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그가 황제가 되고 난 후, 자신과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거절한 것도 에단을 위해서였다.
“나는 흑마법사야. 내 마력을 바꾸지는 못해.”
데클렌이 에단에게 가르쳐 준 것은 마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과 요령 정도였다.
그와 데클렌은 마력의 성질이 달랐다.
“내 존재가 수면 위에 드러나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돼.”
“도움이 안 된다니. 지금까지 내가 네 신세를 몇 번이나 졌는데.”
“나는 그냥 네 친구로 남는 게 좋아.”
어차피 뭔가를 바라고 도운 적 없었다.
데클렌에게 있어 하나뿐인 친구이기에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데클렌은 끝끝내 거절하고 다른 동료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앞으로는 자주 보지 못하겠지.”
“…….”
“그래도 가끔은 놀러 와.”
이전처럼 데클렌이 사는 집에서 잠깐 수다를 떠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니까.”
앞으로는 조금 쓸쓸하겠군.
그래도 건국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풍문으로나마 들려올 테니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거다. 그래서 데클렌은 앞으로가 또 다른 의미로 기대되었다.
***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달에 몇 번씩 찾아오던 에단의 방문이 점점 뜸해졌다.
‘뭐, 예상했던 일이지.’
바쁜 와중에 계속 틈을 내는 건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한번 내가 찾아가 볼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네. 데클렌은 오랜만의 외출을 계획했다.
***
그런데 하필이면 황궁에 가자마자 소란이 일었다. 데클렌이 침입자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일부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황궁에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데클렌에 대해 알지 못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황제가 달려오고 나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최근의 침입 사건 탓에 다들 날카로워서 그래.”
“침입 사건?”
황제를 노린 암살 시도가 있었단 말을 듣고 새삼스레 보니 황궁 결계가 영 허술했다.
“네가 보기에는 엉성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최대한으로 만든 거야. 지금 보완하려고 연구하고 있어.”
그래 봐야 데클렌이 보기에는 비슷비슷할 게 뻔했다.
“내가 결계를 만들어 줄게. 늦었지만 건국 기념 선물이야.”
데클렌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제대로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내내 고민 중이었다.
“황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거야.”
데클렌은 황궁 결계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에단에게만 말해 주었다. 그 방법 외에는 그가 직접 설계했다 해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걸 만들기 위해서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더는 예전처럼 모험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대로 그가 치세를 이어 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
남은 시간은 지루하지만 평화로울 줄 알았는데.
그런 소소한 일상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데클렌에 대한 소문이 악의적으로 퍼져 나갔다.
흑마법사가 황제를 위협하고 조종하려 한다면서.
사람들은 흑마법사를 무찔러야 한다며 결사대까지 만들었다.
“네가 곤란하게 됐네.”
“미안해. 내가 사람들을 설득할게. 절대 곤란해지지 않게 할게. 아니면 차라리 네가 나를 도왔다는 걸 알리는 게 어때? 그럼 분명 사람들이…….”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에단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으니, 사람들의 두려움도 아주 근거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린 잠깐 함께했을 뿐이지 원래부터 가는 길은 달랐으니까.”
그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서 조금만 더 있어 볼까.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함께했을 뿐이다.
데클렌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었다.
“데클렌. 하지만 나한테 너는 동반자였어.”
“…….”
“때로는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구원자였어.”
모험을 이어 나갈수록 에단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럴수록 데클렌의 존재는 더욱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마다 에단은 데클렌에게 너는 영웅의 구원자야 라고 말했다.
네가 나를 살려 주고 도와주고 함께해 주어서 영웅이 될 수 있었다고.
“네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있을 수가 없었어.”
데클렌은 그저 미소 지었다.
그 말이 너무 좋아서. 기꺼워서.
오히려 아주 조금 남아 있었던 미련마저도 사라졌다.
“나도 즐거웠어.”
그의 외로웠던 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결국엔 끝나고 말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꿈을 이루고 난 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는 예정되어 있던 결말을 받아들여야지.
“난 너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즐거워서 함께했으니까. 네가 내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만나지 않더라도 네가 나를 친구로, 가족으로 여겨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데클렌이 처음으로 받아들인 객식구. 그리고 이제는 틀림없이 가족이었다.
“그래. 너도 내게 하나뿐인 가족이야.”
“하나뿐이면 안 되지. 황제의 가족이 하나면 후사는 어쩌려고.”
“하하. 그렇네. 데클렌.”
에단이 진지하게 이름을 불렀다.
“나중에 너에게 내 자식을 보여 주고 싶어.”
“내가 알아서 볼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건 데클렌 역시 놓치기 아쉬웠다. 가능하면 꼭 봐야지.
“그래. 어디서든 꼭 보러 와야 해.”
“꼭 볼게.”
그게 데클렌과 에단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데클렌은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에단은 무리해서라도 데클렌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데클렌은 누군가의 보호는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예전처럼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 하나씩 떠올려도 평생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추억이 있으니까.
***
나중에 찾아올 때 그가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지와 물건을 남겨놓고, 데클렌이 떠나려고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를 노린 함정이 있었다. 원래라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방심한 나머지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게다가 황궁 결계를 만들기 위해 마력을 많이 소모해서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모른 채.
“흑마법사가 백성을 위협하게 둘 수 없다는 폐하의 결단이다.”
데클렌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이들은 한때는 모험을 함께했던 동료들이었다.
에단이 황제가 되고 그들이 작위를 얻고 난 후에는 교류가 끊기기는 했었지만.
그들이 데클렌에게 이토록 악의를 가질 만한 일이 있었던가.
‘우습네. 이유를 찾을 필요가 뭐가 있나.’
에단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데클렌의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게 당연했었는데.
‘나도 많이 물러졌군.’
새삼 상처 입을 일이 아니었는데, 심장이 갈기갈기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한 말도 전부 거짓이었던 건가.’
부디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지만.
그걸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데클렌을 없애기로 했으니까.
어차피 자신은 이대로 사라질 예정이었는데.
평온한 죽음마저도 갖지 못하게 만드나.
너는 몰랐겠지.
나는 쉽게 죽지도 못하는 존재라는 걸.
데클렌이 간신히 그 자리에서 벗어난 뒤에도, 황제까지 참전한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데클렌은 죽은 걸로 알려졌다.
하지만 데클렌은 기어코 살아남았다.
친구의 배신은 생의 의지가 희미했던 그가 구걸하듯이 살아남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손을 낳았다.
나의 피여 계속 이어 나가라. 끊기지 말고 계속 이어 나가서 기다려라.
내가 다시 태어나는 그날까지.
***
데클렌이 환생하기까지 몇백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두 개의 몸에 마력과 정신이 나뉘는 바람에 좀 더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정신은 에밋 시안느에게.
마력은 디아클렌 소공자에게.
그가 처음 환생한 몸은 에밋 시안느였다.
에밋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력이 봉인되어 있었다.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였다.
그리고 에밋 시안느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 그의 정신이 디아클렌의 소공자에게로 들어가면서 완전해졌다.
다만, 에밋 시안느일 때 선대 황제 내외가 데클렌의 정체를 눈치챘던 건 의외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해서 일이 잠깐 꼬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디아클렌 소공자가 된 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흑마법사들의 세력을 만들고 오래전 그를 습격한 자들의 가문을 포섭했다.
아주르디.
라테른.
그들은 탐욕스럽게 손을 잡았고 하나씩 무너져 갔다.
디케이든 후작이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접근하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기는 했지만.
아델라시아.
데클렌의 기억 속 아델라시아는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마법사였다.
그는 처음부터 데클렌을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그다지 접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지식한 성격 탓이었을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데클렌을 도와주었다.
환생하고 나니 아델라시아 가문이 변형 마법을 대표한다는 사실에 다소 놀란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옛날 생각을 너무 지나치게 했네.’
그 역시 이제 슬슬 끝나 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어서일 것이다.
환생은 여러 번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게다가 환생을 위해 막대한 마력을 바쳤기에 과거의 그가 지녔던 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해.
데클렌은 드디어 기나긴 악연을 끝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