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
에리스텔라는 그를 직접 만나 보았다.
“제이 시안느가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그는 단번에 황녀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에리스텔라가 그를 탐색하듯이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이 시안느라면 가주였나?”
전에 브릭에게 시안느 가문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들었던 적 있는 이름이었다.
“네. 제가 맞습니다. 저희 가문에 대해 궁금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시안느 가문에서 그대만 살아 있는 건가?”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에리스텔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제이 시안느의 표정이 미묘했다.
역시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지 제이 시안느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나를?”
아무래도 마을 주민들 속에서 제이 시안느가 나타난 건 그의 의도였던 모양이었다.
에리스텔라가 그를 경계하면서도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데.
제이 시안느가 에리스텔라에게서 뭔가를 확인하듯이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심상찮았다.
“전하를 직접 보니 확신이 듭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뉘앙스만으로도 그가 에리스텔라가 흑마법에 걸린 상태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이 시안느를 바라보는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지금 나를 떠보는 건가.”
“제가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전하가 흑마법에 당한 걸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단번에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눈치챘다.
역시 데클렌과 관련되어 있구나 경계하던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시안느는 어떤 가문인 거지.”
아직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안느 가문에 뭔가가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희는 대대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를 기점으로 마력이 사라졌습니다.”
마법사를 배출하는 가문이 제국에서는 존재감조차 없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리스텔라가 그의 말을 의심하자 제이 시안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희 가문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 마력이 보통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감지한 에리스텔라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저희 가문의 선조는 제국에서 금기시되는 존재입니다.”
역시나 언제나 불길한 예상은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저희가 태어날 때부터 흑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발견하는 즉시 붙잡고 처형하는 게 제국의 법이었으니까.
“그러니 저희는 명맥을 잇기 위해 힘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그대부터 흑마력이 끊어졌다면 더는 숨어 있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에리스텔라가 의아해하며 묻자 제이 시안느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를 이렇게 찾은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에밋 시안느.
그가 그 존재에 대해 에리스텔라의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의 아들이었으나 또한 제 자식일 수 없는 분입니다.”
“……분?”
물론 에리스텔라는 에밋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 시안느가 자신의 자식에 대해 말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희가 지금까지 정체를 숨긴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희의 선조가 남긴 기록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는 건국사에서 모두의 적이라 불리는 흑마법사의 후손입니다. 또한, 선조가 남긴 기록으로 현재 전해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알고 있죠.”
“…….”
“또한, 세상에서 사라진 걸로 알려진 흑마법에 관한 지식이 곧 저희 가문의 힘입니다.”
그렇구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에리스텔라는 단번에 이해했다.
제국의 건국사에 나오는 강력한 힘을 지녔던 흑마법사. 그가 남긴 모든 것을 그들이 이어 왔다는 것이다.
흑마력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 지식만 해도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에리스텔라는 단번에 마력을 채우며 제이 시안느를 경계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를 때였다.
“저희 선조의 존함은 건국사에 남아 있지 않지요.”
“…….”
“그분의 존함은 데클렌입니다.”
담담하게 고백하듯이 꺼낸 이름.
“……데클렌이라고?”
에리스텔라는 충격에 빠졌다.
“전하께서는 데클렌 님을 만났다고 하셨죠.”
“그래. 만났어.”
여전히 혼란스러운 채 대답했다.
“아마 에밋이 그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아이를 죽이려 했습니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제이 시안느에게로 돌아갔다.
“데클렌 님. 그분이 환생하는 순간 제국은 분명 피바람이 불 테니까요.”
시안느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은거하면서 지쳐 있었다. 또 한 번의 풍랑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힘이 없는 그 아이를 죽여 제국을 지키려 했습니다.”
고대 흑마법사의 영혼이라 해도, 몸은 제이의 아들이었으니 스스로도 끔찍하고 괴로운 선택이었다.
아무리 외면해도 자식과 이어진 피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지만요.”
그게 시안느 가문이 멸문한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분은 저희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제이 시안느는 에밋의 진짜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분명히 죽었을 줄 알았던 자신이 구차한 목숨을 건진 후부터 조용히 그 움직임을 쫓았다.
그의 자백에 가까운 고백은 이어질수록 충격적이었다.
“그분은 흑마력이 봉인된 채 모든 기억을 가지고 에밋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에밋을 죽인 순간 디아클렌 소공자의 몸으로 모든 힘을 되찾으셨습니다.”
‘데클렌은 환생자였어.’
드디어 데클렌의 진짜 정체를 전부 알게 되었다.
“건국사에 나오는 흑마법사에 대해 전부 알아봐야겠어. 또 제이 시안느가 알고 있는 정보와 비교를 하는 게…….”
마음이 바빠진 에리스텔라가 빠르게 말을 잇고 있을 때였다.
“에리스텔라!”
“라라!”
결국, 에리스텔라는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힘을 무리해서 쓴 게 문제였다.
제기랄.
하필 이 타이밍에.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 눈이 벌게져서 달려든 게 실수였나.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데클렌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참아.’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몸이 약해서 무력하기는 처음이었다.
몸은 펄펄 끓고 의식이 흐려진 채로 까무룩 정신을 잃기를 반복했다.
‘진짜 짜증 나.’
에리스텔라가 자신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하인리시온과 황제를 보며 인상을 썼다.
지금은 자신을 간병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내 몸이 이 꼴이니 다른 중요한 일들이 전부 멈춰 버렸다.
그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제이 시안느를 데리고 왔다.
“정말 볼 수 있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흑마법으로 인한 저주라면 몇 가지 방법을 알기는 합니다.”
그가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하네요.”
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몇 번을 다시 살폈다.
“전하.”
“혹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에리스텔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 때문에 몸이 엉망이 됐는데 그야 이상하겠지.
그런데 그다음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전하의 몸에는 두 개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두 개?”
“네. 태어나기 전부터 걸려 있던 저주 덕분에 전하께서 지금의 저주에 걸리고도 무사히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설마?”
에리스텔라의 눈꺼풀이 떨렸다.
“역시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나 보군요. 그게 맞을 겁니다.”
에리스텔라가 오래도록 방황하게 만들었던 그것도 데클렌이 건 저주였던 모양이다.
“전하에게 걸려 있는 저주는 매우 강력합니다. 이 저주를 건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풀 수 없을 겁니다.”
역시 그런 거였나.
에리스텔라가 실망할 때였다. 제이 시안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방법?”
“제가 아는 건 두 가지입니다.”
제이 시안느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는 데클렌 님의 흑마법에만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분은 사실 유일한 흑마법사입니다. 모든 흑마력의 기원이라 할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그가 건 흑마법은 다른 방법으로는 깨기 어려웠다.
“그분의 순수한 흑마력이 담겨 있는 흑마력석을 이용해서 저주를 깨는 방법입니다.”
그 역시도 데클렌의 흑마력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다만, 방법을 들은 에리스텔라의 얼굴엔 짙은 고민이 서렸다.
제이 시안느 역시 그 이유를 알았다.
“예. 그런 물건을 남기셨을 리도 없고 있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죠. 그러니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사실상 허울뿐인 방법이었다. 에리스텔라의 기대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럼 나머지 방법은?”
“남은 방법은 모든 흑마법에 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게 뭔데?”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이 가능성이 높았다. 에리스텔라의 눈빛에 기대가 차올랐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지닌 사람만 할 수 있는 방법인데. 전하께는 문제가 안 되겠죠.”
에리스텔라는 대마법사이니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다만, 진짜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그게 뭔데?”
“제물입니다.”
그저 단순한 처방전을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단조로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