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6)화 (116/123)
  • 116.

    “……뭐?”

    에리스텔라는 그대로 굳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세 명의 제물을 바치면 흑마력의 힘을 깰 수 있습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걸 방법이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가?

    에리스텔라가 적의를 드러내도 제이는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을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

    “흑마법이란 대체로 그런 것입니다. 그 저주를 깨는 방법이 깨끗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필요 없어.”

    에리스텔라는 힘이 쭉 빠졌다.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뜻을 내보이며 에리스텔라는 등을 돌렸다.

    그런데 제이 시안느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버티도록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떠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에리스텔라를 떠보거나 비웃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만한 대가 역시 따릅니다.”

    들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해 봐.”

    아무리 개 같은 소리라도 일단은 들어 봐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기회를 주었지만 에리스텔라의 얼굴에는 기대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또 제물 같은 게 필요한 건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다만, 그 제물은 전하 자신일 겁니다.”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천천히 제이 시안느에게로 돌아갔다.

    ***

    다음 날, 하인리시온과 황제가 에리스텔라의 방에 왔을 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어디 간 거지?”

    두 사람이 찾아 나서는데.

    에리스텔라는 집무실에서 태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손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 누워있을 줄 알았어?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냐.”

    에리스텔라가 두 사람을 나무라며 웃어 보였다.

    “데클렌의 정체를 밝혀냈으니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의 속내를 알아내야지.”

    그동안 막혀 있었던 부분이 전부 풀렸다. 이제 그의 행적을 맞춰 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 그래야지.”

    에리스텔라의 채근에 두 사람이 다소 허둥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모두 한데 모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

    흑마법사들은 와해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오로지 데클렌 한 명뿐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혼자가 되는 이 순간까지 정말 오래 기다렸다.

    흑마법사들이 모두 없어져도 데클렌의 계획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애초부터 혼자 만든 계획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은 잠시 혼선을 줄 허울일 뿐이었다.

    그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는 필요 없는 이들이었다.

    데클렌은 회상에 잠겼다.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몇 백 년 전의 시간으로.

    ***

    르오니아 제국이 탄생하기 전, 작은 나라조차 없던 시기에 데클렌은 첫 번째 삶을 보냈다.

    데클렌은 처음부터 혼자였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버려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왜 버려졌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데클렌은 강력한 마력을 타고나,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것을 다룰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마력은 다른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자연스럽게 모두가 기피하고 무서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데클렌 역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지냈다.

    굳이 그들과 어울리려 노력하며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생필품을 구할 때가 아니면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설사 길을 잘못 든다 한들 누가 오는 일은 거의 없는데.

    웬 여우 한 마리가 문 앞에 떡하니 잠들어 있었다.

    ‘……쓰러진 건가.’

    바닥에 핏자국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속았겠지만 그는 그 여우가 변신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예전에는 데클렌을 죽이려는 자들이 몇 번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

    설마 이자도 그런 목적인 건가.

    대충 발로 쓱 옆으로 밀어서 들어갔다. 적당히 정신이 들면 다른 데 가든가 하겠지.

    그런데 다음 날 나와 보니 데클렌이 발로 밀어두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상태는 더 나빠져서 당장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쯧.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질긴 놈인 듯했다.

    귀찮지만 지나갈 때마다 눈에 띄는 것도 거슬리니 일단 치료해 주자.

    적당히 회복 마법을 걸어 주고 난 후 데클렌은 외출하고 밤늦게 돌아왔다.

    “드디어 왔네!”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우가 아닌,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남자였다.

    자신을 에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였다.

    “여우로 변하면 마력을 더 쉽게 보호할 수 있는 편이라서요. 위험하다 싶으면 여우로 변하고는 합니다.”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로 변해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멀쩡해졌으니 이 은혜는 꼭 갚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기어이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만 나가. 그게 보답이야.”

    귀찮아지고 싶지 않아 칼같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하지만 에단은 무슨 속셈인지 떠나지 않고 눌러앉았다.

    데클렌은 그냥 귀찮아서 상대하지 않고 무시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사이에 옆에서 에단이 혼자서 떠들어 대는 말 때문에 그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가문에서 쫓겨나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는 중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재능은 있지만 쓰질 못해 당하기만 하는 멍청이였다.

    지금은 돌아갈 곳이 없으니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만 지낸다던 에단은, 얼마 안 가 지내면 지낼수록 아늑하고 좋은 곳이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내 조용하던 터전에 침입한 주제에 어찌나 낯짝이 두껍고 뻔뻔한지.

    한 달을 넘겼을 때, 그가 드디어 떠났다.

    여기서 정착할 기세라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한 달 남짓이었지만 데클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래서였나. 혼자 지내는 시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데클렌은 난 자리의 허전함에 대해 알지 못해서 자신이 느끼는 이상함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을 때, 데클렌은 뒤늦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에단이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쪽지에서 말한 날짜가 이미 지나 있었다.

    마음이 바뀐 건가.

    그라면 왠지 마음이 바뀌었으면 그렇다고 말하러 찾아올 것 같았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긴 거겠지.

    데클렌은 잠시 고민했다. 다만, 그런 것치고는 금방 결정을 내렸다.

    에단은 말이 많았고 자신의 신상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그가 어느 지역에 살고 어느 가문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번 가 보자. 가서 확인만 해 보자.

    *

    ‘왜 또 피떡이 되어 있지. 생각보다 더 약해 빠졌네.’

    처음으로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곳까지 와서 찾아낸 에단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그런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까. 뭐라도 하고 가야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데클렌은 순식간에 가문을 뒤집고 에단을 데리고 나왔다.

    그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도망간다.

    그러니 에단을 안전한 곳까지만 데려온 후 던져 놓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에단이 기어 오다시피 쫓아와 붙잡는 바람에 넘어질 뻔하며 돌아보았다.

    에단의 얼굴은 호기심과 선망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 진짜 놀랐어요. 대단한 사람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와 진짜 저 좀 가르쳐줘요!”

    다짜고짜 졸라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내 귀가 아플 정도로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됐었다.

    평생 혼자였기에 처음으로 느껴 본 사람의 온기가 생각보다 편안해서 마음이 흔들린 게 문제였다.

    대충 가르치는 시늉을 했더니 생각보다 재능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 버린 것도 문제였다.

    그래도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데클렌은 그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뿌듯하고 나중에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고 싶어졌다.

    “이제 여기서 나가자.”

    그 말을 먼저 꺼낸 건 사실 데클렌이었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작지만 부족한 것 없는 이 오두막이 아닌 더 넓은 세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에단은 많은 사람을 구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자신의 동료를 만들어 나갔다.

    데클렌 역시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동료라는 단어로 묶였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끝내 에단이 복수를 이루고 나라를 건국했을 때.

    데클렌은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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