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5)화 (95/123)

95.

에리스텔라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지금 두 사람은 평소와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에리스텔라를 간병하느라 둘 다 같은 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태. 이런 식으론 누구든 그들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에리스텔라는 바람 빠진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혼자 조용히 쉬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여기 지키고 있을 필요 없어.”

그러니 하인리시온과 샬롯 모두 나가서 각자 할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약도 먹었고 이제는 쉬어야겠어. 일 끝내고 나서 다시 와. 나도 계속 혼자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인리시온은 꿈쩍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를 데리고 나가라는 에리스텔라의 눈치를 읽은 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여기 계속 계시면 로웬 님을 비롯해서 고용인들이 찾아올 겁니다. 제가 계속 틈틈이 확인하겠습니다.”

“…….”

“이미 로웬 님께서 두 번이나 찾아오셨었잖아요.”

역시나 벌써 하인리시온을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오늘 일정이 일정이다 보니 하인리시온이 없으면 곤란할 것이다.

괜히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말라는 에리스텔라의 의도를 이해한 하인리시온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다녀와.”

에리스텔라의 갈라진 목소리가 두 사람을 배웅했다.

혼자 남은 에리스텔라는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사실 아픈 와중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예전, 꾀병을 부리며 관심을 구하던 어린 하인리시온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도 싶었다.

그때는 약한 척하는 게 뭐가 좋냐고 엄청나게 구박했었는데.

‘아픈 상황에서 걱정이랑 관심을 받는 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어릴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 에리스텔라가 작게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래도 얼른 나아야지.

나 때문에 너무 걱정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약이 너무 맛이 없기도 하고.’

아까 한 입 먹었다가 깜짝 놀라서 뱉어 버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소니아는 분명 에리스텔라가 다 나을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해서 약을 가져올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덜 먹으려면 빨리 건강해져야지.

그러니까 일단 좀 자자.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리스텔라가 잠에 들기 직전이었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하인리시온이 왜 다시 들어온 거지?’

지금 하인리시온은 디아클렌 자작을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벌써 돌아갔을 리는 없으니 아마 잠깐 자리를 벗어나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걱정되나.

이 와중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하인리시온이 가까이 오면 놀려 줘야지.

에리스텔라는 깊은 잠에 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어느새 다가온 하인리시온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역시 괜찮을 리가 없지.”

에리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사실 에리스텔라도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파 본 기억이 없어서 이게 남들 기준에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단순한 감기를 이렇게 앓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무리해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졌나.’

그래서 이렇게 심하게 앓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며칠 정도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하인리시온이 이렇게 걱정이 많은 줄 몰랐다.

‘이제 그만 괜찮다고 말해 줘야겠다.’

슬슬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에리스텔라는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인리시온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뭐 하는 거지?’

궁금했지만 이마에 닿은 그의 손이 너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는데.

하인리시온이 낮게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마법 주문인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이마로 열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뜨거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바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의 손을 통해서.

‘설마 지금…….’

에리스텔라는 순간 눈을 뜰 뻔했다. 지금 그가 뭘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움직이기 전에 하인리시온의 손이 먼저 떨어졌다.

에리스텔라를 괴롭히던 열기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계속 잠든 척 가만히 있으니 하인리시온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어린애 같네. 그래도 내일은 건강하게 일어나.”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머리를 툭 가볍게 토닥이듯이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마치 편히 잘 수 있도록 주문을 걸어 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건 완전히 틀리지도 않았다.

그는 방금 에리스텔라의 병을 가져갔으니까.

그것도 마법으로.

이건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마법이었다.

만만치 않은 양의 마력을 소모하면서도 결국 감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인리시온에게 넘어가는 것뿐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하인리시온이 나가자마자 에리스텔라는 눈을 번쩍 떴다.

방금까지 자꾸만 흩어지기만 하던 기력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방금 하인리시온의 마법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에리스텔라가 묘한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하인리시온의 손이 한참이나 닿아 있었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인리시온의 손이 떨어지자 뭔가 허전했다.

‘그냥 그 손이 기분이 좋았던 건 열을 가져가고 있어서였겠지.’

그래서 심장도 미친 듯이 뛰는 거고.

펑—

분명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에리스텔라의 귓가에는 뭔가 터지는 환청이 들렸다.

그러나 에리스텔라가 다시 여우가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어라……?’

그 순간 에리스텔라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정신이 없어서 생각이 정리가 되지는 않지만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 번뜩 뭔가가 떠올랐다.

잠깐만. 에이 설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의구심만 더 강해졌다.

그때도…… 또 그때도…….

기억을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모든 순간을 이어 주는 공통점. 그동안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의 평정심이 흐트러지고 심장이 널뛰었을 때였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서서히 차분히 가라앉았다.

모든 순간이 또렷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

두근두근두근.

흥분했거나 놀랐거나 혼란스럽거나 혹은 설렐 때 평상시와는 다른 속도로 심장은 뛴다.

“이게 원인이었나.”

여러 감정이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변하는 시간은 그녀의 감정, 기분, 긴장도 등 심장 박동이 일상적인 것과 다른 변화가 있을 경우에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에리스텔라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이런 식으로 감정에 흔들린다는 건 그녀의 몸이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거겠지.’

사실, 그녀는 이미 여우와 인간의 모습을 오가는 지금과 같은 생활을 이 이상 지속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당장 조급하게 굴 수는 없었다.

내가 온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지만.

‘안 되더라도 이 몸으로 최대한 버텨봐야지.’

한계가 올 때까지는 계속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변화의 원인은 알아냈으니까 조심해야지.’

사실 지금 에리스텔라가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자신은 이미 쌩쌩해진 후였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열이 나고 식은땀이 흐르는 건 하인리시온일 터였다.

컨디션이 회복되었으니 이제 갑자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리스텔라가 침대에서 나왔다.

‘지금쯤 하인리시온은 디아클렌 자작을 만나고 있겠지.’

열이 들끓는 몸으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디아클렌 자작과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버틸 것이다.

‘그런 상태로 끝까지 버티면 무리가 갈 텐데.’

디아클렌 자작은 유의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앞에서 하인리시온은 절대 아픈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며칠 지나면 나을 병이었으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최소한 디아클렌 자작이 돌아간 후에 병을 가져갔어도 됐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지체하지 않고 에리스텔라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마치 한순간이라도 그녀가 아픈 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론 정말 그런 이유는 아닐 테지만.

자꾸 모습이 오락가락하니까 위험하다 싶어서겠지.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네 발로 가볍게 뛰었다. 몸은 가볍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전부 하인리시온 덕분이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하인리시온을 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현재 하인리시온의 몸 상태가 얼마나 최악일지는 방금까지 똑같이 아팠던 에리스텔라만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사고 안 치기로 했는데. 하지만 덕분에 몸도 괜찮아졌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이번은 예외로 하는 수밖에.

에리스텔라가 네 발을 쭉 뻗으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사고를 치기 위해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좋아. 얼른 하인리시온이 있는 곳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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