.”

옆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복도에서 오늘 있을 데뷔탕트의 주인공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라인하르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내가 그리 불편하니?”

“……아닙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간신히 대답했다. 감정을 온전히 숨기지 못한 탓에 그의 팔 위에 얹어져 있던 손이 살짝 떨렸다.

3개월.

애쉴이 팔라디움에 온 지 정확히 3개월이 지났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긴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평민 여자가 귀족 사회에 적응하기엔 짧다 못해 부족한 시간.

곧 닥칠 상황을 떠올리자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무심코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려던 애쉴이 흠칫했다.

예전에 입던 것과 다르게 너무 부드러워서, 두려웠다.

‘내가 정말 이런 것을 입어도 되는 것일까.’

드레스만이 아니었다.

신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값비싼 신발. 치렁치렁한 팔찌와 귀걸이. 머리카락에 매단 형형색색의 작디작은 보석들까지.

전신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도망치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검은 머리 기사님의 가문에 초대장을 보냈다는, 집사의 말이 없었더라면.

‘쯧.’

동생의 주눅 든 모습에 라인하르트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도 힘들어하긴 했지만. 오늘은 데뷔탕트 날이니 정신이 있는 게 이상할 터였다.

본디 팔라디움에서는 애쉴을 고려하여 데뷔탕트를 생각지 않고 있었다.

제국 내 유일의 공작가. 모든 행보가 귀족의 이목을 끌 만큼 독보적인 곳.

그런 가문에서 20년 만에 찾은 딸이다.

굳이 데뷔탕트를 하지 않아도 애쉴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녀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별 쓸데없는 이유로 방문을 청하는 귀족이 발에 치일 정도였다.

그랬는데, 오늘 이렇게 데뷔탕트를 열게 된 건 다 그놈 때문이었다.

벨키에로트 뤼르 웨이센. 웨이센 제국의 황태자이자, 그의 오래된 친우.

윗사람, 혹은 제가 인정한 사람 외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남자. 친우임에도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어 가까이하고 싶지 않거늘. 왜 애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말인지.

참으로 달갑지 않았다.

“좀 더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 너도 이젠 팔라디움 공작가의 일원이니까.”

“허억…… 죄, 죄송합니다.”

팔라디움 공작가의 일원.

이곳에 온 뒤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건만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쉴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었다.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저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특히 오라버니는 어릴 적 못 받은 사랑을 단기간에 퍼부어주었다.

그러나…….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떠돌이로 살았다. 하여 평민 대부분이 지닌 귀족에 대한 두려움을 그녀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귀족들과, 그것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작가의 사람들과 생활하고 있으니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계속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적응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정신 차려야 해.’

애쉴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간의 피 맛이 났다.

그렇게 얼마간 걷고 있으려니 어느새 연회장의 입구에 도달했다. 시종에게 주인공의 입장을 알리라 눈짓하기 전, 라인하르트가 낮게 속삭였다.

“내가 알려 준 것들은 기억하고 있지?”

애쉴은 저도 모르게 라인하르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긴장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혀도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입은 대답을 술술 내뱉었다.

“첫 번째 춤은 오라버니와 출 것, 두 번째 춤은 황태자 전하와 출 것, 그다음엔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며 고개만 끄덕거릴 것, 그리고…….”

“그만.”

내버려 두었다간 일러주었던 것들을 전부 다 말할 기세다. 그녀의 말을 끊은 라인하르트가 눈짓하자 시종이 주인공의 입장을 알렸다.

데뷔탕트의 시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애쉴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어찌나 소란스럽고 정신이 없던지, 들어오자마자 누군가를 찾아야지 했던 마음도 깜빡 잊어버렸다.

그녀는 연습했던 대로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라인하르트와 춤도 추었다. 그제야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정리되었다. 쿵쿵거리던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다음 순서는…….

“레이디 팔라디움, 부디 아름다운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잡티 하나 없는 얼굴에 시원하게 박힌 푸른 눈동자. 베일 듯이 날카로운 콧날. 단단해 보이는 입술. 전체적으로 강해 보이는 선을 가진, 퇴폐적인 분위기의 조각 같은 남자.

벨키에로트는 애쉴만 응시할 뿐 황태자가 춤을 요청하는 건 처음 본다며 웅성거리는 이들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위험한 무언가가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네, 기꺼이.”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를 뽑아내며 살포시 웃은 애쉴은 그의 손에 본인의 것을 얹었다.

연회장 중앙의 댄스플로어로 가는 남녀에게 수백 개의 눈동자가 달라붙었다. 절반은 순수한 호기심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은 부러움과 질투심이 서려 있었다. 군중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애쉴은 기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잔잔한 왈츠가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걷던 남녀가 손을 마주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라인하르트와 춤을 출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그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오라비처럼 크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으나 맞지 않는 반지를 낀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따뜻했으나 다정하진 않았다.

제 손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에 벨키에로트가 낮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우신지요?”

“네, 네?”

발이라도 밟을까 싶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애쉴이 급히 되물었다.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무엇을 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황태자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진득하니 훑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동공. 달달 떠는 입술. 얼음이라도 만진 것처럼 차가운 손. 거기에 애매하게 어긋나는 춤 박자까지.

물어뜯길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흠 잡힐 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무 살이 아니라 열 살도 하지 않을 행동이거늘. 이런 게 공작가의 영애라니…….

참으로 귀엽지 아니한가. 가지고 싶기도 하고.

입술을 핥은 남자가 아이를 달래듯 낮게 속삭였다.

“그대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자들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를.”

“네, 정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전하께서 와주신 것에-”

“그게 아닙니다.”

회초리로 후려치듯 날카롭게 파고든 음성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외운 대로 읊으려던 애쉴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운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그대보다 낮은 자들이니.”

“아…….”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벌리고만 있자 벨키에로트가 속삭였다.

“혹시 부담스러우신 겁니까. 저 시선들이? 아님 대화들이?”

둘 다였으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좋게, 이 연회를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제 막 귀족이 된 여자의 어설픈 행동 하나 파악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미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 한쪽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아름답기만 하던 벽안에 광기가 진득하니 피어올랐다.

“보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눈을 도려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혀를 잘라 버리면 되고.”

……대체 무슨 말을?

놀란 애쉴이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에 벨키에로트가 킥, 웃었다.

“단순한 장난에 그리 반응하시니. 정말이지.”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생각 같아선 그녀의 입술을 탐한 후 반응을 보고 싶었다. 상대방의 작위가 후작만 되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벨키에로트가 움직일 때마다 샹들리에의 붉은 빛을 머금은 금발이 기분 나쁘게 반짝거렸다. 어쩐지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아 애쉴은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네……?”

나긋한 음성에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상대방의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목에 닿은 것 같았다. 그 서늘함에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를 내자 뱀 같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리히에게 소개 좀 해 달라 할 때마다 기함을 하길래. 대체 왜 그런가 했는데.”

애쉴의 얼굴은 이제 밀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였다. 벨키에로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귀여우시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습니다.”

칭찬인데. 분명 칭찬인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숨이 막혀 더듬거리는 사이 영원할 것 같던 음악이 끝났다.

두 사람은 예를 갖춰 서로에게 인사했다.

* * *

자리로 돌아온 애쉴은 쓰러지다시피 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창백하긴 했지만 혈색 있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돌아오자 공작과 라인하르트는 할 말을 잃었다. 상대방이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대체 뭘 한 거냐며 멱살을 잡고 따졌을 터다.

“세상 이치 좀 알려준 것뿐인데. 힘들어 보이길래.”

두 남자의 시선을 받은 벨키에로트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흡사 배부른 짐승과도 같은 모습에 얼추 사태를 파악한 라인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정치적으로 엮이지만 않았어도 상종 안 할 인간이거늘. 어쩌다 저런 게 황태자가 되었는지.

“잠깐 쉬고 오지.”

그는 비틀거리는 여자를 감싸 안으며 테라스로 향했다. 누가 보면 동생이 아니라 애인으로 알겠다는 조롱 어린 비난을 무시하면서.

* * *

“하아…….”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숨을 토해내자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난간에 양팔을 얹은 채 몸을 기대자 차가운 밤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있으면 봄이거늘 아직도 밤공기는 쌀쌀하기만 하다. 고개를 푹 숙이자 달빛을 머금은 은발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찌륵찌륵. 저 멀리서 이름 모를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가만 귀를 기울이던 애쉴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도망치고 싶어…… 헉.”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리지도 않을 혼잣말에 지레 겁먹은 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커진 눈으로 닫혀 있는 커튼을 쳐다보았다. 열리긴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들으신 건 아니겠지.’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에 한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테라스에 나와 있는 건 애쉴 혼자였다. 자신이 있으면 불편해하는 걸 안 라인하르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라며 배려해 준 것이다. 날이 춥다며 미리 준비해 둔 담요로 온몸을 꽁꽁 싸매둔 건 덤이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입고 있는 드레스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잘 싸여진 담요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던 그녀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얼굴은 차가운데 꽁꽁 여며진 몸은 덥기만 했다. 담요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덮인 것인지, 늘 쓸쓸하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도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갑자기 생긴 아버지. 갑자기 생긴 이복 오라버니. 하루아침에 높아진 신분과, 평민이던 그녀를 우러러보며 아가씨라 불러주는 수많은 고용인들.

‘내가 이런 생활을 해도 되는 것일까?’

황실 마법사를 통해 공작의 딸임을 공식적으로 증명받았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애쉴은 애쉴리아 팔라디움이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그 이유는, 몸과 마음에 배인 평민일 때의 습관과 더불어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때문일 터였다.

‘절대로 아버지를 찾아가지 마렴, 애쉴.’

애쉴은 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뭐가 그리 걱정스러웠던지,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딸의 손을 꼭 붙잡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애쉴이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마다 그분을 만나게 되면 네가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할 거라고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

‘하지만 어머니. 이곳엔 모두 좋은 분들뿐이에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요? 정 안되면…….’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불안감을 털어내던 애쉴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희고 긴 손가락 끝에 닿은 건 허름한 가죽끈이 아니라 가느다란 금 목걸이였다.

그 끝에 매달린 모래시계를 조심스레 꺼내 가만히 쓰다듬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래시계를 사용했던 이유인 검은 머리 기사님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제야 그를 찾지도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는 게 생각났다.

‘그분은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려진 추억에 젖어가던 그때였다.

‘시간을 돌릴 때는 늘 신중히.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만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도록.’

단호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어머니도 참. 제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말이, 지금은 왜 이렇게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일까.

설마, 문장을 찾아줬던 일이 기사님의 운명을 바꾸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좌우로 고개를 흔들던 애쉴은 모래시계를 옷 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녀 외에 모래시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쓸데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늘 해왔듯 그렇게.

‘그러고 보니 기사님을 찾아야 하는데.’

팔라디움의 집사가 직접 초대장을 전달했다 했으니 분명 왔을 것이다.

데뷔탕트에 올 가문의 명단을 정리할 때, 애쉴은 큰 용기를 냈다. 그에게 받았던 은장 단추를 내밀며 이 가문을 꼭 초대해 달라 한 것이다.

제국 내 대부분의 귀족들을 알고 있다며 자신만만해하던 집사는, 몇 시간 동안이나 식은땀을 흘리고 나서야 그의 가문 명을 알아냈다.

어째서였을까. 애쉴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트라펠로 자작가의 영식, 에르도안 트라펠로라 하셨지.’

그가 직접 알려줄 때까진 이름을 모르는 척할 예정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으니까.

그를 생각하자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에르도안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황태자를 향한 두려움까지 덮어버렸다. 묘한 흥분에 휩싸인 애쉴이 막 몸을 돌려 테라스를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그러길래 오지 않겠다 했잖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그때와 달리 노기가 어려 있긴 했지만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목소리였다.

설마, 설마.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애쉴의 눈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1층 테라스에 서 있는 그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가의 집사가 직접 전한 것을 거절할 수는.”

“그 결과가 이거입니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이 기어들어 왔냐며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

“입조심해라, 에르도안!”

낮게 내리깔린 중년 남성의 음성이 강하게 일침했다. 분을 삼키는 듯 으르렁거리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애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르도안? 에르도안 트라펠로? 그분이 맞는 거겠지?

밤공기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얼굴이 뜨거워지며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콩닥거렸다. 에르도안이란 단어 하나에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왜 화가 난 것인지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렸다.

“기사…….”

큰 소리로 그를 부르려던 애쉴이 멈칫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간 라인하르트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들어와도 상관없긴 했지만, 아니, 사실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기사님과 단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왜일까, 왜일까.

뱃속이 간질거렸다. 귓불이 화끈거렸다. 쑥스러운 마음에 질 좋은 스타킹에 감겨 있던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때.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졌다.

애쉴은 황급히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었다. 두껍게 감싼 담요 때문에 쓰러질 듯 뒤뚱거리며 간신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휭.

웬만한 저택 한 채와도 맞바꿀 수 있는 비싼 구두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그러나 힘 조절을 잘못했던지라 얼마 가지 못하고 그들의 주변 풀숲에 떨어졌다.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에 놀란 에르도안과 중년 남성이 숨을 죽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대화를 엿듣기라도 했을까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주변을 경계하던 그들은 애쉴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아, 안 돼!’

다급해진 애쉴은 남은 구두 한 짝을 빠르게 벗었다. 약간 더 힘을 주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휭!

저택 한 채가 힘차게 날았다. 조금 전보다 강한 파공음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너무 세게 던졌나?’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구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악!”

빠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구두는 에르도안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주렁주렁 달린 보석 탓에 꽤 묵직한 소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머리와 맞닿은 부분이 뾰족한 굽 쪽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떡해!’

크게 당황한 애쉴이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이게 뭐야.”

인상을 찌푸리며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던 에르도안이 구두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테라스로, 테라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 여자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낯익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 에르도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비싸 보이는 구두에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

철부지 귀족 영애가 장난이라도 쳤나 보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구두 한쪽을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에르도안과 대화하던 중년 남성은 애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에르도안과 마찬가지로 ‘예의도 모르는 말괄량이가 어떻게 여기에 초대받았지.’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애쉴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움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아 허전한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에르도안이 가까이 올 때까지 담요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레이디?”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고개만 들면 그를 볼 수 있을 것인데도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스쳐 지나갔던 표정으로 봐선 틀림없이 자신을 한심해하고 있을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마냥 좋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뚝뚝하기만 한 음성임에도 가슴이 뛰었다. 설레면서도 어지러웠다.

애쉴이 침묵을 고수하자 에르도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멀리서 봤을 때는 당황하는 것 같아 사과 한마디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착각이었던 거로군. 하긴, 이곳에 초대받은 귀족 중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 있긴 할까.

새삼 느껴지는 격차에 다시 한번 불쾌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구두 한 짝을 테라스의 창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달칵거리는 소리에 애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그녀가 눈만 깜빡거리던 그때, 에르도안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풀이 짓밟히는 소리에 놀란 애쉴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낮게 외쳤다.

“기사님!”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목소리에 놀란 에르도안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의외의 인물을 본 남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잘게 떨렸다.

“애쉴 님?”

“네, 저예요!”

얼굴을 가린 담요를 내리며 애쉴이 밝게 웃었다. 에르도안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는 테라스로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이곳에 계십니까?”

“아, 그게.”

“누군가에게 끌려오기라도 하신 겁니까?”

“네?”

상상치도 못한 질문에 애쉴은 웃고 있던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자의가 아니긴 하지만 끌려온 것도 아닌데. 오라버니한테 에스코트를 받아 잘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애쉴이 당황해하는 사이, 그녀의 침묵을 긍정이라 생각한 에르도안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거렸다.

“대체 누굽니까? 아가씨를 여기까지 끌고 온 개자식이.”

“개, 개자식…….”

“일키아스 백작? 헤이드 남작? 그것도 아니면.”

씩씩거리며 호색한이라 알려진 귀족들의 이름을 읊던 에르도안이 멈칫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여자가 양손까지 내젓기 시작했던 탓이다.

그의 말을 끊은 애쉴은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라인하르트 오라버니와 함께 왔어요!”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입속으로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을 곱씹어보던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제국 내 라인하르트란 이름이 희귀한 건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귀족 중 라인하르트란 이름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라인하르트 팔라디움. 팔라디움 공작가의 장남이자 차기 공작. 그런 사람을 오라버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설마 아가씨, 아니 레이디께서.”

창백하게 질린 에르도안이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털썩,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왜, 왜 그러세요!”

기겁한 애쉴이 작게 소리쳤다. 달려가서 그를 일으켜 주고 싶은 마음을 철제 난간이 가로막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팔라디움 소공작을 개자식으로 부른 것, 레이디 팔라디움의 성함을 허락 없이 부른 것 모두 달게 처벌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 가문만은.”

“에르도안!”

무릎을 꿇는 모습에 놀라기라도 했던 것일까.

에르도안과 대화하고 있던 중년 남성이 기함하며 달려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컸기에 애쉴은 반사적으로 등 뒤의 커튼을 바라보았다. 천만다행으로 라인하르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소란이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 생각하지 못해서였을 터다.

“일어나세요, 어서요!”

커튼과 달려오는 남성을 번갈아 보며 애쉴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용서해 주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대체 무슨 용서를.”

“정말 죄송합니다.”

뭘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비꼬는 것이라 착각한 에르도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에르도안의 옆에 당도한 중년 남성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입을 잘못 놀려 팔라디움 공작가를 욕보였습니다. 저희 가문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부디 선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이디 팔라디움.”

팔라디움이란 말에 중년 남성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못난 자식을 잘못 교육한 제 탓입니다. 은혜로운 초대에 감사해하진 못할망정 욕을 보였으니 이 자리에서 죽어 마땅하겠으나, 에르도안은 가문을 책임져야 할 막대한 임무를 가졌습니다. 부디 에르도안 대신 절 벌하십시오.”

“아버지!”

“시끄럽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애쉴은 울고 싶었다. 아무리 그만하라 해도 두 남자의 사죄는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에르도안의 아버지 트라펠로 자작까지 무릎을 꿇어버렸다.

결국, 그들을 일으키는 데 실패한 애쉴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 상황에 대한 곤란함과 에르도안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반가움으로 물기에 젖어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기사님.”

“그러니까, 대신 절…… 예?”

“보고 싶었어요.”

두 남자의 말싸움이 멈췄다. 그들은 반쯤 입을 벌린 채 바보 같은 얼굴로 애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담요를 살짝 끌어 올려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저,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

어딜 뛰어내린다고?

1층 테라스이긴 했으나 결코 낮은 높이는 아니었다. 키가 큰 편인 에르도안이 까치발을 들어 구두를 올려놓았을 정도이니. 기절초풍할 협박에 그들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오신 거죠? 기다렸는데…….”

책망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자작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빨리 설명하라는 눈짓에 에르도안이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분쟁 지역에 지원 요청을 받아 나가 있었습니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갔었는데, 날이 추워서 나오시지 않은 건가 했습니다.”

“그랬군요. 기사님도 제가 천한 계집이라 생각하셔서 안 오시는 건 줄 알았어요.”

공작 영애가 내뱉은 ‘천한 계집’이란 단어에 자작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에 입조심 좀 하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며 달려드는 아버지에게, 에르도안은 본인이 한 게 아니라며 항변한 후 애쉴에게 시선을 옮겼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그녀를 구해줬을 때처럼 다정하게 풀려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레이디 팔라디움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분이신 것을요.”

“제, 제가요?”

간지러운 말에 애쉴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녀는 담요를 더 끌어 올려 코끝까지 덮었다.

“기억나십니까? 제게 문장을 찾아주셨던 날. 저는 한시도 그날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레이디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진 날이었으니까요.”

“저, 저랑요? 왜……?”

“레이디께서 너무-”

광장에서 보았던 애쉴을 떠올리며 에르도안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웃었다.

음악에 맞춰 하늘거리던 은발. 부드럽게 휘어진 초승달 같은 눈썹. 매력적으로 빛나는 루비 같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즐거움을 머금은 앵두 같은 입술.

그 모든 게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으니 사랑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하던지.

“아름다우셨거든요.”

낯간지러운 말에 애쉴은 이제 목까지 빨갛게 변해 버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담요 속에서 눈을 또르르 굴려대던 여자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툭 던졌다.

“기사님도 아름다우세요.”

“예?”

이번엔 에르도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남자에게 아름답다니.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아름답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에 기뻤다. 가슴속 깊은 곳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얼굴을 붉힌 채 눈도 못 마주치는 두 남녀를 보던 자작은 당황하면서도 발소리를 죽여가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한창 좋을 때다.

“……그래서였군요. 공작가의 집사께서 직접 초대장을 가져오신 것이.”

핑크빛 기류에 젖어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에르도안이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얼굴의 붉은 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귓불은 여전히 타오를 듯 붉었다.

“네, 맞아요. 제가 꼭 초대해 달라 부탁드렸어요. 혹시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그제야 두 사람의 말다툼이 떠오른 애쉴이 시무룩해졌다. 에르도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레이디를 다시 보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다행이에요.”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는 애쉴을 보며 에르도안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함을 넘어서 불쾌했다. 초대장을 가져온 팔라디움의 집사나 연회에서 만난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게 아주 친절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무슨 냄새요?’

‘흙냄새 같기도 하고, 동물 냄새 같기도 한 게.’

‘어디서 시골 촌뜨기가 올라왔나 보죠?’

살랑살랑, 부채를 펼치며 트라펠로가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에르도안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같은 귀족이라지만 상대방과의 격차가 너무나도 심했으니까.

아가씨를 꼭 좀 만나 달라는 집사의 간곡한 청 때문에 삼키고만 있었으나, 결국 버티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그것을 애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미안해할 테니까.

“저, 기사님의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이제까지 말씀도 안 드렸군요. 제 이름은 에르도안 트라펠로입니다.”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허리를 약간 숙여 보였다.

에르도안 트라펠로. 에르도안. 에르도안…….

혀끝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던 애쉴이 방긋 미소지었다. 에르도안이란 이름은 나비가 꽃에 앉은 것처럼 그녀의 가슴에 날아와 콕 박혀 들었다.

“제가 기사님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귀족의 호칭에 익숙하지 못한 애쉴이 더듬거렸다.

“에르도안이라 불러주십시오.”

“네? ……그럼 에르도안 님으로.”

“에르도안.”

단호한 눈빛에 애쉴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그럼 저도 애쉴이라 불러주세요.”

“안됩니다.”

“어째서죠?”

“신분 차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에르도안, 에르도안과 저는 같은 귀족인데.”

“같은 귀족이라도 엄연히 다릅니다.”

본인을 애쉴이라 불러달란 여자와 그럴 수 없다는 남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실랑이의 승자는 다름 아닌 에르도안이었다.

에르도안은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고, 애쉴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에르도안, 저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연회장에서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세요.”

“춤…… 말입니까?”

에르도안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애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오라버니께서 세 번째부터는 원하는 사람과 춤을 춰도 된다 하셨거든요.”

“아, 음.”

“싫으신…… 가요?”

그제야 상대방의 곤란한 기색을 읽은 애쉴이 더듬거렸다. 괜스레 부탁했나 싶어 부끄러운 마음에 담요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싫다기보단…….”

에르도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싫을 리가 있나.

광장에서 애쉴을 봤을 때부터 기회가 된다면 함께 춤을 춰 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그녀의 몸짓은 보는 사람을 매혹 시키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평민이던 그녀는 공작가의 영애가 되었다. 지금 이곳엔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많다. 애쉴이 그의 춤 신청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데뷔탕트에서 겨우 이름 없는 자작가의 영식 따위와 춤을 춘’ 여자가 되는 것이다.

빵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심산으로 온 거냐며 무례한 말을 내뱉던 놈들의 입에 애쉴이 올라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뜻 긍정적인 답을 줄 수 없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무안해진 애쉴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괜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후우. 레이디께서 입방아에 오르실까 그렇습니다.”

“입방아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애쉴에게 에르도안은 본인의 생각을 간추려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여자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조곤조곤 답했다.

“절 걱정해 주셔서 그러시는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레이디.”

“오라버니께서 그러셨어요. 팔라디움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으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요. 그보다 에르도안은 괜찮으신가요?”

“저 말입니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듯,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저 하나뿐이 아닐 것 같아서요.”

애쉴의 근심 어린 눈이 에르도안에게 닿았다.

자신을 걱정해 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다른 고위 귀족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자신만을 위할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전 상관없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던 터라.”

“아.”

애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르도안은 상냥하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날도 추운데 몸은 괜찮으신지,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지 걱정했었습니다.”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 드려서.”

두 사람의 사이에 흐르는 분홍빛 기류가 점차 무르익어 가고 있던 그때였다.

“애쉴? 이젠 좀 괜찮아졌어?”

문을 두드리듯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조심스레 묻는 라인하르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굳었다. 애쉴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급히 대답하려다 혀를 씹을 뻔했다.

“네, 오라버니. 금방 나가겠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고 싶지만, 주인공이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아서.”

“아니에요. 충분히 쉬었어요.”

뚜벅뚜벅. 커튼을 흔들던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애쉴은 에르도안을 향해 속삭였다.

“기다릴게요.”

얼어 있던 에르도안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게 눈인사한 여자가 벗어 두었던 구두를 신으려다 말고 움찔했다.

“저, 에르도안.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괜찮으시다면 구두 좀 찾아주세요…….

한 짝밖에 없는 구두를 보며 애쉴이 애처롭게 말했다.

* * *

“레이디 팔라디움.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이고, 설산의 눈보다 영롱한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오늘 무슨 날인가. 아니면 준비해 둔 음식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연이은 과한 언사에 라인하르트는 귀를 막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건 애쉴도 마찬가지였던지, 그녀는 몸을 살짝 빼며 마주 잡은 양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죄송합니다.”

쓸쓸히 돌아가는 젊은 남성에게 사방에서 소리 없는 비웃음이 쏟아졌다. ‘감히 네까짓 게 팔라디움에 도전해?’라는 의미가 담긴 것들이었다.

벨키에로트와 춤을 춘 직후보단 나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창백한 애쉴을 살피던 라인하르트는 데뷔탕트를 일찍 끝내야겠다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으로도 예상외긴 했으니까.

“이제 슬슬 들어갈까?”

“아, 아니요!”

즉각 알겠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라인하르트는 당황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애쉴이 초조하게 두리번거렸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혹시 벨키에로트를 찾는 거라면 아버지가 상대한다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네에…….”

영혼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애쉴은 연신 주위를 살폈다.

빨강, 파랑, 주황……. 총천연색의 머리칼이 즐비하게 보였으나 그중 검은 머리는 없었다. 분명 알겠다 했었는데. 역시 불편했던 걸까.

“애쉴?”

“조금만 더 있다가요…….”

라인하르트는 의아한 눈빛으로 축 처진 그녀를 보았다. 들어오는 춤 신청은 죄다 거절하고 있으면서 들어가진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대체 누구를?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풀렸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두 팔라디움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을 헤치고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죽을상을 하고 있던 애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수줍게 그를 맞이했다.

“기사, 아니, 에르도안.”

밤하늘을 닮은 검은색 머리칼은 비로드처럼 우아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곧은 눈썹은 그의 강인한 성격을 표현하는 듯했다. 제비꽃처럼 진한 보라색 눈동자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단정한 그의 얼굴을 더욱 강조시키고 있었다.

옷은 또 어떠한가. 그의 푸른 예복은 다른 귀족들이 입고 있는 것보다 훌륭하고 비싼 것은 아니었으나, 단정하게 잘 손질되어 있어 그만의 매력을 표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애쉴이 넋을 놓고 그를 보는 사이, 어느새 앞에 당도한 에르도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내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대에게, 오늘 밤 제게 당신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차게 대답한 애쉴이 그의 손을 잡았다. 길거리에서는 폐를 끼칠까 봐 잡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이번엔 힘있게 잡았다. 깜짝 놀란 남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앞장서다시피 하며 그를 댄스플로어로 이끌었다. 당황하는 라인하르트나 에르도안을 비난하던 귀족들의 경악하는 시선은 보이지도 않았다.

* * *

“그냥 가 버리신 줄 알았어요.”

잔잔한 음악에 맞춰 에르도안의 손을 마주 잡은 애쉴이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방금 들어온 것인지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은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도감이 담긴 그녀의 말에 에르도안이 미안함을 담아 웃어 보였다. 그의 뺨은 바깥의 추위와 더불어 이곳까지 달려온 것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레이디와 무슨 관계냐며 궁금해하시길래, 조금 설명을 드린다는 것이 그만.”

두근두근. 애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관계라 하셨나요?”

그에게 심장 소리를 들킬까 싶어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그러다 제 잘못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한순간, 보라색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빛이 스쳤다. 짓궂은 미소를 지은 남자는 박자에 맞춰 파트너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함께 춤을 추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높게 올렸는데도 굳센 팔뚝은 흔들림이 없었다.

에르도안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춤추던 아가씨와 그걸 구경하던 한량 기사.”

“어…….”

맞는 말이긴 했지만 뭔가 맥이 빠졌다. 그녀의 머리에 동물 귀가 있었으면 틀림없이 축 처져 있으리라 생각한 남자가 잘게 웃었다.

그들은 제자리에서 부드러이 한 바퀴 돌았다.

“실은, 위험에 처한 레이디와 레이디를 구한 기사라고 했습니다.”

“아.”

애쉴을 껴안다시피 하며 내려놓은 에르도안의 숨결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녀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였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다르게 설명해 드린 것 같기도 하고.”

“으으…….”

애가 탄 애쉴이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에르도안은 제 가슴께에 있는 여자의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대답했다.

“아름답고 고귀하신 레이디와 감히 그 레이디께 첫눈에 반한 멍청이라 설명드렸습니다.”

직설적인 말에 애쉴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녀는 춤이 끝날 때까지 에르도안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 * *

“흐응.”

벽에 기댄 채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황태자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본인과 있을 땐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처럼 벌벌 떨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는 날아갈 듯 웃는 모습을 보니,

“죽여 버릴까.”

심사가 뒤틀렸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를 상대하고 있던 팔라디움 공작이 물었다. 워낙 작은 목소리였기에 공작은 벨키에로트의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애께서 무척 아름다우셔서. 눈을 떼기 퍽 힘들단 말이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애쉴을 향해 치켜들며 나른하게 웃었다.

잔에 들어 있던 붉은 와인이 피처럼 불길하게 흔들렸다. 사냥하기 직전의 승냥이가 먹잇감을 보는 듯한 눈빛이 행복해하는 두 남녀에게 닿았다.

황태자인 그는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설령 그것이 팔라디움의 것이라 한들.

* * *

꿈만 같던 데뷔탕트가 끝났다.

그날 후로, 애쉴은 에르도안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

마음 같아선 편지가 아니라 직접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에르도안은 파견을 갔다 온 보상으로 휴가를 받아 본가에 가 있었다. 트라펠로 저택과 수도 사이는 마차를 타고 꼬박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멀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친애하는 에르도안.

잘 지내고 계신가요? 바쁘다 하신 건 좀 괜찮아지셨고요?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오늘은 라인하르트 오라버니와 함께 수도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부티크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

.

.

최근 디저트 가게가 하나 생겼는데, 어찌나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지. 나중에 함께 가 보시지 않을래요?

애쉴리아 팔라디움 드림.」

마음을 꾹꾹 담아 눌러 쓴 편지의 답장은 2주일 만에 왔다.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하면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쓴 것이 뻔했다. 물론 그사이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편지를 받고 있었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써도 써도 이야기가 동나지 않았다.

「경애하는 레이디께.

마음 써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문의 일이 정리되지 않아 당분간 수도에 올라가지는 못하겠지만.

부티크에서 산 옷들, 입고 나오시는 것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물론 레이디께서는 뭘 입든 아름다우실 테지만요. 맛있다고 소문 난 디저트 가게라니, 벌써부터……

.

.

.

수도는 잘 모르겠지만, 저희 쪽에는 슬슬 여름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동봉합니다. 지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찾아올 거라 하더군요.

부디, 레이디의 마음에 들길 바라며.

에르도안 트라펠로 드림.」

“꽃?”

편지 봉투에 들어 있던 물건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애쉴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봐도 꽃이 아니라 팔찌 같은데.’

팔찌는 얇은 은줄에 새끼손톱만 한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래, 꼭 애쉴 자신처럼.

옆에 있던 전속 시녀 엘린은 팔찌와 애쉴을, 그리고 애쉴이 읽어 준 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이거, 그거 아니에요? 그, 왜 있잖아요.”

엘린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나이대가 비슷했기에, 그리고 팔라디움 공작가 자체가 엄격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애쉴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애쉴이 그리해 달라 부탁하기도 했고.

“아가씨를 닮은 팔찌를 주시면서 꽃이라 하신 거니까, 아가씨가 결국 꽃이라는.”

“……!”

화르륵 얼굴을 붉힌 애쉴이 양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몸을 구부려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면서도 심장이 요란 맞게 날뛰는 바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 아가씨를 보며 엘린은 속으로 안도했다.

데뷔탕트 전, 늘 주눅 들어 있던 아가씨가 변했다. 어둡기만 하던 표정이 밝아졌고, 의견을 조금씩 피력하기 시작했으며,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겠다며 외출을 하기도 했다.

고용인들에게 도는 소문으로는 데뷔탕트에서 만난 남자 때문이라는데. 이토록 아가씨를 챙겨 주는 것으로 보아 나쁜 이는 아닌 듯하여 마음이 놓였다.

“미안한데, 이것 좀 채워 줄 수 있을까?”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끙끙거리며 팔찌를 차려던 애쉴이 도움을 요청했다. 엘린은 바로 팔찌를 채워 주었다.

“이런 거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치수를 재어 보기라도 한 듯 팔찌는 가느다란 손목에 꼭 맞았다. 헤헤 웃으며 팔찌에 달린 붉은 보석을 만지작거리던 애쉴은, 이내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에르도안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재차 읽어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것도 곧 해지겠네. 엘린은 편지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러나 수십 번을 읽어 볼 거란 예상과 달리 애쉴은 단 다섯 번만을 읽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놀란 엘린에게 쑥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작게 속닥거렸다.

“나, 오늘 외출할게. 나도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귓불을 잔뜩 붉힌 그녀는 들고 있던 것을 고이 접어 내려놓았다. 에르도안의 편지를 보관하는 상자 보관함 속이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처럼, 몇 달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상자에는 편지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 * *

“뭘 보내 드려야 좋아하실까요?”

“뭘 주던 네가 주는 거라면 좋아하지 않을까.”

휴일임에도 쉬지 못하고 끌려 나온 라인하르트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애쉴이 끌고 나온 게 아니라 본인이 따라온 거긴 하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였기에 듣지 못한 애쉴이 되묻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라인하르트는 제 동생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심란했다. 데뷔탕트 전보다 눈에 띄게 밝아진 모습은 확실히 반길 만했지만, 그 이유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르도안이라는 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애쉴을 보는 느낌은 뭐랄까. 솔직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팔라디움으로 돌아온 날부터 얼마나 잘해 주었거늘. 그런데…….

‘에르도안, 이것도 드셔 보실래요?’

데뷔탕트 때만 생각하면 그는 속이 쓰렸다. 자신에겐 보여 주지도 않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듣도 보도 못한 놈과 꼭 붙어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황당하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고. 혹시 이상한 놈은 아닐까 싶어 떼어놓으려 했는데.

한 걸음을 떼기도 전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레이디 팔라디움과 돌아다니는 남자분은 대체 누구냐는 둥, 공작가와 깊은 관계이기라도 한 거냐는 둥. 두 사람의 핑크빛 기류에 감히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한 귀족들이 전부 그에게 몰린 탓이다.

가문과, 그리고 동생과 관계된 질문이라 짜증도 내지 못했다. 라인하르트는 그날 데뷔탕트의 남은 시간을 호기심 많은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 써야 했다. 정작 그 질문의 주인공인 에르도안과 애쉴에게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끝났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데뷔탕트가 끝나갈 무렵, 대부분의 귀족들이 돌아간 후 한숨 돌리려던 그때. 그는 똑똑히 보았다. 애쉴을 향한 벨키에로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던 것을.

‘설마, 아니겠지.’

벨키에로트에게는 이미 약혼 얘기가 오고 가는 여자가 있었다. 누구든 뒤를 돌아보게 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후작가 출신의 여자였다.

정치적으로 맺어질 사이이니 쉽사리 취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와 약혼한 후 공녀인 애쉴을 후궁으로 달라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데뷔탕트 후 애쉴에게 황궁으로 놀러 오라며 초대편지를 계속 보내고 있긴 하지만. 후작 영애와 약혼할 때까지 무시하고 있으면 알아서 정리될 터다. 미친놈이긴 해도 선을 지키는 미친놈이니까.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믿었다.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애쉴은 진열장에 전시된 손수건 중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보라색으로 자수가 놓인 고급스러워 보이는 손수건이었다.

“어떤가요? 남자분들이 쓰시기 괜찮나요?”

‘그놈은 네가 거적때기를 줘도 괜찮다고 할 것 같은데.’

라인하르트는 목구멍까지 솟구친 말을 주워 삼켰다.

뒷조사를 통해 알아본 트라펠로 자작가는 돈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나름 괜찮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괜찮지 않은 곳이었다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없애 버렸을 것인데.

그는 조금 우울해졌다.

* * *

“제가 사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쇼핑을 마친 그들은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말이 쇼핑이지, 실상은 에르도안에게 보낼 것들을 찾아 헤매는 애쉴과 그녀를 저지하려는 라인하르트의 기 싸움이었다. 오라비의 훌륭한 저지 덕에 그녀의 옆자리에는 곱게 포장된 손수건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초코케이크에 손을 뻗으며 애쉴이 작게 중얼거렸다.

“더 사고 싶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할 거다, 에르도안 경은.”

애쉴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지더니, 귓불이 새빨개졌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분께 드릴 거라는 건, 말씀드린 적이.”

“저택의 모든 사람이 다 알걸.”

편지가 그토록 뻔질나게 오고 가는데 모를 리가 있나.

라인하르트가 질투로 툴툴거렸다. 애쉴은 포크로 찍은 초코케이크를 입에 넣지도 못하고 부끄럽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 눈길이 카페의 유리창에 닿은 순간.

쾅.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부드러운 방석이 깔린 철제 의자가 끼익, 하는 듣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애쉴?”

당황하는 라인하르트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쉴은 유리창에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 유리창 너머에서 걷고 있는 두 남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와 친밀하게 붙어 이야기 중인 낯익은 남자.

심장이 몸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에르도안?”

말도 안 돼.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뛰기 좋도록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두리번거렸다.

에르도안과 중년 여성은 때마침 카페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에르도안!”

“레이디?”

움찔하며 대화를 멈춘 에르도안이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놀랐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나는 몸짓과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삼키며, 애쉴은 당황한 남자의 코앞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흘러넘치는 의문 중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 외에는.

“에르도안…….”

바쁘시다면서 왜 여기 있으신 거죠? 이 여자는 누구인가요? 왜 말 한마디 없이 수도에 오신 거죠? 제가 이제 싫어지신 건가요?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 없이 벙긋거리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놀란 에르도안이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애쉴, 여기 있었- 마담?”

뛰쳐나간 동생을 찾으러 나온 라인하르트가 끼어들었다. 애쉴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던 그는 중년의 여성을 보고 멈칫했다.

“어머,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소공작님?”

에르도안과 이야기하던 중년의 여성이 알은체를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르도안을 보고 있던 애쉴이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담?”

“이쪽은 보석상을 하고 계시는 마담 엘리노아이십니다. 레이디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에르도안이 다급히 외쳤다.

* * *

마담 엘리노아는 질 좋은 보석이 많이 들어왔으니 구경하러 오시라며 안절부절못하던 라인하르트를 끌고 가 버렸다. 말이 좋아 보석 구경이지, 몇 달 만에 만난 두 청춘에게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주자는 취지였을 터다.

“너무해요. 올라오신다고 한마디 말이라도 해 주시지.”

라인하르트와 함께 있던 카페 안이었다. 테이블 보 아래에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애쉴이 물기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레이디께 알리고 싶지 않았던지라.”

에르도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미안함과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정한 어투였으나 매정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애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왜요? 저 몰래 올라오셔서 대체 뭘 하시려고요? 당분간 수도에 올라오지 못하신다고 거짓말까지 하셔 가면서 오신 이유가 뭔데요? 아까 만난 보석상은 또 뭐고요?”

“그게…….”

에르도안은 난처한 얼굴로 말꼬리만 길게 늘일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툭.

결국 테이블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애쉴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너무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끝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테이블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끼이익. 앞쪽에서 의자가 다급히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바로 옆쪽에서 다시 한번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에르도안은 울고 있는 여자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한 손으로는 그녀를 감싼 채,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다정하게 입술을 뗐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얼굴에 닿은 셔츠에서 부드럽고 진한 머스크 향이 났다. 그의 체향과 체온에 황홀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그녀가 질렸다던가, 싫어졌다던가, 다른 사람이 생겼다던가, 뭐 그런-

“음, 비밀로 하려 했던 건데.”

에르도안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품속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떨림에 순순히 실토했다.

“레이디께 드릴 반지를 의뢰하는 중이었습니다.”

“반지, 요?”

잔뜩 목이 멘 애쉴이 더듬거렸다. 에르도안은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네. 생일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요.”

“하지만 제 생일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알아 두었어야 했는데, 그만 놓쳐 버려서. 아쉬운 마음에 내년부턴 꼭 챙겨 드리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세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해서요.”

뜻밖의 대답에 놀란 애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담이 될까 싶어 말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안 것일까? 게다가 생일이 돌아오기까지 11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녀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여긴 에르도안이 초조하게 물었다.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 숨겼습니다. 많이 불쾌하셨습니까?”

애쉴은 그의 품속에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셔츠의 눈물로 젖은 부분이 더욱 넓어졌다.

“그럴 리가요.”

“다행입니다.”

안도 서린 음성이 애쉴에게 닿았다. 축축이 젖은 품 안에서 에르도안의 체온을 느끼고 있던 그녀는,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괴리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바쁘다는 사람이 고작 생일 선물 때문에 수도로 올라왔다고? 세공 의뢰 정도는 편지로 부탁해도 되는 일 같은데.

“그게 다인가요? 올라오신 이유가.”

품속에서 빠져나온 애쉴이 물었다. 붉게 부어오른 눈가에는 의혹이 서려 있었다.

이번엔 에르도안이 침묵했다. 미묘한 표정으로 눈길을 피하던 남자는,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다 못해 바늘같이 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애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기사단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서부 지역의 마물을 토벌하러 가라는.”

마물 토벌이라니.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위험한 곳에 또다시 가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온몸에 오한이 돌고, 앉아 있던 의자가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에르도안의 옷깃을 잡았다. 입술을 떼자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마물 토벌이라뇨. 분쟁 지역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요? 분명, 다른 지역으로의 파견은 웬만해선 나가지 않으신다고.”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게다가 서부는 국경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따로 있어서 중앙기사단까진 필요 없다고 들었는데.”

“꼭, 꼭 가셔야 하는 건가요?”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절박하게 물었다. 기사단에서의 호출이니 반드시 응해야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물음이 에르도안을 곤란하게 만들 거란 걸 알면서도 물었다.

의외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애쉴의 질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사유가 있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지 않으면.”

“레이디.”

에르도안이 처연한 눈빛을 띠었다.

“저는 당신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울리는…… 사람?”

“아시잖습니까. 당신은 제국 내 유일한 공작가의 영애십니다. 저는 이름 없는 귀족일 뿐이고요. 지금 세간에 당신에 대한 소문들이 어떻게 퍼졌는질 아신다면.”

“저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신경 쓰입니다.”

에르도안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가문의 이름이 높았더라면 이 정도로 당신께 폐를 끼치지는 않았을 텐데.”

“에르도안.”

“레이디께서 무엇을 염려하고 계신지는 압니다. 하나.”

에르도안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그는 두려워하는 애쉴을 안심시켜 주고자 봄꽃같이 해사하게 웃었다.

“저 또한 기사입니다. 그것도 제국 내 가장 이름난 중앙기사단 소속이지요. 고작 마물 따위에 당할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한 곳도 많이 다녀왔고요.”

“…….”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잠시나마 당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애쉴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출발하세요?”

“내일 당장.”

에르도안은 양손으로 애쉴의 뺨을 감싸듯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먹거리던 여자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프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아, 이건 선물이에요.”

애쉴이 건넨 곱게 포장된 상자를 열자 그를 똑 닮은 검은 바탕에 보랏빛 무늬의 손수건이 나왔다. 에르도안은 핑 도는 눈물을 참기 위해 더욱 해사하게 웃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마음이 아렸다.

“감사합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 * *

초반에는 간단한 안부 소식이라도 간간이 날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전선이 바빠짐에 따라 그의 소식은 뚝 끊겼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애쉴은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듬해, 그녀의 생일날.

애쉴은 마담 엘리노아로부터 에르도안이 의뢰했던 것을 받았다. 예전에 받았던 팔찌와 마찬가지로 은색 바탕에 붉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미꽃이 달린, 그녀와 닮은 반지였다.

‘에르도안이 오면 손가락에 직접 끼워 달라 해야지.’

그녀는 반지를 눈으로만 볼 뿐, 한 번도 껴 보지 않은 채 고이 간직했다. 혹시나 먼지라도 쌓일까 정성스럽게 관리하면서.

그러나 그 반지가 애쉴의 손에 끼워지는 일은 없었다.

반지를 받은 지 정확히 1달 후, 팔라디움 공작가에는 비보가 한 통 날아왔다.

에르도안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였다.

* * *

“에르도안, 에르도안!”

공작가의 마차가 트라펠로에 도착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애쉴은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뛰어들었다. 그녀의 곱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에르도안이 들어 있는 관은 저택의 중앙홀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본래 관이 도착하자마자 묘지에 묻혔어야 했으나, 애쉴이 온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쓰러질 듯 달려온 애쉴은 관속에 핏기없이 누워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 아아아, 아아아악!”

왜 당신이 거기 있는 거죠?

“에르도안!”

돌아오신다면서요. 약하지 않으시다면서요.

“에르…… 도안…….”

내 곁을 떠나는 건 잠시뿐이라면서요…….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그 눈물은 대리석 위를 기어가는 여자의 검은색 드레스로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갔다.

겨우겨우 관에 가까이 다가온 애쉴이 울부짖었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을 관에 기댄 채 오열했다. 뒤늦게 따라온 라인하르트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거렸다.

“금방 오신다면서요, 다녀오시겠다면서요.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거예요. 눈 좀 떠봐요. 제발요, 에르도안. 제발.”

목을 놓아 울었다.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원해도 눈물을 닦아줄 연인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피 묻은 갑옷 대신 수의를 입고 있는 남자는 죽은 게 아니라 잠든 것처럼 보였다. 마법으로 방부 처리를 해서인지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살아생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핏기없는 얼굴과 차갑게 식은 몸을 제외한다면. 수의 밑에 감춰진 심장 쪽의 검상도 마찬가지로 제외한다면.

에르도안의 주변엔 계절에 맞는 여름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한 손을 꽉 쥔 채 잠들어 있었는데, 트라펠로 자작의 말에 따르면 시신을 수습해 준 누구도 그 손을 펴지 못했다고 했다.

그 손에 쥐어져 있던 건 검은색 바탕에 보라색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었다.

피로 젖어 붉게 변한 보라색 자수를 보며 애쉴은 다시 한번 세상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제 몸을 관 위에 반쯤 뉘인 채, 얼음보다 차가운 그의 손을 부여잡으며 하염없이 오열하던 여자는 결국 기절했다.

그의 비보를 받은 이후로부터 몇 번째 기절인지, 이젠 셀 수도 없었다.

* * *

그가 사라지고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 그의 장례식이 끝난 지 고작 3일이 지났으나 애쉴에게는 30년, 혹은 그 이상과도 같았다.

윤기 나던 은색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게 변했다. 생기 있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얼굴은 잠을 자지 못해 퀭했고, 촉촉하던 입술은 탈수증상으로 바짝 말랐다. 너무 울어 부은 목은 며칠째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걸려 그러지도 못했다. 어두운 방 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애쉴은 상체를 숙이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눈을 감으면 에르도안이 보였다. 눈을 떠도 에르도안이 보였다.

그가 웃을 때 매력적으로 올라가던 눈꼬리나 미안해할 때 뺨을 긁던 행동들이 보였다.

그의 셔츠에서 나던 머스크 향이, 그의 품에 묻어 있던 온기가, 귓가를 간질이던 달콤한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미친 것 같았다.

‘가지 말라 하면 됐는데. 단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부질없는 일을 반복한다 한들 죽은 이가 돌아올 리 없건만. 그녀의 후회에는 끝이 없었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아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고통스러워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불 켜진 촛대를 들고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손바닥만 한 검은색 비로드 상자를 열자 은색 반지가 촛불의 빛을 머금고 금색으로 빛났다.

야속하게도 고운 빛깔에, 또 눈물이 났다.

탁.

책상 위에 촛대를 놓았다. 그녀는 무너지듯 책상에 몸을 기댔다. 진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상자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상자를 꽉 잡았다. 손에 움켜쥔 게 상자가 아니라 심장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입을 열고 크게 헐떡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에 걸린 목걸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살리면 돼.’

그녀는 결심했다. 시간을 돌리기로.

에르도안이 없었으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 그를 기다리지 않았기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것이고, 팔라디움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삶의 전환점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를 살리고자 수명을 사용하는 건 아깝지 않았다.

‘많이도 아니고, 고작 1년이잖아.’

1년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대가는 1년의 수명이었다.

그가 토벌에 참여하겠다 한 때로 돌리면 된다. 1년의 수명만 바치면 그를 살릴 수 있다.

그녀는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막 모래시계를 돌리려던 그때, 어머니에게 들었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시간을 한 번 돌리면, 돌리기 이전으로 갈 수 없어.’

바늘로 찌르듯 가슴이 따끔거렸다.

에르도안이 마물 토벌에 참여하겠다 하는 때로 되돌리는 순간, 자신은 두 번 다시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터였다. 평생 애쉴리아 팔라디움으로 살아야 할 터였다.

‘아버지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럼 에르도안도 살아나는걸.’

‘에르도안이 평민 따위를 상대해 줄 것 같아? 게다가, 그때로 돌아갔다 한들 아버지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고?’

에르도안이 신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안다. 그러나 예전에 들었던 천한 계집이라는 단어가 가슴속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그것은 에르도안이 아무리 괜찮다 한들 공녀가 아닌 이상 영원히 마음에 남아 끊임없이 괴롭힐 가시와도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머니의 말씀은.

아버지를 만나면 온전히 살아가지 못할 거라는 경고는…….

문득,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 *

“어머니는 왜 미래를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나요?”

폭우가 쏟아지는 밤.

버려진 오두막집에 들어오자마자 애쉴의 어머니는 예언했다. 곧 있으면 오두막집 바로 옆의 나무가 벼락을 맞고 머리 위를 덮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두막집의 깊숙한 곳에 딸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린 애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바로 여기서 나가면 되잖아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에는 한 줌의 두려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 분명 무섭고 걱정되어야 할 상황인데도 아이의 마음속에는 어두운 감정 한 조각 깃들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니 괜찮을 것이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가만가만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아는 게 아니야. 엿보는 거지.”

“차이가 있나요?”

“네가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할 때,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기분이 어떻겠니? 예를 들자면,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던가.”

“헉! 정말 짜증 날 것 같아요.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고.”

누군가에게 옷 갈아입는 장면을 들킨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어린 애쉴은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무릎을 세우고 턱을 묻으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미래도 마찬가지야.”

그 말을 끝으로 애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애쉴도 마찬가지였다.

두 모녀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오두막집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운명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벼락 맞은 나무가 그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천만다행으로 오두막집의 통나무들이 무너지며 생긴 작은 구멍 덕에 살아남긴 했으나, 애쉴의 어머니는 큰 상처를 입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었다.

* * *

어머니는 미래를 알면서도 바꾸지 않았다. 모래시계를 건네주시면서도 신중히 사용하라고, 혹여 사용하더라도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지 말라고 하셨다.

애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머릿속에 윙윙 울리는 경고를 애써 외면했다.

‘이미…… 이미 바뀌었어요, 어머니.’

에르도안의 문장을 찾아준 일로 그와 대화를 텄다. 그를 기다리게 되었고, 소문이 났고, 아버지를 만나 팔라디움으로 돌아왔다.

에르도안 외에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떠돌이로 살던 이에게 생긴 소중한 인연이었다. 지레 겁먹고 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괜찮아. 설령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그때 가서 시간을 돌리면 돼.’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애쉴은 찬찬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게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라는 건 끝내 알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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