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23)화 (123/123)

123.

데클렌이 사라졌다. 에리스텔라가 그림을 들어 확인했다.

그림에 한 사람의 뒷모습이 생겨났다.

아마 그곳에는 데클렌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건국 황제가 있을 것이다.

“오해든 복수든 당사자끼리 해결하겠지.”

그러고 나서도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그게 건국 황제가 원했던 일이고 데클렌 역시 제대로 원한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에서 해결하고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잘살 거다.

에리스텔라가 그림을 돌돌 접고 돌아섰을 때였다.

“뭐야? 이걸로 해결이야?”

모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인리시온이 나서서 물었다.

“응. 해결이지.”

에리스텔라가 후련해하며 웃었다.

건국 황제가 자신의 마력을 전부 쏟아 내어 만든 봉인이었다. 데클렌도 깨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견고했다.

“이걸 소각하면 더 이상 봉인이 풀릴 일은 없을 거야.”

그게 이 봉인 마법의 마무리였다.

데클렌이 사라진 이상 아직 세상에 흑마법사가 남아 있을지라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 그럼…….”

더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안전하다.

“와아아! 우리는 이제 살았다!”

“역시 전하가 우리를 구하셨어! 황녀 전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뒤늦게 환호했다.

***

모두가 기뻐하고 환호하고 있는 와중에 하인리시온은 얄궂게도 웃을 수 없었다.

분명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되었고 에리스텔라는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그리고 나는 에리스텔라에게…….’

하인리시온이 조용히 뒷걸음질 치고 있을 때였다.

눈물과 웃음 없이는 볼 수 없는 고백을 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잠깐만. 그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새파래졌을 때였다.

피할 새도 없이 에리스텔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는 의미심장한 입꼬리.

으흐흐흐흫.

에리스텔라의 음흉한 미소에 하인리시온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게까지 고백하는데 어쩔 수 없지.”

에리스텔라가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거 참 곤란하지만 나밖에 없다는데. 내가 결혼해 줘야지 어쩌겠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열화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쳤다.

“…….”

아무래도 에리스텔라의 손아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다.

“아까는 내가 상황이 급박해서 확인해 보는 건데,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에리스텔라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파혼은 못 하겠네.”

사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파혼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후였지만.

그보다 하인리시온의 절절한 고백이 먼저였으니까.

“…….”

어쩌다 보니 모두가 보는 곳에서 공개 고백을 해 버렸다. 하인리시온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하인리시온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이곳에 오는 동안 떠올렸던 최악의 상황에 비한다면 이 정도 일쯤은 웃긴 해프닝이었다.

하인리시온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약간의 쪽팔림은 밀려오지만 뭐 어때. 그 대가로 얻은 건 너무도 크고 값진데.

“에리스텔라. 나는 네가 필요해. 앞으로 있을 수많은 날을 나와 함께해 주겠어?”

하인리시온은 다시 한번 고백했다.

에리스텔라는 이번에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하인리시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남편이 되겠다는 거지?”

“맞아.”

“좋아. 그럼 나도 네 아내가 되어 줄게.”

와아아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사람들의 축하 함성이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다.

제국민 모두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을 축복했다.

***

제국은 빠른 속도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황궁은 상당 부분 보수 및 재건축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활력이 넘쳐났다.

특히나, 아델라시아 대공의 고백은 큰 화제가 되었다.

샬롯은 잔뜩 들뜬 채로 떠들고 있었다.

“그날 고백이 그렇게 대단했다며? 나는 이야기만 듣는데 직접 못 본 게 너무 아쉽더라.”

“고백이 대단하기는 했죠.”

소니아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시아 대공의 절절한 고백을 전해 듣기만 하는 건데도 간질간질하더라.”

샬롯은 너무 아쉽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네가 대마법사가 될 때도 부럽지 않았는데.”

샬롯이 에리스텔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동안 에리스텔라가 보내온 시간을 알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은 부러워. 행복해 보여.”

정말 진심으로 에리스텔라의 행복이 기뻤다.

샬롯은 결혼식 날 자신이 축하 노래를 부르겠다며 몇 번이나 더 축하해 주었다.

***

샬롯과 헤어지고 난 후, 대공가로 돌아가기 전에 에리스텔라는 소니아와 함께 여유롭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는 다들 정신없이 바쁘지만 불안보다는 기대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조금만 담아 두고 싶어서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전하는 저희의 영웅이십니다!”

“전하. 여기도 좀 들러 주십시오!”

사람들이 에리스텔라를 발견할 때마다 몰려들어 열광했다.

에리스텔라는 당황했다.

“전하. 서둘러 돌아가야겠어요.”

“그러자.”

소니아가 에리스텔라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으며 힘겹게 빠져나갔다.

결국, 사람들을 뚫고 도망치다시피 대공가로 돌아왔다. 진이 쭉 빠졌다.

하인리시온이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오늘 외출했다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였다면서.”

“응. 정신없었어.”

한 번 주목을 받기 시작하니 발을 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은 그럴 거야.”

“시온. 오늘 사람들이 나보고 영웅이래.”

최근 제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에리스텔라는 제국을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칭송하고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어?”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이라 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그들의 동경 어린 환호가 묵직한 돌덩이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여전히 제국이 소중하고 제국민들을 지키고 싶지만. 무슨 일인가 생긴다면 망설임 없이 나서겠지만.

지금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에리스텔라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영웅의 남편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돌아보았다.

“영웅이 모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건 사람들의 기대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

“…….”

“영웅도 영웅마다 개성이 있지 않겠어?”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사랑했다. 그녀가 애틋하고, 동시에 존경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에리스텔라에게 가장 편한 쉼터가 되어 주고 싶었다.

“영웅이 된다고 네가 달라질 필요 없어. 너는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면 돼.”

분명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할 수는 있지만, 그들도 에리스텔라 황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다 보면 사람들도 차츰 받아들이겠지.”

에리스텔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이 갔다.

평생을 지고 있던 책임감이 무거웠던 것을 알기에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하지는 마. 네 옆에는 내가 있을 거니까.”

앞으로 모든 순간에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와 함께할 것이다.

“정말?”

하인리시온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에리스텔라는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싫다고 떠난다고 해도 내가 보내 주지 않을 거야.”

“……그건 나도 그래.”

하인리시온의 멱살이라도 잡고서 놓아주지 않을 거다.

이미 네가 함께하는 즐거움과 설렘을 알려줘 버렸으니까.

그 순간 에리스텔라의 눈이 빛났다.

“나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거 있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들뜨는지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뭔데?”

이제는 에리스텔라의 얼굴만 봐도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아 지금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하인리시온이 긴장하기 무섭게 에리스텔라가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코끝이 닿았다.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거나 하는 틈도 없이 그대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하인리시온이 얼굴을 살짝 빼며 물었다.

“왜 싫어?”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하인리시온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

하인리시온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너 감당할 수 있겠어?”

가벼운 마음이라면 지금 여기서 멈추라고. 하인리시온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에리스텔라의 눈매는 더욱 활짝 휘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싫어?”

에리스텔라가 도발하듯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모습에 하인리시온은 허물어졌다.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멈추지 못할까 봐 조심했던 것뿐인데.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함께하는 앞날은 전부 낯설고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설레.

너랑 하는 처음이라면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이상한 것까지 해 보고 싶어.

하인리시온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점점 미끄러져 등을 감쌌다.

어느새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때는 포기했던 행복이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完

@k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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