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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1권) (1/22)
  • 딱 1년만, 나를 사랑해 주세요 1권

    프롤로그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바닥의 홈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의 몸속을 돌며 따뜻해야 할 그것은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흐르는 핏물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눈도 감지 못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체가 보였다.

    닳을 대로 닳아 버렸다 생각했던,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마음이 찌릿 아파 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인 걸까? 아니면 반복된 회귀로 인해 드디어 미쳐 버린 걸까.

    “레이디, 애쉴리아 팔라디움.”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에 몸이 흠칫, 떨렸다.

    피투성이가 된 방 안에서 유일하게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무릎 위에 얹어진 주먹을 꽉 쥐면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면서.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애쉴은 그의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피가 엉겨 붙은 검은 머리칼. 지옥의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증오를 담은 보랏빛 눈동자. 그의 손에서 시작되어 그녀의 목에 겨눠진, 아직도 식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은빛 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르도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그의 이름을 간신히 불렀다.

    에르도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옥에서 온 악마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죠?”

    수십 번의 회귀로 인해 좋은 게 딱 하나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이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겪었던 일이니까. 어차피 지워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내리누르지 못한 공포가, 절망이, 고통이 그녀를 잠식했다.

    회귀 중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

    그것도 하필, 마지막 회귀에서.

    “받은 만큼 갚는 겁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에르도안이 검을 내려놓았다. 피 묻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가벼이 쓸었다. 새하얗던 얼굴에 핏물을 아로새겼다.

    뱀처럼 차가운 감촉에 애쉴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에르도안은 그녀의 턱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연인에게나 지을 법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의 숨결이 닿을 만한 곳까지 얼굴을 들이민 채, 가만가만 속삭였다. 흡사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당신이, 내 가족과 친지들을 전부 죽여 버리지 않았습니까.”

    “뭐…… 라고요?”

    난데없는 말에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다 앗아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런 적이…….”

    “나를 노예로 만들고, 개처럼 기게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새파랗게 질려 있던 입술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 이번 건 정말이지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당신을 살리기 위함이었는데.

    당신이 죽을 날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었는데.

    그런데…….

    “이제야 생각나시는 겁니까? 본인이 무슨 짓을 하셨는지?”

    화려하게 웃은 에르도안이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제 그들은 입술을 내밀면 맞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하지만, 당신의 가족을 죽이지는…….”

    “직접 하지 않았다 해서 죽이지 않은 게 아니랍니다, 레이디 팔라디움.”

    “…….”

    “이 입술로 그동안 대체 몇 명을 죽이셨을지.”

    차게 말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맞대었다. 전쟁에서 이긴 기사가 전리품에 입을 맞추는 듯한 모양새였다.

    툭.

    깊게 가라앉아 있던 애쉴의 적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가족들을 죽일 때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여자였거늘.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일까.

    비웃음을 걸치고 있던 에르도안의 입매가 무너져 내렸다. 좋지 않은 기분을 대변하듯 단정하게 정리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눈 한번 깜빡이기도 전 원래대로 돌아왔기에,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애쉴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랑합니다, 레이디.’

    눈앞에 있는 싸늘한 얼굴 위로 따사로운 봄바람처럼 사랑을 속삭이며 키스해 주던 연인이 겹쳐 보였다. 같은 사람과의 입맞춤인데 왜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건지.

    애쉴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더럽군.”

    겨울보다도 더 차가운 말투는 달콤한 회상에 젖어 있던 여자를 현실로 끌어내리기에 충분했다. 정신을 차리자 한 발자국 물러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에르도안이 보였다.

    그의 손짓에 옆에 있던 남자가 넥 초커 하나를 건넸다. 무늬 없는 검은색 쇠에 투박한 붉은 보석 하나가 달린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애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 아아…….”

    짙은 절망으로 침전된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더듬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질펀하게 고여 있던 피가 양손에 묻었다. 피 묻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새로운 핏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몸짓은 벼락같이 달려든 에르도안에게 물거품처럼 무너져내렸다.

    쿵. 바닥에 등과 뒤통수를 찧었다. 악, 하는 비명소리가 너덜거리는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쓰러진 여자의 위에 올라탄 에르도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더운 숨결이 훅, 끼쳤다.

    “당신이란 여자, 정말 끔찍해.”

    송곳과도 같은 말을 뱉어낸 남자는 들고 있던 것을 주저 없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채웠다. 주인의 의지가 아닌 이상 스스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노예임을 표시하는 구속구였다.

    차가운 금속이 목을 감싸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묵직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이 와중에도 살아 보겠다고, 숨을 쉬어 보겠다고 입을 벌려 헉헉대는 저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이 고통은 정신적인 걸까. 아니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리는 물리적인 걸까.

    “끌고 가.”

    길거리의 개보다도 못한 차가운 시선, 냉정한 말투.

    그것을 보며 심장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애쉴은 끌려가던 상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 *

    눈을 뜨니 빛 하나 없는 차가운 지하 감옥이었다.

    감옥에 던져 넣어진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던 애쉴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거라 믿었다. 아니, 성공하긴 했다. 본래 에르도안이 죽었어야 할 날은 지났다. 여태껏 살아 있으니 성공한 것이다. 수십 번의 회귀 끝에 드디어 그를 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뭐 할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는 본인의 텅 빈 손을 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으나, 무언가가 묻어 있다는 것은 촉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피일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눈꺼풀을 깜빡이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무너진 댐처럼 끊이지가 않았다.

    ‘아아…… 아아아!’

    울고 싶은데. 마음껏 울부짖고 싶은데 구속구에 가로막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저주받을 그것을 긁었다. 끼익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만 날 뿐 무심하게도 멀쩡했다.

    구속구를 더듬거리던 손끝이 목에 걸려 있던 얇은 줄에 닿았다. 습관적으로 줄 끝에 달려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금빛의, 작은 모래시계였다.

    태양처럼 저 스스로 빛을 내는 모래시계 안에는 몇 알 남지 않은 황금빛 모래가 끊임없이 부스러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10분? 5분? 아니면…….

    애쉴은 피 묻은 모래시계를 꽉 움켜쥐며 몸을 웅크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때였다.

    “그가 아니라 너였군.”

    모래를 씹는 듯한 버석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고개를 들자 철창 앞에 서 있는 거무스레한 인영이 보였다. 얼굴이 있을 법한 곳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녹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발하는 눈동자에 두려울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보다 깨달았다. 그는 에르도안이 가족들을 죽일 때 옆에 있던 남자였다. 인간이긴 한 걸까 싶을 정도로 아무런 인기척 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남자. 수십 번의 회귀로 에르도안의 곁에 있던,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음에도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

    무슨 말이냐 묻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몸을 일으켜 철창 쪽으로 붙는 순간-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난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무미건조한, 사형 집행인이 유언이라도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 의미 없는 짓이다. 애쉴은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터질 것처럼 조여오는 심장을 움켜쥐며, 다른 손으로는 차디찬 철창을 부여잡은 채 넝마가 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

    그가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것이라.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애쉴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자 끝인 그녀의 연인, 에르도안을 떠올리면서.

    ‘두 번 다시…… 그를…… 사랑하지 않게…….’

    끝을 맺지 못한 생각이 흩날렸다.

    철창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스르르, 몸이 무너져 내렸다. 거미줄 같던 은발이 허공에 날린다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흐릿하던 시야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씨, 아가씨! 일어나세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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