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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21)화 (121/123)
  • 121.

    ***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하인리시온은 눈이 뒤집히는 감각을 느꼈다.

    에리스텔라가 속박 마법에 걸린 채 데클렌 앞에 제물처럼 꿇려 있었다.

    “에리스텔라!”

    하인리시온의 절박한 외침에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온?”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거리야. 어떻게 너한테 이럴 수가 있어.”

    하인리시온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만 데클렌이 만든 결계에 막혀서 튕겨져 나왔다.

    그럴수록 하인리시온의 마음이 타들어 갔다.

    “정신 차려. 절대로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에리스텔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수록 애가 탔다.

    이대로 그녀가 삶을 포기할 수 없을 만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마음이 흔들릴까.

    도저히 모르겠다. 다만, 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어.

    하인리시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너 죽으면 나는 혼자 늙어 죽어야 돼!”

    “……?”

    “네가 없으면 내가 다른 사람 만날 거 같아? 절대로. 혼자서 아무도 안 만나고 죽을 거야. 그럼 대공가의 명맥도 끊어지겠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너 나 그렇게 만들 거야?”

    “…….”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죽지 마.”

    하인리시온은 빌고 싶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절대로 버티지 못할 거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만 번이나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

    그 수많은 상상이 반복될 때마다 하인리시온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확신했다.

    “너는 내가 아닌 제국을 사랑하겠지만 나는 오직 너만을 위해.”

    “…….”

    “너만 살아 있으면 돼. 그러니까 나를 배신하지 마.”

    하인리시온의 처절한 고백이 이어질 때였다.

    동그랗게 뜬 눈을 끔벅이던 에리스텔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 안 죽을 건데?”

    “……어?”

    하인리시온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려졌다.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죽어? 나 절대 안 죽을 거야.”

    아주 당돌한 대답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하인리시온은 순식간에 김이 빠졌다.

    “나는 절대로 희생할 생각 따위 없어.”

    해사한 미소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하인리시온을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데클렌이 에리스텔라에게 시험하듯이 내놓았던 선택지.

    에리스텔라는 그동안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희생은 단 한 번도 고려한 적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살 거야.”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먼지 한 톨만큼의 망설임마저도 사라졌다.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서 약속할게.”

    “……정말이야?”

    하인리시온은 여전히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한순간에 에리스텔라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다.

    “나 요즘 정말 좋아.”

    에리스텔라는 지금 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황은 거지 같은데도 이상하게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어.”

    아마 그건 네 덕분일 거야.

    “내가 여우가 되어서 널 찾아간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거 같아.”

    돌이켜보면 모든 변화의 시작은 하인리시온과 함께하면서부터였다.

    지금의 에리스텔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이 전부 있는 이곳에서 최대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러니 벌써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다행인데.”

    하인리시온은 예상과는 다른 에리스텔라의 반응에 안도하면서도 불안을 전부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건데?”

    “아, 지금 이거?”

    에리스텔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족쇄 마법이 걸려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에리스텔라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동시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에리스텔라에게 걸려 있던 족쇄가 풀렸다.

    “전하. 괜찮으신 거죠?”

    “그럼 저희는…….”

    “보호 결계가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마.”

    멀찍이 물러난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리스텔라가 태연하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거 전부 짜고 치는 판이었어.”

    에리스텔라가 태연하게 일어났다. 족쇄 마법은 처음부터 쉽게 풀리도록 조작되어 있었다.

    “하하하. 저희는 전하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머쓱해 하며 하인리시온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에리스텔라 역시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근데 혹시 내가 보낸 전령 못 받았어?”

    “전령?”

    “내가 급한 대로 상황을 설명해서 마법으로 전령 비둘기를 보냈는데.”

    하인리시온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눈이 뒤집혀서 달려온 것이었다.

    “이상하다. 왜 전달이 안 됐지……?”

    에리스텔라가 데굴데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었지만 에리스텔라가 보낸 전령 비둘기는 잘 도착해 있었다. 다만, 에리스텔라에 대한 걱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하인리시온이 상황을 파악한 게 더 빨랐던 것이다.

    사실, 에리스텔라가 황궁으로 향하는 사이에 납치 시도가 있었다.

    꽤나 머리를 쓰기는 했다. 마차를 통째로 바꿔치기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도중에 눈치를 챘다.

    하지만 도중에 멈추지 않고 일부러 그들이 있는 소굴까지 갔다.

    그들을 이해해 주거나 용서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런 동정심은 에리스텔라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여기서 허튼짓을 못 하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 다다라 에리스텔라가 목격한 상황은 예상과는 달랐다.

    “저, 저희는 사람 가죽을 쓰고 있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 말렸습니다……! 정말입니다!”

    “혹시라도 전하가 위험에 처해 계시면 저희가 구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뒤에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사람들이 다급하게 한마디씩 외쳤다.

    이번 납치극도 에리스텔라가 먼저 제안을 했기 때문에 따랐을 뿐이었다.

    “저 사람들 말이 맞아.”

    그곳엔 에리스텔라의 납치를 작당한 자들과 그들을 막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간의 사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데클렌에게 저 사람들의 아이와 부모가 붙잡혀 있었어.”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운 마음도 한편으로는 생겨났다.

    물론 괘씸했다.

    감히 납치 따위를 작당한 자들은 반드시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가족을 인질로 잡힌 그들의 두려움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천천히 계획을 세우면 늦을 것 같았어.”

    그래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물론,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려고 한 자들은 내가 제대로 손을 봐줬어.”

    아마 지금 그곳에 전부 쓰러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데클렌에 의해 붙잡혀 있는 아이들은…….

    “인질은 전부 구출했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역시나 해냈구나.

    든든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에리스텔라는 마법으로 전령을 두 사람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지금 막 황제가 직접 알려 주었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 당신뿐이야.’

    에리스텔라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데클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선택을 하라고 했지.”

    그저 눈앞의 하루를 보내는 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

    데클렌은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는 걸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지.

    나를 죽이는 것보다 그 모습을 더 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들에게 기대하는 건 딱 하나야. 그냥 각자의 인생을 잘 사는 거.”

    “…….”

    “내가 저들을 위해 하는 일을 알아주기를 바란 적 없어.”

    그저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자신이 해 온 일들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대가를 원한 적 없다고 해서 대의를 위한 희생이 당연하다는 건 아니었다.

    “근데 당신이 질 나쁜 선택지를 걸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악하고 비겁해서가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기도 했다.

    “이거 까딱 잘못하면 당하겠구나.”

    저 사람들을 흔들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도록 유도하겠구나.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말이야. 이거야.”

    에리스텔라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사람들에게 배신할 틈을 주지 않는 것. 그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는 거.”

    에리스텔라가 먼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처럼 하라고 먼저 제안했던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데클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였구나. 재밌었겠네.”

    “재미랄 게 있나. 질질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데클렌의 입매가 점점 비틀어졌다. 불쾌함을 전신에서 표출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따져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이건 의미 없는 복수야. 다 하고 나서도 허무하기만 할 뿐이야.”

    “그게 뭐가 중요하지.”

    데클렌의 눈빛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길을 잃은 채로 어떻게든 막다른 길을 찾아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더더욱 데클렌을 멈춰야 했다.

    “과거에는 오해였을지 몰라도. 지금 당신은 모두에게 해로운 존재야.”

    “…….”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않을 거고.”

    나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제국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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