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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2)화 (112/123)
  • 112.

    ***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 상황 정리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전염병은 아니지만 따로 조사하는 편이 빠를 듯해 격리를 유지 중입니다.”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을 분리하니 오히려 체계가 생겨서 관리가 수월했다.

    “첫 번째 구역이 상태가 경미한 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구역이 중환자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안내를 받은 에리스텔라가 레이튼과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너희 둘은 첫 번째 구역으로 가서 지원하도록 해. 가벼운 증상들이니 충분할 거야.”

    “네. 열심히 할게요!”

    레이튼이 의욕을 보이는 모습을 보니 왠지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휴식하거라.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그러다 몸이 축나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으니까.”

    에리스텔라가 두 아이의 씩씩한 뒷모습을 향해 당부했다.

    말해 두지 않으면 분명 미련하게 나중에 쉬자면서 무리할 게 뻔했다.

    에리스텔라는 일행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사태가 났으니 물건 회수는 더 확실하게 해야 해.”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왜?”

    에리스텔라가 걸음을 멈추고 물어봤다.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도 여전히 물건을 숨겨 놓고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마력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끊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더는 숨길 수 없는 때가 돼서야 증상을 고백했다.

    그저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 유행하는 물건들을 사들였던 귀족들과는 달랐다.

    “심지어 더는 공공연히 구할 수도 없으니 은밀하게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도 합니다.”

    “……하아.”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가 차는 일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일상이란 언젠가 일어날 두려움보다 더 무거워서.

    “단순히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겠어.”

    하인리시온 역시 사태의 핵심을 꿰뚫었다.

    “그동안 마력석을 이용한 물건들은 지위가 높은 마법사나 귀족들만 누릴 수 있었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일이 있을 텐데.”

    당연하다는 배제되어 있는 세상이었다.

    그 편리함을 처음으로 누려 보았으니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물건이 필요하지 않도록 해야 진짜 해결될 것이다.

    “대체할 만한 걸 제시해 줘야 해.”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물건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번에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게 문제네.”

    “연구부터 안전성 검토 그리고 비용 문제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그건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러니 일단 지금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우선 사람들 상태부터 확인하자.”

    남은 곳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역이었다.

    네 사람은 구역을 따지지 않고 각 구역마다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내가 세 번째 갈게. 두 번째 구역 부탁해.”

    “에리스텔라.”

    “응? 설마 나보고 두 번째 구역 가라는 건 아니지? 네 충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건 내가…….”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붙잡힐까 봐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을 때였다.

    “누가 가지 말래.”

    하인리시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대신 무리하지 말라고. 레이튼한테 말한 것처럼 너도 틈틈히 휴식을 취해.”

    에리스텔라가 자신의 몸 상태를 잊을까 봐 한 말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돌아섰다.

    세 번째 구역에 들어오니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중증이지만 상태가 전부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썩은 나무처럼 꼼짝도 못 하고 죽어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다.

    에리스텔라는 다른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다.

    “적어도 여기서 치료를 받고 나가는 순간부터는 물건에 다시 손을 대서는 안 돼.”

    에리스텔라가 치료해 주면서 단호하게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 다시 돌아오면 치료해 주지 않을 거야.”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물건 회수에 협조하지 않고 숨겨서 사용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잘라 내지 않으면 몇 번이라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었다.

    “네.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그들 역시 후회를 하면서 다짐했다. 부디 그 말을 지키기를 바라야지.

    ***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매일같이 임시치료소에 와서 부작용이 심한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을 파악하면 할수록 심각했다.

    “예상보다 물건을 사용한 적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동안 풀린 물건도 많고.”

    디아클렌 자작가의 사업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 규모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물건이 공급된 시기도 귀족들에게 유리구를 비롯한 관상용 아이템을 판매하기 훨씬 이전이었다.

    “오히려 귀족들을 상대했던 거 위장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진짜는 이쪽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데클렌이 비웃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이 됐다.

    “소란스러운 귀족들에 비해 일반인들의 문제는 조용히 진행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또 작정하고 퍼트리기에 가장 적합하기도 하고.”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 같았다.

    데클렌의 진짜 목적은 사교계에서 영역을 넓혀서 뭔가를 하려던 게 아니라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물건을 퍼트려 놓는 거일지도 몰랐다.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금방 잦아드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바깥에 나오자 첫 번째 구역 앞에서 소란스러운 상황이 펼쳐진 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레이튼과 환자 사이에서 싸움이 났어요. 레이튼 말로는 환자가 수상하다는 것 같아요.”

    정신없는 와중에 유진이 와서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었다.

    브릭과 제이크는 싸움이 난 현장에 끼어들어 말리고 있었다.

    “레이튼이?”

    레이튼이 싸움이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조합은 없었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때마침 두 사람을 발견한 레이튼이 외쳤다.

    “삼촌! 황녀 전하! 이 사람 전에도 온 적 있어요. 그리고 제가 치료해 드렸는데…….”

    레이튼이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아무래도 회복을 한 이후에 또 물건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에리스텔라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근데 좀 전에 옆에 있던 환자한테 물건을 어디서 구하는지 안다고 말했어요.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구해?”

    되묻는 에리스텔라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분명 저번에 물어봤을 때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던 사람이 부작용이 나타나서 온 적도 있어요.”

    “그랬어?”

    에리스텔라가 이번에는 옆에 있던 유진에게 물었다.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당시 다소 급하게 조사하다 보니 누락된 경우가 좀 있어서요.”

    유진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 때문에 최근에 다시 조사를 하면서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기억해요!”

    “기억력 좋은 레이튼이 이렇게까지 확신한다면 다시 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레이튼이 강하게 주장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나섰다.

    어릴 적부터 레이튼을 지켜봐 왔기에 그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럼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네.”

    에리스텔라가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놓치고 있던 게 더 있었던 모양이다.

    ***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대공가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의 상황을 전부 정리했다.

    확실히 그동안 온 환자 목록을 보니 환자의 수가 점점 더 늘고 있었다.

    그만큼 물건을 사용하던 사람이 많았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겼으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브릭. 계산이 특기였지?”

    “못하지 않습니다.”

    보기와는 다르게 브릭은 의외로 머리가 좋았다.

    “계산 좀 해 줄래? 우리가 처음에 예상한 공급량과 실제로 회수된 물건의 수량이야. 추정치가 얼마나 들어맞는지 계산해 줘.”

    “하겠습니다.”

    “괜찮겠어?”

    “물론이죠. 바로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브릭이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곧 보좌관들이 이제까지 조사한 자료들을 모두 브릭에게 건넸다.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바닥이 나야 합니다.”

    “확실해?”

    “네. 제 계산은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에리스텔라가 눈앞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다른 거 맞지?”

    “확실히.”

    에리스텔라의 의문에 하인리시온도 동의했다.

    “물건이 돌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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