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도저히 모르겠다.’
에리스텔라는 데클렌과 디아클렌 자작의 모습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건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내가 그걸 단번에 알아낼 수야 없지.’
지금은 그거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중요한 건 데클렌의 목적과 이 연회를 막는 거였다.
“사실 이번에 황녀 전하께서 저한테 접근하실 줄 알고 일부러 연회장을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한테 뭘 떠보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거지, 경계하는데.
“마법 아카데미에서 원인 불명의 이유로 병이 난 아이가 지금 대공가에서 머무르고 있다죠.”
‘그걸 알고 있어?’
에리스텔라 놀라서 쳐다보는데, 순간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역시나 데클렌은 꿍꿍이가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 사업 발표회를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
“황녀 전하라면 이 자리를 막기 위해서 무조건 저를 찾아올 테니까요.”
이제 알겠다.
이건 디아클렌, 아니 데클렌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정체를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무척이나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리스텔라가 이를 드러내자 데클렌은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데클렌이 에리스텔라를 쭉 훑어보며 물었다.
“그 모습으로 모두 앞에 나설 수 있겠어요?”
그저 작고 귀여운 여우의 모습으로 에리스텔라 황녀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결국엔 사업 발표회가 끝날 때까지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거라고.
“분명 대공 전하와 뭔가 계획을 세우셨겠지만 그걸로는 안 될 겁니다.”
데클렌의 수는 지독했다. 그리고 정확했다.
“제 사업 발표회에 혼선을 줄 수 있을 만한 충격은 하나밖에 없죠.”
지금 그는 에리스텔라를 시험하고 있었다.
흑마법에 당한 황녀임을 밝히느냐, 아니면 이대로 눈먼 사람처럼 모른 척 회피하느냐.
어느 쪽이든 질 나쁜 선택지였다.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눈빛은 독기로 빛났다.
‘그까짓 거. 뭐 못 할 일이라고.’
흥. 그런다고 내가 도망이라도 갈 거 같아?
그리고 순식간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굳은 심지를 가진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 적 없어.”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가 디아클렌 자작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역시 그때 봤던 분이 전하가 맞겠네요.”
지난번 연회에서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며 데클렌이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에리스텔라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피며 중얼거렸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제가 건 저주를 푸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네가 뭐라고 그 정도야.”
그가 건 흑마법의 저주를 완전히 푼 건 아니지만 에리스텔라가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까?”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말해 줘?”
데클렌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언제부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말씀해 주시면 저도 한 가지 알려 드리죠. 어차피 지금은 반쪽에 불과하잖아요?”
……윽. 역시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밀릴 수는 없었다.
“안 들어도 돼.”
디아클렌 자작, 아니 데클렌에게 휘둘릴 생각 따위 없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우일 때부터 걸고 있던 목걸이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도 조금의 훼손도 없이 에리스텔라의 목에 걸려 있었다.
시선을 뗀 에리스텔라가 데클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장 연회를 멈출 생각 따위는 없겠지?”
“제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그럴 수는 없죠.”
“그럴 줄 알았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무리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증명하실 수 없을 겁니다. 대공 전하께서 나선다고 해도 믿지 않을 테고요.”
데클렌은 확신했다.
아무리 하인리시온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단번에 믿고 멈추기에는 그들의 욕심이 더 컸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
에리스텔라는 그대로 돌아섰다.
“마침 잘됐네. 지금부터 보여 줄게.”
에리스텔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직진하는 거다.
사실 아예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화를 내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에리스텔라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에리스텔라가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연회장이었다.
그동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느라 바빴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반대가 될 거다.
‘자. 들어가자.’
에리스텔라는 두 손으로 문을 직접 열었다.
빛무리가 쏟아지며 연회장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리스텔라는 특유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비록 내가 원하던 타이밍은 아니지만.
내가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 숨기만 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니까.
아직 이르기는 해도 내가 나서야 할 때 나설 거야.
그게 내 방식이야.
당당하고 씩씩하게 보란 듯이.
어라. 꼭 데뷔탕트 때가 떠오르네. 그때도 이런 상황이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쏟아지는 시선도 웅성이는 목소리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 하인리시온은 생각보다 오래 돌아오지 않는 에리스텔라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후원을 비롯해 지정받은 방에서도 찾지 못해 연회장에 돌아왔는데.
‘네가 왜 거기 있어?’
그토록 찾던 에리스텔라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었다.
이번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쳤지만 에리스텔라가 모른 척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장내가 술렁였다.
처음에는 누가 요란하게 입장하는 거지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불편한 시선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누구……? 어……?!”
에리스텔라의 뒤로 역광이 쏟아져서 순간적으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리스텔라가 연회장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올수록 존재감만으로 주위의 불을 밝히는 것 같은 화려한 외모가 드러났다.
“저, 저기 좀 보세요!”
“저 얼굴은…… 으, 은발이에요! 저 은발은……!”
은발은 아주 희귀한 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외모에 은발은 제국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설마 황녀 전하……? 하지만 어떻게……? 지금 내 눈에만 저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니죠?”
“저도 분명 황녀 전하로 보여요.”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여기 나타날 수 있는 거죠? 분명 돌아가셨잖아요? 그것도 한참 전에……?”
비명과도 같은 혼란스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황녀 전하가 맞아요.”
그 한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모두가 죽었다고 알고 있던 황녀였다.
“누가 확인해 볼래요?”
그럼에도 다가가서 확인해 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에리스텔라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보란 듯이 선언하기 위해서.
“내가 돌아왔어요.”
에리스텔라 르노 리오나르프 황녀가 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잠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존재감만으로도 제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그녀의 복귀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연회장에 도착한 데클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느새 디아클렌 자작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때. 일단 하나는 보여 줬어.’
이제는 에리스텔라의 방식대로 이 연회를 제대로 망쳐 주는 일만 남았다.
‘잊었나 본데. 그건 내 전문이야.’
에리스텔라의 자신만만하고 짓궂은 눈빛이 데클렌을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왜 하필 지금 돌아왔는지 궁금할 거예요.”
에리스텔라가 모두를 쭉 둘러보며 천천히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잡았다.
그녀의 몸의 변화를 따라 목걸이의 크기도 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법을 걸어 놓은 것처럼.
‘수작 부리고 있어.’
에리스텔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이곳에 있는 물건에는 흑마력이 깃들어 있어요.”
힘으로 당기는 순간 목걸이 줄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