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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8)화 (118/123)
  • 118.

    “정말 괜찮은 거야?”

    “또 괜찮은 척 억지로 버티는 건 아니고?”

    황제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두 사람의 걱정이 크면 클수록 에리스텔라는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에밋 시안느가 방법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어. 비록 임시방편이기는 해도 괜찮아졌어.”

    에밋 시안느는 에리스텔라의 광대한 마력을 일시적으로나마 극단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당분간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테지만, 한 달 안에 저주를 해결하지 못하면 에리스텔라의 몸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수 있었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당장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이건 그냥 직감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거 같아.’

    아마 곧 데클렌이 움직일 것이다.

    “그보다 사람들은 어때? 흑마력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늘고 있는 건 아니지?”

    만약 여전히 효과가 없다면 지금까지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였다.

    “뒷거래로 유통하던 것들을 끊어 냈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어.”

    “앞으로는 처벌도 함께할 거다.”

    황제는 이미 뒷거래를 중계하며 돈을 벌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년 중으로 비슷한 제품을 공급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도 알렸어.”

    “다행이야. 사람들이 뒷거래를 한 건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그들에게는 살아가는데 간절한 문제였을 거야.”

    당장 죽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하냐고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지쳐 있었고 귀족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혜택에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이니까. 눈앞에 매일 벌어지는 일상은 그만큼 무거운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야. 혼란이 더 커지지는 않아서.”

    에리스텔라는 그제야 안도했다.

    “우리도 에밋 시안느에게 데클렌에 관해서 들었다.”

    황제가 먼저 데클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건국 설화에 나오는 영웅과 흑마법사는 사실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황제와 흑마법사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따로 할 말이 있어. 데클렌이 아닌 건국 황제의 시선으로 본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 말이야.”

    ***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황제의 안내를 받아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내가 일부러 국보를 침실에 가져다 두었어.”

    황제가 국보를 모두 꺼낸 후에 마지막에 책 한 권을 올려놓았다.

    “이건 건국 황제의 회고록이야. 국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대로 황제에게 전수해 주는 지침서 역할이지.”

    건국 황제는 일기처럼 매 순간 자신이 느낀 일을 기록해 놓았다. 다소 개인적인 일부터 국정에 관한 일까지 광범위했는데.

    “회고록을 보다 보면 종종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어.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런 건가 했는데.”

    황제가 회고록을 펼쳤다.

    “건국 황제와 데클렌 사이의 내막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되는구나.”

    황제가 펼친 페이지에는 건국 황제가 친구에게 남긴 편지가 있었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회고록에서 먼저 시선을 거둔 건 에리스텔라였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냉정하고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국 분노를 풀기 위한 복수잖아.”

    게다가 아주르디 백작가부터 시작해서 그 일련의 사건들이 알고 보니 데클렌이 일부러 유도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자기 복수에 나를 이용해 먹었어.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식으로 나를 엿 먹이고 있었구나.’

    에리스텔라를 내내 괴롭히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운명.

    그 역시 데클렌이 자신을 흔들기 위해 수작을 걸었던 거다.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을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데클렌이 뭘 하려는 건지 알겠어.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거야.”

    데클렌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황실을 향한 복수가 아닌 듯싶었다.

    그런 거라면 그의 흑마력이 아무리 과거와는 다르다고 해도 지금까지 숨긴 채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마도 자신이 당했던 걸 그대로…….”

    말을 이어 가던 에리스텔라가 갑자기 긴장하며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뭔가가 느껴졌는데?’

    그리고 곧이어 확실해졌다.

    황궁 전체를 보호하던 결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급하게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황궁 결계가 깨졌어.”

    지금까지 어떤 충격이나 침입에도 황궁을 보호해 주던 강력한 결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있었다.

    그건 곧 황궁이 외부의 위협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분명해. 결계가 사라졌어.”

    동시에 황궁 안으로 들이닥치는 무수한 공격이 느껴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결계를 부순 게 분명했다.

    에리스텔라가 서둘러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내가…….”

    에리스텔라가 입을 떼자마자 하인리시온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바꿨다.

    “나랑 시온이 바깥 상황을 살펴볼게. 아무래도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거 같아.”

    “그래. 임시 결계도 필요할 거야. 마법부에 설계도가 있어.”

    “그럼 그건 부탁할게.”

    두 사람의 합이 척척 맞았다.

    “그럼 나는 후방에서 기사단을 통솔하도록 하마.”

    마법에 관련해서는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아는 황제는 두 사람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할 작정이었다.

    “고마워 오빠.”

    에리스텔라는 이전과는 다르게 혼자가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이 함께였다.

    그러자 든든한 마음에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들었다.

    바깥에 나왔을 때는 이미 황궁 곳곳에 불이 나 건물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곧바로 설계도를 확인하러 움직였고, 에리스텔라는 당장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가서 화재를 진압하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 깔린 사람을 구조했다.

    겨우 상황이 잠잠해진다 싶을 때.

    에리스텔라는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

    황실 내 훼손된 곳들에는 모두 특징이 있었다.

    건국 설화와 관련된 벽화가 있는 곳.

    “데클렌이구나.”

    데클렌이 황궁 결계를 만들었으니, 쉽지 않다고 해도 본인이라면 어떻게든 부술 방법은 있겠지.

    에리스텔라는 마법사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따로 움직였다.

    지금은 먼저 데클렌을 찾아야 했다.

    ‘분명 황궁 어딘가에 있을 거야.’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클렌은 처음부터 숨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황궁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네.”

    데클렌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이 인질처럼 모여 있었다.

    황궁에서 빠져나가려다가 데클렌에게 잡힌 듯싶었다.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데클렌의 발밑을 향했다.

    그곳에 그가 가져갔던 그림이 있었다.

    ‘저게 황궁 결계를 해제하는 열쇠였던 건가.’

    그렇다면 데클렌이 한 행동들이 전부 맞아떨어졌다.

    에리스텔라의 추측은 정확했다.

    마법진이 겹겹이 가리고 있는 그 그림은, 특정 마법을 발동해야만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그 마법진을 해제하면 황궁의 결계가 풀리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에리스텔라가 상황을 살피며 살벌하게 물었다.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다들 내가 누군지 잘 모르고 위험한 짓을 하길래. 그러다 큰일 난다고 알려 주다 보니 좀 요란했네.”

    데클렌이 여유로운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데클렌을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건 디아클렌 자작뿐이었고, 데클렌은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흑마법으로 주변을 초토화시키자 그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일단 보내.”

    “내가 일부러 초대한 관객인데 그럴 수는 없지.”

    데클렌이 단 한 명도 여기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얼굴을 굳히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았어. 왜 이러는지도 알았고.”

    “그래?”

    “더 이상 피해를 키우지 마.”

    에리스텔라의 경고에도 데클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맹목적으로 에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이든 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그녀만 있으면 자신들은 괜찮을 거라는 얼굴이었다.

    데클렌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황녀를 많이 믿고 있네.”

    데클렌이 짐짓 안쓰럽다는 듯 조소했다.

    “황녀가 과연 그대들을 지켜 줄 수 있을까. 황녀 자신을 지키는 것도 급해 보이는데.”

    “…….”

    “내가 그때 흑마법을 퍼트렸지. 치명상을 입은 마법사의 마력을 옥죄도록 말이야.”

    데클렌이 에리스텔라에게 건 저주는 단순히 여우의 몸에 갇히게 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에리스텔라의 마력에 흑마력을 침투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마력이 회복되었는데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이 생기는 것이었다.

    에리스텔라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가 흑마법이라니? 무슨 소리야?”

    “우리를 겁주려고 그냥 헛소리하는 거겠지. 누가 속을 줄 알고.”

    “그러게나 말야. 황녀 전하께서 저리 멀쩡하게 지키고 계신데 말도 안 되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대화 내용이 들렸지만, 에리스텔라는 웃을 수 없었다.

    차마 아닌 척할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데클렌이 마음만 먹는다면 들통날 일이니까.

    “아마 몸이 더는 못 버티고 있을 거야.”

    “…….”

    “이미 느끼고 있겠지?”

    데클렌이 에리스텔라의 몸 상태를 살피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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