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디아클렌 자작은 찾을 필요 없을 거야. 찾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
에리스텔라는 황제에게 데클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생김새와 함께 특징까지.
“하지만 절대로 데클렌 앞에 나서면 안 돼.”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경고했다.
“절대로 상대할 수 없어. 위치 정도만 확인해.”
혹시라도 이걸 무시하고 나서는 순간 피해가 나올 것이다.
“그 이상은 절대로 접근하면 안 돼. 절대로.”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몇 번이나 강조하고 주의를 해도 부족하지 않은 문제였다.
황제 역시 그 심각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디아클렌 자작이 사라진 걸 알면 사람들의 불안이 높아질 거야.”
“그러니 마무리를 잘해야겠지.”
에리스텔라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황실의 실수로 디아클렌 자작이 활보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갔다간 소란만 일 뿐이었다.
“디아클렌 자작은 처벌했다고 발표할 거야. 내가 직접 모두 앞에서 발표할게.”
아마 데클렌도 이 정도는 예상하고 모습을 감췄을 것이다.
***
그리고 에리스텔라는 디아클렌 자작가의 사업에 대한 조사 결과를 모두에게 발표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복을 차려입고 홀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가슴에 갑작스런 통증을 느낀 에리스텔라가 입가로 피를 흘렸다.
“전하!”
옆에서 보조하던 소니아가 놀라서 부축하며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당장 주치의를 불러올게요.”
“소니아. 괜찮아.”
에리스텔라가 소니아를 말렸다.
“하지만 지금 피가…….”
에리스텔라가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그러게 확실히 피네.
순간 눈앞이 핑글 도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쩌지.
그저 단순한 피로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에리스텔라는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무리해서 여우에서 황녀로, 황녀에서 다시 여우로 필요할 때마다 변하고는 했으니.
‘몸이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도 최근에는 괜찮은 거 같았는데. 그래서 조금은 더 버텨 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당황하지 마. 예상하면서도 한 거였잖아.
에리스텔라가 담담히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드레스는 갈아입어야겠다.”
핏자국이 묻어서 이대로 갈 수는 없어 보였다.
에리스텔라는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숨기자.
하인리시온과 오빠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무것도 못하게 할 게 뻔했다.
하지만 심각한 얼굴로 에리스텔라를 지켜보던 소니아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전하는 이대로 숨길 거잖아요.”
소니아가 단호하게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 의사를 불러왔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듯 황제와 하인리시온이 따라 들어왔다.
“라라. 피를 흘렸다니 대체 무슨 일이야?!”
“…….”
황제의 격한 걱정과 하인리시온의 따끔한 시선이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곧바로 주치의가 상태를 살폈지만 별다른 이상은 찾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신 탓에 기력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과 관련된 이상이라면 저로서는 원인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주치의를 무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법사의 몸은 보통 사람들과 체질이 달랐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진료로는 이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알겠어. 어차피 별일도 아냐.”
에리스텔라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자신의 몸이 자꾸 아프고 이상해지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주치의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최근에 무리하게 변해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황녀일 때 여러 번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큰 힘에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그릇도 중요했다.
아무리 에리스텔라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있어도 현재 그녀의 몸은 작은 여우 안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에리스텔라의 마력을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이대로 계속 지내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마력을 빼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가능하지만 절대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큰 힘을 소모하느라 마력이 잠시 줄어드는 건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강제로 마력을 빼내는 경우에는 다시는 그 마력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 데클렌의 정체를 알아냈을 때, 그에게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사라져 버렸으니 불가능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쉽게 알아낼 수는 없었을 테지만.
에리스텔라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계속 억지로 모습을 바꾸면 점점 더 빨리 몸이 상하겠지.
‘이 몸으로 지낼 방법을 찾지 못하면 정말 버티지 못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어 내며 웃어 보였다.
“요즘 좀 무리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황제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인리시온에게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마법사는 단순한 과로 정도로 아프지 않으니까. 그런 경우는 보통 마법사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였다.
“일단 먼저 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내가 대신해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
황제가 걱정하며 말했지만 에리스텔라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할 거야.”
황제가 그런 에리스텔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이 얘기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동안 황제는 흑마법과 관련된 사건들을 재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 특징을 알아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이상한 점?”
“라테른 후작 사건을 처리했을 때 신경이 쓰였던 점이 있어.”
황제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테른 후작가는 건국 당시부터 존재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가문이지. 하지만 점점 가세가 기울다가 최근에 다시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에리스텔라의 물건으로 이익을 취하고 흑마법을 이용하면서 가문의 기세가 올라갔었다.
“아주르디 백작도 비슷하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디케이든 후작가 역시 기울던 가문은 아니었지만 가문의 사업이 더 커지긴 했었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조사했었던 부분을 떠올리며 동조했다.
“그 가문들은 전부 제국의 건국사에 언급된 적 있어.”
세 가문은 전부 건국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가문이었다.
“게다가 디아클렌 자작 역시 건국에 이바지한 가문이었어.”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도에 진출한 적 없는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이 건국 역사서에 언급된 적 있다는 것 역시 의외였다.
“그럼 알려지지 않은 개국공신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걸까?”
“아직 더 알아봐야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 일이잖아.”
제국 건국사라니. 까마득하게 오래전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현재 무너져 가던 가문이라고만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
“흑마법사들이 접근한 가문이 더 있지 않습니까.”
아델라시아 대공가.
그리고 리오나르프 황실까지.
단 한 번도 기울어진 적 없었고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건국사에는 등장하지.”
“맞습니다.”
역시 건국 당시의 상황을 다시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건국사를 면밀히 조사하다 보면 흑마법과 연루된 또 다른 가문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오늘 참석한 이들 중에도 건국사에 언급된 적 있는 가문이 몇 있으니 염두에 두도록 해.”
“응. 알겠어.”
그리고 곧 에리스텔라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홀로 향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모두의 앞에 나서서 조사 결과에 대해 발표했다.
동시에 황녀의 힘을 보여 주고 모두의 불안을 안정시켰다.
이제야 겨우 디아클렌 자작가의 사업으로 인해 벌어졌던 모든 사태와 소란이 마무리된 것 같았다.
***
요즘 여우는 잠을 많이 잤다.
집무실에서도 창가 쪽에 앉아 꾸벅.
식사를 다 하고 난 후에도 꾸벅.
먹고 자는 게 하루 일과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느리고 게으르고 천하 태평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여우로 지내야지.’
당분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항상 정해져 있었던 자정부터 아침까지도.
마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여우의 몸으로 마력을 쓰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나았다.
‘원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소모되니까.’
그러니 되돌아온 마력도 최대한 잠재운 채 회복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래서 지금도 하인리시온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창가에 누워 있는데.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하인리시온이 아무런 이상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낮잠을 자고 있는 여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여우 산책 좀 시키고 와야겠어.”
그러고는 태연하게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보좌관들의 인사가 들렸지만, 에리스텔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나 그냥 돌아가고 싶은데.’
에리스텔라가 투덜거리자 하인리시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자꾸 먹고 자고 먹고 자니까 점점 커지잖아.”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에리스텔라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기 무섭게 하인리시온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하인리시온이 천천히 걸으면서 여우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배가 발라당 드러났다.
뭐야. 갑자기 이 자세는.
‘손 저리 치워. 자세 바꿀 거야!’
에리스텔라가 몸을 뒤척이는데 갑자기 하인리시온의 손이 뻗어왔다.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