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4)화 (114/123)
  • 114.

    ***

    수도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

    고작 열 가구가 조금 넘는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는 곳.

    얼핏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는 은밀한 이들이 정체를 숨긴 채 지내고 있었다.

    “물건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데클렌 님이 재고를 잘 관리하라고 한 게 여기까지 염두에 두었던 듯싶습니다.”

    “그럼 뭐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없는데. 이걸로는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이곳도 언제까지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적당한 타이밍에 몸을 숨겨야지.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연락이 올 거다.”

    그들은 이 마을을 거점으로 흑마력석으로 만든 물건을 곳곳에 퍼트리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물건의 정체는 알지 못한 채 동원되어 각종 잡일과 심부름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는…….”

    흑마법사가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후환이 없겠지.”

    “그렇겠죠.”

    마을 주민들을 처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황녀의 동향은 계속 파악하고 있지?”

    “처음에 좀 의심하는 듯싶었는데 별 증거를 못 찾으니 방향을 튼 것 같습니다.”

    “황녀가 직접 나서면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우니 조심해야 해.”

    “그런데 생각보다 황녀가…… 제멋대로라기보다는 환자들 치료에 솔선수범하느라 다른 건 살필 겨를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거 참 순진한 구석이 있는 황녀시네.”

    그들이 황녀를 비웃는 동안 그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 마을은 황제가 발견한 그림 속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정확한 위치가 나와 있는 게 아니라 찾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여러 특징을 종합해 찾아낸 결과 이곳에 정말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나를 저렇게 평가해 주니 실망시키면 안 될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그녀를 덥석 잡았다.

    하인리시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리스텔라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작전대로.”

    하안리시온의 딱 한 마디에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여기서 기다리려고 했어. 먼저 나서려고 한 거 아냐.”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고 나서 돌아섰다.

    오늘 에리스텔라의 역할은 후방 지원이었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이 기사단과 함께 마을을 포위했다.

    지난 며칠 동안 마을을 관찰하면서 흑마법사들을 추려 냈다.

    아무리 이중 삼중으로 포장해도 작정하고 꼬리잡기를 하면 최초 거래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걸 알아내는 며칠 동안 그들이 에리스텔라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을 가장해 왔다.

    “흑마법사들은 오늘부로 끝낸다.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나머지는 전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에리스텔라는 뒤에서 지원을 하는 한편 마을 주민들을 보호해 주었다.

    흑마법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아도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저항은 무력하게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동안 끌어 온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결판이 나 버렸다.

    아마도 데클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에리스텔라는 흑마법사들을 모조리 잡은 후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

    흑마법사들은 전부 황궁 지하 조사실로 보냈다.

    하지만 마을에는 흑마법사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주민들도 섞여 있었다.

    “주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마을 주민들을 모두 모아 놓은 브릭이 물었다.

    에리스텔라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자신들도 휘말릴까 봐 두려움에 떨며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

    “일반인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숨어 있을지도 몰라.”

    에리스텔라가 그들을 살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돼.”

    이번에 일망타진을 해야 했다.

    “단, 주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신경 쓰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리스텔라가 떠나고 브릭을 비롯한 네 사람은 남은 주민들의 신상과 근황을 조사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네.”

    마을 주민들의 마력을 확인한 하인리시온이 말했다.

    “저희 역시 계속 확인하고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마을 주민이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에 이주한 이들에 대해서 자세히 확인 중인데, 대부분 이 마을로 이주해 온 이유가 생계 때문입니다.”

    “그래도 좀 더 확인하고, 저들에게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 주도록 해. 한동안은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할 거야.”

    하인리시온이 지시를 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걸렸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하인리시온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눈짓했다.

    ***

    에리스텔라는 황궁 지하 조사실로 향했다.

    직접 흑마법사들을 상대로 조사를 할 작정이었다.

    그들의 정체. 그들이 하려는 일. 그리고 데클렌과의 관계까지.

    그리고 혹시라도 남은 잔당은 없는지.

    알아내야 할 건 많았다.

    특히, 어떻게 흑마법에 손을 대고 세력을 키워 나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그런데 흑마법사는 의외로 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가 전부 말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숨길 필요도 없지.”

    흑마법사는 꺾이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마법사였다.”

    놀랍게도 그들이 흑마법을 이어 온 시간은 오래되었다.

    그들에게 처음으로 흑마법을 전수하기 시작한 선조는 한마디로, 엉터리 흑마법사들이었다.

    마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별 볼 일 없는 재능에 마법사로서 인생역전은 할 수 없는 자가 흑마력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걸 가지고 혼자서 연구해서 나름의 흑마력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다 할 힘은 아니어서 숨어 지내고 있던 때.

    그들 앞에 한 소년이 찾아왔었다.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고. 그러니 내 밑에서 일하라고.

    건방진 말이었지만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아직 어렸던 데클렌이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데클렌이 중심이 되고 난 후부터 음지에서 각자 숨어 다니던 이들이 조직화되고 제대로 된 힘을 키워나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는 지금의 귀족과 황실을 모두 없애고 우리의 세상을 만드는 거다.”

    “그게 너희의 목표인 건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결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자 흑마법사의 눈매가 기분 나쁘게 휘어졌다.

    “우리의 목표이긴 하지만 데클렌 님의 목표는 아니지. 그건 우리도 모른다.”

    “…….”

    “우리는 그저 데클렌 님의 밑에서 주는 걸 받아먹을 뿐이니까.”

    흑마법사들에게 데클렌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게 해 줄 존재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재물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목표를 위해 그들을 철저히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에리스텔라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데클렌도 그 마을에서 지냈던 건가?”

    “아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지내지는 않았다.”

    “그럼 어디서 지냈지?”

    “그건 우리도 알지 못한다. 그분은 오로지 혼자 지냈고 필요할 때면 먼저 찾아오실 뿐이었으니까.”

    데클렌은 흑마법사들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에리스텔라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데클렌은 혼자였던 듯싶었다.

    일부러 곁에 두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흑마법사들의 목적을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데클렌은 다른 이들의 욕망을 이루어줄 뿐,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럼 데클렌과 조금이라도 가까웠던 사람은 없는 건가?”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흑마법사의 반응이 미묘하더니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한 명 있기는 했지만 이젠 죽어서 없다. 예리엘이라고 황녀 당신이 죽였지.”

    “예리엘? 그게 누구지?”

    에리스텔라가 그동안 상대했던 흑마법사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중에 누구지.

    “우리가 황제에게 붙여 두었었다.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아쉬웠지.”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황제에게 세뇌를 걸었던 흑마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충성심을 보였었던 게 떠올랐다.

    “예리엘이라는 흑마법사와는 왜 가깝게 지냈던 거지.”

    “그 애는 데클렌 님이 어디선가 주워 온 애다. 보호자나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다.”

    에리스텔라는 몇 가지 더 질문을 이어 나갔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

    조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에리스텔라가 지하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마을 주민들을 조사하던 중 의외의 발견이 있었다.

    “시안느?”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 마을에 살던 주민 중에 시안느가 있었어.”

    하인리시온은 마을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를 솎아내기 위해 조사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시안느 가문의 생존자를 우연히 찾아냈다.

    “시안느 가문은 이미 멸문한 거 아니었어?”

    “유일한 생존자인 것 같아. 그것도 시안느 가문의 가주였던 것 같아.”

    하필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흑마법사들이 일부러 숨긴 거야?”

    “흑마법사들은 시안느 가문이라고 해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에리스텔라 역시 어릴 적 만났던 기억을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에 수상하게 여겨 알아봤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시안느 가문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자는 왜 하필이면 그 마을에 있었던 거야?”

    “글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자가 일부러 이곳에 들어온 것 같아.”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시안느 가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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