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3)화 (113/123)
  • 113.

    물건은 더 이상 유통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미 풀려 있었던 제한된 물건이 전부일 텐데.

    “전혀 줄고 있지 않잖아?”

    문제가 나타난 사람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물건이 희소해질수록 가격이 올라갈 테고,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을 넘어서면 포기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이미 거래가 끊겼어야 하는데.

    “이렇게 가격이 유지될 수 있을 리가 없어.”

    현재 알아본 바로는 적절하게 올라간 가격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만큼 공급량이 충분하다는 거야.”

    어디선가 물건을 계속 풀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레이튼이 들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감시를 붙여 봐. 누구를 만나고 뭘 하는지 전부 지켜봐.”

    에리스텔라가 곁에 있던 브릭에게 지시를 내렸다. 분명 뭔가 수상한 행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도 무시한 사람들은 바로 치료해 주지 마.”

    이미 부작용이 나타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경고를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만 좇는 이들에게는 경고가 아닌 협박이 필요했다.

    에리스텔라가 그대로 돌아가려다 망설이며 걸음을 멈췄다.

    “……증상이 심한 사람들은 받아 줘.”

    그 모습을 보던 하인리시온이 피식 웃었다.

    항상 매정한 척하면서 마지막에는 마음이 약해진다니까.

    그때,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뭐야? 그 얼굴은?”

    에리스텔라는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괜히 날카로웠다.

    “잘 결정한 것 같다고.”

    하인리시온이 태연한 얼굴로 발뺌했다.

    ***

    황제는 지난번 건국사에 등장한 가문들이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찾은 후, 건국사에 나와 있는 가문들을 모두 정리했다.

    “한 번이라도 언급된 적 있는 가문까지 전부 스물다섯.”

    황제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에게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이미 사라진 가문은 열.”

    나머지는 제국이 유지되어 온 시간이 긴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겪으며 살아남은 가문이었다.

    “그중 언급되기는 했지만 건국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가문을 제하고 나면…….”

    아주르디 백작가부터 라테른 후작가까지.

    그리고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그들의 표적이 되었던 적 있는.

    “황실과 아델라시아 대공가까지 전부 이번 일에 연루되었어.”

    “혹시 건국사에 시안느 가문이 언급된 적 있어?”

    에리스텔라가 혹시나 하면서 물었다.

    “나도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시안느 가문은 없었어.”

    “……그렇구나.”

    시안느 가문이 데클렌과 관련된 건 아닌 걸까.

    여전히 찝찝함이 남았지만 지금은 건국사에 언급된 가문들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걸 하나 더 찾았다.”

    황제가 찾아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라진 그림은 내가 다시 그리고 있는데 혹시 몰라 남은 국보들도 다시 살펴봤어.”

    황제가 그림 한 장을 펼쳐놓았다.

    건국 황제의 모험을 한 장에 전부 넣은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 지도처럼 보이는 게 있었어.”

    그림 안에는 제국 곳곳의 특징이 들어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작은 표시가 있었다.

    “그러게. 지도…… 그것도 뭔가를 표시해 놓은 것 같은데?”

    “보이지? 그중에서도 특히 여기.”

    황제가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은 흑마력석 광산이 있었던 곳이야.”

    황제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살피던 에리스텔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곳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마도.”

    “이 중 몇 곳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황궁에도 표시가 되어있었다.

    “그럼 다른 곳들은?”

    “아직 어떤 장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관련되어 있는 장소들일 가능성이 높아.”

    아마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을 뿌리까지 끝낼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가능성이 있는 한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오랜만에 솜사탕 구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우가 신이 나서 가볍게 발을 내딛는데.

    “어……? 어어어……? 왜 이러지?”

    솜사탕 구름이 자꾸만 푹푹 꺼지면서 발이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여우가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발버둥 칠수록 몸은 점점 더 구름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윽…… 숨을 못 쉬겠어.’

    겨우 고개만 내민 채 버티는데 이러다 완전히 잠길 것 같았다.

    갑자기 구름이 왜 이러는 거야.

    여우가 괴로워하며 어느새 턱까지 빠졌을 때였다.

    너무 괴로워.

    여우가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쭉 뺐을 때였다.

    ‘응?’

    갑자기 여우의 몸이 쏘오옥 빠져나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여우가 고개를 드니 키가 작은 하인리시온…… 아니다.

    ‘키만 작은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하인리시온이구나.’

    “네가 여기 어떻게 있어? 게다가 너는 구름 위에 잘 서 있네?”

    하인리시온의 발밑에 솜사탕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었다.

    근데 나는 왜 빠졌지.

    여우가 솜사탕 구름과 하인리시온을 번갈아 보면서 눈을 깜박이는데.

    “역시 여기가 문제였구나.”

    하인리시온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여우를 번쩍 들어 올려서는 솜사탕 구름에 마력을 넣기 시작했다.

    “뭐야? 왜 여기에 네 마력을 넣어?”

    “다 됐어. 이제 뛰어 봐.”

    하인리시온이 솜사탕 구름 위에 여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또 빠질…… 우와. 구름이 폭신해.”

    발로 툭툭 두드려보니 구름이 빵빵했다. 부드러운 탄력이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우가 점프하면 탄력을 받고 튀어 올라왔다.

    “어떻게 이렇게 멀쩡해졌지? 시온. 네가 마력을 넣은 게…….”

    ***

    에리스텔라가 눈을 번쩍 떴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볼 겨를도 없이 옆에 있던 베개를 하인리시온의 얼굴에 던졌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방금 내 꿈에 일부러 나타난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하인리시온이 베개를 옆에 고이 정리하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반응했다.

    “발뺌하지 마.”

    에리스텔라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최근에 무리하다 보니 숨기고는 있었지만 마력이 계속 불안정했었다.

    그런데 오늘 눈을 뜨자 안정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솜사탕 구름에 마력을 집어넣자마자 갑자기 멀쩡해진 게 우연일 리 없었다.

    “그 구름은 내 마력이었어. 넌 그걸 알고 그런 거지?”

    구름이 무너질수록 에리스텔라의 마력이 불안정해지는 걸 알고 일부러 꿈속에 들어와서 자신의 마력을 쓴 것이다.

    “너 미쳤어? 나한테 주면 그 마력은 너한테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냥 조금 넣은 거야. 그래서 효과도 잠깐 안정시켜 주는 게 고작이야.”

    하인리시온이 계속 만들어주는 마력보호제로는 도저히 효과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하인리시온은 지난번 에리스텔라의 꿈속에 우연히 들어간 적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신의 꿈인 줄 알았지만 그건 에리스텔라의 꿈속에 우연히 들어갔던 것이다.

    그때는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에리스텔라가 종종 꾸는 꿈이 마력과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에리스텔라 본인보다도 오히려 옆에서 에리스텔라가 마법을 쓰는 걸 지켜본 하인리시온이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내가 희생이라도 한 얼굴이네. 전혀 아니야. 네가 쓰러지면 내가 더 곤란해서 한 거야.”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에게 착각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강조했다.

    에리스텔라는 그것도 결국 자신을 위한 거라는 걸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역시나 물건이 돌고 있는 게 맞았다.

    출처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물건이 공급되고 있는 것만큼은 확인했다.

    “얼핏 보기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가지고 있는 물건을 거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초의 공급처는 확실히 있었어요.”

    유진이 직접 확인한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누가 그 꼬리를 잡고 있는지는 확인 못 했어?”

    “네. 중간에 자꾸 끊어지더라고요.”

    일부러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중간 단계를 복잡하게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좀만 더 캐다 보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디아클렌 자작가의 모든 사업은 철저히 압수했다.

    그걸 몰래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남은 건 재고를 확보하는 자들이 있다는 건데.

    어느 쪽일까.

    데클렌에게 협조했던 귀족이 또 있는 걸까.

    아니면 데클렌 외에 다른 흑마법사들인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무리 복잡해도 의지만 있으면 다 찾아낼 수 있는 법이니까.

    데클렌이 떠나고 난 후, 흑마법사들이 물건을 계속 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 독단적으로 하는 짓인 듯싶었다.

    현재 그들이 데클렌의 동선을 알고 연락은 주고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거야 전부 잡아 놓고 알아보면 될 문제지.

    “그러려면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고.”

    에리스텔라의 머릿속이 또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아, 머리 아파.’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털실이 마구 엉킨 것처럼 꼬이기만 했다.

    으아아—

    에리스텔라가 머릿속 대신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이제야 머리가 좀 가볍네.’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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