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에리스텔라는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욱신거리고 손발에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마치 데클렌의 시선을 따라 에리스텔라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닌가.
“마침 구경하는 사람도 많으니 잘됐네.”
데클렌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아차렸다.
뒤늦게 도착해 상황을 파악한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한발 늦어 버렸다.
저주를 건 데클렌 본인이 눈앞에 있었기에 더더욱 저항할 수 없었다.
“……황녀는 어디로 간 거죠?”
“이게 무슨.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아요?”
“저 여우 많이 본 거 같지 않아요?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여우잖아요.”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변해 있었다.
모두가 그 모습을 똑똑하게 목격했다. 어떻게 숨길 여지조차도 없었다.
“그럼 정말로 황녀 전하가 흑마법에 걸린 거예요?!”
“그럴 수가……!”
사람들은 경악하고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에리스텔라는 데클렌을 노려보았다.
“자꾸만 여우가 되는 황녀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데클렌은 황궁을 습격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황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고 불안감을 자극하는 게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황녀의 존재만으로 안심할 수 없을 테니까.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대마법사.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거라는 무한한 신뢰.
그것들을 한순간에 깨부숴졌다.
“다들 황녀를 믿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
데클렌은 에리스텔라를 농락하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동안 에리스텔라 황녀를 지켜봐 왔지.”
에리스텔라에게는 프루투가 처음이었지만, 데클렌이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에밋 시안느로 처음 본 그날부터 계속 지켜봐 왔다.
그리고 궁금했다. 과연 너는 어떤 선택을 할까.
데클렌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황녀는 제국민을 무척이나 아끼더군.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데클렌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그럴수록 불안했다. 그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특히 고작 소년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다니 예상도 못 했어. 그 때문에 지금 그 꼴이 되기는 했지만 말야.”
‘…….’
“혹시 후회하나?”
[후회 따위 하지 않아.]
에리스텔라가 망설임 없이 딱 잘랐다.
단 한 순간도 그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그 아이가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그러니 감히 그런 걸로 나를 흔들려고 하지 마.
“역시 대단한 황녀 전하네. 그럼 제국민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어?”
데클렌의 시선이 에리스텔라를 넘어 그 뒤에 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그리고 제국민들도 황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까.”
데클렌의 입을 막아야 한다. 저기서 한마디라도 더 나오면 큰일이다.
에리스텔라가 다급하게 입을 열 때였다.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한발 늦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로지 개인적인 복수를 원한다. 그러니 에리스텔라 황녀를 나에게 끌고 와라.”
충분히 혼자 에리스텔라를 제압할 수 있을 텐데도 데클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에리스텔라가 지금껏 자신이 지키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기를 원했다.
“내 복수만 마무리한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다.”
데클렌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데클렌은 파란을 남기고 유유히 떠났다.
몇몇 마법사들이 데클렌을 붙잡으려 하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허무할 정도로 처참하게 당할 뿐이었다.
***
에리스텔라는 여우의 몸으로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대공가의 여우가 에리스텔라 황녀라는 사실이 퍼진 상태였다.
마차에서 실시간으로 소문의 흐름을 보고받았다. 역시나 데클렌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우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였다며 분노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가장 혼란을 가중시키는 건, 흑마법에 걸린 에리스텔라 황녀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불안은 공포를 만나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하인리시온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용인들이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방으로 가지.”
침실에 들어서서야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언젠가 알려질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잖아.”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그래서 지금 밝힌 거겠지.’
에리스텔라에게 있어 최악의 타이밍이 데클렌에게는 최적의 타이밍이었을 테니.
‘그리고 적중했고.’
제국 전체의 분위기는 당장 어찌할 수 없었다.
일단, 주변의 분위기부터 정리하는 수밖에.
에리스텔라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여우로 보내야 했다.
그러니 적어도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고용인들과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풀어야 했다.
에리스텔라가 여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
갑작스러운 진실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어색하고 불편한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이 대부분의 보좌관과 고용인들에게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잠재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있었다.
로웬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려 노력했지만, 눈동자가 정신없이 방황했다.
에리스텔라와 마주할 때마다 여우 앞에서 자신이 한 말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중에는 황녀를 향한 욕이 다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언제나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하인리시온을 향한 원망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살짝 눈치라도 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눈치를 준다고 알아들었겠어?”
오히려 하인리시온의 말에 반박하며 더 많은 욕을 했을 게 뻔했다.
로웬이 앞으로 황녀의 얼굴을 볼 생각에 한숨을 쉴 때였다.
에리스텔라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며 로웬을 놀래켰다.
에리스텔라는 비명을 지를 뻔한 로웬의 어깨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래도 우리가 그동안 함께 보낸 시간이 있는데.”
“그, 그렇습니다.”
로웬이 당황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몰래 먹을 것도 많이 가져다주고. 그런데 내가 마음에 담아 두겠어?”
“하하. 역시 그렇죠? 전하는 사실 굉장히 마음이 넓으신 분이니까요.”
“그럼. 내가 누군데.”
에리스텔라가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나한테 치욕적인 훈련을 논하기는 했지만.”
쿨럭.
로웬이 헛기침을 하며 당황했다. 곧 이은 에리스텔라의 짓궂은 미소 때문에 장난이란 걸 눈치챘지만.
“로웬. 그동안 여우를 잘 챙겨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그제야 긴장했던 로웬은 허탈함과 동시에 몸에 힘이 풀렸다.
***
“보, 복실이가…… 전하…… 딸꾹!”
딸꾹딸꾹딸꾹.
레이튼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보, 복실이…….”
에리스텔라가 달래 보려고 하면 딸꾹질이 더 심해지다 못해 숨을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온. 좀 진정시켜 봐.”
“내 말도 전혀 안 통해.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 같아.”
“……흐음. 어쩌면 좋지.”
레이튼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에리스텔라에게 다가와 인사할 수 있었다.
“제가 그때는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어요.”
에리스텔라는 이상하게도 레이튼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레이튼. 나 좀 볼래?”
“…….”
그래서 고개를 숙여 레이튼의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렸다.
“여우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그게 나라서 실망한 건 아니지?”
레이튼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저는 전하도 너무 좋아요!”
“정말?”
에리스텔라가 즐겁게 웃었다.
레이튼 덕분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잠시나마 가벼워졌다.
“오늘 하벨링 가로 돌아간다고 했지?”
“네. 할머님이 오신다고 했어요.”
“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아카데미에 가서도 궁금한 점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렴.”
“네! 앞으로 자주 뵐 테니까요!”
레이튼의 똘망똘망한 대답에 하인리시온이 당황하는 듯했다.
“하하. 그래.”
에리스텔라는 그저 마냥 기꺼웠다.
레이튼과 함께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오후가 되니 소피아 하벨링이 대공저를 방문했다.
“레이튼을 데리러 왔어요.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니 잠시라도 집에서 시간도 보내야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공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튼이 좋아하니까요.”
소피아 하벨링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튼을 향해 팔을 뻗었다.
“레이튼. 한번 안아 볼까?”
“할머니!”
레이튼이 폭 안겨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도 두 사람은 이전과는 다르게 꽤 편해 보였다.
소피아 하벨링은 마차를 타기 전, 에리스텔라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왠지 그때 느낌이 찝찝하더라니. 역시나 보통 여우가 아니었네요.”
윽. 예전에 황궁에서 마주쳤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빤히 보더니…… 지금 이거 놀리는 거지?
“다시 인사드리죠. 내 손자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도와주려 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소피아 하벨링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전하. 제국의 안위를 단 한 사람의 어깨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
“마법사가 존재하고 검을 쓰는 기사들도 존재하는 이유가 서로를 이기는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을 채워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답니다.”
하벨링 후작가는 검을 상징하는 가문이었다. 비록 후계자인 레이튼이 마법사가 되는 길을 걷는다고 해서 가문의 긍지와 힘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하벨링 후작가는 흔들림 없이 지지하고 힘이 되어 줄 것을 약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하의 어깨가 가벼워져야 전하의 움직임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하려고 일부러 레이튼을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대공저까지 왔구나.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에리스텔라가 천천히 말했다.
“역시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닌가 봐. 나는 이상하게 꼼짝을 못하겠더라.”
고작 말 몇 마디로 에리스텔라가 지고 있던 부담감을 덜어 주었다.
“전부 맞는 말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