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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05)화 (105/123)
  • 105.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잖아?”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가 쓰러져있는 내내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갑자기 변했던 거야?”

    이전에도 몇 번 예정된 시간과는 다르게 변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일부러 변한 거야.”

    에리스텔라는 지난번 몸이 변하는 시간이 달라지는 원인을 알아냈을 때,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었다.

    그 원인을 이용하면 에리스텔라가 필요한 순간에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남몰래 여러 시도를 했었다.

    “제한은 있지만 꼭 필요할 때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에리스텔라의 마력이 대부분 회복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흑마법의 제한이 풀려 있는 상태에서 에리스텔라의 의지로 흑마법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여우로 변한다는 사실은 숨겨야 해. 내가 돌아올 때는 온전한 황녀여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여우로 돌아가야만 하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디아클렌 자작이 가만히 있겠어? 네가 여우인 것도 알잖아.”

    “알고 있어도 직접 폭로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게 데클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패니까.

    에리스텔라가 돌아온 순간부터 멈춰 있었던 모든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삐걱거리는 것 같아도 꾸역꾸역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니 아직은 여기서 지낼 수는 없어.”

    황녀궁은 비밀이 노출될 위험이 컸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가로 간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소니아가 조용히 문제를 제기했다.

    “하긴 그건 그래.”

    에리스텔라 역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 전까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사이에는 냉기가 흘렀다.

    “이거 어쩌지.”

    적당한 명분으로 위장해서 황녀궁이 아닌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돌아가야 했다.

    ‘방법이 하나 떠오르기는 하는데.’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왜? 이번엔 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인리시온은 이쯤 되니 에리스텔라의 눈빛만 봐도 대강 의도는 알아차리는 경지에 올랐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부담 없이 말할게.”

    아니, 양심이 있으면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는 뜻이잖아.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이미 제멋대로 해석 중이었다.

    “걱정 마. 내가 나중에 이 은혜는 전부 다 갚을 테니까.”

    어쩐지 뻔뻔함이 한층 더 수준이 높아진 것 같았다.

    하인리시온은 황당함과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하인리시온은 어느덧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너와의 관계부터 정리하려고 했는데. 내가 대공가에서 지내려면 그럴 수가 없어.”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인리시온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약혼자의 집에서 지내는 걸로 위장해야 했다.

    잔뜩 긴장하던 하인리시온은 허탈한 듯 힘이 쭉 빠졌다.

    “이미 눌러앉은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파혼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하인리시온은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다.

    “정말? 정말 괜찮아?”

    “그래.”

    하인리시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도 그게 아닌데. 나는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 게다가 동의까지 받았으니까.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리는 걸 겨우 참고 있을 때였다.

    한창 논의 중인데 문밖에서 시녀들이 곤란해하며 소니아를 찾았다.

    소니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근데 약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 최대한 자연스럽게…….”

    에리스텔라가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말하려고 하는데, 마침 소니아가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전하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어요. 약속을 잡고 오셔야 한다고 했는데…… 선물을 들고 막무가내에요.”

    모두가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고 있으니 소니아나 다른 시녀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황녀를 찾아오는 손님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모두 거절하는 것도 무리예요. 어느 정도는 만나셔야 할 것 같아요.”

    소니아가 곤란해하며 말했다.

    “흐음.”

    계속 만나는 것도 귀찮은데.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마침 내가 대공가로 돌아갈 핑계가 필요했잖아.”

    “네?”

    갑자기 그건 왜? 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도 없었다.

    에리스텔라의 행동이 바로 이어졌으니까.

    “지금이 딱인 거 같아. 나는 지금 하인리시온과 약속이 있어서 곤란해.”

    하인리시온과 위장 관계 이거 은근 편하고 좋은데?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음흉하게 휘어졌다.

    “그럼 일단 사람들이 믿도록 보여 줄까?”

    에리스텔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루라도 빨리 대공가로 가려면 여유 부릴 시간 따위 없어. 얼른 출발하자.”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팔짱을 끼고 황녀궁을 나섰다.

    ***

    후원을 걷는 에리스텔라와 하인시리온이 비밀스럽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이거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야?”

    “이렇게 해야 사이가 좋아 보이지.”

    에리스텔라가 아직도 팔짱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황궁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이좋은 한 쌍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시녀나 시종과 마주칠 때마다 화사하게 방긋 웃어 보였다.

    “웃어. 웃으라고.”

    하인리시온의 옆구리를 꼬집기도 하면서.

    “시온.”

    에리스텔라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하인리시온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역시 황궁 안에서 돌아다니는 걸로는 부족한 거 같아.”

    그러고는 하인리시온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면서 씨익 웃었다.

    “흐음. 이렇게 외출하는 것도 좋네.”

    에리스텔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황궁 밖 사교계 인사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들만 골라서 돌아다녔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나란히 걷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구경하며 에리스텔라가 후후 웃었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

    황녀궁에서 지낸지 딱 일주일이 흘렀을 때였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거 같아.”

    “준비할까요?”

    소니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챙겨 놓은 짐을 번쩍 들었다.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하게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에리스텔라와 소니아는 그 길로 곧바로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그동안 소원했던 하인리시온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좀 더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 보려 한다는 서신을 한 장을 남겨 놓고서.

    그다음은 에리스텔라와 황제의 완벽한 역할극이었다.

    미리 맞춰 놓은 대로 황제가 뒤늦게 황녀궁에 들이닥쳐서 서신을 확인한다.

    그러고는 황녀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골치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쩌겠어. 이미 가 버렸는데.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졌다. 황녀가 대공가에 들이닥쳐 동거를 시작했다고.

    “이렇게까지 요란할 거라고는 안 했잖아.”

    하인리시온이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며 에리스텔라를 향해 따져 봤지만.

    에리스텔라는 뻔뻔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이렇게까지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게 너무도 에리스텔라 황녀다워서.

    모두가 웃고 떠들고 때로는 손가락질할 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가능성 따위는 떠올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달라지기는 틀린 거 같아.’

    그냥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야 할 듯싶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도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

    에리스텔라는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두 번에 걸쳐 들어와야 했다.

    한 번은 에리스텔라 황녀로.

    또 한 번은 여우로.

    황녀로 들이닥칠 때는 하인리시온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고용인들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느라 정신없는 날이었다.

    갑작스레 황녀를 맞이하고 그녀를 위한 방을 마련해서 안내했다.

    에리스텔라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

    “드디어 대공가에 내 방이 생겼어!”

    그동안은 얼마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객식구 생활이었나.

    그동안 에리스텔라에게 밀려난 생활을 해 오던 하인리시온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지만.

    “여우일 때 여기로 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

    이 방은 에리스텔라 황녀의 방. 그러니 여우로 있을 때는 예전처럼 하인리시온의 방으로 오라는 말이었다.

    “……어. 그래야지. 응.”

    에리스텔라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스텔라 황녀가 대공가에서 지내기 위해 몇 가지 준비해 둬야 할 것이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자유롭게 여우와 원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과 거리를 두는 게 필요했다.

    “필요한 건 소니아 통해서 시킬 테니, 방 정리는 물론이고 식사 같은 것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돼.”

    황녀를 위한 방이 준비되자마자 에리스텔라는 선언하듯이 딱 잘랐다.

    아쉽지만 친해지는 건 다음에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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