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10)화 (110/123)

110.

“배도 동그래지는 거 같고.”

통통통—

하인리시온이 여우의 배를 가볍게 토닥이듯이 때렸다.

‘으아아아아!’

에리스텔라는 기겁한 나머지 펄쩍 허공에 떠오를 만큼 크게 점프했다.

그래 봐야 다시 하인리시온의 팔 안에 쏙 들어갔지만.

‘너 뭐하는 짓이야!’

에리스텔라가 당장이라도 하인리시온의 팔을 물어뜯을 기세로 기겁했다.

그러나 하인리시온은 분노로 눈앞이 불타오른 여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흡사 불과 물 그리고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이러다 산책이 끝날 때까지 실랑이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여전히 흥분한 에리스텔라와는 다르게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하인리시온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여우로만 지내네.”

뜨끔. 그만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에리스텔라의 등이 움찔하고 말았다.

“황녀를 찾는 사람들도 전부 무시하고.”

사실은 하인리시온이 나서서 에리스텔라 황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돌려보내고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추궁할 건 제대로 추궁할 작정이었다.

‘내가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앞에 나서고 다닐 수만은 없잖아.’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전에도 에리스텔라는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대외 활동을 피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고 나섰을 뿐이었다.

필요한 일은 어느 정도 해 뒀으니 좀 쉬어도 되겠지.

[우리가 진짜 집중해야 하는 건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일이 아니잖아.]

에리스텔라의 핑계는 술술 나왔다. 게다가 나름 그럴싸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숨 고르기 하면서 데클렌을 쫓아야지.]

핑계가 아니라 모두 정말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에리스텔라의 몸 상태가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대외 활동을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다.

그래야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쫓아야 하는 거면.”

‘…….’

“나한테 숨기는 건 없어야 하지 않아?”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숨기는 게 뭐가 있다고. 하하하…….

“언제부터야?”

모른 척 뻔뻔하게 웃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나.’

사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이상을 눈치챈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에리스텔라의 병을 옮겨왔을 때, 직접 느꼈던 증상이 심상찮았다.

그때, 혹시 에리스텔라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계속 떠본 거야?’

에리스텔라가 오히려 눈을 흘기며 따질 때였다.

“그 후로 괜찮아 보여서 내 기우였나 했지.”

그래서 안심했던 게 실수였던 모양이라고.

에리스텔라의 양심이 쿡쿡 찔리도록 후회하는 하인리시온의 얼굴은 어두웠다.

‘……으.’

할 말이 없네.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얌전히 아래로 향했다.

하인리시온이 몇 가지 약을 내밀었다.

“이거 챙겨 먹어. 몸을 보호해 줄 거야.”

모두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만드는 마력 보호제였다. 마력의 흐름을 진정시켜 주고 마력을 좀 더 수월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었다.

“특히 이건 내가 개량한 거니까 효과가 괜찮을 거야.”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위해 직접 지난 며칠 동안 밤샘 작업을 하며 만든 것이었다.

‘우와. 감동이야.’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열심히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지만 하나도 흘리지 않고 꼭꼭 씹었다.

‘잘 소화시켜야지.’

꿀꺽. 에리스텔라는 야무지게 삼켰다.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

“앞으로는 꼭 필요하지 않으면 마력을 누르고 있고.”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내가 나설 수 있는 문제는 뒤로 물러나 있어.”

에리스텔라는 항상 물불 가리지 않고 가장 먼저 나서서 날뛰고는 했었다.

당연히 그만큼 마력 소모도 많았다.

[그건 그냥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거라서.]

“본능을 눌러. 네가 여우 꼴을 하고 있다고 진짜 짐승이라도 되는 줄 알아?”

윽.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너무해. 에리스텔라가 토라졌을 때였다.

“상처받은 척하지 마.”

어디서 연기를 하고 있냐며 하인리시온이 단호하게 잘랐다.

역시 안 통할 줄 알았어.

에리스텔라가 새침하게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였다.

“네 몸을 아껴.”

갑자기 하인리시온의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나도 제국도 마지막 순간에 의지할 사람은 너뿐이니까.”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썼다.

하인리시온이 씁쓸해하며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에리스텔라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면서 하인리시온의 턱을 쳤다.

“……읏.”

하인리시온이 턱을 부여잡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쳐다보는데.

[샬롯 공연 보러 가야 해! 초대장 보내 준 지 한참 지났는데 잊고 있었어.]

이번에도 안 가면 두고두고 원망을 받을 게 분명했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꼬리를 다급하게 흔들었다.

***

다음 날,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과 함께 곧바로 샬롯의 공연을 보러왔다.

“제목이 영웅의 구원자네. 지난번에 봤던 그건가 봐.”

샬롯에게 물어볼 게 있어 대기실로 찾아갔을 때 대본이 놓여 있는 걸 봤던 게 떠올랐다.

게다가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공연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공연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리스텔라는 마침 잘됐다는 듯 일부러 보란 듯이 하인리시온의 팔짱을 끼며 초대석으로 향했다.

공연 내용은 한 영웅의 우정과 배신을 그린 모험담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이어질수록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하인리시온. 이 내용 어딘지 익숙하지 않아?”

에리스텔라가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건국 설화와 비슷한 결이긴 하네.”

“역시 그렇지.”

“건국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은 적지 않으니까.”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사랑하는 영웅담이었다.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건국 설화를 다양한 방향으로 비튼 작품을 공연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보통의 건국 설화 비틀기랑은 다른 거 같은데.’

공연을 보는 에리스텔라의 눈빛은 공연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었다.

‘확실해.’

에리스텔라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샬롯의 대기실로 향했다.

“이 공연은 누가 쓴 거야?”

오래된 명작들을 위주로 공연하는 대부분의 무대와는 달리 영웅의 구원자는 초연이었다.

“글쎄. 누가 쓴 건지는 몰라. 극장 후원자가 보낸 시나리오라고 했어.”

“후원자? 직접 본 적 있어?”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지. 극장 주인도 직접 만난 적은 없는 것 같더라고.”

에리스텔라는 후원자라는 사람의 정체가 왠지 의심스러웠다.

공연 내용 역시 건국 설화에서 교묘하게 비튼 내용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극장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거액을 투자한 후원자가 있거든. 가끔 그런 괴짜들이 있어. 개인적인 욕심을 이런 식으로 채우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의아해하자 샬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데 생각보다 내용이 좋더라고. 공연하는 재미가 있어.”

그래서 내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잘 봤냐고. 어땠느냐고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에리스텔라는 잠시 의구심은 뒤로하고 샬롯의 연기에 대한 감상을 줄줄이 늘어놓아야 했다.

샬롯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감상을 듣고 난 후에야 만족했다.

***

한편,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각 가문의 가계도를 확인하던 황제가 뭔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는 듯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 봐야겠다.

황제는 사람을 물리고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잘 봉인해 둔 국보를 확인하는데.

‘이건……!’

뭔가를 발견한 황제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

때마침, 에리스텔라의 부탁으로 조사를 하러 갔었던 네 사람이 찾아왔다.

“데클렌의 행적을 쫓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뭐라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제이크가 아무리 모든 소문과 정보를 끌어모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에리스텔라가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일단 디아클렌 자작에 관해서 찾아보는 것부터 하는 수밖에 없겠지.”

“알겠습니다.”

“단, 정말 아주 사소한 것까지 탈탈 털어야 해. 그 정도가 아니면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이미 한 번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수상한 점을 전혀 찾지 못했었다.

“당사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털어 내도록 하죠.”

제이크가 믿음직스럽게 자신했다. 그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다.

“그리고 전에도 신경 쓰였던 건데.”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부탁하셨던 에밋 시안느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찾았어?”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최면에 빠졌을 때 본 이후로 내내 신경 쓰였던 부분이었다.

“네. 하지만 시안느 가문은 이미 멸문했습니다.”

“……그랬구나.”

내심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에밋 시안느는? 살아 있어?”

에리스텔라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죽었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