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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6)화 (96/123)
  • 96.

    여우의 앙증맞은 발이 총총 사뿐하게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몸이 가뿐한 나머지 발걸음이 한층 경쾌해졌다.

    접견실 앞에서 유리창 너머로 하인리시온과 디아클렌 자작이 보였다.

    언뜻 봐도 지금 하인리시온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그 상태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저러다 곧 쓰러지겠네.

    정말 쓰러질 리는 없겠지만. 굳이 미련하게 저러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역시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어. 에리스텔라가 끼어들려는 순간이었다.

    “여우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로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오늘은 내내 안 보이시더니 여기 계셨군요. 그런데 지금은 들어가면 안 됩니다.”

    로웬이 여우를 안아 들고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안 돼. 싫어!

    내 볼 일은 저쪽에 있단 말야.

    여우가 발버둥 쳤다.

    이거 놓으란 말야!

    예상치 못한 거센 발버둥에 당황한 로웬이 여우를 고쳐 안으려고 할 때였다.

    타이밍이 어긋나면서 여우가 허공에 떠 버렸다.

    ‘어……?’

    나 지금 날았어?

    감상에 빠지는 순간 곧바로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여우님……!”

    로웬이 다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결국 에리스텔라를 잡지 못하고 놓쳤다.

    에리스텔라의 몸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멋지게 착지.

    하. 나를 뭘로 보고. 하늘을 나는 건 수백 번도 넘게 해 봤다고.

    착지하는 거야 식은 수프 먹기지.

    “오…… 여우님. 대단하시네요?”

    로웬이 놀라며 감탄하자 콧방귀를 뀐 에리스텔라는 다시 잽싸게 달렸다.

    그리곤 이번에는 로웬이 붙잡을 틈도 없이 하인리시온과 디아클렌 자작이 있는 곳으로 쏘옥 들어갔다.

    ***

    에리스텔라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여기 왜 왔어?’

    그가 눈빛으로 물었다.

    그야 너를 도와주려고 왔지! 라고 당당하게 눈빛으로 전달하려던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디아클렌 자작에게 닿았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에리스텔라는 뭔가를 떠올린 듯 멈칫했다.

    하인리시온을 돕는 건 잠깐 미뤄 두고 그전에 이번 기회에 한번 확인해 볼까.

    잠시 멈춰서서 망설이던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로 향하던 방향을 그대로 틀어서 반대편으로 달렸다.

    ‘어디 가는 거야?’

    하인리시온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에리스텔라는 순식간에 디아클렌 자작에게 다가갔다.

    “우리 저번에도 본 적 있지?”

    자작은 자신에게로 다가온 여우가 귀엽다는 듯 반가워하며 호응했다.

    역시 이 모습에 안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니까.

    이때다 싶었던 에리스텔라는 과감하게 자작의 품에 안겼다.

    귓가에 하인리시온이 ‘얼씨구?’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일단 무시하고.

    내 목표는 오직 하나!

    우선 가볍게 발장난 좀 치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다 기습을 확-!

    휙!

    디아클렌 자작의 머리를 당겼다.

    “!!!”

    이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짓이야?

    하인리시온까지 기겁하며 에리스텔라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는 재차 자작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어……?”

    그의 머리가 여우의 발길 따라 기울어졌다.

    이상하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발 아니라 진짜 머리 맞네.’

    머리카락을 몇 번 더 당겨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머리나 얼굴은 꾸며낸 게 아니라는 거네.

    혹시 데클렌이 가발이나 다른 분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분장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으니 지금은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에리스텔라는 그저 새끼 여우가 호기심에 머리카락을 당긴 것처럼 순진하게 발장난을 쳤다.

    끼히히히—

    발라당 몸을 뒤집으면서 해맑게 웃기도 하고.

    “하하. 여우가 장난기가 많네요.”

    자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우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눈매가 가늘어진 듯싶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에리스텔라가 슬쩍 발을 빼려고 할 때였다.

    ‘어라? 왜 이래?’

    이번에는 자작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품 안으로 여우를 당겨 안았다.

    그 상태로 자작은 여우를 안고서 장난을 쳤다.

    먼저 다가가 장난을 친 건 그녀였기에 지금 발을 빼는 것도 이상했다.

    에리스텔라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하인리시온을 바라봤다.

    ‘제발 나 좀 구해 줘.’

    그녀의 애절한 눈을 본 하인리시온의 표정이 순간 샐쭉해졌다.

    흐응. 글쎄다.

    그가 당장 자신을 구해 줄 마음이 없다는 걸 눈치챈 에리스텔라가 속으로 외쳤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밀당이든 약 올리는 거든 제발 나중에 하고.

    지금 일단은 나 좀 도와줘!

    끊이지 않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하인리시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움직였다.

    “혹 불쾌했다면 여우를 대신해 사과하겠습니다.”

    자작의 품에 있던 여우를 훌쩍 안아든 하인리시온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 여우가 최근에 터그놀이에 빠져 있어서 뭘 자꾸 잡아당기려 하네요. 앞으로는 훈련을 잘 시켜서 조심하도록 하죠.”

    “하하. 저랑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자중하라는 듯 하인리시온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에리스텔라는 불만스레 꼬리를 휘휘 젓다가도 이내 얌전해졌다.

    대신 소심하게 하인리시온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걸로 불만을 표현했다.

    멋대로 행동한 게 있으니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나저나 오늘 나눈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디아클렌 자작은 흔쾌히 인사하며 물러났다.

    자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번 쫓아가 봐?

    ***

    저택을 떠나는 자작의 뒤로 에리스텔라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는 보좌관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대화 내용을 듣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한창 대화를 나누던 자작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조금씩 다가오는 여우가 귀여웠는지 그가 가볍게 웃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자작은 바로 여우에게 관심을 가졌다.

    “지난번 연회에서는 피하는 거 같았는데. 오늘은 나한테 관심이 많네?”

    상체를 숙인 그가 여우를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뜨끔.

    예리하기는. 하지만 원래 동물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변덕스러운 거라고.

    어느 순간부터 자작은 더 이상 보좌관과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에리스텔라에게만 집중했다. 이러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에리스텔라가 아쉬워할 때였다.

    “자작님. 오늘 나눴던 대화 중에 말입니다.”

    보좌관이 뭔가 신경 쓰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좋아. 계속 말해 봐.

    에리스텔라가 귀를 쫑긋 열었다.

    “잠시.”

    “……?”

    자작은 재빨리 보좌관의 말을 막았다.

    “그건 돌아가서 듣는 게 좋겠습니다. 듣는 귀도 있으니까요.”

    “듣는 귀요?”

    보좌관이 의아해하자 자작의 시선이 여우를 향했다.

    어라?

    지금 내 앞에서 말조심하는 거야?

    마치 평범한 여우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처럼.

    설마 내가 누군지 아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에리스텔라가 의구심을 품은 채 자작의 표정을 파악하고자 빤히 보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여우가 들어봤자…….”

    “그런 식으로 방심하다가 말이 새고 실수가 나오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자작의 엄중한 경고에 보좌관이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여우님.”

    보좌관에게서 고개를 돌린 자작은 다정한 목소리로 여우를 불렀다.

    “대공가의 고용인들이 이렇게 부르던데. 여우님. 맞나요?”

    그러면서 자꾸만 은근하게 웃는데.

    왜 저렇게 웃는지 모르겠지만. 거 되게 기분 더럽네. 에리스텔라가 거부하며 이를 드러내는데,

    “여우님은 제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하하. 그럴 리가.

    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지?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이를 드러낸 채 고민했다.

    이대로 콱 물어버려?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갑자기 자작의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왜 저래. 기분 나쁘게.

    “하지만 몰래 엿듣는 건 나쁜 버릇이랍니다.”

    윽. 자작은 여우의 양 볼을 쭉 늘리며 주의를 주었다.

    이거 놔. 감히 내 볼을 잡고 뭐 하는 짓이야!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자유를 얻고 경계를 할 때였다.

    “다음에 또 만나요.”

    자작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것마저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에리스텔라는 점점 멀어지는 자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기분 탓인가.

    아니 근데. 이건 진짜로 정말.

    너무 찝찝한데?

    저 뭐든 다 아는 척하는 표정은 원래 그런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를 아는 거야?

    하인리시온한테 말해서 다음에 확인해야겠어.

    에리스텔라가 몸을 틀어서 하인리시온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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