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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20)화 (120/123)
  • 120.

    데클렌은 지난 며칠 동안 제국 전체에 공포를 몰고 왔다.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낮추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사람들은 에리스텔라 황녀가 결단을 내리고 발표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황궁과 아델라시아 대공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에리스텔라 황녀가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모두가 에리스텔라 앞에서 말을 조심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에리스텔라 황녀의 희생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도록.

    흑마법에 걸린 황녀를 믿을 수 없으니 데클렌에게 붙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녀가 희생이라는 두 글자를 고민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지만 소니아와 샬롯이 우스갯소리를 하면 할수록 하인리시온이 로웬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심하면 할수록.

    에리스텔라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괜찮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흔들리지 않아.”

    오히려 하인리시온의 표정이 더 좋지 않았다.

    “그보다 에밋 시안느를 불러 줘. 이 물건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황궁 결계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오기 전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부탁해 황녀궁에 잠시 들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 하나를 챙겨 왔었다.

    “어쩌면 지금 문제를 전부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곧 에밋 시안느가 도착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무엇입니까?”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데클렌의 흑마력석이 있으면 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 맞아?”

    “네. 전하의 마력이라면 그 정도의 매개체만 있으면 풀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물건을 구할 수 없을 뿐이죠.”

    불가능한 전제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구할 수 있다면?”

    하지만 에리스텔라도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확인했다.

    “네?”

    “데클렌이 직접 만든 흑마력석이 내 손에 있다면.”

    그럼 흑마법의 저주도 풀 수 있고 데클렌을 상대할 수단도 생기는 것이었다.

    “설마 그거야?”

    에리스텔라가 무슨 물건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하인리시온 역시 놀라며 반응했다.

    “이거 한번 볼래?”

    에리스텔라가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마력석을 꺼내 보여 주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께 받은 마력석이야. 국보 중 하나지.”

    목걸이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어릴 때는 종종 하고 다녔던 적도 있던 물건이다.

    에밋 시안느가 마력석을 자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내가 건국 황제와 마력이 비슷한 편이라서 주셨었어. 다른 사람보다 나한테 더 필요할 거라고.”

    “……이게 정말 국보입니까.”

    한참 동안 마력석을 보던 에밋 시안느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건국 황제가 아니라 데클렌의 흑마력석 맞지?”

    오래전, 데클렌이 건국 황제에게 선물했던 자신이 직접 만든 흑마력석.

    겉으로는 보통 마력석과 구분하기 힘든 데다가 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던 국보기에 그 누구도 의심한 적 없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게 어떻게……?”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건국 황제께서 데클렌과 관련된 물건들을 전부 국보로 보관하도록 한 거겠지.”

    그렇게 해서 단 하나라도 소실되지 않도록.

    만약의 상황에 누군가가 국보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쓸모에 맞게 사용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게 건국 황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국보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걸 선황제와 황후가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에리스텔라에게 가장 필요한 국보는 이미 그녀의 소유였다.

    “확인까지 했으니 바로 진행하자. 단 하루라도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어.”

    ***

    물건이 있으니 저주를 풀기 위한 준비는 금방이었다.

    에리스텔라의 몸 안에 흐르는 마력 중 일부가 데클렌의 흑마력석에 반응했다.

    그동안 끈질기게 괴롭히던 저주의 정체였다. 데클렌이 심어 놓은 저주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소리 없이 에리스텔라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마력을 회복하고 마법을 쓰면 쓸수록 그녀를 괴롭히던 저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때? 성공한 것 같아?”

    에리스텔라가 배 속이 뒤집히는 감각 탓에 입을 틀어막으며 앞으로 쓰러질 듯 무너지자 하인리시온이 바로 다가가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의 몸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다만…… 몸이 가벼운 것 같아.”

    “잘된 듯싶습니다. 다만, 저는 흑마법에 관한 지식이 있을 뿐 마력은 전혀 없어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에밋 시안느가 까맣게 타서 재가 된 흑마력석의 잔재물을 확인하며 말했다.

    에리스텔라가 몸 안의 흐르는 마력을 느끼며 말했다. 마지막 확인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바로 황궁에 다녀올게. 좀 더 확실해질 때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사람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만큼 에리스텔라의 마음도 급했다.

    우선은 황제에게 상황을 말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마무리하고 나도 준비할 테니까.”

    하인리시온은 당연히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아니었다.

    “아냐. 나 때문에 요즘 대공가 일을 거의 못 보고 있었잖아. 나 혼자 다녀와도 충분해.”

    “……괜찮아. 대공가 일도 충분히.”

    “요즘 네가 나보다 더 무리하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그럼 데리러 갈게.”

    하인리시온이 마지막 미련으로 말했다.

    “그럼 그러든가.”

    에리스텔라가 설핏 웃었다.

    ***

    해가 점점 저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배웅하러 황궁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복도 맞은편에서 로웬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필 이 타이밍에 꼭 신호를 주는 것처럼.

    “전하! 큰일 났습니다!”

    “……설마 에리스텔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역시나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지금 황궁 앞에…… 사람들이 황녀 전하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뭐?”

    눈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망망대해 같았다. 차라리 자신의 귀가 먼 것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잘못 들었기를.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일이 벌어진 뒤에야 알리는 거야!”

    하인리시온은 참지 못하고 버럭 분통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분명 마차가 황궁 안까지 잘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아서 사태 파악이 늦어졌습니다.”

    “언제부터 일이 벌어진 거야?”

    “황궁 앞에 사람들이 몰려든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사이에 준비를 하고 기습적으로 일을 벌인 듯합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우선 저희 마법사와 기사들을 그쪽에 보내 놓았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진다 싶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설마 이런 미련한 짓을 할 줄이야.

    하인리시온은 재정비할 틈도 없이 에리스텔라가 있다는 황궁 앞으로 향했다.

    하인리시온은 절대로 에리스텔라를 희생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에리스텔라를 희생해 살아남으려는 자들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하인리시온 스스로도.

    초조한 마음에 이를 바득 갈았다.

    에리스텔라. 부디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해.

    만약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너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살기 위해 발버둥 쳐.

    간단히 포기하지 말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굴어서라도 희생 따위는 하지 마.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일들을 알기에 하인리시온의 불안감은 극도로 치달았다.

    ***

    사람들은 데클렌이 준 족쇄 마법을 이용해 에리스텔라를 강제로 이곳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제물로 바쳤다.

    “시, 시키는 대로 했으니…… 저희는 살려 주시는 거죠?”

    데클렌은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을 무시한 채 자신의 앞에 무릎이 꿇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때. 네가 지키려던 이들이 너를 팔아넘긴 기분은?”

    에리스텔라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데클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여기서 눈이 뒤집히길 기대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이죽거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됐어. 나는 결국 이 꼴이 되었으니. 이제 나를 죽이기만 하면 되겠네.”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고 싶었으면 이런 귀찮은 짓까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뭐 하자는 건데?”

    “이번엔 너한테 기회를 줄게. 자기들 살겠다고 너를 산 제물로 바친 저들에게 복수를 할 기회.”

    “…….”

    “저들이 괘씸하지 않아? 저들을 위해 한 일들이 전부 후회되잖아?”

    데클렌은 에리스텔라의 분노를 부추겼다.

    사람들이 흠칫하며 애써 시선을 피하고 몸을 웅크렸다. 데클렌은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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