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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7)화 (97/123)

97.

디아클렌 자작이 돌아간 직후,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방금 느꼈던 이상한 점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인리시온. 아무래도 디아클렌 자작이 내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거 같아.]

그게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지금까지 여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잠깐 눈길을 주고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조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 여우 앞에서 말을 조심한다는 건. 그녀가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걸 넘어서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었다.

‘설마. 그렇겠어?’

정체를 들킨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본능이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방금 디아클렌 자작이 나를 보더니…….]

방금 전 느낀 위화감을 하인리시온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휘청.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인리시온의 몸이 흔들렸다.

‘시온?’

에리스텔라는 반사적으로 부축해 주려고 했지만 여우의 작은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인리시온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조차 앓아눕게 만들었던 병이다. 하인리시온이라고 해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억지로 참고 있었을 뿐.

‘괜찮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방으로 가자.’

에리스텔라가 걱정스레 하인리시온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잠시 이마를 짚고 호흡을 고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로웬.”

하인리시온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로웬이 들어왔다.

“네. 전하.”

하인리시온이 태연하게 가장한 얼굴에 로웬은 그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하인리시온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도 불구하고.

표정을 갈무리한 하인리시온은 조금도 아픈 티가 나지 않았다.

수없이 해온 일이기에 이렇게 능숙한 거겠지.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많은 걸 참고 괜찮은 척 버텨왔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서 더 말려봐야 하인리시온은 해야 할 일을 끝내야만 쉴 게 분명했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당장 침실로 데려가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어깨 위에 올라가 하인리시온의 얼굴 가까이 몸을 가져다 댔다. 그의 몸은 지탱해 줄 수 없지만 이렇게 하면 고개 정도는 받쳐줄 수 있으니까.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

저렇게 고집을 부리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걸 에리스텔라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확실히 디아클렌 자작은 수상한 구석이 있어.”

오늘 자작을 만나기 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나눈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디아클렌 자작가에 대해서는 알아봤나?”

“혹시나 자작가의 문서가 위조된 게 아닐까 알아보았지만 조작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디아클렌 자작가의 장남으로 3년 전에 작위를 승계했습니다.”

에리스텔라가 디아클렌 자작에 대해 의심을 가졌을 때 지시했던 일이었다.

주목받기 전까지는 수도에서 존재감조차 없었던 가문이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신분을 위조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알아본 건데.

“이름도 외모도 어릴 때 본 적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았으나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적어도 진짜 디아클렌 자작인 건 맞나 보다.

“일단 디아클렌 자작가의 지난 10년간의 행적에 대해 추가적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자작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 쪽도 한번 알아보도록 해.”

원래 가족이 가장 큰 내부고발자이기도 하는 법이니까.

만약 디아클렌 자작에게 수상한 면이 있다면 그걸 잘 아는 사람 역시 그들일 터였다.

자작만 수도로 진출하고 나머지 다른 가족들은 영지에서만 지내는 점도 의심해 볼 만했다.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리고 나서야 하인리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간신히 일을 끝낸 하인리시온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에리스텔라가 나무랐다.

그냥 내가 누워있었으면 되는걸. 괜히 그가 병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야말로 개고생 중이었다.

미안한 만큼 되레 까칠한 말이 흘러나왔다.

“너 설마……?”

그때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가?’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또르르 먼 허공을 향했다.

“너, 그때 정신을 차렸던 거야?”

뜨끔.

아 맞다. 그때 모른 척하고 있었지. 하인리시온의 몸 상태를 걱정하느라 잊고 있었다.

‘아픈데도 엄청 예리하네.’

에리스텔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몰라.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눈이 떠졌어. 일어나 보니까 멀쩡해졌던데?]

이건 하인리시온을 배려하는 게 아니었다.

그 순간에 사실은 깨어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에리스텔라도 민망해서였다.

“그래?”

하인리시온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지만 에리스텔라는 꿋꿋이 발뺌하며 물었다.

[응. 근데 왜 이번엔 네가 골골거려?]

“너한테 옮았나 보지.”

일부러 내 몸살감기를 가져가 놓고서는.

[그래도 오늘 일정은 끝났으니까 푹 쉬면 되겠네.]

에리스텔라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척 말했다.

“그러게. 누구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네.”

하인리시온이 일부러 에리스텔라를 쿡쿡 찌르며 타박했다.

그게 다 널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열이 펄펄 끓었다.

[정신 차려 봐. 괜찮은 거야? 당장 의원이랑 사람을 부르는 게 좋겠어.]

생각보다 상태가 더 나쁜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는 아파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하인리시온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이 간병하는 것보다는 의사와 고용인을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가 소니아를 불러서 사람을 불러오려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그녀의 꼬리를 붙잡았다. 당겨지는 힘에 에리스텔라가 돌아봤다.

“지금 떠넘기는 거야?”

하인리시온은 고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에리스텔라의 양심을 따끔하게만 들었다.

[아냐! 나는 지금 너를 위해서…… 내가 할게. 그럼 믿는 거지?]

에리스텔라는 양심이 살아 있는 황녀였다.

적어도 자신 때문에 아픈 하인리시온을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우의 몸으로는 물이나 약을 가져올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소니아를 찾았다.

소니아는 갑자기 멀쩡한 모습으로 뛰어오는 에리스텔라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그녀를 품에 안고 침실로 왔다.

그리고 아픈 듯 숨을 몰아쉬는 하인리시온을 발견했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거죠? 전하는 괜찮으신 거예요?”

[응. 나는 완전 멀쩡해.]

에리스텔라는 한눈에 봐도 좀 전까지 끙끙 앓았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쌩쌩했다.

소니아의 시선이 천천히 에리스텔라에게서 하인리시온으로 향했다.

“근데 이번엔 대공 전하가 아프신 거고요?”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는 갑자기 좋아지시고… 대공 전하는 갑자기 아프시고…… 아하.”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소니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해했어요. 간병은 전하가 하시는 거죠?”

[어? ……응. 내가 하지.]

“그럼 저는 밖에서 대기할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주세요.”

소니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묻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뭐지? 왜 해명해야 할 거 같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고민에 잠기는 것도 잠시.

에리스텔라는 약하게 들려오는 하인리시온의 신음 소리에 급하게 침대로 향했다.

식은땀을 닦아주고 물을 편히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는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기도 했다.

지난밤엔 내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하인리시온의 상태는 에리스텔라보다 나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도 안정되고 열도 떨어졌다.

물론, 에리스텔라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덕도 있을 것이다.

‘간병이라는 거 힘든 일이네.’

지친 에리스텔라가 의자에 기대며 축 늘어졌다.

밤새 간호했더니 하인리시온이 차라리 간병을 받는 쪽이 편하다고 생각해 버린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이 휴. 그렇다고 어쩌겠어. 나 때문에 아픈 건 사실인데.

에리스텔라가 다시 하인리시온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입은 투덜거리면서도 손길은 정성스러웠다.

***

푹 잠들었던 거 같은데.

눈을 뜬 하인리시온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새 옆에서 불만스레 꿍얼거리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던 것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몸을 살짝 일으키자 옆구리에서 꼼질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

이불을 들어 보니 옆구리에 몸을 웅크리고 자는 여우의 모습이 보였다.

몹시 피로한 기색으로 곯아떨어진 여우를 내려다보던 하인리시온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침대가 조금만 흔들려도 깨어날 듯 눈을 움찔거리는 여우 탓에 도로 자리에 누웠다.

조금만 더 자자.

***

에리스텔라는 단 하룻밤 사이에 건강해진 하인리시온을 보며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하루만 있었으면 좋아졌을 거야.’

이상한 자존심이 앞선 나머지 자신이 하인리시온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오후, 하인리시온이 갑자기 툭 내뱉었다.

“그럼 체력을 좀 길러 보던가.”

‘?’

에리스텔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알고 있다는 투로 그가 말하자 그녀는 작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위한 운동기구 세트를 보여 주었다.

“이걸 하루에 세 번씩 꾸준히 하면 튼튼해질 거야. 앞으로 열심히 해.”

그 모양새를 질린 얼굴로 보던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좀 골골거려도 괜찮겠어. 에리스텔라가 미련 없이 운동기구에서 시선을 돌렸다.

하인리시온이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무시하자.’

에리스텔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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