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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22)화 (122/123)
  • 122.

    “그래서 나를 상대하겠다고 이런 짓을 꾸민 건가.”

    조롱기조차 없는 데클렌의 담담한 목소리는 오히려 두 사람의 전력 차이를 강조하는 듯했다.

    에리스텔라마저도 감당하기 힘든 분노였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서 제법이구나.”

    데클렌이 에리스텔라에게 흑마법으로 건 저주가 발동하도록 했다.

    “여우 꼴을 하고서도 여전한지 궁금하네.”

    “누가 여우가 된대?”

    “……?”

    에리스텔라는 데클렌의 흑마법에도 끄떡없었다. 여우로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데클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이냐며 웅성거리느라 잠시 소란스러워질 정도였다.

    “내가 이걸 아직 말 안 했네. 내가 덕분에 흑마법을 완전히 풀었어.”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더 이상 흑마법으로 나를 농락할 수는 없을 거야.”

    그날 에리스텔라의 시도는 성공했다. 길고 길었던 저주가 끝났다.

    “어떻게…… 풀었지?”

    그때였다.

    “데클렌.”

    에리스텔라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의미심장하게 불렀다.

    “당신이 나를 복수의 대상으로 정한 건 내가 건국 황제와 비슷한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가 에리스텔라를 고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래서인가. 건국 황제가 남긴 마력이 내 마력과 반응했어. 그 덕분에 건국 황제가 은밀하게 남긴 전언을 들을 수 있었어.”

    얼마 전, 황제가 보여 준 회고록을 보는 중 일어났던 일이기에 건국 황제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데클렌은 에리스텔라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리스텔라는 데클렌을 지그시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건국 황제가 그에게 하고자 했던 말을 대신 전해 주기 위해서.

    그녀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결국 너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너를 배신하는 건 나의 뜻이 아니었지만, 내가 너를 지키는 데 늦어 버렸다.”

    “……지금 이게 무슨.”

    “나의 실책이고 과오다.”

    마치 에리스텔라가 아닌 건국 황제가 데클렌에게 하는 말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너에게 해명을 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다.”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데클렌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분노를 풀기 위해서 여러 마을을 공격하고 쑥대밭을 만들었지.”

    “…….”

    “나는 너의 친구였으나 또한 제국의 황제였다. 내 마음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더 컸고, 네가 제국민을 해친 순간 더는 너를 지킬 수가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건국 황제가 남긴 말이었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당신 몫이지만.”

    이걸로 에리스텔라의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건국 황제가 오랜 시간 동안 남겨 놓을 만큼 전달하고 싶었던 진심이었기에 말해 주었을 뿐이다.

    “고작 이런 걸로 나를 흔들려는 건가.”

    데클렌은 언제 혼란스러웠냐는 듯 에리스텔라의 의도를 비아냥거렸다.

    “그럴 리가. 이건 당신이 아니라 건국 황제를 위해 말한 것뿐이야. 이거랑 내가 당신을 여기서 끝내는 건 별개의 문제지.”

    “자신 있어 보이는구나.”

    “나는 살면서 자신 없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서 말이야. 당신은 강하지. 하지만 싸움은 그게 다가 아니잖아?”

    에리스텔라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이미 한 번 져 본 적 있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야.”

    사실 에리스텔라는 데클렌을 없앨 수 있는 회심의 방법이 있었다.

    데클렌을 이길 수는 없어도 그가 제국을 위협할 수 없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

    “저기요 선조님.”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데클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이 지켜보았다.

    에리스텔라는 기꺼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용서가 안 되는 거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우리를 괴롭혀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거고.”

    솔직히 그가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진실이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가장 큰 배신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 꼴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는데.”

    어떤 사연이 있든 상관없었다.

    에리스텔라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제국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느냐 아니냐일 뿐이니까.

    그렇기에 정확히 말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분풀이하지 마. 대신 당신이 복수해야 할 진짜 상대를 만나게 해 줄게.”

    에리스텔라가 그림을 꺼내 데클렌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그걸 왜 보여 주지?”

    “이건 르오니아 제국의 국보 중 하나야. 그리고 당신이 가져갔던 그림처럼 이것도 장치가 숨겨져 있더라고.”

    제국의 국보는 당연히 가치 있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특수하거나 희귀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건국 황제의 무던한 성품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에 에리스텔라가 처음으로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데클렌이 황궁을 보호하는 결계를 해제했을 때였다.

    그때 다른 국보들에도 숨겨진 장치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러 번 국보에 관한 검증을 거쳤지만 별다른 게 나온 적 없었다.

    그래서 국보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확신했다.

    나라면…… 황궁 결계가 전부가 아닐 거야. 절대로 그것만 남겼을 리 없어.

    건국 황제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에리스텔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모든 것은 건국 황제가 남긴 국보와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그러다 건국 황제의 회고록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 안에서 황제는 국보에 관한 비밀과 마법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곳곳에 은밀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건 모두 훗날을 기약해 그가 대비책으로 남겨 놓은 것들이었다.

    부디 이걸 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건국 황제가 우려하던 일은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걸 써야 할 때였다.

    “건국 황제가 어떻게 붕어하셨는지 알고 있어?”

    건국 황제의 죽음은 여러 의문이 있었다.

    비록 노쇠해지기는 했으나 강한 마법사였던 만큼 정정하던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남긴 몇 점의 그림과 회고록은 국보로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고작 그림 하나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못 할 이유가 없지. 그냥 그림이 아니라 건국 황제가 마지막을 바친 거니까.”

    “……언제 적 사람인데.”

    데클렌은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 그림은 건국 황제의 진짜 무덤이야.”

    아마도 건국 황제의 무덤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육신이 남아 있을 수 없으니까.

    황제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걸 깨닫고 스스로를 그림 속에 봉인했다.

    그건 세상에 허락된 마법이 아니었다. 한때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데클렌이 알려 준 흑마법이었다.

    “건국 황제는 당신이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날 일을 걱정했던 듯싶었다.

    “그때 당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도.”

    “…….”

    에리스텔라의 말이 이어질수록 데클렌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듯도 싶었다.

    “아니면 당신을 그냥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수백 년 전 봉인된 건국 황제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회고록을 읽다 보니 어쩌면 그 이유가 더 컸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에리스텔라 혼자만의 추측이니 그 말은 삼켰다.

    “……뭐?”

    “건국 황제는 스스로를 그곳에 봉인해서 잠들어 있어.”

    “…….”

    풍경화에는 점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게 바로 건국 황제였다.

    “설마…… 그럴 리가…….”

    데클렌이 멍해지는 순간. 에리스텔라가 노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인리시온도 알아차렸다.

    데클렌이 흔들린 사이에 틈을 놓치지 않고 봉인 마법에 시동을 걸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데클렌이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건 오로지 데클렌만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그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오히려 그의 사지를 더욱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를 속였구나……!”

    데클렌이 에리스텔라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뻗었을 때였다.

    데클렌이 에리스텔라 코앞까지 다가온 것과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러자 에리스텔라가 들고 있는 그림이 반응하면서 데클렌을 끌어당겼다.

    데클렌이 그림을 찢을 기세로 자신의 마력을 쏟아내었지만, 그림에서 나오는 마력은 더욱 거세게 데클렌을 휘감았다.

    “이거 정말로…… 정말로 에단이 남긴…….”

    데클렌이 무력하게 봉인 마법에 끌려가면서 익숙한 마력을 알아차렸다.

    그럼 저 그림 안에 에단이 있는 건가.

    데클렌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그의 마력에 빈틈이 생겨났다.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건 치사해서 안 좋아하지만.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을 공격했다. 그의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마력이 약해지도록.

    마지막 순간 데클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건국 황제가 봉인되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

    “그러니 거기서 따지고 화내고 원하는 복수를 이뤄.”

    에리스텔라의 말이 끝났을 때 데클렌이 서 있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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